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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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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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58(2017)년 2월 25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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留意事項 ;
1. 이 글은 초고본(草稿本)으로 오류(誤謬)가 다수 있을 수 있음으로 참고로 읽어주시고 인용을 하지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 이 글에는 새로 발굴된 새로운 자료에 의한 기술이 많은 데, 본문에서 직접 설명하기엔 애매한 점이 있어 註를 많이 사용하였다. 교리 교사에 관련된 중요 자료에 대한 설명이 註에 기술되어 있으므로 熟讀하여 널리 활용하여 주시기 바람. / 필자 ; 오암 김용천 심고.
목차
1. 들어가는 말.
2.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 資料에 대한 說明
3. 著者 夜雷 李敦化의 生涯와 思想./포덕 158(2017)년 2월 20일에 게재 발표하여 생략함.
4. 資料 提供者 金京昌의 神觀과 信仰.
5.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
6. 나가는 말.
1. 들어가는 말.
일반적으로 모든 자료의 重刊이나 復刊은 影印本처럼 원본대로 간행하는 것이 상식이고 자료에 대한 신빙성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천도교 교단의 자료들은 편찬자나 간행자에 의해 原典대로 간행되지 않고 사적인 견해가 도를 넘을 정도로 加味되거나 현대 어문화 과정에서 誤謬를 많이 범하고 있는 사례가 너무나 많다. 이런 현상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결함은 原著者의 의도와 사상이 많이 왜곡되거나 훼손되어 교서의 기본 핵심의 파악이 어려워진다는 결함을 초래하게 된다.
모든 서적들은 직간접으로 시대적 상황이 들어나게 되는데 중간이나 복간은 출간 당시의 시각과 문자 표기로 인하여 시대적 상황을 추리할 수 없게 만들어 교서의 담겨진 진실을 알 수 없게 되고 있다. 왜 그럴까를 추리해보면 중간 복간의 의미에 無知하거나 간행자나 편찬자의 傲慢한 자세에서 오는 결과라 할 수 있다. 누구보다도 자기의 생각과 교의해석에 있어서 최고의 수준에 있다는 자부심에서 오는 蠻勇에서 출발했거나 자신이나 집단의 필요에 따라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과오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야뢰 이돈화의 교리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新人哲學』『人乃天要義』『水雲心法講義』『東學之人生觀』等等은 전문 철학서라 해도 과언이 아닌 敎義 解說書이다. 이러한 교서를 읽어 이해하고 자기 나름의 체계를 세워 교화와 포덕에 활용하려면 광범위한 지식이 요구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독서에 앞서 관련분야에 대한 기초지식이상의 전문지식이 있어야 이해와 숙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교서들에서 동학과 천도교를 설명하기 위하여 인용된 생소한 용어들, 구절, 문장 등의 出典에 사용된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는 이 교서들을 이해할 수 없다. 야뢰 이돈화의 다양하고 광범위한 지식은 놀라울 정도이긴 하지만, 인용에서 가장 중요한 原典의 출처가 밝혀져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전과는 조금씩 다른 것들이 많아 이해에 혼란을 주고 있다. 또 동학과 천도교를 설명함에 있어, 신, 성사님들께서 사용했던 용어들을 바탕으로 하여 설득했더라면 오히려 이해가 훨씬 쉬웠을 부분들이 서양의 철학자나 사상가들의 사상을 인용하여 설명함으로써 難解하고 難澁하게 된 부분이 없다고는 할 수가 없다. 더욱이나 儒彿仙의 특수 또는 핵심용어들을 아무런 事前 설명도 없이 인용함으로서 더욱 난해하게 된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 아쉽다. 그래서 이번에 『東學之人生觀』의 비교 분석 연구에서는 출전과 오류를 철저히 찾아서 밝혀 『東學之人生觀』하나만이라도 정확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이번에 필자가 발표하는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에서 나타난 결과로만 판단한다면, 포덕 113(1972)년에 刊行된 『東學之人生觀』은, 1968년에 復刊된 「新人哲學」의 부록으로 간행된 『東學之人生觀』과는 심하게 말한다면 다른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디까지가 원전인지 가늠하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라 할 수 있다. 좀 더 나간다면 1963년에 重刊한 『東學之人生觀』重刊辭에서 원전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어 1972년도 판은 많은 왜곡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이 論文에서 先生의 思想이 적지 아니 變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은 문제를 다루면서도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의 論理나 意味가 全然 달라진 곳이 許多했다. 어느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고 判斷하는 것은 우리의 所任이 아니다. 『新人哲學』에서 보여 준 態度가 進取的이요 科學的이었다면, 『東學之人生觀』의 그것은 靜觀的이요 冥想的이었다. 한 個人의 靑年期와 老年期에 있어서의 思想的變化의 크기에 興味도 있었지만 周圍의 勸誘와 先生自身의 思想的 健全性을 위해서 『東學之人生觀』의 一部 章節을 省略했음을 밝혀둔다.
한편 이 論文은 이번 처음으로 活字化되어 公刊되는 것이다.
또한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을 復刊함에 있어서 맞춤법이나 난삽한 文章의 若干을 다둠 었을 뿐 原文 그대로 조금도 添削이 없다.’
포덕 113(1972)년에 刊行된『東學之人生觀』發刊辭에서 이 책의 간행 의미를 밝히는 내용 중, 이 책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로 인하여 복간과 중간에서 나타난 필자의 의도와 사상을 가늠해 보는데 매우 어려움을 가져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重刊을 담당했던 분의 말인 ‘한 個人의 靑年期와 老年期에 있어서의 思想的變化의 크기에 興味도 있었지만 周圍의 勸誘와 先生自身의 思想的 健全性을 위해서 『東學之人生觀』의 一部 章節을 省略했음을 밝혀둔다.’ 과 ‘ 또한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을 復刊함에 있어서 맞춤법이나 난삽한 文章의 若干을 다둠 었을 뿐 原文 그대로 조금도 添削이 없다.’는 이 말은 어느 것 하나는 거짓말인 것이다. 중간사의 마지막 글에 ‘맞춤법이나 난삽한 文章의 若干을 다둠 었을 뿐 原文 그대로 조금도 添削이 없다.’ 고 했는데 ‘『東學之人生觀』의 一部 章節을 省略했음을 밝혀둔다.’ 란 말은 웬말인가. 原文 그대로 복간 했다는 것인가? 一部 章節을 省略했다는 것과 맞춤법이나 난삽한 文章의 若干을 다둠 었을 뿐이 原文 그대로라는 것인가 맞춤법이나 난삽한 文章의 若干을 다둠고 一部 章節을 省略하고도 原文 그대로라는 것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그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原文 그대로란, 影印本과 같이 誤脫字가 있어도, 맞춤법이 틀렸어도, 현대어가 아닌 고어라도 등등 그 어느 곳 하나 손대지 않고 筆寫하거나 간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 말 하지 말고 原文 그대로 중간했으면 될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 진정 누구를 위한 중간인가?
重刊者가 임의로 한 加筆과 添削으로 인하여. 다음의 글에서 우리가 알아보아야 할 저자인 야뢰 이돈화선생이 직접 고백한 교의 해석의 변화와 사상적 추이를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先生은 이 冊의 緖言에서 『 拙著 「人乃天要義」「新學哲學/「新人哲學」의 誤字」「水雲心法講義等」은 亦是 學으로서 思想을 發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未熟期에 屬한 것이어서 整然한 體系가 不充分한 感이 있다. 이제 「東學之人生觀」은 水雲先生의 本뜻을 問題로 삼고 著者가 東學에 對 한 宇宙觀 人生觀을 풀이한 것이다』라고 所信을 밝히셨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先生은 四十年 前에 著述한 敎書들은 時代的 制約밑에서 敎理를 思想的 哲學的으로 풀이하였으나 이제 晩年에 이르러서 當身의 思想을 整理하여 最終的으로 水雲先生의 本뜻 그대로 宗敎的 信仰方向으로 整理하였다는 意味로도 解釋되는 것이다.’/ 發刊辭 2-3쪽 중에서.
이와는 달리 1968년에 復刊된 「新人哲學」의 重刊辭에서는「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의 差異點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 論文에서 선생의 사상이 적지않게 變했다는것을 알수있다. 같은 問題를 다루면서도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에 論理나 意味가 全然달라진 곳이 許多했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다르다고 判斷하는것은 우리의 所任이 아니다.
新人哲學에서 보여준 態度가 進取的이고 科學的이었다면 「東學之人生觀」의 그것은 靜觀的이고 冥想的이었다. 對照的인 樣相을 보여주었다고 할수있다. -後略- / 重刊辭 1-3쪽 중에서.
라고 하여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이 기본적인 執筆方向과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新人哲學』보다 더『東學之人生觀』이 宗敎的 信仰方向으로 整理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다르다고 判斷하는것은 우리의 所任이 아니다.’라고 해놓고, 왜 重刊者는 임의로 ‘맞춤법이나 난삽한 文章의 若干을 다둠고 一部 章節을 省略’을 하는 행동을 했는지 매우 궁금하다.
