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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戰 論 <br/>道戰·財戰·言戰 <br/>鄭在權 (동의대 철학과) <br/><br/>제1장 서론 <br/>兵戰一款 自歸無奈(병전일관 자귀무내 : 무기로만 싸운다는 것은 자연히 쓸데없이 되는 것이요), 畏尤甚於兵戰者 有三焉(외우심어병전자 유삼언 : 무기보다 더 무서운 것 세 가지가 있으니), 一曰道戰 二曰財戰 三曰言戰(일왈도전 이왈재전 삼왈언전) <br/>첫째 도전이요, 둘째 재전이요, 셋째 언전이라.  <br/>󰡔老子󰡕에 和光同塵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道의 경지를 體得하면, 怪力亂神의 모습을 갖는 것이 아니라 日常事 모습과 똑 같다는 뜻이며, 道를 전혀 모르는 사람 같이 보이게 될 때 참된 道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br/>의암성사께서 말씀하신 道戰, 財戰, 言戰은 마치 일반인들의 처세술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나 자세히 보면 한울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가장 看過하기 쉬운 것으로서 가장 중요한 면이다. <br/>한울님을 모시고, 降靈을 接하면 일상사 貧富에 초연하여 貧寒함 속에서도 마음이 편하고, 부귀 속에서도 겸손할 수 있는 것은 대 원칙이 그렇다는 의미이다. 한울님을 모신 천도교인들은 布德天下의 임무가 막중하기 때문에 포덕감응을 받지 못한 일반인들이 추구하는 바를 먼저 得하여 그들의 부러움을 사야 한다. 일반인들의 추구하는 바는 ‘현명하게 되는 것이요’, ‘健康’이요, ‘부자로 사는 것’이요, ‘신분이 높아지는 것’이요, ‘장수하는 것’이다. 천도교의 한울님의 감응을 받은 사람은 󰡔노자󰡕의 和光同塵과 같이 俗人들의 추구하는 인생의 목적을 그들보다 훨씬 앞질러 획득하여 그들로 하여금 “천도교 신앙을 하면 모두 훌륭한 사람이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해야 한다. <br/><br/>布德天下는 단순히 현란한 말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말’이란 ‘설득’이 전제된 것이다. ‘말’이란 ‘나’의 생각은 맞고, ‘너’의 생각은 틀렸다는 전제로 시작되는 것이다. 논쟁으로는 평생 한 사람도 포덕할 수가 없다. 오직 몸으로 보여줘야 한다. 몸으로 보여준다는 말은 和光同塵의 모습으로 세속적 삶을 누구보다 더 훌륭하게 살아야 한다. 오직 천도교인은 그 삶에 자만하지 않고 모두 한울님을 모시는 사람의 몫으로 돌리고, 세속적 성공에 집착하지 않고, 언제나 감응되는 삶 속에서 세속적 성공을 대대로 계승하게 하며, 포덕천하의 목적을 잊지 않으면 된다. <br/>차라리 구두쇠가 되어도 세속적 성공을 하는 것이 포덕천하에 도움이 된다. 천도교를 신앙하면 할수록 더 가난해져서 빈천해지면 그 무슨 말로써 일반인들로 하여금 한울님 강령으로 引導할 수 있겠는가? <br/>의암성사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道戰, 財戰, 言戰을 설파하셔서 자칫 천도교인들께서 소극과 나태함, 자족함과 은둔, 개인 중심의 感應主義를 경계하고자 하셨으며, 이러한 생각과 講說은 100년이 지난 오늘에 더욱 절실하니 의암성사님의 慧眼 앞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br/><br/>제2장 道戰  <br/>1. 國各有國敎(각국유국교) <br/>한 개인에는 개인의 道가 있고, 나라에는 국가의 道가 있다. 道는 精神이다. 미국에는 미국의 청교도 정신이 있고, 중국에는 중화정신이 있고, 대한민국에는 배달정신이 있다. 정신이 없는 개인은 정신병원에 가야하고, 정신이 없는 국가는 역사의 뒷장에 사라져야 된다. <br/>나라가 굳건히 서기 위해서 가장 나중에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나라의 道이다. 나라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국민이 있고, 영토가 있고, 주권이 있고, 정신이 있어야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이다. 