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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근본사상(根本思想)과 수도방법(修道方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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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근본사상(根本思想)과 수도방법(修道方法)
천도교중앙도서관 | 2021-07-07 10:33:32


          천도교의 근본사상과 수도방법 ......순암  임순호




-이 글은 지난달 초순 해월신사 성묘에 참배하기 위하여 여주에 갔을 때 순암장께 들은 도담의 일부를 초한 것인데 우리교인으로서는 누구나 알아야 할 만한 일이므로 들은 대로 몇 말씀 기록하여 독자제언의 참고로 제공하는 바이 –기자

 

    -한울과 사람

 입에 물(水)한 모금을 물고 확 뿜으면 그 물은 수없는 물방울이 되어서 흩어지고 맙니. 그 한 모금의 물을 한울의 이기(理氣) 즉 지기(至氣)라고 하면 그 수없는 믈방울은 전인류(全人類)또는 온갖 유형체(有形體)와 같습니. 한방울의 물은 한모금 물보 양(量)으로는 적을지언정 질(質)로는 같습니. 사람도 한울에 비하면 한모금의 물에 대한 한방울의 물과도 같아서 양으로는 적으나 질(質)로는 같습니. 아니 사람은 한울에 비하여 양으로는 적으나 질로는 가장 정선(精選)된 한울의 씨(種子)입니. 바위에 뜬 한방울의 물거품은 그 바물의 한 부분(部分)입니. 동시에 그 전체(全體)입니.



 그와 마찬가지로 한울이란 이기(理氣)의 물결위에 뜬 사람도 한울의 한 부분입니. 물결위에 뜬 물거품이 꺼지면 자취도 없이 물이 되고 말듯이 사람도 한울이란 물결위에 떴가 스러지고 말 때에는 그만 한울이 되고 맙니.  환원(還元)이란 말은 이것을 의미(意味)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한울과 사람의 관계(關係)는 물과 물방울 물과 물거품 같지만도 않습니. 사람은 물론 한울의 한 부분입니. 그러나 한울의 전체입니. 아니 한울 이상(以上)의 존재입니. 얼음이 물에서 생겼으나 물보 더 맑고 더 차고 또 물은 액체(液體)인데 얼음은 고체(固體)인거와 같이 사람은 한울속에서 났으나 한울보 더 구체적(具體的)입니.



 그러므로 사람은 한울의 이기(理氣)를 통솔(統率) 한 통솔주(統率主)입니. 얼마나 장(壯)합니까 그러나 얼음이 풀어지면 도로 물이 되듯이 사람도 일정한 시간에 도달하면 영육(靈肉)이 풀어지지 아니치 못합니. 곧 사람은 환원해서 시 한울이 된는 말씀입니. 그 현상을 세상사람들은 죽음이라고 합니. 그러나 죽음이란 단순히 죽음만이 아니외. 죽음은 보 이상의 삶을 위한 즉 보나은 생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한 순간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 세상사람들은 가장 큰 진리나 깨달은 것처럼 사람은 죽기위하여 사는 것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마는 그것은 한 재담(才談), 혹은 인식(認識)착오(錯誤)에 지나지 않습니. 사람은 살기위하여 죽는 것입니. 즉 살기위하여 나고(生) 살기위하여 또 죽는 것입니.



 시 말하면 죽음이란 나기위하여 죽는 것입니. 이런 말씀을 하자면 한(限)이 있겠습니까. 먼저도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가 물을 한모금 입에 물고 확 뿜으면 수없는 물방울이 되어 흩어지고 맙니. 그와 마찬가지로 이 한울(우주)속에 산재(散在)한 모든 성신(星辰)과 온갖 생물과 무생물은 입으로 뿜은 수없는 물방울과 같이 한울이란 무궁(無窮)한 이기(理氣)가 흩어지고 퍼져서 된 그것입니.



 시 말씀하면 온갖 유형체(有形體)는 지기(至氣) 즉 무극이란 대무형체(大無刑體) 의 형형색색으로 갈리어져 퍼진 조각조각입니. 사람도 그 조각의 하나입니 만은 그 조각 중에서 가장 나은 조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  그리고 한입으로 뿜은 수없는 물방울 같이 모든 유형체는 한 이기(理氣)라는 것을 전 인류가 또한 그러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

 

    -도 닦는 법

 우리 교인(敎人)으로서 도를 닦는 것은 나무로 치면 그 뿌리를 북돋아 주고 비료(肥料)를 주는 것과 같습니. 수도(修道)는 실로 교인의 첫 조건(條件)이 됩니. 우리는 무엇보 먼저 우리의 마음을 기르고 닦아야 합니. 뿌리가 깊고 성(盛)해야만 그 줄기와 가지와 잎이 성하는 것과 같이 우리교인은 수도(修道)에 정성(精誠)을 하여 마음의 뿌리를 튼튼히 해놓아야만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일취월장(日就月將)되는 바 있을 것이며 또 성공(成功)할 것입니.