잘못된 교서들의 복간과 중간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동안에 필자가 비교분석 연구를 한 교단의 모든 자료들에서 실감했으리라 이해하고 있다. 그간 잘못된 교서들의 복간과 중간된 교단 자료들은 원본을 찾아 원본대로 복간을 하거나 영인본으로의 재 간행이 시급하다고 제언을 한다.
2.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 資料에 대한 說明
異本 『東學之人生觀』 比較硏究에 사용된 자료는, 1945년 초에 著述되어 프린트로 인쇄되어 講道會의 敎材로 사용되었던 『東學之人生觀』이, 1968년에 重刊된「新人哲學」後尾에 附錄/ PP. 215-270.으로 수록되어 있는 것과 1972년에 천도교 중앙총부가 간행한 『東學之人生觀』으로 하였다. 『東學之人生觀』은 1972년도 판에 後記에 해당하는 ‘刊行에 부쳐’ 에 집필과정과 그 의의를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東學之人生觀』은 八 一五해방이 되던 포덕 八十六(1945/필자 삽입)년 二월 一일부터 다음 해(1946년/필자 삽입) 四월까지 천도교 소강당에서(해방이후는 북조선 천도교 종리원 종학원에서/필자 삽입) 프린트본으로 전국교역자 양성을 위한 재 교육때 강의한 것이다.
저자인 야뢰선생의 사실상 교리서로서 최후작품 그간 논란도 있었고 또 프린트본이 흩으러져 일시 신인철학 부록으로 포덕 107년도에 일부 미완성 원고로 출간되었으나 완간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이 책이 간행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분들 중에는 프린트본을 전부 모아 보내주신 김경창(金京昌/오암) 동덕, 출판비를 자담한 김상준(金相俊/오암)동덕과 원고를 바로 잡는데 三개월여를 신인간사 편집실이 수고했다.(당시 필자 김용천이 신인간사 주간으로 재직기간 중으로 마지막 출판물이 되었다./오암 삽입) 또 부록으로 실린 「敎政雙全」역시 초판 인쇄로서 다만 전문을 게재치 못하고 일부 삭제한 것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라고 하고 있다.
註 00; 比較分析 硏究에서 사용된 異本 資料
『新人哲學』; 李敦化. 1924 3. 30.초간. 천도교 중앙총부. 서울.
『新人哲學』附錄『東學之人生觀』 1963년도 판은 菊版型. 1968.復刊은 4x6판.
『東學之人生觀』李敦化. 천도교 중앙총부. 서울. 1972. 重刊本./ 4x6판. 裝幀本.
그러나 1968년도 판 初刊本『東學之人生觀』은「新人哲學」의 부록/ PP. 215-270.으로
간행된 것으로 『新人哲學』의 머리말인 重刊辭 末尾에 『東學之人生觀』에 대하여, 위의 ‘刊行에 부쳐’ 와는 상당히 다른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前略- 附錄으로 실은 『東學之人生觀』은 先生께서 講道會를 열고 교인들께 說敎하던 講義案 草稿로서 선생으로 서는 晩年에 屬하는 최후 著述이다.
우리는 이 論文에서 선생의 사상이 적지않게 變했다는것을 알수있다. 같은 문제를 다루면서도『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의 論理나 意味가 全然달라진 곳이 許多했다. 어느것이 옳고 어느것이 다르다고 判斷하는것은 우리의 所任이 아니다.
新人哲學에서 보여준 態度가 進取的이고 科學的이었다면 『東學之人生觀』의 그것은 靜觀的이고 冥想的이었다. 對照的인 樣相을 보여주었다고 할수있다. 그리고 이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은 이미 數年前 韓國思想硏究會編으로 復刊되었으나 절판이 되었기 이번에 다시 刊行하면서 먼저 紙型을 그대로 사용하게 된것을 밝혀둔다.’ 라고 하고 있다.
註 00; 이돈화(李敦化/포덕 25(1884)년(고종 21) - 還元 未詳/일부 기록에는 還元年度를 1950년이라 기술하고 있으나 확인된 바가 없음/필자) - 1920년대부터 해방공간까지 천도교의 대표적인 교리 연구가이며 사상가이다. 함경남도 고원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한문을 수학하고 1902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1910년 천도교월보사(天道敎月報社)가 발족되자 사원으로 근무하면서 천도교사상의 정립과 보급에 힘썼다. 1919년 천도교 청년교리 강연부를 만들고, 1920년 천도교청년회를 조직하였다. 그 해 6월 잡지 『개벽(開闢)』을 창간하여 주간으로 있으면서 1926년 폐간될 때까지 거의 매회 천도교 교리의 근대적 해석과 민족자주사상을 고취하는 글을 썼다. 1922년 『부인지(婦人誌)』를 창간하여 편집인 및 발행인으로 있으면서 여성의 권익보호에 앞장섰으며, 1923년 김기전(金起田), 박내홍(朴來弘) 등과 천도교 청년당을 창설하였다. 1926년 『신인간(新人間)』을 창간하고 편집인 및 발행인이 되었다. 또한, 천도교 중앙종리원 편집과 주임종리사(主任宗理師), 지도관장(知道觀長), 상주선도사(常住宣道師), 종법사(宗法師), 현법사부도령(玄法師副道領), 천도교총부대령(天道敎總部大領) 등 행정상의 여러 중책도 역임하였다. 1946년 4월 이북교회를 책임을 맡아 북한에 거주하던 중 6·25전쟁 때 평안남도 양덕 천도교 수도원에서 공산군에게 납치되었다.
그의 저술인 『천도교창건사(天道敎創建史)』는 천도교의 역사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정리(整理)한 기본교사가 되고 있으며, 『신인철학』은 천도교사상을 근대적 시각에서 해석하여 체계를 세운 천도교의 대표적 사상서이다. 이돈화는 민중종교 동학의 사상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서구의 근대사상을 수용하여 종교철학적 사유를 전개했으며, 「개벽」의 편집인으로서 ‘종교’와 ‘사회’를 조화시키고자 노력했다
雅號는 야뢰(夜雷), 백두산인(白頭山人), 도호(道號)는 긍암(亘菴)이다./ 亘(또는 亙)을 豆로 잘못 보아 두암(豆菴)이라 표기한 것이 많이 있다. 亘(또는 亙)은 讀音이 선, 환, 긍이다. 代表的인 經歷은 종법사(宗法師), 현법사부도령(玄法師副道領), 천도교총부대령(天道敎總部大領) 등이다.
代表的인 著書로는, 『신인철학(新人哲學)』『인내천요의(人乃天要義)』·『수운심법강의(水雲心法講義)』·『천도교창건사(天道敎創建史)』『천도교교리독본』·『복념(福念)』·『수도요령』·『천도교요의』·『천도교사전(天道敎史傳)』·『천도교경전해의(天道敎經典解義)』『새말』·『교정쌍전(敎政雙全)』·『동학지인생관(東學之人生觀)』 등등의 著書와 天道敎會月報, 黨志, 開闢, 新人間, 등 月刊誌에 다수의 논문을 게재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신인철학의 저자 약력과 관련 자료들에서 재정리함.
