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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사의 순도 이야기' ......표 영삼

천도교중앙도서관 | 2021-03-10 09:42:20
  대신사의 순도이야기............표영삼

 -머리말

 정부로부터 1864년 1월6일에 대신사와 이내겸을 인계받은 경상감사 서헌순은 1월20일부터 신문에 들어갔다. 상주목사 조영화, 지례현감 정기화, 산청현감 이기재 등 3명을 명사관으로 선임하였다,

상주목사 조영화는 상주 도남서원에서 동학 배척운동을 시작할 때 관여한 관원이었고 지례현감 정기화도 동학도들이 많은 지역의 관장이었다. 산청현감 이기재도 역시동학과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었던 관원이었다.

2월20일 까지 1개월간에 걸쳐 전후 4차의 혹독한 신문이 있었다. 이들은 없는 사실도 꾸며서 대신사를 이단으로 몰아갔다.

 결국 대신사를 사형에 처하였고 나머지는 유배형을 받았다. 대신사의 순도경위를 간추려 살펴보기로 한다.

 

  -곽덕원이 옥바라지

 대신사가 대구 감영에 수감됐다는 소식을 들은 해월신사는 영덕 유상호를 찾아가 옥바라지를 의논했다. 그는 백여 금을 선뜻 내놓았다.

대구성중으로 숨어든 해월신사는 옥바라지를 담당할 분을 물색한 끝에 현풍 곽덕원으로 정했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는 “곽덕원은...굵은 새끼띠를 두르고 망건을 벗고 얼굴에 검정칠을 하고 매일같이 세 때에 맛있는 음식을 차려 바쳤다. ....미진함이 없어야 집으로 돌아갔다.” 고 하였다.

 대신사의 옥바라지를 위해 대구로 올라온 사람이 적지 않았으며 성금도 줄을 이었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는 맹륜을 비롯하여 하치욱. 박하선. 이경여. 최규언. 성한서. 하처일. 김주서. 서군효. 박여인. 강선달. 임익서. 임근조. 전덕원. 전석문. 오명철. 곽덕원 등“이 대구에 왔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금도 ‘북도중관내의 영덕. 영해 접에서 6백여금, 흥해. 연일 접에서 3백금. 평해. 울진 접에서 3백5십금. 안동. 영양 접에서 5백금을 내어 대구로 보냈다고 한다. 이 밖에 상주접주 황문규도 많은 비용을 냈으며 , 그 나머지 사람들도 각기 비용을 썼으며 그 액수는 셀 수없이 많았다.”고 하였다.

 

    -1월 20일에 첫 신문

 감영은 1월 보름 명절을 지나면 곧 신문하려 했다. 그러나 비가 여러 날 내려 20일에야 첫 신문에 들어갔다. 경주에 수감됐던 20여 명 도인들도 대구 감영으로 옮겨 같이 신문하였다. 신문횟수를 보면 대신사가 4차례, 이내겸이 3차례, 이정화가 3차례, 강원보가 2차례 받았고 나머지는 한차례씩 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최자원이 절해고도에 종신 정배되었으나 경상감사의 장계에는 신문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뇌물을 바치고 비밀히 풀려났다는 소문도 전해진다.

 신문이 시작되자 대신사는 큰 칼을 쓴 채 끌려나와 뜰 아래에 꿇어 앉혀졌다. 동학의 신념체계에 대한 신문은 일언반구도 비치지 않았다. 오로지 인심을 현혹시킨 이단으로 몰아가기 위한 신문만 되풀이하였다.

주문과 영부, 그리고 검무를 들어가며 민심을 현혹시키는 사술이라고 몰아갔다.

서헌순의 계서에는 “복술은 본시 요망하게 주문을 지어 요언지설을 퍼뜨려 사람들을 부추겼으며 서양을 배척한다며 오히려 서학을 도습하여 포덕의 글을 꾸며 음으로 불순한 생각을 꾀하였다.

 궁약(弓藥)을 비방이라 하고 칼춤과 검가를 퍼뜨려 태평한 세상에 흉악한 노래로 난리를 걱정토록 하였으며 몰래 무리를 지었다.” 고 하였다.

 그러나 신문 내용을 보면 죄목이 될 만한 것이 없었다.

