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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암
댓글 0건 조회 2,191회 작성일 13-08-28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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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각 (鳳凰閣)
1919년 민족대표 33인중 15명 배출한 연수원으로
3.1운동의 발원지이다.

한일합방 후 1911년에
손병희선생이 우이동에서 의친왕 이강과 밀회를 가지다가
수련도장을 짓기로 의기투합하여 1921년 완공하였다.
봉황각은 일종의 수련원으로써
482명의 국내 독립운동원을 교육하고 정신무장을 시킨 곳으로
3.1운동의 발원지이며 성지(聖地)이다.
작년(2012)에 건립 100주년의 기념식이 있었다.
삼각산 인수봉이 뒤를 지켜주고 있다.
봉황각 내부의 손병희선생 영정
동학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첫눈에 손병희 선생의 인물됨을 알았고,
해월은 직접 의암이라는 도호道號를 주고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었으며, 동학의 도통을 넘겨주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던져서 나라도, 정부도, 지도자가 없어져서
대한민국이 역사에서 사라져 갈 상황에서
우리 민족 스스로 나라를 되찾도록 용기와 의지

그리고 자생력을 키워준 거인이었다.
손병희 선생 묘지
묘비는 의암 손병희선생 기념사업회에서 건립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자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1919)날까지

단군 이래 가장 암울했던 9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을 이끈 분이 의암 손병희 선생이며,
3.1운동을 통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만든 장본인이시니,
대한민국의 대부이시다.

뒤로는 북한산 백운대의 정기가 흔들림 없이 이어지고
앞으로는 도봉산의 봉우리가 즐비하니
대한민국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2019년에는
천도교에 새로운 기운이 일어날 것이다.

