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일대 장정리 사동 그리고 천동(샘골)은 우리에게 어떤의미인가(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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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일대 장정리, 사동 그리고 천동(샘골)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해월 선생이 단양지역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1874년 이다. 1872년 겨울 태백산 적조암에서 49일 기도를 마치고, 정선 영월 등지로 거처를 정하지 못하고 다니다가, 갑술년 4월 단양 남면으로 돌아가게 된다. 도인들의 도움을 받아 도솔봉아래 첫 동네인 남면 사동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사동에서 1년 가까이 지내시다, 사동에서 약 십 여리 정도 떨어져 있는 송두둑이라는 곳으로 내려오게 되는 데, 이 곳 송두둑이 바로 오늘의 장정리가 된다.
예전에 이곳은 군량미 창고가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작고 조용한 마을이 있을 뿐이다. 이 곳 장정리에서 우측으로 약 1백 미터쯤 들어가게 되면 과수원이 나오는 데, 이 과수원 아래 밭자리에 해월선생은 집을 짓고 살았다. 처음 이 곳 단양 땅에 들어 거처하던 사동이나 용담유사를 판본으로 인쇄하였던 천동이 모두 이 곳 장정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고 따라서 이 곳 장정리는 마치 해월 선생을 중심으로 하는 동학 지도부의 중요한 본거지와 같은 곳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곳 장정리에서 해월 선생은 7년 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게 된다. 이렇듯 긴 시간을 이곳 장정리에 머물면서 경전 발간을 비롯해, 『대선생사적』을 비롯하여 도의 연원을 기록한 『도원기서』 등의 교단 역사 편찬의 진두지휘 및 많은 설법 등을 펼쳤다. 또한 전국을 다니며 당시의 도인들을 순회하는 등 동학을 절정에 이르게 하는 중요한 사업들을 열정적으로 펼쳤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해월 선생은 치제와 경전발간. 설법 등을 통하여 교단을 정비하는 데에 보다 체계적이고, 도한 정열적으로 정성을 드렸던 시기가 바로 장정리에 거처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단양 장정리의 의미는 그 만큼 크다. 다시 말해서 단양 남면 산간 마을에 위치한 장정리, 곧 송두둑은 동학교단의 본격적인 정비의 체비, 해월 선생 중심의 동학의 교단을 이룬 매우 중요한 곳이라고 하겠다.
장정리 경로당 옆 표지석
단양 남면 도솔봉 아래 자리하고 있는 산간마을 장정리에 거처하며 해월 신사는 많은 설법을 펼치게 되는 데 이 가운 데 가장 대표적인 설법이 '용시용활(用時用活)'이다.
기록에 의하면 을해년(1875) 10월 18일 제례를 모시고 이어서 이 자리에서 설법을 한 것을 되어 있다. 그리고는 해월선생은 본인의 이름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시(時)’자로 고치고, 자(字)를 ‘활(活)’자로 고쳤다고 한다. 최경상(崔慶翔)에서 오늘 우리에게 알려진 최시형(崔時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시(時)와 형(亨), ‘시대와 형통하다.’라는 의미의 이 존함에서 우리는 해월선생의 깊은 결의를 엿보게 된다. ‘용시용활(用時用活)’ 설법의 일부를 잠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대저 도는 용시용활 하는 데 있나니, 때와 짝하여 나아가지 못하면, 이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하물며 우리 도는 오만년의 미래를 표준함에 있어 대를 짓고 때를 쓰지 아니 하면 안 될 것은 선사의 가르친 바라. 그러므로 내 이 뜻을 후세만대에 뵈우기 위하여 특별히 내 이름을 고쳐 맹서코자 하노라.”
수운 선생께서도 말씀하시기를 “ 지금 저 죽어있는 사자나 호랑이가 무서우냐? 지금 짖고 있는 저 개가 무서우냐 하시며, 나는 저 짖고 있는 개가 더 중요하다”고 하시며 죽은 호랑이 즉, 유불선의 종언을 고하셨다. 아무리 좋은 사상과 체계라고 하더라도 현실의 문제 나아가 다가올 미래의 문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적 실천을 도외시 한다면 이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그런 말씀이다.
