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제4회)동학혁명120주년특별기획(전북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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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120주년 특별기획】
4. 공주전투와 우금티의 좌절
전북도민일보 - 2월 7일
동학혁명군의 집강소통치 기록화
▲ 전주성 점령과 완산전투의 실상
전주성 점령에는 전봉준 대장과 함께 김덕명·손화중·김개남·김인배·최경선 등의 동학조직인 포접들과 농민 대중들의 적극적 참여로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전라감사 판관 영장 등 전라감영의 관원들은 혼비백산하여 동문을 통해 달아나기에 정신이 없었다. 감사 김문현은 거지와 같은 복장으로 변장하여 피난민 사이에 끼어 공주로 달아났고, 판관 민영승은 목을 잡고 도망치다가, 조경묘 참봉 장교원 박봉래에게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빼앗아 위봉사 대웅전에 모심으로써, 전주성을 포기한 죄를 면하려고 하였다.
한편, 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급한 전보를 받고 놀란 정부는 이원회를 양호순변사로 임명하여 병력 1,400여 명을 인솔하여 전주성 일대의 동학농민군의 토벌을 지시하고 긴급대신회의를 열어 민영준을 중심으로 청군의 파견을 요청하는 조회문을 보내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른다.
일본군의 개입을 우려한 원로대신 김병시 등 대신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으나 결국 고종의 승인으로 1894년 4월 29일 청나라 사신 원세개를 통해 정식으로 파병을 요청하였다. 이는 참으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망국의 화를 재촉하는 바보 같은 짓이었다. 청나라는 내심 조선을 욕심내며 파병준비까지 마친 상태라 곧바로 청군 2,500여 명을 충청도 아산만에 상륙시킨다.
이에 뒤질세라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일본은 조선에 청군파병의 정보를 후카시와 스기무라를 통해 보고들을 받고 결국 제물포조약 5관의 억지 근거에 의한 ‘일본공사관원과 일본거류민’의 보호라는 얄팍한 속임수로 재빠른 내각회의를 열어, 조선정부의 요청이 없었는데도 5월 4일 출병을 일방적으로 통보한다.
이에 허겁지겁 당황한 조선정부가 일본출병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반대하였으나 일본은 조선정부를 비웃듯이 무시하며 6일부터 12일에 걸쳐 6,300여 명의 병력을 서울에 가까운 인천에 상륙시켰다.
국가의 자존을 망각한 조선정부는 결국 안과 밖으로 큰 곤경에 처하고, 청·일의 조선 진주와 침공은 후일 동학농민혁명의 좌절과 동아시아의 역사에 커다란 굴절을 불러온다. 이러한 급변의 상황이 전개되는 와중에, 동학군은 홍계훈의 경군과 전주성을 둘러싸고 4월 28일에서 5월 사흘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경군은 완산을 중심으로 건지산·기린봉·오목대·황학대 등 전주성을 완전 포위하고 전주성 탈환에 나서는 강공전술을 폈다. 이에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지만 동학농민군의 피해가 더욱 많았다. 나라의 백성을 보호해야 하는 관군은 혁명군이 있는 전주성은 물론 이태조의 영정이 있는 경기전에 포격을 가하여 일부가 파괴되었으며, 전주성 밖의 민가에 여러 차례에 걸쳐 약 2,500여 채에 불을 지르는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약탈과 방화를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경군의 야만적인 행동에 급기야 동학군은 성문을 열고 나가 동학의 부적인 영부를 가슴과 등에 붙이고, 동학의 주문‘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를 외우며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관군의 본진 등을 기습하였으나 계속 증원되는 관군과 엄청난 화력에 밀려 수 백 명의 전사자를 내고 다시 성안으로 후퇴하는 일들을 반복해야만 했다. 또한, 내부 동요도 일어나는 조짐을 보면서 혁명군 지도부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전주화약과 집강소설치의 폐정개혁
경군의 거듭된 효유문이 동학군에게 전달되고, 또한 내부 반란을 유도하는 책략이라는 이중성의 전술에 혁명군으로서는 포위당한 고립무원의 상태까지 겹쳐 결국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약 27개항의 폐정개혁안을 놓고 관측과 서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5월 5일 새로 부임한 감사 김학진이 삼례에 도착하여 동학군의 안전귀가라는 유인책을 썼으나 동학혁명군 지도부는 완고하게 버티며, 조선정부차원의 약속인 전주화약을 이끌어내는 엄청난 성과를 성취하게 된다.
