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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이화의 인
물한국사

최시형

崔時亨

민족종교인 동학을 열다

요약 테이블
출생 1827년
사망 1898년

최제우의 순도를 지켜보다

최보따리는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의 애칭이다. 그는 끝없이 잠행하면서 보따리를 자주 쌌는데 여기서 이런 별명이 붙여졌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해월선생’이라 부르기보다 어딘지 측은하게 느껴지는 이 별명을 애칭으로 불렀다.

1863년(철종 14) 겨울, 선전관 정구룡(鄭龜龍)은 포졸을 거느리고 경주 용담에 들이닥쳐 동학을 주장하는 최제우를 잡아갔다. 최제우는 왕명에 의해 천주를 외우고 민심을 현혹시키는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과천까지 왔다가 국상(철종의 죽음)을 만나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중죄인이므로 의금부의 처결을 받아야 했으나 국상 중에는 모든 중앙의 옥사가 중지된다. 이에 국상 기간을 넘기고 다시 조사하게 되면 《경국대전》에 규정된 결옥(決獄)의 기한을 지킬 수가 없어 하급기관으로 이첩한 것이다(《승정원일기》 고종 즉위년 12월 20일조, 정구룡의 〈장계〉).

최제우는 대구 감옥에서 경상감사 서헌순(徐憲淳) 등의 심문을 받았는데 이에 연루된 동학인은 25명이었다. 이 25명을 반드시 최제우의 열렬한 추종자들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최제우를 따라 주문을 외우고 동학을 전파했던 것은 말할 여지가 없다(《일성록》 고종 원년 2월 29일조, 서헌순의 〈장계〉).

체포된 인물 중에 최제우의 수제자인 최시형이 빠져 있었다. 최시형의 본명은 경상(慶翔)으로 최제우가 살고 있는 용담에서 25리 떨어진 경주 검곡에 살고 있었다. 최제우가 잡혀갈 때, 그는 외지에 있었다고 한다. 최제우가 대구 감영에 잡혀 있을 적에 그는 대구로 와서 여러모로 최제우의 옥바라지를 했다. 마침 현풍에 사는 곽덕원(郭德元)을 만나 그의 종으로 가장하고 최제우에게 접근했다.

그러니 최시형은 눈치껏 스승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루된 사람들의 입에서 마침내 최시형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에 그는 김춘발(金春發)과 함께 대구를 빠져나가 도망했다. 이것이 그의 긴 도피 여정의 첫걸음이었다. 최제우는 옥중에서 시를 남겼다.

최시형

그는 평리원 재판장 조병직에 의해 ‘좌도난정’이라는 죄목으로 교수형 선고를 받았고, 일흔두 살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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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밝힌 물 위는 한 점 혐의의 틈새도 없고
기둥은 삐쩍 마른 것 같지만 버틸 힘 남아 있도다

여기서 ‘혐의의 틈새’가 뜻하는 것은 ‘사람들이 서로 미워해서 생시는 틈’이다. 이 시 구절의 뜻은 자신에게는 어떤 혐의나 죄가 없다는 것이요 비록 나무기둥처럼 보이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는 신념을 나타낸 것이다. 최제우는 곽덕원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경상이 지금 성중에 있느냐? 오래지 않아 잡으려 할 것이다. 내가 ‘고비원주(高飛遠走, 빨리 서둘러 멀리 달아나라)’라고 말하더라고 전해라. 만약 잡히면 일이 매우 위험스럽게 된다.
- 《동학사상자료집1》 〈도원기서(道源記書)〉

이 기록은 최제우와 최시형의 ‘도통연원(道統淵源)’을 밝힌 것으로, 최시형이 살아 있을 당시인 1880년(고종 17)에 이루어진 것이니 신빙성이 있다. 몇몇 책들에서는 담뱃대 심지에 앞의 시와 ‘고비원주’를 써서 최시형에게 주었다는 약간 상반된 기록들이 전한다(《천도교교회사》 ; 《천도교창건사》 ; 오지영 《동학사》).

어쨌든 최제우는 대구 장대(지금의 달성공원 안)에서 처형당했고 머리는 남문 밖에 사흘 동안 조리돌렸다. 최제우의 제자들 중에 강원보 등 12명은 모진 매를 맞고 정배되었으며 나머지는 풀려났다. 또 최제우의 부인 박씨와 큰아들 최세정은 다행히 풀려났다. 그러고 나서 부인 박씨와 아들은 시신을 인도받아 용담으로 운구했다.

최제우의 시체를 염습하고 용담에 장사 지낼 적에 10여 명의 제자들이 따랐으나 최시형은 영양 용화동 등지를 잠행하면서 밥을 빌어먹었다. 이로부터 그의 끝없는 잠행이 시작되었다. 그는 그런 잠행 중에도 동학 포덕에 열중했다.

그동안 최시형에 대한 평가가 한쪽으로 치우친 감이 있다. 그의 줄기찬 동학 포덕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역사적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그를 신격화하는 데에 열중해 그를 역사 인물로 다루지 못한 것이다. 그에 대한 기록도 1차 사료가 아닌 후기의 사료에 치중해 있다. 여기서는 1차 사료를 중심으로 그의 행적을 더듬어보고 나름의 평가를 내리려고 한다.

최제우와의 만남

최시형, 곧 최경상은 최제우와 같은 경주 최씨요 같은 경주 땅에서 태어났다. 다만 두 사람이 촌수로 따져 어떻게 되는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최제우는 용담에서 태어났고 최경상은 황오리에서 태어났다. 이런 인연이 두 사람의 관계로 보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 되었다.

최경상의 아버지는 최종수(崔宗秀), 어머니는 월성 배씨였는데 어머니는 여섯 살 적에, 아버지는 열다섯 살 적에 죽었다(족보에 따름). 어려서 고아가 된 셈이다. 최경상은 어릴 적에 영일 기일동에서 자랐는데 크면서는 힘이 셌다고 한다. 열일곱 살에 그는 조지소(造紙所)에 심부름꾼으로 들어가 생계를 이어야 했다. 그의 형제와 자매에 대해서는 별로 기록이 없으나 누이동생 하나가 있었고 계모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자신 이외에 부양가족이 몇이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이때 그의 근실함을 보고 매파가 돈 많은 집 청상과부의 딸과 혼인하라고 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열아홉 살에 밀양 손씨를 맞아 장가를 들었는데 이 손씨가 첫째 부인이다. 이렇게 장가를 들어 10여 년을 지내면서 경주 신광면 마북동에 정착했다. 이때 마을 사람들이 그의 인품을 보고 집강(執綱, 면, 리의 행정사무를 보는 사람)으로 천거했다. 그리하여 6년 동안 이 일을 보면서 민은(民隱, 백성의 고통)을 없게 하고 숨은 미담가화를 찾아내 잘 기려주어 칭송이 자자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이런 공덕을 돌비에 새겨주기도 했다.

