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동학 장생주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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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侍天主
‘시천주(侍天主)를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主者 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라고 풀었습니다.
천도인들은 ‘시천주’가 동학만이 쓰는, 동학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란 것을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넓고 깊게 살펴서 의미별로 인지하고 응용해야 합니다. 그러하려면 ‘시천주’를 ‘동학론’에 나온 ‘풀이’만으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용담유사’에 나온 ‘풀이’도 포함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결과는 하나의 원인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이뤄진 것이다.’라는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시천주’는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이뤄진 것입니다. 우선 ‘시천주’란 말을 수운께서 분석한 것을 보면 ‘시’라는 말과 ‘천(한울님)’이란 말과 ‘주’라는 말입니다. 그 ‘시(侍모시다)’도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고, ‘천(天)’도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의미 중에서 ‘지기의 속성’에 합하는 것으로써 ‘시천주’를 풀어야 동학의 ‘시천주’ 의미가 나오게 됩니다.
먼저 ‘모시다(侍)’의 일반적 의미를 살펴보고, ‘용담유사’의 ‘교훈가’ ‘네 몸에 모셨으니...’의 의미와, ‘동학론’의 ‘모신 것(侍者)’의 의미를 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천(한울님)’에 대한 풀이가 생략되어 있는데, 수운께서 지금까지 언급해 온 것을 참고하여 ‘천(한울님)’의 동학의 모습을 밝혀야 합니다. ‘천(한울님)’의 개념을 알지 못하고는 ‘시천주’ 풀이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글 끝’에서 ‘시천주’를 동학의 의미로 정립하려 합니다.
[모시다(侍)]
먼저 일반에서 쓰는 ‘모시다’의 의미를 봐야겠습니다. ‘모시다’에는 ‘섬기다· 받들다· 위하다’와 같은 ‘존칭의미’와, ‘선생님을 집에 모시다(인도하다), 부모님을 모시다(함께 살다)’ 등처럼 ‘단독개념’으로 쓰입니다. ‘모시다’가 ‘존칭의미’를 갖게 된 것은 ‘가시다· 오시다’처럼 ‘존칭사’인 ‘시’가 들어서입니다. 이처럼 ‘가다’에 존칭사인 ‘시’를 넣어 ‘가시다’라고 한 것이므로 알기가 쉬운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을 집에 모시다’의 ‘모시다’처럼 ‘안내하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는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시다’의 단독개념이 무엇인지 알아야 ‘모시다’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동학에서 사용하는 ‘모시다’도 ‘존칭의미’와 ‘단독개념’이 있는데 역시 ‘단독개념’이 무엇인지 알아야 ‘모시다’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교훈가’의 ‘모셨으니’와, 동학론(논학문)의 ‘모신 것(侍者)’의 단독개념은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모셨으니’의 단독개념}
‘모셨으니’는 수운의 ‘교훈가’ “나는도시 믿지말고 한울님을 믿어셔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 하단말가”라는 글 속에 있습니다. 이 문장의 의미론적 의미는 ‘한울님을 네 몸에 모셨으니 가까운 데 한울님을 버리고 먼 데 한울님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근취원(捨近取遠)’의 의미를 알면 자연히 ‘모셨으니’의 단독개념은 ‘갖추고 있었으니’의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이미 지기의 속성‘을 통해 ‘지기한울님을 몸속에 갖추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셨으니’의 ‘단독개념’은 ‘네 몸에 갖추고 있었으니’란 의미입니다.
{‘모신 것’의 단독개념}
‘모신 것(侍者)’을 ‘동학론’에서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신 것’은 ‘내유신령· 외유기화’· ‘각지불이자’입니다. 그럼 ‘내유신령· 외유기화’와 ‘각지불이자’의 단독개념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내유신령·외유기화’의 단독개념은 ‘기화’이고, ‘각지불이자’의 단독개념은 ‘사유·’입니다. 그럼 그런가 알아봅니다.
‘내유신령· 외유기화’의 단독개념이 ‘기화’인 것은 ‘기화한 것’을 ‘모신 것’이라 해왔고 ‘모신 것(侍者)’을 ‘內有神靈 外有氣化’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 동학을 동학으로 교리를 정립하려한 야뢰 뒤로, 가장 교리에 애쓴 분이 최동희 교수입니다. 그는 ‘모신 것’인 ‘내유신령· 외유기화’를 1974년 ‘한국사상3권’ ‘동학주문에 대하여’와, 이후 근년의 ‘새로 쓰는 동학 238쪽’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내유신령·외유기화’를 ‘기화현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모신다는 말의 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 내유신령은 마음의 경지이고, 외유기화는 신체의 상태임을 알 수 있다.”1)처럼 <‘모신다(기화하다)는 말’의 풀이라는 관점에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내유신령’은 지기에 심신이 화한(기화한) ‘마음의 경지’란 것입니다. 그리고 ‘외유기화’는 지기에 심신이 화한(기화한) ‘신체의 상태’란 것입니다. 그래서 ‘내유신령’은 기화한 ‘마음의 경지’이고, ‘외유기화’는 기화한 ‘신체의 상태’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마음은 몸보다 내적인 것으로 보며, 따라서 ‘내유신령’을 마음 측면으로 본 것은 합리적입니다. 또한 ‘몸’은 마음보다는 외적으로 보아왔으므로 ‘외유기화’를 몸 측면으로 본 것은 합리적입니다. 그럼 ‘동학론’의 ‘내유강화지교[內有降話之敎; 마음에는 강화의 가르침이 있었고]’도, ‘허령’에 마음이 접해서 일어난 현상으로 볼 수 있고, ‘외유접령지기(外有接靈之氣; 몸에는 접령의 기운이 있었다)’도, ‘일기’에 몸이 접해서 일어난 현상으로 볼 수 있어 일관성이 있습니다. 이처럼 ‘내유· 외유’를 ‘마음측면· 몸측면’의 기화로 보면, 다른 용어들도 해석할 수 있어서, 보편성이 있는 해석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은 방법이 ‘내(內)· 외(外)’를 <속· 겉>으로 의역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개체의 ‘내· 외’를 말할 때는 ‘속· 겉’이라 말하지 ‘안· 밖’이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사과 속은 희고 사과 겉은 붉다’라고 말하지 ‘사과 안은 희고 사과 밖은 붉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내∼ 외∼’는 개체인 사람의 ‘기화겪음’을 설명한 것이므로 ‘속· 겉’으로 의역해야 합니다. 그래서 ‘안에는(맘에는)· 밖에는(몸에는)’이라 풀지 말고 ‘속에는∼· 겉에는∼’이라고 풀어야 옳습니다.
