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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수련과 사회적실천:신인간(625호,2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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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수련과 사회적 실천

김용휘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

* 출전 : 신인간(625호, 2002, 9)





1. 들어가면서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천도교는 수운대신사의 구도 동기 자체가 보국안민(輔國安民)에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강력한 현실변혁의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현실변혁의 이상은 ‘개벽’이라는 용어 속에 함축적으로 드러난다.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태평성세 다시 정해 국태민안 할 것이니”(『용담유사』 「몽중노소문답가」) 대신사는 개벽이 우주 순환의 이치상 필연적으로 오게 되어 있다고 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대신사는 개벽을 가까운 장래에 저절로 실현될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주체적 자각을 통해서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는데 더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대신사는 주문과 영부를 통한 수련, 그리고 성경신의 실천을 통한 시천주의 자각을 더욱 중시하였다. 대신사는 새 세상을 만들어내는 주체는 인간이며, 그 변화는 자기 내면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개벽은 하나의 역사적 필연이기보다는 인간의 주체적 자각을 통한 생활 양식의 전환,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천도교의 개벽은 물질개벽보다는 정신개벽에 더 초점을 두는 경향을 띄게 된다.
  대신사는 깨달음을 개인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것을 항상 사회적 실천과 적극적으로 연결시켰다. 대신사에게는 항상 초월과 내재가, 깨달음과 사회적 실천이 역동적 긴장관계 속에 있다. 어느 한 쪽을 강조하면 극단에 빠진다. 이것은 그의 독특한 인식론이기도 한 불연기연(不然其然)의 논리 구조와 상통한다. 불연은 드러나지 않는 세계, 종교적 직관의 세계를 말하고, 기연은 현상의 세계를 말한다. 상식과 논리와 추론이 가능한 경험적 현실세계이다. 그는 이 불연기연에서 기연만 알고 그것이 전부라고 믿고 의존하는 것도 비판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불연의 세계에만 빠지는데도 반대한다. 그는 불연과 기연을 함께 살펴서 기연의 드러나는 세계에서의 합리성과 불연의 드러나지 않는 세계에서의 직관의 차원을 함께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수련과 사회적 실천은 함께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대의 여러 과제는 사회적 실천이 단지 제도의 변화에 그쳐서는 안되고, 마음의 변화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수련과 사회적 실천,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하는 것에 종교계는 물론, 모든 시민 운동의 승패가 달렸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서 인류의 장래까지도 여기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천도교의 중흥도 마찬가지다.


2. 천도교의 수련



가. 수련의 목적


  왜 수련을 하는가? 왜 수련이 필요한가? 수련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답변은 수련하는 사람들마다 천차만별일지도 모른다. 천도교에서도 그렇다. 공식적으로는 자아완성을 통해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 궁극적으로 지상천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이지만, 누구나 처음부터 지상천국을 위해서 수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수련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수련 체험이 달라지고 내용도 달라진다. 건강을 위해서 수련을 할 경우 그 체험은 주로 몸의 변화일 것이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경우에는 마음이 안정되는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치에 마음을 두고 수련을 하면 이치를 깨닫는 쪽으로 열리게 된다. 영적인 체험을 위주로 수련을 할 경우에는 영적인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수련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생각이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수련에 임하는가? 또 평소에 어떤 생각을 가장 많이 하는가, 무엇이 가장 절실한가? 그것이 모두 기도가 되고 결국 그것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수련이 목적이 너무 추상적이면 체험하는 바가 없고, 수련이 너무 개인적인 데 빠지면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위아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반면 수련의 목적이 어떤 부분에 한정되어서도 안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체험만을 절대시하여 다른 사람의 체험을 인정하지 않는 고집스런 사람이 되기 쉽상이다. 우리는 수련을 해서 인격이 함양되고 마음이 더 넓어지고 지혜가 생긴 분도 보게 되지만, 오히려 더 고집스러워지고 자기의 체험만을 절대시하는 분도 만나게 되는데 그렇게 된 이유는 그 분이 수련을 열심히 안해서가 아니라, 잘못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열심히 하는 것보다 바른 생각과 바른 목적을 가지고 해야 한다. 그리고 수도의 계단과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한 이해도 충분히 하고 있어야 그 모든 체험들을 이해하고 또 더 발전적으로 이끌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수련의 방법


