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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댓글 0건 조회 4,050회 작성일 14-02-19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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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道敎는 어떤 宗敎인가? (上)
/ 筆者의 講材 中 拔萃 內容의 一部.
천도교 홈에 게재된, 본인의 모든 글과 동학, 천도교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은, 모두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카페(http://cafe.daum.net/oamdonghak)의 김 용천 자료실과 교리, 교사 연구 논문과 학술논문 자료실에 게재되어 있사오니, 자주 방문하시어 많이 읽어주시고, 교단발전에 널리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알림; 연구소 방문은, 필자의 카페주소인 여기를(http://cafe.daum.net/oamdonghak/오암 동학사상 연구소)를 클릭하여 ‘김 용천 자료실’을 찾으시면, 회원이 아니시더라도, 방문객은 누구나 각 종 분야에서 선정(選定)한 만여 건(一萬餘 件)의 자료들을 검색하여 읽고, 활용하실 수 있습니다.
포덕 155(2014)년 2월 19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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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왜 동학과 천도교에 매달리고 있는가?
필자는 계대교인(繼代敎人)으로 모태신앙자(母胎信仰者)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와 형님이 지방에서 일선 교역자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중앙의 교역자들 중에는, 사석(私席)에서는 호형호제(呼兄呼弟)하시던 분들이 계셔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필자가 교단에 직접 간여하기 시작한 때부터 은퇴 시 까지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교리 교사에 깊은 지식은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1958년부터 1961년 초까지, 경전이 간행될 까지 직접 참여하여, 교단 최초로 간행된 삼부경전(三部經典)인『天道敎 經典』을 간행한 것이, 이후 필자의 삶에 족쇄(足鎖)가 될 줄을 몰랐다. 출간에 필요한 모든 부문에서 필자의 손을 거쳐 간행되었기 때문에, 그 과정(過程)과 오류(誤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필자로서는 바로 잡고 가야한다는 멍에가 지워졌다. 삼부경전(三部經典)인『天道敎 經典』에 간여하셨던 분들이 모두 환원(還元)하셨기 때문에, 필자에게 있어서는 피할 수 없는 운명(運命)과 같은 것이 되었다. 때로는 후학(後學)이 알아서 하겠지 하고 물려놓았다가도 기념일(紀念日)과 시일(侍日)에 참석하게 되면, 경전(經典) 봉독(奉讀)을 하는 교역자와 귀 담아 듣는 교도들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의 삶에 대하여 부끄러워지는 날의 연속이었다.
인간들의 삶과 관련되어 알고 있는 지식들 중에서, 필자가 적확(的確)하게 분간(分揀)하여 명료(明瞭)하게 설명(說明)할 수 있는 지식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게 되었다. 그나마 처(處)해있던 상황(狀況)에 따라, 자신의 유불리(有不利)를 고려(考慮)하여, 나 자신이 진실을 외면하고 많이 왜곡(歪曲)시키고 있었다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이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왜 나 자신의 삶에 대하여 떳떳하지 못하고, 왜곡을 하고 있는가? 등등에 대하여 후회와 반성도 하게 되었지만, 되돌아보는 것도, 그나마 내가 살고 있는 삶의 보람이 되지 않을까? 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동학과 천도교를 더 깊이 학문적으로 공부를 하기로 하고, 교사는 기록의 진실여부를 중심으로 하고, 교리는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이것이 제가 은퇴한 후에 선택한 길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2, 30대의 젊은 시절에, 교리 교사와 교단운영에 대한 전반에 걸친 일들에 대한 많은 영향을 준 교단 내외의 여러분들이 있다. 교단 내에서는 백중빈(白重彬), 백세명(白世明), 최수정(崔守正), 조종오(趙鍾浯,) 이을(李 乙), 임문호(林文虎), 김위제(金偉濟), 최덕신(崔德新), 조기주(趙周基), 박응삼(朴應三), 김용문(金用文), 박창건(朴昌建) 등의 원로 분들이었고, 교단 밖 학계에서는 박종홍(朴鐘鴻), 이항령(李恒寧), 최동희(崔東熙), 신일철(申一澈), 조용일(趙鏞一) 등등의 분들이었다. 이분들 중 필자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신 분이, 백세명 원로와 은사이신 최동희 교수님이었다.
필자가 중년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피해왔던 동학과 천도교에 대한 강의 부탁을 받아 드려 청중의 구성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를 바꾸어 가면서 강의를 해 본 경험이 있다. 약 30여 년간의 수차례에 걸친 강의를 했는데, 짧게는 50 분간의 간단한 한 개의 주제를 설명한데서부터 1회를 100분으로 하여 30회에서 50회까지 계획 강의를 해본 결과, 많은 것들을 깨닫게 했다. 단순히 교리, 교사를 기존의 교재로서 강의를 한다는 것은, 청중에게 많은 무리가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깨닫게 했다.
