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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해월신사를 생각함.....임순호
천도교중앙도서관 | 2021-06-16 10:08:

 멀리 해월신사를 생각할 때 나는 오즉 감격할 뿐이다.  사생동거(死生同居)를 약속하신 선생을 더욱이 생각할 제 그러하다. 한 가지 한(恨)되는 일은 선생과 같이 잡혔을 때 선생과 같이 죽지 못하게 된 일이다.

 생각하면 목숨이라고는 바람에 나는 먼지만치도 안 알고 오즉 우리교의 창도(彰道)를 위하여 민중을 위하여 밥 먹을 새 잠잘 새도 없이 동분서주하던 옛날이 그립다.  그러나 내 이미 칠순의 몸이라 옛날과 같지 못함이 가장 한(恨)이다.  그러나 옛날의 그 맘 그 뜻 그 용기는 역시 변치 않았다 하나 시골서 수도와 명상의 단조(單調)한 생활을 하고 있는 나이라 세상을 위하여 밤을 낮 삼아 일하던 옛날과 같은 그러한 생애는 이제는 나에겐 있어보지 못할 것인가를 생각할 적에 연일 종의 비애(悲哀)를 금치 못하겠다.

 이제는 여초목동부(與草木同腐) 하고 말 노구(老軀)에 지나지 않는가를 행각할 제 한없이 옛일이 그립다.  더구나 사생동거까지 하자고 하신 해월신사와  좌봉도(左奉道) 임(任)을 가지고 의암성사를 모시고 있던 일을 생각할 제 실로 글자 그대로 감개(感慨)가 무량하다.



 어느듯 부모와 같이 모시고 있던 해월신사의 33회 환원기도 (올해 123주기) 를 맞게 되니 삼십 삼년 전의 선생과 나의 옛일이 그리워서 순서 없는 말이나마 몇 마디 기록하여 회고(懷古)의 눈물이나 스치고 싶다.  해월신사가 잡히시기 전후의 일은 그 대개만이라도 다시 말할 기회가 있기에 여기에는 다만 신사의 말씀과 평소 행하신 일 몇 가지만 들어보려 한다.

 해월신사야말로 정성과 근면-(誠勤), 그리고 공경(敬)과 믿음(信)의 화신(化神)과도 같았다.  선생은 무엇보다 가장 위대하신 민중의 벗이며 지도자(指導者)이셨다.



 무술년에 강원도가 흉년에 들어서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음으로 칙 뿌리를 캐서 겨우 목숨을 이어간 때가 있었다. 칙 뿌리를 캐다가 높은 산위에서 떨어져죽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때에 해월신사께서는 ‘내가 어찌 밥을 먹겠는가’ 하시고 콩죽과 나물죽을 잡수셨다.  콩죽이래야 콩을 간 것을 거르지도 못하게 하시고 그대로 쑤게 하셔서 잡수셨다.  이만치 선생은 사람을 생각하시었다.  실로 해월신사야말로 가장 위대한 민중의 동무이셨다.  신도 메투리를 신으시지 않으시고 큰 집신을 신으시며 ‘이게 발이 편하고 제일 좋다’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실로 검박(儉朴) 그대로의 선생이셨다.



걸인(乞人)이 와도 밥을 똑 같이 차려주셨다.  만약 걸인에게 대하여 조금이라도 차별적 대우를 하는 빛이 보이면 크게 꾸중을 하시었다.  더욱이 가장 잊히지 않는 것은 ‘이담엔 세상 사람이 집을 크게 짓고 모든 사람이 한집에서 똑같이 살며 거처나 음식을 한결같이 하리라’ 하신 해월신사의 말씀이다.  이것은 곳 지상천국의 새 살림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듯 선생은 사람에게 대하시기를 오즉 공경(敬)과 평등(平等)으로 대하시었고 사회에 대하여는 늘 지상천국의 새살림을 말씀하시었다.  아 아! 얼마나 감격되는 일이냐.