수운 최제우 선생의 시천주侍天主는 해월 최시형 선생의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그리고 의암 손병희 선생의 인내천人乃天으로 발전하였다.
모심과 섬김이 의암 선생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일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을 가장 높은 경지에 올려놓은 것이다.
의암선생은 육신의 탐욕에 젖어 살지 말고 하늘의 본성인 자신의 성령을 찾아서
영원한 삶을 살도록 하라는 이신환성以身換性을 강론하셨다.
특히 3.1운동전 49일 특별기도시에 ‘이신환성“을 강조하였는데,
때가 닥치면 나라와 겨레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의암선생은 종교지도자였지만, 천도교에 얽매이지 않고 민족을 생각하며
민중의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온몸으로 고민한 사상가이셨다.
천도교가 융성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민중의 행복을 위해서는
보국안민이 선결되어야 함을 깨닫고, 나라 없는 나라를 보전하려고
자신과 천도교를, 나라를 되찾는데 올인 하고 있었다.
그는 교육가적인 면모도 보였는데,
보성학교(현 고려대학교)와 동덕여학교(현 동덕여대)를 운영하면서
관련자들을 조직화시켰으며 한민족의 정신을 교육시켰다.
보성학교를 통하여 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해공 신익희선생이다.
보성학교는 3.1운동 후 재정압박을 극복하지 못하자 동아일보 김성수씨가 인수했다.
경술국치(1910년)를 당하자
“앞으로 국권회복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니
내 반드시 10년 안에 이것을 이루어 놓으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1912년에 심산유곡인 우이동에 봉황각을 짓고
독립운동을 위해 7회에 걸쳐 483명을 수련시켰으며,
의암선생께서는 “먼저 보국 안민輔國安民이 된 다음에야
광제창생 포덕천하도 할 수 있다”고 강조한 뒤
49일 특별기도(1919년 1월5일-2월22일)를 통해 3.1운동을 위한 정신무장을 강화했다.
민족의 혼과 독립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했다.
의암선생은 우이동 봉황각에서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되는 것은 아니다”며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한다”고 굳게 말씀하셨다.
그는 미래를 보며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일본이 천도교의 탄압을 위해 종교적 성금을 거둘 수 없도록 하자,
1918년 의암선생은 천도교의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를 짓기 위한
건축성금을 거두기로 한다.
건축성금은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한 수단이었다.
건축성금은 3.1운동 및 독립운동 군자금으로 지원되었다.
이 자금은 홍범도의 봉오동전투와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의암선생이 예견하고 준비해 왔던 대로,
1919년 3월 1일,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의 3.1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고,
동시에 종로 파고다공원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일제의 식민 지배를 종식시키기 위해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자주국가임을 선포하였다.
3.1독립운동은 의암 손병희 선생이 주도했다.
민족 대표 33인중 15명이 봉황각에서 손병희 선생의 교육과 지도를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의암의 역할이 지대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헌법 전문 첫줄을 보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3.1운동은 바로 대한민국의 법통이다.
의암이 없었다면 3.1운동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도 수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3.1운동 직후 의암은 옥중에 갇혀 있었음에도,
애국지사들에 의해 6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
대한 국민의회 정부(러시아)는 손병희 선생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그 후 대한 국민의회 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해), 한성임시정부(서울)는
상호 협상과 통합으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탄생시켰다.
의암선생은 3.1운동 직전(1919년2월)에
이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의 필요성을 인지하시고
상해로 제자 신익희를 보내면서
“이번 (기미)독립선언서에는 신익희, 송진우, 최남선 세 분의 이름을 빼도록 하오.
세 분은 앞으로 할 일이 많소.
신익희 동지는 상해에 가서 망명(임시)정부를 세울 대책을 연구하기 바라오”등의
비밀 지령을 내렸다.
손병희 선생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을 염두에 두었으며,
독립을 예견하고 드라마틱하게 계획을 실행시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도
손병희 선생은 국내감옥에 투옥되어 더 이상 독립운동에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한 알의 밀알이 썩어 수많은 새로운 밀알을 만든 길을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간 것이다.
천도교의 희생정신
의암 손병희의 독립운동은 철저하게 천도교인 중심으로 치밀하게 진행했다.
이는 천도교를 위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충성심과 조직력 그리고 경제력, 정신력이 갖추어진 집단은
천도교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3.1운동 전까지는 대부분의 독립운동 조직과 자금이
천도교의 성금에서 유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천도교의 전국적인 조직을 활용하여 천 3.1운동의 전국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3.1운동으로 천도교 교단의 지도부는 모두 투옥되어 천도교는 공동화되기도 했다.
일제치하에서 천도교는 줄곧 박해와 탄압을 받았고,
교인들도 사회적 불이익의 대상이 되어 핍박을 받았다.
독립에 앞장 선 천도교단의 희생은 뼈아픈 고통이 수반되었지만,
보국안민을 위한 의암의 ‘이신환성’에 대한 큰 가르침이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의암 손병희 선생은 3.1운동으로 투옥되어
일제의 고문과 방치로 옥중에서 병마에 시달리는데,
병세가 심각해지자 일제는 1920년 병보석으로 출옥시킨다.
1921년 4월8일 환갑을 맞이하여 주변에서 걱정을 하자,
의암은 “나는 아무 병도 없소, 있다면 그건 독립병이요.
오늘이라도 독립이 되면 내 병은 곧 나을 것이요.”라고
독립에 대한 자신의 불굴의 의지를 천명했다.
의암은 안타깝게도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22년 5월19일 다음과 같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가셨다.
“여러분 수고했소이다.
나는 이제 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오.
우리 교회에서는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이라.
뒷일은 청년들에게 부탁하오.”
(동아일보1922년 5월20일자)
3.1운동은 손병희 선생의 3대원칙대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의 성과를 거두었으며,
독립과 해방의 길로 걸어가게끔 방향을 잡아주셨으니
지금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모두 그가 뿌린 씨앗의 열매라 할 것이다.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던 독립을 예견하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의암은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으로 자신의 역사적인 소임을 다하고
남은 일을 후손에게 남겨두고 떠났다.
그의 불굴의 의지는 민족의 횃불로 불타올랐다.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이 독립되자 귀국하여
손병희 선생의 묘지를 참배하였다.
“우리 일행은 우리 민족의 영웅 의암선생을 성묘하는 뜻이
천도교에 헌신하신데 있다고만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민족의 투사인 선생의 영혼을 위로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근원의 물을 우리들이 마시어
이 강산을 지키지 못하고 환국한 오늘-”..............
북바처 오르는 슬픔을 참지 못하여 목이 메여 말을 맺지 못하였다-(생략).
(동아일보1945년 11월29일자)
손병희선생은 민중에 의한 동학혁명의 맥락을 3.1운동으로 승화시키고,
대한제국의 ‘대한’과 국민이 대표되는 ‘민국’을 합쳐 국호로 제정하게 한
손병희 선생.
대한민국정부는 천도교 교주이기 전에 민족지도자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의 업적과 공훈을 기리어서
1962년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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