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은 어떻게 외울까 ...소춘 김기전/신인간(1942.3)
본문
주문은 어떻게 외울까
-소춘 김기전 / 신인간 (1942.3)
-겨울밤과 수도-
‘도’는 그 성질상 借啣(차함, 이름만 빌린 벼슬)도 아니요 명예직도 될 수 없다. 닦으면 닦으니 만큼 도가 있고, 아니 닦으면 없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도가 있으면 도인이요, 도가 없으면 도인이 아니다. 여기에 다른 말을 붙일 여지가 없다.
정성스럽게 오관을 실행하는 것은 우리가 도를 닦는 차제이다. 그런 중 그 오관에서 첫째를 꼽는 이 ‘주문’에서 능히 힘을 얻는다면 우리의 수도는 어느덧 한 지경을 체험한 것으로서, 승당입실(升堂入室)은 가히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문을 외우는 이는 많되 주문의 힘을 얻은 이는 적으며, 또 약간 힘을 얻는 이는 있으되 구경(究竟)의 도성덕립을 증험하는 이는 적으니 이 필연 무슨 까닭이 있는 일은 아닌가?
나의 적은 경험에 의하면 주문을 외우는 데는 반드시 그 방법이 있을지니 이 방법은 무릇 수도에 지극한 남녀 도우 각자가 그 묵묵한 중에서 스스로 요회(了會)하고, 실행하며 있을 것을 믿으나 우선 내가 증험한 몇 가지를 적어서 한 참고재료를 짓고자 한다.
우리가 주문을 외우려 할 적에 맨 먼저 가져야 할 것은 이 ‘송주’에 대한 의욕(意欲)이다.
어떻게 하든지 이 주문 속에 씌어있는 그대로의 지기대강을 얻고 내유신령을 증험하고 지화지기(至化至氣)를 체득해보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욕이다.
그래서 이 삼칠(三七)자를 체험해 보는 일을 자기 평생의 일대사(一大事)로 꼭 인정하는 그것이다. 삼칠자의 체험은 곧 시천주의 체험이요 시천주의 체험은 곧 내유신령의 무궁생명의 체득이니 이것이 인간 일생의 큰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보통사람은 물론이요, 도를 닦는 사람 중에도 이 시천주의 공부에 높은 값을 놓지 않고, 그저그저 한 보통의 심정으로써 대하려 하니 이것이 수도에 증험이 없고 성취가 없는 바이다.
대개 큰일은 큰일로 대하여야 하고 귀한 물건은 귀한 값으로 이바지하여야 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반응이 없다. 절대로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문을 외우려 할 때에는 마치 대제사장(大祭司長)이 폐백을 받들고 성소(聖所)에 들어 대제(大祭)를 받듬과 같은 지극 경건한 마음으로써 일체를 차단하고 오로지 한울님을 모시는 한울님 뿐의 세계에 드는 강한 심고를 행하여써 한울님의 심령과 친히 만나고 직접하고 교통하여 그 지기와 그 영덕(靈德)을 곧곧 받아 내리는 심태(心態-즉 분위기)를 지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수심정기하고 눈감고 손길 맞잡고 꼭 바로 앉아서 일단 주문을 외우기 시작할 때에는 그야말로 심신부동(心身不動)- 깊은 ‘정’(深侍定에) 들어야 할 것이다.
현송이든 묵송이든 여기에서 할, 단 한 가지 일은 무엇인고하면 꼭꼭 구절구절 주문의 뜻을 일념으로 생각하는 그것이다.
주문을 외는 온 비결은 전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이와 같이 그 구절구절에 있어 빼지 말고 뜻을 생각하면서 읽되 그 외우는 조자(調子,가락 리듬)나 호흡에 있어서도 이리저리 변동을 하지 말고 꼭 한 모양으로 일사불란하게 그것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러하면
한 반시간 내지 한 시간 안에 무슨 모양으로나 약간의 증험이 있을 것이다.
어찌하여 ‘송주’에는 반드시 구절구절이 그 뜻을 생각하고 또 모든 태세를 한 모양으로 되풀이하되 그것을 엄격히 지켜야 하는가 하면 우리가 주문을 외우는 것은 첫째가 정신통일이요, 또 정신을 통일하되 내유신령의 한울님께로 통일하자는 것이다.
