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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과 사람, 京畿를 세우다]26. 하늘의 덕(德)을 지닌 곳에 사는 동학 교조 해월 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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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과 사람, 京畿를 세우다]26. 하늘의 덕(德)을 지닌 곳에 사는 동학 교조 해월 최시형

하늘의 덕을 지닌 봉우리, 또는 하늘로부터 덕을 내려받은 봉우리가 있다. 바로 천덕봉(天德峯)이다. 경기도 광주와 여주 그리고 이천을 아우르는 원적산의 주봉으로 경기도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경기 남부지역의 수많은 산중에서 광교산, 수리산, 무갑산과 더불어 4대 명산에 해당하는 산이 바로 원적산이다. 그 원적산 주봉인 천덕봉 줄기에 동학의 2세 교조인 해월 최시형 선사가 잠들어 있다.

원적산은 3개 지자체를 공유하고 있기에 등산로도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등산로고 동원대학교 입구에서 출발하여 범바위 골 약수터로 올라 장개봉과 천덕봉으로 올라 여주 이포쪽으로 하산하는 것이다. 최근 완공된 여주 이포보가 바로 인근에 있어 하산 후에 천서리 막국수 촌으로 가서 메밀 막국수를 먹는 재미도 있다.

하지만, 등산이라는 것이 어찌 산만 오르는 것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산에 담긴 이야기와 교훈을 통해 인간세상의 복잡하고 답답함을 풀어내고 더 나은 세상으로 가기 위한 것이 등산의 참맛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산과 함께 있는 인물을 찾아가는 것이 더욱 멋진 등산인 것이다. 천덕봉의 위인 해월 최시형을 만나러 가는 길이 바로 그런 것이고, 어쩌면 수행과 깨달음의 길일 수도 있다.

해월의 묘소가 있는 천덕봉 자락으로 가는 출발지는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이다.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는 ‘사슴이 달렸다’는 한자명 그대로 주록(走鹿)마을, 사슴 마을로 불린다. 서울에서 불과 1시간 거리지만 고라니와 노루가 뛰노는 천혜의 공간으로 두메산골 같다는 느낌이 든다.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마을은 1급수의 맑은 물에 사는 빙어와 가재만 봐도 청정마을임을 실감할 수 있다. 마을 안 금사 저수지와 최시형 묘소, 오부자옹기 등이 자리해 있고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면 세종대왕 능, 목아박물관, 파사산성, 신륵사, 명성황후 생가 등 이름난 문화관광지가 있어 볼거리, 즐길 거리가 풍성한 마을로 유명하다.

주록리 사슴 마을은 69가구에 인구 136명이 살고 있다. 천혜의 자연환경에 아기자기한 시설, 인심 좋은 사람들이 풍성하니 마을은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단순히 보고 즐기는 여행객들이 아닌 산나물 캐기, 감자파종하기, 옥수수 따기 등 계절마다 10여가지의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는 체험형 마을로 인기 만점이다. 특히 이 작은 마을이 더 유명해진 것은 2006년 4월 5일 故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이곳에서 식목행사를 하신 이후이다. 대통령 내외분이 오셔서 나무를 심었으니 산속에 깊숙이 숨겨진 작은 마을은 더없이 큰 영광이고, 이러한 내용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주록마을의 환경과 생태 그리고 인심이 알려진 것이다.

사실 주록마을은 1980년대까지 곰이 마을에 나타날 정도로 산골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전쟁의 피해를 당한 적이 없을 정도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마을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천하 역적이었던 해월 최시형이 죽고 은밀히 묻힐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하늘은 이미 해월이 이곳에 묻힐 것은 예언하였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하늘의 덕이 가장 풍부한 이가 이곳에 묻혔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운명이다.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 나타나는 동학의 기본 사상은 포덕천하에 의한 보국안민의 후천개벽을 전제로 하는 시천주 사상이다. 신앙의 대상을 천주(天主, 天, 上帝, 한울님, 하느님)로 하고 마음을 닦아 정성과 공경 그리고 신의를 갖추는 것이다. 이러한 시천주 사상은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에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제우는 깨달음을 얻은 지 4년 만에 대구 감영에서 사형을 당하였기에 동학의 세력을 크게 키우지 못하였고 이론의 체계를 확실하게 다지지도 못하였다.

동학의 이론 정립과 세력을 확장하여 1894년 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힘을 키운 이는 바로 최제우가 아닌 그의 제자이자 2대 교조인 해월 최시형이었다. 그는 최제우가 강조한 시천주 사상을 뛰어넘어 인간이 곧 하늘이요, 인간을 하늘같이 섬겨야 한다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으로 확대하였다.