해월 선생은 도(道)의 운용(運用)과 현실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시고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이라 하여도 , 이 가르침이나 도가 현재, 지금 여기에서의 현실의 문제, 또 나아가 미래의 문제에 대안을 내지 못하고 잘 적용되지 않는다면 이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즉, 시대적 요청과 역사적 관점에서 폭넓게 도를 운용 할 수 있을 때 진정한 한울님의 가르침이 이 세상에 펼쳐질 수 있다는 그런 말씀인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받은 도를 지키고, 이 도를 펴기 위하여 흩어진 도인들을 모으고 , 또 교단을 정비하며 고난의 세월을 보내던 해월선생은 이제 이 곳 장정리에 이르러, 보다 분명한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해나갔던 것이다. 대신사의 생신과 기일에 행하는 기도식 외에도 인등제·구성제 등의 제례와 특별히 설법을 펴기 위한 설법제 등을 수시로 열어 도인들을 의식에 적극 참가시켰고 보다 종교적 의식을 공고히 하여 이 의식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동학의 가르침을 보급하였을 뿐만 아니라 , 교단의 조직을 보다 단단히 해나갔다. 이렇게 다져온 교단의 조직인 동학이 전국적인 조직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음은 물론 훗날 교조신원운동과 동학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등 매우 중요한 근간이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해월 선생은 이 곳 장정리에서 다만 세상에 엎드려 있으며 숨죽여 주문이나 읽는 그러한 때가 아니라, 이제까지 숨겨진 도를 세상에 드러내고 또 펼쳐야 할 때임을 깊이 자각하였다. ‘용시용활(用時用活)’의 설법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올바르게 이 세상에 도가 펼쳐지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현실에 뛰어 들어야 하며, 그 시대가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깊이 인지한 후에, 그 시의에 맞게 도를 펼쳐야 한다는 그런 필연성을 깊이 자각하고 온몸으로 실천하여 보여준 곳, 단양의 장정리. 지금 장정리, 해월선생께서 거처하던 집은 그 자취를 찾을 수가 없다. 동학혁명 이후 고루한 유생들이 동학의 본부라 하여 불살라버렸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단양 천동(샘골), 『용담유사』의 발간
'도의 정통성을 확보하다'
용담유사 간행터에 있는 표지석
교단정비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일은 대신사의 유저(遺著)를 정리하여 경전으로 발간, 도를 세상에 편 교조(敎祖)의 위상에 대한 확립, 나아가 이들 교도들에게 가르침을 펼 경전의 확정은 스승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펴게 되는 가장 핵심적인 일이 된다.
기록에 의하면 장정리를 뒤로 한 채 조금만 오르면 산 밑 마지막 동리가 단양의 천동, 우리말로 ‘샘골’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1881년 6월에 여규덕이라는 도인의 집에서 개간소를 마련하고 『용담유사』를 간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인제 갑둔리에서 처음 『동경대전』을 간행할 때가 경진년(1880)이니, 꼭 한 해 뒤에 『동경대전』을 간행하고 가사로 되어 있는 경전인 『용담유사』를 간행하게 되었으니, 이곳은 바로 인제 갑둔리에 이어 대신사의 유저인 두 권의 경전 모두를 간행한 매우 중요한 교단내의 사적지이며 동시에 우리 역사의 장소이기도 하다.
매우 안타깝게도 단양 천동에서 간행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모두 오늘에 전해지지 않고 있다. 최초의 간행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두 판본이 전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단양 일대는 우리가 해월선생을 생각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특히 이곳 천동은 『용담유사』라는 경전을 발간 한 곳으로 대신사의 가르침을 보다 공고히 하고자 했던 해월선생의 신념과 열망이 담긴 지역이다. 심심산골 깊은 산골마을에 숨어, 흩어진 경전을 모으고 검토하고, 해월선생께서 직접 영(靈)으로 암송하여 원본을 확정하기 위하여, 동학의 여러 인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숙의 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침자(梫字)를 하고 또 인쇄를 하며, 스승님의 말씀을 하나라도 그릇되게 하지 않으려 온갖 정열과 심혈을 기울인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바로 이러한 정성의 뒤에는 이어받은 대도를 온 천하에 펴야한다는 해월선생의 투철한 사명감이 담겨진 것이요, 그러기 위해서는 가르침이 담긴 경전의 발간이 최우선적으로 이루어 져야 한다는 종교지도자로서의 탁월한 판단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김연국이 쓴 1907년 천도교 중앙총부의 간행의 『동경대전』 발문을 보면 해월신사께서 왜 그토록 어려운 상황에서도 거듭 경전을 간행하게 되었는가 하는 저간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예전에 대신사께서 일경(一經)을 지어 당시 문제(門弟)가 친자(親炙)하는 것을 듣는 대로 따라 끌어 써서 혹 다르고 같은 것이 잘못된 것이 없지 않아, 우리 해월신사께서 심히 오래되고 진리를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이에 기궐을 명하셨다.”