그리고 ‘내유신령 외유기화’의 ‘기화’는 ‘강령· 강화· 대강’ 중에서 어떤 ‘기화’ 현상을 지칭한 말인지 가려보니, ‘대강’뿐이었습니다. ‘대강’에는 ‘고요해지고 맑아지고 밝아지고 신령·거룩해짐’이 있었습다. 이 같은 ‘대강체험’에서, ‘맑음·밝음’으로 겪었을 경우 ‘내유신령· 외유기화’를 의역하면 <속에는 맑아짐이 있고 겉에는 밝아짐이 있다.>가 됩니다. 또 ‘신령·거룩’으로 겪었을 경우에는 <속에는 기화한 신령함이 있고, 겉에는 기화한 거룩해짐이 있다.>가 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모신 것(侍者)’인 ‘내유신령·외유기화’의 ‘단독개념’은 줄잡으면 ‘기화’입니다.
다음 ‘모신 것(侍者)’의 ‘각지불이자(各知不移者)’의 ‘단독개념’은 ‘사유’가 된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 알아봅니다.
‘各知不移者’를 직역하면 “각기 옮기지 않는 것(者)을 앎이다.”입니다. 따라서 <옮기지 않는 것>을 <앎>이 <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옮기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봐야 합니다. ‘옮기는 것’과 ‘옮기지 않는 것’은 ‘만유’의 이분법입니다. 같은 유에 ‘변자’와 ‘불변자’가 있는데, 만유를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으로 나누는 이분법입니다. 그래서 ‘옮기는 것’과 ‘옮기지 않는 것’은, ‘변자’와 ‘불변자’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옮기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존재론’ 측면에서 보면, 존재자를 현존(개체)과 본존(본체)으로 분리하는데 현존은 옮기고 변하는 것이요, 본존은 불변자입니다. 동학에서 본존(본체)은 무한자 지기이며, 무한자 ‘지기’는 불변자· 불이자(不變者· 不移者)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옮기지 않고 변하지 않는 유일한 본존인 ‘지기를 앎’이 ‘모시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알기 위해서는 이처럼 ‘옮기지 않는 것인 지기(不移者)’에 ‘관심’을 갖고 ‘사유’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기의 속성이 ‘무한· 맑음· 밝음 거룩· 섭명· 기화’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관심을 갖고 사유해 ‘앎’이 ‘모시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모시는 것’인 ‘지(知)’의 단독개념은 ‘사유· 앎’이요 줄잡으면 ‘사유’입니다.
따라서 ‘각지불이자(各知不移者)’는 <각자, 옮기지 않는 몸속 지기의 속성을 사유해 앎이다>라고 풀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기화’를 겪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지기의 속성’을 사유해서 알아가는 것이 ‘모시는 것’이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부모님에 관심을 갖는 것이 효도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모시는 것(侍者)’의 “내유신령·외유기화, 각지불이자”의 단독개념은 ‘사유· 기화’입니다. 이 같은 단독개념인 ‘사유· 기화’로써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를 풀어보면 “모신 것이란, 속에는 기화한 신령함이 있고, 겉에는 기화한 거룩함이 있고, 그렇지 않은 세상 사람들은 각기 옮기지 않는 지기를 사유해 앎이다.”가 됩니다.
[천(天한울님)]
수운께서는 ‘시천주’를 풀이할 때 ‘시(侍)’를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各知不移者’라고 풀었지만 ‘천(天)’을 풀이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동학론’을 짓기 이전에 지은 ‘교훈가’에서 이미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하단말가’라는 글로 밝혔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네 몸에 모셨으니’는 ‘네 몸에 갖추고 있었으니’란 의미였습니다. 이처럼 한울님을 ‘몸속에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게 된 근본 원인은 ‘몸속 무한소 무한인 지기’를 ‘한울님’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지기한울님’이 만사만물로 화생하시고 만물 속에 계시다는 것이 동학의 화생론 우주관입니다. 이런 화생론으로 한울님을 알아봅니다. 수운께서 득도한 뒤낮에 지기한울님이 말씀 하신 “천지를 알면서 귀신을 알지 못하니 귀신이란 것도 나니라(知天地而 無知鬼神 鬼神者吾也)(동학론)”라 하셨는데 ‘귀신도 나니라’ 하신 것을 보면 틀림없는 화생론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의미는 <천지를 한울님의 화생으로 알면서 귀신을 모르니 귀신이란 것도 나의 화생인 것이다>입니다. 그렇다면 넓은 의미로 보면 ‘천지·귀신도 한울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기화’해 화생한 한울님을 보겠습니다. 수운께서 지기한울님에 화하자(기화하자) 수운의 몸맘을 통해 한울님으로 ‘현화(現化)한 한울님’입니다. 또한 기화 후 한울님 말씀(강화)으로, 화생한 ‘강화의 한울님’도 있습니다. 이처럼 화생론의 한울님은 복잡하므로 이를 일일이 분별해 정의하려면 너무 길어지고 복잡해지므로 생략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화생한 한울님은 필요에 의해 일시적으로 화생한 한울님이므로 변하고 옮기는 한울님이어서 한울님의 본래 모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에 도움은 되지만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부족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대상이 되려면 ‘한울님’은 무극의 본체여야 하고 무시무종(無始無終)한 불변자 불이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조건을 갖춘 한울님은 ‘몸속지기한울님’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수운께서 한울님을 ‘네 몸에 모셨으니’란 말씀이 ‘한울님을 몸속에 갖추고 있었으니’란 의미를 지칭한 말임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몸속에 갖추고 있는 한울님은 무한소 무한의 지기한울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한울님은 ‘몸속에 계신 지기한울님’입니다.
