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嶺湖) 동학농민군의 활동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9-05-24 12: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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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서부 경남의 동학 성장

장흥의 동학혁명이 전개되기 일주일 전에 전라도에 인접한 경상도 하동의 고성산에서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의 대규모 전투가 있었다. 고성산 전투로 대표되는 경상도 서부의 동학혁명은 영남과 호남의 동학농민군이 합세해 지역을 초월해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위한 새 세상 건설을 위해 연대했음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사례다.

 
경상도 서부의 동학 포덕은 1862년의 접주제 시행 시 고성(固城)접주 성한서(成漢瑞)가 임명된 것으로 보아 초기부터 이루어졌다. 1871년의 영해 교조신원운동에서 고성과 칠서, 칠원의 동학도가 참석했던 것으로 보아 서부 경남의 동학세력은 수운 순도 이후에도 적지 않은 세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후 쇠락했다가 다시 동학이 서부 경남으로 전파된 것은 1880년대 후반이었다. 천도교단 기록에는 함안(咸安)의 이원식(李元植)이 1889년에 입도해 육임직(六任職)인 교장(敎長)을 지냈고, 1892년에는 사천(泗川)의 김억준(金億俊), 이지우(李志祐), 곤양(昆陽)의 김학두(金學斗), 김용수(金瑢洙), 최기현(崔璣鉉), 진주의 윤치수(尹致洙)가 입도해 육임의 직책인 대정(大正), 집강(執綱), 도집(都執), 교수(敎授), 교장(敎長)을 맡았다. 이들 세력은 대체로 충청도 보은의 임규호 대접주의 포덕으로 이루어졌다.

호남 동학 세력의 진출

1890년대 들어 경상도 서부에 또 한 부류의 동학 조직이 성장했다. 이 세력은 진주의 덕산에서 백낙도(白樂道)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전라도 장수 출신 유해룡(劉海龍)에게 입도한 백낙도는 지리산을 넘어 서부 경남에 동학을 포덕해 진주의 손은석(孫殷錫)이 입교했고 손은석을 중심으로 서부 경남의 동학 세력이 급격히 성장했다. 이 조직은 전라도로부터 포덕이 돼 동학혁명이 발발한 후 순천과 광양을 기반으로 하는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 김인배(金仁培)와 연결됐다. 당시 25세의 젊은 동학군 지도자였던 김인배는 처음에는 김덕명 대접주 밑에 있었으나 관군과의 전투에서 출중한 기량을 발휘해 김개남에게 발탁됐다. 이후 김인배는 영호대접주로 임명돼 순천에서 활동하며 경상도 서부의 동학세력과 손을 잡았다.

 

▲ 경상도에서 처음으로 동학혁명이 일어난 진주 덕산. 지금의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다. 사진의 가운데 부분 산 아래 마을에 백낙도의 도소가 있었다. 진주영장이 병사를 이끌고 산을 넘어와 백낙도가 체포됐다. 백낙도는 진주에서 참형 당했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경상도에서 가장 먼저 기포한 이가 백낙도였다. 백낙도는 4월 초에 기포했으나 관에 알려져 기포한 지 열흘이 못 된 13일에 진주 영장 박희방에 의해 체포돼 15일 진주 장날에 백낙도와 같이 붙잡힌 5~6명이 처형됐다. 백도홍 등 동학도가 참형된 후 손은석 등 1천 명의 동학도가 진주부에 집결해 시위를 전개하자 진주의 우병사 민준호는 동학도에게 앞으로는 동학도를 탄압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동학도를 해산시켰다. 백낙도의 기포는 경상도 최초의 기포였다는 점과 아울러 이후 진주 일대의 동학이 관의 탄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당시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경상도 서부의 동학 세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진주) 외촌(外村)의 동비(東匪)들을 제압하려면 먼저 관인과 가까운 동비를 제거하고, 상인과 천인의 동비들을 제거하려면 먼저 반족의 동비들을 제거해야 하며, 각 읍의 동비를 제거하려면 먼저 진주의 동비를 제거해야 한다. 진주의 동비를 제거하려면 덕산의 동비와 삼장(三壯), 시천(矢川, 청암(靑巖), 사월(沙月) 등 4∼5리에서 반상(班常)이 같이 사는 동학도의 마을을 제거해야 한다.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진주 외곽의 덕산, 삼장, 시천, 청암, 사월 일대에 동학 세력이 상당했으며 여기에는 양반 사족들이 포함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학혁명이 일어났던 1894년 경상도 서부에는 대접주 2∼3명, 접주급 인물 40명 정도의 세력이 있었다.