이는 청군과 일본군의 외세개입이라는 국가위기상황과 전봉준과 동학군 지도부의 현명한 지략, 그리고 폐정개혁에 대한 기대와 농사철의 바쁜 시기 등을 감안하여 협정하였던 것이다.
5월 8일(음력) 민관상화로 이루어진 폐정개혁안은 오지영의 동학사 12개조와 23~27개조까지 전봉준공초, 소원열록 등 여러 자료에 의해 폐정개혁의 내용들이 전해지고 있다. 관민상화로 이루어진 폐정개혁안은 때론 관의 협조에 이루어지는 상황과 또는 지역에 따라 혁명군의 점령에 의해 실현되는 두 측면이 있었다. 아무튼 갑오년 동학혁명과 전주성 점령에 의한 집강소의 폐정개혁은 오늘날 지방자치의 효시요, 자주적 근대민주주의 실현이라는 큰 성과를 이루게 된다.
▲ 동학군 전국기포와 일본과의 전쟁
일본은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20여 년 전 1870년대부터 이미 조선침략의 야욕을 공개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의 내정문제를 외부로 돌리려는 소위 동아시아 침략의 전단계로서 조선을 노렸던 것이다. 이러한 준비단계가 1875년 운요호 사건과 1876년 강화도조약이 증명한다.
동학군과 관군의 전주화약으로 명분마저 상실한 일본은 조선정부의 거듭된 철수 요구에도 불구하고 여러 트집을 잡아 철병을 거부하였고, 조선정부의 양국 철병의 요구에 청군도 역시 일본을 핑계 삼아 거절하였다.
조선정부는 청·일 군대를 철수시키기 위해 조선 주재 서양 각국 공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조선을 남북으로 양분하여 양국이 공존하라는 등 영국을 중심으로 해괴한 논리를 펴다가 거절당했다.
일본은 결국 6월 21일 조선의 궁궐을 강제점령하고 23일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으며 6월 23일 아산만에 주둔한 청군을 선제 기습 공격하여 큰 피해를 주었고, 7월 1일 청일전쟁이 시작되어 그 결과는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다. 이러한 상황을 주시하던 동학군은 경복궁이 점령되었고 조선이 통째로 일본에 넘어간다는 판단에 구국의 대일항전에 다시 일어선다.
전봉준 대장과 김덕명·손화중·김개남·김인배 등 대접주들은 각자 역할을 분담하며 전주 삼례에 우선 김덕명 포를 중심으로 전봉준 대장의 깃발 아래 모이기 시작한다.(음력 9월 재기포)
한편, 전봉준 대장으로부터 대일항쟁의 기포소식을 접한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선생도 고민 끝에 전국동학조직의 총기포령이라는 통문을 하달하고, 손병희 장군에게 동학군통령이라는 직책을 임명하여 전봉준 대장과 합류하도록 지시한다. 이제 저 멀리 황해도 해주의 김구(후일 임시정부 주석) 접주까지 동학교단 전체가 기포하여 일본군을 몰아내는 항일전쟁이 시작된다.
동학농민연합군은 충청도 공주의 우금고개를 넘어 서울을 점령하고 일본군을 축출하려다 결국 우금티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월등한 화력에 의해 수 만 명이 학살당한다. 혁명군은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시체로 산을 쌓고 피로 강물을 이루는 한 많은 패전을 하여 다시 전주로 퇴각하게 된다.