 대신사는 “의관지류로서 양학이 세력을 떨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하늘을 공경하고 천리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13자 주문을 지어 동학을 가르쳤다. ..사람들이 혹 글씨를 써달라면 귀(龜)자와 용(龍)자를 써 주었다. 원근 사람이 부득이 머물게 되어 도당이란 이름이 생겼다.. ...돈과 쌀을 토색하는 일은 애초부터 없었다. 선생과 제자라는 설도 자칭한 것이 아니다. 삿된 가르침과 다르므로 처음부터 숨기거나 꺼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내겸도 “ 복술은 본래 글씨에 이름이 났으며 구. 룡. 상. 운 등의 글자를 써서 여러 사람에게 주었으며 학부형들은 수고하였다고 약간의 돈과 양식을 주었을 뿐이며 토색하는 일은 없었다”고 하였으며 검가의 전문을 소개하면서 흉악한 노래가 아님을 밝혔다.

 박응한도 “병이 있어 찾아갔더니 성심으로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늘 돈독히 행하게 되면 병도 곧 나을 것이라고 하더라.”는 증언을 하였다. 결국 요언지설이라 할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경상감영은 이단으로 만들기 위해 없는 사실을 꾸며댔다. 장계의 후단부분에서 “조상빈은 복술을 만났더니 천신이 강림하여 금년 2월과 5월 사이에 서양 사람이 용만으로부터 나오는데 나의 통문을 기다렸다가 일제히 뒤따라가서 검무를 익힌 이들이 보국안민의 공훈을 세우면 나는 고관이 되고 너희들도 각기 다음 자리를 맡게 되리라 하였다.”고 꾸며놓았다. 또한 대신사의 진술이라며 ‘귀마(귀신)가 이르기를 계해년 10월에 너는 하양현감이 될 것이며 12월에는 이조판서가 될 것이라.“ 고 했다는 엉터리 기록을 집어넣었다.

 

    -동학을 뿌리뽑기 위해 엄형

 감영의 신문은 2월20일 경에 종결되었다. 이날 신문에서 대신사는 다리뼈가 부러지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우레와 같은 소리에 깜짝 놀란 서헌순은 “무슨 소리가 그리 요란한가”고 물었다. 죄인의 다리뼈가 부러지는 소리라고 하자 신문을 중지시키고 하옥시켰다. 마지막 날에 이런 혹독한 신문을 한 것은 수제자인 해월신사의 소재를 추궁하기 위해서였다.



 날이 저물자 곽덕원은 밥상을 들고 옥에 들어갔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대신사는 곽덕원에게 두 가지를 부탁하였다. 하나는 해월신사에게 멀리 도망치도록 하라는 부탁이었고, 하나는 시 한 수를 전하라는 것이었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 “경상이 지금 성중에 있는가. 머지않아 잡으러 나갈 터이니 내말을 전하여 고비원주하게 하라. 만일 잡히면 일이 매우 위태롭게 될 것이다. 번거롭다 하지 말고 꼭 내 말을 전하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곽덕원은

“경상은 이미 떠났다“ 고 하였다. 그리고 곽덕원에게 시 한 수를 전했다. ”물위에 등불을 밝혀 혐의를 찾으려 하나 혐의할 틈새가 없으며, 기둥은 마른 모습을 하고 있으나 그 힘은 여전히 남아 있다(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는 두 줄의 시였다.

 이 최후의 유시는 대신사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낡은 조선왕조는 나를 처형하려고 갖은 혐의를 잡으려 하지만 물위에 등불을 비춰 찾아보아도 나에게는 혐의할 틈새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처형되겠지만 나의 가르침인 무극대도의 힘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일성록에 의하면 대왕대비는 2월29일에 묘당으로 하여금 서헌순의 장계를 품하여 처리하도록 하교했다.

 즉 조선왕조는 대신사를 서학으로 몰아 사형을 내리고 그 제자들에게는 무거운 정배형을 내려야 한다는 안을 승인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 동학이란 서양의 요사한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 이름만 바꾼 것이다. 세상을 헷갈리게 하고 어지럽혔으니 최복술은 효수경중(梟首警衆)하고, 강원보 최자원은 엄형 2차 후 절도에 정배 보내 종신케 하고, 이내겸. 이정화. 박창욱. 박응환. 조상빈. 조상식. 정석교. 백원수는 엄형 2차 후 원지에 정배 보내고 신덕훈. 성일규는 엄형 1차 후 정배 보내고 나머지 죄수들은 도신(道臣)이 처리하라” 하였다.

 다행히 박씨 사모와 장자 세청은 무죄 방면되었다.

전하기를 백사길은 황해도 문화군에, 강원보는 함경도 이원에 정배 보냈으며 이경화는 영월 소미원에 정배 보냈다고 한다.

관변기록(12명)과 교중기록(11명)을 추리해 보면 백사길은 백원수이고 최병철은 최자원이 분명하다. 박명중은 박창욱이고 정생은 정석교로 여겨진다.

