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제5회)동학혁명120주년특별기획(전북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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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120주년 특별기획
5. 동학군 최후의 전투와 오늘의 과제
전북도민일보 2월 14일
▲동학대혁명과 항일전쟁
전봉준 대장의 건의에 따라 동학 2대교주 해월 최시형선생에 의해 동학총기포령이 내려지고 혁명군은 전국적 상황으로 전개된다. 1차 기포 때 참여하지 않았던 부안의 김낙철 대접주를 비롯해 전라도 전역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충청도·경상도 일대는 물론 강원도·경기도·황해도 등 전국기포로 확산된다.
또한 흥선 대원군의 밀지에 의한 항일전쟁의 지지는 혁명군에게 탄력을 준다. 김덕명포를 중심으로 전주삼례에 집결한 혁명군주력부대는 손병희 통령의 동학군과 연합하기 위해 논산으로 출진하면서 전주에 남은 김개남의 혁명군과 함께하지 못한다. 또한 전략상 최경선 장군과 손화중 대접주의 혁명군을 광주·나주로 출진시켜 일본군의 해로를 통한 협공을 차단케 한다. 이때 호남에서 동원된 동학민중혁명군은 총10만에 가까웠다.
전봉준 대장은 10월 12일경 삼례를 출발, 논산에서 손병희 통령의 10만의 동학혁명군과 만난다. 전봉준과 손병희는 의형제를 맺고 10월(양 11월) 21일깨 동학민중연합군을 조직한다. 동학대혁명군은 논산을 출발해 23일부터 공주를 눈앞에 두고 일본군 및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23~25일 이인·효포·웅치를 중심으로 전초전이 벌어져 혈전이 이어진다. 이때 전주의 김개남 부대도 북상을 시작하여 24일 금산을 점령한다. 동학군주력부대의 최후 전투는 우금치(티·재)에서 벌어진다. 공주성을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 바로 우금티였던 것이다.
일본과 조선의 연합군은 미리 지형지물을 이용한 완벽한 전투준비와 일본군이 서양에서 수입한 최신식무기를 설치하고 모리오 대위의 일본군과 조선의 성하영부대를 중심으로 철저하게 대비했던 것이다. 11월(양 12월) 9일부터 11일까지 수십차례의 공방전에서 동학혁명군은 수천에서 수만명이라는 숫자조차 파악할 수 없는 목숨을 잃게 된다. 동학혁명군이 수만에 이르는 숫적 월등함에도 일본군 200여 명, 관군 2천500여 명의 수천에 불과한 조·일 연합군에게 패하고 만다.
대포와 연발총, 최대사거리 2,000m의 미제 스나이더소총과 무리다소총 등 최신식무기로 무장을 한 연합군과 달리 동학혁명연합군은 대다수 농민들로서 칼과 활·죽창으로 무장했다. 총이라곤 관군에게 빼앗은 화승총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동학정신과 애국애족으로 뭉친 동학민중혁명군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산화했던 것이다. 일본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관군은 마치 일본의 용병이 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선 백성들을 무참히 사살하는 등 망국의 한을 자초하게 된다.
▲우금티 패전과 최후의 항쟁
이규태와 이두황이 합류한 관군은 일본군의 지휘를 받으며 퇴각 혁명군을 추격했다. 후퇴를 거듭하는 동학민중들은 일본군과 관군들에게 인간사냥감이 돼 무참히 살해되기 시작한다. 전봉준과 손병희는 동학군과 관군이 협력해 일본군을 몰아내자고 호소했지만 거절당하고 수천의 김개남부대가 11월 13일 청주를 공격하며 본진에 합류를 시도했다. 하지만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하여 퇴각하기 시작한다.
논산 황화대에서 전투를 했지만 패하고 다시 강경에서 수천명에 불과한 전봉준·손병희·김개남의 잔류부대가 합류해 11월 19일 전주성에 도착한다. 그러나 더 이상 전면전을 벌일 수 없어 22일 밤을 틈타 전봉준과 손병희 부대는 원평으로 후퇴하고 김개남 부대는 남원방향으로 흩어진다. 동학군이 철수한 전주에는 이튿날 경군이 들어와 전주성을 장악한다.