서른세 살 때에 경주 검악산 아래 검곡(劍谷, 현재 지명은 검곡동이라 함)에 정착했다. 최제우가 죽고 난 뒤 잠행을 시작했으니 검곡에서 5년 남짓 산 셈이 된다.

그가 최제우를 처음 만난 것은 1861년 여름으로 보인다(《도원기서》 ; 《천도교창건사》). 이때에 최제우는 새로운 교를 창도하고 포덕문을 지어 돌리며 천도 또는 동학이라고 명명했다. 최제우가 11월에 들어 남원 은적암으로 가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3월에 경주로 돌아오던 무렵이었다. 경주 일대의 집집에 동학 주문소리가 요란했다는 때이기도 하다. 그가 이 소문을 못 들었을 리 없다. 어쨌든 이 만남이야말로 조선후기의 역사에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도통을 전수받다

이듬해 3월, 최제우는 자신을 체포한다는 소문이 돌아 경주에 숨어 지내며 거처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최경상이 최제우를 찾아왔다. 최제우는 이에 놀라 말했다.

“그대는 소문을 듣고 왔는가?”
“소생이 어찌 알겠습니까? 저절로 오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리고 최경상은 그동안 근실히 공부했음을 말하고 기름 반 종지로 밤을 새워도 기름이 다 닳지 않았다며 이적이 있었던 일을 전했다. 이에 최제우는 조화의 큰 징험이라고 일러주었다(《도원기서》).

이 해 6월 진주를 비롯한 각지에서 삼남농민봉기가 벌떼처럼 일어났지만, 이들은 동학에만 전념한 것으로 보인다. 동학의 관계자료에는 이 봉기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최경상은 한 달에도 몇 차례씩 최제우를 찾아와서 도를 물었고 얼음물로 목욕을 하며 수도에 정진했다. 그리고 최제우의 거처를 자신의 집으로 정할 것을 간청했지만 좁다고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밀려오는 많은 교도들을 좁은 집에서 모두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최제우의 옷을 지어 바치기도 하고 최제우 가족의 생계를 위해 쌀과 돈을 마련해 보내기도 했다. 이때 최제우는 각지의 접주를 정했는데 최경상은 여기에 빠져 있었다.

1863년 정초에 최경상은 특별한 임무를 받았다. 그에게 영덕, 영해지방의 순회포덕을 맡긴 것이다. 이때 최경상은 영덕 출신 강수(姜洙)를 처음 만난 것으로 보인다. 곧이어 강수가 최제우를 찾아와 수도의 절차를 묻는 등 잦은 방문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의 만남 또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주의 초기 도인들은 압제의 시기에 모두 흩어져버렸지만 이 두 사람은 농민전쟁기까지 철저하게 함께 행동했다.

이 해 6월에 통문을 내어 경주에서 접소를 열었는데 각지에서 50여 명이 모여들었다. 접소를 파할 즈음에 최제우는 시 한 구를 지어 돌렸다.

용담의 물이 흘러 사해의 근원이 되고
구악에 봄이 도니 한 세상의 꽃이로다

이 해 8월, “용담의 물이 흘러 사해의 근원이 되고 검악에 사람이 있어 하나의 마음이라”고 고쳤다. 이는 최경상을 지적한 것이다.

용담의 물은 최제우의 창업을 뜻하고 구악의 봄은 최경상의 수성(守成)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최경상을 북도의 주인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호를 내려주었다(《천도교교회사》).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이른바 첫 공을 이룬 사람은 갈 것이다. 이 운(후천개벽의 운을 뜻하는 듯하다)은 반드시 그대에게서 나올 것이다. 이 뒤로 도의 일을 신중히 간섭하여 나의 가르침을 어기지 말라.
- 《도원기서》

이것은 바로 도통의 전수를 뜻한다. 이후로 최제우는 경주 남쪽의 포덕에 전념하면서 그 북쪽은 최경상에게 맡겼다. 여기에서 북접의 용어 사용이 시작되었다. 그 뒤 최경상은 ‘주인’, 최제우는 ‘대주인’으로 불렸다. 손병희가 천도교를 창건한 뒤, 최제우를 ‘대신사(大神師)’, 최시형을 ‘신사(神師)’라고 부르기 전까지는 이것이 공식호칭이었다.

이 해 8월에 최제우는 다시 ‘수심정기(守心正氣)’ 4자를 써주어 그에게 도통 전수를 더욱 확실하게 표명했다. 이 뒤 최경상은 동학의 주문과 가사와 시, 포덕문 등을 늘 암송하며 더욱 수도에 정진했다.

최경상은 대구에서 빠져나와 밤에는 걷고 낮에는 숨으면서 안동까지 와서 교도의 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포졸이 밀어닥쳐 수색하는 통에 곧바로 영덕 직천으로 가서 강수의 집에 숨어 하룻밤을 지냈다. 이어 그는 영해를 거쳐 평해에 이르러서 황주일(黃周一)의 주선으로 거처를 정하고 처자까지 데리고 와서 살면서 짚신 삼기를 생업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그는 평생 동안 짚신 삼는 일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얼마 동안을 지낸 뒤 울진 죽변을 거쳐 영양 일월산 아래 용화동 죽현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평생 동안 산 바깥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1865년 7월에 들어 최제우의 부인 박씨가 수소문 끝에 이곳을 찾아왔다. 그때 도인들은 각기 흩어져 있으면서 서로 왕래가 없었으며 또 서로 아는 사이라 해도 원수 대하듯 했다. 동학으로는 가장 침체기에 속할 것이다.

최제우의 부인(이하 사모씨로 호칭)은 의탁할 곳이 없어 자식들을 데리고 최경상을 찾아온 것이다. 최경상은 자기가 살던 집을 사모씨에게 내주고 다른 거처를 마련하여 옮겼다. 그는 열심히 농사를 짓고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그의 근면성이 여실히 나타난 때였으리라. 그는 나무를 심는 일 또한 평생 동안 어느 곳에서든 계속했다.

1865년 가을에는 동학의 탄압이 뜸해졌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조직을 재건하고 교도들이 모이기 좋은 검곡에서 순도기념제례를 모시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이보다 먼저 스승의 탄신제를 올리기로 해, 이해 11월 28일 검곡에는 수십 명의 교도들이 모여들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동학이 실천해야 할 이념 또는 현실인식을 밝히는 중요한 강론을 펼쳤다. 그 요지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인시천(人是天)이다. 사람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나니 사람이 인위로써 귀천을 나눔은 한울님 뜻에 어긋나는 것이리라.

