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덕 163년 07월 0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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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성사 순도 100주기...'성사 환원'에 대한 사회 각 방면의 감상

천도교중앙도서관 | 2022-05-11 11:08:08

 성사(聖師)의 환원(還元)에 대(對)한

         사회(社會)각방면(各方面)의 감상(感想)

先生(선생)은 民衆的(민중적) 一大偉人(일대위인)....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씨담)

  조선 사천년사를 통관하면 그 간에 영웅호걸이 불무하였으나 흔히는 군주중심이 아니면 귀족을 배경으로 하여 그 업을 이루었으며 그名(명)을 成(성)하였소.

그러나 선생에게 至(지)하여는 민중 간에 生(생)하야 민중적으로 활동하고 민중적으로 대업을 成(성)하려하는 始終一貫(시종일관)한 주의(主義)는 선생 일대의 위업(偉業)이외다.

이것이 조선이 장차 민중문화를 건설하려는 劈頭(벽두)의 위인이 아닌가 합니다. 또한 선생의 모든 경력이 민중적이 됨으로 그 出處(출처) 進退(진퇴)에 정의(正義) 인도적 정신이 橫溢(횡일)한 것이 朝鮮偉人史上(조선위인사상)에 一光彩(일광채)를 더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政賊(정적)으로서의 師友(사우)된 珍奇事(진기사)....전 도지사 조희문(趙羲聞)씨담

 구한국 시대 갑오이후 거금 22.3년 전까지는 朝鮮人士(조선인사) 간에 國政(국정)의 日非(일비)하여 감을 심히 분개(憤慨)하야 개혁론을 창도(唱導)하는 자(者) 불소(不少)하든 시대이었습니다.

나 또한 호기(好機)를 승(乘)하여 그네들과 함께 대사를 역모하다가 급기야 대세(大勢)가 去(거)함을 보고 부득이 근동(近東)으로 망명하야 북해도에 僑居(교거)하였습니다.

손 선생님께 처음으로 면회하기는 나와 전후하여 당시 일본으로 피난하여 來(래)한 수천인 중, 나의 중형 되는 조희연씨에게로 頻數(빈수)히 왕래하는 때이요 겸하야 선생은 청국각지에 漫遊(만유)하시다가 大阪(대판)으로 渡來(도래)하신 春節(춘절)입니다.

 당초 선생님과 남달리 관계를 갖게 된 동기는 피차의 출처, 비록 各自(각자) 不同(부동)하다 할지라도 기 불평을 鳴(명)하는 氣味(기미)가 서로 같으므로 同病相燐(동병상린)적으로 자연히 밀접하게 될 수밖에 없게 된 사정상 더구나 선생님의 헌앙(軒昂)한 氣骨(기골)이며, 百折不屈(백절불굴)하는 志槩(지개)라든지 待人接物(대인접물)에 圓滿寬厚(원만관후)한 포용성은 실로 누구든지 心悅誠服(심열성복)치 않을 수가 없게 되어 마침내 동지제인(同志諸人)으로 더불어 일번의 치제(致祭)로써 영시중맹하기 까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럴뿐더러 전 국내가 수마의 굴로 화한 그 때에 선생은 벌써 천하대세의 전기를 見(견)하시고 오교의 현명이 차시(此時)라 하여 汲汲(급급)히 국내로부터 다수한 청준(廳俊) 청년을 廣募(광모)하여 신교육에 심력을 경주하는 동시에 일방으로 궁도(窮道)에 陷(함)한 망명객의 다수로 하여금 기(其) 은우(恩雨)에 沐浴(목욕)치 못한 자 없으리만큼 널리 구호의 힘을 다하여 내외결탁에 분망하시었음은 其(기) 절세대인(絶世大人)의 雄圖(웅도)임을 敬憚(경탄)치 않은 자 없었습니다.


 이렇게 선생님은 교정쌍방(敎政雙方)에 더욱 활동력을 가하여 병오년 환국이후 15.6년 동안밖에 아니 되는 단일(短日) 월내에 대 속보(速步)로 교(敎)의 면목을 일신하여 항상 민중으로 더불어 출발도 동일 귀착도 동일, 시종일관한 주의를 확수물체(確守勿替)하시였습니다.

 만사의 성패(成敗)이둔(利鈍)의 여하는 막론하고 철두철미한 선생의 일생은 가히 천도교의 중흥시대라 하겠으며 다시 한걸음 나아가 조선의 문화사상에 초유한 신기원을 이루었다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인제 선생의 상(喪)을 당한 우리는 전도의 여산(餘算)이 풍부하신 선생의 일거(一去)를 망극히 봉도합니다.

그러나 선생의 정령은 언제든지 영원히 전 민중의 정신계에 귀숙(歸宿)하시어 문화적 신생의 활로를 개척하여 주실 줄로 확신합니다.

 그리고 사제(師弟)간 기우(奇偶)적 일화거리가 있습니다. 차(此)는 구 한국정부시대 갑오년 간에 제가 청주영장으로 재임하였을 적이며 그 후 동학당 초토사로 다수한 토벌군을 영솔하고 호서객지로 순찰할 적에 동학당 중에는 손병희라 칭하는 수령이 있어서 암중 활약한다는 비보가 종지함으로 기어이 체포 하려고 부심한 일이 있었던 바, 그 후 일본에서 선생과 사제의 의를 결하게 되었소.