그럼 ‘한울님’이란 말은 언제부터 쓰였을까. 그래서 ‘천도교회월보’ 17호(1911년)∼31호(1913년)의 ‘한글편’을 조사해봤더니 ‘한울님’이란 말이 7번이나 등장하는데 ‘하느님· 하날님’ 등 다른 용어에 비해 월등히 많았습니다. 초기 ‘천도교회월보’ 한글난에 이처럼 ‘한울님’이란 말이 제일 많이 쓰인 것은 그 이전부터 많이 쓰여왔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한울님’이란 말은 수운께서 쓰시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야뢰의 ‘신인철학 제일장의 한울’은 1925년에 출간 된 것으로, ‘천도교회월보’에 ‘한울님’이란 말이 이미 많이 쓰이기 시작한 때로부터 10여 년 뒤의 일입니다. 이를 보면 야뢰께서도 ‘한울님’이란 말이 제일 많이 쓰이므로 이로써 신의 명칭을 통일하기 위해서 ‘한울’에 대한 정의를 내린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런 걸 보면 ‘한울님’이란 말이 야뢰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보는 건 잘못입니다.
그럼 야뢰께서 말한 ‘한울님· 지기’의 개념을 보겠습니다. 야뢰는 ‘신인철학’에서 ‘지기일원론’을 거론하고 말년 작인 ‘동학지인생관’에서도 ‘지기일원의 원리’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학지인생관’ 70쪽에서 “요컨대 천주와 기화신(지기)은 근본적으로 一體이나, 조화의 운용상의 위치로 보나 현실과 직접 관계하는 위치로 보아 一體는 二位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물과 물결은 동일체의 두 현상인 것과 같으며, 태양과 광선의 관계와 같다....천주의 靈力이 현상계를 창조할 이념으로 움직일 때에 영력은 至氣로 化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천주의 영력이 현상계를 창조할 이념으로 지기로 화한 것’이라고 ‘천주(한울님)’와 ‘지기’를 분리시키는 것을 봅니다. 일원론이라면 마땅히 끝까지 일원화하여 천주+지기=‘지기한울님’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유일신이라면 마땅히 ‘천주+지기=지기한울님’처럼 합해서 하나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하나를 둘로 나누어 한울님 따로 지기 따로 분리한 것은 실수입니다. ‘한울님’이나 ‘지기’나 똑같이 무극의 존재자이므로 선 한울님, 후 지기로 분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극의 존재자를 선후로 분리하면 경계가 생겨 후자는 시종(始終)이 있는 유한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뢰가 ‘한울님’과 ‘지기’를 선후로 나누었으므로 후학들도 선후를 두어 한울님(천주)의 현현(顯顯)을 지기로 보거나(최동희 ‘새로 쓰는 동학’ 85~87쪽), 천주가 처음 창조한 것을 지기로 보거나 하게 되어 ‘지기’는 유한자가 되는 모순이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또한 야뢰께서 위에서 인용한 ‘천주의 靈力’이란 것도 ‘지기의 속성’인 ‘허령’이지, ‘천주영력’이 따로 있고 ‘지기허령’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기의 속성’이 ‘한울님의 성품’이므로 ‘지기’를 ‘한울님’으로 봐야 합니다. 다만 ‘지기’를 존재론적 의미로, ‘한울님’을 존칭의 보면 될 뿐입니다.
‘지기· 한울님’을 선후로 분리하면 경전 해석에서도 모순이 드러납니다. 해월의 ‘도결’을 보면 “한울님이 간섭하지 않으면 고요한 한 물건 덩어리니 이것을 죽었다 하는 것이다(天不干涉卽寂然一塊物 是曰死矣)”라고 하였습니다. ‘지기· 한울님’을 분리하면 한울님이 간섭한 것이 아니라 실제는 지기가 간섭한 것이므로 틀린 말씀이 됩니다. ‘천’을 ‘지기한울님’으로 봐야 말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의암의 ‘권도문’을 봐도 “후천 운수를 알아 지키지 아니하면 한울이 간섭치 아니하는 바, 한울이 간섭치 아니하면 오직 사람의 중함으로도 놀다가도 죽고 자다가도 죽고····”라고 하였다. 이 역식 ‘한울님’을 ‘지기한울님’으로 보고 한 말씀이어야 틀림없는 말씀이 됩니다
현대의 과학상식으로 봐도 ‘지기한울님이 맞습니다. 우리의 우주·물질·생명·인간이 존재하고 움직이는 데 ‘지기의 속성’과 특이점의 빅뱅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되고 있어서입니다. 그래서 지기위에 한울님을 내세울 필요가 도무지 없습니다. 물체와 그 속의 무한소 무한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분리 된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개체는 본체인 무한소 무한인 지기한울님의 섭명에 의해 존재하고 성질을 부여받고 마음을 부여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기한울님인 것입니다.
신일철 교수의 ‘범천론(凡天論)’을 보면 ‘몸속에 계신 지기한울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동학사상의 이해‘ 26쪽에서 “주문에서 ‘지기’와 ‘시천주’는 깊은 관계가 있다. ‘지기가 지금 크게 내리소소’ 그렇게 지기가 나의 내면에 내린 상태가 ‘시천주상태’가 된다.” 지기와 심신이 화한 생태인 ‘기화’가 ‘시천주상태’란 것입니다. 그러니 지기를 한울님으로 봐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반공주의였지만 학자적 입장에서 33쪽에서는 북한의 ‘철학사전’의 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천주는 비록 신적 존재이기는 하였지만 유교에서 말하는 ‘천’이나 예수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는 달리 ‘지기’를 인격화하여 표현했다” ‘천주’는 ‘지기를 인격화하여 표현한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즉 지기천주(지기한울님)로 봤다는 것입니다. 통일의 뒷날을 생각해서라도 ‘지기한울님’이어야 합니다.
