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촌 전투에서 중앙군인 경군에 대승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8-12-26 16:23:20
  • -
  • +
  • 인쇄
해월 최시형 평전

동학군 토벌을 위해 경군(京軍) 출동


동학농민군이 무장에서 기포해 고부를 다시 점거한 후 백산에 웅거하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이를 정부에 보고하고 전라 감영군, 즉 지방군을 동원해 동학농민군의 토벌을 시도하였다. 황토현 전투는 전라감사 김학진이 동원한 전라도 감영군과 보부상, 그리고 토병 등 정부군이 동학농민군을 토벌을 위해 벌인 전투였다. 감영군은 동학농민군을 오합지졸이라고 얕잡아보았다. 이러한 사실은 오지영의 <동학사>에 잘 드러나는데 감영군들은 동학농민군 토벌을 앞두고도 술을 먹고 취해 잠이 들었고 동학농민군은 이런 감영군을 급습해 이겼다고 했다.


김학진의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동학농민군의 토벌을 위해 대책을 마련했다. 3월 29일 장위영(壯衛營) 정령관(正領官) 홍계훈(洪?薰)을 전라병사(全羅兵使)로 임명해 동학군 토벌의 임무를 맡겼다. 충청병사 이용복(李容復)이 충청도 접경지역에 동학농민군 3000명이 주둔해 해산을 종용했으나 날마다 숫자가 늘어나 토벌할 계획이라는 4월 1일의 장계를 접한 조정은 다음날인 4월 2일 홍계훈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士)로 승진, 임명시키고 장위영(壯衛營), 총위영(統衛營)과 서영(西營)의 평양 병력을 이끌고 전라도와 충청도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양호(兩湖)란 호남(湖南)과 호서(湖西) 즉 전라도와 충청도를 말한다.


4월 3일 홍계훈은 인천에 도착해 병력을 점검하고 이튿날인 4일 4개의 병선에 병력 800명과 군수물자, 대포를 싣고 인천항을 출발했다. 4개의 병선 가운데 청의 순양함 평원호(平遠號)가 포함돼 있었는데 이는 동학군 토벌과 관련해 조정과 청이 협의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4월 5일 원세록(元世祿)을 태운 창룡호(蒼龍號)와 이두황(李斗璜)을 태운 한양호(漢陽號)는 군산포에 도착했고, 다음 날인 6일에는 평원호의 홍계훈 부대도 군산포에 도착, 임피(臨陂)로 이동해 숙영했다.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은 도착하자마자 황토현 전투에서 감영군이 참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위축됐다.


한편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도착하기 전인 4월 2일 진산에서는 김치홍(金致洪)과 임한석(任漢錫)이 이끄는 보부상이 동학농민군을 공격해 114명을 살상했고, 4월 3일 전라감영에서는 김제, 부안, 흥덕, 고창, 정읍, 장성, 태인 등 7개 읍에 동학농민군들이 후퇴할 때 뒤따라가며 섬멸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4월 4일에는 태인, 김제, 부안, 고부 등 4개 읍으로 통하는 길을 모두 차단해 동학농민군들의 이동을 막도록 하고, 감영의 중군(中軍)이 병대를 이끌고 태인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와 같이 정부와 전라감영에서는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중앙 차원과 지방 차원에서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황토현 전투는 중앙군과 지방군의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전개돼 동학농민군에게 유리했다.


 


평원호(平遠號). 홍계훈이 이끄는 장위영 등의 경군 800명은 청국의 순양함인 평원호을 포함한 4개의 병선를 타고 1894년 4월 4일 인천을 출발해 4월 6일 군산포 앞바다에서 내려 전주로 향했다. 평원호는 청.일전쟁 때 일본에 나포돼 일장기가 걸려있다.(출처:나무위키)
평원호(平遠號). 홍계훈이 이끄는 장위영 등의 경군 800명은 청국의 순양함인 평원호을 포함한 4개의 병선를 타고 1894년 4월 4일 인천을 출발해 4월 6일 군산포 앞바다에서 내려 전주로 향했다. 평원호는 청.일전쟁 때 일본에 나포돼 일장기가 걸려있다.(출처:나무위키)

 


민심은 동학농민군에게로


황토현 전투의 승리로 동학농민군은 많은 무기와 1000석 이상의 쌀을 전리품으로 획득했다. 백산에서 기포한 이후 겨우 죽창(竹槍) 정도로 무장하던 동학농민군은 정부군이 갖고 있던 무기로 무장할 수 있게 됐고, 많은 식량도 확보하는 등 전력이 급상승했다. 황토현에서 대승한 동학농민군은 곧바로 정읍에 진출했고, 이튿날인 4월 8일에는 흥덕, 고창을 석권하면서 9일에는 파죽지세로 무장현에 돌입했다. 무장에 들어온 동학농민군은 고산봉에 포진해 향후의 대책을 논의했다. 황토현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동학농민군은 승승장구의 기세였다.