전주에서 밀려난 전봉준·손병희의 혁명군은 김제원평에서 또다시 최후의 항쟁을 벌이지만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25일 원평 구미란은 피로 물들고, 결국 태인으로 패주한다. 27일의 태인전투는 주력부대인 동학농민연합군의 마지막 전투로서 혁명군의 해산을 결정한다. 김덕명 장군과 전봉준 대장은 흩어졌고 광주를 점령하고 대기하던 손화중·최경선 부대도 같은 날 해산을 결정한다.
원평·태인전투까지 함께한 손병희 통령의 동학혁명군은 임실에 있는 최시형 교주와 함께 전투를 강행하면서 장수·장계·금산을 거쳐 12월 5일 무주를 점령한다. 손병희 부대는 다시 북상 길을 따라 충청도를 지나 9~10일 청산 영동 등을 함락했으나 청주의 관군과 보부상, 민보군에게 집중 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다. 이때 손병희부대는 어렵게 포위망을 뚫고 보은 북실로 가지만 북실에서 동학군은 17~18일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아 300여 명이 참살을 당한다.
북실에서 탈출한 손병희 부대는 충주 무극시장에서 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를 내자 최시형 교주는 해산 명령을 내리고 만다. 이후 최시형 교주와 손병희 통령은 몇 년간 깊은 산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후일 손병희 선생은 동학 3대교주 자리에 오르고 해월선생이 교수형을 받아 순국순도하자 손병희 교주는 동학교단을 수습, ‘천도교’로 교단의 이름을 바꾸고 후일 기미 3.1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또한 동학혁명군 주력부대의 해산에도 불구 광주에서 해산한 혁명군은 전라도 서남해안의 장흥과 강진으로 이동해 이방언 대접주와 합류한다. 이방언 장군에 의해 광주인근과 남평·보성·능주·화순 등은 물론 전봉준 본진에 있었던 김제금구 김방서 대접주도 합류하게 된다. 수만의 혁명군은 12월 4일~5일 벽사역과 장흥부성을 점령하고 그 일대를 접수하지만 일본군의 소나미 소좌의 지시를 받은 관군에게 패퇴하고 결국 장흥 석대들에서 최후의 항쟁을 벌이다 수백명의 희생자을 내고 만다. 인근 야산에 숨어있던 민간인마저 참혹하게 학살을 당한다. 이어 17일 옥산리의 마지막 전투에 수백명의 죽음과 함께 해산한다.
이밖에 2차 기포를 전후로 남원 방아치 전투에서 수천명이 학살당하고 홍천·고승산·세성산·대둔산 등 수백명에서 수천명이 일본군 및 관군에게 참살당하는 최후의 전투로 기록된다. 이는 마치 몽골군이 자행했던 초토화 적전을 방불케 하는 일본 본국의 지시인 ‘동학당을 끝까지 추격하여 완전 섬멸하라’는 명령을 받아 산사람들을 불에 태우고 물에 빠뜨리는 집단학살을 자행한다.
▲동학혁명120주년과 오늘날의 우리
전봉준 대장과 김덕명·김개남·손화중·김인배 등 대접주들은 체포돼 결국 사형을 언도받는다. 또한 동학 2대교주 최시형을 비롯해 차도주 강수, 수제자 손천민 등도 사형을 당한다. 갑오년 동학민중혁명은 전국에서 약 100만~200만 명이 참여해 20만~30만 명이 희생당한 세계 3대혁명사에 빛날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역사다.
동학대혁명은 일시적으로 좌절됐으나 천도교에 의해 다시 3.1독립운동으로 이어졌고 상해임시정부를 탄생시켰으며 해방 후 4.19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 등 끊임없는 민주화운동으로 계승되고 있다. 이에 동학민중혁명의 역사적 결실은 바로 분단된 남북의 통일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 같이 노력해야 한다.