해월 선생은 사람의 입과 입을 통해 잘못 와전된 경전으로 교도들이 잘못 그 가르침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대신사께서 가르침을 준 그대로 조금도 틀림이 없는 경전을 세상에 내놓으려고 이렇듯 각고의 노력을 하셨고 경전을 통한 가르침의 정통성(正統性)을 확보하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정한 경전으로서의 그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노력을 온 몸으로 다 하셨다.
이렇듯 한 종교지도자로서의 탁월한 판단은 후일 전국적 동학혁명을 이끄는 원천적인 힘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경전을 모으고 침자를 하고 인쇄를 하고 책으로 만들고 그것도 한문이 아닌 가사로 완결된 경전을 다시 교도들에게, 민중들에게 배포한다는 체계적인 노력이 바로 동학혁명의 가장 중요한 힘이었던 공공성의 조직력을 이룬 매우 중요한 일이 되었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상 없는 혁명은 있을 수 없다. 혁명의 근거는 ‘시천주’요 ‘사람 섬기기를 한울과 같이 하라’는 실천의 윤리이다. ‘유무상자’의 정신이 확산되고 나아가 ‘보국안민’의 역사성이 확장되는, 백성, 민(民)의 의식의 성장은 그리고 동학혁명이 전국적으로 일어 날 수 있었던 그 근간은 동학을 창명한 대신사의 가르침과 해월이라는 일하는 한울님의 실천적 행보가 함께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단양 일대, 장정리. 사동 그리고 천동(샘골)은 지금은 그저 평범한 농촌이지만 오늘의 동학의 중요한 가르침인 『용담유사』가 그 정통성을 지니고 경전으로 다시 태어난 곳이라는 점에서 오늘 우리의 유적지 탐방은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가슴깊이 새겨야 할 곳으로 기억하고 보존해야 할 천도교 역사의 장이다.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해월 선생이 단양지역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1874년 이다. 1872년 겨울 태백산 적조암에서 49일 기도를 마치고, 정선 영월 등지로 거처를 정하지 못하고 다니다가, 갑술년 4월 단양 남면으로 돌아가게 된다. 도인들의 도움을 받아 도솔봉아래 첫 동네인 남면 사동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사동에서 1년 가까이 지내시다, 사동에서 약 십 여리 정도 떨어져 있는 송두둑이라는 곳으로 내려오게 되는 데, 이 곳 송두둑이 바로 오늘의 장정리가 된다.
예전에 이곳은 군량미 창고가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작고 조용한 마을이 있을 뿐이다. 이 곳 장정리에서 우측으로 약 1백 미터쯤 들어가게 되면 과수원이 나오는 데, 이 과수원 아래 밭자리에 해월선생은 집을 짓고 살았다. 처음 이 곳 단양 땅에 들어 거처하던 사동이나 용담유사를 판본으로 인쇄하였던 천동이 모두 이 곳 장정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고 따라서 이 곳 장정리는 마치 해월 선생을 중심으로 하는 동학 지도부의 중요한 본거지와 같은 곳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곳 장정리에서 해월 선생은 7년 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게 된다. 이렇듯 긴 시간을 이곳 장정리에 머물면서 경전 발간을 비롯해, 『대선생사적』을 비롯하여 도의 연원을 기록한 『도원기서』 등의 교단 역사 편찬의 진두지휘 및 많은 설법 등을 펼쳤다. 또한 전국을 다니며 당시의 도인들을 순회하는 등 동학을 절정에 이르게 하는 중요한 사업들을 열정적으로 펼쳤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해월 선생은 치제와 경전발간. 설법 등을 통하여 교단을 정비하는 데에 보다 체계적이고, 도한 정열적으로 정성을 드렸던 시기가 바로 장정리에 거처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단양 장정리의 의미는 그 만큼 크다. 다시 말해서 단양 남면 산간 마을에 위치한 장정리, 곧 송두둑은 동학교단의 본격적인 정비의 체비, 해월 선생 중심의 동학의 교단을 이룬 매우 중요한 곳이라고 하겠다.