소인섭 기자
이윤영<전주 동학혁명기념관장>
4. 공주전투와 우금티의 좌절
전북도민일보 - 2월 7일
동학혁명군의 집강소통치 기록화
▲ 전주성 점령과 완산전투의 실상
전주성 점령에는 전봉준 대장과 함께 김덕명·손화중·김개남·김인배·최경선 등의 동학조직인 포접들과 농민 대중들의 적극적 참여로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전라감사 판관 영장 등 전라감영의 관원들은 혼비백산하여 동문을 통해 달아나기에 정신이 없었다. 감사 김문현은 거지와 같은 복장으로 변장하여 피난민 사이에 끼어 공주로 달아났고, 판관 민영승은 목을 잡고 도망치다가, 조경묘 참봉 장교원 박봉래에게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빼앗아 위봉사 대웅전에 모심으로써, 전주성을 포기한 죄를 면하려고 하였다.
한편, 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급한 전보를 받고 놀란 정부는 이원회를 양호순변사로 임명하여 병력 1,400여 명을 인솔하여 전주성 일대의 동학농민군의 토벌을 지시하고 긴급대신회의를 열어 민영준을 중심으로 청군의 파견을 요청하는 조회문을 보내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른다.
일본군의 개입을 우려한 원로대신 김병시 등 대신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으나 결국 고종의 승인으로 1894년 4월 29일 청나라 사신 원세개를 통해 정식으로 파병을 요청하였다. 이는 참으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망국의 화를 재촉하는 바보 같은 짓이었다. 청나라는 내심 조선을 욕심내며 파병준비까지 마친 상태라 곧바로 청군 2,500여 명을 충청도 아산만에 상륙시킨다.
이에 뒤질세라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일본은 조선에 청군파병의 정보를 후카시와 스기무라를 통해 보고들을 받고 결국 제물포조약 5관의 억지 근거에 의한 ‘일본공사관원과 일본거류민’의 보호라는 얄팍한 속임수로 재빠른 내각회의를 열어, 조선정부의 요청이 없었는데도 5월 4일 출병을 일방적으로 통보한다.
이에 허겁지겁 당황한 조선정부가 일본출병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반대하였으나 일본은 조선정부를 비웃듯이 무시하며 6일부터 12일에 걸쳐 6,300여 명의 병력을 서울에 가까운 인천에 상륙시켰다.
국가의 자존을 망각한 조선정부는 결국 안과 밖으로 큰 곤경에 처하고, 청·일의 조선 진주와 침공은 후일 동학농민혁명의 좌절과 동아시아의 역사에 커다란 굴절을 불러온다. 이러한 급변의 상황이 전개되는 와중에, 동학군은 홍계훈의 경군과 전주성을 둘러싸고 4월 28일에서 5월 사흘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경군은 완산을 중심으로 건지산·기린봉·오목대·황학대 등 전주성을 완전 포위하고 전주성 탈환에 나서는 강공전술을 폈다. 이에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지만 동학농민군의 피해가 더욱 많았다. 나라의 백성을 보호해야 하는 관군은 혁명군이 있는 전주성은 물론 이태조의 영정이 있는 경기전에 포격을 가하여 일부가 파괴되었으며, 전주성 밖의 민가에 여러 차례에 걸쳐 약 2,500여 채에 불을 지르는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약탈과 방화를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경군의 야만적인 행동에 급기야 동학군은 성문을 열고 나가 동학의 부적인 영부를 가슴과 등에 붙이고, 동학의 주문‘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를 외우며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관군의 본진 등을 기습하였으나 계속 증원되는 관군과 엄청난 화력에 밀려 수 백 명의 전사자를 내고 다시 성안으로 후퇴하는 일들을 반복해야만 했다. 또한, 내부 동요도 일어나는 조짐을 보면서 혁명군 지도부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전주화약과 집강소설치의 폐정개혁
경군의 거듭된 효유문이 동학군에게 전달되고, 또한 내부 반란을 유도하는 책략이라는 이중성의 전술에 혁명군으로서는 포위당한 고립무원의 상태까지 겹쳐 결국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약 27개항의 폐정개혁안을 놓고 관측과 서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5월 5일 새로 부임한 감사 김학진이 삼례에 도착하여 동학군의 안전귀가라는 유인책을 썼으나 동학혁명군 지도부는 완고하게 버티며, 조선정부차원의 약속인 전주화약을 이끌어내는 엄청난 성과를 성취하게 된다.