註 00; 윗글 중 ‘1946년 4월 이북교회의 책임을 맡아 북한에 거주하던 중’은 필자가 알기로는 사실과 다르다. 천도교는 해방을 전후하여 북한지역의 교세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이시기에 서울에 있는 천도교 중앙 총부의 주요 교역자들이 북한 지역을 자주 왕래하면서 또는 거주하면서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강도회를 열어 해방이전에 하던 대로 설법을 했다. 고태우가 쓴 「북한의 종교정책/개정판」 63페이지 하단에서 ‘이처럼 민족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이었던 천도교는 요원의 불길처럼 교세가 확장되었고, 일제의 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8.15광복 전후에는 280만의 신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중 약 70%인 169만 여명이 북한에 있었다. 이러한 천도교의 교세와 교리 체계는 북한 공산당으로서는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시기는 남북의 분단이 고착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왕래가 어느 정도 가능하였다. 이 시기에 북한지역의 천도교의 명칭은 해방 전과 같이 군(郡)마다 일부는 면(面)지역으로 교구가 설립되어 있으므로 천도교 OO교구 또는 전교실로 불리어졌다 일부에서는 ‘북조선 천도교 종무원’이라고도 했지만, 공식명칭은 아니었다. 분단이 된 후에 알려진 명칭으로는 ‘천도교 북조선 종리원’이었다. 북한에서는 교단보다는 청우당 활동이 활발하였으므로 공개적인 조직으로 천도교 청우당이 먼저 조직화되었다.「북한의 종교정책/개정판」 122-123페이지 의하면 ‘북한지역에서의 청우당은 발족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 되었으므로(일제시대 1939년 4월 3일 전당대회에서 해산 결정으로 16년 만에 해산되었기 때문에/필자) 부활된 것이다. 북한 정권이 공고해지기 전인 1945년 11월 초에 김달현(金達鉉)을 중심으로 북조선 천도교 청우당이 결성되었다. 그런데 북한의 공산당은 일제 시대부터 활발한 정치, 사회, 문화활동을 전개했던 천도교 청우당의 전통을 이용하자는 의도에서 일종의 종교 단체적 성격으로의 정당을 변질시켜 나갔고, 그 후 소위 ’우당/(友黨) 필자삽입’으로 존속시켰던 점으로도 그들의 의도를 알 수 있겠다. ‘북조선 천도교 청우당’은 1946년 2월 8일에 위에서 말한 청우당을 골간(骨幹)으로 다시 창당되었는데, ‘북조선 중앙연감(1949판)’에는 1948년 전당대회에서 수정하여 채택하였다는 강령 및 정책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PP123-125까지 참조바람. 1983년 3월 11일에 내외통신에 의하면 천도교 북조선 종무원(또는 종리원)은 1949년에 설립된 것으로 나와 있다./「북한의 종교정책/개정판」126페이지. 이러한 정황들을 살펴보면 이돈화가 ‘1946년 4월 이북교회를 책임을 맡아 북한에 거주하던 중’이라는 기술은 이북교회를 책임을 맡아 직무를 수행하던 시기일 뿐, 이돈화는 해방 전 후에 관계없이 상시 북한지역에서의 강도회(講道會)를 자주 열어 포덕활동을 활발히 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註 00; 「新人哲學」과 「人乃天要義」그리고「水雲心法講義」은, 모두 布德 65(1924)년 3月 30日에 初版發行된 것으로, 布德 109(1968)년 2月 20日에 처음으로 同時에 復刊되었다. 이 세 권의 교서는 천도교 중앙 총부 명의로 간행되어 있지만, 교단에서 간여하지 않았다. 이 시기는 「신인간」이 「새인간」이란 이름으로 隔月刊으로 간행될 무렵이고, 필자가 「새인간」의 편집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세 권의 교서는, 필자보다 앞선 시기에 「신인간」의 主幹으로 계셨고, 이 세 권의 교서가 간행될 시기에는 韓國思想 硏究會의 幹事로 硏究會가 간행하는「韓國思想」의 편집과 간행을 總括하고 계셨던 李光淳 元老에 의해 간행된 교서들이다. 천도교인들이 깊이 간여한「韓國思想」은 韓國現代思想講座로 출간을 시작하여 제 1.2輯 合本이 1957年 7月 10日 刊行으로 시작하여(韓國現代思想講座 韓國思想」第1卷은 1958年 7月 1日로 單行本으로 간행된 것이 있다.) 1998年 8月14日字로 海月神師 殉道 100周年紀念特輯으로 第24輯을 끝으로 終刊되었다. 교단이 지원할 財源과 東學思想의 硏究人員도 크게 부족하였지만, 교단으로부터 持續的인 刊行의 必要性을 인정받지 못하였고 이것을 담당할 人才도 없고 집필자진의 충원도 여의치 않아 완전히 중단되었다. 第24輯을 간행을 하는 동안, 1957年年부터 終刊된 1998年까지 40餘年 동안 교단은 물론 人文社會 學界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필자의 短見인지는 몰라도, 교단이 깊이 관여 하지도 못하면서 일부의 재정적인 지원을 해온 「동학학보」「동학연구」를 지원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원로분들이 시작하여 간여하여 간행했던 그 의의와 그 결실을 생각해서라도「韓國思想」의 續刊이야말로 第 1輯부터 第24輯에 게재된 내용들을 되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確信하고 있다. 지금 아무런 효과도 없는 雜多한 刊行物들을 모두 廢刊하고 「韓國思想」의 續刊을 하는 것이, 敎團이 미래를 향한 4大 宗敎的 目的에 符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윗글에서 李光淳 元老가 밝힌, 數年前에 韓國思想硏究會編으로 復刊한 「新人哲學」과「東學之人生觀」등의 자료들은 희귀하여 현재로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新人哲學의 重刊辭 末尾에서 ‘그리고 이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은 이미 數年前 韓國思想硏究會編으로 復刊되었으나 절판이 되었기 이번에 다시 刊行하면서 먼저 紙型을 그대로 사용하게 된 것을 밝혀둔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韓國思想硏究會編과 1968年度 復刊本은 같은 紙型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때문에 韓國思想硏究會編을 구하지 않아도 1968年度 復刊本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믿고, 필자는 1968年度 復刊本과 1972年度 原典本을 比較硏究의 底本으로 삼았다.
포덕 113(1972)년에 刊行된「東學之人生觀」發刊辭에서 이 책의 간행 의미를 밝히는 내용 중, 이 책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이 冊에서 先生의 思想이 적지 않게 變하였음을 發見할 수 있다. 같은 問題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에 論理나 意味가 다른 點이 許多히 散見된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는 것은 우리 後學들로서는 判斷할 所任이 아니다. 先生은 이 冊의 緖言에서 『拙著 「人乃天要義」「新學哲學/「新人哲學」의 誤字」「水雲心法講義等」은 亦是 學으로서 思想을 發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未熟期에 屬한 것이어서 整然한 體系가 不充分한 感이 있다. 이제 「東學之人生觀」은 水雲先生의 本뜻을 問題로 삼고 著者가 東學에 對 한 宇宙觀 人生觀을 풀이한 것이다』라고 所信을 밝히셨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先生은 四十年 前에 著述한 敎書들은 時代的 制約밑에서 敎理를 思想的 哲學的으로 풀이하였으나 이제 晩年의 當身의 思想을 整理하여 最終的으로 水雲先生의 本뜻 그대로 宗敎的 信仰方向으로 整理하였다는 意味로도 解釋되는 것이다.’/ 發刊辭 2-3쪽 중에서.
이와는 달리 1968년에 復刊된 「新人哲學」의 重刊辭에서는「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의 差異點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대의 制約에서 오는 先生의 지나친 표현들을 무조건 변호할 정도로 頑固해서는 옳지 않을 줄 안다. 新人哲學을 通讀하면서 우리가 이미 退色한 사상적 표현을 자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것이 거이 四十年前에 出版된 책인 것을 생각한다면 勢의 當然이라 하겠으나 그 以外에도 남의 사상을 理解하는데 있어서 너무 조급했던점 예컨대 唯物論과 經驗論의 混同이라든가 唯物論의 認識方法이 科學的이라 한다든가 하는 結論을 散見하게 된다. 그러니 이책이 著述되던 당시의 문화적 사회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우리사회文化의 近代化에 當時 知識人들이 얼마나 無謀할만큼 정열적이었던가를 짐작케 하는 歷史的 證據이기도 한 것이다. 비록 시대의 變移로 말미아마 言及된 문제와 借用한 理論이 이미 시대의 後景으로 물러나고 文體가 鈍重하지만 그러한 表皮를 뚫고 진실로 「한국적인것을」 발견한 선생의 사상적 核心에 接할수만 있다면 그것도 오늘날 우리自身의 主體性을 회복하는 作業에 큰 役割을 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는 이 論文에서 선생의 사상이 적지않게 變했다는것을 알수있다. 같은 問題를 다루면서도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에 論理나 意味가 全然달라진 곳이 許多했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다르다고 判斷하는것은 우리의 所任이 아니다.
新人哲學에서 보여준 態度가 進取的이고 科學的이었다면 「東學之人生觀」의 그것은 靜觀的이고 冥想的이었다. 對照的인 樣相을 보여주었다고 할수있다. -後略- / 重刊辭 1-3쪽 중에서.
라고 하여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이 기본적인 執筆方向과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新人哲學」보다 더「東學之人生觀」이 宗敎的 信仰方向으로 整理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註 00; 1968년도 판「東學之人生觀」의 緖言에서는 『 拙著 「人乃天要義」「新人哲學」「水雲心法講義」「修道要領」「福念」「敎理讀本」等은 亦是 學으로서 思想을 發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未熟期에 屬한 것이어서 整然한 體系가 不充分한 感이 있다. 이제 東學의 人生觀은 先生의 본뜻을 問題로 삼고 著者가 東學에 對 한 宇宙觀 人生觀을 풀이한 것이다』/P.217.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용은 잘못된 부분이 있다. 그리고 1968년에 重刊된 「新人哲學」 後尾에 「東學之人生觀」이 附錄으로 수록되어 있다. / PP. 215-270.
「東學之人生觀」의 1968년도 판과 1972년도 판은 모두 4X6 판형으로 되어 있다 다만 1972년도 판은 洋裝本이다. 그리고 모두 문체(文體)는 국한문(國漢文) 혼용체(混用體)이나 1968년도 판은 한주국종체(漢主國從體)로 9호 활자로 종서(縱書) 인쇄되었고, 1972년도 판은 국주한종체(國主漢從體)로 10호 활자로 종서(縱書) 인쇄되었다.
1968년도 판은 중간사(重刊辭)에서 「東學之人生觀」원고(原稿)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자료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당시 야뢰(夜雷)로 부터 직접 강의를 받은 원로들의 전하는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교재는 프린트 물이었고 책으로 완성된 자료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지만 미루어 생각해보면 짐작이 가는 부분도 있다.
