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연원 (淵源)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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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연원(淵源)의 유래
천도교중앙도서관 | 2021-05-12 09:58:34
천도교 연원(淵源)의 유래 ...........수송 김응조
1. 접(接) 조직과 교단의 형성
대신사께서 경신년 4월 5일 무극대도를 득도하시고 1년여 동안 수이연지 하신 후 다음해인 신유년(포덕2년) 6월부터 포덕을 시작했다. 그러자 “원처 근처 어진 선비 풍운같이 모아드니, 통개중문 하여두고 오는 사람 가르치니 불승감당 되었더라”는 경전 말씀 그대로 소문을 듣고 용담정으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포덕이 날로 늘어갔다.
이에 따라 신유포덕 후 자연발생적으로 접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누구 접’이라는 명칭으로 호칭되었다. 그러다가 대신사께서 세상의 음해를 피해 남원 은적암에 다녀오신 후 포덕3년 12월 29일 흥해 손봉조의 집에서 처음으로 교인들을 조직화하여 경주를 비롯한 각 지역별로 16명의 접주를 임명한 것이 연원의 효시가 된다. 이 때부터 편의상 접주가 있는 지역 명칭을 붙여 ‘영덕접’이니 ‘안동접’이니 불렀다. 당시 처음으로 조직된17개 접과 접주는 다음과 같다.
경주부내 이내겸, 부서 백사길.강원보, 영덕 오명철, 영해 박하선, 흥해 손봉조, 대구.청도 김주서, 경기도 이창선, 청하 이민순, 영일 김이서, 안동 이무중, 단양 민사엽, 영양 황재민, 신령 하치욱, 고성 성한서, 울산 서군효, 영천 김선달(이름모름), 장기 최중희
이렇게 해서 비로소 동학 교문이 형성되었다. 교단을 형성하는 데는 교리. 교인. 조직 이 3대 요소가 있어야 성립된다. 따라서 대신사께서 접을 조직함으로써 이 3대 요소가 충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포덕4년 7월 23일에 대신사께서 해월신사를 북접주인으로 정함으로써 우리 교단의 정통연원은 북접에서부터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이 해 8월 14일에 해월신사에게 도통을 전수하였다. 이것이 대신사께서 말씀하신 사사상수(師師相授)로서 우리 교단의 첫 번째 사사상수가 된다.
2. 교단 체제의 정비와 포제(包制)의 시행
해월신사는 포덕12년 3월 이필제의 영해작변 후 피신생활을 하다가 영월 박영걸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포덕16년 2월에 단양 도솔산 근처에 있는 송두둑으로 이거한 후 이 해 10월 18일에 정선 등지에 통문을 보내어 교단의 융성을 기원하는 제례를 지냈다. 이 때 해월신사는 예복을 입고 관모를 썼다. 그리고 이 날 ‘용시용활’의 법설을 말씀하신 후 “내 이 뜻을 후세 만대에 보이기 위하여 내 스스로 이름을 고쳐 수범을 보이노라” 하시고 자신의 이름 경상(慶翔)을) 시형(時亨)으로 바꾸었다. 이어서 강수는 강시원으로, 유인상은 유시헌으로, 전성문은 전시황으로 고치는 등 여러 제자의 이름을 ‘때 시(時)’ 자를 넣고 바꾸게 했다. 또한 이날 강수를 서열 2위인 차도주로 임명하고 그 후 유인상을 서열 3위인 도접주로 임명하여 교단 체제를 정비하였다. 포(包)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은 해월신사가 포덕 25년 10월 28일 대신사의 탄신향례를 지낼 때 처음으로
‘각 포의 두령이 참석했다’는 기록이 ’시천교종역사‘에 나온다. 그리고 같은 10월에 해월신사가 교장(敎長), 교수(敎授), 도집(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의 육임제를 제정하여 각 포에 두었다. 이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포제가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교장: 자질이 있고 신망이 두터운 사람.
교수: 성심으로 수도하여 가히 교리를 전할 수 있는 사람
도집: 위풍이 있고 기강이 밝아 시비선악의 한계를 아는 사람
집강: 시비를 밝히고 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
대정: 공평하고 부지런하여 중후한 사람
중정: 바른말을 능히 할 수 있는 사람
해월신사는 포덕28년 5월에 보은 장내리로 이거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육임소를 설치하여 매월 1회씩 각 접주들에게 강론을 했다. 당시 동학은 강원도를 비롯해서 충청도, 경기도, 경상도, 남부 등지로 널리 퍼져 있었다. 그 후 대도소와 포 단위로 육임제가 확대 시행되었고, 장실이 있는 대도소에는 육임소를 두어 자문에 응했다. 그 후 포덕 30년 11월에 해월신사가 복호동에서 내칙과 내수도문을 지어 반포할 때에 ‘각 포에 반포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포덕 33년에 해월신사가 발송한 통유문에도 ‘이 쪽 포 연원이 저쪽 포 연원으로 옮긴다’고 하면서 그 잘못을 질책하는 내용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포덕20년대 후반부터 포라는 명칭이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포명(包名)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포덕 34년 3월11일 해월신사가 통유문을 발송해서 교인들을 보은에 소집하여 척왜양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 때부터이다. 당시 충청. 전라. 경상. 경기. 강원도 등 각지에서 2~3만 명이 보은 장내리에 모여 4월2일 해월신사의 해산명령이 내릴 때까지 포별로 행동했다. 당시 보은 취회에 참가한 포명과 대접주는 다음과 같다.
충의포대접주 손병희. 충경포대접주 임규호, 청의포대접주 손천민, 문청포대접주 임정준, 옥의포대접주 박석규, 관동포대접주 이원팔, 호남포대접주 남계천, 상공포대접주 이관영, 덕의포대접주 박인호, 태인포대접주 김개남, 부안포대접주 김낙철, 청풍포대접주 성두환, 금구포대접주 김덕명, 무장포대접주 손화중, 신산포대접주 김낙삼, 옥구포대접주 장경화, 완산포대접주 서영도, 청산포대접주 박원칠, 고산포대접주 박치경, 풍대포대접주 김석윤, 봉성포대접주 김방서, 공주포대접주 깁지택, 예산포대접주 박희인, 문의포대접주 암정재, 내면포대접주 차기석, 홍천포대접주 심상훈, 인제포대접주 김치운, 보은포대접주 김연국, 서호포대접주 서장옥, 정선포대접주 유시헌, 대흥포대접주 이인환, 덕산포대접주 손은석, 장흥포대접주 이방언, 아산포대접주 안교선, 영호포대접주 김인배.
이때부터 접의 상위개념인 포가 동학의 연원조직을 대표하는 단위조직이 되었다. 그러니까 포는 여러 개의 접 조직을 포용하는 상위 기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포를 대표하는 대접주 밑에는 접별로 차접주. 수접주. 접주. 접사 등이 있어 포를 형성하였다.
