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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칼럼

[매경시평] 제2의 가쓰라 태프트 밀약인가

입력 : 
2019-07-29 00:06:01
수정 : 
2019-07-31 15: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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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한국 사법부의 일제징용 배상 판결을 수출제한 조치로 보복한 것은 두 나라 사이에 묵시적으로 존중되었던 정경분리원칙을 깬 것이어서 이례적이다. 수출제한 조치가 한국 경제의 중추인 반도체 산업 붕괴를 겨냥한 것이라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보기에는 비례의 원칙을 벗어나 지나치게 강한 조치여서 배경에 의구심이 생긴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 경제의 급소에 일격을 가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베 신조 정부는 일본을 태평양전쟁 전범국가에서 미국의 동맹국가로 격상하는 업적을 쌓았다. 중국의 군사적 굴기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역할이 필요한 미국과 다시 군사강국 반열에 오르길 열망하는 일본 우익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이다.

일본의 지위가 격상된 후 집단적 자위권에 의한 일본군 한반도 전개 가능성이 제기되었을 때 '한국 정부의 허락 없는 일본군 한반도 전개는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지만 일본과 미국의 반응은 원론적이며 모호했었는데, 최근 '주한미군 2019전략 다이제스트' 보고서에서는 '일본과의 전력협력'을 언급하고 있어 더 늦기 전에 미국과 일본 사이에 어떤 내용의 합의가 있었는지 철저하게 따져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순신 장군의 12척 배와 전라남도가 나라를 구했다' 하고 조국 전 민정수석은 동학혁명군의 죽창가를 언급하며 강경 대응 의지를 다진다. 세계가 놀란 고속성장으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된 자긍심과 정부의 과대선전이 어우러져 기술 수준이 매우 높은 것으로 오해하면서 산업전문가를 제외한 국민은 '한국 산업의 기술적 약점과 높은 대일 의존도'를 모르고 있었다.

일본의 의도가 일제징용 배상 판결을 계기로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붕괴시키고 나아가 한국 산업을 무너뜨리는 것이라면 최종 목표는 한국 경제를 일본 경제에 종속시키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미국과 일본이 일본 재무장에 합의하면서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역할을 일본에 부여했다면, 한국 산업이 독자적으로 번영하면서 중국 산업에 부품과 반제품을 공급하는 모습을 미국이 불편하게 바라볼 수 있다. 정한론의 주창자 요시다 쇼인을 받드는 일본 우익이 이 공간을 노리고 파고든 것일 수 있다.

한국 정부는 어정쩡한 태도로 일관하는 미국 정부를 향해 중재를 부탁할 게 아니라 수출제한 조치가 제2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결과물로서 '한국을 일본의 영향권 안에 묶어두려는 계획'의 출발점인지 집요하게 물어야 한다. 아니라는 답을 받으면 수출제한 조치는 한미 나아가 한·미·일 안보 공조를 위협하는 것임을 설명하고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한국 정부와 정치인들은 앞으로 일거수일투족을 신중히 해야 한다. 특히 미국이 일본 우익의 왜곡된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도록 하려면 한미동맹에 금이 가지 않게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을미사변 때 고종임금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자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던 영국이 조선을 친러세력으로 분류한 것이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갈랐다는 관점에 주목해야 한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조선을 점령한 것은 일본을 러시아 견제 세력으로 키운 당시 서구세계의 리더 영국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12척의 배로 300척이 넘는 일본 함대를 격파했는데 애국심과 뛰어난 전술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판옥선이 '제자리 360도 회전'과 '전방위 함포사격'이 가능한 첨단 전함이었고, 세계 최초의 산탄대포인 조란탄과 로켓포의 원조인 신기전으로 무장하여 인명 살상 능력과 원거리 타격 능력이 월등한 기술 우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내가 옳더라도 힘을 기르고 준비되어 있기 전에 강한 자와 대립하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정연하게 입장을 밝히되, 아니꼽고 자존심 상해도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면 강한 자의 억지를 용인하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 진실로 현명한 자의 선택이다. 강한 자를 향한 결기는 일시적으로 멋지게 보일지 모르나 자존심을 접은 타협보다 훨씬 더 큰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

[최중경 공인회계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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