범천은 만사만물의 궁극에 ‘한울님’이 내재한다는 신관이므로 ‘한울님이 몸속 무한소 무한에 있다.’는 신관입니다. 신일철 교수는 ‘동학사상의 이해’ 116쪽에서 말하기를 “최제우의 시천주 사상은 최시형에 와서 물물천 사사천 사인여천 등 범천론(凡天論)으로 세속화되고 그로 인해 서민 등 소외 계층의 인간존중과 자연애호의 경물주의에 이르러 1905년 후 인내천의 종지를 내세운 천도교의 교리와 교문조직의 기초를 이루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범천’은 ‘범신’이 아닌 동학에서 신앙하는 만물 속에, 몸속에 계신 지기한울님이라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이처럼 만유 속에 내재하는 ‘범천’이어서 세속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처럼 세속화하면서 간과한 것은 ‘범천신앙’의 유용한 가치를 찾아 신앙화하는데 주력하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이제라도 세속화한 범천을 신앙화 수도화 생활화하는 방법을 찾는데 애써야 합니다. 범천관은 세속화한 것이어서 신앙화 수도화가 수월하게 이뤄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모든 수도자들은 의식이 몸을 향하면 심신이 정화되는 것을 알고 있어서 의식을 몸에 보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천도교의 신앙의 대상은 몸속 무한소 무한에 계신 까닭에,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심고하면 자연히 의식이 ‘몸속 무한소 무한에 계신 지기한울님’에게 가게 되므로 무위로 심신이 정화가 됩니다. 그건 몸속 무한소 무한에 지기한울님의 속성인 ‘무한· 맑음····.’이 있어서 의식이 이같은 속성에 자연히 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수련을 하면 심신의 정화가 더 잘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밥 때도 ‘몸속에 계신 한울님’에게 심고하면 심신이 정화되어 고마운 마음으로 밥먹을 수 있어 건강에 유용합니다. 그래서 ‘몸속 무한소 무한에 계신 지기한울님’으로써 신앙하고 수련하는 방법을 계발해 가는 것이 유용한 일입니다. 이런 것을 헤아리면 범천인 ‘몸속 무한소 무한에 계신 지기한울님’은 신앙화 수도화에 가장 적합한 신관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범신도, 기독교의 범재신론도, 범신론적 일신론도 아닌 ‘범천론’인 ‘몸속 지기한울님’이 동학의 신관입니다.
[주(主)의 의미]
수운께서는 ‘侍天主’의 ‘主’를 “주란 것은 존칭해서 부모처럼 섬기는 것이다(主者 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라고 풀었습니다. 따라서 ‘주’는 ‘몸속 지기한울님’을 부모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부모를 섬기는 것은 부모님의 성품에 관심을 갖고 사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듯이, ‘지기한울님’을 모심은 ‘한울님의 성품’인 ‘지기의 속성’에 관심을 갖고 사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시천주 의미]
‘시천주’를 살펴 본 결과를 세 가지 의미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의미는 ‘한울님을 몸속에 갖추고 있다·(몸속에 계신 지기한울님)’이고, 두 번째 의미는 ‘모시다’의 단독개념인 ‘사유하다· 기화하다’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의미는, ‘사유·기화’로 모시면 ‘모신한울님’이 생기는데 이것이 세 번째 의미가 됩니다.
이 세 가지 의미는 모두 각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갖추고 있으므로 ‘시천주’를 풀이 할 때는 세 가지 의미를 모두 살려내야 합니다. 그럼 ‘시천주’의 의미는 ‘1 몸속에 계신 지기한울님을, 2 사유와 기화로 모시고, 3 모신한울님’이 됩니다. 여기서 어느 하나라도 빼면 ‘시천주’가 딴 의미로 바뀔 수 있습니다. 부연하면 ‘몸속에 계신 지기한울님’은 모시기 전 본래의 한울님이요, ‘사유· 기화’는 모시는 방법이요, ‘모신한울님’은 모신 후의 화생한 한울님이 됩니다.
이처럼 ‘시천주의 세 가지 의미’를 알아야 경전 구절들도 제대로 풀어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해월 법설 ‘영부주문’의 현재의 해석을 봅니다. “천지만물이 다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느니, 저 새소리도 또한 시천주의 소리니라.(天地萬物皆莫非侍天主也 彼鳥聲亦是侍天主之聲也)” ‘천지만물이 한울님을 모셨다’는 말이나 ‘시천주의 소리’란 말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를 ‘첫번째 의미인 ‘몸속에 갖추고 있다· 몸속에 있는 지기한울님’‘이란 의미로써 풀이하면 “천지만물은 다 한울님을 몸에 갖추고 있지 않음이 없으니, 저 새소리도 역시 ‘몸속에 계신 지기한울님’의 소리니라”가 되어서 누구나 무슨 말인지 알게 됩니다.
다음 ‘모시다’의 2번째 의미인 모시는 방법인 ‘사유· 기화’를 알면, 모신 것인 ‘내유∼· 외유∼’가 ‘기화’에 해당하고 ‘각지불이자’가 ‘사유’에 해당함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또 ‘사유· 기화’는 모시는 방법이므로 한울님을 모시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 3번째 의미인 ‘시천주’가 ‘모신한울님’이란 의미임을 알면 ‘조화정’이 ‘모신한울님’의 조화정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시천주(모신한울님)의 조화’로 알게 되면 ‘천지자연의 조화’로 보는 것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시천주’의 세 가지 의미들은 동학의 목숨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사유·기화’로써 한울님을 모시는 것이 제일의 의의(意義)가 있습니다. 지기한울님이 ‘장생주’를 내려 주신 것은 한울님을 모시게 함이요, 이 같은 한울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방법이 ‘사유·기화’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걸 보면 지기한울님이 137억년을 물질로 생명으로 사람으로 화생하시고 사람 몸속에 계신 까닭은 사람의 모심을 받아 ‘모신한울님’이 되고 싶어서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천주’의 셋째 의미가 ‘모신한울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한울님을 모셔서 자기 ‘몸속에 모신한울님을 갖춘 모신사람이 된 것’은 한울님의 뜻을 이뤄드린 것이 되고, 또한 사람으로 태어난 도리가 됩니다. 도리가 됨은 지기한울님의 성품에 의해 사람은 화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은 지기한울님의 속성에 의해 화생했으므로 빗을 진 존재이며, 필연적 존재입니다. 이처럼 알고 보면 나는 ‘왜 태어났나?, 왜 사는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살아야 할 까닭’을 묻는 물음을 넘어서서 사람으로 태어난 도리를 다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사유· 기화’로 모심은 한울님의 뜻(성품)의 실현이 되고,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되어서 ‘시천주의 의미’ 중에서 제일의 의의가 됩니다.