 

    -대구장대에서 순도

 대신사는 1864년 3월 10일(양 4월 15일) 하오 2시경에 대구 남문 앞 개울가에 있는 관덕당 뜰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 당하였다.

죄목은 좌도난정율(左道亂正律)이었다. 즉 조선왕조의 신념의 틀인 주자의 가르침에 반했다는 죄목이다.

 형장에는 기다란 판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대신사를 이 판자에 엎어놓고 동여맨 다음 턱 밑에 나무토막을 바쳐놓았다. 그리고 칼로 내려쳐 참수하였다.

조선조 후기의 역적참경도(逆賊斬頃圖)에 의하면 먼저 사형수를 형틀에 묶고 머리를 풀어 줄을 매었다. 이 줄은 앞에 세워놓은 장대 끝 고리를 통해 2명의 관원이 잡고 있다. 사형수가 참수되어 머리가 떨어지면 관원은 이 줄을 잡아당겨 머리를 장대 끝에 매달리게 한다.

 참수된 후 대신사의 머리 부분은 남문 밖 길가에 3일간 효수했었다. 3월 13일에 박씨 사모님과 아들 최세정을 방면하면서 시신을 가져가라 하였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는 “선생께서 처형된 후 3일이 지나자 경상감사는 선생의 처자를 불러다 이유 없이 방면하면서 수습해 가라고 시신을 인도해 주었다.” 고 하였다.

 

대신사는 37세에 동학을 창도하여 38세부터 포덕에 나섰다가 겨우 3년 반 활동하다 순도한 것이다.

이 날 정오경에 많은 제자들은 시신을 염습하여 하오 2시경에 대구를 떠났다. 염습에는 김경숙. 김경필. 정용서. 곽덕원. 임익서. 김덕원 등이 참여하였다. 서둘러 길을 재촉하여 약 40리길을 걸어 저녁 무렵에야 비둘기재를 넘어 자인 서쪽 10리 지점인 <짐못> 주막에 당도하니 날이 저물었다.“고 하였다.

후연점이란 집 뒤에 연못이 있는 주점이란 뜻이다. 기록대로 압량면 신천동에 <짐못>이 있었고 그 앞에는 선돌배기 주막 터가 있었다. 지금은 논으로 바뀌었으나 동리 고로들에 의하면 50년 전만 해도 큰 길 양쪽에 주막집이 세 곳이나 있었으며 길 아래 주막집은 <짐못> 앞 길가에 있었다고 증언한다. 연못이 크며 못 가에는 아름드리 고목들도 남아 있었다. 여기서 3일간을 머물러 있었다. 3일이 지나자 비도 그치고 날씨가 회복되자 길을 떠났다.

자인현 서쪽으로 나 있는 샛길로 걸음을 재촉했다. 여기서 니고개까지는 50리요, 니고개에서 건천까지는 20리이며, 건천에서 가정리까지가 20리가 된다. 16일 아침 일찍 서둘러 길을 떠났으나 시신을 모시고 90리 길을 오다보니 16일(4월21) 밤에야 겨우 가정리에 당도하였다. 주막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인 다음 대신사의 양사위 정울산의 집에 이르렀다.

3월17일 2시경 밤을 타서 구미산 아래 대릿골 밭머리 위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현재 모셔져 있는 대신사 태묘로 올라가다 우측아래 숲 속 후미진 곳이 있는데 여기가 대릿골 밭머리 위가 된다.

 

    - 결론

 대신사는 1860년 4월에 무극대도를 득도한 후 1년간 다듬은 다음 1861년 6월부터 민중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해 갔다.

용담 골짜기로는 각처 어진 선비들이 풍운같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2개월 후인 8월부터 지배층의 모략을 받아 관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한 때 전라도 남원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8개월 만에 경주로 돌아와 박대여의 집에 은신했으나 관원에 체포되어 갖은 모욕을 당하였다. 풀려난 후에도 탄압은 계속되었고 용담을 떠나 전전하였다.

 비장한 결심 끝에 1863년 3월에 용담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가르침을 폈다.

결국 유생들의 압력으로 정부는 12월에 대신사를 체포하기에 이르렀고, 이듬해인 1864년 3월 10일에 대구에서 순도하게 되었다.

 대신사의 활동기간은 피신기간을 빼면 겨우 2년간이었다.

다행히 ‘동경대전’ 과 ‘용담유사’라는 글을 남겼다. 여기에는 새로운 삶의 틀을 만들어 가는 역사의 씨앗이란 생명은 자라가고 있다.

                                                                                                                                                (신인간 2004.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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