3. 동학혁명당시의 남북접 문제
동학혁명 당시에는 한 개의 포가 10개 내지 20개의 접을 거느리고 있었다. 지금은 학계에서 ‘동학군이 봉기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과거에는 동학혁명과 관련된 거의 모든 기록에는 ”동학군이 기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왜냐하면 동학혁명은 동학의 포가 중심이 되어 일어난 혁명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동학혁명을 면밀히 검토해보아도 동학군은 예외 없이 동학의 포조직이 있는 곳에서만 봉기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학혁명은 동학의 핵심조직인 포 조직을 중심으로 기포한 혁명이었다.
그런데 동학혁명 당시 남접과 북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결론적으로 말해서 남북접은 한때의 대립적 시각에서 비롯된 한시적 명칭이었다.
동학에는 종문을 달리하는 남북접은 애초에 없었다. 대신사 당시에도 남접이라는 기록을 아직 보지 못했다. 해월신사를 북도중주인. 북접주인. 북접법헌. 북접대도주 등의 명칭으로 불렀기 때문에 남접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남접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서 동학혁명 당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오지영은 그의 저서 “동학사‘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남접이라는 원인은 처음 어디로부터 나온 것이냐. 수운 선생 당시에 북접이란 말이 처음으로 발생되었다. 어찌된 말이냐 하며 수운선생이 있던 용담정과 해월선생이 있던 검악촌이 용담정 북편에 있다함을 지명함이며, 수운선생이 말년에 도를 해월선생에게 맡기고자 하는 의향이 있어서 어느 제자가 오든지 하면 말씀을 이렇게 하였다. ”군등이 만일 나를 보러 오겠거든 먼저 북접주인 해월을 찾아보고 오라, 나도 북접으로 가겠노라” 하셨다. 북접이라는 명사가 이와 같이 발생된 후에 후인들은 이 말씀을 가장 이상히 여겨 이 다음에 도운수가 북접에 있다는 등 미신적으로 해석하여 북접에 붙어야 산다는 등 허무맹랑한 말을 지껄이는 자도 많았다.“
남접. 북접이라는 말은 동학혁명 초기에 무장봉기를 주장하는 전봉준 계열의 동학군을 편의상 남접이라 불렀고 무장봉기를 반대했던 해월신사를 중심으로 한 동학 지도부를 북접이라 한데서 연유한다. 이와 관련해서 동학혁명 연구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김의환 등의 다음 이야기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김의환 교수: “동학에서 남북접이라는 칭호가 생긴 것은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이다” 전봉준 공초: “호남을 남접이라 칭하고 호중을 북접이라 칭했다.
조기주 종법사: 남접이란 호남접이란 명칭에서 호자가 생략된 말이다“
따라서 이 해 6월에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상륙하여 왕궁을 점령하는 굴욕적인 사건이 벌어지자 그동안 은인자중하던 해월신사가 9월 18일에 드디어 총 기포령을 내려 남북접이 통합전선을 형성하게 되면서 남접이니 북접이니 하는 이야기는 없어지고 말았다. 즉 공주 우금치 전투를 앞두고 논산 대본영에서 전봉준 장군과 손병희통령이 만나 결의형제를 맺고 악수하면서 남접이니 북접이니 하는 말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로써 남접이란 원래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4. 의암성사의 일본망명
동학혁명 후 포덕38년 12월에 의암성사가 도통을 이어받았다. 그 다음 해 해월신사가 체포되어 6월에 순도하자 의암성사는 포덕41(1906)년 6월2일 해월신사의 2주기에 경자설법을 통해서 지도체계를 확립한 후 해외망명을 모색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포덕 41년에 이르러 정부는 동학에 대한 탄압을 가중시켰기 때문이다.
동학혁명 후 많은 동학군 패잔병들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영학당. 남학당. 활빈당 등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부연하자면 동학혁명 다음해인 을미년에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살해되자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을미의병이다. 그러나 동학혁명 당시 왕궁이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한 후 김홍집을 내세워 조직된 친일내각이 일본군을 상대로 일어난 의병활동을 탄압하였다. 그러한 관정에서 동학에 대한 탄압도 가중되어 갔다.
그래서 포덕 41년 경자년 8월에 성도주 손천민이 경군에 체포되어 서울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도하였고, 이 무렵 평안도 영변 용추동의 강성택 도인이 체포되어 순도하였으며 김연국도 공주에서 체포되어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의암성사에 대한 관헌의 추적도 집요하여 이 무렵 홍병기로부터 예천군수 이소영이 군졸을 풀어 의암성사를 뒤쫒고 있다는 급보를 받고 제천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죽산 미륵평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의암성사는 망명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정부는 그동안 그토록 탄압하던 서학, 즉 기독교에 대해서는 공인해 주면서 오직 동학에 대해서만 여전히 탄압일변도로 대하는데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신변의 안전도 도모할 겸 장차 포덕천하를 위해 세계대세도 살피기 위해 망명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원래는 의암성사가 미국으로 망명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서 포덕 42년 3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다.
5. 대두령제(大頭領制)의 시행
그런데 이런 와중에서도 의암성사가 일본으로 망명한 포덕42년 후반부터 포덕43년,44년에 걸쳐 국내 서북지방으로 마당포덕이 일어나 동학의 교세가 급신장하기 시작하였다. 호남지방은 동학혁명의 여파로 교세가 몰락하다시피 한데 반해서 동학혁명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던 서북지방으로 동학이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서북 지방에는 ‘집집마다 동학이요, 사람마다 주문을 외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교세가 들불처럼 일어나 라용환 포. 라인협 포. 오영창 포 등 수백개의 포가 조직되었다.
이렇게 동학이 크게 일어나자 일본에 체류 중이던 의암성사는 포덕 44년 2월에 국가경영의 방략인 ‘삼전론’을 발표하는 한편 이 해 봄에 국내 교단에 경통을 보내어 다음과 같이 조직을 정비하고 대두령제를 시행하였다.
수청대령 십만지장 이용구
해명대령 오만지장(보류)
대접주 1천명 이상
수접주 5백명 이상
해접주 105명 이상
당시 대접주는 라용환,이종훈, 홍기억, 오응선,노석기 등 2백여명에 이르렀다.
포덕 45년의 갑진개화운동은 바로 이러한 연원조직을 바탕으로 전개한 혁신운동이었다.