5) 조화정
“造化者는 無爲而化요 定者는 合其德 定其心也(<조화>라는 것은 무위이화요, <정>이라는 것은 그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하는 것입니다)”
<조화>라는 것은 ‘무위이화요’.(造化者는 無爲而化)라고 하신 ‘무위이화’는 몸맘의 무위상태를 뜻합니다. 시천주(모신한울님)의 조화이므로 ‘조화’는 용(用)에 해당하고, ‘용’은 ‘섭명· 기화’이므로 ‘섭명의 조화’이거나, ‘기화의 조화’이거나를 의미합니다.
‘섭명의 조화’로 본 말씀을 ‘포덕문’ 첫머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저 옛적부터 봄과 가을이 갈아들고 사시가 성하고 쇠함이 옮기지도 바뀌지도 아니하니 이 또한 한울님 조화의 자취가 천하에 뚜렷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비와 이슬의 혜택을 알지 못하고 무위이화로 알더이다(盖自上古以來 春秋秩代四時盛衰 不遷不易 是亦天主造化之迹 昭然于天下也. 愚夫愚民 未知雨露之澤 知其無爲而化矣)” 이처럼 ‘사시성쇠’를 수운께서는 ‘지기한울님의 조화의 자취가 천하에 뚜렷한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위이화’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 까닭을 ‘논학문’에서 밝히고 계신데 “어찌하여 그런가. 옛적부터 지금까지 그 중심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何者 於古及今 其中未必者也)”라고 하신 겁니다. ‘그 중심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란 말씀은 무한자 ‘지기한울님의 속성인 <섭명>에 의해 만사의 성쇠가 이뤄짐을 아직 일반사람들의 의식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란 의미입니다. ‘맘 급함을 한탄함(탄도유심급)’에서 “산하의 큰 운수가 다 이 도에 돌아오나니 그 근원이 가장 깊고 그 이치가 심히 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지기의 속성을 살펴보면 만사만물의 ‘화생·환원’이 섭명에 의해서임을 알게 됩니다. 그럼 ‘사시성쇠’와 같은 자연현상이 무극의 지기한울님의 ‘섭명’에 의한 조화의 자취임도 알게 됩니다. 이 같은 ‘섭명’을 ‘지기의 속성’에서는 ‘직접섭명· 간접섭명’으로 나누어 풀었습니다. 이 같은 자연현상에 해당하는 섭명에 의한 조화를 수운께서는 노자처럼 ‘무위이화’라 하지 않고 ‘조화의 자취’라고 한 것입니다. 이를 보면 수운께서는 자연현상을 지기한울님의 섭명의 조화로 보고 자취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비와 이슬의 혜택을 알지 못하고 무위이화로 알더이다”에서 보는 것처럼 자연현상은 노자처럼 무위이화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기한울님의 섭명에 의해 되지는 자취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동경대전· 용담유사’ 어디에도 ‘자연현상’을 ‘무위이화’라고 한 구절은 없습니다.
다음, ‘기화의 조화’를 봅니다. 그래서 ‘造化者 無爲而化’의 ‘무위이화’는 ‘기화의 조화’로 봐야 합니다. ‘기화’하면 심신이 고요해지면서 무위이화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심신이 맑아지고 밝아지고 신령해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 같은 기화를 반복하다 보면 속의식은 몸을 초월하여 무극의 지기를 보게도 됩니다. 이처럼 심신이 기화에 의해 무위에 이르게 되고 맑아지고 신령해지는 등의 ‘조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기화· 무위이화· 조화’입니다. 이것이 ‘기화의 조화’입니다.
‘논학문’에 “우리도는 무위이화라. 그 마음을 지키고 그 기운을 바르게 하고, 그 성품을 따라 그 가르침을 받으면 자연한 가운데 되어져 나옵니다.(曰吾道無爲而化矣 守其心正其氣 率其性受其敎 化出於自然之中也)” 하셨습니다. ‘그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 하고...’ 등의 글을 보면 여기의 ‘무위이화’는 몸맘의 무위이화를 지칭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 확실한 것은 ‘흥비가’의 “합기덕 알았으니 무위이화 알지마는” 하는 글에서입니다. ‘합기덕’은 기화해서 심신이 무위이화되어 고요해지고 맑아진 것과 같은 ‘기화조화’의 덕입니다. 이런 덕을 알면 무위이화를 안다는 것은, 이런 덕이 몸맘의 무위이화 상태에서 이뤄져서입니다.
그래서 ‘造化者 無爲而化’의 ‘무위이화’는 ‘몸맘의 무위이화’이고, 그 ‘무위이화’의 원인은 ‘기화의 조화’입니다.