이는 청군과 일본군의 외세개입이라는 국가위기상황과 전봉준과 동학군 지도부의 현명한 지략, 그리고 폐정개혁에 대한 기대와 농사철의 바쁜 시기 등을 감안하여 협정하였던 것이다.
5월 8일(음력) 민관상화로 이루어진 폐정개혁안은 오지영의 동학사 12개조와 23~27개조까지 전봉준공초, 소원열록 등 여러 자료에 의해 폐정개혁의 내용들이 전해지고 있다. 관민상화로 이루어진 폐정개혁안은 때론 관의 협조에 이루어지는 상황과 또는 지역에 따라 혁명군의 점령에 의해 실현되는 두 측면이 있었다. 아무튼 갑오년 동학혁명과 전주성 점령에 의한 집강소의 폐정개혁은 오늘날 지방자치의 효시요, 자주적 근대민주주의 실현이라는 큰 성과를 이루게 된다.
▲ 동학군 전국기포와 일본과의 전쟁
일본은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20여 년 전 1870년대부터 이미 조선침략의 야욕을 공개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의 내정문제를 외부로 돌리려는 소위 동아시아 침략의 전단계로서 조선을 노렸던 것이다. 이러한 준비단계가 1875년 운요호 사건과 1876년 강화도조약이 증명한다.
동학군과 관군의 전주화약으로 명분마저 상실한 일본은 조선정부의 거듭된 철수 요구에도 불구하고 여러 트집을 잡아 철병을 거부하였고, 조선정부의 양국 철병의 요구에 청군도 역시 일본을 핑계 삼아 거절하였다.
조선정부는 청·일 군대를 철수시키기 위해 조선 주재 서양 각국 공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조선을 남북으로 양분하여 양국이 공존하라는 등 영국을 중심으로 해괴한 논리를 펴다가 거절당했다.
일본은 결국 6월 21일 조선의 궁궐을 강제점령하고 23일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으며 6월 23일 아산만에 주둔한 청군을 선제 기습 공격하여 큰 피해를 주었고, 7월 1일 청일전쟁이 시작되어 그 결과는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다. 이러한 상황을 주시하던 동학군은 경복궁이 점령되었고 조선이 통째로 일본에 넘어간다는 판단에 구국의 대일항전에 다시 일어선다.
전봉준 대장과 김덕명·손화중·김개남·김인배 등 대접주들은 각자 역할을 분담하며 전주 삼례에 우선 김덕명 포를 중심으로 전봉준 대장의 깃발 아래 모이기 시작한다.(음력 9월 재기포)
한편, 전봉준 대장으로부터 대일항쟁의 기포소식을 접한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선생도 고민 끝에 전국동학조직의 총기포령이라는 통문을 하달하고, 손병희 장군에게 동학군통령이라는 직책을 임명하여 전봉준 대장과 합류하도록 지시한다. 이제 저 멀리 황해도 해주의 김구(후일 임시정부 주석) 접주까지 동학교단 전체가 기포하여 일본군을 몰아내는 항일전쟁이 시작된다.
동학농민연합군은 충청도 공주의 우금고개를 넘어 서울을 점령하고 일본군을 축출하려다 결국 우금티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월등한 화력에 의해 수 만 명이 학살당한다. 혁명군은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시체로 산을 쌓고 피로 강물을 이루는 한 많은 패전을 하여 다시 전주로 퇴각하게 된다.
소인섭 기자
이윤영<전주 동학혁명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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