둘째, 우리 도인들은 일체 귀천의 차별을 철폐토록 해야 한다.

셋째, 스승님의 본뜻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한울이라”는 데에 있으니 제자들은 이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 표영삼 《동학 1 : 수운의 삶과 생각》 〈동학재건에 전력〉 참고

이에 대해 표영삼은 “사람은 누구나 몸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누구를 막론하고 한울님과 같이 존엄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존엄성과 한울님의 존엄성은 똑같으므로 사람의 존엄성=한울님의 존엄성이란 등식에 따라 인내천이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월은 이를 일상생활에 적용시켜 양반, 상놈이라는 신분제는 수운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라 하였다”고 풀이했다.(《동학 1 : 수운의 삶과 생각》)

1866년 3월 10일 최제우 순도 2년이 되는 날, 용화동 위쪽 대치에 있는 사모씨 집에서 마침내 제례를 올렸다. 이 두 의식의 거행은 동학 재건의 지름길이 되었다. 최경상은 이 자리에서 끊임없는 강론을 통해 동학사상을 알렸다.

한편 1866년 8월, 병인양요로 나라가 시끄러웠고 이에 따라 동학에 대한 단속이 뜸해졌다. 이에 강수 등 일부 교도들이 최경상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강수는 마침내 최경상의 거처를 찾아내어 박춘서(朴春瑞)와 함께 일월산으로 왔다.

이 해 10월 28일은 최제우의 생신날이었다. 교도들이 모여 생신제사를 지내고 봄 · 가을로 교주의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수계안(修契案)을 돌렸다. 그리하여 여기에 수십 명이 참가했다. 이 수계안이 바로 동학재건의 실마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최경상은 이보다 앞서 《동경대전(東經大典)》,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입으로 불러 베껴놓기도 했는데 이때부터 이를 활용했다. 그리고 거처를 옮겨가며 예천에 도량을 두어 분접(分接)을 만들기도 하고 흥해에 도량을 개설하기도 하면서 포덕에 열중했다(《천도교교회사》).

이필제 주도의 영해부 기습에 참가

1870년(고종 7)에 들어 그는 강원도 양양에 있었다. 이 해 10월에 영해 도인 이인언(李仁彦)과 박춘서가 찾아와 도인 이필제가 지리산에 들어가 있었던 탓으로 교조의 죽음을 모르고 있다가 이제야 산에서 나와 교조의 죽음을 신원(伸寃)하려 한다고 했다. 그리고 최경상에게 그를 찾아가 만나볼 것을 권유했다. 최경상은 다섯 차례에 걸친 권유를 받은 끝에, 1871년 2월 박사헌(朴士憲)과 함께 영해로 이필제를 만나러 갔다. 이필제는 최경상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노형, 나는 한 번 선생의 수치를 씻고 한 번 창생의 재앙을 구하고 이어 중국을 차지할 뜻이 있소.······ 3월 10일이 선생께서 돌아가신 날이니 그날에 거사하겠소. 다시 다른 말 없이 이를 따르시오.

이러한 위압적인 이필제의 언사에 최경상은 마지못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필제는 서울에서 왔다는 김낙균과 수작을 나누며 현직에 있는 금장(禁將, 금위영의 장수)의 것이라는 편지를 꺼내들고 현역의 군인들이 돕는다고 이들을 꼬였다(관변 기록과는 달리 《도원기서》, 《천도교교회사》, 《천도교창건사》 등에는 이필제가 최경상을 찾아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말투 역시 최경상이 이필제를 아랫사람 대하듯 한 것으로 기술했다).

이에 교도 등 5백여 명을 모아 천제를 지내고 밤을 틈타 영해부로 쳐들어갔다. 봉기꾼들은 영해부 관아를 점령하고 하룻밤 호기를 부리고는 이튿날 영양 일월산으로 퇴각했다[《동래부계록(東萊府啓錄)》 권7 신미년 3월 15일조].

일월산에 진을 친 이들은 관군의 수색이 심하자 뿔뿔이 흩어졌다. 이런 속에서 최경상 일행은 사모씨와 그 아들 세정, 세청과 함께 관군을 피해 달아났고 세청의 아내만 빠졌다. 이들은 갈 곳이 없었다. 이때 이필제가 말했다.

정기현은 나와 친하오. 또 동모(同謀)한 사람이오. 곧 이 사람의 집을 찾아 자취를 숨깁시다.
- 《도원기서》

이를 보면 이들 일행에 이필제가 끼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최경상은 그를 뒷바라지하던 전동규(全東奎), 박사헌, 이사인(李士仁) 등 1백여 명을 잃었다. 그뿐이 아니라 조정에서는 영해부습격에 동학도가 관련되었다 하여 동학도에 대한 일대 수색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이른바 동학에서 큰 수난사로 기록되는 신미사변이 일어난다. 동학관계 기록에서는 이 영해민란에 최경상이 참여했다고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참여했음을 알리는 간접적 표현들이 있다.

어쨌든 이들은 단양 가산리에 있는 정기현을 찾아갔다. 이때 정기현과 이필제는 밤새 수작을 했다고 하며, 이튿날 이필제는 김창화(金昌和)의 집, 최경상은 정석현의 집, 강수와 전성문은 영춘에 있는 김용권(金用權)의 집에 각기 흩어져 거처를 정했다[《포도청등록》 25책 신미년 8월 29일의 죄인 공초에 이 관계사실이 나온다. 여기에 이필제의 동행으로 영남인 권성거(權性巨)라는 이름이 나온다. 권성거는 처음 그와 동행했다가 뒤에 조령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 그들이 분산하여 숙소를 정했다는 점, 정기현의 동생으로 석현(石鉉, 《도원기서》 등에서는 錫鉉으로 표기되어 있다)이 있다는 점 등으로 보아 최경상의 가명으로 보인다].

이 해 4월 최경상은 성명을 바꾸고 일꾼이 되어 밭을 일구고 나무를 하고 고기를 잡고 새끼를 꼬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5월에 강수의 권유로, 좀 더 숨기에 좋은 영월 정진일(鄭進一)의 집으로 피했다. 이때 이들은 이필제의 새재 모의에 가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필제를 심히 원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8월에 이필제가 모의한 문경새재의 작변이 발각되어 이필제와 정기현 등이 잡히고 또다시 동학교도에 대한 수색이 크게 벌어졌다. 이때 이들은 “구초(口招, 신문을 받는 것)의 단서가 있을까 두려워 자취를 숨기는 계책으로 미리 피하는 게 좋겠다” (《도원기서》)고 생각해 행장을 꾸리고 길을 떠났다.