6. 천도교의 대고천하(현도)와 중앙총부의 설치
의암성사의 밀명에 의해 포덕 45년에 일어났던 갑진개화운동은 진보회장 이용구가 송병준의 친일단체 일진회와 야합하는 배교친일 행위로 말미암아 좌절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그 다음해 이용구가 “일본의 지도와 보호 아래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망국적 선언서를 ‘황성신문에 발표한 열흘 후인 11월 17일에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써 동학교문이 덩달아 친일집단으로 오인되어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의암성사는 황급히 자구책을 강구한 끝에 12월 1일을 기해서 ’동학‘을 ’천도교‘라는 근대 종교명칭으로 바꾸어 대고천하함으로써 비로소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의암성사는 일본에서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그 다음해, 즉 포덕47년 1월 5일에 부산을 통해 귀국하여 1월28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때 4만여 명의 교인과 일반시민이 환국하는 의암성사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일본에 갈 때 몰래 숨어서 망명했던 의암성사가 불과 4년 만에 떳떳하게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많은 인파의 환영을 받으면서 당당히 귀국하였다는 사실은 실로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의암성사 는 상경 즉시 천도교를 근대적인 종교체계로 개편하는 작업을 시행했다. 그래서 2월1일 종령(宗令) 제1호 공포를 시작으로, 2월10일에는 종령 제5호로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공포함과 동시에 종령 제7호로 원직(原職)인 육임과 주직(住職)인 중앙총부 임직원을 선임 발표하였다. 계속해서 2월16일에는 천도교중앙총부를 설치하여 천도교의 상징인 궁을기를 게양했다. 3월3일에는 종령 제15호를 공포하여 전국에 72개 대교구를 설치함으로써 조직체계를 완비하였다. 그 후 정교분리(政敎分離)정책을 단행하여 이 해 9월 21일에 이용구를 비롯한 친일배교분자 62인을 출교 처분함으로써 이들이 장악했던 교단 재정마저 사라져 한 때 재정적인 타격으로 혹심한 곤경에 처하기도 아였으나 불과 3년 미만에 교단을 기사회생시키는 데 성공하여 오히려 교단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7. 중앙총부의 주요 조직체계와 원직의 변동
중앙총부의 특징은 기관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에 있다. 따라서 이 제도는 종전 은도시대의 불문율(不文律)에 의한 교단 운영체제를 탈피하여 성문법(成文法)에 의한 근대적 교단조직을 지향하고 있다. 그 첫 번째 성문법이 천도교대헌이다.
이 대헌을 간략히 살펴보면 교단의 정점에 의암성사가 계신 장실(丈室)이 있다. 이 장실은 종인(宗印)을 관수하고, 종령을 반포하며, 종단의 기밀사항을 다루는 교단의 최고 권위기관이다. 장실 밑에는 대도주가 있는데 처음에는 의암성사가 대도주직을 겸임하다가 포덕 48년 8월에 김연국을 대도주로 임명하였다.
중앙총부는 다음과 같이 원직과 주직의 이원체제(二元體制)로 구성하였다.
1,원직
1) 천선: 성도사. 경도사. 신도사. 법도사
2) 도선: 교장. 교수. 도집. 집강. 대정. 중정
3) 교선: 대교령. 중교령. 소교령(포덕연비의 다소로 임함
2. 주직
중앙총부원. 대교구원. 중교구원. 소교구원
(대교구장은 대교령, 중교구장은 중교령, 소교구장은 소교령)
여기서 중앙총부의 임직원은 원주직을 막론하고 원칙적으로 원직을 지닌 교역자만이 임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용구 등 일당이 출교처분을 당하자 이들은 이 해 12월에 시천교를 별립하였다. 그런데 이용구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상당수 교인들이 시천교에 합세함으로써 교단이 재정적 공동상태에 빠지게 되자 의암성사는 부득이 72개 대교구를 통폐합하여 그동안 일련번호를 붙여 관리하였던 대교구를 지역명칭을 붙여 23개 대교구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의암성사는 그 후 포덕 55년에 37개 대교구로 확대개편 하였다.
한편 대도주인 김연국이 변절하여 포덕 49년 초에 이용구를 따라 시천교의 대례사가 되자, 의암성사는 1월 18일에 차도주인 춘암상사를 대도주로 승임(陞任)하였다. 이와 아울러 1월 26일에 이용구 등의 배교행위로 교세가 갑자기 위축됨에 따라 연원직제를 도훈(道訓) 1500호, 교훈(敎訓) 300호, 봉훈(奉訓) 30호로 축소 개편하였다. 당시 도훈은 3명, 예비도훈은 16명, 직접교훈은 45명, 직접봉훈은 12명이었다.
이와 같은 이용구 일당의 배교행위로 말미암아 여러 두목들이 연원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이제 현도가 되었으니 연원제도를 폐지하자’ 고 건의하였다. 이에 의암성사는 숙고한 끝에 연원의 폐해를 교정하기 위하여 부구총회(部區總會)의 결의를 거쳐 이 해(포덕49년) 11월 23일을 기해서 다음 3대원칙에 따라 연원갱시조직을 단행하였다.
1. 천주(薦主) 연비(聯臂)라 칭하는 구시제한(舊時制限)은 일체 폐지함.
2. 사사상수(師師相授)하는 로(路)를 개(開)하여 각(各)히 지의상합(志義相合)한 인(人)으로 일단(一團)을 조성(造成)하되, 구시종유(舊時從遊)를 물론하고 지(只)히 자심자유(自心自由)로 해연원(該淵源)을 정(定)함.
3. 하인(何人)을 물론(勿論)하고 자기(自己)의 교력범위(敎歷範圍)로 다수 낙종자(樂從者)를 단합(團合)하여 자기의 주간(主幹)하는 실적(實蹟)을 성(成)함.
이것이 우리교단 최초의 갱시조직(更時組織)이다. 그 후 의암성사의 불퇴전의 성력에 힘입어 오관제도가 정착되면서 교세가 진작됨에 따라 포덕 53년 2월 21일에 종령97호로 연원직제를 다시 개편하여 도령(道領) 5000호이상, 도훈(道訓) 1500호이상, 교훈(敎訓) 300호이상, 봉훈(奉訓) 30호이상으로 변경하였다.
8. 3.1운동 이후 연원조직의 변화
기미년의 3.1독립운동은 천도교의 절대적인 주도하에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3.1운동으로 말미암아 우리 교단은 막대한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3.1운동으로 교단 지도부가 대거 투옥되는가 하면, 더구나 의암성사가 중병을 얻어 출옥 후 환원하면서 교단은 여러 가지로 갈등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3.1운동 이후 교단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한때 무교주제(無敎主制)를 시행하는가 하면 포덕61년에 의정회(議政會)가 구성되었는데, 포덕 62년 12월에 개최된 의정회 결의에 의해서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이 종헌(宗憲)으로 개정되었다. 또한 대도주를 교주라 칭하고 연원제를 폐지하는 등 진통을 겪기도 하였다. 그리고 포덕64년에 중앙총부를 중앙종리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런 가운데 포덕65년 11월에 포덕제가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각 연원에는 포명(布名)을 부여하고 이를 주관하는 포덕사를 두기로 하는 등 포제도를 실시하게 되면서 사실상 62년 12월에 의정회에서 폐기하였던 연원제가 부활되었다. 이 포제도는 30호에 포덕사 1인, 300호에 주간포덕사1인을 두고 지역에 관계없이 교인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30호를 기본단위로 결성토록 하였다. 포의 명칭은 ‘순(順) .수(守). 정(正). 명(明). 지(至). 수(水). 시(侍). 진(眞). 화(化). 동(同). 흥(興). 문(文). 치(致).종(宗)’ 글자아래 성(誠).경(敬).신(信).법(法).지(知) 중에서 한 글자를 붙여 짓도록 하였는데(예:순성포. 정경포 등) 이때 56개포가 결성되었다.
