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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직후의 즐거웠던 천도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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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147년 서른한번째 말씀드립니다.<br/><br/>  해방되던 해가 열살, 공립국민학교 3학년의 저는 어른들 뒤따라 광복 당시가 그저 신나기만 했습니다. 중앙총부 주변이 인산인해, 진정으로 산하대운이 진귀차도(山河大運 盡歸此道)하는 것 같았고 방방곡곡의 교구에도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많은 겨레의 관심이 천도교에 쏠리던 그때의 한반도, 그렇게도 갈망하던 신인간, 신세계의 천도세상(天道世上)이 도래한듯하여 천도인은 정말로 즐거웠습니다.<br/><br/>  이러한 해방의 격동이 조금 가라앉은 후 처음 학교에 가서 조선말, 일본말 섞인 수업시간에 3.1운동과 천도교이야기를 들었고 그 주역인 권오최(權東鎭, 吳世昌, 崔麟)와 다른 33인 여러분도 총부에 가면 직접 뵐 수 있었으니 어린 한울님은 가슴이 뛰어 스승님에 대한 존경심과 천도인의 자긍심이 충천하였습니다. 갑오혁명에 육임 중 대정(大正)으로 참여하신 우리할아버지 덕분에, 또 아주 어려서부터 동학, 천도교 정신으로 의식이 형성된 터여서 저의 광복을 맞는 천진한 감회는 남다른 데가 있었습니다.<br/><br/>  그때 천도인들은 진정한 우리의 새 세상이 오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일본의 속박에서 풀려난 것만도 삼대목적의 실현 과정인 것으로 알았으니까요. 천도인중에는 민족 지도자급 인사가 많았고 정치, 사회의 중요행사가 대교당에서 자주 거행되어 가시적인 암시도 컸습니다. 특히 임정요인들과의 긴밀한 관계 때문에 천도세상의 전개를 감지케 했고 10대 초반의 저만해도 백범의 인일기념 참석을 보고 기뻐 날뛰었습니다. 그 무렵 많은 천도인들은 경교장을 찾았는데, 기미만세이후 천도교청년회 동경지부 활동에 관여하신 저의 아버님도 수시 백범 집에 들르셨고 그 무렵 출판된 백범일지에 친필 싸인한 책을 곁에서 지켜본 제가 지금도 귀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천도세상을 간접으로 느껴본 천도소년은 그래서 즐겁고 자랑스럽기만 했습니다. <br/><br/>  나중에 안 것이지만, 해방이후 3년간은 천도교의 남가일몽(南柯一夢)에 불과했습니다. 처음에는 남북교단이 그런대로 새 세상 건설을 위한 교류도 하였으나 1948년에 두개 체제의 분단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우리 천도교는 미국과 소련의 지향 세력에 밀려 시대적인 쇠운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곧 이어진 6.25와 수많은 북녘 천도인의 남하, 그 후 천도교 내부는 갈등, 분열, 쇠퇴가 60년 가까운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불가피한 세계사의 외적압력(外壓)과 통탄스런 교단사의 내적상충(邪心) 때문에 우리는 이 지경에 까지 왔습니다. 요즈음은 남들이 측은히 여기는 그들 이기적 찬사에나 위안을 받으려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왜 주문과 사계명과 참회문을 외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스승님들의 순도결행(殉道決行)을 생각하면 가슴 메는 송구함을 느낄 따름입니다.<br/><br/>  우리 도(道)의 지구적인 천도세계(天道世界) 실현은 100년대의 중일변에 의하여 가능 할 것이고, 한국적인 천도세상의 여건은 10년대의 소일변(小一變)으로도 조성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열살 남짓하여 즐겁기만 했던 “우리세상”의 기억이 두세대가 지난 지금도 흐뭇하기만 합니다.<br/><br/>  한울님과 스승님께서는 우리의 앞길을 잘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파사현정(破邪顯正)해야 합니다.<br/><br/>    - 진암 朴 永 寅 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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