한울님께로 통일만 되면, 곧 한울님 뿐의 세계에 들기만 하면 한울님의 일체는 곧 나에게 열릴 것이다.
그런데 이 정신통일은 너무 길지 아니한 같은 생각(念)을 엄정하게 되풀이하는 것 밖에 더 이상 가는 묘법은 없다.
우리가 기차를 타보면 그 기차 바퀴가 같은 조자로 굴러가는 소리에 우리의 정신은 통일되어 그 덜거덕하는 소리 속에서도 우리는 잠이 들다가 그만 차가 정거하여 그 덜거덕 소리가 딱 그치면 우리는 도리어 잠을 깨고 만다. 이로써 보아도 같은 현상이 엄정하게 계속되면 우리의 정신은 통일되고야 만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문을 읽는 것은 정신을 통일하되 잠을 자기 위함이 아니요, 한울님께 합정(合定)되기 위한 정신통일이므로 지위천주의 주문 뜻을 되풀이함으로써 나의 일념을 통일 집중한다는 것이다.
주문의 뜻을 생각지 않고 그저 마음을 비우는 무사무념으로 읽는 것이 어떠하냐 하는 편도 있다. 불교의 ‘선’에는 이 무사무념의 방법을 취하는 것이 있으나 이른바 ‘지관(止觀)이 이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어렵다. 무사무념을 하려 할수록 더 여러 가지 생각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어떤 주장되는 생각을 막 세워가지고 그 생각만을 빈틈없이 되풀이함으로써 그 여타의 모든 잡념을 일어날 여지가 없이 하는 것이 가장 묘하다. 도를 닦는 중에 제일 곤란한 것은 이 잡념이다.
주문을 읽을 때에 꼭꼭 주문 뜻을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만 어느 짬에 또 잡념이 들어 올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때에는 주문 뜻을 생각하되 그 대체만을 생각하지 말고 아주 구체적으로 생각하되
’지기금지‘라 하면 ’허령창창 무사불섭 무사불명‘ 까지를 생각하고, ’시천주‘라 하면 적어도 ’내유신령 외유기화‘까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하노라면 나의 생각은 차츰 본길로 들어서서 그 주문 생각이 점차로 간단해지며 필경은 주문생각을 잊어버리는 정신통일의 지경, 곧 ’무아(무아)의 지경에 들어서는 것이다. 이 ‘무아’의 지경은 곧 한울님에 합정하는 지경인데 이 지경이 가까워 오려하는 그때면 벌써 ‘지기’가 몸에 내리기 시작하여 여기에서 점차로 더 나아가서 완전히 무아지경에 들면, 여기에서는 한울님의 영광이 빛나고, 한울님의 그 ‘도’. 그 ‘지혜’가 받아지는 것이다.
이 주문을 읽을 때에 가장 어려운 관문은 잡념이 떨어지기까지의 동안이다. 여기에서 스승님이 말씀하신 작심(作心)이 필요 된다. 일대사를 경영하는 강한 의욕으로써 그야말로 주문 뜻을 염념불망하되 그래도 정히 안되면 다시 수심정기하고 지극한 심고를 드리고 다시 외우기를 시작하기로 하며, 또 어떤 때에는 주문해석(지자는 극언지위지.....지화지기 지어지성)정문을 3회쯤 외어 무슨 모양으로든지 나의 일념을 주문에서 떠나지만 않게 하면 반시간 내지 한 시간 안에 정신은 그만 통일되고 말며, 한번 길만 잡히면 그 다음은 퍽 수월한 것이다. 수월하다기 보다도 욕파불능으로 주문 몇 번만 읽으면 그만 그 지경에 들어서는 것이다.
주문을 참스럽게 공부하는 중에는 접령상태(氣化靈化의 상태)는 반드시 만나게 되는데 이 지경이 심히 묘하다. 사람 중에는 혹 허령을 염려하는 이가 있으나 이것은 쓸데없는 염려이다. 꼭 주문의 정상한 뜻을 생각하면서 정신이 통일순화 될 때에 그 밖에의 다른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오직 자연스럽고 성스런 한울님의 지기가 내리고, 한울님의 영덕이 드러나는 영광이 있는 것뿐이다. 이 주문공부에 있어서 하는 말은 몹시 자상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보다 도의 증험이 높은 이에게 맡기며, 또는 각자의 차근한 노력에 맡기고,
‘겨울밤과 수도’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 쓰고자 한다.