「東學之人生觀」은 1972년도 판에 後記에 해당하는 ‘刊行에 부쳐’ 에서 기술하고 있는 ‘「동학지인생관」은 八 一五해방이 되던 포덕 八十六(1945/필자 삽입)년 二월 一일부터 다음 해(1946년/필자 삽입) 四월까지 천도교 소강당에서(해방이후는 북조선 천도교 종리원 종학원에서/필자 삽입) 프린트본으로 전국교역자 양성을 위한 재 교육때 강의한 것이다.’라는 것을 고려해서 그 때의 그 정황과 해방정국에서의 교단의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참작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추출(抽出)해내 볼 수가 있다. 1968년도 판은 緖言; P. 215.에서 第四章 人間과 그 屬性의 # 3. 犧牲死; 268.(未完)까지로 미완(未完)이라고 하고 게재하고 있으나, 1972년도 판에는 第四章 人間과 그 屬性의 # 3. 犧牲死에 이어서 四 死와 來世 로부터 계속하여 第 三 編 人生問題(福念編)과 第 四 編 人生問題(夜雷 對福 正菴 問答編)까지
1972년도 판 페이지로 PP. 146.- 333.로 약 190 페이지의 장문(長文)의 글이 추가(追加) 되고 있다. 전체분량의 약 3분의 2에 가깝게 추가된 셈으로「東學之人生觀」의 전편(全篇)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두 개의 자료를 꼼꼼히 살펴본 필자는, 1968년도 판은 해방 무렵까지의 강의록 자료이고 1972년도 판은 해방이후에 추가된 자료이라는 것이다. 1972년도 판은 1968년도 판의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정과 가필(加筆)이 되고, 분장(分章)과 분절(分節)을 통하여 전체적 프레임을 조정하고 구체적으로 세분화(細分化)하여 야뢰가 전하고자하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필자가 이렇게 판단하게 된 근거는 내용뿐만 아니라 시대적 정황을 많이 고려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교단은 해방으로 인하여 자유를 찾은 것은 잠시 미소의 개입으로 분단이 되자 교단은 혼란을 극복해야 했다. 東學革命百周年紀念論叢 下卷의 ‘광복과 해방정국. 2) 분단과 교단조직’ 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나라 전체의 운명이 양단되는 불행을 당하게 되었으니 개인이나 집단을 막론하고 온전할 수가 없으며 특히 중앙집권의 일사분란한 조직을 가졌던 천도교의 타격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따라서 중앙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의 기능마저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또한 해방이 되었으므로 나라도 새로 세워야 하고 빈사상태에 빠진 교회도 재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으며 그것은 기관과 인물과 운영방법이 모두 일제시대와는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45년 10월 25일에 전국임시대회가 서울의 중앙대교당에서 열리고 여기서 3원1관제(三院一觀制)의 교약으로 개정 채택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이 그 임원을 선임하였다. -중략- 이때 38선의 경계가 점점 강화되면서 남북간의 왕래가 어렵게 됨에 따라 교회운영상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남북간의 통신 연락의 두절은 물론 7할 이상이 북한에 분포되어 있는 관계로 무엇보다 먼저 연월성미(年月誠米)의 중앙납부가 수월치 못하다는 결정적인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46년 1월에 어쩔 수 없는 임시조치로 평양에 천도교 서선(西鮮)연락소와 함흥에는 천도교 북선(北鮮)연락소를 설치하여 연월성수납을 비롯한 제반 교무연락을 서울의 총부와 하게 되었다. - 중략- 이와 같은 조치는 나름대로 효과를 나타내면서 연월성을 중앙에 납부하는 일과 중앙의 각종 지시사항을 일반 교인들에게 전달하는데 있어서 불편한대로 운영해 나갈 수가 있었으므로 얼마동안 계속해 나갔다.’ /PP. 650-652.
이와는 달리 좀 더 구체적인 것도 있었다. 필자가 교화관과 신인간 주간으로 교역자로 봉직하는 기간 동안(1970년대 전후) 교단의 많은 원로 분들이 교화관이나 신인간사를 찾아와 필자가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시는 노변한담(路邊閑談)에서, 교단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 가운데, 해방정국에 관련된 부분도 많았다. 해방 무렵에 서울에 계셨던 분들의 대 부분은, 일본군에게 군수물자 창고로 빼앗겼던 천도교 대교당을 1945년 8월경(8월 17일라고 명확히 말하시는 분도 있었다.) 돌려받았다고 했고, 해방 당시 북한에서 살다가 6,25동란으로 월남한 분들은, 1947년 2월경에(2월 11일로 기억하고 계신 분도 있었다.) 평양에서 북조선 원주직 전체회의를 열어 서선(西鮮)연락소와 북선(北鮮)연락소를 합쳐서 ‘북조선 종리원’이라고 정하였다고 했다.
위에서 기술하고 있는 해방 무렵의 교단사정에 대한 정황을 미루어 보아, 1968년도 판은, 해방 무렵까지의 강의 자료인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을 맞은 그 무렵 2-3개월 정도는 강도회가 중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만약 분단을 전후하여 북한지역에서「東學之人生觀」의 강의가 있었다면, 완성된 1972년도 판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하겠다. 그리고 강도기간 중 종료기간인 1946년 4월보다 훨씬 뒤라고 추정된다. 1972년도 판에 後記에 해당하는 ‘刊行에 부쳐’에서 간행에 도움을 주신 분들에 대한 기술에서 ‘이번 이 책이 간행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분들 중에는 프린트본을 전부 모아 보내주신 김경창 동덕, 출판비를 자담한 김상준동덕과 원고를 바로 잡는데 三개월여를 신인간사 편집실이 수고했다.’ 라고 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북한출신이 있기 때문이다.
1968년도 판과 1972년도 판과의 내용의 변화가 많다는 것을 다음의 목차에서 비교하여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필자는 내용을 상세히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이 많으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직접 비교하여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만 필자가 시간의 여유가 생긴다면,「新人哲學」「人乃天要義」「水雲心法講義」「東學之人生觀」의 해설서(解說書)와 「新人哲學」「人乃天要義」「水雲心法講義」「天道敎經典解義」「敎政雙全」「東學之人生觀」등을 철저한 비교 분석을 통하여 야뢰의 사상적 추이(推移)를 연구해보는 기회가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
1968년도 판과 1972년도 판의 目次 比較
目次(#은 원 목차에는 없고 책안에서 分章이나 分節되어 있는 目次)
1. 1968년에 重刊된「新人哲學」 後尾에 附錄/ PP. 215-270.으로 수록된 附錄本.
附 東學之人生觀; 213.
緖言; 215.
第 一 編 宇宙觀; 218.
第一章 「反對一致의 眞理; 218.
第二章 神의 觀念; 220.
# 1. 奇蹟; 221.
# 2. 無窮; 223.
# 1. 人乃天的 新神觀; 226.
# 2. 反對一致의 眞理로 보는 新神觀의 正體; 229.
# 3. 人乃天의 神觀; 232.
第三章 宇宙와 世界의 生成原理; 236.
# 1. 至氣一元의 原理; 236.
# 2. 至氣의 創造能力의 槪念; 239.
# 3. 氣化와 現象界; 242.
第 二 編 人生觀; 246.
第一章 世界; 246.
# 1. 天文學的 世界; 246.
# 2. 神話的 世界; 247.
# 3. 靈魂人의 世界; 249.
第二章 人間其者; 251.
# 1. 人間 對 超越; 251.
# 2. 人間世界; 252.
# 3. 人間 其者의 學; 254.
第三章 個性과 個性/내용에선 性과 個性; 257.
# 1. 持續存在와 依存存在; 257.
# 2. 個性; 258.
第四章 人間과 그 屬性; 261.
# 1. 苦의 原理; 261.
# 2. 死의 原理; 263.
# 3. 犧牲死; 268.(未完)
2. 1972년에 천도교 중앙총부가 간행한 「東學之人生觀」復刊本.
머릿말; 7.
第 一 編 宇宙觀; 17.
第一章 「反對一致」의 眞理; 19.
第二章 神의 觀念; 25.
一 奇蹟; 26.
二 無窮; 31.
三 理法; 34.
四 本能; 37.
五 精神; 39.
六 價値; 40.
第三章 人乃天的 새 神觀; 45.
一 神觀의 進步; 45.
二 反對一致의 眞理로 생기는 새神觀의 正體; 50.
三 人乃天의 神觀; 56.
第四章 宇宙와 世界의 生成原理; 65.
一 至氣一元의 原理; 65.
二 至氣의 創造能力의 槪念; 70.
三 至氣와 現象界; 78.
第 二 編 人生觀; 85.
第一章 世界; 87.
一 天文學的 世界; 87.
二 神話的 世界; 90.
三 靈魂人의 世界; 95.
四 人間世界; 101.
第二章 人間 其 者; 105.
一 人間 對 超越者; 105.
二 人間 其 者의 學; 111.
第三章 個體와 個性; 117.
一 持續存在와 依存存在; 117.
二 個性; 120.
第四章 人間과 그 屬性; 127.
一 苦의 原理; 127.
二 死의 原理; 132.