  일반적으로 주문 수련은 근기가 약한 사람들을 위한 대중적인 수련법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인도에서도 마찬가지다. 밀교의 만트라 수행은 기존의 전문가 위주의 수행에 비해 대중적인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대중적이라 해서 깊은 체험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일반인들이 깊은 체험을 하기 힘든 것은 간이한 수행법을 택해서라기보다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큰 목적을 세워서 그 한 생각에 매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생활하면서 한 생각에 매진할 수 없기 때문에 고안한 것이 바로 주문이다. 주문에만 집중해서 염념불망하면 그것으로도 깊은 체험을 할 수 있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주문 수련법의 특징이다.
  이렇게 주문 수련은 일반적으로 간단한 몇 구절을 반복적으로 외움으로써 빠르게 정신 집중과 영적 체험을 하게 한다. 주문을 보통 주술적인 효과와 관련해서 보기도 하지만, 주문은 그런 주술적인 효과보다는 반복적인 암송을 통해 저절로 호흡이 되므로 자연히 기운이 일어나게 하고 더 빠르게 정신 집중이 되게 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문 수련은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에서 매우 유력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명상 수련과 같은 것은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는 쉽지 않은 방법이다. 일상 생활을 하다 보면 항상 복잡한 생각과 처리할 일들이 많은데, 바로 명상으로 들어가면 잡생각이 계속 일어나서 깊이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웬만한 근기가 아닌 보통사람으로서는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반면 호흡을 병행해서 하는 기수련이나, 절 수련, 염불 수련, 그 중에서도 주문 수련은 일상 생활 속에서도 유력한 방법이다. 최근의 단전호흡을 위주로 하는 단체가 각광을 받는 것도 이런 장점들을 잘 살렸기 때문이다. 천도교의 주문 수련은 위에서 상술한 일반적인 주문 수련법과 대동소이하지만, 차이가 나는 것은 천도교의 주문은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천도교의 21자 주문에는 우주의 근본 진리, 만물화생의 근본 이치와 인간사 화복의 근원에 대한 이치를 담고 있다.
  천도교의 주문은 강령주문 8자와 본주문 13자로 되어 있다. 강령주문은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으로 그 뜻은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이 내 몸에 크게 내리기를 간구한다는 것이다. 본 주문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인데, 그 뜻은 “한울님을 내 안에 모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그 한울님의 조화의 덕에 내 마음을 합하고 정해서 영원토록 잊지 않으면 만사를 다 깨닫게 된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시천주’라고 하는 천도교의 핵심적 진리가 주문 속에 내포되어 있어 이것을 항상 반복하여 암송함으로써 정말 내 안에 한울님의 영기가 모셔져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또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우주의 생성과 만물의 화생 작용이 모두 한울님 지기(至氣)의 덕이며, 그 덕과 내 마음이 하나가 될 때 우주의 이치를 다 깨닫게 되며, 천지조화를 함께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 나라는 존재가 유한하고 개체적 자아가 아니라 본래부터 무궁한 존재이며 한울님 성령과 하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수운대신사는 「흥비가」에서 “이글보고 저글보고 무궁한 그이치를 불연기연 살펴내어 부야흥야 비해보면 글도 역시 무궁하고 말도 역시 무궁이라 무궁히 살펴내어 무궁히 알았으면 무궁한 이 울속에 무궁한 내아닌가”라고 노래하고 있다.
  천도교 주문 수련의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소리를 내어서 하는 현송법(顯誦法)이 있고, 소리를 내지 않고 잠잠히 속으로만 하는 묵송법(默誦法)이 있다. 현송은 기운을 주로 공부하는 방법이고 묵송은 이치공부, 불교의 성품공부에 해당한다. 현송과 묵송을 병행함으로써 기운공부와 성품공부를 같이 하게 된다. 궁극적인 깨달음은 나의 본래의 성품을 깨닫는데 있지만, 성품을 깨닫는데 이르기 위해서는 기운공부를 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천도교에서는 초보자일 때는 현송을 더 많이 하게 하고, 점차로 깊어지면 묵송을 위주로 하게 한다. 또 현송을 할 때는 21자를 모두 다 하고, 묵송을 할 때는 13자 본주문만 한다. 이는 현송을 할 때는 한울님의 지기를 체험하고 강령을 구하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보통 천도교에서는 수도원에서 일주일 정도만 집중해서 주문을 외워도 강령을 체험하게 된다. 강령이 되면 온 몸이 떨리면서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일어나고 착한 마음을 회복하게 된다. 강령이 되면 영부와 강화(降話:한울님의 가르침)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강화도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에 이것을 절대화하게 되면 오히려 공부를 그르칠 수 있다. 이 강령과 강화의 체험은 내 안에 한울님의 영기가 실재하며, 항상 나를 간섭하고 주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는 체험일 뿐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머물면 타력 신앙에 빠지게 되므로, 더 나아가서 그 한울님이 바로 나의 본성이라는 ‘자천자각(自天自覺)’에 이르러야 한다. 이 때는 누가 누구를 모시고 가르침을 받는 것도 없는 하나의 경지가 된다. 의암성사의 『무체법경』에 의하면 자천자각이 되면 비로소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탈(解脫)’이 되며, 그 다음에 우주의 본성을 깨닫고, 우주 조화를 운용하는 마음 자리를 깨닫는 ‘견성각심(見性覺心)’이 가능하게 된다고 한다. 이 강령, 강화, 자천자각, 해탈, 견성각심이 천도교의 수도 계단이 되며, 궁극적으로 ‘견성각심’까지 나아가 나의 본래가 한울임과 만물화생과 인간사의 화복 작용을 일으키는 마음자리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3. 천도교의 사회적 실천