황토현 전투 이후 동학농민군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는 더욱 커져갔다. 동학혁명이 일어난 고부현 운동면(宮洞面) 석지리(石池里)에서 동학혁명 당시 체험한 경험을 회고담 형식으로 기술한 <석남역사(石南歷事)>를 쓴 박문규(朴文圭, 1879~?)는 이 책에서 황토현 전투에 대해 소상히 기록한 후 “만약 병정들이 이겼다면 고부는 도륙(都戮)되었을 것이다. 천운이 망극하여 병정들은 검사봉(劍死峯)에 진을 쳤다가 패진(敗陣)했다”라고 적었다. 이는 당시 정부에 대한 호남 일대의 민심이 어떠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부군이 승리하면 고부군민들이 모두 살육되었을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동학농민군의 승리가 천운(天運)이라고 할 절도로 잘된 일이라고 했다.


특히 “정부군은 기율이 극도로 문란하여 이르는 곳마다 인민의 가축, 의복, 화물의 약탈, 부녀의 겁탈 등 유적(流賊)과 같은 잔혹(殘暴)한 행동을 감행하였으므로 형세를 관망하던 인민까지도 동학군에 향응”할 정도로 정부군의 폐해가 극심했고 민심을 잃은 정부군의 패배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황토현 전투 이후 호남의 민심은 완전히 동학농민군에게 넘어 왔다.


 


동학농민군 황룡촌에서 대승


경군을 이끌던 홍계훈은 4월 7일 전주에 입성했다. 홍계훈은 전주감영 내에 동학도와 내통하는 자가 있다고 조사했다. 11일에는 전 영장 김시풍과 동학도 4명을 체포해 효수형에 처해 동학도들과 백성들에게 본보기를 보였다. 홍계훈은 각 읍의 병력 요청에 응하지 않고 전주에 웅크리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경군 가운데에서도 도망자가 속출했기 때문이었다. 800명으로 출발한 경군이 전주에 도착했을 때 470명만 남았을 정도로 경군의 군율도 엉망이었다. 특히 황토현에서 동학농민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에 도망자가 급증했다. 홍계훈은 경군을 1/3씩 출발시켜 19일에 완전히 전주를 떠났다.


동학농민군도 경군과의 전투를 피하고 있었다. 조선의 중앙군인 경군은 신식군대였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비록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위한 기포였지만 상대는 국왕의 명령을 받은 정예군이었다. 왕명을 받은 군대와 대적하는 일은 당시의 시각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혁명이 본격화되고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뿌리깊은 존왕사상으로 동학농민군의 의식은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었다. 무장을 점령한 이후 동학농민군은 1차 목표인 전주가 아닌 남쪽으로 선회해 영광과 함평을 내려왔는데 여기에는 경군에 대한 두려움도 작용했다. 그러나 남하하면서 동학농민군은 세력을 확충하고 조창을 습격해 군량미를 확보했다. 함평에서 북상을 결정한 동학농민군은 4월 21일에는 장성으로 들어왔다.


동학농민군과 경군의 전투인 황룡촌 전투는 4월 23일 벌어졌다. 4000명 이상의 동학농민군이 장성의 황룡촌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이를 발견한 이학승이 이끄는 경군 별동대 700명이 기습했다. 동학농민군은 급작스런 경군의 습격에 40~5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자 일시 후퇴했다. 전열을 정비한 동학농민군은 산꼭대기에서 바퀴를 단 큰 장태에 총수를 넣은 기관총 같은 것을 굴리며 경군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거꾸로 경군에서 5명의 전사가가 발생하자 동학농민군의 기세에 밀려 경군은 무기를 버리고 퇴각하고 말았다. 경군이 동원된 황룡촌 전투는 생각보다 싱겁게 동학농민군의 승리로 끝났다.


황룡촌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야포와 기관총 각 1문, 탄약, 양총 100여 정 등을 포획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경군에 승리하자 동학농민군은 본격적으로 혁명의 성공을 확신하며 진군을 서둘러 전주로 향했다.


 


황룡촌 전투 전승기념탑. 4월 23일 동학농민군과 중앙군인 경군이 황룡촌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다. 초기에는 경군이 우세했지만 장태를 굴리며 반격하는 동학농민군의 기세에 밀려 경군은 힘도 쓰지 못하고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경군 별동대 대장 이학승이 전사했는데 이학승의 순의비가 기념탑 옆에 있다. 전승기념탑은 죽창을 상징해 1997년 세웠다.
황룡촌 전투 전승기념탑. 4월 23일 동학농민군과 중앙군인 경군이 황룡촌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다. 초기에는 경군이 우세했지만 장태를 굴리며 반격하는 동학농민군의 기세에 밀려 경군은 힘도 쓰지 못하고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경군 별동대 대장 이학승이 전사했는데 이학승의 순의비가 기념탑 옆에 있다. 전승기념탑은 죽창을 상징해 1997년 세웠다.

