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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 선구자 주옥경 누가 기생이라 폄하하나

이문영 기자
입력 : 
2017-05-15 15: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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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2월 24일 경향신문 기사. 주옥경이 73세 때의 기사이다.
[물밑 한국사-47] 3·1운동 민족대표가 태화관에 모여서 술집 마담 시중을 받으며 낮술을 먹었다는 식의 인식이 있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손병희 부인인 주옥경이 기생 출신이라는 비하 의식이 있는 것은 더욱 서글픈 일이다. 주옥경이 기생 출신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3·1운동 때는 이미 손병희와 혼인해 더 이상 기생이 아니었다. 주옥경은 3·1운동을 위한 비밀회합을 할 때마다 기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망을 보는 일을 하는 등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었던 여걸이었다. 1914년 5월 16일자 매일신보에는 손병희와 주옥경의 이야기가 기사로 실려 있다. 기사는 손병희가 풍류 괴수라고 비하하는 내용이지만 주옥경에 대해서는 "그림도 잘 그리고 가무에도 칭찬 듣는 주산월"이라 묘사하고 있다. 주옥경의 기명이 주산월이었다. 기사 내용 중에 주산월은 무부기조합을 창설하여 조합장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기사에는 주산월이 천도교의 사모(師母)가 되었다고 나오므로 1914년에 이미 주옥경은 손병희의 부인이 되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천도교 측에서 나온 <수의당 주옥경>(천도교여성회본부)에서는 1915년에 결혼을 했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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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여성회에서 2005년에 펴낸 주옥경 전기집. 여성운동의 선구자 주옥경의 일대기가 정리되어 있다.
주옥경은 1894년 12월에 태어나 어떤 연유로 어떻게 기생이 됐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녀는 14세에 평양의 기생학교에 들어가 여러 기예를 배웠다. 특히 그림과 노래, 춤에 소질이 있었다는 것은 유명하다. 19세가 된 1912년 5월 서울로 올라와 명월관에서 근무하게 됐다. 명월관은 1918년에 화재로 불 타 없어졌고 명월관 주인이었던 안순환은 순화궁 터를 매입해서 태화관이라 이름 짓고 새로 개업했다. 이 태화관에서 민족대표가 회동을 가졌던 것이다. 주옥경은 나이 어린 후배들을 따뜻하게 잘 보살피는 걸로 유명했다. 특히 그녀는 기생들이 기둥서방을 두고 행세하며 기둥서방이 없는 기생들을 핍박하는 것을 참지 못하여 1913년에 기둥서방이 없는 기생 모임, 즉 무부기(無夫妓) 조합을 만들었다. 그 자신이 초대 회장이 되었다. 조합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인원을 채우려고 기생의 어머니 이름까지 빌려야 했다. 주옥경이 만든 무부기조합은 뒤에 대정권번으로, 그리고 다시 조선권번으로 발전하여 3대 기생조직 중 하나로 발전했다.

기생이라 하니까 미모가 뛰어났을 거라 지레짐작하기 쉽고 손병희가 풍류남아로 소문이 났던 사람이니 그런 미모에 혹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산월은 미모가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 1936년에 6월에 나온 <삼천리> 잡지에는 주옥경에 대해서 "얼굴은 비록 잘나지 못한 편이나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고 더구나 마음씨가 곱고 태도가 아련해서 장안의 수많은 남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라고 쓰고 있다. 손병희는 원래 서화와 음악을 매우 좋아해서 늘 가까이했다고 하니 주옥경의 그런 재능에 반했던 것이 틀림없다. 당시 손병희는 일제의 철저한 감시 때문에 파락호처럼 행동하면서 밖으로는 낭비벽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집안에서는 검약하고 절제된 생활을 했다.

민족대표가 파고다 공원에 나타나지 않고 태화관에서 총독부에 전화 통지를 하고 잡혀간 것에 대해 비겁하다는 인식도 있는데, 당시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 기꺼이 감옥을 가는 길을 택한 그 용기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본다. 민족대표 중 두 분이 옥사를 했고 손병희도 건강을 크게 해쳐서 출옥한 뒤에 사망하고 말았다.

