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례에서 교조신원운동을 전개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기사승인 : 2018-08-29 20:2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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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 최시형 평전

서인주(徐仁周)와 서병학(徐丙鶴)


공주에서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서인주와 서병학이었다. 서인주의 다른 이름은 서장옥이다. 서인주는 해월과 인척지간이었다. 해월의 아들 덕기의 부인과 서인주의 부인이 자매이다. 덕기의 장인은 청주 율봉(현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의 음선장(陰善長)인데 첫째 딸이 서인주의 부인이고 둘째 딸이 덕기의 부인이다. 음선장의 동학 입도도 서인주가 주선했다. 서인주는 1883년에 충청도 북부 지방에 동학이 성행할 때 입교한 것으로 보인다. <시천교종역사>에 1883년 서인주와 황해일이 목천 김은경의 집으로 해월을 찾아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부터 동학의 지도부로 활동했다.


서인주는 동학에 입도하기 전에 30여 년간 승려로 불도에 몸담았다. 그러다 환속해서 동학에 입도했다. 그는 신체는 작았으나 용모가 특이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해월도 서인주를 특별하게 생각했다. 1889년 10월 서울에서 활동하던 중 체포돼 전라도 진도의 금갑도(金甲島)에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해월은 이불도 덮지 않고 방구석에서 쪼그려서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해월과 동학도인들이 750냥의 돈을 모아 1890년 8월 보석으로 빼냈다. 서인주가 감옥에 있을 때 그를 위해서 하던 식후(食後) 고천(告天)이 심고(心告)라는 의식으로 정해졌다고 한다.


서병학은 충주 출신으로 서인주와 함께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행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서인주와는 같은 집안으로 친밀하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다만 교조신원운동 당시 두각을 나타냈고 혁신적인 노선을 경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행적은 이후 동학이 단순히 교조의 신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모순을 농민층에게 전파했다고 전한다.


황현의 <오하기문(梧下紀聞)>에 서인주와 서병학을 남접으로 기술하면서 해월의 동의 없이 독자적으로 도인들을 모아 교조신원운동을 일으킨 것으로 기술돼있다. 또 몇몇 동학 계열의 문서에도 서인주와 서병학이 독단적으로 교조신원운동을 일으켰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동학의 조직이 해월을 중심으로 단일적으로 결성돼 있어서 서인주나 서병학이 함부로 사람을 모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또 해월이 입의통문(立義通文)을 각 접에 보내 도인들을 집결시켰다는 점, 손천민의 집에서 지도부들이 모여 의송단자(議送單子)를 만들었다는 점 등등은 동학 교단 지도부가 개입했음을 의미한다.


 


전주 풍남문(왼쪽)과 전라감영 포정문(布政門). 1892년 11월 2일 서인주, 서병학, 전봉준, 유태홍 등이 의복을 정제하고 포정문(布政門) 앞에서 의송단자를 전라도관찰사 이경직에게 올렸다. 사진은 1910년의 모습이다. 현재는 전라감영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전주 풍남문(왼쪽)과 전라감영 포정문(布政門). 1892년 11월 2일 서인주, 서병학, 전봉준, 유태홍 등이 의복을 정제하고 포정문(布政門) 앞에서 의송단자를 전라도관찰사 이경직에게 올렸다. 사진은 1910년의 모습이다. 현재는 전라감영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공주에서 국정 쇄신과 반외세 요구


동학도들이 충청도관찰사 조병식에게 보낸 의송단자(議送單子)를 살펴보면 교조신원운동이 일시적으로 실행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송단자의 핵심 내용은 첫째, 교조 신원을 통한 동학의 공인, 둘째,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통한 국정의 쇄신, 셋째, 일본 상인들의 경제적 이득 독점과 서양 열강의 이권 침탈을 막아달라는 외세의 배격, 반외세를 담고 있었다.


