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철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홍성철의 까칠하게 세상읽기] 차분한 대응이 克日이다](http://contents.dt.co.kr/images/201907/2019072902102269660001[1].jpg "[홍성철의 까칠하게 세상읽기] 차분한 대응이 克日이다")
1000년 전 역사의 진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말은 일본이 왜 한국을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는지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던져준다. 먼저 한국 대법원의 일제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지속적으로 부인하면서도 신뢰성을 잃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또 과거 일본이 지배했던 전자제품과 반도체 등에서 세계 최고기술력을 가진 한국기업의 성장판을 무너뜨리기 위해 치밀하게 기획되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부에서는 일본의 수출규제가 국내 정치용이라면서 일본 참의원선거 이후 국면이 달라질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하지만 선거 이후에도 일본은 당초 입장을 철회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다음 달 2일 열리는 각료회의에 한국을 우방국에서 제외하는 개정안을 상정해 처리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만약 우리나라가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되면 식품과 목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일본산 물품을 개별허가를 받고 수입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청와대의 입장은 단호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2일 전남도청을 방문 "전남 주민들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불과 12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며 결의를 다졌다. 조국 민정수석은 이튿날 페이스북을 통해서 "SBS 드라마 '녹두꽃' 마지막회를 보는데, 한참 잊고 있던 이 노래(죽창가)가 배경음악으로 나왔다"며 글을 올렸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의병들의 노래인 죽창가를 언급한 것은 외교적 타협의 가능성을 접고, 일본과 한번 붙어보자는 심사로 보인다. 조 수석은 18일에는 "중요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 '좌냐 우냐'가 아니라, '애국이냐 이적(利敵)이냐'"라고 적으며 단결된 행동을 주문하였다.
우리 정부의 감정적 대응도, 일본 정부와의 강대강 충돌도 바람직하지 않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밝히듯 '한일 갈등은 윈-윈(win-win)게임이 아닌 루즈-루즈(lose-lose) 게임'이다. 일본은 부품산업을 무기화하면서 국제사회에 자국의 신뢰도를 스스로 깎아버렸다. 향후 일본과 교역하는 외국기업들은 일본의 변심에 대비해 또 다른 물품 공급처를 염두에 둬야 한다.
우리 정부는 이번 기회에 소재 산업을 집중육성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꼭 필요하지만 단기 처방으로는 한계가 있다. 소재부품산업이 단기간에 육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 반도체, 전자제품, 스마트폰 공장의 일부라도 멈춰 서면 천문학적인 경제적 손실이 초래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제 때에 제품 생산을 못하면서 납품 기일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다. 기업의 신용하락은 돈으로 만회할 수 없다. 편협한 일본의 도발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그러한 변명은 국제사회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책임은 국내 기업들의 몫이다.
민간영역에서는 일본상품 불매 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일본상품의 불매운동과 일본관광 자제는 일본 국민들에게 무역상대국으로서 한국의 존재를 상기시킬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처음부터 그러한 반발을 예상했고, 감내할 준비도 되어 있을 것이다. 반일(反日)의 분위기 속에서도 잊어서 안 되는 것은 일본상품을 수입해서 파는 사람들, 일본 관광을 알선하는 여행사 직원들, 이들 역시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사실이다. 강제징용되었던 어르신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국민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는 것도 정부의 몫이다.
100년 전 한반도를 침탈했던 일본은 언젠가부터 우방으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역시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늦게나마 일본의 실체를 국민들이 확인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필요한 것은 감정적 맞대응이 아니라, 차분하고 치밀하게 힘을 길러 일본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의 다원화된 목소리를 친일행위로, 이적행위로 매도해서는 안된다.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는 언제나 '진실'(The first casualty is the truth)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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