장정리 경로당 옆 표지석
단양 남면 도솔봉 아래 자리하고 있는 산간마을 장정리에 거처하며 해월 신사는 많은 설법을 펼치게 되는 데 이 가운 데 가장 대표적인 설법이 '용시용활(用時用活)'이다.
기록에 의하면 을해년(1875) 10월 18일 제례를 모시고 이어서 이 자리에서 설법을 한 것을 되어 있다. 그리고는 해월선생은 본인의 이름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시(時)’자로 고치고, 자(字)를 ‘활(活)’자로 고쳤다고 한다. 최경상(崔慶翔)에서 오늘 우리에게 알려진 최시형(崔時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시(時)와 형(亨), ‘시대와 형통하다.’라는 의미의 이 존함에서 우리는 해월선생의 깊은 결의를 엿보게 된다. ‘용시용활(用時用活)’ 설법의 일부를 잠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대저 도는 용시용활 하는 데 있나니, 때와 짝하여 나아가지 못하면, 이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하물며 우리 도는 오만년의 미래를 표준함에 있어 대를 짓고 때를 쓰지 아니 하면 안 될 것은 선사의 가르친 바라. 그러므로 내 이 뜻을 후세만대에 뵈우기 위하여 특별히 내 이름을 고쳐 맹서코자 하노라.”
수운 선생께서도 말씀하시기를 “ 지금 저 죽어있는 사자나 호랑이가 무서우냐? 지금 짖고 있는 저 개가 무서우냐 하시며, 나는 저 짖고 있는 개가 더 중요하다”고 하시며 죽은 호랑이 즉, 유불선의 종언을 고하셨다. 아무리 좋은 사상과 체계라고 하더라도 현실의 문제 나아가 다가올 미래의 문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적 실천을 도외시 한다면 이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그런 말씀이다.
해월 선생은 도(道)의 운용(運用)과 현실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시고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이라 하여도 , 이 가르침이나 도가 현재, 지금 여기에서의 현실의 문제, 또 나아가 미래의 문제에 대안을 내지 못하고 잘 적용되지 않는다면 이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즉, 시대적 요청과 역사적 관점에서 폭넓게 도를 운용 할 수 있을 때 진정한 한울님의 가르침이 이 세상에 펼쳐질 수 있다는 그런 말씀인 것이다.
스승으로부터 받은 도를 지키고, 이 도를 펴기 위하여 흩어진 도인들을 모으고 , 또 교단을 정비하며 고난의 세월을 보내던 해월선생은 이제 이 곳 장정리에 이르러, 보다 분명한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해나갔던 것이다. 대신사의 생신과 기일에 행하는 기도식 외에도 인등제·구성제 등의 제례와 특별히 설법을 펴기 위한 설법제 등을 수시로 열어 도인들을 의식에 적극 참가시켰고 보다 종교적 의식을 공고히 하여 이 의식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동학의 가르침을 보급하였을 뿐만 아니라 , 교단의 조직을 보다 단단히 해나갔다. 이렇게 다져온 교단의 조직인 동학이 전국적인 조직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음은 물론 훗날 교조신원운동과 동학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등 매우 중요한 근간이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해월 선생은 이 곳 장정리에서 다만 세상에 엎드려 있으며 숨죽여 주문이나 읽는 그러한 때가 아니라, 이제까지 숨겨진 도를 세상에 드러내고 또 펼쳐야 할 때임을 깊이 자각하였다. ‘용시용활(用時用活)’의 설법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올바르게 이 세상에 도가 펼쳐지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현실에 뛰어 들어야 하며, 그 시대가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깊이 인지한 후에, 그 시의에 맞게 도를 펼쳐야 한다는 그런 필연성을 깊이 자각하고 온몸으로 실천하여 보여준 곳, 단양의 장정리. 지금 장정리, 해월선생께서 거처하던 집은 그 자취를 찾을 수가 없다. 동학혁명 이후 고루한 유생들이 동학의 본부라 하여 불살라버렸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단양 천동(샘골), 『용담유사』의 발간
'도의 정통성을 확보하다'
용담유사 간행터에 있는 표지석
교단정비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일은 대신사의 유저(遺著)를 정리하여 경전으로 발간, 도를 세상에 편 교조(敎祖)의 위상에 대한 확립, 나아가 이들 교도들에게 가르침을 펼 경전의 확정은 스승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펴게 되는 가장 핵심적인 일이 된다.