동학 탄압과 김인배의 하동 장악

전라도에 이어 진주에서 동학도의 활동이 허용되자 하동의 동학도들도 궐기했다. 하동 동학도들은 숙의 끝에 성부역(星浮驛) 접주 박정주(朴正周)를 찾아가 1백 명의 장정을 선발해 하동에 건너와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영호포(嶺湖包)에서는 하동 동학군의 요청을 받아들여 7월 7일 1백 명의 젊은이들이 하동읍 내 광평(廣坪)으로 건너와 하동접주 여장협(余章協)과 협력해 영남의소(嶺南義所)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7월 초에 부임한 하동부사 이채연(李彩淵)은 이에 크게 놀라 동학도들을 찾아가 설득했으나 듣지 않자 몰래 화개면(花開面)에 있는 민포대장 김진옥(金振玉)을 불러 동학군 섬멸을 부탁했다.


이채연의 부탁을 받은 김진옥은 화개의 수백 명 민포(民砲)를 동원해 하동으로 들어와 영남의소의 동학군 전원을 체포했다. 김진옥은 붙잡은 동학도를 전부 죽이려 했으나 이채연의 만류로 동학군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채 광양으로 쫓겨났다. 가족들과 같이 광양으로 쫓겨난 이들은 광양 동학도들의 지원으로 생활했다. 김인배는 금구에서 순천으로 내려와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했고 김인배는 이 소식을 듣고 하동을 공격하고자 했으나 남원 대회 때문에 미루어졌다.

 
8월 25일의 남원대회 직후 여수로 돌아온 김인배는 하동 점령을 위해 각 접에 8월 28일 섬거역에 집결하라고 통문을 보냈다. 섬거역에 집결한 1만 명의 동학농민군은 8월 30일 하동읍 건너편인 광양군 다압면으로 진군했다. 하동부사 이채연은 전라도 동학군이 출동했다는 소식을 듣고 겁에 질려 당황하다 원병을 청하러 경상감사를 찾아간다는 구실로 달아났다. 부사가 달아나자 민포대장 김진옥도 다급히 통영으로 달려가 지원을 요청했으나 대완포(大碗砲) 12문만 얻어오는 데 그쳤다. 김진옥은 악양(岳陽), 화개, 적량(赤良), 하동읍 등에서 수천 명의 민병을 동원해 대항하기로 했다. 섬진강 서쪽 강가에 동학군 대부대가 나타나자 민포군들은 북과 징을 울리고 총포를 쏘아댔다. 동학농민군은 9월 1일 아침에 도강 작전을 벌였다. 주력부대는 하동읍 북서쪽 상류에 있는 섬진관(蟾津館) 나루터를 건너 만지등(晩池嶝)으로 건너 화심리(花心里)와 두곡리(豆谷里) 일대를 장악했다. 강을 건넌 후 일부는 하동읍 바로 뒤에 있는 해량(解良) 포구를 공격했다. 해량 포구의 민포들은 얼마간 저항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철수해 버렸다.


한편 광양 진월면(津月面) 망덕진(望德津)에서 출발한 천여 명의 선단(船團)은 조수를 타고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와 하동읍 남쪽에 상륙했다. 대기하고 있던 하동의 여장협(余章協) 동학군과 합류해 읍의 남쪽을 공격해 들어갔다. 화심리와 두곡리에서 진격한 동학농민군은 점심 후 안장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예상외로 안장봉이 가팔라 중턱까지 올라가자 날이 어두워졌다. 동학농민군의 공세에 민포들은 대포를 겨우 발사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이날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삼면에서 포위해 민포군을 완전히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음날인 9월 2일 새벽부터 동학군이 총공격에 나서 저녁 무렵에 주봉을 점령하고 하동읍으로 들어오자 관군과 민포들은 흩어졌다. 동학농민군은 다음날 민포군의 거점인 화개로 들어가 탑리부터 법하리까지 불 지르고, 악양과 적량 일대 민포군의 집을 찾아 불태워버렸다.