그럼 기화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봅니다. 그건 ‘대강’입니다. 또 ‘대강’의 ‘고요해지고· 맑아지고· 밝아지고· 거룩해진 것’ 중에서 가장 유용한 것이 ‘맑아짐’입니다. 지기한울님은 만사를 잘 분별하도록 ‘감각· 본능· 감정’으로 화생하셔서 알게 하셨으며, 이 역시 부정확하여 ‘감각· 본능· 감정’을 ‘의식화’하여 의식으로 결정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부족하기 때문에 의식이 생각해 봐서 ‘흐려지면 버리게 하고, 맑아지면 받아들이게 하신 것입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쾌불쾌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의식은 쾌하면 받아들이고 불쾌하면 거부하는 본능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맑아지면 받아들이게 한 본능’은 지기한울님의 허령의 섭명에 의해 이뤄진 한울님의 뜻입니다. ‘맑음’은 허령의 표상으로, 허령은 맑음으로써 분별의 기준(흐리면 버리고 맑아지면 받아들이는 법)을 삼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화한 무위이화의 조화 중에서 제일 ‘유용한 것’이 ‘맑음’임을 시냅스에 기록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학의 ‘조화’에는 ‘섭명’에 의한 조화인 ‘섭명조화’가 있고, 기화에 의한 조화인 ‘기화조화’가 있는데 여기서의 조화는 ‘기화조화’입니다. 이 같은 몸맘의 ‘기화조화’를 ‘무위이화’라 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定者 合其德 定其心也(<정>이라는 것은 그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하는 것입니다)”를 보겠습니다. 여기서 그 덕(其德)은 ‘기화조화’의 덕이며, 이 중에서 가장 유용한 것이 맑음이었으므로 ‘맑음의 덕’입니다. 이 같은 ‘맑음의 덕’은 수련해 기화가 되어 심신의 무위이화에서 얻는 덕입니다.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은 이처럼 애써서 얻는 맑음의 덕입니다. ‘맑음의 덕’을 살펴보면 심신이 맑아지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되고, 또 큰 기화로 더욱 맑아지면 마침내 견천(지기의 속성인 무한· 맑음· 거룩을 봄)도 하게 됩니다. 또한 맑음의 거울에 일을 그려내면 버려야 할 일은 흐려지고 선택해야 할 일은 맑아지는 삶의 지혜의 덕도 얻습니다. 더구나 이처럼 맑아지는 일을 모두 선택하면 우리가 바라는 맑은 세상이 되기 때문에 대덕이 됩니다.
그럼 이제 ‘조화정’의 의미를 정리해 봅니다. ‘조화란 것은 무위이화’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몸맘이 기화한 무위이화였습니다. 심신이 기화하여 무위에 이르면 ‘선뜩’ 해지며 여러 가지 기화현상이 일어납니다. 그 중에서 최상의 유용한 조화는 ‘맑아짐’이요 ‘맑음의 덕’입니다. 따라서 ‘합기덕’은 맑아지는 덕에 합하기를 바라는 것이요, ‘정기심’은 그런 맑음으로 마음을 정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흐려지는 마음을 버리고 맑아지는 마음으로 정하는 것입니다. 점집의 점보다 이 ‘마음점’이 더 잘 맞습니다. 그 ‘맑아진 마음’은 지기한울님의 속성인 허령의 화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화정’을 의역하면 “(모신한울님의) 조화, 맑음으로 마음을 정하게 하옵소서”입니다.
<주석>
1) 최동희지음. "동경대전 용어출전" 127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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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천주(侍天主)를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主者 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라고 풀었습니다.
천도인들은 ‘시천주’가 동학만이 쓰는, 동학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란 것을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넓고 깊게 살펴서 의미별로 인지하고 응용해야 합니다. 그러하려면 ‘시천주’를 ‘동학론’에 나온 ‘풀이’만으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용담유사’에 나온 ‘풀이’도 포함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결과는 하나의 원인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이뤄진 것이다.’라는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시천주’는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이뤄진 것입니다. 우선 ‘시천주’란 말을 수운께서 분석한 것을 보면 ‘시’라는 말과 ‘천(한울님)’이란 말과 ‘주’라는 말입니다. 그 ‘시(侍모시다)’도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고, ‘천(天)’도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의미 중에서 ‘지기의 속성’에 합하는 것으로써 ‘시천주’를 풀어야 동학의 ‘시천주’ 의미가 나오게 됩니다.
먼저 ‘모시다(侍)’의 일반적 의미를 살펴보고, ‘용담유사’의 ‘교훈가’ ‘네 몸에 모셨으니...’의 의미와, ‘동학론’의 ‘모신 것(侍者)’의 의미를 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천(한울님)’에 대한 풀이가 생략되어 있는데, 수운께서 지금까지 언급해 온 것을 참고하여 ‘천(한울님)’의 동학의 모습을 밝혀야 합니다. ‘천(한울님)’의 개념을 알지 못하고는 ‘시천주’ 풀이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글 끝’에서 ‘시천주’를 동학의 의미로 정립하려 합니다.
[모시다(侍)]
먼저 일반에서 쓰는 ‘모시다’의 의미를 봐야겠습니다. ‘모시다’에는 ‘섬기다· 받들다· 위하다’와 같은 ‘존칭의미’와, ‘선생님을 집에 모시다(인도하다), 부모님을 모시다(함께 살다)’ 등처럼 ‘단독개념’으로 쓰입니다. ‘모시다’가 ‘존칭의미’를 갖게 된 것은 ‘가시다· 오시다’처럼 ‘존칭사’인 ‘시’가 들어서입니다. 이처럼 ‘가다’에 존칭사인 ‘시’를 넣어 ‘가시다’라고 한 것이므로 알기가 쉬운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을 집에 모시다’의 ‘모시다’처럼 ‘안내하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는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시다’의 단독개념이 무엇인지 알아야 ‘모시다’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동학에서 사용하는 ‘모시다’도 ‘존칭의미’와 ‘단독개념’이 있는데 역시 ‘단독개념’이 무엇인지 알아야 ‘모시다’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교훈가’의 ‘모셨으니’와, 동학론(논학문)의 ‘모신 것(侍者)’의 단독개념은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모셨으니’의 단독개념}
‘모셨으니’는 수운의 ‘교훈가’ “나는도시 믿지말고 한울님을 믿어셔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 하단말가”라는 글 속에 있습니다. 이 문장의 의미론적 의미는 ‘한울님을 네 몸에 모셨으니 가까운 데 한울님을 버리고 먼 데 한울님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근취원(捨近取遠)’의 의미를 알면 자연히 ‘모셨으니’의 단독개념은 ‘갖추고 있었으니’의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이미 지기의 속성‘을 통해 ‘지기한울님을 몸속에 갖추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셨으니’의 ‘단독개념’은 ‘네 몸에 갖추고 있었으니’란 의미입니다.
{‘모신 것’의 단독개념}
‘모신 것(侍者)’을 ‘동학론’에서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신 것’은 ‘내유신령· 외유기화’· ‘각지불이자’입니다. 그럼 ‘내유신령· 외유기화’와 ‘각지불이자’의 단독개념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내유신령·외유기화’의 단독개념은 ‘기화’이고, ‘각지불이자’의 단독개념은 ‘사유·’입니다. 그럼 그런가 알아봅니다.
