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이라 하니까 미모가 뛰어났을 거라 지레짐작하기 쉽고 손병희가 풍류남아로 소문이 났던 사람이니 그런 미모에 혹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산월은 미모가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 1936년에 6월에 나온 <삼천리> 잡지에는 주옥경에 대해서 "얼굴은 비록 잘나지 못한 편이나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고 더구나 마음씨가 곱고 태도가 아련해서 장안의 수많은 남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라고 쓰고 있다. 손병희는 원래 서화와 음악을 매우 좋아해서 늘 가까이했다고 하니 주옥경의 그런 재능에 반했던 것이 틀림없다. 당시 손병희는 일제의 철저한 감시 때문에 파락호처럼 행동하면서 밖으로는 낭비벽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집안에서는 검약하고 절제된 생활을 했다.
민족대표가 파고다 공원에 나타나지 않고 태화관에서 총독부에 전화 통지를 하고 잡혀간 것에 대해 비겁하다는 인식도 있는데, 당시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 기꺼이 감옥을 가는 길을 택한 그 용기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본다. 민족대표 중 두 분이 옥사를 했고 손병희도 건강을 크게 해쳐서 출옥한 뒤에 사망하고 말았다.
큰 교세를 자랑하던 천도교도 이 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보성학교(고려대)와 동덕여학교(동덕여대)를 포기해야 했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보성사인쇄소도 원인 모를 불로 소실됐다. 불이 났는데 소방대는 불 끄는 시늉만 하다가 전소시켜버렸던 것이다.
민족대표들은 한 평 반의 독방에서 면회도 불허된 상태로 지내야 했다. 운동 시간도 단 10분이었고 겨울에는 아예 그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민족대표들끼리 만나지 못하게 따로 불러냈다. 손병희는 만성위장병이 있었기 때문에 주옥경은 손병희의 건강이 너무나 걱정스러웠다. 그 때문에 주옥경은 가회동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서대문 형무소까지 날라왔다. 처음에는 사식 반입 자체도 허용되지 않았다. 사식 반입이 허용된 뒤에 주옥경은 가까운 곳에서 옥바라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옥사한 시신을 임시 보관하는 무너져가는 초가집 하나를 빌려 손병희의 옥바라지를 시작했다. 바로 이것이 서대문 형무소 옥바라지 마을의 시초였던 것 같다. 주옥경의 눈물겨운 옥바라지에도 불구하고 손병희는 11월 28일에 뇌일혈로 쓰러졌다. 반신불수 상태에서도 수감 생활을 계속 하다가 병세가 극도로 악화된 다음해 10월 22일에야 병보석으로 출옥하게 됐다. 이후 병석에 있다가 2년 후인 1922년 5월에 별세했다.
29세에 남편을 잃은 주옥경은 그대로 좌절하지 않았다. 1924년 주옥경은 손병희의 딸 손광화 등과 함께 내수단(內修團)이라는 천도교 여성단체를 만들었다. 1922년에 결성된 대한여자기독청년회(YWCA 전신)에 이은 두 번째 여성단체였다. 주옥경은 내수단의 의의를 이렇게 말한다.
"참말 우리 여자들은 여태까지 맹목적 신앙이었습니다. 남자의 지배만 받아 단순히 가장이 있으니까 자기도 있다는 외에는 아무런 주의(主義)도 주장도 없었습니다. (중략) 우리도 이제로부터 남들과 같이 사람다운 사람노릇을 하기 위하여 참되고 가치 있는 신앙의 길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리하자면 무엇보다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알려면 배워야 하겠습니다."
이 내수단은 이후 이름을 몇 차례 바꿔 지금은 천도교여성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주옥경은 내수단을 통해서 여성의 권리 향상을 위해 노력했고 잡지를 발행하여 계몽운동을 펼쳤다. 미신 타파, 문맹 퇴치, 남녀평등운동을 펼친 선구자가 주옥경이다. 내수단은 야학과 명사 초빙 강연을 통해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잡지와 책자도 발간하여 여성의 지위 향상에 힘을 기울였다. 주안점은 미신 타파와 생활 개선에 두고 있었다.
주옥경은 1927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손병희의 셋째 사위인 소파 방정환의 권고에 의한 것이었다. 도쿄에서도 내수단 도쿄지부를 조직했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고 3년 만에 졸업해 귀국할 수 있었다. 주옥경은 신학문을 배워서 내수단을 통한 여성운동에 더욱 앞장섰다. 여성운동에 대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주옥경은 천도교가 여성 문제를 선언적인 차원에서만 다루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여자들이 비록 실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남자의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모든 일을 미루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주옥경의 이런 여성운동에 대한 매진은 당시에 큰 화제였다. 주옥경은 당대에도 존경받는 여성지도자였고 해방 후에도 천도교를 이끌며 광복회 부회장, 천도교 종법사 등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82년에 88세로 별세했다.
뜻밖에도 초기 여성운동의 지도자였던 주옥경에 대한 연구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탓에 이처럼 고난의 시대를 살아간 여성지도자를 안주 하나 더 준다고 호객한 마담이라고 빈정대는 말이 나오게 되는 모양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문영 역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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