三 犧牲死; 142.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11-1)
천도교 홈에 게재된, 본인의 모든 글과 동학, 천도교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은, 모두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카페(http://cafe.daum.net/oamdonghak)의 김 용천 자료실과 교리, 교사 연구 논문과 학술논문 자료실에 게재되어 있사오니, 자주 방문하시어 많이 읽어주시고, 교단발전에 널리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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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덕 158(2017)년 2월 25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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留意事項 ;
1. 이 글은 초고본(草稿本)으로 오류(誤謬)가 다수 있을 수 있음으로 참고로 읽어주시고 인용을 하지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 이 글에는 새로 발굴된 새로운 자료에 의한 기술이 많은 데, 본문에서 직접 설명하기엔 애매한 점이 있어 註를 많이 사용하였다. 교리 교사에 관련된 중요 자료에 대한 설명이 註에 기술되어 있으므로 熟讀하여 널리 활용하여 주시기 바람. / 필자 ; 오암 김용천 심고.
목차
1. 들어가는 말.
2.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 資料에 대한 說明
3. 著者 夜雷 李敦化의 生涯와 思想./포덕 158(2017)년 2월 20일에 게재 발표하여 생략함.
4. 資料 提供者 金京昌의 神觀과 信仰.
5.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
6. 나가는 말.
1. 들어가는 말.
일반적으로 모든 자료의 重刊이나 復刊은 影印本처럼 원본대로 간행하는 것이 상식이고 자료에 대한 신빙성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천도교 교단의 자료들은 편찬자나 간행자에 의해 原典대로 간행되지 않고 사적인 견해가 도를 넘을 정도로 加味되거나 현대 어문화 과정에서 誤謬를 많이 범하고 있는 사례가 너무나 많다. 이런 현상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결함은 原著者의 의도와 사상이 많이 왜곡되거나 훼손되어 교서의 기본 핵심의 파악이 어려워진다는 결함을 초래하게 된다.
모든 서적들은 직간접으로 시대적 상황이 들어나게 되는데 중간이나 복간은 출간 당시의 시각과 문자 표기로 인하여 시대적 상황을 추리할 수 없게 만들어 교서의 담겨진 진실을 알 수 없게 되고 있다. 왜 그럴까를 추리해보면 중간 복간의 의미에 無知하거나 간행자나 편찬자의 傲慢한 자세에서 오는 결과라 할 수 있다. 누구보다도 자기의 생각과 교의해석에 있어서 최고의 수준에 있다는 자부심에서 오는 蠻勇에서 출발했거나 자신이나 집단의 필요에 따라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과오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야뢰 이돈화의 교리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新人哲學』『人乃天要義』『水雲心法講義』『東學之人生觀』等等은 전문 철학서라 해도 과언이 아닌 敎義 解說書이다. 이러한 교서를 읽어 이해하고 자기 나름의 체계를 세워 교화와 포덕에 활용하려면 광범위한 지식이 요구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독서에 앞서 관련분야에 대한 기초지식이상의 전문지식이 있어야 이해와 숙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교서들에서 동학과 천도교를 설명하기 위하여 인용된 생소한 용어들, 구절, 문장 등의 出典에 사용된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는 이 교서들을 이해할 수 없다. 야뢰 이돈화의 다양하고 광범위한 지식은 놀라울 정도이긴 하지만, 인용에서 가장 중요한 原典의 출처가 밝혀져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전과는 조금씩 다른 것들이 많아 이해에 혼란을 주고 있다. 또 동학과 천도교를 설명함에 있어, 신, 성사님들께서 사용했던 용어들을 바탕으로 하여 설득했더라면 오히려 이해가 훨씬 쉬웠을 부분들이 서양의 철학자나 사상가들의 사상을 인용하여 설명함으로써 難解하고 難澁하게 된 부분이 없다고는 할 수가 없다. 더욱이나 儒彿仙의 특수 또는 핵심용어들을 아무런 事前 설명도 없이 인용함으로서 더욱 난해하게 된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 아쉽다. 그래서 이번에 『東學之人生觀』의 비교 분석 연구에서는 출전과 오류를 철저히 찾아서 밝혀 『東學之人生觀』하나만이라도 정확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이번에 필자가 발표하는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에서 나타난 결과로만 판단한다면, 포덕 113(1972)년에 刊行된 『東學之人生觀』은, 1968년에 復刊된 「新人哲學」의 부록으로 간행된 『東學之人生觀』과는 심하게 말한다면 다른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디까지가 원전인지 가늠하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라 할 수 있다. 좀 더 나간다면 1963년에 重刊한 『東學之人生觀』重刊辭에서 원전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어 1972년도 판은 많은 왜곡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이 論文에서 先生의 思想이 적지 아니 變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은 문제를 다루면서도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의 論理나 意味가 全然 달라진 곳이 許多했다. 어느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고 判斷하는 것은 우리의 所任이 아니다. 『新人哲學』에서 보여 준 態度가 進取的이요 科學的이었다면, 『東學之人生觀』의 그것은 靜觀的이요 冥想的이었다. 한 個人의 靑年期와 老年期에 있어서의 思想的變化의 크기에 興味도 있었지만 周圍의 勸誘와 先生自身의 思想的 健全性을 위해서 『東學之人生觀』의 一部 章節을 省略했음을 밝혀둔다.
한편 이 論文은 이번 처음으로 活字化되어 公刊되는 것이다.
또한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을 復刊함에 있어서 맞춤법이나 난삽한 文章의 若干을 다둠 었을 뿐 原文 그대로 조금도 添削이 없다.’
포덕 113(1972)년에 刊行된『東學之人生觀』發刊辭에서 이 책의 간행 의미를 밝히는 내용 중, 이 책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로 인하여 복간과 중간에서 나타난 필자의 의도와 사상을 가늠해 보는데 매우 어려움을 가져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重刊을 담당했던 분의 말인 ‘한 個人의 靑年期와 老年期에 있어서의 思想的變化의 크기에 興味도 있었지만 周圍의 勸誘와 先生自身의 思想的 健全性을 위해서 『東學之人生觀』의 一部 章節을 省略했음을 밝혀둔다.’ 과 ‘ 또한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을 復刊함에 있어서 맞춤법이나 난삽한 文章의 若干을 다둠 었을 뿐 原文 그대로 조금도 添削이 없다.’는 이 말은 어느 것 하나는 거짓말인 것이다. 중간사의 마지막 글에 ‘맞춤법이나 난삽한 文章의 若干을 다둠 었을 뿐 原文 그대로 조금도 添削이 없다.’ 고 했는데 ‘『東學之人生觀』의 一部 章節을 省略했음을 밝혀둔다.’ 란 말은 웬말인가. 原文 그대로 복간 했다는 것인가? 一部 章節을 省略했다는 것과 맞춤법이나 난삽한 文章의 若干을 다둠 었을 뿐이 原文 그대로라는 것인가 맞춤법이나 난삽한 文章의 若干을 다둠고 一部 章節을 省略하고도 原文 그대로라는 것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그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原文 그대로란, 影印本과 같이 誤脫字가 있어도, 맞춤법이 틀렸어도, 현대어가 아닌 고어라도 등등 그 어느 곳 하나 손대지 않고 筆寫하거나 간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 말 하지 말고 原文 그대로 중간했으면 될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 진정 누구를 위한 중간인가?
重刊者가 임의로 한 加筆과 添削으로 인하여. 다음의 글에서 우리가 알아보아야 할 저자인 야뢰 이돈화선생이 직접 고백한 교의 해석의 변화와 사상적 추이를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先生은 이 冊의 緖言에서 『 拙著 「人乃天要義」「新學哲學/「新人哲學」의 誤字」「水雲心法講義等」은 亦是 學으로서 思想을 發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未熟期에 屬한 것이어서 整然한 體系가 不充分한 感이 있다. 이제 「東學之人生觀」은 水雲先生의 本뜻을 問題로 삼고 著者가 東學에 對 한 宇宙觀 人生觀을 풀이한 것이다』라고 所信을 밝히셨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先生은 四十年 前에 著述한 敎書들은 時代的 制約밑에서 敎理를 思想的 哲學的으로 풀이하였으나 이제 晩年에 이르러서 當身의 思想을 整理하여 最終的으로 水雲先生의 本뜻 그대로 宗敎的 信仰方向으로 整理하였다는 意味로도 解釋되는 것이다.’/ 發刊辭 2-3쪽 중에서.
이와는 달리 1968년에 復刊된 「新人哲學」의 重刊辭에서는「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의 差異點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 論文에서 선생의 사상이 적지않게 變했다는것을 알수있다. 같은 問題를 다루면서도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에 論理나 意味가 全然달라진 곳이 許多했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다르다고 判斷하는것은 우리의 所任이 아니다.
新人哲學에서 보여준 態度가 進取的이고 科學的이었다면 「東學之人生觀」의 그것은 靜觀的이고 冥想的이었다. 對照的인 樣相을 보여주었다고 할수있다. -後略- / 重刊辭 1-3쪽 중에서.
라고 하여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이 기본적인 執筆方向과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新人哲學』보다 더『東學之人生觀』이 宗敎的 信仰方向으로 整理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다르다고 判斷하는것은 우리의 所任이 아니다.’라고 해놓고, 왜 重刊者는 임의로 ‘맞춤법이나 난삽한 文章의 若干을 다둠고 一部 章節을 省略’을 하는 행동을 했는지 매우 궁금하다.
