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종문심법(宗門心法)이란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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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 용 천
2004/10/21(목)
정말 종문심법(宗門心法)이란 무엇인가.
종문심법(宗門心法)이란 무엇인가.
각 종 교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살펴봅니다.
천도교단내에서 종문심법이 문제가 된 것은, 1920년대 중엽에 발생한 신, 구의 1차 갈등이 서로간의 오해와 교단발전 대안의 차이로 잘못 분열되었다는 점을 서로 양해하고 일치단결하여 나아가자고 합의하고 협력하여 매진했으나, 내부적으로는 더욱 서로간의 불신이 가중되어 2차 내분이 시작되면서 시작됐다.
<宗門心法>이란 말이 처음 쓰여진 기록은 포덕 68(1927)년 8월 14일에 춘암상사께서 <從今이후로는 종문심법을 어떠한 일개인에게 傳受하지 못할 것이다>란 說法을 하신 것이 된다.(동학 천도교사 P.522상단. 동학 천도교 약사 PP.122-123.중앙) 그 후, 이 종문심법의 확정은 吳榮昌이 4세 춘암상사에게서 제 5세 법통을 전수하였다고 선포한 것에 대하여 上師主께서 사실이 아님을 규명키 위하여 포덕 74(1933)년10월 12일에 오영창이 이끈 사리원파에 대한 경고로 발표한 輪告文(교도들에게 널리 알리는 글)이다. 이 윤고문의 핵심은, 내용 4개항 중에, 1항은 6년 전에 설법한 <종문심법은 어떠한 일개인에게 전수하지 못할 것이다>란 말씀을 재 확정한 것이고, 2항은 <나의 이번 설법은 오만년 영원히 천도교인에게 일반적으로 나의 심법을 전수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종문심법의 방향을 확정한 것에 있다.(동학 천도교사 PP.529-530.하단에서 상단. 동학 천도교 약사 P.129.중앙.)
다음은 구파 교서 중에 하나인 <동학, 천도교 약사>의 기록에 따르면 포덕 73(1932)년 4월 3일에 최린 일파가 행한 신, 구파 분열에 대하여, 분열원인의 핵심인 천도교 제 4세 교조 춘암상사에 대한 역사적 법통의 부인은, 법통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그 부당성을 지적한 성명서를 내고, 포덕 59(1918)년 1월 18일에 의암성사께서 춘암상사가 大道主가 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된 道日記念式을 마치신 후 친히 일반교도에게 말씀하신 것을 상기시켰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다.
<此大道主의 位統은 天窮地終토록 幾億萬回를 備하더라도 天이 大神師에 傳하시던, 同一한 心法이오 且使東에 傳하든지 西에 傳하든지, 木에 傳하든지 石에 傳하든지 大神師께서 天에 受하시던 동일한 正嫡이니 汝等은 其信하라.> -金玩洙 <동학, 천도교사> P.503에 동일한 내용이 기록됨
결국 宗門心法의 核心은, <春菴上師가 天道敎의 4世 敎祖라는 法統守護>였다. 그리고 이 法統에 準據하여 만들어진 天道敎 儀節(P. 24.의 반 국판형. 천도교 중앙 총부 수습위원회를 발행소로 하고 편집 겸 발행인은 이종해로 포덕 106(1965)년 8월 14일 간행)의 입교식과 入敎文을 따를 것을 강조하고 있다. 현 천도교 중앙 총부가 제정 간행한 천도교 의절에는 없는 입교문 중 天宗, 道宗, 敎宗, 法宗의 法統을 밝히고 遵守해야만 진정한 천도교인이 되고 올바른 心法傳受가 된다는 주장을 수운심법 전수원이 하고 있으나 동학도유회는 입교식은 의식절차에 따라 하지만 <진정한 천도교인이 되고 올바른 심법전수가 된다.>고는 강조하지 않으며 현 천도교 중앙 총부 집행부와의 갈등을 원치 않고 있다..