유대인들을 보라. 2천년 동안 국민도 없었고, 주권도 없었고, 영토도 없었지만 종교적 정신만 가지고서 나라를 다시 세웠다. <br/>의암선사께서는 우리나라에 가장 중요한 것이 道를 세우는 일이라고 하셨다.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무기는 道이다. 1차세계대전의 살상무기, 2차세계대전의 원폭과 현대의 국가적 테러에서도 유대인들은 살아남았다. 우리도 언젠가 2천년 동안 국가도, 민족도, 영토도 없는 유대인 같이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br/>그러나 한울님을 모시는 道를 가슴에 새기고 사는 한 1천년 뒤에라도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고, 민족이 생길 수 있고, 주권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이 시대에 증명하고 있는 일이다. <br/>우리가 불교를 믿어서 우리 동포를 확인할 수 있을까?, 우리가 기독교를 믿어서 우리 동포를 확인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한울님을 모셔서 우리 동포를 확인해야 한다. 한울님을 모시는 몸은 흑인이라도 동포이며, 백인이라도 동포이며, 인디언이라도 동포이며, 일본인이라도 동포이다. 한울님의 道는 無極大道이니, 宇宙森羅萬象에 걸쳐 모든 인종의 피부색깔을 초월하여 인간과 만물에 걸쳐 우주를 덮고 있기 때문이다. <br/><br/>2. 무엇을 믿는 것인가? <br/><br/>(1) 侍 ---- 모심 <br/>侍란 모심을 의미한다. 모심이란 보이는 神靈과 보이지 않는 神靈을 같이 본다는 의미이다. 모심에 있어서 수운대신사께서 “侍字 內有神靈 外有氣化 各知不移者也”라고 하셨다. 무엇을 모시는가? 神靈과 至氣를 모시는 것이다. 神靈과 至氣는 같은 것의 다른 이름이다. 눈에 보이는 神靈은 몸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神靈은 精神이다. <br/>모심의 반대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을 보려고 애쓰고, 눈에 보이는 신령은 신령이 아닌 것으로 보는 것이다. 모심의 반대말은 怪力亂神이다. 보이지 않는 신령을 본 듯 말하고, 보이는 神靈을 神靈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데에서 怪力亂神이 발생한다. <br/>(2) 內有神靈 <br/>神靈은 無所不在한 것이어서 공간의 한계에 구속되지 않는다. 內有神靈에서 內란 무슨 의미인가? 內란 우주의 氣運과 교통하고 우주의 기운을 마시고, 먹고, 기대고, 배출하는 몸이기에 그것은 구속의 상징이 아니다. 즉 몸은 구속의 상징이 아니라 氣化의 부분이다. 그래서 神靈이 氣化에 근거한다는 말은 지극히 당연한 의미이다. <br/>내 몸에 모신 神靈은 至氣의 일부분이며 인간적 입장에서 부른 명칭이다. 우주적 입장에서는 똑 같은 至氣이나 인간적 입장에서는 神靈이다. <br/>(3) 外有氣化 <br/>外有氣化에서 ‘化’란 ‘造化定’에 있어서 ‘造化’이며, ‘無爲而化’로 묘사된다. 내 몸에 모신 神靈이란 말은 ‘내 몸’과 ‘모셔진 神靈’이란 두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내 몸’이란 눈에 보이는 ‘神靈’이고 ‘모셔진 神靈’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精神이다. ‘몸’이나 ‘精神’이 모두 한울님이나 오직 ‘몸’을 통하여 神靈은 외부 ‘至氣’와 관계를 맺을 뿐이다. <br/>(4) 各知不移者也 <br/>인간은 자신의 五官을 통하여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곤충은 자신의 오관을 통하여 곤충관계를 형성하고, 박쥐는 자신의 오관을 통하여 박쥐관계를 형성하고, 달팽이는 자신의 오관을 통하여 달팽이 관계를 형성한다. 關係란 社會이다. 인간의 오관을 통한 인간관계란 인간사회를 의미한다. 氣化는 이렇듯 모든 생명체의 몸을 통하여 각각의 사회를 형성시키며, 각각의 사회를 통하여 萬物을 이루니 氣運 하나로써 만물을 이루고, 氣運하나로써 우주가 이루어지나 氣運의 근본 출발점은 몸이다. <br/>萬物同體感으로서 우주 한울님과 개체 한울님의 교통은 각자 몸을 통하여 각자의 사회를 이루고, 각자의 사회를 통하여 우주로 관통되기 때문에 사람 한 몸이 곧 우주의 몸과 관통하고, 우주의 몸과 신령이 사람 한 몸과 신령으로 통하는 이치이다. <br/>(5) 삶과 죽음의 문제 <br/>인간의 삶과 죽음은 이렇듯 우주 한 몸과 우주 신령과 유대관계 속에 있는 것이니 살고 있다하여 산 것도 아니고, 죽는다고 하여 죽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몸과 우주 신령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 개체의 삶과 죽음이 모두 삶이고, 삶과 죽음이 모두 죽음이기도 하다. 