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천도교청년당 동경부의 동학지광(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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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청년당 동경부의 동학지광(옮김)
《동학지광(東學之光)》은 1927년 11월 10일자로 창간된 천도교청년당(黨) 동경부(部)의 기관지인데, 1933년 11월 통권 18호로 폐간되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경우 천도교청년당 ‘동경지부’가 될 것 같은데 그 격을 높여 ‘동경부’로 했다.
신인간(新人間)》(1927. 11)지의 ‘〈청년당시보(靑年黨時報)〉’란에도 “당 동경부에서는 당의 주의와 교의 진리를 선전하며, 당의 각부 사업 상황과 필요 학술 등을 소개키 위하여 《동학지광(東學之光)》을 발행하게 되었는데 ······”라고 썼다.
필자가 본 것은 1930년 4월호인 통권 10호인데 판권장을 보면, 편집 겸 발행인 최광룡(崔光龍), 인쇄인 강호원(姜虎元), 인쇄소 대동사(大東社)인쇄부, 발행소 동학지광사(東京府 下巢鴨町 宮下 1581), A5판 30면, 정가 10전이다.
창간 이후의 발행인은 김병순(金炳淳) 최광용(崔光龍) 김형준(金亨俊) 홍순길(洪淳吉) 등으로 이어졌으며, 1933년 9월호(건당(建黨) 10주년 기념호)를 발행하기도 했는데, 그해 11월호로 폐간되었다고 기록되었다.
‘폐간’ 사유는 밝히지 않았으나, 일제가 싫어하는 ‘동학’이고 보면 강제 폐간이 아닌가 싶다.
통권 제10호(제4권 제2호)의 목차를 본다.
‘권두사’··· 편자, 〈논문〉 ‘조선현실(朝鮮現實)과 천도교(天道敎)의 지위(地位)’··· 조기간(趙基栞)/ ‘천도교(天道敎)의 교정합일론(敎政合一論)’··· 김병순(金炳淳)/ ‘조선(朝鮮)에서 규정(規定)되는 우리 당(黨)의 역사적(歷史的) 지위(地位)’··· 김형준(金亨俊)/ ‘제사차전당대회(第四次全黨大會)에서 해결(解決)할 제문제(諸問題)’··· 김정주(金廷柱)/ ‘사적(史的) 변증법(辨證法)에 있어 자유(自由)와 필연(必然)’··· 김형준(金亨俊)/ ‘인생관(人生觀)의 일단면(一端面)’··· 최광용(崔光龍), ‘시보(時報)’ 등이 게재되었다. 〈권두사〉를 보자.
“······ 시유(時維) 4월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71년 전 경신(庚申) 4월 5일을 절실히 회상케 한다.
이날이야말로 천도교 원조(元祖) 최수운(崔水雲) 선생께서 금불문(今不聞) 고불문(古不聞), 금불비(今不比) 고불비(古不比)의 무극대도(無極大道)를 각득(覺得)하시고, 과거 5천년간이나 우리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여 온, 허무맹랑하고도 구린 냄새가 코를 찌르던 우주관(觀) 인생관 사회관을, ‘人乃天’(인내천)이라는 개벽(開闢)의 철추(鐵椎)로써 모조리 두들겨 부수고 후천(後天) 개벽을 선언한 날이다.
말하자면 과거의 무지한 인간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유일무이의 숭배(崇拜)를 33천(天) 옥경대(玉京臺)에서 비위(脾胃)좋게 받고 있던 옥황상제(玉皇上帝)를 끄집어내려, ‘인내천(人乃天)’이라는 개벽의 검(劒)으로 용감스럽게 그의 목을 잘라버렸다.
옥황상제의 목이 떨어지는 바람에, 과거의 우주관 인생관 사회관은 근본적으로 전복(轉覆)되고, 우주 및 인간사회의 범주(範疇) 진리를 인간 자기네의 정신 속에서 찾게 되었으며, 따라서 인간 및 우주사회의 정체(正體)를 이로부터 바르게 인식 파악하게 되었다.
