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를 찿아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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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글은 고 동천교구 김 선 진 동덕님의 글입니다<br/>우리 선열의 성지입니다 천도교인의 자랑입니다 그러나 지방에서 누구도<br/>거들 떠 보지 않고 있어 묘소가 방치 되고 있습니다<br/>본 묘소는 평분(평평 한 묘)을 제암고주리 위령식을 1회 봉행 후 사무국장 김선진동덕<br/>등이 화성시에 건의하여 봉분을 2001년에 새롭게 성역화 했습니다 하지만<br/>얼마 전 방문 해 본 결과 무연고 묘 같이 방치 되어 있는 것입니다<br/>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우리가 과연 천도교인 이라면 선열 분들의 역사적 넋이 담긴 곳을<br/>방치하고 있으며 바른 교인 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요 ?<br/><br/>관리자님 !<br/>고주리 6인 묘소를 성지 정보에 올려 주세요 !<br/>우금치도 대전교구에서 매년 위령 행사를 하는 곳입니다<br/>천도교 역사를 찿는 것도 하나의 포덕 이라고 생각 합니다 죄송 합니다 <br/><br/>(4) 고주리 학살 <br/><br/>4월 15일 오후 6시경 <br/>제암리 주민들을 집단학살하고 집을 모두 불태운 수비대들은 <br/>다시 조희창을 선두로 하여 10여 명의 수비대와 함께 <br/>팔탄면 고주리 쪽으로 올라갔다. <br/>고주리는 제암리에서 불과 15분 거리 밖에 안되는 가까운 이웃 부락이다. <br/>이때 고주리 주민 대부분은 제암리의 참변을 목격하고 <br/>겁이 나서 거의 모두 다 산 속으로 피신들을 했다. <br/><br/>그러나 김흥렬(전 고주리 천도교 전교사) 가족만은 <br/>그 놈들도 사람인데 차마 죄 없는 사람들을 저희 마음대로 잡아 죽이지는 못하겠지’하는 <br/>오기의 생각에서 온 가족이 피신하지 않고 그대로 집안에 남아 있었다.<br/>조희창은 수비대들을 이끌고 곧바로 김흥렬의 집으로 달려가 포위를 하였다. <br/>그리고! 일부 수비대는 조희경이 이끌고 집안으로 들어가 방을 덮쳤다. <br/>이어 조희창은 수비대를 시켜 김흥렬을 비롯한 김성렬, 김세열, 김주업, 김주남, 김흥복 등<br/>한 가족 6명을 방에서 끌어내어 포박을 지어 집 뒤 언덕으로 끌고 올라갔다. <br/>이때 김성렬, 김세열, 김주남, 김흥복 등은 고문의 여독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를 못한 채 <br/>끌려갔다. 발안주재소장 사사카(佐阪)는 조희창을 불러 귓속말을 주고 받았다. <br/>조희창은 칼을 뽑아들고 김흥렬 앞으로 다가가 수촌리 백낙렬이 숨어 있는 곳을 대지 않으면 <br/>전 가족을 몰살시키겠다고 위협을 했다. 김흥렬이 모른다고 부인하자 <br/>조희창은 이 지방의 만세시위를 주동한 주모자가 백낙렬의 출처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된<br/>다고 위협하면서 칼등으로 김흥열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러나 김흥렬은 조희창을 노려보면서<br/>“내가 그 분의 출처를 안다 하여도 네 놈에게는 그 분이 숨어 계신 곳을 말할 수 없다. <br/>조국과 민족을 파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네 놈에게 무슨 말을 하! 라는 말이냐? <br/>백낙렬 앞으로 나온 현상금 200원이 그리도 탐이 난단 말이냐? <br/>삼괴지역과 발안 만세운동도 나와 이정근, 안정옥이 주동했는데 이미 이정근, 안정옥은<br/>너희 놈들의 손으로 죽이지 않았느냐? 너희놈들 마음대로 해봐라”하며 조희창 앞으로 몸을 <br/>밀면서 다가서자 옆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던 사사카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몸을 부르르 <br/>떨면서 군도를 뽑아 들고 사정없이 김흥렬의 목을 쳤다. <br/><br/>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비대들이 일제히 군도를 뽑아 휘둘러 차례차례 일가족 6명의 목을 <br/>치자 붉은 피를 뿜으며 목이 사방으로 펄펄 튀였다. <br/>그래도 수비대놈들은 무엇이 모자랐던지 사방에서 나뒹구는 몸체에 칼을 휘둘러 난도질을 <br/>쳐 여섯토막을 냈다. 