 ‘가(呵)가 일소(一笑)’ 당시 선생은 이 상헌으로 변성명하신 때 귀국하시기까지 하조 이생원인 줄로만 확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가 일차 천도교명을 천하에 포고하신 후, 병오 춘 정월을 제하야 우리는 망명객중 칠인(칠(七)人)을 잔류하시고 먼저 현해탄을 도(渡)하시자 각 보도계로부터 ‘금지 이상헌은 고지 손병희’(今之李祥憲 古之 孫秉熙) 라고 정비(鼎沸)와 여(如)히 선전하여 그때까지 오리무중에 재(在)하든 우리들로 하여금, 청천의 벽력이 고막을 흔감(欣感)하듯이 환경(喚驚)케 하였습니다.

아! 알다가도 모를 것은 선생님의 임기응변에 선(善)하신 수완이며 따라서 나의 일신상 남다른 운회(運會)라고 소감합니다.이렇게 일시정적으로서 번연히 사우(師友)가 될 줄이야 어찌 예측할 수 있겠소. 참말로 일 진기(珍奇)한 일이 될 뿐 아니라 가히 희세(稀世)의 기연(奇緣)이라 하겠습니다.

 

     선생(先生)의 원만성(圓滿性)........全 道知事 이진호

 내(余)가 손 선생과 회합(會合)하기는 거금 23.4년 전 경(頃) 일본대판에서 다수한 서생(庶生)을 조선내지로부터 널리 모집하여 동경 대판 경도 등지에 분파(分派)하여 신교육(新敎育)에 노력하든 그 때였습니다.


 대범 여하한 사람을 막론하고 장처(長處)가 있는 동시에 단처(短處0가 不無(불무)함은 보통인데 내가 선생을 처음으로 대하던 그날이나 20년 동안을 지나온 금일에 이르기까지 歷見(역견)한 그 성격상 頗多(파다)하신 장처 중에서도 가장 배워 얻은 것은 제일 원만한 특점입니다. 

 그 얼굴에 나타나는 豐厚(풍후)한 온정과 정대한 광명(光明)이며 또한 그 언행이 일평생을 지나도 남의 단처라는 것은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을 뿐더러 더구나 둔사(遁辭)와 수식(修飾)이 없는 순결한 열변(熱辯)과 활변(活辯)을 겸하여 백출하는 웅론(雄論)으로써 사람을 포용함은 가히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큰 그릇을 가진 長者(장자)라 탄상(歎賞)치 않을 수가 없었소.


 조선 유사 이래 전무후무하다 할 만한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기(旗)를 들고 백절불굴하야 마침내 누백만 교중을 포옹하고 교세의 확장을 금일과 같게 함이든지 시세가 상조함이든지 민도가 불급함이든지 일의 성패를 물론하고 특히 三昨年 사건에 대하여는 총감정적(總勘定的)으로 견(見)하면 여하간 선생의 일생은 전혀 민중으로 더불어 고해에 부침(浮沈)하시었습니다. 목하 직관적 사실입니다.

 그리하야 선생일거 후 민중일반이 고비(考妣)를 상(喪)함보다도 더 절감함은 모두 선생의 민중에 대한 무엇보다도 이상의 강대한 인인합력(引人合力)은 영원히 涽滅(혼멸)치 않을 줄로 생각합니다.

 선생의 상(喪)은 거세(擧世)의 동감(同感).........중앙기독교청년회 고문 이상재

 여(余)는 손 선생과 일차 면회가 없이 다만 신문의 보도로써 보고 들었을 뿐임으로 그의 성행(性行)여하(如何)애 대하여는 어떠하다고 容? 할 수가 없소. 그러나 세인의 공론을 거(擧)하면 인물인즉 이 세상 불이득지(不易得之))할 즉, 쉽게 얻지 못할 큰 인물이라 하겠소. 

 선생은 본래 한미(寒微)한 사람으로 초야에서 일어나서 남다르게 민중으로 더불어 크나큰 사업을 경영한 이래 중간의 기복(起伏)이 중첩(重疊)한 파란(波瀾)속에서 능행능지(能行能止)의 자유(自由)를 잃지 않고 사업으로부터 사업에 다 일신을 희생하였으니 이러한 고로 나는 이런 인물은 다시 얻기가 쉽지 못하오. 

 지금 선생 상사(喪事)를 당한 슬픔은 어찌 천도교인 뿐이겠소. 그 인물과 그 사업을 생각하면 나. 남 할 것 없이 거세(擧世)가 통석(痛惜)치 않을 이가 없을 줄로 압니다...........

 선생(先生)은 일대위걸(一代偉傑).......중앙고등보통학교장 현상윤 씨담

 나는 선생의 逝去(서거)에 대하여 무엇을 말씀할 자격이나 촌료(村料)를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원래 나는 선생의 경해(謦咳)를 일찍이 친승(親承)치 못하였으므로 그 인격에 대한 인상이 깊지 못합니다.

 그러나 전문(傳聞)이나 방관(傍觀)하여서는 선생의 기국과 정력과 경륜은 대강 들어 알았나이다. 그리하여 독단일는지 모르나 혼자의 생각으로는 조선근대에 드물게 보는 일대위걸로 생각하였나이다. 

그것을 일언을 폐하여 말하면 선생은 ‘크다’는 것이 그의 전 인격을 표시하는 말인가 합니다.


 평지에 파란을 일으키는 것이라든가 삼사십년동안을 생상의 간에 왕래한 것이라든ㄴ가 인심이 효박하고 시비가 구구한 조선사회에서 삼백만의 대 단결을 성취한 것이라든가 모두 선생의 ‘큼(大)’을 발휘치 않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생의 부(訃)를 접하게 되니 어찌 슬프지않을 수 있겠습니까. 역시 일언(一言)으로 말하면 선생의 서거는 우리 조선민족의 일대손실(一大損失)이라합니다.   (의암성사 환원호에서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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