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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 그 역사를 찾아] (7) 동학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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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 그 역사를 찾아] (7) 동학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

산천 방방곡곡 ‘보따리 포교’… ‘東學의 꽃’ 활짝 피워

거장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영화 개벽은 1991년 당시 대종상을 휩쓴 명작이었다.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가 대종상을 받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었음에도 영화 개벽은 동학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삶과 죽음을 다루면서 진한 감동을 주었다.

동학에서 해월 최시형을 기억하는 이들은 사실상 드물다. 왜냐하면 동학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수운 최제우 선생이기 때문이다.

또한 동학의 이름이 천도교로 바뀐 이후 사람들은 손병희 선생을 떠올리기에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은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난 시절 수운 최제우가 대구 감영에서 혹세무민의 죄로 사형을 당하고 동학의 교세가 완전히 사라질 즈음 최시형이 아니었다면 역사속에서 동학은 존재할 수 없었다. 영화 개벽에 나오는 것처럼 그의 헌신적인 삶이 아니었다면 동학의 부활과 포교는 존재할 수 없었다.

해월 최시형은 경기지역 인물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경기지역을 포함한 전 동학의 교주이며 대접주였다. 그리고 그가 수운 최제우에 이어 백성들을 현혹하여 사교(邪敎)를 널리 퍼뜨린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한 이후 그의 유해가 경기도 여주시 주록면 천덕산에 묻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게 경기인으로 죽어 다시 태어났다. 죽은 자의 부활이 이 땅에서 이루어졌고 그의 동학 사상이 경기지역에서 다시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나타나는 동학의 기본 사상은 포덕천하에 의한 보국안민의 후천개벽을 전제로 하는 시천주 사상이다. 신앙의 대상을 천주(天主, 天, 上帝, 한울님, 하느님)로 하고 마음을 닦아 정성과 공경 그리고 신의를 갖추는 것이다.

이러한 시천주 사상은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제우는 깨달음을 얻은 지 4년 만에 대구 감영에서 사형을 당하였기에 동학의 세력을 크게 키우지 못하였고 이론의 체계를 확실하게 다지지도 못하였다.

동학의 이론 정립과 세력을 확장하여 1894년 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힘을 키운 이는 바로 최제우가 아닌 그의 제자이자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이었다. 그는 최제우가 강조한 시천주 사상을 뛰어넘어 인간이 곧 하늘이요, 인간을 하늘같이 섬겨야 한다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으로 확대하였다.

최제우에 의해 이루어진 유교와 불교, 그리고 선교의 합일은 최시형에 의해 한 단계 높은 동학의 도가 만들어졌다. 『동학사』를 저술한 오지영은 그 동학의 도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동학의 도는 유교 같아도 유교가 아니오, 불교 같아도 불교가 아니요, 도교 같아도 도교가 아니오, 정치 같아도 별다른 정치가 아니오, 다만 사람에게 있는 도를 사람으로 하여금 찾게 하여 사람과 사람이 다 같이 잘 살아나갈 것을 말씀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 곧 사람이 세 가지 잘 먹고 사는 법을 이름이니 한 가지는 그 마음을 잘 먹어야 사는 것이오, 한 가지는 그 기(氣)를 잘 먹어야 사는 것이오, 한 가지는 그 밥을 잘 먹어야 사는 일이라 하는 바이며, 사람이 그 세 가지를 잘 먹고 사는다하고 보면, 도는 스스로 원만대도(圓滿大道)가 될 것이오, 세상은 비로소 태평천국(太平天國)이 될 것이다”

즉 동학은 사람을 사람답게 대우하여 사람을 다같이 잘살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동학을 만들어낸 이가 바로 해월 최시형인 것이고, 그가 바로 여주시 금사면의 주록리에 묻혀 있는 것이다.

해월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용살이 등을 하다가 19세 때 밀양 손씨와 결혼하여 처가 근처인 흥해 매곡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28세 때에는 경주 신광면 마복동으로 이사하여 화전민 생활을 하며 마을 집강일을 보다가, 33세 때는 다시 검곡으로 이사했다.

최제우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 6월 동학에 입교했다. 설교를 듣고 의범을 배웠으며 집에 있을 때는 명상과 극기로 도를 닦기에 힘써 한울님의 말씀을 듣는 등 여러 가지 이적을 체험했다고 한다. 1862년 3월 최제우로부터 포교에 힘쓰라는 명을 받고 영해·영덕·상주·흥해·예천·청도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포교를 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863년 7월 북도중주인으로 임명되었고, 8월 도통을 이어받았다. 이때 최제우는 최시형에게 해월(海月)이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아마도 곧 닥칠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미리 후계자를 정하고 이를 선포한 것이다. 그해 12월 최제우가 체포되자 관헌들의 눈을 피해 옥바라지를 하다가 태백산·안동·평해 등지에서 도피생활을 했다.