 


고종, 청나라에 동학군 토벌을 위한 원병 요청


정부군과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맞붙은 황토현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양호초토사 홍계훈은 전투도 한 번 해보기 전에 고종에게 청나라의 원병을 건의했다. 1893년 보은 교조신원운동 당시에도 고종은 동학도 진압을 위해 청에 원병을 요청하자고 주장했으나 김병시(金炳始) 등 고관들을 반대에 부딪쳐 채택되지 않았다. 홍계훈은 군산에서 동학군을 추격하러 영광으로 내려오던 4월 10일 전보로 정부에 청국(淸國)의 출병(出兵)을 건의했는데 그 이유는 동학농민군의 수가 많아 정부군으로 대적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황토현에서 동학농민군이 승리하자 정부군 가운데 도망하는 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홍계훈이 인천에서 군산으로 올 때 청나라의 군함인 평원호를 타고 왔다는 점은 조정과 청이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해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홍계훈의 전보를 접한 병조판서 민영준(閔泳駿)은 위안스카이와 비밀리에 협의한 후 4월 12일 고종에게 청의 원병을 발의했다.


민영준은 외국군 차병이 가져올 파문을 알고 있었지만 민씨 척족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시키려고 이를 주장했다. 고종 또한 왕실 보존을 위해 원병이 필요하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외국군의 동학군 진압은 인명 살상, 민심 불안, 각국 군대의 유입으로 인한 불화 등을 이유로 들어 강경하게 반대했다. 4월 18일 고종은 다시 중신회의를 열어 사태의 급박함과 서울 방비의 어려움, 러시아의 남침 우려 등을 이유로 충주의 장후원으로 천도(遷都)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대신들은 고종의 천도 의견을 반대하고 동학농민군을 효유하고 귀화시키기 위해 인재를 골라 파견하자고 주장했다.


뒤로 밀렸던 청의 원병 요청은 4월 27일 전주성이 동학농민군에 함락당하자 다시 거론됐다. 29일 전주 함락 소식을 공문으로 접한 고종은 다시 청병 차입을 꺼냈다. 민영준은 청병 차입을 적극 주장했으나 대신들은 신중론을 펴 동정을 살펴가며 이 계획을 실행하자고 청병 차입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민영준은 고종의 명령을 받고 위안스카이와의 교섭을 위해 밀사 성기운을 보내 청의 원병 요청은 기정사실화됐다. 중신회의에는 원로 김시병에게 의견을 구하자는 의견도 냈는데 김시병은 청군의 동학농민군 탄압은 민심 동요와 일본군의 발호를 염려하며 반대했다.


그러나 청병의 차입에 대한 고종의 의지는 확고했다. 민영준 또한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청의 배경이 필요했다. 4월 29일 김시병의 반대 의견을 접한 후에도 고종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대신들 또한 청병 차입에 대해 찬성한다고 해 청관(淸館)에 조회문(照會文)을 발송했다. 4월 30일 조회문은 위안스카이에게 접수됐고 그날로 청의 북양대신 리홍장[李鴻章]에게 전보로 보고됐다. 리홍장은 이튿날인 5월 1일 즉시 총리아문에 전보를 전달해 출동을 서둘렀다. 리홍장은 수수제독(水帥提督) 정여창(丁汝昌)에 명해 순양함 제원(濟遠).양위(楊威)호를 인천으로 보냈고, 이어서 직예제독(直?提督) 섭지초(葉志超), 산서(山西).태원진총병(太原鎭摠兵) 섭사성(?士成)에 명해 1500명의 청병을 거느리고 출동케 했다. 청은 출병하면서 텐진조약에 따라 이를 일본에 알렸고 일본도 군대를 파견해 청군과 일본군이 국내로 들어오게 되었다.


청군과 일본군의 국내 유입은 홍계훈의 건의와 고종 및 민씨 척족의 권력욕으로 시작됐다. 동학농민군 토벌을 위한 청군과 일본군의 개입은 동학혁명을 동아시아의 문제로 전환시켰고 결국 청.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동아시아 역사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동학농민군의 신무기 장태. 황룡천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정부군의 총격을 막기 위해 개발한 무기. 닭 등 짐승을 기르는 장태에 짚을 넣어 굴리면서 정부군의 총격을 막으며 전진했다. 정부군은 처음 보는 무기인 장태에 당황해 결국 패배했다. 이 장태는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된 것이다.
동학농민군의 신무기 장태. 황룡천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정부군의 총격을 막기 위해 개발한 무기. 닭 등 짐승을 기르는 장태에 짚을 넣어 굴리면서 정부군의 총격을 막으며 전진했다. 정부군은 처음 보는 무기인 장태에 당황해 결국 패배했다. 이 장태는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된 것이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후원합니다.

기사후원하기

울산저널은 행복한 울산을 만드는 시민의 힘이 되겠습니다.

결제금액:

감사합니다.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기자의 인기기사

뉴스댓글 >

오늘의 울산 이슈

주요기사

+

많이 본 기사

정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