최경상과 강수는 소미원 사모씨의 집을 찾아갔다. 이들은 약을 캐는 사람으로 변장하고 있었다. 사모씨는 이들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받고 놀라 물었다. “그대들의 행색이 어찌 이런가?” 이에 강수가 대답했다.

“우리는 아무 일도 범한 적이 없소. 그런데 문경의 변은 진실로 이필제가 일으킨 것이오. 혹 구초의 단서가 잡힐까 몸을 피해 이리 온 것이오.”

이에 세정 · 세청 형제는 초행(礁行, 최제우의 딸의 혼사를 가리킴)이 있어 집을 비우게 되므로 잠시도 자기 집에 머물 수 없다고 거절했다. 이들은 하인으로 꾸며 따라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이것도 거절을 당했다. 이처럼 푸대접을 받은 최경상은 이렇게 한탄했다.

나의 신세는 갈 데도 올 데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구나. 물러가 산에 숨는 것이 좋겠다.
- 《도원기서》

그의 마음은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들은 사모씨에게 작별을 고하고 정처없는 길을 떠났다. 태백산을 향해 걸으면서 솔잎을 먹고 바위틈에서 잠을 잤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까지 배반을 당하고 다시 쫓기는 몸으로 보름씩 굶으며 산속을 헤매게 된 것이다. 이들은 영월 직곡리의 어느 교도의 집에 정착했다.

1872년(고종 9)에 들어 최경상과 강수는 사모씨의 안부를 알기 위해 소미원으로 찾아갔다. 그때 이들은 최세정이 양양 관가에 잡혀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사모씨는 그들이 사는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들은 거처를 숨기기 위해 인제, 홍천, 영춘 등지로 전전했다. 3월에는 최제우의 셋째 딸과 최세정의 처까지 인제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5월에는 최세정이 감옥에서 장사(杖死)를 당했다. 불행의 연속이었다.

교단을 재건하다

이런 속에서도 최경상은 태백산 적조암에 들어가 49제를 지냈다. 꺼져가는 동학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몸부림이었다. 이때 그는 ‘태백산공사십구(太白山工四十九)’라는 구절을 하늘로부터 얻어 새로운 동학의 전도를 밝혔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태백산공’이다.

이때 사모씨가 갑자기 병사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74년 3월에 최경상은 첫 부인 손씨의 행방이 묘연하여 안동 김씨의 딸을 얻어 장가 들었다. 그리고 동학교도에 대한 수색이 뜸해지는 틈을 타 단양 사동으로 옮겼다. 그런데 1875년 정초에는 최세청마저 병을 얻어 갑자기 죽었다. 이로써 최제우의 아들은 모두 죽고 딸만 남게 되었다.

최경상으로서는 슬픔을 억제할 수 없었지만 스승의 가족을 돌볼 부담은 줄어든 셈이다(딸 셋은 출가했다). 그동안 세정과 세청이 그에게 온갖 푸대접을 해도 그는 노여워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사모씨까지도 “천주가 무슨 물건이냐”고 대들어도 이를 참고 견뎌냈다. 그는 스승의 가족에 대해서도 인간적 정의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던 것이다(《천도교교회사》).

1875년 9월에 들어 최경상과 강수 등은 경주 용담에 갔다왔고, 10월에는 단양의 사동에서 또 하나의 뜻있는 일을 벌였다. 최세청이 죽고 난 뒤 스승의 생신제와 기제 등을 최경상이 맡아 지내기로 한 것이다. 이때 강원도와 충청도 일대의 교도를 모아 제사를 거행하면서 자신을 주인, 강수를 차주인(次主人)으로 반포하고 열두 사람의 이름과 자(字)를 시(時)자와 활(活)자로 개작하게 했는데, 우선 세 사람에게 이를 시행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이름은 시형(時亨,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기술한다), 강수의 이름은 시원(時元), 전성문의 이름은 시명(時明)으로 정했다.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두 사람에게 이런 이름을 준 것은 의미가 크겠거니와, 교단의 조직을 정비하고 체계를 세우려는 고심에서 나왔을 것이다(《도원기서》). 이후에 그는 적절하게 이 ‘시’자를 붙인 이름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지어주었다.

이제 그는 최경상에서 최시형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최제우가 복술(福述)이라는 이름을 제우로 바꾼 뜻과 상통하지 않겠는가? 최시형은 병자수호조약 등 조정에서 개항을 단행하면서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다시 포덕에 더욱 열중했다. 특히 강원도를 중심으로 해서 벌인 그의 활동은 가히 동학의 부흥운동이라 부를 만했다.

1878년 겨울에 들어 그는 동학교단사에서 빛나는 일을 벌였다. 그는 북접(北接)을 표명하고, 최제우가 북방에 운이 올 것을 말한 대목을 빌려 북접 대도주를 정식으로 표명했다. 그리고 최제우의 모든 글을 간행하기 위해 인제에 도적편집소(道蹟編輯所)를 두고 일을 서둘렀다. 이어 동경대전간행소를 두고 자금을 염출하고 판각을 하여 역사(役事)를 마쳤다. 또 단양에서 가사를 찍어 나누어주고 옥천에서 《동경대전》 1천 부를 찍어 교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 일은 5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이 일에는 한문에 상당히 조예가 깊은 강시원의 조력이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최제우와 최시형의 사적 및 간행의 경위를 밝힌 《도원기서》도 강시원 등의 손으로 완성되었다. 《도원기서》는 유려한 문장으로 과장없이 기술하여 동학연구에 비중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런데도 현재의 천도교단에서는 이를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최시형이 활발하게 활동을 벌이자 서로 헤어져 소식을 모르던 손씨 부인이 수소문 끝에 찾아왔다. 그리하여 그는 어쩔 수 없이 편법으로 손씨와 김씨를 좌우 부인으로 삼았다. 최시형은 제자들에게 첩을 두지 말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1883년(고종 20)에 들어 동학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 인물들이 최시형을 찾아왔다. 곧 그들은 손병희(孫秉熙), 손천민(孫天民), 박인호(朴寅浩), 황하일(黃河一), 서인주(徐仁周) 그리고 윤상오(尹相五) 등이었다. 최시형은 이때 이런 설법을 했다.

오도(吾道)의 운이 장차 흥륭하리라.