이 외에도 수운심법 전수원은 춘암상사의 생존시, 올바른 신앙자세의 정립을 강조했던 여러 가지 내용과 준수항목의 이행을, 넓은 의미의 종문심법의 내용으로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용담연원 편저.1990, 4. 4.일 간행. 동학 천도교 약사 PP.126-128. 기록의 일부 요약임). 그러나 지금 천도교 홈에 기술되고 있는 내용은 위에서 살펴 본 기록으로 한정하여 본다면, 지나치게 춘암상사의 위상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과격해져 사실에서 좀 멀어진 감이 있다.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파 내부의 갈등. 즉 수운심법 전수원과 동학도유회간의 화합을 위한 대화부족도 영향을 주었지만, 기존 나이 많은 어른들이 환원함으로 인하여 교인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어,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교인 수가 매우 적어 수 백명이 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구에 관련없이 모든 교인들은 위의 여러 기록들을 잘 살펴 서로간의 오해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정리하였습니다.
참고문헌에 대한 해설
1920년대 중엽, 교단 노선에 대한 차이가 심화되어 제 1차 분열을 자초했다. 그 후 신, 구 양쪽 지도자들의 끝임 없는 대화로 화합되어 가는 과정에서 1930년에 구파 쪽에서 구파의 정체성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주장을 바탕으로 <천도교 교회사 (부 총서)초고-인쇄되지 못했다. 자료 제공자는 崔俊模, 鄭廣朝, 李鐘隣 等 三長老와 李敦化, 李仁淑이다.>가 마련되었다. 이 교서는 결국 1934년, 신파 쪽의 <천도교 창건사>를 간행하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오지영은 1940년에 <동학사>란 교서를 써 조금씩 시각이 다른 교사가 생겼다. 지금에 와서는 이 모든 기록을 서로 대조 비교하여 첨삭 수정을 해야 할 부분이 생겼다.
이 구파의 초고가 30여 년을 지나면서 희귀해졌다. 그래서 구파의 정통이라 할 수 있는 신, 구파 합동을 위한 수습위원장인 李鐘海 元老가 韓順會 長老의 기록을 바탕으로 구파 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자료들을 모아 1930년 이후의 구파 중심의 교사 기록을 포덕 103(1962)년 4월에 등사(필경)본으로 <천도교사 부 총서>란 제목으로 출간했다. 편제는 초고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제1편 天統 최수운대신사편 - 1
제2편 地統 최해월신사편 - 15
제3편 人統 손의암성사편 -77
제4편 道統 박춘암상사편 -105
제5편 法統 공화제 -121
천도교총서편
제 1편 -별 페이지 1-100은 생략하고 101페이지부터 시작.
제 2편 -131
제 3편 -146
***編名 이외 내용의 소제목이 없다. 내용은 제 1편, 수운. 제 2편, 해월. 제 3편, 의암의 법설을 망라해서 수록했다. 그러나 춘암상사는 단 한 줄의 법설도 없습니다.
이 천도교서는 다시, 天道敎 京全忠淵源(수도권, 호남, 충청지방에 산재해 있는 구파교인의 총칭)의 논의를 거쳐 용담연원의 명의로 포덕 131(1990)년 4월에 <동학 천도교 약사 부 총서>란 이름으로 총 376페이지 양장 인쇄본으로 간행됐다. 체제는 유사하나 제 5편의 편명이었던 공화제가 없어져 편명없이 기술하고 있다. 이는 1990년. 그 무렵에 공화제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1962년 필경본 부록에 없었던 춘암상사 법훈을 제 4편으로 하여 첨가 수록하였다. (P.371에서 P.376까지 6페이지 분량임.) 또 의암성사의 법설에 들어 있는 聖訓演義를 춘암편에 편집했다-편집 사유는 없다. 또 1962년 본과 비교하면 첨삭이 많으나 그 어느 곳에도 첨삭 기록의 자료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 간행의 참여했던 必菴 金正哲, 碩菴 金玩洙, 優菴 李威卿(優菴은 해방후 교화관에서 일했던 李演淑先生의 子弟) 등 원로들이 내부적인 갈등으로 분리되여 따로 동학도유회란 모임을 결성하였다. 이 모임에서 또 다른 구파의 교회사로 포덕 134(1993)년 9월 5일에 東學道儒會 碩菴 金玩洙 元老의 명의로 총 582페이지로 된 <동학, 천도교사>와 포덕 144(2003)년 7월 30일에 간행된 390페이지의 <동학, 천도교약사>가 출간이 됐다. 이 교서의 편제는 창건사의 편제와 유사하다. 