잘못된 교서들의 복간과 중간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동안에 필자가 비교분석 연구를 한 교단의 모든 자료들에서 실감했으리라 이해하고 있다. 그간 잘못된 교서들의 복간과 중간된 교단 자료들은 원본을 찾아 원본대로 복간을 하거나 영인본으로의 재 간행이 시급하다고 제언을 한다.
2.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 資料에 대한 說明
異本 『東學之人生觀』 比較硏究에 사용된 자료는, 1945년 초에 著述되어 프린트로 인쇄되어 講道會의 敎材로 사용되었던 『東學之人生觀』이, 1968년에 重刊된「新人哲學」後尾에 附錄/ PP. 215-270.으로 수록되어 있는 것과 1972년에 천도교 중앙총부가 간행한 『東學之人生觀』으로 하였다. 『東學之人生觀』은 1972년도 판에 後記에 해당하는 ‘刊行에 부쳐’ 에 집필과정과 그 의의를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東學之人生觀』은 八 一五해방이 되던 포덕 八十六(1945/필자 삽입)년 二월 一일부터 다음 해(1946년/필자 삽입) 四월까지 천도교 소강당에서(해방이후는 북조선 천도교 종리원 종학원에서/필자 삽입) 프린트본으로 전국교역자 양성을 위한 재 교육때 강의한 것이다.
저자인 야뢰선생의 사실상 교리서로서 최후작품 그간 논란도 있었고 또 프린트본이 흩으러져 일시 신인철학 부록으로 포덕 107년도에 일부 미완성 원고로 출간되었으나 완간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이 책이 간행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분들 중에는 프린트본을 전부 모아 보내주신 김경창(金京昌/오암) 동덕, 출판비를 자담한 김상준(金相俊/오암)동덕과 원고를 바로 잡는데 三개월여를 신인간사 편집실이 수고했다.(당시 필자 김용천이 신인간사 주간으로 재직기간 중으로 마지막 출판물이 되었다./오암 삽입) 또 부록으로 실린 「敎政雙全」역시 초판 인쇄로서 다만 전문을 게재치 못하고 일부 삭제한 것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라고 하고 있다.
註 00; 比較分析 硏究에서 사용된 異本 資料
『新人哲學』; 李敦化. 1924 3. 30.초간. 천도교 중앙총부. 서울.
『新人哲學』附錄『東學之人生觀』 1963년도 판은 菊版型. 1968.復刊은 4x6판.
『東學之人生觀』李敦化. 천도교 중앙총부. 서울. 1972. 重刊本./ 4x6판. 裝幀本.
그러나 1968년도 판 初刊本『東學之人生觀』은「新人哲學」의 부록/ PP. 215-270.으로
간행된 것으로 『新人哲學』의 머리말인 重刊辭 末尾에 『東學之人生觀』에 대하여, 위의 ‘刊行에 부쳐’ 와는 상당히 다른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前略- 附錄으로 실은 『東學之人生觀』은 先生께서 講道會를 열고 교인들께 說敎하던 講義案 草稿로서 선생으로 서는 晩年에 屬하는 최후 著述이다.
우리는 이 論文에서 선생의 사상이 적지않게 變했다는것을 알수있다. 같은 문제를 다루면서도『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의 論理나 意味가 全然달라진 곳이 許多했다. 어느것이 옳고 어느것이 다르다고 判斷하는것은 우리의 所任이 아니다.
新人哲學에서 보여준 態度가 進取的이고 科學的이었다면 『東學之人生觀』의 그것은 靜觀的이고 冥想的이었다. 對照的인 樣相을 보여주었다고 할수있다. 그리고 이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은 이미 數年前 韓國思想硏究會編으로 復刊되었으나 절판이 되었기 이번에 다시 刊行하면서 먼저 紙型을 그대로 사용하게 된것을 밝혀둔다.’ 라고 하고 있다.
註 00; 이돈화(李敦化/포덕 25(1884)년(고종 21) - 還元 未詳/일부 기록에는 還元年度를 1950년이라 기술하고 있으나 확인된 바가 없음/필자) - 1920년대부터 해방공간까지 천도교의 대표적인 교리 연구가이며 사상가이다. 함경남도 고원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한문을 수학하고 1902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1910년 천도교월보사(天道敎月報社)가 발족되자 사원으로 근무하면서 천도교사상의 정립과 보급에 힘썼다. 1919년 천도교 청년교리 강연부를 만들고, 1920년 천도교청년회를 조직하였다. 그 해 6월 잡지 『개벽(開闢)』을 창간하여 주간으로 있으면서 1926년 폐간될 때까지 거의 매회 천도교 교리의 근대적 해석과 민족자주사상을 고취하는 글을 썼다. 1922년 『부인지(婦人誌)』를 창간하여 편집인 및 발행인으로 있으면서 여성의 권익보호에 앞장섰으며, 1923년 김기전(金起田), 박내홍(朴來弘) 등과 천도교 청년당을 창설하였다. 1926년 『신인간(新人間)』을 창간하고 편집인 및 발행인이 되었다. 또한, 천도교 중앙종리원 편집과 주임종리사(主任宗理師), 지도관장(知道觀長), 상주선도사(常住宣道師), 종법사(宗法師), 현법사부도령(玄法師副道領), 천도교총부대령(天道敎總部大領) 등 행정상의 여러 중책도 역임하였다. 1946년 4월 이북교회를 책임을 맡아 북한에 거주하던 중 6·25전쟁 때 평안남도 양덕 천도교 수도원에서 공산군에게 납치되었다.
그의 저술인 『천도교창건사(天道敎創建史)』는 천도교의 역사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정리(整理)한 기본교사가 되고 있으며, 『신인철학』은 천도교사상을 근대적 시각에서 해석하여 체계를 세운 천도교의 대표적 사상서이다. 이돈화는 민중종교 동학의 사상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서구의 근대사상을 수용하여 종교철학적 사유를 전개했으며, 「개벽」의 편집인으로서 ‘종교’와 ‘사회’를 조화시키고자 노력했다
雅號는 야뢰(夜雷), 백두산인(白頭山人), 도호(道號)는 긍암(亘菴)이다./ 亘(또는 亙)을 豆로 잘못 보아 두암(豆菴)이라 표기한 것이 많이 있다. 亘(또는 亙)은 讀音이 선, 환, 긍이다. 代表的인 經歷은 종법사(宗法師), 현법사부도령(玄法師副道領), 천도교총부대령(天道敎總部大領) 등이다.
代表的인 著書로는, 『신인철학(新人哲學)』『인내천요의(人乃天要義)』·『수운심법강의(水雲心法講義)』·『천도교창건사(天道敎創建史)』『천도교교리독본』·『복념(福念)』·『수도요령』·『천도교요의』·『천도교사전(天道敎史傳)』·『천도교경전해의(天道敎經典解義)』『새말』·『교정쌍전(敎政雙全)』·『동학지인생관(東學之人生觀)』 등등의 著書와 天道敎會月報, 黨志, 開闢, 新人間, 등 月刊誌에 다수의 논문을 게재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신인철학의 저자 약력과 관련 자료들에서 재정리함.