흔히 천도교 안에서 설명되는 표현방식으로는, 의사소통이 처음부터 어려움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청중들의 대부분이 천도교에서만 사용되는 용어에 익숙하지 않아 이해가 어렵게 되었고, 특히 일상화되었거나 학계에서 일반화가 된 학문적인 특수한 언어들에 대한 전제적(前提的)인 설명이 없이 다른 설명을 할 때에는, 매우 난색(難色)을 들어냈다. 천도교만의 표현과 설명방식은, 현대사회의 소통방식에 익숙한 청중들에게는 난해(難解)한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언어란 사회적 약속’으로, 이 약속에 의해 화자(話者/演士)와 청자(聽者/聽衆)가 의사소통(意思疏通/communication)을 하게 된다. 언어의 사회적 약속을 무시하고 말을 하면, 비록 공맹(孔孟)의 말씀이라도 소음(騷音)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청중의 다수가 세대 간의 차이가 극심하고, 그들이 교육을 받은 시대와 정도가 달라 교육받은 내용의 차이가 심하고, 또 차이가 있을수록 이해의 정도에 큰 편차(偏差)가 나타났다. 그리고 청중의 상당수가 고등교육을 통하여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 그리고 역사와 종교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기본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청중이 납득할 만한 이해의 한계를 뛰어 넘는데 많은 노력을 들이게 되었다. 그 결과 필자만의 강재(講材)를 만들게 되었고, 그간 교단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독특한 강재를 만들었다. 그 강재들은 몇 개의 주제로 나누어 구체적이고 사실적 기록(잘못된 기록들은 모두 수정 보완하였다.)을 바탕으로 만들게 되었다. 강재의 주제에 따른 자료들 중의 상당수는, 지난 10여 년 동안 이미 필자가 각 게시판에 게재하여 소개한 바가 있다.
1. 천도교 경전을 이해하기 위한 사전 공부.
가. 수운의 생몰기간의 국내외의 시대적 상황과 시대정신.
나. 경전에 사용된 수운과 해월 그리고 의암이 만들어 낸 신조어(新造語)들의 해석.
다. 경전에 사용된 기존의 언어들 중, 수운과 해월 그리고 의암이 다르게 사용한 것들의 해석. 각 언어들의 해석에 있어 1차적인(지시적 의미) 의미로 해석하여야 하는가와 상징적(象徵的)이며 함의적(含意的)인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의 선택.
1. 19세기 초부터 21세기 초까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미래지향적 역사관의 정립을 요구./ 진정한 역사의 의미는,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해석을 통한 새로운 역사와 신세계를 창조하는데 있어야 한다. 는 것이다.
1. 150여 년간의 교단사의 재해석의 필요성과 미래지향적인 해설. 그리고 교리사의 변천 내용과 교리해석의 특징과 그것들이 미친 영향들의 공과(功過)를 파악하여 설명하여야 하고. 새로운 해석을 했을 때의 신 성사님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민중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신 성사님의 핵심적인 말씀이나 주제를 적확(的確)하게 파악하여 반드시 제시해야 한다.
1. 수행(수도, 수련)의 의미와 새로운 수행법의 필요성. / 맹목적으로 수행케 하면, 맹신자를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냉담자(冷談者)를 만들어 그들을 교단에서 본의 아니게 쫒아내는 결과를 초래하여 교단의 몰락을 자초하게 된다.
1. 천도교의 4대 종교적 목적에 대해 현대와 미래사회의 발전 내용과 시대정신에 맞게 구체적인 설명이 요구된다. / 시대적 상황과 시대정신을 이해시켜야 하고, 이를 통하여 천도교의 4대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지도자와 인도자를 양성해야 한다.
1. 종교에 관련된 전 분야의 종합적인 주제. 특히 종교적 언어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해야 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새로운 출현이 예상되는 미래종교에 대해서, 출현의 이유와 배경 등등의 구체적인 설명이 요구된다.
1. 사상과 문화 그리고 철학과 역사인식에 대한, 새로운 인식방법과 해설방법을 천도교의 교의를 바탕으로 반드시 제시해야 한다.