대체 우리에게 밤이 있고 또 수면이 있음이여, 참으로 다행하도다. 우리는 매일매일 이 밤을 맞으며 이 수면을 즐기어 이 복잡한 인생들로서도 매일 아침 한울님의 영광 속에서 다시 남을 얻는도다.
종일 부산하던 오관의 지각.감능을 딱 폐쇄하고 나의 일체를 오직 나의 신령에 전탁하고 깊은 수면에 들어 호호탕탕히 하룻밤을 치르는 것은 본능적으로 우리에게 실천되는 큰 수행이다. 옛 성인은 이것을 야기(夜氣)라 하여 이것의 신성을 고조하였거니와 우리가 다시 생각할 것은 수면이 우리에게 한 휴식이요 수행인 동시에 수면을 하든 아니하든 ‘밤’ 그 자체가 우리에 대한 무한한 안식이요 수양이다. 밤의 고요한 신비와 허명(虛明)은 우리를 모두 스스로 ‘무아’의 혼연의 지경으로 인도함이 있다.
그러므로 밤 한 시간의 송주는 그 효과에 있어 낮의 두 세 시간의 송주를 당하고 남음이 있다. 어두워가는 황혼, 밝아오는 새벽은 특히 정추가 있는 바이거니와, 첫 한잠을 자고나서의 깨어지는 그 시간(대개로 자정시간)은 정신통일이 유난하게 잘 되고 신명의 감응이 몹시 빠른 시간으로서 약간 수행에 적공이 있는 사람이면 이 시간의 송주에는 곧 지기가 강화하고 휘연한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복잡 다사한 인간으로서 가장 쉬이 큰 도의 지경을 영험할 시간, 밤을 참으로 참으로 신령하게 맞음이 있을지어다.
격언 한마디: 세상의 많은 재능은 용기 결핍 때문에 항상 그 할 바를 못하고 마치는 것이다.
참고 : <소춘 김기전 선생문집> 에서 옮김 (현대문으로 번역)
-소춘 김기전 / 신인간 (1942.3)
-겨울밤과 수도-
‘도’는 그 성질상 借啣(차함, 이름만 빌린 벼슬)도 아니요 명예직도 될 수 없다. 닦으면 닦으니 만큼 도가 있고, 아니 닦으면 없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도가 있으면 도인이요, 도가 없으면 도인이 아니다. 여기에 다른 말을 붙일 여지가 없다.
정성스럽게 오관을 실행하는 것은 우리가 도를 닦는 차제이다. 그런 중 그 오관에서 첫째를 꼽는 이 ‘주문’에서 능히 힘을 얻는다면 우리의 수도는 어느덧 한 지경을 체험한 것으로서, 승당입실(升堂入室)은 가히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문을 외우는 이는 많되 주문의 힘을 얻은 이는 적으며, 또 약간 힘을 얻는 이는 있으되 구경(究竟)의 도성덕립을 증험하는 이는 적으니 이 필연 무슨 까닭이 있는 일은 아닌가?
나의 적은 경험에 의하면 주문을 외우는 데는 반드시 그 방법이 있을지니 이 방법은 무릇 수도에 지극한 남녀 도우 각자가 그 묵묵한 중에서 스스로 요회(了會)하고, 실행하며 있을 것을 믿으나 우선 내가 증험한 몇 가지를 적어서 한 참고재료를 짓고자 한다.
우리가 주문을 외우려 할 적에 맨 먼저 가져야 할 것은 이 ‘송주’에 대한 의욕(意欲)이다.
어떻게 하든지 이 주문 속에 씌어있는 그대로의 지기대강을 얻고 내유신령을 증험하고 지화지기(至化至氣)를 체득해보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욕이다.
그래서 이 삼칠(三七)자를 체험해 보는 일을 자기 평생의 일대사(一大事)로 꼭 인정하는 그것이다. 삼칠자의 체험은 곧 시천주의 체험이요 시천주의 체험은 곧 내유신령의 무궁생명의 체득이니 이것이 인간 일생의 큰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보통사람은 물론이요, 도를 닦는 사람 중에도 이 시천주의 공부에 높은 값을 놓지 않고, 그저그저 한 보통의 심정으로써 대하려 하니 이것이 수도에 증험이 없고 성취가 없는 바이다.
