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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삼일운동100주년
댓글 0건 조회 1,839회 작성일 17-05-22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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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3.1운동기념관>

안성에서 일어났던 원곡, 양성 독립운동은 평안북도 의주군, 황해도 수안군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이 재판에도 인용될 만큼 격렬했던 3.1운동 3대 실력항쟁지이다. 특히 다른 지역과 연결, 조직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닌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전 주민이 참가했던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의를 두고 있다. 3.1운동의 역사를 되새기고, 안성지역의 순국선열들의 희생정신과 독립정신을 기리기위한 이 지역의 성역화사업으로 안성 3.1운동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이 기념관은 후손과 후학들에게 국가와 민족과 동포가 무엇인가를 일깨우고, 자랑스런 선열들을 민족의 긍지로 여기며, 그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발전시켜 스스로 삶의 표본으로 세우는 산교육의 장이 될 것이다.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은 수원에서 남서쪽으로 약 20km 지점에 위치한 조용한 농촌마을로서 일명 두령바위라고 불려지는 이곳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시 이곳 주민들이 발안장터에서 격렬한 만세운동을 벌이자 만세운동에 대한 주모인사 명단을 입수한 일본 헌병 30명이 4월 15일 오후 2시경 제암교회에 주민을 모이게 한 뒤 모든 문을 페쇄하여 감금시키고 교회에 불을 지른 후, 교회를 향하여 무차별 공격을 가하여 23명을 학살하고 30여채의 가옥을 불태워버린 선조의 한과 넋이 시린 곳이다. 제암리 학살사건이 있은지 63년이 지나서야 마을에서 4km 떨어진 도이리 공동묘지에 평토장으로 안장되었던 유해를 발굴하여 제암교회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유택을 마련하였으며 후세에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와 전시관, 교육관 조형물 등을 설치하여 나라 사랑 정신을 일깨우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종로 YMCA 3.1독립운동 유적지>

3.1운동의 3대 주축 세력인 학생단 운동의 중심지
중앙YMCA회관은 3.1운동 당시 학생YMCA가 중심이 된 학생단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으로, 신간회 창립대회를 비롯한 각종 민족운동 집회가 개최된 장소이다.
학생단 독립운동은 1919년 1월 27일의 중앙YMCA 간사 박희도가 회원모집을 명목으로 소집한 이른바 대관원모임에서 태동하였다. 이날 모임에서 서울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들 사이에 독립운동 추진에 관한 의견교환이 있은 이후, 박희도가 근무하던 중앙YMCA회관은 학생단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3층 벽돌양옥 약 600평 규모의 중앙YMCA 회관은 1950년 한국전쟁 때 불타 파손되었다. 서울YMCA는 1958년 회관재건운동을 개시하여 1967년 현재의 화관 건물을 완공하였다.

<부산 3.1운동 독립기념탑>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부산광역시에서 기념탑을 세우기로 기획하였다. 1995년 8월 15일에 착공하고, 1996년 3월 1일에 완공되었다. 부산 지역의 3.1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후대에 계승하고 살아 있는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기념탑을 세웠다.

<남대문역전 학생단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5일 학생과 시민이 제2차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던 곳.
1919년 3월 5일 오전 9시경 학생단의 주도면밀한 사전준비 속에 남대문역 광장에 모여든 군중은 수천 명을 헤아렸다. 학생단 대표로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과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기덕이 각각 인력거를 타고 ‘조선독립’이라 크게 쓴 기를 휘두르며 달려와 제2차 독립시위운동을 벌일 것을 선언하였다. 군중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고, 선두에 선 김원벽과 강기덕의 지휘에 따라 남대문 방향으로 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붉은 완장을 두른 학생들이 격문을 뿌렸고 시위에 동참하는 군중은 더욱 늘어났다.
남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를 제지하기 위해 출동한 일제 경찰ㆍ관헌에 의해 김원벽ㆍ강기덕 등 지도부가 체포되었다. 검문을 면한 시위대는 여러대로 나뉘었다. 한 무리는 남대문시장에서 조선은행 앞을 지나 종로 보신각으로 향하고, 또 한 무리는 남대문에서 대한문 앞과 무교정을 거쳐 종로 보신각으로 향했다. 대한문 앞에서는 약 1만 명에 이르는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고, 종로 보신각 앞에서는 정오 무렵 여러대로 나뉘어졌던 시위대가 집결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다 강제 해산당하였다.
3월 5일 시위 이후 일제관헌이 독립시위를 기획하는 학생과 일반인을 대대적으로 검문했기 때문에, 이후 서울 중심가에서의 대규모 시위는 일어나지 못했다.
<3.1독립운동기념탑>



3.1독립운동기념탑은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한 식민통치로부터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개된 3.1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발전시켜 널리 국민들의 호국애족정신을 고양하고자 온 겨레의 정성을 모아 중구 장충동 남산공원에 건립되었다.
199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제50주년 기념일에 착공하여 3.1독립운동 80주년 기념일인 1999년 3월 1일 준공하였으며, 탑의 높이가 19m 19cm로 이는 3.1독립운동의 거사일인 1919년을 의미한다. 3.1독립운동은 세계 최초의 비폭력 평화운동이며 세계최초의 천도교·기독교·불교의 종교연합운동으로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무저항운동을 비롯하여 전세계 비폭력 평화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3.1독립선언기념탑>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삼창함으로써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의 불을 지폈다.
3.1독립선언기념탑은 이날의 숭고한 자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 8월 15일에 당시 재건국민운동본부 주관으로 온 국민의 성금을 모금하여 3.1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이었던 탑골공원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1979년 탑골공원의 정비사업으로 철거되어 12년간 방치되었다가 각 계에서 복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1992년 항일 독립운동의 터전인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옮겨 세우게 되었다. 탑의 높이는 4.2m이며 탑 뒤에는 3.1독립선언문과 손병희 등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이 판각되어 있다.
3.1운동문화재(2)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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