교단은 포덕67년부터 신파와 구파로 갈리어 이른바 신구파분규(1차)가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포덕 71년 12월에 1차 합동이 이루어진 후 양측의 합의에 의해서 2백호 이상의 포에 대해서는 이를 완성포로 인정하여 포명을 부여하고 이에 따라 91개의 포와 주간포덕사를 정했다.
그런데 포덕 73년 4월에 2차 분규가 재연되자 신파는 포갱시조직을 단행하여 이 해 12월에 연원조직을 개편하여 500호이상 도정(道正), 250호이상 교정(敎正), 100호이상 신정(信正), 50호이상 선정(宣正), 25호이상 종정(宗正)으로 하였다.
그리고 각 포에는 주관도정 밑에 도정을 두기로 했다. 아울러 포명은 ‘성.경.신.법.지.현.통.정.개.명.보. 인.선.제.도.동.화.대.용.광.시.종.순.수.진.락.창.가.흥.청’ 글자아래 원(源)자를 붙였다. 그러다가 포덕 78년 다시 원직이 개편되어 200호이상 도정, 100호이상 교정, 10호이상 신정으로 바뀌었다.
한편 구파는 포덕73년 8월에 포제(布制)를 포제(包制)로 변경하여 기본단위를 300호로 하고 각 포에 도훈을 비롯해서 성도사. 경도사. 신도사. 법도사.를 대표로 선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포덕 72년(1931)에 일제가 만주사변을 도발한데 이어 포덕78년 7월에는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포덕 79년 4월에 국가총동원령을 공포하여 전시체제를 강화해나갔다. 아울러 일제는 국민정신총동원령을 전개하는 등 이른바 황국신민화 운동을 강행하면서 포덕 80년부터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등 민족말살정책을 강화해나갔다. 이에 따라 종교 본연의 기능마저도 극도로 제한되자 신구파는 분규의 명분을 상실한 채 포덕 81년 4월에 합동(2차)하지 않을 수 없었다.
9. 해방 후의 연원조직의 변화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가 패망하고 포덕86(1945)년 8월에 조국이 해방되었으나 뜻하지 않는 남북분단의 비극적 사태가 발생했다. 그런 가운데 이 해 10월에 임시전국대회가 열렸는데 최린의 출교문제로 잠재했던 신구파 계열간의 의견충돌로 인해 결국 포덕 87년 5월에 신구파의 세 번째 분규가 야기되었다.
그런 가운데 남북분단으로 절대다수를 점하던 북한 교세가 묶여 남한의 교세가 위축되는 등 더 이상 분규를 지속할 명분을 상실하게 되자 포덕89년 4월 신구파가 합동대회를 열고 진용을 새로 구성하였다. 한편 비록 남북이 분단되었으나 북한에는 광복 후 마당포덕이 일어나 교세가 급신장하자 포덕 87년 1월에 중앙총부와의 소통을 위해 함흥에' 북선연락소', 평양에 '서선연락소'를 설치함과 아울러 이 해 연말에 '천도교북조선연원회'를 조직하여 의장에 이돈화, 부의장에 김광호를 선임하였다. 그리고 남북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자 포덕 88년 2월에는 두 연락소를 통합하여 평양에 '천도교북조선종무원'을 설치하였다.
한편 북조선연원회는 포덕 89년 3월 1일을 기해 연원조직을 통하여 비밀리에 남북분열저지운동(일명 3.1재현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사전에 비밀이 탄로되어 1만7천여 명의 교인이 체포되는 수난을 겪고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포덕 89년 4월에 포제(包制)를 실시하여 북한 전역에 36개 포를 두었다. 그리고 포덕91년(1950)년에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일어나 3년 동안 지속되었던 전란이 멈춘 후 포덕 96년 1월에 임시대회를 개최하여 천도교교약(天道敎敎約)을 천도교헌(天道敎憲)으로 바꾸고 중앙기구의 명칭을 천도교중앙총부로 복귀시키는 등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연원제도를 개편했다.
이에 따라 과거의 포제를 폐지하고 갱시조직을 단행하여 2백호이상 도정, 1백호이상 도훈, 50호이상 교훈, 25호이상 신훈으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다시 포덕 101년에 갱시조직을 하여 25명이상 신훈을 20명으로 변경했다.
또한 중앙총부는 포덕 102년 8월 20일 ‘연원갱시조직요강’을 공포하고 12월 20일까지 연원을 갱시조직토록 하였다. 갱시조직 방법은 20호이상 신훈, 50호이상 교훈, 1백호이상 도훈, 2백호이상 도정으로 하였으며, 한 연원에 2개 이상의 도정이 있을 경우에는 도훈회의에서 대표도정 1인을 선출하도록 하였다.
그 후 포덕 108년 4월에 최덕신 교령이 취임하고 그 해 12월의 전국대회에서 교헌을 개정하여 교령이 연원회의장과 재단이사장을 겸임하는 강력한 교령중심제로 개편되었다. 그 후 포덕 113년 12월에 교령이 당연직으로 되어있는 연원회의장직을 분리한 데 이어 포덕 114년 8월에는 도정 간담회를 개최하여 연원을 갱시 조직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이 해 12월에 연원회규정을 개정하여 도정 2백호이상, 도훈 1백호이상, 교훈 21호이상, 신훈 7호이상으로 개편되어 그 다음해인 포덕 115년부터 시행하였다.
포덕 117년에 최덕신 교령과 연관된 교회분규가 1년 동안 지속된 후 포덕 118년 4월 제13차 연원회의에서 조기주 도정이 연원회 의장으로 재선되었다.