최제우에 이루어진 유교와 불교 그리고 선교의 합일은 최시형에 의해 한 단계 높은 동학의 도가 만들어졌다. 『동학사』를 저술한 오지영은 그 동학의 도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동학의 도는 유교 같아도 유교가 아니오, 불교 같아도 불교가 아니요, 도교 같아도 도교가 아니오, 정치 같아도 별다른 정치가 아니오, 다만 사람에게 있는 도를 사람으로 하여금 찾게 하여 사람과 사람이 다 같이 잘 살아나갈 것을 말씀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 곧 사람이 세 가지 잘 먹고 사는 법을 이름이니 한 가지는 그 마음을 잘 먹어야 사는 것이오, 한 가지는 그 기(氣)를 잘 먹어야 사는 것이오, 한 가지는 그 밥을 잘 먹어야 사는 일이라 하는 바이며, 사람이 그 세 가지를 잘 먹고 사는 다하고 보면, 도는 스스로 원만대도(圓滿大道)가 될 것이오, 세상은 비로소 태평천국(太平天國)이 될 것이다.”

즉 동학은 사람을 사람답게 대우하여 사람을 다 같이 잘살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동학을 만들어낸 이가 바로 해월 최시형인 것이고, 그가 바로 여주 금사면의 주록리에 묻혀 있는 것이다.

해월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용살이 등을 하다가 19세 때 밀양 손씨와 결혼하여 처가 근처인 흥해 매곡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28세 때에는 경주 신광면 마복동으로 이사하여 화전민 생활을 하며 마을 집강일을 보다가, 33세 때는 다시 검곡으로 이사했다.

최제우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 6월 동학에 입교했다. 설교를 듣고 의범을 배웠으며 집에 있을 때는 명상과 극기로 도를 닦기에 힘써 한울님의 말씀을 듣는 등 여러 가지 이적을 체험했다고 한다. 1862년 3월 최제우로부터 포교에 힘쓰라는 명을 받고 영해·영덕·상주·흥해·예천·청도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포교를 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863년 7월 북도중주인으로 임명되었고, 8월 도통을 이어받았다. 이때 최제우는 최시형에게 해월(海月)이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아마도 곧 닥칠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미리 후계자를 저?고 이를 선포한 것이다. 그해 12월 최제우가 체포되자 관헌들의 눈을 피해 옥바라지를 하다가 태백산·안동·평해 등지에서 도피생활을 했다. 1864년 3월 최제우가 처형되자 다음해 1월 평해에서 울진으로 거주를 옮겨 최제우의 부인과 아들을 보살폈다. 같은 해 6월 영양으로 이사한 후 수도에 힘써 1년에 4차례씩 49일간 기도했으며 ‘동경대전’·‘용담유사’를 외워 받아쓰게 하여 교도들에게 전했다. 1866년 10월 최제우의 탄신일에 모여든 교도들과 함께 계를 조직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1년에 2차례의 모임을 통해 흩어진 교도들을 재결속시키고 신앙을 다져나갔다. 1871년 최제우의 기일인 3월 10일에 영해부에서 이필제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난에 많은 동학 교도들이 참가하여 이후 다시 심한 탄압을 받게 되자 도피생활을 계속하면서 동학을 재건하고자 노력했다.

1875년 도는 때에 따라 나아가야 한다고 하여 이름을 때를 따라 순응한다는 뜻의 시형으로 바꾸었다. 1878년 접소를 열고 교도들에게 접제의 통문을 돌려 최제우의 뜻에 따라 도를 펼 것을 알렸다. 1880년 5월 인제군에서 ‘동경대전’을 간행했고, 1881년에는 단양 샘골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했다. 1883년에는 목천군에서 ‘동경대전’ 1천여 부를 간행·보급했다. 1884년 교장·교수·도집·집강·대정·중정의 육임제를 정하여 교단을 정비했으며 교세로 확장하였다.

1892년, 1893년 걸쳐 교조신원과 척왜양창의를 내세우면서 시위를 벌였다. 1894년 1월 전봉준이 주도한 갑오농민전쟁에 처음에는 때가 아니라 하여 반대하다가 5월에 전주화약을 맺고 일단 해산한 농민군이 10월 다시 봉기할 때 전체 동학교도에게 총기포령을 내렸다. 1894년 12월말 갑오농민전쟁이 진압되자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힘을 기울였고 1897년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했다. 1898년 3월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월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시신은 그 후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천덕봉으로 옮겨졌는데, 그곳은 그가 ‘유령에게 빼앗겼던 밥그릇을 되찾아 대낮의 산 사람 앞으로 옮겨놓는, 역사를 한 이천군 설성면 앵산동에서 멀리 바라다보이는 곳이다. 그 바로 아래에는 손병희의 여동생이며 세 번째 부인인 손시화의 묘가 나란히 놓여 있다.

일제강점기에 1천만에 이르던 신도가 이제 50여만명에 이르지 않은 천도교의 쇠잔함 때문인지 해월의 묘소 역시 애잔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아주 진한 기(氣)가 나옴을 느낄 수 있다. 해월의 묘소에서 인간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다볼 수 있다. 사람을 사람답게 대우하고 살게 하자는 그의 외침이 비록 궁벽진 산골에 있다 해도 포효처럼 온 산하에 진동하고 있다.

김산(홍재인문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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