지금까지 교사 따로, 법설 따로 분리 수록하였던 법설을, 각 스승님 교사속에 포함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 1편 천통, 제 2편 지통, 제 3편 인통, 제 4편, 법통(용담연원이 간행한 1990년까지는 도통이 춘암상사였고 법통은 공화제 또는 무제(無題)였는데, 동학도유회 간행된 교사에서는 도통이 없어지고 춘암상사편을 법통으로 호칭하는 변화를 가져왔다.)으로 나누어 편찬됐다. 포덕 129(1988)년 仲夏 석암 김완수는 37페이지의 <法皇 春菴上師 在世史料集>을 간행하였고, 포덕 134(1993)년 4월에는 37페이지의 <法宗 春菴上師>란 책을 필암 김정철이 집필하여 간행했다. 이책 P. 6에서 <法皇氏는 모든 법을 잘 지키어 일분일초라도 間斷이 없이 均衡을 잡아간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석암 김완수는 <동학 천도교사> 책의 序言에서 그간 간행된 <천도교 총서>, <동학 천도교약사>, <천도교 백년사> 등의 교사가 그 내용과 체계가 미흡한 현실을 자타가 공인한 바이므로 올바른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로 하여금 참고가 되어 正史로 인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본서를 간행한다는 취지를 밝히고 있지만 자료의 출처와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그래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구파 측의 정통교사에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외 天道敎 京全忠淵源 이름으로 포덕 122(1981)년 2월 11일에 간행된 198페이지의 <天道敎 精神史>가 있다. 이 책의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던 朴商益, 金建泳 등이 따로 분리되어 종문심법에 관련된 주장을 했고, 이 주장이 수운심법 전수원의 설립이론의 바탕이 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동학도유회와 수운심법 전수원간에는 암암리에 구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지금은 서로간의 대화마져 끊긴 상태로 敬而遠之하는 것 같은 느낌을 느끼게 하고 있다.
참고로 수운심법 전수원의 일부가, 신파측의 일방적인 기록으로 잘못된 교사라고 評價切下하고 있는 <천도교 창건사>와 <천도교 백년 약사 상,하권>과 신, 구파와 다른 立場과 視覺을 바탕으로 기술된 吳知泳의 <동학사> 그리고 敬菴 李 魯. 현 법원리 수도원장이 집필하여 天法 出版社에서 인쇄한 <천도교사 교정본 상,하>에서 1920년대 중엽 신, 구 갈등에서부터 현재까지의 갈등 내용들을 자세히 대조 비교하여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종문심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 구 갈등을 밝힐 자료의 필요성.
지난 2003년 7월 중순경 본인이 천도교 홈에 자료협조 요청을 하면서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밝힌 적이 있습니다. 15개월이 지난 오늘까지 단 한 건의 자료에 대한 정보나 협조를 받지 못했습니다. 갈등에 대한 논의는 많으나 적확한 내용을 알 수 있고 지금까지의 공개된 자료가 잘못되었다고 증명할 확실한 자료가 더 이상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총부에 보관된 자료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신파에 불리하기 때문에 공개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분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알기로는 없습니다. 1958년경에 대학생활을 하기 위해 상경하여 학생회에 참가해서 활동하는 과정에서 총부의 자료를 수습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우이동으로 해체 이전한 총부의 본 건물이, 수운회관 자리에 있을 때, 본 건물 1층서 교당 후문으로 연결된 回廊형식의 지붕이 있는 복도가 있었습니다. 거의 20여 메터 정도의 길이였다고 생각됩니다. 이 복도안 양쪽과 밖에 5, 60CM의 높이로 많은 양의 각종 도서와 문서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6,25동란과 교단 내 갈등 때문에 버려진 것이라 추측은 했지만 어른들로부터 정확한 답을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학생회의 몇몇 회원들과 함께 일부를 분류하여 많은 양의 도서와 문서를, 2층 왼쪽으로 안쪽 구석진 방이 도서실이었는데 그 곳에다 옮겼습니다. 이 때 옮겨지지 않은 많은 양의 자료들은 눈, 비를 맞아 버려지거나 불태워졌습니다. 