그리고 포덕 123년 4월에 개최된 제18차 연원회의에서 포제도가 시행되면서 각 연원집단에 현재와 같은 포명(布名)이 부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이러한 연원회 기본골격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포덕 157년에 이르러 전통적인 교호제(敎戶制)가 교인제(敎人制)로 바뀌는 전환기를 맞이하면서 연원조직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 천도교연원회 사진첩 - 포덕 159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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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중앙도서관 | 2021-05-12 09:58:34
천도교 연원(淵源)의 유래 ...........수송 김응조
1. 접(接) 조직과 교단의 형성
대신사께서 경신년 4월 5일 무극대도를 득도하시고 1년여 동안 수이연지 하신 후 다음해인 신유년(포덕2년) 6월부터 포덕을 시작했다. 그러자 “원처 근처 어진 선비 풍운같이 모아드니, 통개중문 하여두고 오는 사람 가르치니 불승감당 되었더라”는 경전 말씀 그대로 소문을 듣고 용담정으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포덕이 날로 늘어갔다.
이에 따라 신유포덕 후 자연발생적으로 접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누구 접’이라는 명칭으로 호칭되었다. 그러다가 대신사께서 세상의 음해를 피해 남원 은적암에 다녀오신 후 포덕3년 12월 29일 흥해 손봉조의 집에서 처음으로 교인들을 조직화하여 경주를 비롯한 각 지역별로 16명의 접주를 임명한 것이 연원의 효시가 된다. 이 때부터 편의상 접주가 있는 지역 명칭을 붙여 ‘영덕접’이니 ‘안동접’이니 불렀다. 당시 처음으로 조직된17개 접과 접주는 다음과 같다.
경주부내 이내겸, 부서 백사길.강원보, 영덕 오명철, 영해 박하선, 흥해 손봉조, 대구.청도 김주서, 경기도 이창선, 청하 이민순, 영일 김이서, 안동 이무중, 단양 민사엽, 영양 황재민, 신령 하치욱, 고성 성한서, 울산 서군효, 영천 김선달(이름모름), 장기 최중희
이렇게 해서 비로소 동학 교문이 형성되었다. 교단을 형성하는 데는 교리. 교인. 조직 이 3대 요소가 있어야 성립된다. 따라서 대신사께서 접을 조직함으로써 이 3대 요소가 충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포덕4년 7월 23일에 대신사께서 해월신사를 북접주인으로 정함으로써 우리 교단의 정통연원은 북접에서부터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이 해 8월 14일에 해월신사에게 도통을 전수하였다. 이것이 대신사께서 말씀하신 사사상수(師師相授)로서 우리 교단의 첫 번째 사사상수가 된다.
2. 교단 체제의 정비와 포제(包制)의 시행
해월신사는 포덕12년 3월 이필제의 영해작변 후 피신생활을 하다가 영월 박영걸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포덕16년 2월에 단양 도솔산 근처에 있는 송두둑으로 이거한 후 이 해 10월 18일에 정선 등지에 통문을 보내어 교단의 융성을 기원하는 제례를 지냈다. 이 때 해월신사는 예복을 입고 관모를 썼다. 그리고 이 날 ‘용시용활’의 법설을 말씀하신 후 “내 이 뜻을 후세 만대에 보이기 위하여 내 스스로 이름을 고쳐 수범을 보이노라” 하시고 자신의 이름 경상(慶翔)을) 시형(時亨)으로 바꾸었다. 이어서 강수는 강시원으로, 유인상은 유시헌으로, 전성문은 전시황으로 고치는 등 여러 제자의 이름을 ‘때 시(時)’ 자를 넣고 바꾸게 했다. 또한 이날 강수를 서열 2위인 차도주로 임명하고 그 후 유인상을 서열 3위인 도접주로 임명하여 교단 체제를 정비하였다. 포(包)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은 해월신사가 포덕 25년 10월 28일 대신사의 탄신향례를 지낼 때 처음으로
‘각 포의 두령이 참석했다’는 기록이 ’시천교종역사‘에 나온다. 그리고 같은 10월에 해월신사가 교장(敎長), 교수(敎授), 도집(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의 육임제를 제정하여 각 포에 두었다. 이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포제가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교장: 자질이 있고 신망이 두터운 사람.
교수: 성심으로 수도하여 가히 교리를 전할 수 있는 사람
도집: 위풍이 있고 기강이 밝아 시비선악의 한계를 아는 사람
집강: 시비를 밝히고 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
대정: 공평하고 부지런하여 중후한 사람
중정: 바른말을 능히 할 수 있는 사람
해월신사는 포덕28년 5월에 보은 장내리로 이거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육임소를 설치하여 매월 1회씩 각 접주들에게 강론을 했다. 당시 동학은 강원도를 비롯해서 충청도, 경기도, 경상도, 남부 등지로 널리 퍼져 있었다. 그 후 대도소와 포 단위로 육임제가 확대 시행되었고, 장실이 있는 대도소에는 육임소를 두어 자문에 응했다. 그 후 포덕 30년 11월에 해월신사가 복호동에서 내칙과 내수도문을 지어 반포할 때에 ‘각 포에 반포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포덕 33년에 해월신사가 발송한 통유문에도 ‘이 쪽 포 연원이 저쪽 포 연원으로 옮긴다’고 하면서 그 잘못을 질책하는 내용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포덕20년대 후반부터 포라는 명칭이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포명(包名)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포덕 34년 3월11일 해월신사가 통유문을 발송해서 교인들을 보은에 소집하여 척왜양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 때부터이다. 당시 충청. 전라. 경상. 경기. 강원도 등 각지에서 2~3만 명이 보은 장내리에 모여 4월2일 해월신사의 해산명령이 내릴 때까지 포별로 행동했다. 당시 보은 취회에 참가한 포명과 대접주는 다음과 같다.
충의포대접주 손병희. 충경포대접주 임규호, 청의포대접주 손천민, 문청포대접주 임정준, 옥의포대접주 박석규, 관동포대접주 이원팔, 호남포대접주 남계천, 상공포대접주 이관영, 덕의포대접주 박인호, 태인포대접주 김개남, 부안포대접주 김낙철, 청풍포대접주 성두환, 금구포대접주 김덕명, 무장포대접주 손화중, 신산포대접주 김낙삼, 옥구포대접주 장경화, 완산포대접주 서영도, 청산포대접주 박원칠, 고산포대접주 박치경, 풍대포대접주 김석윤, 봉성포대접주 김방서, 공주포대접주 깁지택, 예산포대접주 박희인, 문의포대접주 암정재, 내면포대접주 차기석, 홍천포대접주 심상훈, 인제포대접주 김치운, 보은포대접주 김연국, 서호포대접주 서장옥, 정선포대접주 유시헌, 대흥포대접주 이인환, 덕산포대접주 손은석, 장흥포대접주 이방언, 아산포대접주 안교선, 영호포대접주 김인배.
이때부터 접의 상위개념인 포가 동학의 연원조직을 대표하는 단위조직이 되었다. 그러니까 포는 여러 개의 접 조직을 포용하는 상위 기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포를 대표하는 대접주 밑에는 접별로 차접주. 수접주. 접주. 접사 등이 있어 포를 형성하였다.