1, 현대사회와 미래사회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인식을 통하여 ‘다시 개벽의 세계(후천개벽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를 모색하여 제시해야 한다. 아울러 지상천국이란 어떤 세상인가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타 종교인들이 천국과 극락을 이해하고 있듯이 우리 도인들도 지상천국이란 어떤 세상인가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위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심사숙고(深思熟考)하여 선택(選擇)과 보완(補完)을 통하여, 종학대학원의 강의방법과 수행방법 등의 여러 문제들과, 각종 세미나 및 일반강좌 그리고 교화를 위한 설교, 각 지역의 포교를 담당하고 있는 실무자에 대한 전문교육, 신입교인을 위한 교육과 상담, 일반교인들의 재교육을 시행함에 있어, 먼저 위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고려를 해야만 소기(所期)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필자는 확신하고 있다. 만약에 지금과 같은 교화방법 즉 우리들만의 언어로, 우리들만의 표현의 전달(傳達)방식으로 계속한다면, 교세는 날이 갈수록 더욱 약화(弱化)되리라 믿게 되는 증거로는, 매년 각 수도원에서 실시된 교육에서 수강자들의 수강이후에 일어나는 현상에서 예견할 수 있다. 수강인원보다 훨씬 적은 인원만이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直視)해야 한다.
각종 종교들의 수도, 수련원이나 교육기관에서의 이수자들의 이탈현상은, 비단 천도교만의 일은 아니다. 한국에서 포교활동을 하는 크고 작은 종단들이 다 이런 경험을 하고 있으나 천도교가 그 정도에 있어 조금 더 심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흡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각종 수도, 수련원이나 교육기관에서의 이수한 이탈자들은, 개종(改宗)을 하거나, 반종교자가 되거나 냉담자(冷談者)가 되어 가고 있다.
냉담자란 과거에는 신앙자이였지만, 지금은 타인에게는 OOO교의 신앙자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각종 종교집회나 행사에는 참석하지도 않으며, 의무실행도 하지 않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냉담자 중의 일부는 재가신도(在家信徒/個別信徒)가 되기도 하지만, 일부는 무종교인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런 이탈자들 중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심신 수련원이나 무속신앙에 매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무종교인들뿐만 아니라 일부의 독실한 신앙자 들 중에서도 심신 수련원이나 무속신앙에 매달리고 있는 실정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한국의 종교적 특이현상(特異現象)이다. 이런 이중적인 신앙자들이 많은 나라가 한국이고, 한국인만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표면적으로는 종교는 달라도, 실생활의 전반에서 대처하는 방식으로서의 무속신앙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종교인의 상당수가 단일 무속신앙자인 것이다. 신문에서 일진을 보거나 토정비결에서 신년운수를 보거나 결혼 날짜와 이사 가고 올 때에 길일을 택하는 등등의 실생활을 기준으로 한다면, 한국에는 무속신앙인과 반 종교, 무종교 등의 무 신앙인만 있는 것이다.
천도교, 불교, 개신교(기독교), 천주교, 원불교, 대종교, 유교 등등의 순수하고 단일한 개별 종교인이 없다는 뜻이 된다. 특히나 과학문명이 인류역사상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여 인간이 예측하지도 못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현시점에서, 한국사회에서 이런 시대사조에 역행(逆行)하는 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 앞에 아연질색(啞然窒塞)을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치병(治病)과 기복(祈福), 운수(運數)보기와 제액초복(除厄招福/除魔招福/除禍招福; 악마 또는 악귀를 쫓아 보내고 복을 부름)을 위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각종 굿판과 부적(符籍)을 숨기고 붙이기, 산제(山祭), 풍어제(豊漁祭), 동제(洞祭) 사당제(祠堂祭), 풍수(風水)와 고사(告祀) 그리고 무격(巫覡; 무당과 박수)에게서 답을 찾으려는 일들. 즉 각종 시험에서의 합격여부, 정치인들의 각종 선거에서의 당락여부, 각종 사업과 투자에서의 성공여부 등등의 문제들 앞에서는, 학력수준에 관계없이, 지성인과 교양인에 관계없이,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 존경받는 사람들까지 무속신앙(巫俗信仰)과 사주관상(四柱觀相), 굿판과 부적(符籍), 그리고 점괘(占卦)에서는 맹신자(盲信者)에 불과하여 그 격(格)에 있어서, 사회적 신분(social status)의 상하와 역할(Social role)에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 갈등에서 심각하고 우려할 정도의 다양한 계층사회로서, 수많은 사회적 갈등과 집단 간의 배척과 인간 상호간의 무시로 인하여, 혼란한 사회가 되어 태평성대가 언제나 될 수 있을지 그 결말을 알 수 없는 지경에 처해 있는 매우 복잡한 사회인데, 무속신앙과 사주관상, 굿판과 부적 그리고 점괘 등등에서는 맹신자로서, 모두가 정체성이 부족하고, 주인의식이 부족하며, 자신의 삶에 있어서 자립을 하지 못하는, 그리고 매우 무지(無知)하게 보이는 매우 나약(懦弱)한 국민으로서, 신분과 역할의 상하(上下)와 귀천(貴賤)이 없는 평등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한국의 종교 인구가 급감하고 있는 현실적 이유는, 산업기술사회가 급격한 발전으로 인한 문회지체현상이 아노미 현상을 초래해, 다원화(多元化)되고 복잡한 구조를 가진 현실사회에 