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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이화의 인
물한국사

방정환

소파, 方定煥

하얀 눈을 사랑한 어린이 운동가

요약 테이블
출생 1899년
사망 1931년

손병희의 사위가 되다

나이가 채 스물도 못 된 청년이 운니동의 천도교 예배당에 열심히 드나들고 있었다. 그 청년은 천도교 예배당 안에 있는 천도교 청년회에서 활동하며 그곳에서 어린이들을 지도했다.

천도교의 교주 손병희는 이 청년을 유심히 살폈고 그 청년의 성실한 모습과 열정을 남달리 알아주었다. 손병희는 그를 셋째 사윗감으로 골랐는데, 이 청년이 바로 열아홉 살의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 1899~1931)이다. 때는 신문화운동이 한창 일어나던 1917년이었다. 손병희는 100여 만이 넘는 교도를 거느린 천도교의 교주였을 뿐 아니라 서울의 명망가였다. 그의 사위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여간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방정환의 출신배경은 어떠했을까. 그는 서울 야주개(당주동)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때 야주개에는 중인 신분의 사람들이 주로 살았다.

그는 일곱 살에 부모의 허락도 없이 혼자 보성소학교에 다녔으나 너무도 가난하여 소학교를 마칠 수가 없었다. 그 뒤 서대문에 있는 왕고모집으로 옮겨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이어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선린상업학교도 2년 만에 중퇴하고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취직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열일곱. 토지조사국이라는 곳은 우리의 국유지를 총독부 소유로 이관하는 일을 하던 곳이었다. 그곳은 오랫동안 옛 국유지를 경작하던 농민들의 생활터전을 빼앗는 일을 담당하는 기관이라 농민들의 원한이 서린 곳이었다.

방정환은 먹고 살아가는 것으로만 따지면 좋은 자리였을 텐데 이를 박차고 나와 천도교 예배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린이운동에 전력하다

그는 손병희의 사위가 된 뒤 더욱 어린이운동에 열성을 보였고,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이런 일에 열중할 적인 1919년 3·1운동이 터졌다. 당시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普成社)에서 이 해 3월 1일자 〈조선독립신문〉을 비밀리에 간행하여 3·1운동 사실을 알리자, 경찰은 〈조선독립신문〉의 발행인인 윤익선을 체포하고 신문발행을 중지시켰다.

이때 청년 학생들은 비밀리에 재동에 있는 방정환의 골방에서 등사판으로 신문을 발행하여 돌렸는데, 3주일 만에 이 일도 발각이 났다. 경찰이 들이닥친다는 연락을 받은 방정환 등은 등사판 따위를 우물에 처넣고 시치미를 뗐다. 경찰은 그를 잡아다가 코에 물붓기 등 온갖 고문을 가했으나 끝내 자백을 않자 일주일 만에 풀어주었다.

3·1운동의 기세가 꺾일 무렵, 그는 짐을 싸들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동양대학 아동미술과에 입학했다. 그는 어린이 운동을 할 결심으로 아동미술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방정환은 2년 뒤 여름방학 때 고국에 돌아와 천도교 안에 정식으로 소년회를 조직했다. 그 소년회는 문예 · 체육 등의 활동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정서와 건강과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기 위해 조직한 것이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강연을 했다. 이때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냈고 어린이 동화집도 냈다.

1923년 3월 1일에는 월간 〈어린이〉라는 잡지를 창간했고, 동경에서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했으며, 이 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지정하여 기념식을 가졌다. 색동회에는 윤극영, 마해송, 윤석중 등이 가입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어린이 단체이다. 한편 첫 어린이날의 구호는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갑시다”였다.

방정환 동상

그는 어린이날 뿌린 전단의 첫 구절을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라는 말로 시작했다. 이는 어른들에게 한 말이었다. 위대한 정치가나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그는 ‘어린이 사랑’이라는 소중한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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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뚱뚱한 몸집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어찌나 이야기를 잘했던지, 어른들도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울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가 첫 번째 어린이날에 뿌린 전단의 첫 구절에서 어른에게는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라고 했고, 어린이에게는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라고 했다. 얼마나 부드럽고 설득력 있는 표현인가.

방정환이 어린이를 위해 글을 쓰고 강연할 적에 일본 경찰은 내용을 꼬투리 잡아 서대문경찰서에 가두는 따위의 탄압을 했으나 그는 결코 굽히지 않았다. 이렇게 정열적인 그는 하얀 눈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는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눈물을 흘리며 쏘다니기를 좋아했다. 그 눈을 소재로 한 동요를 남겼다.

겨울밤에 오는 눈은 어머님 소식
혼자 누운 들창에 바아삭 바삭
잘 자느냐 잘 크느냐 묻는 소리에
잠 못 자고 내다보면 눈물납니다
- 〈눈〉 방정환

순사를 울린 사람

그는 구연동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 듣는 이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고 슬픈 이야기를 하면 듣는 이들은 눈물을 옷깃에 적셨다. 그를 감시하던 순사가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끝내 눈물을 흘려 그에게 ‘순사를 울린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어린이 앞에서만 아니라 어디서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고, 감옥에 가서는 죄수들에게, 동네에서는 노인들에게, 병원에 들러서는 간호사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타고난 어린이 운동가였다.

그는 꽤나 멋쟁이였다. 늘 말쑥한 양복을 입고 다녔고 목에는 곧잘 보타이를 맸다. 너무 멋을 부린 탓으로 어떤 사람은 “사치를 일삼는다”는 꾸지람도 했다. 이도 그의 예술적 감각이 남다른 탓이 아닐까?

방정환은 서른세 살의 나이에 고혈압으로 입원했는데 죽던 날 저녁, “가야겠어. 문간에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어”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했다. 이 말은 꼭 동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그는 아마도 동화의 나라로 갔을 것이다.

그는 위대한 정치가나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어느 누구보다 ‘어린이 사랑’의 소중한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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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펼쳐보기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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