지금 왜(倭)나라 상인들은 각 항구를 통해 장사하여 얻은 이득을 그들이 독차지하고 있으며 나라 안의 전곡(錢穀)은 탕갈(蕩竭)되어 백성들은 생계를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다. 요긴하고 목 좋은 곳에서 관세(關稅) 시세와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서 나는 이득은 오로지 오랑캐에게 돌아가니 이 또한 우리들이 주먹을 치며 눈물을 흘리는 바이다. …… 엎드려 바라건대 자비를 베풀어 넓으신 덕으로 외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모두 방송하는 특별한 조치를 내려 주시고, 임금님에게 계달(啓達)하여 스승님을 신원하여 주기를 피눈물로 우러러 호소하며 큰 은인이신 관찰사 합하(閤下)에게 엎드려 비는 바이다.


위의 의송단자의 글에서처럼 동학의 공인 이외에 외세의 경제적 침탈과 도적의 횡행을 지적하며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방책을 찾아 줄 것을 함께 요구했다.


 


전라감영 선화당. 1910년도의 모습으로 전라감사가 집무하던 곳이다.
전라감영 선화당. 1910년도의 모습으로 전라감사가 집무하던 곳이다.

 


교조신원운동을 통해 동학을 재인식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던 동학도들은 내심 관의 강경책을 염려했다. 1891년부터 지속적인 동학에 대한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큰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 조병식은 동학도에 대한 공인 여부는 조정에서 결정한다고 미뤘지만 각 고을의 수령과 아전들이 행한 침탈에 대해 솔직히 시인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이처럼 교조신원운동을 제한적이지만 성과가 있었다.


교조신원운동으로 동학도들은 관의 탄압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 조직적으로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관의 폭압적인 탄압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특히 1천여 명에 이르는 동학도들이 의관을 갖추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였으며 겸손한 자세로 공주의 백성들과 접촉했다. 이러한 동학도들의 행위는 동학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다. 동학을 이단으로 바라보던 민중들도 동학도들이 질서정연하게 관찰사에게 의송단자를 전하는 모습을 보고 동학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또한 동학도들의 주장은 단순히 교조의 신원이라는 종교적 차원의 시위에 그치지 않고 탐관오리의 횡포를 질타하고 외세를 물리쳐 나라를 바로잡아 백성을 평안하게 하자는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제시함으로써 민중들에게 미래의 희망이라는 것을 각인시켰다. 10월 20일 공주에서 시작된 공주에서의 교조신원운동은 5일 만인 10월 25일 일부 지도자를 제외한 나머지가 공주에서 철수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호남읍지(湖南邑誌)"의 삼례도역지도. 1871년에 제작한 "호남읍지"의 삼례역 지도. 삼례역이 있었던 곳은 현재 삼례동부교회이다.

 


전봉준(全琫準)이 삼례 의송문을 전달


충청도관찰사를 상대로 한 공주에서의 교조신원운동에서 소기의 성과를 얻은 동학도들은 전라도관찰사를 상대로 한 번 더 신원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공주에서 철수한 지도부는 곧바로 삼례(參禮)로 향했다. 삼례는 호남 가운데 일찍 동학이 전해진 곳으로 동학도들이 많았다. 해월은 1888년 5월의 호남 순례 때 삼례리의 이몽로(李夢老)의 집에서 기거한 적이 있었다. 삼례로 모인 가장 큰 이유는 찰방역(참察訪驛站)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유숙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0월 27일 밤에 해월은 11월 1일에 삼례 집회를 개최한다는 경통(敬通)을 보내 도인들의 참석을 독려했다.