가. 천도교의 사회적 실천의 역사


  천도교의 사회적 실천은 해월신사로부터 시작된다. 해월신사는 수운대신사의 시천주 철학을 서민들의 생활 속으로 끌어내려서 서민들의 삶 속에서 대신사가 제시한 동학적 가치들을 구체화시켰다. 먼저 내 안의 신령한 한울님을 체험하고 그 한울님을 부모와 같이 봉양하는 공부를 통하여 새로운 인간 주체의 형성에 주력한다. 신사는 사람이 바뀌지 않고 새로운 세상은 올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해월신사에게서 변혁의 중심은 제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 생활이었으며, 그 변혁 수단은 생활의 전면적인 부정이 아니라 한울님을 모시는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해월신사는 신분제를 철폐하고 한울적 평등주의를 내세우며, 여성을 생활의 중심으로 등장시켜 기존의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아닌 부부화순의 새로운 가정을 제시하였다. 해월신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890년을 기점으로 포, 접을 이용하여 동학적 생활양식을 공고히 하고, 민의 집회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동학의 정치적 영향력은 공주와 삼례의 집회, 광화문 복합상소, 보은 집회로 이어지면서 조선사회에서의 동학적 공공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해월신사는 철저하게 영적인 각성에 기반해서 그 정치적 공공성을 확장해 나가려고 하였다. (오문환, 『사람이 하늘이다』(솔, 1996) )
  반면 전봉준에 의한 동학혁명은 동학도와 농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면서 급진적인 방법으로 폭정에 항거하고, 외세에 저항하였다. 비록 지도부의 합의에 의한 계획된 혁명은 아니었지만 한국 민중의 힘과 근대정신을 열어준 기폭제는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해월신사의 노선과 전봉준의 노선을 보통 대립적인 것으로 보지만 반드시 그렇게 볼 것은 아니다. 해월신사의 위와 같은 노력이 없었다면 동학혁명은 애당초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만 혁명 초기에 해월신사가 혁명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은 아직 환경적 조건과 주체적 조건이 구비되지 않았는데 섣불리 일으킨 때문이었다. 새로운 사회의 형성은 민이 동학적 이념을 생활양식으로 철저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구체적인 정치 프로그램으로 실천할 수 있는 정치적 공공영역이 형성될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동학혁명 당시는 아직 결정적인 역사 변혁의 시점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해월신사는 결국 인간 주체의 각성, 또 그것이 생활을 통해 실천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을 전 사회적, 전 우주적으로 확대시키는 거대한 기획을 하였다. 따라서 동학의 개벽은 시천주적 삶이 완전히 발화된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의미한다. 결국 개벽은 인간 변혁을 통해 삶의 양식을 일대 전환하는 것이다. 혁명이 사회정치적, 경제적, 제도적인 외적 환경의 급격한 변화라고 정의한다면, 개벽은 이러한 외적 변화가 내적, 영적, 정신적 변혁과 함께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이후 해월신사의 정신은 의암성사에게 계승되어 3·1운동에서 다시 꽃을 피운다. 사실 이 3·1운동이야말로 수련과 사회적 실천이 잘 조화된 모범적 사례라 할 만 하다. 의암성사는 3·1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몇 년 전부터 전국의 대두목 500여 명을 차례로 우이동 봉황각으로 불러 49일 기도를 계속 시키면서 거국적 행사를 준비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의암성사 환원 이후 일본 유학을 다녀온 천도교 청년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된 신문화 운동은 비록 여러 분야에서 놀랄만한 업적을 보여줬지만, 해월신사와 의암성사가 중시해 온 영적 각성에 바탕한 사회적 실천으로 나아가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이후 무인멸왜기도라든지 남북통일운동 등에서 살신성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는 이렇다 할 사회적 실천을 보여주지 못한 채 사실상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비록 여러 부문 단체에서 통일과 여성, 환경 등에 관심을 가지고 애를 쓰고 있지만, 조직이나 자금, 그리고 무엇보다도 초창기에 보여주었던 활발한 영성을 잃어버린 채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 앞으로의 과제


  천도교는 교리적으로 볼 때 매우 많은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시천주와 사인여천, 그리고 삼경 사상은 오늘날 생태계 문제, 인권 문제, 인종·종교 갈등을 해결하는 실천적인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 또한 통일 문제에 있어서도 천도교는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의 천도교의 조직이나 여건으로 봐서는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마음만 앞서 있지 실제로 수련을 통한 힘이 결집되지 않기 때문이다.
  천도교는 다시 처음 대신사의 체험으로 돌아가 내면의 한울님 모심을 자각하는 것에서 다시 출발하여야 한다. 그동안 종교적 영성을 상실하고 사회단체와 같은 성격을 보여준 이미지를 벗고 가장 영성이 있는 단체로 거듭날 때 비로소 진정한 사회적 실천을 다시 보여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나는 영성을 ‘마음의 감통성’으로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나와 다른 인간과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고, 초목과 바위·땅 등의 자연과도 소통하고, 나아가 천지와 우주·하늘과도 소통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열린 마음, 심미적 감수성을 가진 사람을 나는 영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아무리 화해와 대화를 말하고, 생태계 보존과 실천을 말하면 무엇하나? 먼저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천도교가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인데 지금은 가장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마음의 감통성을 회복하여 새로운 문명적 대안을 마련하는 역할에 지금이라도 동참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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