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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영윤
댓글 0건 조회 1,670회 작성일 17-01-06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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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주년 3.1절을 2년 앞두고
우리는3.1절을 맞이할때마다 독립투사 선열들의 치열한 대일항쟁을 더듬어보면서 우리는 민족적 자긍을 가지게 된다.
그 민족적 자긍의 중심에 3.1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있다, 3.1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는 얼마나 부끄러울까?
12월24일(인일기념일)을 크리스마스 이브라 하여 크리스마스를 극찬하는 극성스러운 우리 국민들, 우리것도 좀 알고 배워야 하지않을까 하는 분노마져 느껴진다.
우리 국민들은 3.1독립운동을 얼마나 아는가? 3.1독립운동하면 유관순 열사는 알아도 영도자이신 의암손병희성사님을 아는 국민과 청소년이 얼마나 될까? 5월5일 어린이 날을 모르는 국민이 있는가?
3.1독립운동과 어린이 날의 사상과 뿌리와 원동력이 천도교란 것을 아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포덕150(2009)년 3월1일 인천일보 논설에서 발췌한 "청사에 길이 빛날 의암손병희성사님의 무릎"을 펌합니다.
우리는 3.1절을 맞을 때마다 민족대표48인이 왜33인으로 결정되었으며, 당초 거사일을 3월3일에서 왜3.1일로 앞당겨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 수많은 군중을 모아놓고, 민족대표33인은 왜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민족의 배신자들이라는 비난을 사게 되었을까?
그 배경에는 민족대표48인의 대표이신 의암 손병희성사님의 청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무릎과 민족 반역자 신승희(신철)형사가 있다.
포덕60(1919)년 당시 서울 종로 경찰서 고등계소속이었던 39세된 신승희 형사는 함경도 함흥 출생으로 밀정노릇을 하다가 10년 전인 1909년 일본 경찰의 순사보로 특채된 뒤 종로경찰서에서 일하며 밀정들을 거느리고 민족주의자들의 냄새를 맡아 독립운동가들을 사찰하여 체포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독립운동 자료들을 보면 의암 손병희성사님, 최린, 한용운, 이상재, 윤치호선생등 수많은 거물급 지도자들이 그의 촉수(觸鬚)를 피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들이 역역하다.
3.1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사흘 전인 2월26일 저녁,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천도교 소속 인쇄소인 보성사에서는 기밀문서를 인쇄하고 있었다.
"오등은 자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되는 독립선언문이 었다,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신승희 형사가 들어와서 인쇄된 선언문을 읽고는 한장을 집어들고 나가버렸다,
의암성사님께서 강제 한일합방(경술국치:1910.8.22일 조선총독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한일합방 조약 조인, 발표"8.29일, 조선왕조 건국된지 27대 순종임금 때 519년 만에 망함)이후 10여년간 준비하여 거국적으로 계획한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좌절되는 청천벽력과 같은 순간이 었다
보성사 사장 이종일 선생은 황급히 의암 손병희 성사님께 알렸다, 의암성사님은 즉시 그날밤 신승희 형사를 은밀히 찾아가 현금 5천원을 싼 돈보따리를 내 놓았다. 당시 쌀 한가마 값이 4원50전이 었으므로 쌀 1.111가마 값이 되는 어마어마한 거금이 었다,
"당신도 조선의 아들이 아니오? 이걸 받고 며칠만 눈 꼭 감아 주시오", 의암성사님은 간곡히 호소하며 생애 처음 신승희 형사 앞에 무릎을 꿇으시고 애원하셨다. 이때 신승희 형사는 무릎꿇으신 의암성사님을 보시고 한울님이 두러웟는지 돈 보따리는 쳐다보지도 않고 말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의암 손병희 성사님께서는 희망이 절반 절망이 절반인 상황에서 3월3일 고종황제의 인산(因山)(장사지내는날)일로 잡았던 거사 계획을 초하루인 3월1일로 앞당기게 지시하였다, 그리고 신승희형사는 의암 손병희성사님의 꿇으신 위대한 무릎에 감화되어 나간 후 서울 장안에 모습이 보이지 않아 수소문 해본 결과 신의주에 독립단이 잠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구실로 출장을 떠난것이었다,