기록에 의하면 장정리를 뒤로 한 채 조금만 오르면 산 밑 마지막 동리가 단양의 천동, 우리말로 ‘샘골’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1881년 6월에 여규덕이라는 도인의 집에서 개간소를 마련하고 『용담유사』를 간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인제 갑둔리에서 처음 『동경대전』을 간행할 때가 경진년(1880)이니, 꼭 한 해 뒤에 『동경대전』을 간행하고 가사로 되어 있는 경전인 『용담유사』를 간행하게 되었으니, 이곳은 바로 인제 갑둔리에 이어 대신사의 유저인 두 권의 경전 모두를 간행한 매우 중요한 교단내의 사적지이며 동시에 우리 역사의 장소이기도 하다.
매우 안타깝게도 단양 천동에서 간행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모두 오늘에 전해지지 않고 있다. 최초의 간행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두 판본이 전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단양 일대는 우리가 해월선생을 생각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특히 이곳 천동은 『용담유사』라는 경전을 발간 한 곳으로 대신사의 가르침을 보다 공고히 하고자 했던 해월선생의 신념과 열망이 담긴 지역이다. 심심산골 깊은 산골마을에 숨어, 흩어진 경전을 모으고 검토하고, 해월선생께서 직접 영(靈)으로 암송하여 원본을 확정하기 위하여, 동학의 여러 인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숙의 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침자(梫字)를 하고 또 인쇄를 하며, 스승님의 말씀을 하나라도 그릇되게 하지 않으려 온갖 정열과 심혈을 기울인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바로 이러한 정성의 뒤에는 이어받은 대도를 온 천하에 펴야한다는 해월선생의 투철한 사명감이 담겨진 것이요, 그러기 위해서는 가르침이 담긴 경전의 발간이 최우선적으로 이루어 져야 한다는 종교지도자로서의 탁월한 판단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김연국이 쓴 1907년 천도교 중앙총부의 간행의 『동경대전』 발문을 보면 해월신사께서 왜 그토록 어려운 상황에서도 거듭 경전을 간행하게 되었는가 하는 저간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예전에 대신사께서 일경(一經)을 지어 당시 문제(門弟)가 친자(親炙)하는 것을 듣는 대로 따라 끌어 써서 혹 다르고 같은 것이 잘못된 것이 없지 않아, 우리 해월신사께서 심히 오래되고 진리를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이에 기궐을 명하셨다.”
해월 선생은 사람의 입과 입을 통해 잘못 와전된 경전으로 교도들이 잘못 그 가르침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대신사께서 가르침을 준 그대로 조금도 틀림이 없는 경전을 세상에 내놓으려고 이렇듯 각고의 노력을 하셨고 경전을 통한 가르침의 정통성(正統性)을 확보하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정한 경전으로서의 그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노력을 온 몸으로 다 하셨다.
이렇듯 한 종교지도자로서의 탁월한 판단은 후일 전국적 동학혁명을 이끄는 원천적인 힘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경전을 모으고 침자를 하고 인쇄를 하고 책으로 만들고 그것도 한문이 아닌 가사로 완결된 경전을 다시 교도들에게, 민중들에게 배포한다는 체계적인 노력이 바로 동학혁명의 가장 중요한 힘이었던 공공성의 조직력을 이룬 매우 중요한 일이 되었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상 없는 혁명은 있을 수 없다. 혁명의 근거는 ‘시천주’요 ‘사람 섬기기를 한울과 같이 하라’는 실천의 윤리이다. ‘유무상자’의 정신이 확산되고 나아가 ‘보국안민’의 역사성이 확장되는, 백성, 민(民)의 의식의 성장은 그리고 동학혁명이 전국적으로 일어 날 수 있었던 그 근간은 동학을 창명한 대신사의 가르침과 해월이라는 일하는 한울님의 실천적 행보가 함께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단양 일대, 장정리. 사동 그리고 천동(샘골)은 지금은 그저 평범한 농촌이지만 오늘의 동학의 중요한 가르침인 『용담유사』가 그 정통성을 지니고 경전으로 다시 태어난 곳이라는 점에서 오늘 우리의 유적지 탐방은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가슴깊이 새겨야 할 곳으로 기억하고 보존해야 할 천도교 역사의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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