우주에 음과 양이 있듯이 몸의 탄생과 몸의 소멸이 지극히 당연한 순환이다. <br/>우리의 道가 弓弓乙乙의 道라면 弓乙이란 太極의 형상인데 太極이 무엇인가? 첫째는 陰과 陽의 對待이다. 陰이 없는 陽이 없고, 陽이 없는 陰이 없다는 것으로 인간의 心이 우주를 觀하는 유일한 공식이기 때문에 陰陽對待의 원칙에서 벗어나면 道의 관점이 아니다. 둘째는 陰과 陽이 갈마드는 動靜의 원리이다. 삶의 뒷면은 죽음이요, 죽음의 뒷면은 삶이라. 내가 죽고 사는 것이란 陰陽의 動靜원리일 뿐이니 삶이 좋고, 죽음이 싫은 것도 아니다. <br/>(6) ‘몸’의 중요성 <br/>侍天主에서 내 몸에 모신 한울님이란 내 몸으로 한울님을 모신다는 의미이다. 내 몸은 우주의 근본이다. 내 몸에 대한 우주론적 이해가 없이는 한울님을 모실 수가 없다. 몸은 단순한 살 덩어리가 아니다. 몸은 서구 문명의 이원론적 구분 즉 영혼과 육체라는 구분된 몸이 아니다. 기독교적 思考의 肉體에는 神靈이 없기 때문에 靈魂만 개인 삶의 주체이며, 영혼만 그 심판의 대상이다. 천도교에 있어서는 내 몸에 모시는 한울님이기에 내 몸이 神殿이며, 내 몸이 한울님의 거처이며, 내 몸이 한울님이 氣化하는 통로이며, 내 몸이 한울님의 뜻이 영그는 종착점이며, 내 몸이 한울님의 뜻이 전달되는 유일한 언어이다. <br/>선천 오만년의 문제점은 몸으로서 한울님의 거처를 천대했고, 몸으로서 한울님의 언어를 몰랐으며, 몸으로서 한울님의 신전을 버렸으며, 몸으로서 한울님의 뜻이 현시되는 것에 눈 감았다는 사실이며, 그것이 선천 오만년의 문제점이었다. <br/>몸은 누구나 생명체이면 갖추어야 하는 필수적인 것이며, 몸의 소중함을 인정해야 한다. 벽돌로 만들어진 수백억짜리 신전이 어찌 몸의 숭고함에 비교될까? 대리석으로 치장하고, 유리로 치장한 신전은 귀하고, 몸의 먹고, 자고, 일하고, 땀나고, 울고, 웃고, 죽는 몸의 신전이 천하다는 생각 속에서 사회의 불평등을 만드니 결국 개인의 눈에 원통함의 눈물을 만들고, 양반과 천민이라는 제도 신전의 차별이 생기고, 부귀과 빈천이라는 금전 신전이라는 격차가 생긴다. <br/><br/>제3장 財戰 <br/>財也者 天寶之物貨也(재야자 천보지물화야 : 재화란 한울께서 주신 보배의 物貨니라), 業, 商業, 工業··· 美法良規也(농업, 상업, 공업 ··· 미법양규야 : 농업, 상업, 공업 ···은 좋고 선량한 법칙이고, 규칙이다.), 養其才達其技(양기재달기기 : 재능을 기르고 기술을 발달시켜야 한다.) <br/>한울님 강령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한울님 강령은 손발이 떨리고 쏟아지는 눈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의 땀흘리는 노동과 정신의 창의력 넘치는 지혜 속에 내린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몸이라는 삶의 영위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뜻이다. 그 방도의 기반은 財貨를 산출하는 몸의 노동력이며, 마음의 창의력이다. 재화는 天時와 地利와 人和 중 하나라도 없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은 오직 財貨의 생산 과정 중에 한울님을 발견하고 감응할 수 있다. <br/>쌀 한톨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태양과 달이 번갈아 200번을 넘게 지고 다시 떠야 하며, 雲雨가 번갈아 適時에 작용을 해야 하며, 봄과 여름과 가을의 계절을 거쳐야 하며, 농민의 파종과 김매기와 추수 있어야 하며, 商人의 유통이 있어야 하며, 재화의 유통을 가능하게 하는 화폐와 사회의 신뢰가 전제되어야 하며, 그 신뢰를 지키는 직업이 있어야 하며, 국가간 관계가 있어야 하며, 교육이 있어야 한다. <br/>쌀 한톨이 내 입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노고와 인내심이 요청된다. 