‘내유신령· 외유기화’의 단독개념이 ‘기화’인 것은 ‘기화한 것’을 ‘모신 것’이라 해왔고 ‘모신 것(侍者)’을 ‘內有神靈 外有氣化’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 동학을 동학으로 교리를 정립하려한 야뢰 뒤로, 가장 교리에 애쓴 분이 최동희 교수입니다. 그는 ‘모신 것’인 ‘내유신령· 외유기화’를 1974년 ‘한국사상3권’ ‘동학주문에 대하여’와, 이후 근년의 ‘새로 쓰는 동학 238쪽’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내유신령·외유기화’를 ‘기화현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모신다는 말의 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 내유신령은 마음의 경지이고, 외유기화는 신체의 상태임을 알 수 있다.”1)처럼 <‘모신다(기화하다)는 말’의 풀이라는 관점에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내유신령’은 지기에 심신이 화한(기화한) ‘마음의 경지’란 것입니다. 그리고 ‘외유기화’는 지기에 심신이 화한(기화한) ‘신체의 상태’란 것입니다. 그래서 ‘내유신령’은 기화한 ‘마음의 경지’이고, ‘외유기화’는 기화한 ‘신체의 상태’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마음은 몸보다 내적인 것으로 보며, 따라서 ‘내유신령’을 마음 측면으로 본 것은 합리적입니다. 또한 ‘몸’은 마음보다는 외적으로 보아왔으므로 ‘외유기화’를 몸 측면으로 본 것은 합리적입니다. 그럼 ‘동학론’의 ‘내유강화지교[內有降話之敎; 마음에는 강화의 가르침이 있었고]’도, ‘허령’에 마음이 접해서 일어난 현상으로 볼 수 있고, ‘외유접령지기(外有接靈之氣; 몸에는 접령의 기운이 있었다)’도, ‘일기’에 몸이 접해서 일어난 현상으로 볼 수 있어 일관성이 있습니다. 이처럼 ‘내유· 외유’를 ‘마음측면· 몸측면’의 기화로 보면, 다른 용어들도 해석할 수 있어서, 보편성이 있는 해석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더 나은 방법이 ‘내(內)· 외(外)’를 <속· 겉>으로 의역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개체의 ‘내· 외’를 말할 때는 ‘속· 겉’이라 말하지 ‘안· 밖’이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사과 속은 희고 사과 겉은 붉다’라고 말하지 ‘사과 안은 희고 사과 밖은 붉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내∼ 외∼’는 개체인 사람의 ‘기화겪음’을 설명한 것이므로 ‘속· 겉’으로 의역해야 합니다. 그래서 ‘안에는(맘에는)· 밖에는(몸에는)’이라 풀지 말고 ‘속에는∼· 겉에는∼’이라고 풀어야 옳습니다.
그리고 ‘내유신령 외유기화’의 ‘기화’는 ‘강령· 강화· 대강’ 중에서 어떤 ‘기화’ 현상을 지칭한 말인지 가려보니, ‘대강’뿐이었습니다. ‘대강’에는 ‘고요해지고 맑아지고 밝아지고 신령·거룩해짐’이 있었습다. 이 같은 ‘대강체험’에서, ‘맑음·밝음’으로 겪었을 경우 ‘내유신령· 외유기화’를 의역하면 <속에는 맑아짐이 있고 겉에는 밝아짐이 있다.>가 됩니다. 또 ‘신령·거룩’으로 겪었을 경우에는 <속에는 기화한 신령함이 있고, 겉에는 기화한 거룩해짐이 있다.>가 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모신 것(侍者)’인 ‘내유신령·외유기화’의 ‘단독개념’은 줄잡으면 ‘기화’입니다.
다음 ‘모신 것(侍者)’의 ‘각지불이자(各知不移者)’의 ‘단독개념’은 ‘사유’가 된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 알아봅니다.
‘各知不移者’를 직역하면 “각기 옮기지 않는 것(者)을 앎이다.”입니다. 따라서 <옮기지 않는 것>을 <앎>이 <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옮기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봐야 합니다. ‘옮기는 것’과 ‘옮기지 않는 것’은 ‘만유’의 이분법입니다. 같은 유에 ‘변자’와 ‘불변자’가 있는데, 만유를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으로 나누는 이분법입니다. 그래서 ‘옮기는 것’과 ‘옮기지 않는 것’은, ‘변자’와 ‘불변자’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옮기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존재론’ 측면에서 보면, 존재자를 현존(개체)과 본존(본체)으로 분리하는데 현존은 옮기고 변하는 것이요, 본존은 불변자입니다. 동학에서 본존(본체)은 무한자 지기이며, 무한자 ‘지기’는 불변자· 불이자(不變者· 不移者)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옮기지 않고 변하지 않는 유일한 본존인 ‘지기를 앎’이 ‘모시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알기 위해서는 이처럼 ‘옮기지 않는 것인 지기(不移者)’에 ‘관심’을 갖고 ‘사유’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기의 속성이 ‘무한· 맑음· 밝음 거룩· 섭명· 기화’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관심을 갖고 사유해 ‘앎’이 ‘모시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모시는 것’인 ‘지(知)’의 단독개념은 ‘사유· 앎’이요 줄잡으면 ‘사유’입니다.
따라서 ‘각지불이자(各知不移者)’는 <각자, 옮기지 않는 몸속 지기의 속성을 사유해 앎이다>라고 풀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기화’를 겪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지기의 속성’을 사유해서 알아가는 것이 ‘모시는 것’이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부모님에 관심을 갖는 것이 효도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모시는 것(侍者)’의 “내유신령·외유기화, 각지불이자”의 단독개념은 ‘사유· 기화’입니다. 이 같은 단독개념인 ‘사유· 기화’로써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를 풀어보면 “모신 것이란, 속에는 기화한 신령함이 있고, 겉에는 기화한 거룩함이 있고, 그렇지 않은 세상 사람들은 각기 옮기지 않는 지기를 사유해 앎이다.”가 됩니다.