대개 큰일은 큰일로 대하여야 하고 귀한 물건은 귀한 값으로 이바지하여야 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반응이 없다. 절대로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문을 외우려 할 때에는 마치 대제사장(大祭司長)이 폐백을 받들고 성소(聖所)에 들어 대제(大祭)를 받듬과 같은 지극 경건한 마음으로써 일체를 차단하고 오로지 한울님을 모시는 한울님 뿐의 세계에 드는 강한 심고를 행하여써 한울님의 심령과 친히 만나고 직접하고 교통하여 그 지기와 그 영덕(靈德)을 곧곧 받아 내리는 심태(心態-즉 분위기)를 지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수심정기하고 눈감고 손길 맞잡고 꼭 바로 앉아서 일단 주문을 외우기 시작할 때에는 그야말로 심신부동(心身不動)- 깊은 ‘정’(深侍定에) 들어야 할 것이다.
현송이든 묵송이든 여기에서 할, 단 한 가지 일은 무엇인고하면 꼭꼭 구절구절 주문의 뜻을 일념으로 생각하는 그것이다.
주문을 외는 온 비결은 전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이와 같이 그 구절구절에 있어 빼지 말고 뜻을 생각하면서 읽되 그 외우는 조자(調子,가락 리듬)나 호흡에 있어서도 이리저리 변동을 하지 말고 꼭 한 모양으로 일사불란하게 그것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러하면
한 반시간 내지 한 시간 안에 무슨 모양으로나 약간의 증험이 있을 것이다.
어찌하여 ‘송주’에는 반드시 구절구절이 그 뜻을 생각하고 또 모든 태세를 한 모양으로 되풀이하되 그것을 엄격히 지켜야 하는가 하면 우리가 주문을 외우는 것은 첫째가 정신통일이요, 또 정신을 통일하되 내유신령의 한울님께로 통일하자는 것이다.
한울님께로 통일만 되면, 곧 한울님 뿐의 세계에 들기만 하면 한울님의 일체는 곧 나에게 열릴 것이다.
그런데 이 정신통일은 너무 길지 아니한 같은 생각(念)을 엄정하게 되풀이하는 것 밖에 더 이상 가는 묘법은 없다.
우리가 기차를 타보면 그 기차 바퀴가 같은 조자로 굴러가는 소리에 우리의 정신은 통일되어 그 덜거덕하는 소리 속에서도 우리는 잠이 들다가 그만 차가 정거하여 그 덜거덕 소리가 딱 그치면 우리는 도리어 잠을 깨고 만다. 이로써 보아도 같은 현상이 엄정하게 계속되면 우리의 정신은 통일되고야 만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문을 읽는 것은 정신을 통일하되 잠을 자기 위함이 아니요, 한울님께 합정(合定)되기 위한 정신통일이므로 지위천주의 주문 뜻을 되풀이함으로써 나의 일념을 통일 집중한다는 것이다.
주문의 뜻을 생각지 않고 그저 마음을 비우는 무사무념으로 읽는 것이 어떠하냐 하는 편도 있다. 불교의 ‘선’에는 이 무사무념의 방법을 취하는 것이 있으나 이른바 ‘지관(止觀)이 이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어렵다. 무사무념을 하려 할수록 더 여러 가지 생각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어떤 주장되는 생각을 막 세워가지고 그 생각만을 빈틈없이 되풀이함으로써 그 여타의 모든 잡념을 일어날 여지가 없이 하는 것이 가장 묘하다. 도를 닦는 중에 제일 곤란한 것은 이 잡념이다.