만일 71년 전의 경신 4월 5일이 없었다고 가정하면, 금일의 인류는 어떤 생활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냐? 말할 것도 없이 허위와 가식(假飾) 속에서 도깨비생활을 되풀이하고 있을 것이다.
이같이 생각할 때에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주의는 우리 조선의 무엇보다도 큰 자랑거리인 동시에, 현하 조선의 존재와 가치는 71년 전 경신 4월 5일이 있었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선생의 본지(本志), 선생의 심법(心法)을 각골명심(刻骨銘心)하여, 모든 일에 있어 주의(主義)의 생명화(化)를 유일의 무기(武器)로 삼을 뿐이다.
갑자(甲子) 3월 10일에 선생이 대구 장대(將臺)에서 참형(慘刑)을 당하실 때에, 선생은 선생의 생명에 하등의 애착심이 없었으며, 하등의 애석심(哀惜心)도 없으셨다.
즉 다시 말하자면 선생의 주의가 곧 생명이었으며 선생의 생명이 곧 주의였었다.
만일 선생께서 참형을 받으실 때에 바늘끝만큼이라도 생명에 애착심이 계셨고, 또는 생명의 주의화(化)가 되지 못하셨다고 가정하면 금일의 천도교의 존재 유무를 의심치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판단 명제(命題) 하에서 선생의 제자인 우리들의 임무와 사명은 오직 생명의 주의화에 있으며, 따라서 우리들의 소기(所期)의 목적은 생명의 주의화에서뿐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실히 인식 파악하자! 〈편자〉”
(여기에 나온 경신년은 1860년, 갑자년은 1864년, ‘인내천(人乃天)’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천도교의 근본 사상이다.)
김형준(金亨俊)의 논문 〈조선(朝鮮)에서 규정(規定)되는 우리 당(黨)의 역사적(歷史的) 지위(地位)〉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갑오(甲午) 동학혁명은 봉건계급 타파와 자본계급 타파의 양대 임무를 지고 일어난 동시에, 한편으로 보면 종교개혁운동과 계급타파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학혁명은 종교개혁과 계급의식 환기(喚起)에 어느 정도까지 성공하였다.
역대(歷代)에 있어서 조선인의 정신상 고질이었으며 민중생활의 망근(亡根)을 지은 유교(儒敎)를 여지없이 타궤(打潰)하였으며, 양반계급 또는 지주 자본가의 노예화되었던 무산자(無産者)들에게 대립적 항쟁적 계급의식을 넣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도 정치적 실현에 있어서는 참패를 당하였다.
이 정치적 실현의 참패는 당시 사정으로 보아, 또는 변화적(的) 이론으로 보아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왜 그런고 하니, 당시의 조선은 독립한 조선이 아니라 벌써 열강(列强)의 반(半)식민지화되었던 까닭이다.
〈중략〉 그러나 갑오혁명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갑오혁명은 앞으로의 완전한 운동을 전제로 한 사상(思想)혁명임에서, 다시 말하면 미래의 운동에 대한 기초임에서, 오히려 그 가치가 중차대(重且大)하다는 것을 우리는 망각하여서는 아니 된다.”
3·1운동을 주동했던 천도교는 교주 손병희(孫秉熙 1861~1922, 호 의암(義菴))의 투옥 등으로 한때 힘을 잃는 듯했지마는, 천도교청년당이 결성되어 세(勢)를 떨치던 이 무렵의 천도교는, 일본 수도 동경에다 당부(黨部)를 만들고 기관지 《동학지광(東學之光)》을 발간할 정도로 교세가 활발했다.
당시 동학지광사의 주요 멤버는 최광용(崔光龍) 김형준(金亨俊) 한정호(韓正浩) 강호원(姜虎元) 승관하(承寬河) 김정주(金廷柱) 이응진(李應辰) 조기간(趙基栞) 김병순(金炳淳) 홍순길(洪淳吉) 최병호(崔秉昊) 이달여(李達汝)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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