사소한 재화 하나를 낭비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수 많은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노고와 인내심을 함부로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br/>財戰은 한울님의 뜻을 이 땅에 펴는 한울님의 활동이다.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을 들여 좋은 상품을 만들고, 상대적으로 적은 교육비를 통해 고급 인재를 양성하고, 상대적으로 적은 투자를 통해 고효율의 유통망을 개척해야 하는 것은 한울님의 활동 영역에 드는 일이다. <br/>의암성사께서 “왕가의 자제로부터 민간의 수재에 이르기까지 그 재주를 기르고 그 기술을 발달시켜야 한다”고 하셨다. 쌀 한톨이 내 입에 들어오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과정을 익히고, 자신의 적성과 일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살펴 그 일에 매진해야 한다는 말씀이시다. <br/>모든 재화란 天地自然의 至氣와 內有神靈의 氣運이 心氣妙合하여 발생한 것이니 재화의 생산이란 결국 한울님의 聖靈 덩어리인 것이다. 나의 땀과 육신은 한울님의 땀과 육신이며, 나의 지식과 지혜는 한울님의 지식과 지혜이니 한 물건 한 물건에 대한 至極한 정성은 한울님을 모시는 가장 중요한 행위이다. <br/>財貨란 단순히 삶을 윤택하게 하는 수단이 아니다. 재화란 한울님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한울님이다. 천지만물에 한울님 아닌 것이 없으니 재화엔들 없을소냐!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자신이 행하는 직업의 일과 노동과 마음씀에 한울님의 소신을 가져야 한다. 상품의 품질과 이윤을 면밀히 따지는 일은 한울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꾼이라는 증명이며, 그렇지 못한 행위는 한울님의 소리를 멀리하고 있다는 증명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br/>한탕주의의 재화 또는 부정부패로 만들어진 재화 또는 남의 실패를 자양분으로 획득한 재화, 눈속임으로 진실되지 못한 상품 생산 또는 판매에서 얻게 된 재화에는 한울님의 생명이 없다. 내 한울님이든 남 한울님이든 한울님을 허물어지게 하고 한울님을 주리게 한 재화는 참된 재화가 아니다 <br/><br/>제4장 言戰(언전) <br/>1. 時然後出言(시연후출연 : 때가 된 뒤에 말을 하라) <br/>時란 무엇인가? 하루에 24시가 있고, 일년에 12개월이 있다. 개인의 성장기가 있고, 개인의 쇠퇴기가 있다. 국가의 흥망성쇠가 모두 시기의 문제이다. 팔다리를 다친 환자의 고통도 시기가 지나면 그 고통을 망각하고 웃는 것은 시간과 시기의 조화 때문이다. <br/>때가 되면 잊게도 되나 때가 되면 잊지 말아야 하는 것도 있고, 때가 되면 말하지 않아야 되는 것도 있지만 때가 되면 꼭 말을 해야 하는 것도 있다. 잊어야 할 것을 잊지 않는다든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을 잊는다든가, 말하지 말아야 될 것을 말한다든가,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때를 모르는 것이며, 言戰의 원칙에 어긋난다. <br/>무릇 말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내유신령 한울님의 나들이하는 소리이다. 한울님은 나와야할 시기에 나오시고, 들어가야할 시간에 들어가신다. 한울님을 드러내는 시기에는 한울님을 드러내는 말씀을 해야 하고, 한울님을 드러내지 않는 시기에는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얼마나 많은 시기 동안 천도교인은 가족에 대해서든, 이웃에 대해서든, 국가에 대해서든 말해야 할 시기에 말 하지 않고, 말하지 말아야 할 시기에 말을 하였는가에 대해 면밀히 반성해 보아야 한다.  시기를 놓치고 말을 하면 천도교의 진리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의암선사 생시같이 열악한 상황보다 대한민국 국기가 휘날리는 이 시기에 천도교 포덕이 어렵게 전개된다면 의암선사께서 말씀하신 言戰을 다시 읽고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br/>시기는 어떤시대이든 중요하다. 