3. 동학혁명당시의 남북접 문제
동학혁명 당시에는 한 개의 포가 10개 내지 20개의 접을 거느리고 있었다. 지금은 학계에서 ‘동학군이 봉기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과거에는 동학혁명과 관련된 거의 모든 기록에는 ”동학군이 기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왜냐하면 동학혁명은 동학의 포가 중심이 되어 일어난 혁명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동학혁명을 면밀히 검토해보아도 동학군은 예외 없이 동학의 포조직이 있는 곳에서만 봉기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학혁명은 동학의 핵심조직인 포 조직을 중심으로 기포한 혁명이었다.
그런데 동학혁명 당시 남접과 북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결론적으로 말해서 남북접은 한때의 대립적 시각에서 비롯된 한시적 명칭이었다.
동학에는 종문을 달리하는 남북접은 애초에 없었다. 대신사 당시에도 남접이라는 기록을 아직 보지 못했다. 해월신사를 북도중주인. 북접주인. 북접법헌. 북접대도주 등의 명칭으로 불렀기 때문에 남접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남접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서 동학혁명 당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오지영은 그의 저서 “동학사‘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남접이라는 원인은 처음 어디로부터 나온 것이냐. 수운 선생 당시에 북접이란 말이 처음으로 발생되었다. 어찌된 말이냐 하며 수운선생이 있던 용담정과 해월선생이 있던 검악촌이 용담정 북편에 있다함을 지명함이며, 수운선생이 말년에 도를 해월선생에게 맡기고자 하는 의향이 있어서 어느 제자가 오든지 하면 말씀을 이렇게 하였다. ”군등이 만일 나를 보러 오겠거든 먼저 북접주인 해월을 찾아보고 오라, 나도 북접으로 가겠노라” 하셨다. 북접이라는 명사가 이와 같이 발생된 후에 후인들은 이 말씀을 가장 이상히 여겨 이 다음에 도운수가 북접에 있다는 등 미신적으로 해석하여 북접에 붙어야 산다는 등 허무맹랑한 말을 지껄이는 자도 많았다.“
남접. 북접이라는 말은 동학혁명 초기에 무장봉기를 주장하는 전봉준 계열의 동학군을 편의상 남접이라 불렀고 무장봉기를 반대했던 해월신사를 중심으로 한 동학 지도부를 북접이라 한데서 연유한다. 이와 관련해서 동학혁명 연구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김의환 등의 다음 이야기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김의환 교수: “동학에서 남북접이라는 칭호가 생긴 것은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이다” 전봉준 공초: “호남을 남접이라 칭하고 호중을 북접이라 칭했다.
조기주 종법사: 남접이란 호남접이란 명칭에서 호자가 생략된 말이다“
따라서 이 해 6월에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상륙하여 왕궁을 점령하는 굴욕적인 사건이 벌어지자 그동안 은인자중하던 해월신사가 9월 18일에 드디어 총 기포령을 내려 남북접이 통합전선을 형성하게 되면서 남접이니 북접이니 하는 이야기는 없어지고 말았다. 즉 공주 우금치 전투를 앞두고 논산 대본영에서 전봉준 장군과 손병희통령이 만나 결의형제를 맺고 악수하면서 남접이니 북접이니 하는 말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로써 남접이란 원래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4. 의암성사의 일본망명
동학혁명 후 포덕38년 12월에 의암성사가 도통을 이어받았다. 그 다음 해 해월신사가 체포되어 6월에 순도하자 의암성사는 포덕41(1906)년 6월2일 해월신사의 2주기에 경자설법을 통해서 지도체계를 확립한 후 해외망명을 모색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포덕 41년에 이르러 정부는 동학에 대한 탄압을 가중시켰기 때문이다.
동학혁명 후 많은 동학군 패잔병들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영학당. 남학당. 활빈당 등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부연하자면 동학혁명 다음해인 을미년에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살해되자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을미의병이다. 그러나 동학혁명 당시 왕궁이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한 후 김홍집을 내세워 조직된 친일내각이 일본군을 상대로 일어난 의병활동을 탄압하였다. 그러한 관정에서 동학에 대한 탄압도 가중되어 갔다.
그래서 포덕 41년 경자년 8월에 성도주 손천민이 경군에 체포되어 서울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도하였고, 이 무렵 평안도 영변 용추동의 강성택 도인이 체포되어 순도하였으며 김연국도 공주에서 체포되어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의암성사에 대한 관헌의 추적도 집요하여 이 무렵 홍병기로부터 예천군수 이소영이 군졸을 풀어 의암성사를 뒤쫒고 있다는 급보를 받고 제천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죽산 미륵평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의암성사는 망명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정부는 그동안 그토록 탄압하던 서학, 즉 기독교에 대해서는 공인해 주면서 오직 동학에 대해서만 여전히 탄압일변도로 대하는데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신변의 안전도 도모할 겸 장차 포덕천하를 위해 세계대세도 살피기 위해 망명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원래는 의암성사가 미국으로 망명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서 포덕 42년 3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다.
5. 대두령제(大頭領制)의 시행
그런데 이런 와중에서도 의암성사가 일본으로 망명한 포덕42년 후반부터 포덕43년,44년에 걸쳐 국내 서북지방으로 마당포덕이 일어나 동학의 교세가 급신장하기 시작하였다. 호남지방은 동학혁명의 여파로 교세가 몰락하다시피 한데 반해서 동학혁명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던 서북지방으로 동학이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서북 지방에는 ‘집집마다 동학이요, 사람마다 주문을 외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교세가 들불처럼 일어나 라용환 포. 라인협 포. 오영창 포 등 수백개의 포가 조직되었다.
이렇게 동학이 크게 일어나자 일본에 체류 중이던 의암성사는 포덕 44년 2월에 국가경영의 방략인 ‘삼전론’을 발표하는 한편 이 해 봄에 국내 교단에 경통을 보내어 다음과 같이 조직을 정비하고 대두령제를 시행하였다.
수청대령 십만지장 이용구
해명대령 오만지장(보류)
대접주 1천명 이상
수접주 5백명 이상
해접주 105명 이상
당시 대접주는 라용환,이종훈, 홍기억, 오응선,노석기 등 2백여명에 이르렀다.
포덕 45년의 갑진개화운동은 바로 이러한 연원조직을 바탕으로 전개한 혁신운동이었다.