이때는 기독교가 정부로부터 공인을 받은 직후였다. 그는 이어 교도들에게 9조의 포유문(布諭文)을 반포하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이때부터 그의 포유 · 유시 · 통유 등의 글이 반포되기 시작했다. 그 글에는 끊임없이 양반, 상놈의 타파는 물론 적서의 차별, 여성의 존대, 어린이의 보살핌 등 신분제 차별의 철폐와 인권 유린의 관례를 깨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렇게 교세가 퍼지자 그를 체포하려는 손길이 다시 뻗쳤다. 그는 익산 사자암으로 몸을 피해 4개월을 지냈다. 이때가 전라도 땅에 처음 발을 들인 때이다. 이어 그는 어느 교도가 주선한 상주 전성촌(前城村)으로 거처를 옮겼다. 비록 초가삼간이나마 그가 도피를 시작한 뒤 자신의 집을 처음 갖게 된 때가 아닐까?

이 해 10월에 최시형은 손병희, 박인호와 함께 가섭사에 가서 기도를 거행하고 이어 주문을 고치게 했다.

그때 사람이 ‘천주’ 두 글자를 지목함을 피하여 강서(降書, 하늘이 내려 준 글)로 주문을 개작하사 일시 임시로 행하시니 주문은 ‘봉천상제일편심(奉天上帝一片心) 조화정만사지(造化定萬事知)’러라.
- 《천도교교회사》

‘천주’라는 단어 때문에 늘 사교로 지목을 받기 때문에 유가에서 쓰는 ‘상제’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교단조직을 6임(六任)으로 정비하여 교장(敎長), 교수(敎授), 도집(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을 두었다. 이들 조직은 시기에 따라 명칭이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으나 그 골격은 천도교가 창시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리고 1885년 5월에는 유명한 보은 장내(帳內, 마을 사람들은 장안으로 부름)로 접소를 옮겼다. 그 뒤 때때로 최시형이 관의 눈을 피해 옮겨 다니기는 했지만 장내리는 동학의 본거지가 되었다.

1887년은 그의 회갑이 되는 해였다. 이때는 생활도 폈을 무렵인데, 그의 둘째 부인 김씨가 죽었다. 그는 회갑연을 치른 뒤 ‘북접법헌(北接法軒)’이라는 첩지를 만들고 ‘해월장(海月章)’이라는 도장을 찍어 6임에 나눠주었다. 이것은 곧 동학의 정통을 의미했지만 뒤에 남접과의 분란이 있을 적에 하나의 계파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혁명의 기운이 고조되다

1888년 1월에 들어 그는 다시 뜻깊은 걸음을 걸었다. 전주로 가서 기도식을 거행하고 삼례로 와서 이몽노(李夢老)의 집에 머문 것이다(《천도교교회사》). 이때 그 유명한 마당 포덕을 행한 것으로 보인다. 마당포덕은 입도할 사람들이 몰려들어 정식 입도식을 거행치 못하고 마당에 모아놓고 한꺼번에 청수를 받들어 입도식을 거행하는 의식이다. 이때부터 동학이 전라도 지방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해 3월에는 손병희의 누이동생을 맞아 세 번째 부인으로 삼았다. 이 일은 손병희와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많은 교도들 특히 여성 교도들이 몰려들자, 1890년 11월 금릉군 구성면 용호동(지금 김천시)에 있는 교도의 집에서 강론을 하면서 〈내칙(內則)〉과 〈내수도문(內修道文)〉을 지어 돌렸다. 여성의 수도 방법과 지켜야 할 생활 태도를 이른 것이다.

그가 공주로 와서 접소를 열고 나서 청주에 있을 적인 1891년 2월, 호남의 남계천(南啓天), 김낙철(金洛喆), 김낙삼(金洛三), 손화중(孫華仲) 등의 방문이 있었다. 이때 남계천을 전라좌도 두령, 윤상오를 전라우도 두령으로 삼았는데, 김낙삼이 1백여 명의 교도를 데리고 와서 천한 신분인 남계천을 따르지 못하겠다고 항의했다. 이에 최시형은 문벌의 귀천과 노소의 등분은 우리 도에 없는 일이라고 타일렀다(《천도교교회사》). 이로써 동학교도는 신분 차별이 없음을 확실하게 천명한 것이다.

이때 그는 부안, 고부, 태인 등지를 다니며 전라도 포덕에 열중했다. 특히 정읍 지금실에 가서 김기범(金箕範, 김개남의 본 이름)의 집에 머물렀고, 원평의 김덕명(金德明)도 만났다. 전라도 일대에 동학교도가 날로 늘어가고 있었다. 당시 최시형은 이렇게 개탄했다고 한다.

이때에 호남도인이 사문에 날로 늘어 찾아오되 도를 아는 자 없거늘 신사 개연히 탄식하사 가로되 “도를 아는 자 드물다” 하시고 남계천 등에게 이르사 너희들은 실심수도(實心修道)하여 천부의 성품을 통케하라.
- 《도원기서》

여기에서 “도를 아는 자 드물다”는 말은 어떤 시사를 준다. 동학에 무지하다는 말이 아니다. 호남의 도인들이 동학보다 동학을 통해 딴 생각을 품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런 개탄은 바로 뒤에 일어날 남접, 북접의 갈등을 암시한 것이다.

1890년대에 들어 북쪽의 황해도 등 전국에 걸쳐 동학이 퍼졌지만 교도의 숫자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때는 교도 성분이 문제가 되었다. 단순히 후천개벽이 도래하여 미래에 잘 사는 사회만을 바라는 순수 동학교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의 체제를 부정하고 폭력적 방법으로라도 현실과 대결하겠다는 세력들이 끼어들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이들의 성분에 대해 어윤중은 상당히 정확하게 지적하여 이들을 일러 ‘위동학당(僞東學黨)’이라 불렀다[어윤중 〈선무사재차장계(宣撫使再次狀啓)〉]. 특히 보은집회 이후에 나타난 남접이 그러했다.

이들은 관권의 탄압에도 예전처럼 도망만 가지는 않았다. 정면대결을 시도하여 무기를 입수하고 계획을 꾸미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는 도주 최시형으로서도 제대로 제재할 수 없었다. 더욱이 천주교와 개신교가 정부의 공인을 받고 때로 정부의 비호까지 받는 현실에서 동학에만 가해지는 탄압을 이들은 참을 수가 없었다. 1892년에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은 동학의 금령을 내리고 교도들을 색출하면서 재산을 토색질했다. 이에 최시형은 진천 등지로 잠행하며 통유문을 내렸는데 이런 항목을 두었다.

우리 도는 후천개벽의 운으로 무극한 대도(大道)라 대개 그 종통진원(宗統眞源)이 영영소소(靈靈昭昭)하니 어찌 감히 일호문란이리오. 근간 각지 도유(道儒)가 망령되이 존대(尊大)하여 혹 이 포(包) 연원이 저 포 연원에 옮겨들며 저 포 연원이 이 포 연원에 옮겨들며 혹 그 수령을 기롱하며 그 종맥을 손상하는 자 있다 하니 이것을 어찌 참으리오······.
- 《천도교교회사》

이 훈시는 당시 동학교단 사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 해 7월에 서인주와 서병학(徐丙鶴)이 교조의 신원을 위해 상소운동을 벌일 것을 최시형에 간청했다. 그러나 최시형은 이를 적극 만류하고 나섰다. 이에 이들은 이 해 10월에 자의로 도인을 공주에 모아놓고 감사 조병식에게 강경한 항의문을 보냈다.