일설에는 많은 양의 자료가 교단 관련 원주직에 있던 동덕들이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떠돌았고, 60연대말 본인이 교화관서로 있으면서, 해방이후 처음으로 도서목록을 작성하여 비치할 때도 여러 사람들로부터 교단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분들이 가지고 있다는 자료가 개인이 수집 정리한 자료인지, 총부에서 유출된 자료인지는 총부에서 공식적으로 확인한 바가 없습니다. 그 당시는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위와 같은 사정으로 구파에 관련된 자료는 없고 사실상 신파쪽의 자료도 거의 없어 자료의 공백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본인이 신인간 주간으로 있으면서 신인간 지령 300호 목차를 정리하려 총부내 자료를 확인한 바 보관된 신인간이 몇 부가 없어, 부산 초량교구의 박지돈 선생의 협조로 선생의 귀중한 소장본과 본인이 고서상가와 중고서점에서 수집했던 것과 합쳐 간행했습니다. 그래도 해방 무렵에서 1950년도 초반까지의 결본이 많았고, 발행호수의 확인도 어려워서 이 시기에 발견된 신인간을 바탕으로 통권 총 호수를 정리했습니다. 통권 호수에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의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현재의 통권 총 호수가 정착되고 있습니다. 독실한 동학교도로 교단 자료 수집가이셨던 박찬표 선생의 후예이신 박지돈 선생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었다면 지령 300호 기념 신인간 총 목차 집 간행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신인간 총 목차 집에 본인이 쓴 창간호에서 300호까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교단 사정으로 미루어 생각해 보면, 위에 열거한 구파측에서 간행한 여러 자료들과 총부가 보관하고 있는 자료들을 참고하여, 교단 내 여러 가지 역사를 살펴볼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우암 이위경선생과 석암 김완수선생, 그리고 얼마 전에 환원하신 鏡菴 李世權선생이 저에게 들려준 바에 의하면, 천도교사의 기초자료가 된 한순회와 이종해 원로분이 소장하고 계셨던 방대한 자료들이 폐지로 버려졌다고 합니다. 두 분 외에도 많은 자료를 가졌다고 알려졌던 원로들도 환원하실 무렵에는 연락이 두절되어 그 자료의 행방을 알 길이 없습니다. 혹시 자료공개가 어려워 숨기기 위한 방편으로 버려졌다고 한다면, 그 자료들을 보관할 신뢰할 수 있는 기관에 기증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올바른 역사의 기술을 위하여 모든 자료들이 남아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심고드립니다.\n\n[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6-01-15 17:28:47 교리/교사 토론에서 이동 됨]
2004/10/21(목)
정말 종문심법(宗門心法)이란 무엇인가.
종문심법(宗門心法)이란 무엇인가.
각 종 교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살펴봅니다.
천도교단내에서 종문심법이 문제가 된 것은, 1920년대 중엽에 발생한 신, 구의 1차 갈등이 서로간의 오해와 교단발전 대안의 차이로 잘못 분열되었다는 점을 서로 양해하고 일치단결하여 나아가자고 합의하고 협력하여 매진했으나, 내부적으로는 더욱 서로간의 불신이 가중되어 2차 내분이 시작되면서 시작됐다.
<宗門心法>이란 말이 처음 쓰여진 기록은 포덕 68(1927)년 8월 14일에 춘암상사께서 <從今이후로는 종문심법을 어떠한 일개인에게 傳受하지 못할 것이다>란 說法을 하신 것이 된다.(동학 천도교사 P.522상단. 동학 천도교 약사 PP.122-123.중앙) 그 후, 이 종문심법의 확정은 吳榮昌이 4세 춘암상사에게서 제 5세 법통을 전수하였다고 선포한 것에 대하여 上師主께서 사실이 아님을 규명키 위하여 포덕 74(1933)년10월 12일에 오영창이 이끈 사리원파에 대한 경고로 발표한 輪告文(교도들에게 널리 알리는 글)이다. 이 윤고문의 핵심은, 내용 4개항 중에, 1항은 6년 전에 설법한 <종문심법은 어떠한 일개인에게 전수하지 못할 것이다>란 말씀을 재 확정한 것이고, 2항은 <나의 이번 설법은 오만년 영원히 천도교인에게 일반적으로 나의 심법을 전수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종문심법의 방향을 확정한 것에 있다.(동학 천도교사 PP.529-530.하단에서 상단. 동학 천도교 약사 P.129.중앙.)