부 적응자가 다수 발생하게 됨으로 인하여 삶의 방향을 상실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제 4물결의 중심부에 들어서고 있지만, 선진 국가와 일부 산업에서는 제 5물결을 거쳐 제 6물결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 6물결에 접어들면 제 6물결의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한, 융합종교(학계에서는 시민종교/civic religlon 일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라는 ‘인간의 현실적 욕구를 기성종교보다 더 확실히 해결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종교’가 새로운 교의(敎義)와 조직을 갖춘 종교가 탄생하거나 기존 종교가 새로운 교의 해설과 조직을 통하여 교역자와 신도 간의 소통하는 모습으로 개혁하여, 대체종교(代替/ 代用宗敎와 宗敎代置物-surrogate/ alternative religion. / religions surrogates)로서의 새로운 역할을 하게 될 런지도 모를 일이다. 거대교단(巨大敎團)들도 다 겪고 있는 신도들의 급감하는 현실에 제대로 대처를 하고 있지 못하는 형편에 놓여 있다고 한다. 이러한 한국적 현실에서 천도교의 포교는, 신앙자 들의 이탈(離脫)과 급감(急減) 그리고 포덕(布德)이라는 상반되는 이중적인 고난(苦難)을 안고 있는 심각한 현실에 놓여 있는 것이다. 종교에서 이탈하는 사람과 신입교인이 줄어드는 상황에서의 포교는, 특단(特段)의 포교전략이 없이는 중흥이라는 전망이 매우 어두운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의 종교는 대체로 국민으로부터 불신에 가까운 30% 미만의 신뢰도를 보이고 있다. 2014년 2월 5일 07시 sbs-tv 뉴스 자막방송에서, 기독교 윤리실천 운동(기윤실)이 작년도 말까지 수년 동안에 실시한 각 종교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조사에서 천주교가 29.2%, 불교가 28%, 개신교 21.3%, 유교 2.5%, 원불교 1.3% 등의 순으로 조사되고 있다. 천도교는 신뢰도 조사에서도 빠져 있어 대중의 관심밖에 있다.
한국에서 종교 활동을 하고 있는 모든 교단과 교역자들은, 아래의 조사에서 나타나고 있는 국민들의 시각과 냉정한 평가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받아드려 신도와 국민들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다.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며 우월감으로 상대를 무시하려는 태도는 반드시 개선되어, 봉사자로서 공존공영하려는 이 나라의 국민의 한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국민들이 종교인들에게 주는 경고에 대한 올바른 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註 01; 개신교 신뢰하는 성인 10명 중 2명 정도에 그쳐" / 프레임 제 구성.
/ SBS 뉴 미디어부 / 최종편집 : 2014-02-04 11:29
우리나라 성인의 20%가량만이 한국 개신교를 신뢰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개신교는 종교기관별 신뢰도에서도 천주교(가톨릭), 불교보다 훨씬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종교기관 또는 종교인의 정치적 참여활동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74.6%가 반대 또는 적극 반대한다는 의견을 보였습니다. 기독교 윤리실천 운동(기윤실)이 만 19세 이상 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오늘(4일) 발표한 '2013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기독교(개신교)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19.4%에 그쳤습니다. 반면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44.6%나 됐고 보통이라는 의견은 36.0%였습니다. 이런 조사 결과를 5점 척도로 환산하면 평균 2.62점으로 파악됐습니다. 2008년부터 2010년에 걸친 세 차례 조사에서 신뢰한다는 응답은 18.4%, 19.1%, 17.1%, 5점 척도 평균은 2.55, 2.82, 2.58로 나타나 개신교의 낮은 신뢰도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기윤실은 분석했습니다. 주요 종교기관의 신뢰도는 가톨릭이 29.2%로 가장 높았고 불교(28.0%), 개신교(21.3%), 유교(2.5%), 원불교(1.3%) 등 순이었습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의 종교 신뢰도를 보면, 가톨릭 32.7%, 불교 26.6%, 개신교 8.6%로 나타나 개신교 신뢰도가 더욱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개신교의 구성요소별 신뢰도 조사에서는 교인(30.3%)의 신뢰도가 가장 높았고 다음이 목사(21.1%), 교회활동(14.1%) 순이었습니다. 개신교의 신뢰 회복을 위한 개선점으로는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24.0%), 불투명한 재정 사용(22.8%), 교회 지도자들(21.0%), 교회성장제일주의(14.5%), 교인들의 삶(13.1%) 등을 꼽았습니다. 종교인 과세 문제에 대한 의견은 찬성이 85.9%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반대는 12.2%밖에 안 됐습니다. 종교기관 또는 종교인의 정치적 참여활동에 대한 의견은 반대(39.8%), 적극 반대(34.8%), 찬성(20.7%), 적극 찬성(2.4%)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번 조사는 기윤실이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조흥식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책임연구원으로 작년 12월 10∼11일 실시했으며,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 포인트였습니다.