큰 교세를 자랑하던 천도교도 이 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보성학교(고려대)와 동덕여학교(동덕여대)를 포기해야 했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보성사인쇄소도 원인 모를 불로 소실됐다. 불이 났는데 소방대는 불 끄는 시늉만 하다가 전소시켜버렸던 것이다.

민족대표들은 한 평 반의 독방에서 면회도 불허된 상태로 지내야 했다. 운동 시간도 단 10분이었고 겨울에는 아예 그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민족대표들끼리 만나지 못하게 따로 불러냈다. 손병희는 만성위장병이 있었기 때문에 주옥경은 손병희의 건강이 너무나 걱정스러웠다. 그 때문에 주옥경은 가회동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서대문 형무소까지 날라왔다. 처음에는 사식 반입 자체도 허용되지 않았다. 사식 반입이 허용된 뒤에 주옥경은 가까운 곳에서 옥바라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옥사한 시신을 임시 보관하는 무너져가는 초가집 하나를 빌려 손병희의 옥바라지를 시작했다. 바로 이것이 서대문 형무소 옥바라지 마을의 시초였던 것 같다. 주옥경의 눈물겨운 옥바라지에도 불구하고 손병희는 11월 28일에 뇌일혈로 쓰러졌다. 반신불수 상태에서도 수감 생활을 계속 하다가 병세가 극도로 악화된 다음해 10월 22일에야 병보석으로 출옥하게 됐다. 이후 병석에 있다가 2년 후인 1922년 5월에 별세했다.

29세에 남편을 잃은 주옥경은 그대로 좌절하지 않았다. 1924년 주옥경은 손병희의 딸 손광화 등과 함께 내수단(內修團)이라는 천도교 여성단체를 만들었다. 1922년에 결성된 대한여자기독청년회(YWCA 전신)에 이은 두 번째 여성단체였다. 주옥경은 내수단의 의의를 이렇게 말한다.

"참말 우리 여자들은 여태까지 맹목적 신앙이었습니다. 남자의 지배만 받아 단순히 가장이 있으니까 자기도 있다는 외에는 아무런 주의(主義)도 주장도 없었습니다. (중략) 우리도 이제로부터 남들과 같이 사람다운 사람노릇을 하기 위하여 참되고 가치 있는 신앙의 길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리하자면 무엇보다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알려면 배워야 하겠습니다."

이 내수단은 이후 이름을 몇 차례 바꿔 지금은 천도교여성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주옥경은 내수단을 통해서 여성의 권리 향상을 위해 노력했고 잡지를 발행하여 계몽운동을 펼쳤다. 미신 타파, 문맹 퇴치, 남녀평등운동을 펼친 선구자가 주옥경이다. 내수단은 야학과 명사 초빙 강연을 통해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잡지와 책자도 발간하여 여성의 지위 향상에 힘을 기울였다. 주안점은 미신 타파와 생활 개선에 두고 있었다.

주옥경은 1927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손병희의 셋째 사위인 소파 방정환의 권고에 의한 것이었다. 도쿄에서도 내수단 도쿄지부를 조직했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고 3년 만에 졸업해 귀국할 수 있었다. 주옥경은 신학문을 배워서 내수단을 통한 여성운동에 더욱 앞장섰다. 여성운동에 대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주옥경은 천도교가 여성 문제를 선언적인 차원에서만 다루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여자들이 비록 실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남자의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모든 일을 미루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주옥경의 이런 여성운동에 대한 매진은 당시에 큰 화제였다. 주옥경은 당대에도 존경받는 여성지도자였고 해방 후에도 천도교를 이끌며 광복회 부회장, 천도교 종법사 등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82년에 88세로 별세했다.

뜻밖에도 초기 여성운동의 지도자였던 주옥경에 대한 연구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탓에 이처럼 고난의 시대를 살아간 여성지도자를 안주 하나 더 준다고 호객한 마담이라고 빈정대는 말이 나오게 되는 모양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문영 역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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