주문을 읽을 때에 꼭꼭 주문 뜻을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만 어느 짬에 또 잡념이 들어 올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때에는 주문 뜻을 생각하되 그 대체만을 생각하지 말고 아주 구체적으로 생각하되
’지기금지‘라 하면 ’허령창창 무사불섭 무사불명‘ 까지를 생각하고, ’시천주‘라 하면 적어도 ’내유신령 외유기화‘까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하노라면 나의 생각은 차츰 본길로 들어서서 그 주문 생각이 점차로 간단해지며 필경은 주문생각을 잊어버리는 정신통일의 지경, 곧 ’무아(무아)의 지경에 들어서는 것이다. 이 ‘무아’의 지경은 곧 한울님에 합정하는 지경인데 이 지경이 가까워 오려하는 그때면 벌써 ‘지기’가 몸에 내리기 시작하여 여기에서 점차로 더 나아가서 완전히 무아지경에 들면, 여기에서는 한울님의 영광이 빛나고, 한울님의 그 ‘도’. 그 ‘지혜’가 받아지는 것이다.
이 주문을 읽을 때에 가장 어려운 관문은 잡념이 떨어지기까지의 동안이다. 여기에서 스승님이 말씀하신 작심(作心)이 필요 된다. 일대사를 경영하는 강한 의욕으로써 그야말로 주문 뜻을 염념불망하되 그래도 정히 안되면 다시 수심정기하고 지극한 심고를 드리고 다시 외우기를 시작하기로 하며, 또 어떤 때에는 주문해석(지자는 극언지위지.....지화지기 지어지성)정문을 3회쯤 외어 무슨 모양으로든지 나의 일념을 주문에서 떠나지만 않게 하면 반시간 내지 한 시간 안에 정신은 그만 통일되고 말며, 한번 길만 잡히면 그 다음은 퍽 수월한 것이다. 수월하다기 보다도 욕파불능으로 주문 몇 번만 읽으면 그만 그 지경에 들어서는 것이다.
주문을 참스럽게 공부하는 중에는 접령상태(氣化靈化의 상태)는 반드시 만나게 되는데 이 지경이 심히 묘하다. 사람 중에는 혹 허령을 염려하는 이가 있으나 이것은 쓸데없는 염려이다. 꼭 주문의 정상한 뜻을 생각하면서 정신이 통일순화 될 때에 그 밖에의 다른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오직 자연스럽고 성스런 한울님의 지기가 내리고, 한울님의 영덕이 드러나는 영광이 있는 것뿐이다. 이 주문공부에 있어서 하는 말은 몹시 자상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보다 도의 증험이 높은 이에게 맡기며, 또는 각자의 차근한 노력에 맡기고,
‘겨울밤과 수도’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 쓰고자 한다.
대체 우리에게 밤이 있고 또 수면이 있음이여, 참으로 다행하도다. 우리는 매일매일 이 밤을 맞으며 이 수면을 즐기어 이 복잡한 인생들로서도 매일 아침 한울님의 영광 속에서 다시 남을 얻는도다.
종일 부산하던 오관의 지각.감능을 딱 폐쇄하고 나의 일체를 오직 나의 신령에 전탁하고 깊은 수면에 들어 호호탕탕히 하룻밤을 치르는 것은 본능적으로 우리에게 실천되는 큰 수행이다. 옛 성인은 이것을 야기(夜氣)라 하여 이것의 신성을 고조하였거니와 우리가 다시 생각할 것은 수면이 우리에게 한 휴식이요 수행인 동시에 수면을 하든 아니하든 ‘밤’ 그 자체가 우리에 대한 무한한 안식이요 수양이다. 밤의 고요한 신비와 허명(虛明)은 우리를 모두 스스로 ‘무아’의 혼연의 지경으로 인도함이 있다.
그러므로 밤 한 시간의 송주는 그 효과에 있어 낮의 두 세 시간의 송주를 당하고 남음이 있다. 어두워가는 황혼, 밝아오는 새벽은 특히 정추가 있는 바이거니와, 첫 한잠을 자고나서의 깨어지는 그 시간(대개로 자정시간)은 정신통일이 유난하게 잘 되고 신명의 감응이 몹시 빠른 시간으로서 약간 수행에 적공이 있는 사람이면 이 시간의 송주에는 곧 지기가 강화하고 휘연한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복잡 다사한 인간으로서 가장 쉬이 큰 도의 지경을 영험할 시간, 밤을 참으로 참으로 신령하게 맞음이 있을지어다.
격언 한마디: 세상의 많은 재능은 용기 결핍 때문에 항상 그 할 바를 못하고 마치는 것이다.
참고 : <소춘 김기전 선생문집> 에서 옮김 (현대문으로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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