그리하여 당초 계획에서 이틀 앞당겨 포덕60(1919)년 기미년 3월1일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은 의암 손병희성사님의 지시대로 거사가 전개되었다. 당초 민족대표가 48인인것을 33인으로 정한것도, 독립선언 거사일을 고종황제의 장례일(因山)인 3월3일로 정했기 때문이며, 이날에는 서울 장안에 군중이 많이 모일것이기 때문에 3월3일로 거사일을 정하였는데 불가피 하게 3월1일로 앞당기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독립선언식을 탑골(파고다)공원에서 하지않고 민족대표 33인 중29인(4명불참"길선주,유여대,김병조,정춘수)이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오후 2시에 한용운선생의 인사 연설에 이어 일동 기립하여 한용운선생의 선창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삼창하고 축배를 든후 일본 경시청에 연락하여 전원 체포되었는데 민족대표 33인을 민족의 배신자라는 비난을 사게된 동기는 탑골공원에 집결한 군중들과 하생들이 너무 흥분되어 있어 공약 삼장에 명시된 정의, 인도, 배타적 감정, 질서 존중, 광명정대를 어겨 거사를 그르치게될 위험에 처하게 될것을 염려해서엿다고 한다. 한편 탑골공원에서는 독립선언서를 경신학교(儆信學校)졸업생 정재용씨가 낭독하고 만세소리 드높게 외치면서 시가로 쏟아져 나와 독립선언서를 가두에 뿌리며 시의행진을 감행하였다. 국민들은 피끓는 감정이 솟구쳐 올라 요원의 불길같은 기세로 독립운동은 치열의 도를 일가월증할때 신승희 형사는 3월14일밤 경의선 열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자 말자 기다리고 있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독립서언서 21.000매를 인쇄한 보성사 인쇄공들이 왜경들의 심한 고문을 못 이겨 독립선언서 인쇄도중 신승희형사가 다녀간 것을 실토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경찰에 체포된 신승희는 심믄을 받고 그날 밤 유치장에 갇힌 그는 자정무렵 미리 준비해 혁대 틈에 숨겼던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민족 반역자 였던 신승희는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의 결정적인 순간에 의암성사님의 꿇은 위대한 무릎에 감화되어 민족을 배반하지 못하고 죽음의 길을 갔던 것이다,
그가 독립선언문을 손에 넣은 직후 상부에 왜 보고하지 않았을까? 당시 싯가로 쌀 1.100가마니 값이 넘는 거금 5천원의 돈 보따리를 두고 밖으로 나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독립선언서를 손에 쥔 2월26일부터 목숨을 끊은 3월14일까지 17일 동안 어떻게 지냈으며 어떤 마음으로 그 약을 준비 했을까?.우리는 3.1절을 생각할때마다 의암 손병희성사님께서 민족 반역자 신승희 앞에 꿇은 위대한 무릎에 감화되어 민족을 배반하지 못하고 한 평생 편히 살수있는 거금 5천원도 뒤로 한채 죽음을 택한 신승희의 마음을 상상하고, 청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성이이시며, 대 종교가요, 대 청치가요, 대 철학가요, 대 교육가이신 의암 손병희 성사님의 보국안민을 위한 우국충정에 조용히 옷깃을 여미게 된다,
의암 손병희 성사님은 말단 공무원인 아전의 서자로 탄생하시어 어려서 부터 강건한 체구에 의리에 살고 불의 항거하는 대담하신 인물로서 호방한 기질과 부굴의 저항의식을 가지신 위인으로서 용감하게 구국의 횃불을 들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전 세계만방에 선포하시기위해 생애 처음으로 꿇은 청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의암 손병희 성사님의 업적을 떠나서 어찌 대한민국의 역사를 논할수 있으며 민족신앙의 근대적인 혁명정신과 독립정신인들 운위할수가 있겠습니까.
옜 글에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버리며 얻음을 보고 의를 생각한다"라는 견위치명 견득사의(見危致命 見得思義)란 말이 있다.
바로 그것이다, 그(신승희)는 자랑할만한 애국지사는 아니나 의암 손병희 성사님의 꿇은 무릎에 감화되어 속죄로서 자기를 버려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을 성사케 한 용기가 우리 모두를 숙연케 한다. 사람이 결심은 마음만 먹으면 할수 있으나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3.1독립선언과 만세운동 때 희생되거나 투옥되어 고생하신 수많은 선열들은 자주독립의 결심을 실천한 우국지사들이다, 민족정신이나 민족의 역량은 우국선열들이 실천한 견위치명의 희생 위에 자라는 큰 나무와도 같은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 자랑하는 조국의 번영도 순도 순국하신 선열들의 거룩한 희생위에 피어난 꽃이라고 아니할수 없다.
포덕 광제와 보국안민과 조국 독립을 위해 하나뿐인 귀중한 생명을 받쳐 견위치명을 실천하시다가 순도 순국하신 우국선열들의 유지를 받들어 몸소 체행하면서 毋 欺天하는 신앙을 하겠다고 경건한 마음으로 心告합니다. 侍天主 心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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