평화시기든, 전쟁시기든, 식민시기든, 독립시기든, 국제시기를 가리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시기가 없다. 무엇이 적절한 말이며, 적절한 시기인가를 반성하지 않는 말은 말이 아니고, 소리일 뿐이다. 소리는 개도 소도 낸다. 포덕천하의 말이 시기와 적절성을 잃고 개소리 말소리로 되어서야 되겠는가? <br/>2. 若非言語之通涉 安可得交際之方策乎 (약비언어지통섭 안가득교제지방책호 : 만약 말이 통하지 못하면 어찌 교제할 방책이 있겠는가.) 사람이 무인도에 혼자서 산다면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이다. 사회적 관계와 감정적 관계는 다르다. 사회적 관계는 타인들 마음에 계시는 한울님과 정신적 합의를 통한 관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서양적 계약과는 다르다. 서양적 사회계약은 인간의 지능과 법적 공포를 염두에 둔 합의이다. 천도교의 관계는 인간의 지식적 지능에 앞선 것이며, 법적 공포 이전의 한울님에 대한 감응을 받은 사람과 사람들의 관계이다. <br/>감응을 통한 사람의 말과 감응을 받지 못한 사람들끼리의 말은 비록 그것이 말로써는 같다고 할지라도 그 말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전자의 말에는 상호 존중과 상호 신뢰와 상호 기쁨의 말이지만 후자의 말에는 상호 경쟁과 상호 불신과 패배자를 딛고 선 기쁨만 존재하는 말이다. <br/>말이라고 해서 다 말이 아니다 한울님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오관실행과 기도 및 주문이 선행되지 않는 말은 말이 아니라 흉기일 뿐이다. 흉기로 일어선 자는 흉기로 망할 것이다. 의암선사의 ‘말’ 속에는 한울님의 자애로운 ‘道’를 전제한 말로써 세계를 대적해야 한다는 자신에 찬 말이다. <br/>예수는 ‘사랑’이란 말 한마디로 유럽인들을 그의 발 아래 굽히게 하였으나 동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과 유대인 및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인종청소 및 문화파괴라는 씻지못할 죄를 지었다. 공자는 ‘仁’이라는 말로써 중국과 동아시아를 유교문화권을 만들었지만 가족이기주의와 생존지상주의로 인해서 우주에 가득찬 한울님과 내 몸에 살아계시는 한울님을 인식 못하고, 빈부귀천의 족벌체제 영속화라는 세속주의와 가족제도주의로 화석화되어 버렸다. 불교는 ‘자비’라는 말 한마디로 배타와 질곡에 놓여있던 정치권력과 신분의 차별을 넘었고, 인종과 국가를 넘어 많은 이들에게 우주적 관점에서 선 자신을 바라보게 하였으나, 가족을 배려하지 않는 지나친 금욕과 승려중심적 세계관이 인간 종족의 영속성과 참 생명의 소중함을 헛것으로 간주하게 하였고, 내 몸에 실린 한울님에 대한 확신감을 一切無常이라는 의심으로 대체시켜 버렸다. <br/>오직 대신사님께서 만물과 인류의 몸에 모셔진 한울님을 발견하시고, 왜곡된 유교적 가족주의를 세계동포주의로 확장시켰다. <br/>예수교의 내세주의 구원관에 의해 자행된 몸에 대한 경시와 몸의 자연스런 욕구에 대한 부정의식이 다양한 문화 속에 있는 몸의 다양성을 모두 부정해 버렸지만 대신사님만이 몸에 모신 한울님의 의미를 통하여 몸은 눈에 보이는 한울님이며, 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한울님이라는 이분법의 통일을 주창함으로써 몸이 갖는 숭고함을 회복시켰으며, 한울님 모신 한울님 몸으로써 모든 인간의 신분차별과 남녀차별을 극복하게 하셨다. <br/>대신사님의 한울님은 우주에 가득찬 한울님이기 때문에 불교식으로 보면 眞諦에만 존재하고, 俗諦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차별적 한울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울님을 모신 몸이라면 승려든 중생이든 모두 최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승려 중심의 세계관을 극복하셨다. 또 대신사의 한울님 정신은 불교의 모든 생명과 우주를 緣起法에 따른 渴愛에 의해 연출된 헛것으로 보는 관점을 지양하고, 모든 생명과 우주를 인간적 세계에서 보이는대로 한울님의 顯現된 모습으로 보는 포용적 입장을 가지고 계시면서 현세부정적 세계관을 극복하셨다. <br/>‘말’이란 입을 통해 소리로 전달되는 단순한 의미의 전달 만이 말이 아니다. 