6. 천도교의 대고천하(현도)와 중앙총부의 설치
의암성사의 밀명에 의해 포덕 45년에 일어났던 갑진개화운동은 진보회장 이용구가 송병준의 친일단체 일진회와 야합하는 배교친일 행위로 말미암아 좌절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그 다음해 이용구가 “일본의 지도와 보호 아래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망국적 선언서를 ‘황성신문에 발표한 열흘 후인 11월 17일에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써 동학교문이 덩달아 친일집단으로 오인되어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의암성사는 황급히 자구책을 강구한 끝에 12월 1일을 기해서 ’동학‘을 ’천도교‘라는 근대 종교명칭으로 바꾸어 대고천하함으로써 비로소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의암성사는 일본에서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그 다음해, 즉 포덕47년 1월 5일에 부산을 통해 귀국하여 1월28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때 4만여 명의 교인과 일반시민이 환국하는 의암성사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일본에 갈 때 몰래 숨어서 망명했던 의암성사가 불과 4년 만에 떳떳하게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많은 인파의 환영을 받으면서 당당히 귀국하였다는 사실은 실로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의암성사 는 상경 즉시 천도교를 근대적인 종교체계로 개편하는 작업을 시행했다. 그래서 2월1일 종령(宗令) 제1호 공포를 시작으로, 2월10일에는 종령 제5호로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을 공포함과 동시에 종령 제7호로 원직(原職)인 육임과 주직(住職)인 중앙총부 임직원을 선임 발표하였다. 계속해서 2월16일에는 천도교중앙총부를 설치하여 천도교의 상징인 궁을기를 게양했다. 3월3일에는 종령 제15호를 공포하여 전국에 72개 대교구를 설치함으로써 조직체계를 완비하였다. 그 후 정교분리(政敎分離)정책을 단행하여 이 해 9월 21일에 이용구를 비롯한 친일배교분자 62인을 출교 처분함으로써 이들이 장악했던 교단 재정마저 사라져 한 때 재정적인 타격으로 혹심한 곤경에 처하기도 아였으나 불과 3년 미만에 교단을 기사회생시키는 데 성공하여 오히려 교단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7. 중앙총부의 주요 조직체계와 원직의 변동
중앙총부의 특징은 기관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에 있다. 따라서 이 제도는 종전 은도시대의 불문율(不文律)에 의한 교단 운영체제를 탈피하여 성문법(成文法)에 의한 근대적 교단조직을 지향하고 있다. 그 첫 번째 성문법이 천도교대헌이다.
이 대헌을 간략히 살펴보면 교단의 정점에 의암성사가 계신 장실(丈室)이 있다. 이 장실은 종인(宗印)을 관수하고, 종령을 반포하며, 종단의 기밀사항을 다루는 교단의 최고 권위기관이다. 장실 밑에는 대도주가 있는데 처음에는 의암성사가 대도주직을 겸임하다가 포덕 48년 8월에 김연국을 대도주로 임명하였다.
중앙총부는 다음과 같이 원직과 주직의 이원체제(二元體制)로 구성하였다.
1,원직
1) 천선: 성도사. 경도사. 신도사. 법도사
2) 도선: 교장. 교수. 도집. 집강. 대정. 중정
3) 교선: 대교령. 중교령. 소교령(포덕연비의 다소로 임함
2. 주직
중앙총부원. 대교구원. 중교구원. 소교구원
(대교구장은 대교령, 중교구장은 중교령, 소교구장은 소교령)
여기서 중앙총부의 임직원은 원주직을 막론하고 원칙적으로 원직을 지닌 교역자만이 임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용구 등 일당이 출교처분을 당하자 이들은 이 해 12월에 시천교를 별립하였다. 그런데 이용구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상당수 교인들이 시천교에 합세함으로써 교단이 재정적 공동상태에 빠지게 되자 의암성사는 부득이 72개 대교구를 통폐합하여 그동안 일련번호를 붙여 관리하였던 대교구를 지역명칭을 붙여 23개 대교구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의암성사는 그 후 포덕 55년에 37개 대교구로 확대개편 하였다.
한편 대도주인 김연국이 변절하여 포덕 49년 초에 이용구를 따라 시천교의 대례사가 되자, 의암성사는 1월 18일에 차도주인 춘암상사를 대도주로 승임(陞任)하였다. 이와 아울러 1월 26일에 이용구 등의 배교행위로 교세가 갑자기 위축됨에 따라 연원직제를 도훈(道訓) 1500호, 교훈(敎訓) 300호, 봉훈(奉訓) 30호로 축소 개편하였다. 당시 도훈은 3명, 예비도훈은 16명, 직접교훈은 45명, 직접봉훈은 12명이었다.
이와 같은 이용구 일당의 배교행위로 말미암아 여러 두목들이 연원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이제 현도가 되었으니 연원제도를 폐지하자’ 고 건의하였다. 이에 의암성사는 숙고한 끝에 연원의 폐해를 교정하기 위하여 부구총회(部區總會)의 결의를 거쳐 이 해(포덕49년) 11월 23일을 기해서 다음 3대원칙에 따라 연원갱시조직을 단행하였다.
1. 천주(薦主) 연비(聯臂)라 칭하는 구시제한(舊時制限)은 일체 폐지함.
2. 사사상수(師師相授)하는 로(路)를 개(開)하여 각(各)히 지의상합(志義相合)한 인(人)으로 일단(一團)을 조성(造成)하되, 구시종유(舊時從遊)를 물론하고 지(只)히 자심자유(自心自由)로 해연원(該淵源)을 정(定)함.
3. 하인(何人)을 물론(勿論)하고 자기(自己)의 교력범위(敎歷範圍)로 다수 낙종자(樂從者)를 단합(團合)하여 자기의 주간(主幹)하는 실적(實蹟)을 성(成)함.
이것이 우리교단 최초의 갱시조직(更時組織)이다. 그 후 의암성사의 불퇴전의 성력에 힘입어 오관제도가 정착되면서 교세가 진작됨에 따라 포덕 53년 2월 21일에 종령97호로 연원직제를 다시 개편하여 도령(道領) 5000호이상, 도훈(道訓) 1500호이상, 교훈(敎訓) 300호이상, 봉훈(奉訓) 30호이상으로 변경하였다.
8. 3.1운동 이후 연원조직의 변화
기미년의 3.1독립운동은 천도교의 절대적인 주도하에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3.1운동으로 말미암아 우리 교단은 막대한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3.1운동으로 교단 지도부가 대거 투옥되는가 하면, 더구나 의암성사가 중병을 얻어 출옥 후 환원하면서 교단은 여러 가지로 갈등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3.1운동 이후 교단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한때 무교주제(無敎主制)를 시행하는가 하면 포덕61년에 의정회(議政會)가 구성되었는데, 포덕 62년 12월에 개최된 의정회 결의에 의해서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이 종헌(宗憲)으로 개정되었다. 또한 대도주를 교주라 칭하고 연원제를 폐지하는 등 진통을 겪기도 하였다. 그리고 포덕64년에 중앙총부를 중앙종리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런 가운데 포덕65년 11월에 포덕제가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각 연원에는 포명(布名)을 부여하고 이를 주관하는 포덕사를 두기로 하는 등 포제도를 실시하게 되면서 사실상 62년 12월에 의정회에서 폐기하였던 연원제가 부활되었다. 이 포제도는 30호에 포덕사 1인, 300호에 주간포덕사1인을 두고 지역에 관계없이 교인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30호를 기본단위로 결성토록 하였다. 포의 명칭은 ‘순(順) .수(守). 정(正). 명(明). 지(至). 수(水). 시(侍). 진(眞). 화(化). 동(同). 흥(興). 문(文). 치(致).종(宗)’ 글자아래 성(誠).경(敬).신(信).법(法).지(知) 중에서 한 글자를 붙여 짓도록 하였는데(예:순성포. 정경포 등) 이때 56개포가 결성되었다.