註 00; 윗글 중 ‘1946년 4월 이북교회의 책임을 맡아 북한에 거주하던 중’은 필자가 알기로는 사실과 다르다. 천도교는 해방을 전후하여 북한지역의 교세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이시기에 서울에 있는 천도교 중앙 총부의 주요 교역자들이 북한 지역을 자주 왕래하면서 또는 거주하면서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강도회를 열어 해방이전에 하던 대로 설법을 했다. 고태우가 쓴 「북한의 종교정책/개정판」 63페이지 하단에서 ‘이처럼 민족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이었던 천도교는 요원의 불길처럼 교세가 확장되었고, 일제의 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8.15광복 전후에는 280만의 신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중 약 70%인 169만 여명이 북한에 있었다. 이러한 천도교의 교세와 교리 체계는 북한 공산당으로서는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시기는 남북의 분단이 고착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왕래가 어느 정도 가능하였다. 이 시기에 북한지역의 천도교의 명칭은 해방 전과 같이 군(郡)마다 일부는 면(面)지역으로 교구가 설립되어 있으므로 천도교 OO교구 또는 전교실로 불리어졌다 일부에서는 ‘북조선 천도교 종무원’이라고도 했지만, 공식명칭은 아니었다. 분단이 된 후에 알려진 명칭으로는 ‘천도교 북조선 종리원’이었다. 북한에서는 교단보다는 청우당 활동이 활발하였으므로 공개적인 조직으로 천도교 청우당이 먼저 조직화되었다.「북한의 종교정책/개정판」 122-123페이지 의하면 ‘북한지역에서의 청우당은 발족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 되었으므로(일제시대 1939년 4월 3일 전당대회에서 해산 결정으로 16년 만에 해산되었기 때문에/필자) 부활된 것이다. 북한 정권이 공고해지기 전인 1945년 11월 초에 김달현(金達鉉)을 중심으로 북조선 천도교 청우당이 결성되었다. 그런데 북한의 공산당은 일제 시대부터 활발한 정치, 사회, 문화활동을 전개했던 천도교 청우당의 전통을 이용하자는 의도에서 일종의 종교 단체적 성격으로의 정당을 변질시켜 나갔고, 그 후 소위 ’우당/(友黨) 필자삽입’으로 존속시켰던 점으로도 그들의 의도를 알 수 있겠다. ‘북조선 천도교 청우당’은 1946년 2월 8일에 위에서 말한 청우당을 골간(骨幹)으로 다시 창당되었는데, ‘북조선 중앙연감(1949판)’에는 1948년 전당대회에서 수정하여 채택하였다는 강령 및 정책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PP123-125까지 참조바람. 1983년 3월 11일에 내외통신에 의하면 천도교 북조선 종무원(또는 종리원)은 1949년에 설립된 것으로 나와 있다./「북한의 종교정책/개정판」126페이지. 이러한 정황들을 살펴보면 이돈화가 ‘1946년 4월 이북교회를 책임을 맡아 북한에 거주하던 중’이라는 기술은 이북교회를 책임을 맡아 직무를 수행하던 시기일 뿐, 이돈화는 해방 전 후에 관계없이 상시 북한지역에서의 강도회(講道會)를 자주 열어 포덕활동을 활발히 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註 00; 「新人哲學」과 「人乃天要義」그리고「水雲心法講義」은, 모두 布德 65(1924)년 3月 30日에 初版發行된 것으로, 布德 109(1968)년 2月 20日에 처음으로 同時에 復刊되었다. 이 세 권의 교서는 천도교 중앙 총부 명의로 간행되어 있지만, 교단에서 간여하지 않았다. 이 시기는 「신인간」이 「새인간」이란 이름으로 隔月刊으로 간행될 무렵이고, 필자가 「새인간」의 편집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세 권의 교서는, 필자보다 앞선 시기에 「신인간」의 主幹으로 계셨고, 이 세 권의 교서가 간행될 시기에는 韓國思想 硏究會의 幹事로 硏究會가 간행하는「韓國思想」의 편집과 간행을 總括하고 계셨던 李光淳 元老에 의해 간행된 교서들이다. 천도교인들이 깊이 간여한「韓國思想」은 韓國現代思想講座로 출간을 시작하여 제 1.2輯 合本이 1957年 7月 10日 刊行으로 시작하여(韓國現代思想講座 韓國思想」第1卷은 1958年 7月 1日로 單行本으로 간행된 것이 있다.) 1998年 8月14日字로 海月神師 殉道 100周年紀念特輯으로 第24輯을 끝으로 終刊되었다. 교단이 지원할 財源과 東學思想의 硏究人員도 크게 부족하였지만, 교단으로부터 持續的인 刊行의 必要性을 인정받지 못하였고 이것을 담당할 人才도 없고 집필자진의 충원도 여의치 않아 완전히 중단되었다. 第24輯을 간행을 하는 동안, 1957年年부터 終刊된 1998年까지 40餘年 동안 교단은 물론 人文社會 學界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필자의 短見인지는 몰라도, 교단이 깊이 관여 하지도 못하면서 일부의 재정적인 지원을 해온 「동학학보」「동학연구」를 지원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원로분들이 시작하여 간여하여 간행했던 그 의의와 그 결실을 생각해서라도「韓國思想」의 續刊이야말로 第 1輯부터 第24輯에 게재된 내용들을 되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確信하고 있다. 지금 아무런 효과도 없는 雜多한 刊行物들을 모두 廢刊하고 「韓國思想」의 續刊을 하는 것이, 敎團이 미래를 향한 4大 宗敎的 目的에 符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윗글에서 李光淳 元老가 밝힌, 數年前에 韓國思想硏究會編으로 復刊한 「新人哲學」과「東學之人生觀」등의 자료들은 희귀하여 현재로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新人哲學의 重刊辭 末尾에서 ‘그리고 이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은 이미 數年前 韓國思想硏究會編으로 復刊되었으나 절판이 되었기 이번에 다시 刊行하면서 먼저 紙型을 그대로 사용하게 된 것을 밝혀둔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韓國思想硏究會編과 1968年度 復刊本은 같은 紙型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때문에 韓國思想硏究會編을 구하지 않아도 1968年度 復刊本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믿고, 필자는 1968年度 復刊本과 1972年度 原典本을 比較硏究의 底本으로 삼았다.
포덕 113(1972)년에 刊行된「東學之人生觀」發刊辭에서 이 책의 간행 의미를 밝히는 내용 중, 이 책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이 冊에서 先生의 思想이 적지 않게 變하였음을 發見할 수 있다. 같은 問題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에 論理나 意味가 다른 點이 許多히 散見된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는 것은 우리 後學들로서는 判斷할 所任이 아니다. 先生은 이 冊의 緖言에서 『拙著 「人乃天要義」「新學哲學/「新人哲學」의 誤字」「水雲心法講義等」은 亦是 學으로서 思想을 發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未熟期에 屬한 것이어서 整然한 體系가 不充分한 感이 있다. 이제 「東學之人生觀」은 水雲先生의 本뜻을 問題로 삼고 著者가 東學에 對 한 宇宙觀 人生觀을 풀이한 것이다』라고 所信을 밝히셨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先生은 四十年 前에 著述한 敎書들은 時代的 制約밑에서 敎理를 思想的 哲學的으로 풀이하였으나 이제 晩年의 當身의 思想을 整理하여 最終的으로 水雲先生의 本뜻 그대로 宗敎的 信仰方向으로 整理하였다는 意味로도 解釋되는 것이다.’/ 發刊辭 2-3쪽 중에서.
이와는 달리 1968년에 復刊된 「新人哲學」의 重刊辭에서는「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의 差異點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대의 制約에서 오는 先生의 지나친 표현들을 무조건 변호할 정도로 頑固해서는 옳지 않을 줄 안다. 新人哲學을 通讀하면서 우리가 이미 退色한 사상적 표현을 자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것이 거이 四十年前에 出版된 책인 것을 생각한다면 勢의 當然이라 하겠으나 그 以外에도 남의 사상을 理解하는데 있어서 너무 조급했던점 예컨대 唯物論과 經驗論의 混同이라든가 唯物論의 認識方法이 科學的이라 한다든가 하는 結論을 散見하게 된다. 그러니 이책이 著述되던 당시의 문화적 사회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우리사회文化의 近代化에 當時 知識人들이 얼마나 無謀할만큼 정열적이었던가를 짐작케 하는 歷史的 證據이기도 한 것이다. 비록 시대의 變移로 말미아마 言及된 문제와 借用한 理論이 이미 시대의 後景으로 물러나고 文體가 鈍重하지만 그러한 表皮를 뚫고 진실로 「한국적인것을」 발견한 선생의 사상적 核心에 接할수만 있다면 그것도 오늘날 우리自身의 主體性을 회복하는 作業에 큰 役割을 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는 이 論文에서 선생의 사상이 적지않게 變했다는것을 알수있다. 같은 問題를 다루면서도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에 論理나 意味가 全然달라진 곳이 許多했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다르다고 判斷하는것은 우리의 所任이 아니다.
新人哲學에서 보여준 態度가 進取的이고 科學的이었다면 「東學之人生觀」의 그것은 靜觀的이고 冥想的이었다. 對照的인 樣相을 보여주었다고 할수있다. -後略- / 重刊辭 1-3쪽 중에서.
라고 하여 「新人哲學」과 「東學之人生觀」이 기본적인 執筆方向과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新人哲學」보다 더「東學之人生觀」이 宗敎的 信仰方向으로 整理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註 00; 1968년도 판「東學之人生觀」의 緖言에서는 『 拙著 「人乃天要義」「新人哲學」「水雲心法講義」「修道要領」「福念」「敎理讀本」等은 亦是 學으로서 思想을 發表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未熟期에 屬한 것이어서 整然한 體系가 不充分한 感이 있다. 이제 東學의 人生觀은 先生의 본뜻을 問題로 삼고 著者가 東學에 對 한 宇宙觀 人生觀을 풀이한 것이다』/P.217.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용은 잘못된 부분이 있다. 그리고 1968년에 重刊된 「新人哲學」 後尾에 「東學之人生觀」이 附錄으로 수록되어 있다. / PP. 215-270.
「東學之人生觀」의 1968년도 판과 1972년도 판은 모두 4X6 판형으로 되어 있다 다만 1972년도 판은 洋裝本이다. 그리고 모두 문체(文體)는 국한문(國漢文) 혼용체(混用體)이나 1968년도 판은 한주국종체(漢主國從體)로 9호 활자로 종서(縱書) 인쇄되었고, 1972년도 판은 국주한종체(國主漢從體)로 10호 활자로 종서(縱書) 인쇄되었다.
1968년도 판은 중간사(重刊辭)에서 「東學之人生觀」원고(原稿)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자료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당시 야뢰(夜雷)로 부터 직접 강의를 받은 원로들의 전하는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교재는 프린트 물이었고 책으로 완성된 자료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지만 미루어 생각해보면 짐작이 가는 부분도 있다.