당시 전라도관찰사는 이경직(李耕稙)이었다. 해월도 상주 왕실에서 교조신원운동을 직접 진두지휘하려고 삼례로 출발했으나 도중에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해 다시 왕실로 돌아갔다. 10월 29일부터 삼례에 집결하기 시작한 동학도들은 수천 명에 달했다. 공주에서의 시위에서 일부 성과를 거두자 동학도인들은 자신감에 차서 삼례로 모여들었다. 삼례에서의 신원운동도 서인주와 서병학이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삼례 집회에는 고부접주 전봉준도 참석했는데 전봉준은 11월 2일 전주감영에 진송할 의송단자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남원군동학사>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주 삼례역에 우 대회하야 서병학의 문필로 소장을 진송(陳送)하야 의송(議送)코자 할새 관리 압박의 위엄으로 인하야 소장을 고정(告呈)할 인이 업셔서 주저 방황 중에 우도에 전봉준(全琫準), 좌도에 유태홍(柳泰洪)씨가 자원 출두하야 관찰부에 소장을 제정한대


의송단자를 전해 받은 이경직은 조병식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하지 않았다. 답을 미루면 동학도들이 저절로 해산할 것을 기대하고 6일까지 답을 주지 않고 동학도들의 동태만 파악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동학도들의 수는 늘어갔다. 동학도들을 7일에 다시 이경직의 결단을 촉구하는 글을 재차 보냈다. 이 글에서 교조신원을 임금님께 건의할 것과 아울러 “각 고을에서는 지목과 박해가 날로 심해지고 수재를 비롯하여 이서나 군교와 간교한 향리들까지 거침없이 가산을 수탈하여 자기 소유처럼 하며 구타하고 학대하는 일이 그칠 날이 없다.”라고 동학도에 대한 탄압의 중지를 요구했다.


 


장충단. 장충단은 대한제국 시기에 을미사변과 임오군란으로 순사(殉死)한 충신과 열사를 제사지내기 위해 만들었다. 삼례 교조신원운동 당시 전라도관찰사였던 이경직(李耕稙)과 동학혁명 당시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였던 홍계훈(洪?薰)이 포함돼 있다. 이경직은 을미사변 당시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장충단. 장충단은 대한제국 시기에 을미사변과 임오군란으로 순사(殉死)한 충신과 열사를 제사지내기 위해 만들었다. 삼례 교조신원운동 당시 전라도관찰사였던 이경직(李耕稙)과 동학혁명 당시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였던 홍계훈(洪?薰)이 포함돼 있다. 이경직은 을미사변 당시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전라감영군을 출동시켜 강압적으로 해산시키려


11월 9일에서야 이경직은 제사(題辭, 답변서)를 보내왔다. 이경직은 이단의 무리인 동학도와의 대화를 나누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 즉각 해산하고 물러가 새 사람이 되라고 하였다. 동학도들은 이경직이 동학이 이단이라서 대화할 수 없다고 하자 계속 시위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그러자 이경직은 영장 김시풍(金始豊)에게 3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해산하라고 명했다. 김시풍은 삼례 쪽의 한천(寒川, 만경강)까지 감영군을 이끌고 동학도의 대표자를 나오라고 하자 동학도들은 김시풍에게 만나러 온 사람이 도소로 찾아오라고 대응했다. 김시풍은 군졸 300명을 도열시키고 동학도소로 들어와 서인주를 만났다.


김시풍은 “어찌 무리를 모아 태평성세를 어지럽히려는가?”하고 질타하자 서인주는 “도인들이 관리들에게 상해당해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감사에게 의송을 올리려고 모였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후 두 사람은 한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치하면서 기싸움을 벌였다. 김시풍은 끝내 칼을 뽑아 허세를 부리며 위협했지만 서인주는 예의를 다해 김시풍을 대하였다. 그러자 김시풍이 누그러지면서 “동학이 난당(亂黨)인줄 들었는데 와서 보니 관대한 것을 알겠다. 윗사람에게 알려서 해결해주겠다.”며 돌아갔다.


11월 11일자로 이경직은 각 군현에 감결(甘結)을 내려 보냈다. 감결에는 “각 읍에 속해 있는 관리들이 금단을 이용하여 빈번히 전재를 약탈하니 어째 재물을 탈취할 줄을 알았으랴”라고 관리의 탐학을 시인하면서 앞으로 탄압을 중지하겠다고 밝혔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성강현 전문기자.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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