교단은 포덕67년부터 신파와 구파로 갈리어 이른바 신구파분규(1차)가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포덕 71년 12월에 1차 합동이 이루어진 후 양측의 합의에 의해서 2백호 이상의 포에 대해서는 이를 완성포로 인정하여 포명을 부여하고 이에 따라 91개의 포와 주간포덕사를 정했다.
그런데 포덕 73년 4월에 2차 분규가 재연되자 신파는 포갱시조직을 단행하여 이 해 12월에 연원조직을 개편하여 500호이상 도정(道正), 250호이상 교정(敎正), 100호이상 신정(信正), 50호이상 선정(宣正), 25호이상 종정(宗正)으로 하였다.
그리고 각 포에는 주관도정 밑에 도정을 두기로 했다. 아울러 포명은 ‘성.경.신.법.지.현.통.정.개.명.보. 인.선.제.도.동.화.대.용.광.시.종.순.수.진.락.창.가.흥.청’ 글자아래 원(源)자를 붙였다. 그러다가 포덕 78년 다시 원직이 개편되어 200호이상 도정, 100호이상 교정, 10호이상 신정으로 바뀌었다.
한편 구파는 포덕73년 8월에 포제(布制)를 포제(包制)로 변경하여 기본단위를 300호로 하고 각 포에 도훈을 비롯해서 성도사. 경도사. 신도사. 법도사.를 대표로 선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포덕 72년(1931)에 일제가 만주사변을 도발한데 이어 포덕78년 7월에는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포덕 79년 4월에 국가총동원령을 공포하여 전시체제를 강화해나갔다. 아울러 일제는 국민정신총동원령을 전개하는 등 이른바 황국신민화 운동을 강행하면서 포덕 80년부터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등 민족말살정책을 강화해나갔다. 이에 따라 종교 본연의 기능마저도 극도로 제한되자 신구파는 분규의 명분을 상실한 채 포덕 81년 4월에 합동(2차)하지 않을 수 없었다.
9. 해방 후의 연원조직의 변화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가 패망하고 포덕86(1945)년 8월에 조국이 해방되었으나 뜻하지 않는 남북분단의 비극적 사태가 발생했다. 그런 가운데 이 해 10월에 임시전국대회가 열렸는데 최린의 출교문제로 잠재했던 신구파 계열간의 의견충돌로 인해 결국 포덕 87년 5월에 신구파의 세 번째 분규가 야기되었다.
그런 가운데 남북분단으로 절대다수를 점하던 북한 교세가 묶여 남한의 교세가 위축되는 등 더 이상 분규를 지속할 명분을 상실하게 되자 포덕89년 4월 신구파가 합동대회를 열고 진용을 새로 구성하였다. 한편 비록 남북이 분단되었으나 북한에는 광복 후 마당포덕이 일어나 교세가 급신장하자 포덕 87년 1월에 중앙총부와의 소통을 위해 함흥에' 북선연락소', 평양에 '서선연락소'를 설치함과 아울러 이 해 연말에 '천도교북조선연원회'를 조직하여 의장에 이돈화, 부의장에 김광호를 선임하였다. 그리고 남북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자 포덕 88년 2월에는 두 연락소를 통합하여 평양에 '천도교북조선종무원'을 설치하였다.
한편 북조선연원회는 포덕 89년 3월 1일을 기해 연원조직을 통하여 비밀리에 남북분열저지운동(일명 3.1재현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사전에 비밀이 탄로되어 1만7천여 명의 교인이 체포되는 수난을 겪고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포덕 89년 4월에 포제(包制)를 실시하여 북한 전역에 36개 포를 두었다. 그리고 포덕91년(1950)년에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일어나 3년 동안 지속되었던 전란이 멈춘 후 포덕 96년 1월에 임시대회를 개최하여 천도교교약(天道敎敎約)을 천도교헌(天道敎憲)으로 바꾸고 중앙기구의 명칭을 천도교중앙총부로 복귀시키는 등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연원제도를 개편했다.
이에 따라 과거의 포제를 폐지하고 갱시조직을 단행하여 2백호이상 도정, 1백호이상 도훈, 50호이상 교훈, 25호이상 신훈으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다시 포덕 101년에 갱시조직을 하여 25명이상 신훈을 20명으로 변경했다.
또한 중앙총부는 포덕 102년 8월 20일 ‘연원갱시조직요강’을 공포하고 12월 20일까지 연원을 갱시조직토록 하였다. 갱시조직 방법은 20호이상 신훈, 50호이상 교훈, 1백호이상 도훈, 2백호이상 도정으로 하였으며, 한 연원에 2개 이상의 도정이 있을 경우에는 도훈회의에서 대표도정 1인을 선출하도록 하였다.
그 후 포덕 108년 4월에 최덕신 교령이 취임하고 그 해 12월의 전국대회에서 교헌을 개정하여 교령이 연원회의장과 재단이사장을 겸임하는 강력한 교령중심제로 개편되었다. 그 후 포덕 113년 12월에 교령이 당연직으로 되어있는 연원회의장직을 분리한 데 이어 포덕 114년 8월에는 도정 간담회를 개최하여 연원을 갱시 조직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이 해 12월에 연원회규정을 개정하여 도정 2백호이상, 도훈 1백호이상, 교훈 21호이상, 신훈 7호이상으로 개편되어 그 다음해인 포덕 115년부터 시행하였다.
포덕 117년에 최덕신 교령과 연관된 교회분규가 1년 동안 지속된 후 포덕 118년 4월 제13차 연원회의에서 조기주 도정이 연원회 의장으로 재선되었다.
그리고 포덕 123년 4월에 개최된 제18차 연원회의에서 포제도가 시행되면서 각 연원집단에 현재와 같은 포명(布名)이 부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이러한 연원회 기본골격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포덕 157년에 이르러 전통적인 교호제(敎戶制)가 교인제(敎人制)로 바뀌는 전환기를 맞이하면서 연원조직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 천도교연원회 사진첩 - 포덕 159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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