팔, 다리가 토막이 나서 사방에서 팔팔 뛰었고 언덕은 온통 붉은 피로 <br/>물 들었다. 순간에 일어난 참변이다. <br/><br/>수비대들은 일가족 6명의 시체를 짚가리 옆에다 걷어 모아 쌓아 놓고 짚가리에서 짚을 날라다! <br/>쌓아 놓은 후 불을 질렀다. 이때 김성렬의 아들 김원기(金元基)가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와 <br/>이 처참한 모습을 보고 울면서 달려가 “나만 살면 뭘해 나도 같이 죽여라”하며 수비대들에게 <br/>덤벼들자 수비대는 구두발로 걷어 차 김원기는 기절한 채 언덕 아래 울타리 밑으로 굴려 떨어<br/>졌다. 이 때 마침 마당에 나와서 겁에 질려 이 광경을 바라보던 김주업의 처 한씨는 깜짝 놀래며 달려가 이 집안의 유일한 혈손인 김원기를 치마폭에 끌어안고 허둥지둥 집안으로 들어간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나 한씨 부인은 너무나 잔인한 참살 현장을 목격<br/>하고 큰 충격을 받아서 그날로 자리에 누워 신음하다가 3일만에 죽고 말았다. <br/><br/>이로 인해서 김흥렬 일가는 한꺼번에 7명이 몰살되고 만 것이다.<br/>그 후 수비대들은 매일같이 이 곳에 들려 시체에 손을 대지 못하게 감시 하다가 3일이 지나서야 묻으라고 지시를 했다. 그래서 이 부락 김시열은 문의 여독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시체를 추려 모아서 장사를 지낼 때 어느 토막의 시신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가 <br/>없어서 대충 찾아 맞출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고 말을 했다. <br/>그래서 김주업, 김주남, 김흥복 형제들의 시체라고 생각되는 것만을 대충 추려서 분묘를 만들<br/>었으나 그 유골은 여섯사람 전부의 것이었을 것이라고 말을 하였다. <br/><br/>그리고 김흥렬, 김성렬, 김세열 형제의 시체는 얼마나 불을 많이 놓았는지 도저히 분간할 길이<br/>없어서 그 재를 함께 모아서 팔탄면 월문리(月文里) 공동묘지에 분묘를 만들었던 것이다.<br/>지금은 팔탄면 덕우리로 명칭이 바뀌었다<br/>당시 손수 시체들을 거둔 김시열(87세, 1978년)옹은 그 때를 희상하면서 “토막토막 난도질을 <br/>한 후 불을 질러 시체를 구분할 수 없게끔 만든 잔혹한 왜놈들의 만행에 치가 떨리지 않을 수 <br/>없습니다.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입니까? <br/>지금도 그때의 광경을 생각만 하면 현기증이 납니다.”라고 말을 마치고는 눈물을 흘렸다.<br/><br/>그 후 수비대들의 만행에 치를 떨던 주민?! 湧? 매일같이 천덕산 상봉에 올라가 <br/>조국의 자주독립을 기 원하는 심고를 드리는 한편 왜경들의 갖은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br/>항거하였다 한다.<br/>포덕 137년 8월 20일경 경기도 화성군의 3·1운동사 「미명의 횃불」이라는 비디오를 촬영하기<br/>위해서 필자는 이 곳 고주리 김흥렬 일가족 6명의 참살 현장과 월문리 공동묘지를 돌아보고 <br/>가슴이 아파 통분을 하였다. <br/><br/>6명 선열들의 묘소가 묘소들의 침범으로 그 자취가 없어져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니 <br/>나도 모르게 눈물이 앞을 가리며 서글픔이 가슴을 조여왔다. <br/>또 먼저번 화성군청 회의실에서 삼괴지역 제암리 화성군의 3·1독립운동사 학술발표회를 가졌을 때 필자는 화성의 지도자들에게, 팔탄면 지도자들에게, 화성군수, 화성문화원, 유족들에게 <br/>이 곳에 적은 정성이라도 모아 선열들의 고귀한 항일 정신을 비석에 적어 우리의 후손 들에게 <br/>그 사실을 전해주는 교육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 후손들의 할 일이라 호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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