말이란 내 몸에 모신 한울님의 현현을 증거하는 말이기 때문에 좋은 말로써 바른 말로써 한울님을 드러내는 것이며, 말 자체도 한울님이다. 내 몸에 한울님을 모셔서 內有神靈이라 하지만 外有氣化으로서 ‘말’ 역시 중요한 한울님이다. 한울님은 만물 자체이면서 만물을 만물되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br/>말에 대한 신뢰와 말에 대한 공부가 없이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말하지 않고, 함부로 거짓을 퍼뜨리면 우주에 독초를 심는 것과 같다. 독초를 심으면 많은 생명이 죽게 될 것이다. 침묵해야 할 말을 함부로 퍼뜨린 말과, 침묵하지 말하야 할 말을 침묵함으로써 어느날 천도교의 진리가 세상에서 설 자리가 좁아진 것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한울님을 모시는 일에 맞지 않은 처세를 한 것으로 반성해야 할 것이다. <br/><br/>3. 事緖之曲直(사서지곡직 : 시비곡직을 가리라) <br/>몸은 눈에 보이는 한울님이며, 마음은 눈에 안 보이는 한울님이시다. 몸은 한울님이 우주와 관통하는 출입문이다. 몸을 학대하면 한울님이 괴로워하신다. 모든 사람은 그 처한 상황에 따라 자신과 세상을 보는 관점을 달리하게 되며, 그 관점의 차이 때문에 상당히 많은 영역의 한울님 출입문이 가리어져 外有氣化하는 출입이 막혀지게 된다. 의암성사님의 是非曲直을 가린다는 말씀은 가려진 한울님의 통로를 여는 행위이다. <br/>나의 한계를 넘는 방법은 나 아닌 타인 한울님의 경험을 참고함으로써만 가능해진다. 내가 남자이면서 동시에 여자일 수 없고, 내가 이곳에 거하면서 동시에 저 곳에 거할 수 없다. 내가 눈을 감으면서 눈 뜬 세상을 볼 수 없고, 내가 눈을 뜨면서 눈 감은 마음의 세계를 볼 수 없다. 한울님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나’의 경험과 타인들의 경험 폭을 수용함으로써 가능해진다. <br/><br/><br/><br/><br/> 言戰의 是非曲直의 문제는 이렇게 한 개인으로 보고 느끼는 것을 초월하여 다른 이의 보고 느낀 見聞을 종합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만 고집하는 속에는 타인 한울님이 아파하시고, 타인의 입장만 듣고, 나의 입장을 버리는 속에는 나의 한울님이 아파하시며, 나의 입장도 버리고, 타인의 입장도 버리는 속에는 나와 타인의 한울님이 다 같이 통곡하신다. 오직 나의 입장도 듣고, 타인의 입장도 듣는 속에 한울님은 自他를 막론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신다. <br/>言戰은 내가 말로써 타인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보다 나은 결론을 도출하는 행위이며, 自와 他의 한울님을 모두 모시는 행위이다. 言戰은 항상 상대를 전제하는 철저한 사회성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인간 사회를 형성하는 접착제는 다름 아닌 言語이다. 언어가 살아있다는 것은 한울님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생존은 언어의 교류에서 가능해진다. 언어의 생존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믿을 信字이다. 信을 破字하면 ‘사람’의 ‘말’이라는 뜻이니, 五行 상 중앙 土 자리가 五常의 信이니 信 없으면 仁義禮智도 없다는 의미가 된다. 즉 언어가 없고, 사용이 없다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의 문명과 문화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br/>4. 興敗利鈍 亦在於談判(흥패이둔, 역재어담판 : 나라가 흥하고 패하는 것과 빠르고 더딘 것이 담판하는데 달렸다.) <br/>나라란 우주 자체이며 우주 한울님이시다. 인간의 우주란 인간의 사회의 우주이며, 인간사회의 우주란 인간언어의 우주이며, 인간언어의 우주란 담판의 우주이다. 사람이 언어를 사용하여 교제를 이루고, 사회를 형성한다는 것은 談判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다. 