이들이 계속해서 교주에게 압력을 넣자 최시형은 마지못해 삼례집회를 허락했다. 그리하여 서인주 등이 주동이 된 삼례집회에서 전라감사 이경직(李耕稙)에게 동학을 탄압하지 말라는 항의의 글을 보냈다. 당시 도인들의 분위기는 봉기를 서두를 태세였다. 이때 최시형은 공주에서 삼례로 오다가 낙상해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고 발의문만 보냈다. 발의문에서 “복합상소의 건은 의논중이니 하회를 기다리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서인주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들은 이 모임에서 복합상소를 계속 추진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이 해 12월에 보은 장내리와 청주 청산리 등지에 도소(都所)를 정하고 복합상소를 추진했다.

이 결과 1893년 2월 북접계통의 서병학, 박광호 등 많은 교도가 서울로 올라와 상소문을 들고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복합 시위를 벌였고 고종은 “좋은 조치가 있을 것이니 가서 기다리라”는 비교적 부드러운 조치를 취했다. 이때 서병학 등은 대병(隊兵, 구식 군대를 뜻하는 듯)과 합동하여 정부를 타도하자고 주장했지만 최시형의 지시를 잘 따르는 김연국, 손병희 등에 의해 좌절되었다(《천도교교회사》).

이 해 3월 11일에는 보은 장내리에 교조신원을 위해 전국의 교도 수만 명이 집결했다. 이것은 북접이 주도한 보은집회이다. 이때에도 온건파와 강경파가 나누어져 그들의 행동을 놓고 논란을 벌였지만 어윤중이 왕명으로 해산할 것을 종용하자, 은유에 감읍해서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해산했다 한다(《시천교역사》).

이때 전봉준이 주도한 남접세력 수만 명은 금구의 원평집회를 갖고 보은집회에 사람을 보내 동정을 엿보다가 보은집회가 해산되자, 이들도 일단 행동을 멈추고 해산했다. 그리고 곳곳에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면서 불온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최시형은 다시 인동, 금산(지금의 김천), 상주, 청산 등지로 잠행했는데, 이 무렵에도 서병학 등이 신원의 일을 다시 말하자 이를 만류하며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동학농민전쟁과 남북접의 갈등

1894년 3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이 고부에 이어 무장에서 봉기하고, 이어 각지에 격문을 보내고 나서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일어났다. ‘보국안민’은 바로 정치적 구호였다. 이에 최시형은 통유문을 교도들에게 보냈다.

근래 들으니 교도가 본분에 안도하지 못하고 생업에 힘쓰지 아니 하고 당여(黨與)를 각각 세워서 서로 성원함에 예전 원수를 눈을 흘기며 갚으려 함에 이르러 위로 군부(君父)의 연연한 근심을 끼치고 아래로 생령이 도탄에 빠지는 근심을 불러오니 말이 이에 미치매 어찌 한심치 않으리오. 이와 같이 포유한 후에 잘 깨달아서 숨어 지내며, 도를 지키지 아니 하고 한결같이 미망에 잡혀 같은 악으로 서로 연결하면 하늘을 거스르고 스승을 배반함이라. 결단코 북을 울려 교에서 쫓아낼지니 이것을 모두 잘 알아서 한결같이 따라 어기지 말라.
- 《천도교교회사》

이는 남접의 봉기를 초기에 막으려 한 것이다. 이어 전봉준이 장성에서 중앙에서 보낸 관군을 격파하자, 최시형은 전봉준에게 경고문을 보냈다.

아비의 원수를 갚고자 할진대 마땅히 효도할 것이오. 백성의 곤궁을 구코자 할진대 마땅히 인(仁)할지라.······ 더구나 경(經, 《동경대전》을 뜻함)에 이르되, “현기(玄機)를 드러내지 말고 마음을 급하게 먹지 말라”라고 했나니 이는 선사의 유훈이시라. 운이 아직 열리지 않고 시대 또한 이르지 아니 했나니 망동치 말고 진리를 더욱 궁구하여 천명을 어기지 말라.
- 《천도교교회사》

“아비의 원수를 갚고자······”의 구절은 전봉준을 지적한 말이다. 최시형은 계속 교도들에게 망동하지 말 것을 일렀다. 이에 호남에서도 북접의 지시를 따르는 교도들은 전봉준의 봉기에 가담하지 않았고 오히려 호남의 북접계통과 남접, 북접의 남접계통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는 일까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전봉준, 김개남이 집강소를 설치하고 고리채의 정리, 신분의 타파, 부정한 수령의 처단 등의 일을 벌일 적에 이런 분쟁은 더욱 잦았다(남북접의 생성 원인과 분쟁은 오지영의 《동학사》 〈남북접쟁단〉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최시형은 공식 문서를 여섯 차례나 내려서 남접의 봉기와 교도의 동요를 나무랐다. 더욱이 남접을 치라는 뜻으로 ‘벌남기(伐南旗, 남쪽을 치는 깃발)’를 내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남접과 북접을 한 무리로 보고 단속했으며, 북접계통에서도 최시형의 경고를 무시하고 각지에서 봉기를 일삼았고, 북접 내의 서인주, 황하일 등도 행동에 나설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남접에서 2차봉기를 단행하며 북접의 호응을 여러 차례 요구해오자, 최시형은 이에 손병희에게 대통령기(大統領旗, 큰 통령을 상징하는 깃발)와 벌남기를 주어 공주와 이인에서 전봉준과 회동하게 했다. 손병희는 논산에서 전봉준을 만나 ‘벌남기’를 찢고 ‘척왜양창의기(斥倭洋倡義旗)’를 내걸고 연합전선을 폈다.

이때 최시형은 전라도 일대에서 잠행하고 있었다. 그는 장수, 남원, 임실 등지를 다녔는데 공주, 원평, 태인 등지에서 패전한 뒤 남하한 손병희와 임실 조항리에서 만났다. 이들은 다시 북상하여 금산, 무주를 거쳐 영동에 닿았다. 영동 용산장터에서 격전을 치른 뒤 이들은 관군에 쫓겨 보은 종곡리에 와서 다시 격전을 치렀다. 그런 뒤 다시 관군과 일군에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런데 최시형은 이 무렵 충주 주둔 일본 병참소에 두 차례 글을 보냈다. 그 글의 일부 내용은 이러했다.