 어린이를 때리거나 꾸짖는 것을 크게 걱정하실 뿐 아니라 부인에 대하여 늘 존경(尊敬)의 뜻을 가질 것을 말씀하셨다. 특히 내수도에 대하여 많이 말씀을 하시었다. ‘도를 할 때에 부인(婦人)이 좋아하지 않으면 절이라도 하여라’ 하시었다. 이것은 곧 자기 아내가 자기의 주의를 좇지 않는다고 강압적으로 대하지 말고 어디까지든지 부인을 존중하여 잘 이해를 시키고, 감복을 시켜서 부부(夫婦)는 먼저 주의적(主義的)으로 통일이 되라 하신 말씀이다.  완고한 사람들은 망발이라고도 하겠지만 우리 위대한 해월선생은 부인에게 절까지 하라고 하셨다.  그만치 여인을 존중하신 것이다. 선생이야말로 조선에 있어서 소년(小年)문제와 여성문제(女性問題)를 맨처음(最初)로 부르짖으신 어른이 아니고 누구이랴!



 선생은 평소에 어린이들과도 맞절을 하시며 삼암(三菴)울 보시고는 ‘ 이담에 너희는 앉아서 절을 받아도 나는 지금 앉아서는 절을 받을 수 없다’ 이런 말씀을 하시었다. 선생은 이와 같이 극히 어린이들을 공경하시었다.



 구암이 부인이 있으면서 다시 장개를 들은 일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부인이 장개처?가 아님으로 색시 장개를 들고자 함이었다. ‘어떻게 했든지 장개를 한번 들었으면 그만이지 왜 두 번씩 들며 장개처가 아니면 어떤가 꼭 장개처래야 하고 색시 장개래야 하나’ 선생은 이렇게 원칙적으로 중혼(重婚)을 반대하시었으며 결혼의 조건으로 장개처라든가 처녀라든가를 문제삼지 않으셨다. 결혼이란 두사 람이 뜻만 맞으면 하는 것이지 결코 처녀나 장개처라야만 하는 것은 이니다. 해월신사는 그러한 봉건풍(封建風)을 가장 싫어하시고 배제(排除)하시었다. 이것을 근대어를 빌어 말한다면 결혼혁명이라고나 할는지.



 그러나 해월신사의 이러한 일은 다 경천(敬天) 경인(敬人)의 위대한 진리를 토대로 지어진 것이었다.

한번은 강암이 제사를 지내는 데 강암이 제사를 다 지내고 나오니까 선생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 무슨 제사를 그리 오래 지내나 잠깐 생각만 했으면 그만이지’ 하시었다. 이것은 곧 허례를 반대하시는 동시에 ‘아사아즉 부모재자(我社我則 父母在玆)’ 즉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진리대로 제 몸에 모신 부모생각을 잠깐 했으면 그만이지 구구한 형식에 흐르지 말 것을 가르치심이었다.



 그리고 선생은 무엇보다 일에 있어서 성근(誠勤)과 열(熱)을 가지시었다. 선생의 하신 실제 운동은 말하지 않아도 ‘천하(天下)만국이 머리를 조선으로 두었다. 너희는 합심(合心)하여 호말이라도 사이와 의심을 두지마라’ ‘너희들이 이 담에 일할 것을 내다 보는 듯하다.  일에 익지 못하고 처변을 잘하지 못할 것이다.  등에 땀이 나고 땅을 두드릴 제 있으리라’  의암성사와 구암과 기타 몇 사람의 제자가 않은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보아서 선생이 얼마나 일을 근심하신 것을 알 것이다.  아 아! 그러나 선생은 이미 가신지 오래라 한번 가신 스승이 다시 올 리야 있으랴마는 나 개인으로 보든지 세상일로 보든 한길이 선생이 그리워 회고(懷古)의 정을 금치 못하겠다.    (천도교회월보 제246호-19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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