왜 그들은 교단으로 돌아오지 않고 떠나고 있는가? 를 심각(深刻)하고 냉철(冷徹)하게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지금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청중과 종교의 신앙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언어를 충분히 알아들어, 질문의 요지와 알고 싶은 핵심 주제에 대하여 정확하게 숙지하고 있으며,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표현방법으로, 각 종단에게 답변을 요구하고 있는 내용들을 잘 설명하고 있는가? 를 반성해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태의 발단은 교단과 교화를 담당하고 있는 교역자들의 태반이 종교적 언어의 중요성을 모를 뿐만 아니라 ‘언어의 사회적 약속’을 도외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황당한 것은, 경전과 일반교양에 대한 충분한 학습과 수행을 하지 않은 미숙한 상태로, 자기만의 언어로 소통을 하겠다고 덤벙대기 때문이다. 라고 필자는 단정하고 있다. 심하게 말하면, 청중보다 더 다양한 각종 분야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해설과 설득능력의 부족함과 특히 종교분야의 광범위한 학문적 지식을 갖추지 못한 일부의 교역자들이 교단의 장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우리들은 현재와 미래의 문화에서 탈락했거나 현대인과 미래인 들의 ‘약속된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외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슴이 아프지만 인정해야 할 것이다.
종교인들 간에는 감성적(感性的)인 언어로 소통과 표현을 해야 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더 언어에 대한 깊은 이해와 표현기술이 있어야 한다. 일상적인 언어인 공적언어(公的言語)와 종교라는 특수한 영역에서 사용되는 종교적 언어 즉 특수 언어들의 그 속성과 특성을 잘 이해하고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다 천도교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보다 감성적인 언어로 소통을 하는 것 이외에다 더 이성적인 소통을 위한 적확(的確)한 언어의 선택과 표현기법(表現技法)이 더 많이 요구된다. 그 이유는 동학의 기본사상이, 매우 고도(高度)의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사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천도교의 모든 교역자의 필수적인 요건은, 청중보다 더 다양한 분야에서 더 깊고, 더 넓은 학식(學識)과 덕망(德望)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운의 ‘좌잠(座箴)’에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믿는 것만으로는 포교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도학을 수련하여 터득하는 데는 올바른 방법이지만, 현실에서 생존경쟁에 우위를 차지하고 생존하기 위하여 냉엄하게 살아가야 할 현대인들에게는 합당한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좌잠(座箴)’에서 말씀하신 것을, 깊이 자각하여 깨달아서 실천궁행을 하여야 한다. 황선희는 『한국근대사의 재조명』에서 1910년대의 교단의 교리해석에 있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수양을 거듭하여 정신을 천에 융합일치시키면 인내천에 이른다고 하여 한울을 대정신으로, 인간을 소정신으로 설명하였다.(梁漢黙의 “大宗正義”에서 밝힌 내용/필자 주) 크고 작다는 양적인 조건을 제외하면 천과 인간은 정신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조는1910년대에 천도교에서 전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또한 인간의 성이 천의 리이므로, 결국 리도 인간과 천의 공통요소라고 하였는데 천의 성, 리와 조화를 나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더욱 강조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理로, 능력을 조화로 본 것은 역시 천의 종교성을 부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무렵 천도교의 신관은 한울님을 一氣, 理, 性, 心과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성 즉 도를 완성하는 것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과 정성에 있다고 하여 인간은 항상 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논증은 무신론적으로 흐르기 쉬운 위험이 있었다. 그리하여 천에 신성을 부여하면서 교리를 철학적으로 체계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20년대의 인내천 논증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PP. 210-211.