영호 동학농민군 진주 점령

영호 동학농민군의 하동 점령은 진주, 사천, 곤양 일대의 동학농민군의 사기를 북돋았다. 그러자 진주의 동학농민군도 항일전 준비에 들어갔다. 9월 8일 진주의 동학농민군은 평거의 광탄진에서 보국안민 대회를 열어 일본군을 척결하자는 결의를 다졌다. 하동을 점령한 영호대접주 김인배는 9월 10일경부터 전라도의 흥양, 순천, 광양지역의 동학농민군과 하동의 동학농민군을 진주 쪽으로 이동시키면서 병력을 몇 갈래로 나누어 사천, 남해, 고성 등지로 파견해 관아를 점거하고 지방 동학농민군을 기포시켜 동참하도록 했다. 김인배의 주력은 곤양을 거쳐 진주로 진격했다. 이로써 호남과 영남의 동학농민이 합세해 경상도 서부를 장악했다.

 

▲ 광양 다압의 섬진나루. 강 너머 하동 읍내가 보인다. 영남과 호남의 동학농민군은 1894년 9월 1일 이곳에서 섬진강을 건너 하동읍을 점령하고 진주로 진격했다. 지금은 광양 매실마을로 잘 알려져 있다.


9월 17일에는 하동의 동학농민군 수천 명이 진주로 들어왔다. 병사와 목사는 같이 성곽 밖으로 나가서 동학농민군을 진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타일렀으나 동학농민군은 진주로 들어가 각 관아에 집무소를 마련했다. 9월 18일에는 영호대접주 김인배가 천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진주성에 도착했다. 진주성 안에 있던 동학농민군들은 성의 둘레에 오색 깃발을 휘날렸고 그중 성루의 맨 앞 큰 깃대에는 붉은 바탕에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 쓴 대형 깃발을 내걸어 김인배를 맞이했다. 동학농민군의 위세에 눌린 이 지역의 관속들은 모두 도망쳐 공해(公廨)는 텅텅 비었고, 관아들은 모두 마비 상태에 빠졌다. 사법과 행정기능은 정지됐고 누구 하나 동학농민군에 항거하려는 반항도 없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오래 진주에 머물지 않고 해산했다. 9월 19일부터 24일까지 동학농민군은 모두 진주를 빠져나갔다. 이는 진주성 점령이라는 일차적인 목표를 달성해 각 군현에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김인배가 이끄는 호남의 동학농민군은 너무 깊숙이 경상도로 들어와 퇴로가 막힐 것을 염려하고 있었는데 부산의 일본군이 출동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여수로 돌아왔다.

 

▲ 광양의 망덕포구. 망덕포구는 섬진강과 남해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포구다. 호남의 동학농민군 일부는 이 포구에서 출발해 섬진강을 거슬러 하동읍으로 진격했다.

부산의 일본군과 지석영의 관군, 경상도 서부로 출동

9월 2일 하동이 동학군에 의해 점령됐다는 소식을 접한 부산의 일본군은 9월 5일 정찰대를 파견했다. 청찰대로는 일본 헌병 순사 4명과 함께 동래 감리서(監理署) 주사 이모(李某)와 순사 4명을 차출했다. 정찰대는 15일과 20일 두 차례의 보고를 통해 경상 남서부 일대가 동학군의 수중에 들어갔음을 보고했다. 특히 진주와 통영 쪽으로 동학농민군이 진격해 온다는 첩보를 받자 출병을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9월 22일 일본 재부산 영사관은 일본군 출병을 위한 한국 지방관의 편의 제공 조치를 요청한 후 9월 23일과 24일에 일본군 남부병참감(南部兵站監)의 스즈키(鈴木) 대위와 엔다(遠田) 중위로 하여금 1개 중대와 2개 소대의 약 200명을 선편으로 출동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한편 정부에서도 9월 25일자로 대구판관 지석영(池錫永)을 토포사(討浦使)로 차하(差下)해 현지로 파견했다. 지석영은 9월 26일 대구를 출발해 28일 부산에 도착했고 감리서(監理署)와 일본 영사관을 만난 후 출동해 배편으로 29일 통영에 도착했다. 지석영은 통영에서 포군(砲軍) 100명과 군관 4명 즉 104명을 인계받은 다음 10월 2일에 고성으로 향했고 고성에서 일본군과 합류했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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