1864년 3월 최제우가 처형되자 다음해 1월 평해에서 울진으로 거주를 옮겨 최제우의 부인과 아들을 보살폈다. 같은 해 6월 영양으로 이사한 후 수도에 힘써 1년에 4차례씩 49일간 기도했으며 ‘동경대전’·‘용담유사’를 외워 받아쓰게 하여 교도들에게 전했다.

사실 그는 한문을 몰랐다. 너무도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여서 한문을 배울 수가 없었다. 수운 최제우는 비록 서자로 태어났지만 영남 남인의 거두인 최옥(崔玉)의 아들이었다.

최옥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그대로 이었던 영남 지역 사대부의 최고 학자로 대산 이상정의 제자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 여유가 있었고 서자이지만 유일한 아들인 최제우를 사랑했고 아들에게 열정적으로 글공부를 시켰다.

하여 최제우의 학문은 영남 남인의 적통을 잇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시형은 평민 출신으로 글을 몰랐다. 그렇지만 그는 수운의 모든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었고, 수운의 죽음 이후 동학의 2세 교주가 된 이후 자신의 기억을 문자를 아는 제자들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였다.

그의 기억으로 다시 기록된 것이 오늘날 동학의 모든 경전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해월이 진정 한울님을 몸과 마음으로 받들고 그러한 섬김이 특별한 지혜를 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수운 최제우가 죽고 해월 최시형이 포교를 하러 다니던 시절 그의 별명은 최보따리였다. 등에 괴나리봇짐을 둘러 메고 전국을 떠돌아 다녔기 때문이다. 숨어서 도(道)를 전파하러 다녔다고 하여 ‘은도시대(隱道時代)’라 불리던 시절 해월은 보따리 하나를 메고 산천 방방곡곡 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면서 그의 인품에 감화되고 동학의 세력은 다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1866년 10월 최제우의 탄신일에 모여든 교도들과 함께 계를 조직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1년에 2차례의 모임을 통해 흩어진 교도들을 재결속시키고 신앙을 다져나갔다. 1871년 최제우의 기일인 3월10일에 영해부에서 이필제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난에 많은 동학교도들이 참가하여 이후 다시 심한 탄압을 받게 되자 도피생활을 계속하면서 동학을 재건하고자 노력했다.

1875년 도는 때에 따라 나아가야 한다고 하여 이름을 때를 따라 순응한다는 뜻의 시형으로 바꾸었다. 1878년 접소를 열고 교도들에게 접제의 통문을 돌려 최제우의 뜻에 따라 도를 펼 것을 알렸다. 1880년 5월 인제군에서 ‘동경대전’을 간행했고, 1881년에는 단양 샘골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했다. 1883년에는 목천군에서 ‘동경대전’ 1천여 부를 간행·보급했다. 1884년 교장·교수·도집·집강·대정·중정의 육임제를 정하여 교단을 정비했으며 교세로 확장하였다.

1892년, 1893년 걸쳐 교조신원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세우면서 시위를 벌였다. 1894년 1월 전봉준이 주도한 갑오농민전쟁에 처음에는 때가 아니라 하여 반대하다가 5월에 전주화약을 맺고 일단 해산한 농민군이 10월 다시 봉기할 때 전체 동학교도에게 총기포령을 내렸다. 1894년 12월말 갑오농민전쟁이 진압되자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힘을 기울였고 1897년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했다.

1898년 3월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월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시신은 그 후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 천덕봉으로 옮겨졌는데, 그 곳은 그가 ‘유령에게 빼앗겼던 밥그릇을 되찾아 대낮의 산 사람 앞으로 옮겨놓는 역사’를 한 이천시 설성면 앵산동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곳이다. 그 바로 아래에는 손병희의 여동생이며 세 번째 부인인 손시화의 묘가 나란히 놓여 있다.

이제 해월 최시형은 다시 태어날 것이다. 종교의 문제가 아닌 공동체의 이상을 다시 공유하고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준비하는 시기인 오늘 해월의 통합 사상과 인간존중의 사상은 다시 우리 사회의 기반이 될 것이다. 여주 천덕산에 올라 해월의 묘소에서 경기땅을 바라보며 새로운 공동체를 꿈꿔 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김산(홍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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