한국에서의 교역자와 신도들은 따뜻한 가슴(多情多感한 感性)도 중요하지만, 차가운 머리(冷徹한 理性)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註 02; 吾道博而約 不用多言義 別無他道理 誠敬信三字 這裏做工夫 透後方可知 不怕塵念起 惟恐覺來知 / 座箴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우리의 도(내가 창도한 수운의 도는)는 도의 범위가 깊고 넓은 것 같으나 간략함으로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도를 터득함에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 경, 신 석자에 있으므로, 이를 깊이 자각하여 깨달아서 실천궁행을 하면 된다. 그러면 그 과정 속에서 우리 도의 참 모습을 터득하여 마침내 깨달을 수 있다. 자각하고 실천궁행을 하는데 잡념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깨우쳐서 「萬事知」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라.
■ 世俗的인 言語(日常的인 言語)와 宗敎的인 言語(特殊言語).
소쉬르가 말한 언어의 여섯 가지 기능은 다음과 같다.
(1) 화제(話題)(대상) : 말이 관계 맺고 있는 상황 ..................... 표현 기능.
(2) 발신자(發信者) : 화자, 필자 ................................................. 표출 기능.
/ 정보적 기능이란? 상대방에게 정보가 담긴 말을 전달하는 것.
(3) 수신자(受信者) : 청자, 독자 ................................................. 지령 기능.
/ 명령적 기능이란?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명령하는 기능.
(4) 의사소통(意思疏通) 경로(經路) : 언어가 사용된 분위기(경로). 친교 기능.
/ 친교적 기능이란? 언어의 기능이 친교를 확보하거나 확인하는 것일 때에는 개념적인 의미보다도 언어가 발화되는 전후 상황이 중시 되는 것.
(5) 전언(傳言) : 쓰여진 말 자체 ................................................ 미적 기능.
/ 미적 기능이란? 언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기능.
(6) 언어(言語) : 사용된 언어의 종류 ...................................... 관어적(關語的) 기능.
/ 표현적 기능이란? 화자에 초점을 둔 언어 행위일 때 드러나는 언어의 기능.
또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 라는 표현을 제일 먼저 사용한 사람인 닐슨(Kai Nielson; 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종교적 개념은 그 개념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삶의 형식’을 이해할 수 있는 내부인의 입장에서만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개념이나 종교언어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먼저 외부인으로부터 내부인이 되어야 한다. 또한 종교개념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그 개념을 만들어 낸 “삶의 종교적 형식”에 직접 “참여하려는 의향”을 가져야 한다. 닐슨이 제시한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Wittgensteinian Fideism)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고 설명하고 있다.
1. 종교개념을 이해하려면 삶의 흐름에 나타난 그 개념의 기능을 이해해야 되며, 그 개념의 기능을 이해하려면 그 기능이 작용하는 삶의 형식에 직접 관여하는 내부자가 되어야 한다.
2. 언어형식(the forms of language)은 삶의 형식-삶의 형태이다.
3. 삶의 형식은 주어진 것(the givenness)이다.
4. 일상 언어는 있는 그대로 괜찮다(all right as it is).
5. 철학자의 임무는 사람들의 언어와 삶의 형식을 비판 및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는 데 나타나는 철학적 혼란을 해소시키는 방향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6. 각기 다른 삶의 형식을 전체적(as a whole)으로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7. 각기 다른 삶의 형식이 가진 각기 다른 대화법은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제 나름 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8. 지성, 실재, 합리성과 같이 일반적으로 논란을 일으키는 개념들은 확실한 삶의 방식의 맥락 속에서만 정확한 의미가 결정될 수 있다.
9. 그러므로 철학자는 각기 다른 삶의 형식이나 그 형식이 가진 제 나름 대로의 대화법을 비판할 권리가 없다. 모든 삶의 형식은 비합리성을 구별하는 자체의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최경환의 ‘비트겐슈타인과 신앙의 문법’ / 철학과 기독교 신앙. 2009. 07. 23.에서.
■ 宗敎 言語의 特異性과 세 가지 問題點.
가. 宗敎 言語의 特異性.
아퀴나스(Thomas Aquinas)와 같은 철학자들에 의하면, 종교언어는 단의적(單義的/ univocal; 완전히 동일한 의미)으로 사용된 것도 아니며, 다의적(多義的/ equivocal; 완전히 다른 의미)으로 사용된 것도 아니며, 유추적(類推的/ analogical)으로 사용된 것이다. 라고 했다.
나. 宗敎 言語의 세 가지 問題點.