동학혁명120주년을 맞아 올해는 여러 기념사업들과 계승차원의 행사들이 열릴 것이며 몸으로 동학정신을 실천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역이기주의에 볼모 잡혀 국가기념일 제정을 못하고 있는 현실은 안타까움을 넘어 ‘역사의 죄인’이란 낙인을 두려워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전주 동학혁명기념관장/ 이윤영
5. 동학군 최후의 전투와 오늘의 과제
전북도민일보 2월 14일
▲동학대혁명과 항일전쟁
전봉준 대장의 건의에 따라 동학 2대교주 해월 최시형선생에 의해 동학총기포령이 내려지고 혁명군은 전국적 상황으로 전개된다. 1차 기포 때 참여하지 않았던 부안의 김낙철 대접주를 비롯해 전라도 전역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충청도·경상도 일대는 물론 강원도·경기도·황해도 등 전국기포로 확산된다.
또한 흥선 대원군의 밀지에 의한 항일전쟁의 지지는 혁명군에게 탄력을 준다. 김덕명포를 중심으로 전주삼례에 집결한 혁명군주력부대는 손병희 통령의 동학군과 연합하기 위해 논산으로 출진하면서 전주에 남은 김개남의 혁명군과 함께하지 못한다. 또한 전략상 최경선 장군과 손화중 대접주의 혁명군을 광주·나주로 출진시켜 일본군의 해로를 통한 협공을 차단케 한다. 이때 호남에서 동원된 동학민중혁명군은 총10만에 가까웠다.
전봉준 대장은 10월 12일경 삼례를 출발, 논산에서 손병희 통령의 10만의 동학혁명군과 만난다. 전봉준과 손병희는 의형제를 맺고 10월(양 11월) 21일깨 동학민중연합군을 조직한다. 동학대혁명군은 논산을 출발해 23일부터 공주를 눈앞에 두고 일본군 및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23~25일 이인·효포·웅치를 중심으로 전초전이 벌어져 혈전이 이어진다. 이때 전주의 김개남 부대도 북상을 시작하여 24일 금산을 점령한다. 동학군주력부대의 최후 전투는 우금치(티·재)에서 벌어진다. 공주성을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 바로 우금티였던 것이다.
일본과 조선의 연합군은 미리 지형지물을 이용한 완벽한 전투준비와 일본군이 서양에서 수입한 최신식무기를 설치하고 모리오 대위의 일본군과 조선의 성하영부대를 중심으로 철저하게 대비했던 것이다. 11월(양 12월) 9일부터 11일까지 수십차례의 공방전에서 동학혁명군은 수천에서 수만명이라는 숫자조차 파악할 수 없는 목숨을 잃게 된다. 동학혁명군이 수만에 이르는 숫적 월등함에도 일본군 200여 명, 관군 2천500여 명의 수천에 불과한 조·일 연합군에게 패하고 만다.
대포와 연발총, 최대사거리 2,000m의 미제 스나이더소총과 무리다소총 등 최신식무기로 무장을 한 연합군과 달리 동학혁명연합군은 대다수 농민들로서 칼과 활·죽창으로 무장했다. 총이라곤 관군에게 빼앗은 화승총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동학정신과 애국애족으로 뭉친 동학민중혁명군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산화했던 것이다. 일본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관군은 마치 일본의 용병이 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선 백성들을 무참히 사살하는 등 망국의 한을 자초하게 된다.
▲우금티 패전과 최후의 항쟁
이규태와 이두황이 합류한 관군은 일본군의 지휘를 받으며 퇴각 혁명군을 추격했다. 후퇴를 거듭하는 동학민중들은 일본군과 관군들에게 인간사냥감이 돼 무참히 살해되기 시작한다. 전봉준과 손병희는 동학군과 관군이 협력해 일본군을 몰아내자고 호소했지만 거절당하고 수천의 김개남부대가 11월 13일 청주를 공격하며 본진에 합류를 시도했다. 하지만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하여 퇴각하기 시작한다.
논산 황화대에서 전투를 했지만 패하고 다시 강경에서 수천명에 불과한 전봉준·손병희·김개남의 잔류부대가 합류해 11월 19일 전주성에 도착한다. 그러나 더 이상 전면전을 벌일 수 없어 22일 밤을 틈타 전봉준과 손병희 부대는 원평으로 후퇴하고 김개남 부대는 남원방향으로 흩어진다. 동학군이 철수한 전주에는 이튿날 경군이 들어와 전주성을 장악한다.
