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성지경주를 찾아서...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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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성지 경주 용담정을 찾아서..수운해월모심과 살림<br/><br/> <br/><br/>△ 산과 계곡의 절겨에 자리한 용담정<br/><br/><br/><br/><br/><br/>수운 최제우가 1960년 천도교를 창도한 날인 16일(음력 4월5일)을 앞두고, 천도교를 처음 <br/>연 경주 용담정을 찾았다. <br/>경주시내에서 북동쪽으로 20~30분을 달려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구미산의 품에 접어드니 <br/>수운의 동상이 먼저 반겼다. 몇발자국 옮기지도 않았는데, 멀리서 보던 구미산의 평이한 <br/>산세가 아니었다. 안개 서린 골짜기와 맑디 맑은 계곡물이 벌써 속세를 완연히 떠난 <br/>심산유곡같았다. <br/>용담수도원은 단정한 선비처럼 단아한 한옥으로지어져 있다. 부친이 사망하면서 “5만년 <br/>동안 세상을 이끌 천도교를 뿌리내리라”며 지어준 이름을 사용한다는 김근오(83) <br/>수도원장은 1974년 초대 수도원장으로 부임해 수도원과 용담정을 짓고 30년 가까이 이곳을 <br/>지켜온 터줏대감이다. 그는 60대 정도의 나이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교통사고가 나 거동할 <br/>수 없는 부인을 그 나이에 직접 엎어 병원에 다녔다니, 그 나이로는 더욱 믿기지 않는다. <br/>그와 함께 아늑한 산책로를 따라 올라 가다보니, 돌 바위에 1914년 폐허였던 용담정을 <br/>복원한 ‘오응선’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오응선은 황해도에서 백범 김구를 천도교에 입도<br/>시킨 인물이다. <br/>시원한 바람이 쏟는듯한 계곡 위에 얹어진 돌다리를 건너니 용담정이었다. <br/>서구 열강들의 위협이 심해지는데도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민중들의 삶은 도탄에 빠진 것을<br/> 본 수운은 세상을 구할 도를 얻기 위해 10년 동안 전국을 헤메고도 도를 얻지 못한 채 <br/>이미 피폐해진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용담정은 수운이 그 후 목숨을 건 정진 끝에 도를 얻어<br/>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 종교인 천도교를 연 곳이다. 이어 천도교인들이 동학혁명과 3·1운동, <br/>독립운동을 주도했으니 이곳은 잠자던 한민족을 깨운 정신의 뿌리인 셈이다. <br/><br/><br/>△ 천도교 1세교조 최제우.<br/>천하절경에 사뿐히 앉은 용담정엔 수운의 초상화가 마치 숨쉬는 듯하다. <br/>“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주장하기 3년 전에 벌써 ‘사람마다 모두 한울’이라며 자신의 <br/>집에서 부터 노예 해방을 먼저 실천하고, 존귀하게 며느리와 수양딸로 품에 안은 분이 <br/>수운 선생이다. 그런데도 남의 나라의 사상은 새겨도, 이 나라의 사상은 알지 못하는 게 <br/>우리의 현실이다. 음력 4월 8일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일이라는 것은 어린 아이도 <br/>모르는 이가 없지만, 3·1운동을 이끌었던 민족대표 33인의 수장 손병희(천도교 3세 교조)<br/>선생의 탄신일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이 땅에 몇명이나 있을까” <br/>가까운 것을 오히려 소홀히 취급하고 먼나라의 사상만을 중히 여긴다는 안타까움을 토로한 <br/>김 원장은 “한 나라가 완전히 독립하려면 자기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백범의 말을<br/> 되새겨 주었다. <br/>“수운 선생이 지금 나타난다면 무슨 말을 할 것 같으냐”는 물음에 김 원장은 “너 나 할 것 <br/>없이 남을 대접할 생각은 하지 않고, 대접을 받을려고만 하는 세상 아니냐”며 “‘모든 사람이<br/> 한울님으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했던 수운 선생이었으니, ‘말 잘 하나거나 글 잘 쓰는 사람<br/>보다 절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용담의 물이 흘러 네 바다의 근원이요<br/>/구미산에 봄이 오니 온세상이 꽃이로다” <br/> <br/>용담가를 듣노라니, 상대를 악마로 대하며 증오하고 박대하고 죽이려는 세상을 향해 수운이 <br/>“사람을 한울님으로 존경해 행복의 꽃을 피우라”며 깊히 허리 숙여 절하는 것만 같다. <br/>그가 부인에게 3배를 올린 것 처럼.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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