1. 종교언어(religious language)는, 실제로 외형적(external)으로는 세속적 언어(Secular language)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2. 우리가 비록 종교언어의 특이점을 발견했다고 가정해도 그것은 적어도 문법상(grammatical)으로는 세속 언어와 다른 점이 없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리고 어떤 기준에 의하여 특이한 지를 판명할 수가 없다.
3. 언어의 종교적 의미는 어디까지나 세속적 의미의 연장(extension)이거나 변형(transformation)에 불과하다. / 황필호의 “철학적인간 종교적인간” PP. 219-220.에서 발췌 요약정리.
종교언어가 일상적인 언어와는 다르게, 위와 같은 특이성과 문제점을 내포(內包)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종교행위 전부를 종교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러나 개별 종교들의 특성이 들어나는 것은 종교언어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종교와 다른 종교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종교행위(기도, 의식, 수행, 대화, 경전의 이해 등등)를 다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천도교가 천도교답기 위해서는 천도교만이 사용하는 종교적 용어에 대한 개념정의가 정확하게 설명되어 있어야 하고, 그 설명에 따라 통일되게 말을 해야 한다. 만약 ‘천도교 교단이 약속한 언어’가 아닌,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유사(類似) 천도교이거나 다른 종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종교용어는 문학과 예술용어와 같이 基本文法에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 어떤 분야의 表現과 記述보다 더 자유롭게 萬事의 現象과 關係를 표현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하나’라는 수사에 존칭사인 ‘님’이 합해진 합성어이다. 그러나 우리의 표준문법(기준문법)에선 수사에다 존칭사인 ‘님’을 붙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비문법적이다. 같은 이유로 목판본 용담유사에 ‘하님’이라 표기 되었다고 해서 하느님이라 해야 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동학과 천도교의 교의가 담겨진 것이 ‘한울님’이라면, 한울님이 올바른 표기인 것이다.
모든 종교는 가기만의 언어로 교의를 설명하고 있고, 그 언어로 이해해야 그 종교를 올바르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각 종교가 경전을 설명하는 언어의 다수는 생활언어로서 공적언어이지만, 그 종교의 특성을 나타내는 언어들은 그 종교만의 종교언어로 특수언어인 것이다. 한 종교의 종교언어는 그 종교의 특성을 들어내는 중요한 언어인 것이기 때문에 교의를 설명할 때에는 상징성(象徵性)과 함의적(含意的)인 언어의 선택을 적확하게 하여야 한다.
註 03;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년 11월 26일 - 1913년 2월 22일)는 스위스의 언어학자로 근대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조로 불린다. 언어학에서 사용되는 중요 개념 중 상시 언어학(synchronic linguistics)과 통시 언어학(diachronic linguistics)을 처음 도입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 소쉬르의 제자들의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편집하여 그의 사후(1916년)에 출판된 《일반언어학 강의》(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가 있다.
젊은이 문법학파의 제자였으나 그들의 이성과 존재론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전근대적인 접근 방법을 취하였다. 언어 현상을 전체로서 체계 속에서 고찰하였다. 드 소쉬르의 최초의 논문이자 가장 중요한 저작인 1878년의 Mémoire sur le système primitif des voyelles dans les langues indo-européennes (인도유럽어족 원시 모음체계에 관한 논문)가 바로 그것이다. 이 논문에서 인도유럽어족의 음성체계에는 이미 알려진 음 이외에 소멸한, 음가를 알 수 없는 한 음이 있었다고 가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941년 헨드릭센(Hendriksen)이 히타이트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드 소쉬르가 언급한 바로 그 위치에서 어떤 후두음을 발견함에 따라, 드 소쉬르의 이론의 정당성은 확고해졌다. 이 이론은 후두음 이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위키 백과에서 정리.
註 04;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년 4월 26일 – 1951년 4월 29일)은 오스트리아와 영국에서 활동한 철학자이며, 논리학, 수학 철학, 심리 철학, 언어 철학 분야에 업적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힌다. 저서로는
시기별 주요 저서1889-1921 : 《논리 철학 논고》(독일어: Logisch-Philosophische Abhandlung, Annalen der Naturphilosophie, 14 ,1921년), 《쪽지》
1922-1933 : 〈철학에 대한 견해〉(독일어: Philosophische Bemerkungen), 러쉬 리즈(Rush Rhees) 편집,1964년)
1933-1935 : 《청색 책, 갈색 책》(영어: The Blue and Brown Books, 1958년), 케임브리지 재학시절인 1933년 - 1935년 사이에 영어로 쓰인 노트를 사후에 정리
1936-1949 : 《철학적 탐구》(독일어: Philosophische Untersuchungen, 1953년)
1949-1951 : 〈확실성에 관하여〉(영어: On Certainty) - 행동이론에 영향을 받은 철학적 단상들 / 위키 백과에서 요약정리.