「東學之人生觀」은 1972년도 판에 後記에 해당하는 ‘刊行에 부쳐’ 에서 기술하고 있는 ‘「동학지인생관」은 八 一五해방이 되던 포덕 八十六(1945/필자 삽입)년 二월 一일부터 다음 해(1946년/필자 삽입) 四월까지 천도교 소강당에서(해방이후는 북조선 천도교 종리원 종학원에서/필자 삽입) 프린트본으로 전국교역자 양성을 위한 재 교육때 강의한 것이다.’라는 것을 고려해서 그 때의 그 정황과 해방정국에서의 교단의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참작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추출(抽出)해내 볼 수가 있다. 1968년도 판은 緖言; P. 215.에서 第四章 人間과 그 屬性의 # 3. 犧牲死; 268.(未完)까지로 미완(未完)이라고 하고 게재하고 있으나, 1972년도 판에는 第四章 人間과 그 屬性의 # 3. 犧牲死에 이어서 四 死와 來世 로부터 계속하여 第 三 編 人生問題(福念編)과 第 四 編 人生問題(夜雷 對福 正菴 問答編)까지
1972년도 판 페이지로 PP. 146.- 333.로 약 190 페이지의 장문(長文)의 글이 추가(追加) 되고 있다. 전체분량의 약 3분의 2에 가깝게 추가된 셈으로「東學之人生觀」의 전편(全篇)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두 개의 자료를 꼼꼼히 살펴본 필자는, 1968년도 판은 해방 무렵까지의 강의록 자료이고 1972년도 판은 해방이후에 추가된 자료이라는 것이다. 1972년도 판은 1968년도 판의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정과 가필(加筆)이 되고, 분장(分章)과 분절(分節)을 통하여 전체적 프레임을 조정하고 구체적으로 세분화(細分化)하여 야뢰가 전하고자하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필자가 이렇게 판단하게 된 근거는 내용뿐만 아니라 시대적 정황을 많이 고려했다는 것이다. 당시의 교단은 해방으로 인하여 자유를 찾은 것은 잠시 미소의 개입으로 분단이 되자 교단은 혼란을 극복해야 했다. 東學革命百周年紀念論叢 下卷의 ‘광복과 해방정국. 2) 분단과 교단조직’ 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나라 전체의 운명이 양단되는 불행을 당하게 되었으니 개인이나 집단을 막론하고 온전할 수가 없으며 특히 중앙집권의 일사분란한 조직을 가졌던 천도교의 타격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따라서 중앙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의 기능마저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또한 해방이 되었으므로 나라도 새로 세워야 하고 빈사상태에 빠진 교회도 재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으며 그것은 기관과 인물과 운영방법이 모두 일제시대와는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45년 10월 25일에 전국임시대회가 서울의 중앙대교당에서 열리고 여기서 3원1관제(三院一觀制)의 교약으로 개정 채택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이 그 임원을 선임하였다. -중략- 이때 38선의 경계가 점점 강화되면서 남북간의 왕래가 어렵게 됨에 따라 교회운영상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남북간의 통신 연락의 두절은 물론 7할 이상이 북한에 분포되어 있는 관계로 무엇보다 먼저 연월성미(年月誠米)의 중앙납부가 수월치 못하다는 결정적인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46년 1월에 어쩔 수 없는 임시조치로 평양에 천도교 서선(西鮮)연락소와 함흥에는 천도교 북선(北鮮)연락소를 설치하여 연월성수납을 비롯한 제반 교무연락을 서울의 총부와 하게 되었다. - 중략- 이와 같은 조치는 나름대로 효과를 나타내면서 연월성을 중앙에 납부하는 일과 중앙의 각종 지시사항을 일반 교인들에게 전달하는데 있어서 불편한대로 운영해 나갈 수가 있었으므로 얼마동안 계속해 나갔다.’ /PP. 650-652.
이와는 달리 좀 더 구체적인 것도 있었다. 필자가 교화관과 신인간 주간으로 교역자로 봉직하는 기간 동안(1970년대 전후) 교단의 많은 원로 분들이 교화관이나 신인간사를 찾아와 필자가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시는 노변한담(路邊閑談)에서, 교단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 가운데, 해방정국에 관련된 부분도 많았다. 해방 무렵에 서울에 계셨던 분들의 대 부분은, 일본군에게 군수물자 창고로 빼앗겼던 천도교 대교당을 1945년 8월경(8월 17일라고 명확히 말하시는 분도 있었다.) 돌려받았다고 했고, 해방 당시 북한에서 살다가 6,25동란으로 월남한 분들은, 1947년 2월경에(2월 11일로 기억하고 계신 분도 있었다.) 평양에서 북조선 원주직 전체회의를 열어 서선(西鮮)연락소와 북선(北鮮)연락소를 합쳐서 ‘북조선 종리원’이라고 정하였다고 했다.
위에서 기술하고 있는 해방 무렵의 교단사정에 대한 정황을 미루어 보아, 1968년도 판은, 해방 무렵까지의 강의 자료인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을 맞은 그 무렵 2-3개월 정도는 강도회가 중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만약 분단을 전후하여 북한지역에서「東學之人生觀」의 강의가 있었다면, 완성된 1972년도 판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하겠다. 그리고 강도기간 중 종료기간인 1946년 4월보다 훨씬 뒤라고 추정된다. 1972년도 판에 後記에 해당하는 ‘刊行에 부쳐’에서 간행에 도움을 주신 분들에 대한 기술에서 ‘이번 이 책이 간행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분들 중에는 프린트본을 전부 모아 보내주신 김경창 동덕, 출판비를 자담한 김상준동덕과 원고를 바로 잡는데 三개월여를 신인간사 편집실이 수고했다.’ 라고 하고 있는데 이 중에는 북한출신이 있기 때문이다.
1968년도 판과 1972년도 판과의 내용의 변화가 많다는 것을 다음의 목차에서 비교하여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필자는 내용을 상세히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이 많으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직접 비교하여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만 필자가 시간의 여유가 생긴다면,「新人哲學」「人乃天要義」「水雲心法講義」「東學之人生觀」의 해설서(解說書)와 「新人哲學」「人乃天要義」「水雲心法講義」「天道敎經典解義」「敎政雙全」「東學之人生觀」등을 철저한 비교 분석을 통하여 야뢰의 사상적 추이(推移)를 연구해보는 기회가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
1968년도 판과 1972년도 판의 目次 比較
目次(#은 원 목차에는 없고 책안에서 分章이나 分節되어 있는 目次)
1. 1968년에 重刊된「新人哲學」 後尾에 附錄/ PP. 215-270.으로 수록된 附錄本.
附 東學之人生觀; 213.
緖言; 215.
第 一 編 宇宙觀; 218.
第一章 「反對一致의 眞理; 218.
第二章 神의 觀念; 220.
# 1. 奇蹟; 221.
# 2. 無窮; 223.
# 1. 人乃天的 新神觀; 226.
# 2. 反對一致의 眞理로 보는 新神觀의 正體; 229.
# 3. 人乃天의 神觀; 232.
第三章 宇宙와 世界의 生成原理; 236.
# 1. 至氣一元의 原理; 236.
# 2. 至氣의 創造能力의 槪念; 239.
# 3. 氣化와 現象界; 242.
第 二 編 人生觀; 246.
第一章 世界; 246.
# 1. 天文學的 世界; 246.
# 2. 神話的 世界; 247.
# 3. 靈魂人의 世界; 249.
第二章 人間其者; 251.
# 1. 人間 對 超越; 251.
# 2. 人間世界; 252.
# 3. 人間 其者의 學; 254.
第三章 個性과 個性/내용에선 性과 個性; 257.
# 1. 持續存在와 依存存在; 257.
# 2. 個性; 258.
第四章 人間과 그 屬性; 261.
# 1. 苦의 原理; 261.
# 2. 死의 原理; 263.
# 3. 犧牲死; 268.(未完)
2. 1972년에 천도교 중앙총부가 간행한 「東學之人生觀」復刊本.
머릿말; 7.
第 一 編 宇宙觀; 17.
第一章 「反對一致」의 眞理; 19.
第二章 神의 觀念; 25.
一 奇蹟; 26.
二 無窮; 31.
三 理法; 34.
四 本能; 37.
五 精神; 39.
六 價値; 40.
第三章 人乃天的 새 神觀; 45.
一 神觀의 進步; 45.
二 反對一致의 眞理로 생기는 새神觀의 正體; 50.
三 人乃天의 神觀; 56.
第四章 宇宙와 世界의 生成原理; 65.
一 至氣一元의 原理; 65.
二 至氣의 創造能力의 槪念; 70.
三 至氣와 現象界; 78.
第 二 編 人生觀; 85.
第一章 世界; 87.
一 天文學的 世界; 87.
二 神話的 世界; 90.
三 靈魂人의 世界; 95.
四 人間世界; 101.
第二章 人間 其 者; 105.
一 人間 對 超越者; 105.
二 人間 其 者의 學; 111.
第三章 個體와 個性; 117.
一 持續存在와 依存存在; 117.
二 個性; 120.
第四章 人間과 그 屬性; 127.
一 苦의 原理; 127.
二 死의 原理; 132.
三 犧牲死; 142.
---------------------------------東學之人生觀의 比較分析 硏究(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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