談判은 단순히 다투는 것이 아니라 信賴를 기반으로 한 합의의 도출이다. 이 세상에 전쟁까지 포함하여 모두 합의일 뿐이다. <br/>합의는 신뢰이며, 그 출발은 談判에서 시작된다. 담판을 싫어 한다는 것은 신뢰를 싫어 한다는 것이며, 언어를 싫어 한다는 것이며, 인간을 싫어 한다는 것이며, 한울님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한울님을 모신다는 것은 끊임없는 담판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의 입장과 남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는 담판은 주먹구구식의 폭력일 뿐이다. 폭력을 싫어하고, 평화를 호혜한다면, 남의 입장을 헤아리고, 나의 입장을 파악하는 담판의 능력과 노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br/>한울님을 모시는 행위는 단순히 눈감고, 외우는 주문강령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끊임없는 노고와 기다림과 배려 속에 있다. 눈감고 주문 외우는 것도 어렵지만, 담판을 위한 대화의 노력과 기다림과 배려 또는 쉬운 것이 아니다. 후자의 일을 간과하고 전자에만 몰입하는 속에 한울님은 쇠퇴하고, 전자를 간과하고 후자에만 몰입하는 속에 한울님은 형식으로 남아 화석화된 儒學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br/><br/>제5장 總論 <br/>如坐井中(여좌정중 : 우물안에 앉은 것 같아서), 吾道之宗旨三戰之理合用則 豈非天下之第一乎(오도지종지삼전지리합용즉 기비천하지제일호 : 우리 도의 종지와 삼전의 이치를 합하여 쓰면 어찌 천하 제일이 아니겠는가.) <br/>우물 속에서는 우물이 좁은 것을 알지 못한다. 우물 밖에 나가야 우물이 좁은 것을 안다. 개인은 각자의 우물에서 한치도 밖에 나올 수 없다. 오직 道戰과, 財戰과, 言戰을 통하여 자신을 비추어 볼 뿐이다.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행하는 모든 세속적 행위에 한울님의 기운이 깃들지 않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치는 일이 중요한 관건이다. <br/>한울님은 세속의 모든 인간 행위 속에 계시는 한울님이시다. 나의 창의력 속에 한울님이 계시고, 세속적 삶의 성공 속에 한울님이 계시고, 내가 행하는 기술과 상품 속에 한울님이 계신다. 수도원 속에만 사는 한울님은 병원에 입원한 폐병환자이고, 교당을 찾지 않고 홀로 모시는 한울님은 한 밤중 죽음의 절벽 앞에 놓인 포대기에 싸인 아기이다. 한울님은 수도원에도 가시고, 교당에도 가시고, 직장에도 가시고, 오관실행에도 참여하시는 한울님이시다. <br/>한울님은 三戰을 토양으로 성장하신다. 三戰은 한울님의 집이며, 한울님의 양식이다. 三戰을 회피한다는 것은 한울님의 집을 버린다는 것이다. 사람이 생활하자면 셋방이라도 있어야 하듯이 집이 없으면 길가에 생활해야 한다. 한울님이 거처하시는 곳이 三戰이니 三戰을 회피하여 한울님을 모실수는 없는 일이다. <br/>三戰은 한울님의 양식이다. 三戰을 회피하면 한울님께서 드실 양식이 없다는 의미이다. 삼전은 세속적인 戰爭이 아니라 聖戰이다. 三戰의 ‘戰’字를 보라. 戰爭의 戰자이다. 믿을 信자의 마지막 단계가 전쟁이다. 전쟁이란 상호간 한쪽이 죽고, 다른 한쪽이 사는 행위이다. 전쟁은 한쪽은 틀려야 하고, 다른 한쪽은 옳아야 하는 모순관계이다. 三戰을 행하면 한울님이 살고, 행하지 않으면 한울님이 돌아가시게 되는 바 聖戰은 한울님을 모시는 자로서 행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적인 운명이다 三戰을 마음에 깊이 새겨 진실된 한울님을 모시는 삶이 그리 쉽지 않다. 쉬움 속에 한울님이 <br/>계신다면 모두가 한울님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돈이 좋지만 돈벌기가 어렵듯이 한울님 <br/>모시면 기쁜일이야 많지만 한울님 모시기가 그리 녹녹치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br/>라고 반문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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