현대사회가 모든 분야에서 매우 복잡해져서 多元化 時代라고 불려진지도 20여 년에 이르고 있다. 다원화 사회가 갖는 특징 중에 하나는 價値의 多樣性을 수용하는 풍토가 형성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眞理라든가 絶對價値란 말이 수용되지 않는 경향이고, 만의 하나라는 극소수의 상황 즉, 과거 시대에는 제외시켰던 평가의 가치가 없었던 상황도 이제는 독립된 가치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치 혼란의 시대가 잘못된 결과를 양산하는 상황이 자초하게 되었고, 이로 인한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惡循環의 繼續’이라 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다 종교가 크게 번창하기 시작한 시기가, 해방이후가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천주교, 기독교, 불교의 그 신도 수가 천만 명을 전후하여 크게 성장함에 따라, 다양한 종교와 무속이 크게 번창하고 있는 실정의 다종교시대가 되었다. 학술적으로는 이런 현상을 ‘複數宗敎 現狀(religious pluralism)’이라 하고 있다. 황필호는 “서양종교철학산책”에서 복수종교 현상에 대하여 학계의 논의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수많은 종교가 존재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나름대로의 절대성을 주장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과거에도 복수종교현상의 갈등과 마찰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철학의 비판을 받아 온 종교는 복수종교현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언제나 큰 문제로 부상되어 왔다.’ P. 95.
註 05; 황필호는 “철학적인간 종교적인간” PP. 263-266.에서 종교 간의 관계를 극단적인 배타주의(Extreme exclusivism), 극단적인 포괄주의(Extreme inclusivism), 일반적인 병행주의(general parallelism), 활동적인 복수주의(dynamic pluralism)의 네 가지로 분류해서 설명하고 있다.
황필호는 “서양종교철학산책”에서 복수종교현상이 보여주고 있는 공통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명제를 정하여 설명하고 있다.
1.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다.
2.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3. 모든 종교는 공통의 심리적 근원을 가지고 있다.
4. 모든 종교는 중심을 향한 길이다./ PP. 95-109.
황필호는 위의 주제들을 설명한 것 중에서, 기독교의 절대주의를 부정하고 종교의 상대주의를 제창한 19세기에 들어와서 독일의 종교사학파의 대표자인 어네스트 트뢸치(Ernest Troeltsch)와 폴 니터(Paul F. Knitter)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다. 라는 것에 대하여,
‘이 주장을 최초로 명확히 지적한 사람으로는 독일의 신학자. 철학자, 정치가였던 트뢸치(Ernest Troeltsch 1865-1923)를 들 수 있다. 그는 독일의 한 기독교인으로써 지금까지 그가 믿어 온 신앙과 시대의 조류(the signs of the times) 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서, 인간은 사회적이며 합리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존재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인간이 역사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인간에 관한 한, 절대적인 것을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니터(Paul F. Knitter)는 그의 사상을 이렇게 요약했다.
‘인간이 역사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모든 인간적인 것과 인간이 창조한 모든 것은 역사적인 상황의 제약을 받으며, 또한 역사적인 발전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간문화와 인간지식은 당연히 제약되고 변화하게 마련이다. 동일한 것이라도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마련이다.
인간이 성취하는 모든 역사적인 업적은 절대적인 것-유일한 진리나 불변하는 진리- 을 거부한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인 의식은 모든 문화에 대한 극단적인 상대성을 함유한다. 이런 지적인 정직성에 의하여 트뢸치는 역사적인 의식과 문화적인 상대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註 06; 폴 니터 - 1939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1966년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신학과정을 이수, 목사가 됐으며 1972년 독일 마르부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1975년 서른여섯 살 때 사제로서 길을 접고 수도회를 떠났다. 2007년부터 미국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비교 종교학을 가르치고 있는 중이다. 달라이 라마, 데스몬드 투투 등과 함께 평화평의회국제위원회의 이사로 활동했으며 무슬림과 힌두, 불교 신도들과의 심층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다원주의적 종교 신학의 정점에 서 있는 그는 교회 중심주의·그리스도 중심주의에서 신 중심주의로, 해방의 실천을 통한 구원 중심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 세계를 돌며 마음의 평화와 세계 평화에 대해 설파하는 인기 강연자이다. 2(2009)년 전 `부처님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다.`는 책을 냈다. / 인터넷의 뉴스자료에서 요약 종합정리. / 天道敎는 어떤 宗敎인가? (上)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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