전주에서 밀려난 전봉준·손병희의 혁명군은 김제원평에서 또다시 최후의 항쟁을 벌이지만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25일 원평 구미란은 피로 물들고, 결국 태인으로 패주한다. 27일의 태인전투는 주력부대인 동학농민연합군의 마지막 전투로서 혁명군의 해산을 결정한다. 김덕명 장군과 전봉준 대장은 흩어졌고 광주를 점령하고 대기하던 손화중·최경선 부대도 같은 날 해산을 결정한다.
원평·태인전투까지 함께한 손병희 통령의 동학혁명군은 임실에 있는 최시형 교주와 함께 전투를 강행하면서 장수·장계·금산을 거쳐 12월 5일 무주를 점령한다. 손병희 부대는 다시 북상 길을 따라 충청도를 지나 9~10일 청산 영동 등을 함락했으나 청주의 관군과 보부상, 민보군에게 집중 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다. 이때 손병희부대는 어렵게 포위망을 뚫고 보은 북실로 가지만 북실에서 동학군은 17~18일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아 300여 명이 참살을 당한다.
북실에서 탈출한 손병희 부대는 충주 무극시장에서 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를 내자 최시형 교주는 해산 명령을 내리고 만다. 이후 최시형 교주와 손병희 통령은 몇 년간 깊은 산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후일 손병희 선생은 동학 3대교주 자리에 오르고 해월선생이 교수형을 받아 순국순도하자 손병희 교주는 동학교단을 수습, ‘천도교’로 교단의 이름을 바꾸고 후일 기미 3.1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또한 동학혁명군 주력부대의 해산에도 불구 광주에서 해산한 혁명군은 전라도 서남해안의 장흥과 강진으로 이동해 이방언 대접주와 합류한다. 이방언 장군에 의해 광주인근과 남평·보성·능주·화순 등은 물론 전봉준 본진에 있었던 김제금구 김방서 대접주도 합류하게 된다. 수만의 혁명군은 12월 4일~5일 벽사역과 장흥부성을 점령하고 그 일대를 접수하지만 일본군의 소나미 소좌의 지시를 받은 관군에게 패퇴하고 결국 장흥 석대들에서 최후의 항쟁을 벌이다 수백명의 희생자을 내고 만다. 인근 야산에 숨어있던 민간인마저 참혹하게 학살을 당한다. 이어 17일 옥산리의 마지막 전투에 수백명의 죽음과 함께 해산한다.
이밖에 2차 기포를 전후로 남원 방아치 전투에서 수천명이 학살당하고 홍천·고승산·세성산·대둔산 등 수백명에서 수천명이 일본군 및 관군에게 참살당하는 최후의 전투로 기록된다. 이는 마치 몽골군이 자행했던 초토화 적전을 방불케 하는 일본 본국의 지시인 ‘동학당을 끝까지 추격하여 완전 섬멸하라’는 명령을 받아 산사람들을 불에 태우고 물에 빠뜨리는 집단학살을 자행한다.
▲동학혁명120주년과 오늘날의 우리
전봉준 대장과 김덕명·김개남·손화중·김인배 등 대접주들은 체포돼 결국 사형을 언도받는다. 또한 동학 2대교주 최시형을 비롯해 차도주 강수, 수제자 손천민 등도 사형을 당한다. 갑오년 동학민중혁명은 전국에서 약 100만~200만 명이 참여해 20만~30만 명이 희생당한 세계 3대혁명사에 빛날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역사다.
동학대혁명은 일시적으로 좌절됐으나 천도교에 의해 다시 3.1독립운동으로 이어졌고 상해임시정부를 탄생시켰으며 해방 후 4.19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 등 끊임없는 민주화운동으로 계승되고 있다. 이에 동학민중혁명의 역사적 결실은 바로 분단된 남북의 통일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 같이 노력해야 한다.
동학혁명120주년을 맞아 올해는 여러 기념사업들과 계승차원의 행사들이 열릴 것이며 몸으로 동학정신을 실천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역이기주의에 볼모 잡혀 국가기념일 제정을 못하고 있는 현실은 안타까움을 넘어 ‘역사의 죄인’이란 낙인을 두려워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전주 동학혁명기념관장/ 이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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