개인의 수련에는 물론 이지만 우리가 무슨 일에 임(臨)하는데도 수도에 힘을 하여 큰 도력(道力)을 얻지 않으면 안됩니. 우리교인의 인격여하와 우리교의 모든 일이 우리교인의 수도(修道)여하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

시 말하면 개인의 도력(道力)여하와 일의 성불성(成不成)은 우리교인들의 수도여하와 정비례 된는 말씀입니.  여기 말씀하는 수도라는 것은 주문만 읽고 청수만 모신는 것은 아닙니. 그러한 수도도 수도려니와 우리가 모든 사물에 접촉하는 것이 또한 큰 수도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

말하자면 우리의 수도는 철두철미(徹頭徹尾)한 교정쌍방(敎政雙方)의 그것입니.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도를 닦아가야 할까가 문제일 것입니.

 ‘삼년불성 하게 되면 그 아니 헛말인가’ 하셨으니 우리는 과연 도를 어떻게 닦아야 하겠습니까 삼년은 고사하고 삼사십년동안이나 천도교를 하고도 종내 도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 수도는 각자의 기국에도 관계가 있지만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요 수도의 방법에 있어 음의 두가지 순서를 밟을 수는 있을까합니.



 수십년 동안 교(敎)를 지극히 하고도 오히려 도(道)를 바르게 모르는 것은 도를 바르게 못한 탓입니. 비도심지(非徒心至)라 유재정심(惟在正心)이란 말씀이 있지않습니까. 암만 도를 지극히 해도 먼저 정심(正心)이 되지 못하면 그것은 헛수고입니.  도를 가장 바르게 알아가지고 그음 지극히만 하면 어찌 금일입도 명일상제(今日入道.明日上帝)라도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도를 닦되 첫째 정심(正心), 둘째 심지(心至) 이렇게 해야 됩니. 그리고 운수야 좋지만은 닦아야 도덕이란 말씀을 잊지 맙시.



  -고기와 물

 고기(魚)는 물속에서 물을 마시고사나 물을 모르고 물을 못 봅니.  마치 한울속에서 한울을 먹고 살면서도 한울을 모르고 한울을 못 보는 사람과 같습니.

 물은 고기의 한울(水는魚之 天)입니.  물이 있음으로 해서 고기가 있어졌습니. 그러나 고기는 제가 재조(才操)가 용해서 살고 헤엄치는 줄 압니.  사람도 제 근원(根源)인 한울을 모른면 물을 모르는 고기와 같습니.  물은 고기의 한울입니. 한울을 모르는 자 있거든 물과 고기를 생각하시오 우리는 한울을 알아야 합니.  심안(心眼)으로 한울을 보아야 합니. 그래야만 한울님이 될 것입니.

 

  -무(無)와 유(有)

 평범한 말씀입니 만은 무(無)를 유(有)의 어머니(母)라 하면 유는 무의 아들(子)입니. 퍽 간단한 말씀입니 만은 호범(浩汎)한 진리(眞理)를 가장 알기 쉽게 말씀했는가 합니.

 

  -더 생각

 진리는 무궁입니. 과연 무궁한 진리를 무궁히 살펴내서 무궁히 알아야만 무궁한 한울속에서 무궁한 내가 될 것입니.  진리가 무궁인 만큼 우리는 무궁히 살피고 또 무궁히 도를 닦아야 합니.

 여간 좀 도를 깨달았고 아는 체를 해서는 안됩니. 오늘에 깨달은 진리는 밝는 날에는 한 웃음꺼리가 되는 수가 많습니.  예전에 해월신사께서는 제자들이 도에 대하여 어떤 것은 이러이러한 뜻이 아닙니까 하고 물으면 자세히 가르쳐 주시지는 않고 그저 ‘더 생각해보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  웬 마큼 진경에 가까운 말씀을 해도 ‘그렇기도 하지만 더 생각해 보게’ 이런 말씀을 하실 뿐이었습니.

 해월신사의 그 ‘더 생각’ 이란 말씀이야말로 천언만어(千言萬語)의 도담(道談)보도 오히려 큰 가르침이 되었고 큰 힘이 되었었습니.

 그것은 제자(弟子)들에게 사색(思索)을 많이 하게 하신 까닭입니. 무궁(無窮)한 사색, 무궁한 수도(修道)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

 

 해월신사께서 한번 ‘그저 지극히만 생각해보게 들리느니 보이느니’ 이런 말씀을 하셨더니 그 뒤에 제자 중에 누가 와서 ‘아 저는 한울님말씀을 들었습니. 대신사를 보았습니.’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 해월신사는 역시 더 생각해 보라고 하실 뿐이었습니.

 우리가 웬만큼 도를 알게 되면 ‘이만하면 되었’ 이런 생각을 하는 수가 많으나 우리는 수도와 또는 일에 있어서도 더 생각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 더 생각은 더 나은 생각,  더 나은 자아(自我)를 만드는 원인(原因)이 됩니.

우리는 무궁한 그 이치를 무궁히 살펴내어 무궁한 내가 되어야 합니.

 

 요컨대 진리도 무궁이요 사람의 생명도 무궁이요 한울도 무궁인 만큼 우리는 무궁한 진리를 무궁히 사색하여 무궁아(無窮我)가 되려하는 노력의 생활, 즉 무궁생활(無窮生活)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

                                                                                                                    (천도교회월보 19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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