다음은 구파 교서 중에 하나인 <동학, 천도교 약사>의 기록에 따르면 포덕 73(1932)년 4월 3일에 최린 일파가 행한 신, 구파 분열에 대하여, 분열원인의 핵심인 천도교 제 4세 교조 춘암상사에 대한 역사적 법통의 부인은, 법통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그 부당성을 지적한 성명서를 내고, 포덕 59(1918)년 1월 18일에 의암성사께서 춘암상사가 大道主가 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된 道日記念式을 마치신 후 친히 일반교도에게 말씀하신 것을 상기시켰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다.
<此大道主의 位統은 天窮地終토록 幾億萬回를 備하더라도 天이 大神師에 傳하시던, 同一한 心法이오 且使東에 傳하든지 西에 傳하든지, 木에 傳하든지 石에 傳하든지 大神師께서 天에 受하시던 동일한 正嫡이니 汝等은 其信하라.> -金玩洙 <동학, 천도교사> P.503에 동일한 내용이 기록됨
결국 宗門心法의 核心은, <春菴上師가 天道敎의 4世 敎祖라는 法統守護>였다. 그리고 이 法統에 準據하여 만들어진 天道敎 儀節(P. 24.의 반 국판형. 천도교 중앙 총부 수습위원회를 발행소로 하고 편집 겸 발행인은 이종해로 포덕 106(1965)년 8월 14일 간행)의 입교식과 入敎文을 따를 것을 강조하고 있다. 현 천도교 중앙 총부가 제정 간행한 천도교 의절에는 없는 입교문 중 天宗, 道宗, 敎宗, 法宗의 法統을 밝히고 遵守해야만 진정한 천도교인이 되고 올바른 心法傳受가 된다는 주장을 수운심법 전수원이 하고 있으나 동학도유회는 입교식은 의식절차에 따라 하지만 <진정한 천도교인이 되고 올바른 심법전수가 된다.>고는 강조하지 않으며 현 천도교 중앙 총부 집행부와의 갈등을 원치 않고 있다..
이 외에도 수운심법 전수원은 춘암상사의 생존시, 올바른 신앙자세의 정립을 강조했던 여러 가지 내용과 준수항목의 이행을, 넓은 의미의 종문심법의 내용으로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용담연원 편저.1990, 4. 4.일 간행. 동학 천도교 약사 PP.126-128. 기록의 일부 요약임). 그러나 지금 천도교 홈에 기술되고 있는 내용은 위에서 살펴 본 기록으로 한정하여 본다면, 지나치게 춘암상사의 위상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과격해져 사실에서 좀 멀어진 감이 있다.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파 내부의 갈등. 즉 수운심법 전수원과 동학도유회간의 화합을 위한 대화부족도 영향을 주었지만, 기존 나이 많은 어른들이 환원함으로 인하여 교인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어,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교인 수가 매우 적어 수 백명이 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구에 관련없이 모든 교인들은 위의 여러 기록들을 잘 살펴 서로간의 오해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정리하였습니다.
참고문헌에 대한 해설
1920년대 중엽, 교단 노선에 대한 차이가 심화되어 제 1차 분열을 자초했다. 그 후 신, 구 양쪽 지도자들의 끝임 없는 대화로 화합되어 가는 과정에서 1930년에 구파 쪽에서 구파의 정체성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주장을 바탕으로 <천도교 교회사 (부 총서)초고-인쇄되지 못했다. 자료 제공자는 崔俊模, 鄭廣朝, 李鐘隣 等 三長老와 李敦化, 李仁淑이다.>가 마련되었다. 이 교서는 결국 1934년, 신파 쪽의 <천도교 창건사>를 간행하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오지영은 1940년에 <동학사>란 교서를 써 조금씩 시각이 다른 교사가 생겼다. 지금에 와서는 이 모든 기록을 서로 대조 비교하여 첨삭 수정을 해야 할 부분이 생겼다.
이 구파의 초고가 30여 년을 지나면서 희귀해졌다. 그래서 구파의 정통이라 할 수 있는 신, 구파 합동을 위한 수습위원장인 李鐘海 元老가 韓順會 長老의 기록을 바탕으로 구파 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자료들을 모아 1930년 이후의 구파 중심의 교사 기록을 포덕 103(1962)년 4월에 등사(필경)본으로 <천도교사 부 총서>란 제목으로 출간했다. 편제는 초고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제1편 天統 최수운대신사편 - 1
제2편 地統 최해월신사편 - 15
제3편 人統 손의암성사편 -77
제4편 道統 박춘암상사편 -105
제5편 法統 공화제 -121
천도교총서편
제 1편 -별 페이지 1-100은 생략하고 101페이지부터 시작.