······비도의 뜻을 품은 서장옥(徐璋玉, 앞에 나온 서인주를 말함)과 전봉준의 무리가 사문을 거짓 핑계대어 망령되이 척화라 일컫고 무지한 교도들을 선동하여 깃발을 내걸고 죽창을 든 행동이 아주 모질었습니다. 또 우리 북접을 끼고 때를 타서 함께 봉기하려 했으나 우리 북접은 각별히 스승의 훈계를 따라 굳게 따르지 아니 했습니다. 아, 저 남접이 무리를 모아 세력을 믿으며 사람을 죽인 것이 아주 많았습니다. 저희 북접은 죄를 짓지 아니 했다고 생각합니다. 장차 무리를 들어(남접을 가리킴) 성토하려고 합니다.
- 《시천교역사》 (시천교는 친일경향을 보인 동학의 한 갈래인데, 일본군에 보낸 이 두 건의 서신은 여기서만 언급되고 있다.)

두 번째 보낸 글의 한 대목은 이러하다.

······근래 한 지역이 겉으로 우리 교를 핑계대고 속으로 역적의 마음을 품고서 남접이라 자칭하고 도중(徒衆)을 규합하여 함부로 침폭했습니다. 그리하여 위로는 임금에게 근심을 끼치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화를 부채질했으니 지극히 통탄스럽습니다. 또 저네 서장옥, 허운초(許雲樵) 등은 우리 북접이 결단코 움직이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교인들을 셀 수도 없이 살해했습니다. 이와 같은 짓이 충군 · 우국하는 충성이겠습니까? 지금 우리 북접은 차마 앉아서 그 곤궁함을 당할 수가 없어서 부득이 거의성토(擧義聲討)하려고 합니다. 대중이 모이는 날 저희들은 마땅히 이해로 깨우쳐 귀순케 하겠습니다.
- 《시천교역사》

모든 봉기의 책임을 남접에 돌리고 또 자기들 손으로 남접에게 제재를 가하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들이 쫓기면서 남은 교도를 보호하겠다는 취지에서 나왔는지 아니면 그들의 타협적 성격 때문인지, 또는 앞으로 동학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에서 나왔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한 대목에 서서 이 일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최시형은 이 농민전쟁 중에, 임신한 아내가 감옥에서 다리가 부러지며 유산을 겪었고 열일곱 살 된 딸과 외손녀는 관에 잡혀서 청산의 통인(通引)에게 강제로 시집가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또 많은 측근의 교도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30년 동안 동고동락하던 강시원을 잃기도 했다.

도통을 전수하다

최시형 일행은 다시 기약 없는 잠행길에 나섰다. 이들은 강원도로 달아나서 인제, 홍천을 헤매다니며 숨었다. 이렇게 1년을 보낸 뒤 1895년 말, 이들은 치악산 아래 수례촌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최시형은 태백산을 헤맬 적보다는 어려움이 적었던 것 같다. 이때는 강원도에도 많은 교도들이 있어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치악산 아래로 온 것은 그의 생애의 종장을 의미했다.

이때 그는 몸도 늙고 마음도 약해져 있었다. 현실에 대한 좌절과 스승에 대한 연모가 뒤엉켜 그를 방황하게 했으리라. 그런 탓인지 1896년 1월 그는 손천민에게 송암(松菴), 김연국에게 구암(龜庵), 손병희에게 의암(義菴)이라는 도호(道號)를 내리고 이 세 사람으로 하여금 합의체로 모든 일을 처리하게 했다. 이를테면 그는 2선으로 물러앉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북접법헌(北接法軒)’을 ‘용담연원(龍漂淵源)’으로 고쳐 특정지역을 지칭하는 모습을 탈피했다. 아마 이때는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까지 동학이 퍼져 있어 충청도와 강원도 등 특정지역의 이미지를 풍기는 ‘북접’이라는 호칭을 불식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해 12월에 손병희를 대도주(大道主)로 삼아 도통을 전수했다(《시천교역사》에는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것은 김연국을 도통전수자로 보려는 경향을 나타낸 것이다).

1898년에 최시형은 홍천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이때도 동학교도에 대한 일대 수색령이 내려져 있었다. 그리하여 열렬한 동학인이요 농민전쟁 때 큰 활약을 보인 이상옥(李祥玉, 뒤에 용구로 개명)이 충주에서 잡혔고 또 교도 권성우(權聖佑)가 이원에서 잡혔다. 권성우는 매에 못 이겨 최시형의 거처를 일러주었다. 그리하여 군사가 홍천 그의 거처로 들이닥칠 적에 그는 이질을 앓아 자리에 누워 있었다. 군사들은 그의 집에 들어왔으나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어 이웃집을 수색하자 김낙철이 스스로 최시형임을 자칭하여 잡혀갔다.

체포를 모면한 최시형은 들것에 실려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3월에 그는 치악산이 바라보이는 원주 서면 송동으로 거처를 정했다. 이때는 그의 아내와 어린 아들도 함께 와 지냈다. 이렇게 병을 다스리며 지낸 지 한 달도 못 되어 다시 그의 거처로 군사들이 들이닥쳤다. 교도인 송경인(宋敬仁)이 상금과 공을 탐내 그를 밀고한 것이다. 그렇게 은신술에 뛰어났던 그도 제자의 배반으로 잡힌 몸이 되었으니, 천운이 다한 것인가?

교도 몇 명이 잡혀가는 그의 뒤를 따르며 울음을 삼키자, 군사들은 그들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찼다. 이에 그는 군사들을 꾸짖었다.

죄 없는 사람을 때리면 도리어 그 죄를 받게 된다. 너희들은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쇠약한 노인으로서는 마지막 풍모를 보인 것이다. 그는 평리원 재판장 조병직에 의해 ‘좌도난정’이라는 죄목으로 교수형의 선고를 받았다. 그리하여 6월 2일, 일흔두 살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 아픈 몸으로도 동학의 주문을 잠시도 쉬지 않고 외웠다고 전해진다. 그의 시신은 문도들에 의해 경기도 광주 땅에 묻혔다가 뒤에 여주 천덕산 기슭으로 옮겨졌다(《시천교역사》).

일제의 관헌이 그에게 전봉준의 경우와 같이 회유했다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또 그의 스승과 같이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죽었지만 그에게는 반역죄가 붙지 않았다. 나중에는 그의 충실한 교도였다가 뒤에 일제에 회유를 당해 친일파로 변신했던 이용구의 주선으로 신원되었고 동학교단도 이용구에 의해 공인을 받았다. 이것이 역사의 장난이 아니겠는가?

