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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대현
댓글 0건 조회 1,657회 작성일 17-03-2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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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대학생단 성명서
대한민국의 독립에 중심이 되고, 3.1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민족대표 33인과 의암 손병희 선생님, 주옥경 여사님을 모독하고, 왜곡하여 발언한 설민석 강사에게 천도교대학생단의 입장에서 바라본 역사적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사”라는 학문은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지만, 객관적 사실에 따라 해석해야 합니다. 설민석 강사는 역사를 왜곡하였으며 사실무근인 내용을 대중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이에 천도교대학생단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설민석 강사의 발언에 대응하는 성명을 발표하겠습니다.
설민석 강사의 발언 중 “민족대표 33인은 룸살롱에서 술을 먹고, 독립선언서를 읽고 바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오로지 국민의 힘으로 일으킨 운동이다”라는 발언이 있었습니다. 이 내용은 민족대표 33인은 3·1운동에 있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천도교 교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손병희 선생님은 3.1운동을 준비하시면서 전국에 있는 지도자들을 모아 봉황각에서 수련을 하시고 결의를 다졌습니다. 그 당시 민족대표 33인은 종교단체의 대표 인물로 구성이 되었고, 이들은 전국 각지에 기미독립선언문을 인쇄 및 배포하여 3·1절 날 다 같이 만세를 외칠 수 있도록 준비해온 많은 과정이 있었습니다.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만세를 외친 것도, 전국에서 그 당시에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도, 전부 손병희 선생님과 민족대표 33인의 주도하에 일어난 일입니다.
또한, 설민석 강사는 태화관을 최초의 룸살롱이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이는 민족대표들의 회합장소에 대한 ‘폄하’를 바탕으로 민족대표의 역할을 축소하고, 그분들을 비난하기 위한 왜곡입니다. 그 당시 태화관은 룸살롱이 아니라 종로구 인사동에 있던 고급 요릿집이었습니다. 명월관의 인사동 지점이었습니다. 역사학자 전우용 씨는 “요릿집(태화관)은 룸살롱이라기보다는 ‘피로연장’이나 ‘회식장소’의 원조였다. 당시 요릿집은 결혼식 피로연장, 회갑연장, 신문사 망년회장, 사회단체 창립총회장 등으로 널리 이용됐다”고 설명했습니다. “기생 시중을 받으며 낮술 먹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이 발언은 상상력이 과도하며, 역사적 사실에도 없는 그저 개인적인 주장입니다.
“민족대표 33인 대부분이 친일파로 변절 됐다.”라는 말도 설민석 강사가 하였습니다. 이 역시 마찬가지로 역사 왜곡입니다. 3월 1일 이후 민족대표의 행적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이들의 역할과 태화관에서의 ‘선언문 발표’를 그리 쉽게 폄하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각각의 민족대표는 재판 후 1년~3년에 이르는 징역형을 선고받습니다. 양한묵 선생은 재판을 받는 도중 순국하셨고, 손병희 선생은 희생 가능성이 없을 만큼 병이 깊어진 뒤에야 병보석으로 풀려나와 투병 중 순국하셨습니다. 이종일 선생과 이종훈 선생,박준승 선생 역시 고문의 후유증으로 몇 년 뒤에 순국하셨습니다. 또 살아남은 분들도 변절한 3명을 제외하고는 출소 후에 일제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로 일관하거나 만주에 진출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만큼의 고통을 겪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민족대표들을 왜곡하는 것은 명백하게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천도교 대학생단은 설민석 강사에게 역사왜곡에 대해 구체적이고 정확한 해명, 사죄, 답변을 요구합니다.
* 일반 대중들에게 “3.1운동의 의의와 역사”가 다시 분명하게 인식되었으면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포덕 158년 3월 25일(토) 천도교 대학생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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