제 2편 -131
제 3편 -146
***編名 이외 내용의 소제목이 없다. 내용은 제 1편, 수운. 제 2편, 해월. 제 3편, 의암의 법설을 망라해서 수록했다. 그러나 춘암상사는 단 한 줄의 법설도 없습니다.
이 천도교서는 다시, 天道敎 京全忠淵源(수도권, 호남, 충청지방에 산재해 있는 구파교인의 총칭)의 논의를 거쳐 용담연원의 명의로 포덕 131(1990)년 4월에 <동학 천도교 약사 부 총서>란 이름으로 총 376페이지 양장 인쇄본으로 간행됐다. 체제는 유사하나 제 5편의 편명이었던 공화제가 없어져 편명없이 기술하고 있다. 이는 1990년. 그 무렵에 공화제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1962년 필경본 부록에 없었던 춘암상사 법훈을 제 4편으로 하여 첨가 수록하였다. (P.371에서 P.376까지 6페이지 분량임.) 또 의암성사의 법설에 들어 있는 聖訓演義를 춘암편에 편집했다-편집 사유는 없다. 또 1962년 본과 비교하면 첨삭이 많으나 그 어느 곳에도 첨삭 기록의 자료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 간행의 참여했던 必菴 金正哲, 碩菴 金玩洙, 優菴 李威卿(優菴은 해방후 교화관에서 일했던 李演淑先生의 子弟) 등 원로들이 내부적인 갈등으로 분리되여 따로 동학도유회란 모임을 결성하였다. 이 모임에서 또 다른 구파의 교회사로 포덕 134(1993)년 9월 5일에 東學道儒會 碩菴 金玩洙 元老의 명의로 총 582페이지로 된 <동학, 천도교사>와 포덕 144(2003)년 7월 30일에 간행된 390페이지의 <동학, 천도교약사>가 출간이 됐다. 이 교서의 편제는 창건사의 편제와 유사하다. 지금까지 교사 따로, 법설 따로 분리 수록하였던 법설을, 각 스승님 교사속에 포함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 1편 천통, 제 2편 지통, 제 3편 인통, 제 4편, 법통(용담연원이 간행한 1990년까지는 도통이 춘암상사였고 법통은 공화제 또는 무제(無題)였는데, 동학도유회 간행된 교사에서는 도통이 없어지고 춘암상사편을 법통으로 호칭하는 변화를 가져왔다.)으로 나누어 편찬됐다. 포덕 129(1988)년 仲夏 석암 김완수는 37페이지의 <法皇 春菴上師 在世史料集>을 간행하였고, 포덕 134(1993)년 4월에는 37페이지의 <法宗 春菴上師>란 책을 필암 김정철이 집필하여 간행했다. 이책 P. 6에서 <法皇氏는 모든 법을 잘 지키어 일분일초라도 間斷이 없이 均衡을 잡아간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석암 김완수는 <동학 천도교사> 책의 序言에서 그간 간행된 <천도교 총서>, <동학 천도교약사>, <천도교 백년사> 등의 교사가 그 내용과 체계가 미흡한 현실을 자타가 공인한 바이므로 올바른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로 하여금 참고가 되어 正史로 인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본서를 간행한다는 취지를 밝히고 있지만 자료의 출처와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그래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구파 측의 정통교사에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외 天道敎 京全忠淵源 이름으로 포덕 122(1981)년 2월 11일에 간행된 198페이지의 <天道敎 精神史>가 있다. 이 책의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던 朴商益, 金建泳 등이 따로 분리되어 종문심법에 관련된 주장을 했고, 이 주장이 수운심법 전수원의 설립이론의 바탕이 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동학도유회와 수운심법 전수원간에는 암암리에 구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지금은 서로간의 대화마져 끊긴 상태로 敬而遠之하는 것 같은 느낌을 느끼게 하고 있다.
참고로 수운심법 전수원의 일부가, 신파측의 일방적인 기록으로 잘못된 교사라고 評價切下하고 있는 <천도교 창건사>와 <천도교 백년 약사 상,하권>과 신, 구파와 다른 立場과 視覺을 바탕으로 기술된 吳知泳의 <동학사> 그리고 敬菴 李 魯. 현 법원리 수도원장이 집필하여 天法 出版社에서 인쇄한 <천도교사 교정본 상,하>에서 1920년대 중엽 신, 구 갈등에서부터 현재까지의 갈등 내용들을 자세히 대조 비교하여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종문심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 구 갈등을 밝힐 자료의 필요성.