인간 평등을 가르친 종교실천가

한 인간, 특히 역사적 인물을 평가할 때는 각자의 역사관이나 인생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최시형에게는 종교적 차원과 변혁적 차원의 양면에서 볼 때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킬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그는 전봉준과는 사뭇 다르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로 나누어 최시형의 성격과 행적을 평가할 수 있다.

첫째는 끈기와 성실성이다. 이 점이 바로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전수받게 된 이유였고 동학을 세상에 포덕하게 된 원동력이었다. 그는 ‘최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자주 쫓겨다니면서도 잠시도 쉴 틈이 없이 주문을 외우고 기도를 드리고 제사를 받들었다. 이것은 40여 년간의 변함없는 생활태도였다.

그는 동학도로서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종교적 엄숙함을 결코 잃지 않았다. 이런 태도가 동학을 재건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둘째는 관용과 근면성이다. 최제우의 아내와 자식이 그를 핍박하여 푸대접을 했어도 결코 그들을 원망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었다. 비록 그를 멀리하고 배반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는 계속 접근하여 기어코 교도로 만들기도 했다. 그에 대한 이런 기록이 전해진다.

평시에라도 낮잠을 자거나 또는 손을 놓고 무료하게 있는 법이 없고 반드시 짚신을 삼으며 또는 노끈을 꼬나니 만약 노끈을 꼬다가 일감이 다하고 보면 꼬았던 노끈을 다시 풀어 꼬되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물으면 가로되 “사람이 거저 놀고 있으면 한울님이 싫어하시나니라” 할 뿐이오. 한 달 혹은 석 달이 멀다 하고 이사를 하시되 새로 든 집에 가서는 반드시 나무를 심고 겨울이면 멍석을 내었다. 가인(家人)과 제자들이 “내일이라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 터인데 그것은 하여 무엇하겠습니까” 하고 물으면 신사 대답하되 “이 집에 오는 사람이 과실을 먹고 이 물건을 쓴들 무슨 안 될 일이 있겠느냐? 만약 세상 사람이 다 나와 같으면 매사 다닐 때에 가구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나니라” 하시었다.
- 《천도교창건사》

이런 면모는 바로 그의 근면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머슴, 농부가 되기 일쑤였고 짚신이나 베를 짜서 생업을 이었다.

셋째는 그는 철저한 인도주의자였다. 반상과 적서의 차별을 타파하고 종을 잘 대우하고 노인과 청년을 동등한 예우로 대했다. 그는 “길가에서 어린이를 때리는 것은 하늘의 뜻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곧 하늘을 때리는 것이다”라고 가르쳤고, “부인, 소아의 말이라도 이를 배우라”고도 했다. 또 “집안사람을 한울같이 공경하라. 며느리를 사랑하라. 노예를 자식같이 사랑하라. 우마, 육축을 학대하지 말라. 만일 그렇지 못하면 한울님이 노하시니라”라고 〈내수도문〉에서 일렀다.

그는 여인들의 베 짜는 소리를 듣고 “천주의 소리니라”고 말했다. 그는 여성의 인권과 대우를 위해서 끊임없는 가르침을 보냈다.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의 ‘페미니스트’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최제우가 말한 ‘인시천’의 사상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하늘과 인간이 같다는 것은 동학이 철저한 민본의 종교임을 표방한 것이요, 최시형은 그 가르침을 잘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최제우는 선생 또는 대주인으로 불렸고 최시형은 주인으로 불리지 않았던가?

이런 것이 인간 평등을 가르친 스승, 그리고 꿋꿋한 종교실천가의 면모일 것이다. 하지만 신분제도의 부당함이라든가, 인간 평등의 원리라든지, 구체적 이론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동학에 들면 누구나 양반이 된다”는 소문이 퍼져 더욱 최시형 아래로 입도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특히 노비, 백정 등 천민들과 몰락 양반, 낮은 관료집단인 이서들이 몰려왔다. 따라서동학의 초기에는 ‘반불입(班不入) 사불입(士不入) 부불입(富不入)’이라 하여 민중종교로 자리를 잡았다.

최시형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신분계층을 가리지 않고 서로의 호칭을 접장(接長)으로 통일해 부르게 했다. 스스로 자신을 부를 적에는 하접(下接)이라 했다. 접장은 보부상의 최소 단위의 책임자를 가르키는 용어로 쓰여 왔는데 이를 원용한 것이다. 접장은 가장 평등한 호칭이었다.

그런데 뒷날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면서 최제우를 대신사, 최시형을 신사, 자신은 성사로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서구의 종교를 흉내 낸 것이다. 철두철미 동학인이었던 최시형의 본모습과는 배치되는 일이 아닌가?

변혁의지와 현실개혁의 한계

한편 그의 다른 면모를 보자. 그가 살던 시기는 분명 억압과 혼돈, 갈등 그리고 나라의 주권이 유린되고 민족적 모순을 겪은 시대였다. 이런 속에서 그의 변혁의지와 현실개혁이라는 실천적 행동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역사의 순환이 어떤 것인지, 제국주의 침략의 실상이 어떠한지, 봉건체제의 타파를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깊은 식견과 투철한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영해 거사와 교조신원운동, 농민전쟁 시기에 그는 늘 마지못해 뒤따라 다니기만 했다. 물론 그가 이런 항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하여 소기의 성공이 기약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실천적 행동을 늘 주저한 것은 그의 성격적 나약성과 역사의식의 부족을 보여준다. 그가 비록 ‘시운불래(時運不來)’나 ‘현기불로(玄機不露)’를 말했지만 끝내 나라는 일제에 넘어가고 민족은 더욱 고통을 받지 않았는가?

후천개벽의 5만 년 운수를 기다리며 현실에 안존하려는 것은, 일개 종교지도자의 모습이지 결코 스스로 쟁취하려는 변혁 사상가나 민족의 지도자다운 행동철학은 아니다.

단적인 예로 아무리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고 또 동학교단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라 할지라도 일본군에게 굴욕적인 서신을 보낸 행위는 하나의 교훈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서 일제에 대한 항거의 구체적 가르침을 찾을 수 없고, 또 일제와의 묵은 혐의를 없애자고 말한 것은 식민통치를 겪은 민족으로서는 그의 엷은 현실인식 또는 역사의식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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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집필자 소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우리 고전을 번역하고 편찬하는 일을 했으며, 서원대, 성심여대 등에서 역사학을 강의했다.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역사잡지 <역사비평&..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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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인물한국사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저자이이화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역사를 이끈 왕과 신화들, 새 세상을 꿈꾼 개혁가와 의학 및 과학자들, 학문을 꽃피운 사상가와 예술가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독립운동가와 개화기 지식인 등 고대부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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