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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댓글 0건 조회 2,454회 작성일 19-03-26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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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을 합니다.(추가분)
간단한 질문에 장황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핵심적인 몇 가지만 우선 올리고, 먼저 올린 글을 어느 정도 이해한 다음에 조금은 구체적이라 할 수 있는 답변을 추가로 준비했습니다. 제가 드리는 답변을 이해하시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천도교의 근현대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1960년대 이후 신,구파의 걸어온 길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이미 발표한 아래의 글들에서 충분한 답을 드렸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2004.08.05. 남북통일만이 지상과제가 아니다.
2004.09.11. 누가 사계명을 지키는가?
2004.11.28. 종문심법(宗門心法)이란 무엇인가
2006.04.29. 친일행위는 신파만 했는가?
2006.04.29. 천도교가 친일파의 소굴인가?
2008.06.15. 총부는 누구를 위하여 있는가? /부제; 끝없이 추락하는 천도교와 방조자들.
2009.01.22. 천도교 임시본부는 어떤 단체인가 (상, 하)
2009.01.22. 正 水月執義春이란 무엇인가?
2013.08.22. 언제인가 멈춰 서서, 내동댕이쳐질 수도 있는 팽이 같은 세상(1-7)
목차
1. 들어가는 말.
2. 北韓의 宗敎政策.
3. 北韓의 宗敎批判.
4. 北韓의 各 宗敎 自由現況
5. 北韓의 天道敎 靑友黨의 現況.
6. 北韓의 天道敎 靑友黨 組織과 黨員數.
7. 韓國의 現實 政況.
8. 筆者의 現實 認識.
9. 나가는 말.
2014.01.17. 상주동학교와 천도교 상주교당에 대하여 (上,下)
2017.02.20. 夜雷 李敦化의 生涯와 思想(1-10)
필자가 구파의 여러 원로 분들을 만난 기간은 1960년 전후부터 2010년 이전까지이다. 필자가 만난 분으로는, 천도교 중앙 총부에서 교역자로 일하신 黃生周, 朴來源, 崔秉濟 원로가 있고, 해방이후 60년대 전후까지 구파계열의 지도자로 계셨던 韓順會, 李鍾海, 鄭煥奭 등이 있었다.
해방공간에서는 구파의 재정이 신파보다 좋았기 때문에 구파에서 포덕94(1953)년에 간행한 직해와 주해없이 원문만 수록한 『東經大全 附 龍潭遺詞』가 4판까지 출간하였으나 6.25동란으로 인하여 월남교인들의 수요에 따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해를 돕기 위하여 직역과 주해를 실은 『天道敎經典』을 포덕 97(1956)년에 정환석의 주도하에 간행되어 포덕102(1961)년에 삼부경전인 『天道敎經典』이 간행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정환석이 주도하여 간행된 『天道敎經典』은 천덕송이 합본된 최초의 경전이었으며 경전의 편제는 수운의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그리고 천덕송의 합본으로 동경대전은 종서 전단으로 문단별로 직해와 주해가 기술된 것이었고 용담유사는 해설없이 전문만을 수록하였으며 천덕송은 악보가 있는 24편과 악보가 없는 수도기렴송과 환원기렴송 두 편이 수록되었다.
위의 원로분들이 환원하자 李威卿과 金玩洙가 구파의 행정과 역사를 담당했던 분들이다. 이위경은 구파의 조직이 해체되어 몇 개의 조직으로 분산되자 그가 보관하고 있던 구파의 자료 100여부 가까운 자료를 필자에게 모두 다 주면서 ‘신구파의 역사를 어느 편에 기울지 않게 기술해 달라.’는 한 가지 바람으로 전부 저에게 주어 사실상 구파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한때는 천도교 중앙 총부에 감사원장직을 맡아 교단에 이바지한 적도 있다. 비록 구파의 관리조직이 무너져 힘을 합칠 바탕은 잃었으나 개별 신앙자들은 상당수가 남아 있었지만 연월성을 수납하여 관리 운영하는 주체가 없었으므로 지역의 형편에 따라 운영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위경 원로가 필자에게 준 자료들 중에는 崔俊模 원로가 소장했던 해월의 이기대전 원문 필사본과 구파의 간행물인의 잔여분인 『東學天道敎略史 附叢書』, 『천도교정통연원약사』 『天道敎精神史』가 다수 있었다.
신파로 알려지고 있는 현재 법원수도원을 운영하고 있는 李呤魯 원로는 구파의 『東學天道敎略史 附叢書』에 편집위원으로 발간에 힘을 보탠 경험으로, 신,성사님의 법설 주해와 『神言解義』의 주해서를 출간했다.
그리고 金玩洙는 구파의 입장에서 본인이 직접 집필한 『東學 天道敎史』를 출간한 구파의 마지막 원로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열거된 원로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면서 필자가 느낀 것은 교단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유능한 지도자이며 독실한 신앙자 들이었는데 1925년부터 시작된 신,구 갈등의 오랜 시간과 일제침략 하라는 역사적 굴곡으로 인하여 갈등으로 출발된 분파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억울하게 희생된 동학군의 초라한 모습들이었다.
필자가 상주 동학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4년에 필자의 『東學思想 展開의 諸問題』를 출간하고 나서, 자료교환을 할 수 있을까하는 기대로 동서가 되는 형님의 수고로 주선해준 만남을 위하여, 2004년 10월 하순경에 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 상주동학교당으로 직접 찾아가 상주동학의 설립자인 김주희(金周熙/1860-1944)의 자제분인 김정선(金正善)님을 만나 하루 밤을 지새면서 상주동학의 걸어온 길과 총 177종 1000여 점의 유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이 유물들은 이미 1999년 12월 30일에 경상북도는 민속 문화재 제120호로 지정되었다가. 2013년 12월 30일에 상주 동학교당 유물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되었다. 스스로 자신을 남접도주(南接道主) 김주희(金周熙)라 하면서 1904년에 동학계(東學系)의 하나인 경천교(敬天敎)를 창립한 후, 靑林敎로 바꾸었다가 상주지방을 본거지로 정하고 상주동학의 부흥과 포교에 노력하다가, 1915년 지금의 자리에 교당을 건축하고 전도사를 각 지방에 파견하는 등 교세 확장에 힘썼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동학계열의 여러 교파의 원로 여러분들과 인연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필자가 포덕 70년대 초반 무렵부터 韓 燦 원로분이 운영한 동학정신 선양회와 인연을 갖게 되어 포덕116(1975)년에 출간된 『東經大全演義』가 동학협의회 명의로 출간될 때에 주로 교정에 참여하여 도움을 준 연유로 이후에 간행된 여러 간행물에 참여하게 된 일이 있었다. 이 시기에 동학정신 선양회에 참여하고 계셨던 그 당시 현존하였던 동학계열의 여러 교파의 원로 분들과 가끔 만난 적이 있었는데 출간되었거나 앞으로 출간될 간행물에 대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각 교파의 해설상의 형편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1980년대 전후로 연로하셨던 원로 여러분이 하나 둘 환원하게 되자 운영의 어려움이 생겨, 한 찬 원로 혼자 자금을 대고 동학협의회를 운영하였지만 그 분 또한 환원하시자 운영에 어려움이 생겨 활동을 멈추게 되었다./ 추가분 끝.
포덕 160(2019)년 3월 26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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