지난 2003년 7월 중순경 본인이 천도교 홈에 자료협조 요청을 하면서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밝힌 적이 있습니다. 15개월이 지난 오늘까지 단 한 건의 자료에 대한 정보나 협조를 받지 못했습니다. 갈등에 대한 논의는 많으나 적확한 내용을 알 수 있고 지금까지의 공개된 자료가 잘못되었다고 증명할 확실한 자료가 더 이상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총부에 보관된 자료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신파에 불리하기 때문에 공개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분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알기로는 없습니다. 1958년경에 대학생활을 하기 위해 상경하여 학생회에 참가해서 활동하는 과정에서 총부의 자료를 수습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우이동으로 해체 이전한 총부의 본 건물이, 수운회관 자리에 있을 때, 본 건물 1층서 교당 후문으로 연결된 回廊형식의 지붕이 있는 복도가 있었습니다. 거의 20여 메터 정도의 길이였다고 생각됩니다. 이 복도안 양쪽과 밖에 5, 60CM의 높이로 많은 양의 각종 도서와 문서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6,25동란과 교단 내 갈등 때문에 버려진 것이라 추측은 했지만 어른들로부터 정확한 답을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학생회의 몇몇 회원들과 함께 일부를 분류하여 많은 양의 도서와 문서를, 2층 왼쪽으로 안쪽 구석진 방이 도서실이었는데 그 곳에다 옮겼습니다. 이 때 옮겨지지 않은 많은 양의 자료들은 눈, 비를 맞아 버려지거나 불태워졌습니다. 일설에는 많은 양의 자료가 교단 관련 원주직에 있던 동덕들이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떠돌았고, 60연대말 본인이 교화관서로 있으면서, 해방이후 처음으로 도서목록을 작성하여 비치할 때도 여러 사람들로부터 교단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분들이 가지고 있다는 자료가 개인이 수집 정리한 자료인지, 총부에서 유출된 자료인지는 총부에서 공식적으로 확인한 바가 없습니다. 그 당시는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위와 같은 사정으로 구파에 관련된 자료는 없고 사실상 신파쪽의 자료도 거의 없어 자료의 공백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본인이 신인간 주간으로 있으면서 신인간 지령 300호 목차를 정리하려 총부내 자료를 확인한 바 보관된 신인간이 몇 부가 없어, 부산 초량교구의 박지돈 선생의 협조로 선생의 귀중한 소장본과 본인이 고서상가와 중고서점에서 수집했던 것과 합쳐 간행했습니다. 그래도 해방 무렵에서 1950년도 초반까지의 결본이 많았고, 발행호수의 확인도 어려워서 이 시기에 발견된 신인간을 바탕으로 통권 총 호수를 정리했습니다. 통권 호수에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의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현재의 통권 총 호수가 정착되고 있습니다. 독실한 동학교도로 교단 자료 수집가이셨던 박찬표 선생의 후예이신 박지돈 선생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었다면 지령 300호 기념 신인간 총 목차 집 간행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신인간 총 목차 집에 본인이 쓴 창간호에서 300호까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교단 사정으로 미루어 생각해 보면, 위에 열거한 구파측에서 간행한 여러 자료들과 총부가 보관하고 있는 자료들을 참고하여, 교단 내 여러 가지 역사를 살펴볼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우암 이위경선생과 석암 김완수선생, 그리고 얼마 전에 환원하신 鏡菴 李世權선생이 저에게 들려준 바에 의하면, 천도교사의 기초자료가 된 한순회와 이종해 원로분이 소장하고 계셨던 방대한 자료들이 폐지로 버려졌다고 합니다. 두 분 외에도 많은 자료를 가졌다고 알려졌던 원로들도 환원하실 무렵에는 연락이 두절되어 그 자료의 행방을 알 길이 없습니다. 혹시 자료공개가 어려워 숨기기 위한 방편으로 버려졌다고 한다면, 그 자료들을 보관할 신뢰할 수 있는 기관에 기증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올바른 역사의 기술을 위하여 모든 자료들이 남아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심고드립니다.\n\n[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6-01-15 17:28:47 교리/교사 토론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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