[천(天한울님)]
수운께서는 ‘시천주’를 풀이할 때 ‘시(侍)’를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各知不移者’라고 풀었지만 ‘천(天)’을 풀이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동학론’을 짓기 이전에 지은 ‘교훈가’에서 이미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하단말가’라는 글로 밝혔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네 몸에 모셨으니’는 ‘네 몸에 갖추고 있었으니’란 의미였습니다. 이처럼 한울님을 ‘몸속에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게 된 근본 원인은 ‘몸속 무한소 무한인 지기’를 ‘한울님’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지기한울님’이 만사만물로 화생하시고 만물 속에 계시다는 것이 동학의 화생론 우주관입니다. 이런 화생론으로 한울님을 알아봅니다. 수운께서 득도한 뒤낮에 지기한울님이 말씀 하신 “천지를 알면서 귀신을 알지 못하니 귀신이란 것도 나니라(知天地而 無知鬼神 鬼神者吾也)(동학론)”라 하셨는데 ‘귀신도 나니라’ 하신 것을 보면 틀림없는 화생론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의 의미는 <천지를 한울님의 화생으로 알면서 귀신을 모르니 귀신이란 것도 나의 화생인 것이다>입니다. 그렇다면 넓은 의미로 보면 ‘천지·귀신도 한울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기화’해 화생한 한울님을 보겠습니다. 수운께서 지기한울님에 화하자(기화하자) 수운의 몸맘을 통해 한울님으로 ‘현화(現化)한 한울님’입니다. 또한 기화 후 한울님 말씀(강화)으로, 화생한 ‘강화의 한울님’도 있습니다. 이처럼 화생론의 한울님은 복잡하므로 이를 일일이 분별해 정의하려면 너무 길어지고 복잡해지므로 생략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화생한 한울님은 필요에 의해 일시적으로 화생한 한울님이므로 변하고 옮기는 한울님이어서 한울님의 본래 모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에 도움은 되지만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부족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대상이 되려면 ‘한울님’은 무극의 본체여야 하고 무시무종(無始無終)한 불변자 불이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조건을 갖춘 한울님은 ‘몸속지기한울님’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수운께서 한울님을 ‘네 몸에 모셨으니’란 말씀이 ‘한울님을 몸속에 갖추고 있었으니’란 의미를 지칭한 말임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몸속에 갖추고 있는 한울님은 무한소 무한의 지기한울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한울님은 ‘몸속에 계신 지기한울님’입니다.
그럼 ‘한울님’이란 말은 언제부터 쓰였을까. 그래서 ‘천도교회월보’ 17호(1911년)∼31호(1913년)의 ‘한글편’을 조사해봤더니 ‘한울님’이란 말이 7번이나 등장하는데 ‘하느님· 하날님’ 등 다른 용어에 비해 월등히 많았습니다. 초기 ‘천도교회월보’ 한글난에 이처럼 ‘한울님’이란 말이 제일 많이 쓰인 것은 그 이전부터 많이 쓰여왔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한울님’이란 말은 수운께서 쓰시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야뢰의 ‘신인철학 제일장의 한울’은 1925년에 출간 된 것으로, ‘천도교회월보’에 ‘한울님’이란 말이 이미 많이 쓰이기 시작한 때로부터 10여 년 뒤의 일입니다. 이를 보면 야뢰께서도 ‘한울님’이란 말이 제일 많이 쓰이므로 이로써 신의 명칭을 통일하기 위해서 ‘한울’에 대한 정의를 내린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런 걸 보면 ‘한울님’이란 말이 야뢰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보는 건 잘못입니다.
그럼 야뢰께서 말한 ‘한울님· 지기’의 개념을 보겠습니다. 야뢰는 ‘신인철학’에서 ‘지기일원론’을 거론하고 말년 작인 ‘동학지인생관’에서도 ‘지기일원의 원리’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학지인생관’ 70쪽에서 “요컨대 천주와 기화신(지기)은 근본적으로 一體이나, 조화의 운용상의 위치로 보나 현실과 직접 관계하는 위치로 보아 一體는 二位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물과 물결은 동일체의 두 현상인 것과 같으며, 태양과 광선의 관계와 같다....천주의 靈力이 현상계를 창조할 이념으로 움직일 때에 영력은 至氣로 化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천주의 영력이 현상계를 창조할 이념으로 지기로 화한 것’이라고 ‘천주(한울님)’와 ‘지기’를 분리시키는 것을 봅니다. 일원론이라면 마땅히 끝까지 일원화하여 천주+지기=‘지기한울님’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유일신이라면 마땅히 ‘천주+지기=지기한울님’처럼 합해서 하나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하나를 둘로 나누어 한울님 따로 지기 따로 분리한 것은 실수입니다. ‘한울님’이나 ‘지기’나 똑같이 무극의 존재자이므로 선 한울님, 후 지기로 분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극의 존재자를 선후로 분리하면 경계가 생겨 후자는 시종(始終)이 있는 유한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뢰가 ‘한울님’과 ‘지기’를 선후로 나누었으므로 후학들도 선후를 두어 한울님(천주)의 현현(顯顯)을 지기로 보거나(최동희 ‘새로 쓰는 동학’ 85~87쪽), 천주가 처음 창조한 것을 지기로 보거나 하게 되어 ‘지기’는 유한자가 되는 모순이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또한 야뢰께서 위에서 인용한 ‘천주의 靈力’이란 것도 ‘지기의 속성’인 ‘허령’이지, ‘천주영력’이 따로 있고 ‘지기허령’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기의 속성’이 ‘한울님의 성품’이므로 ‘지기’를 ‘한울님’으로 봐야 합니다. 다만 ‘지기’를 존재론적 의미로, ‘한울님’을 존칭의 보면 될 뿐입니다.
‘지기· 한울님’을 선후로 분리하면 경전 해석에서도 모순이 드러납니다. 해월의 ‘도결’을 보면 “한울님이 간섭하지 않으면 고요한 한 물건 덩어리니 이것을 죽었다 하는 것이다(天不干涉卽寂然一塊物 是曰死矣)”라고 하였습니다. ‘지기· 한울님’을 분리하면 한울님이 간섭한 것이 아니라 실제는 지기가 간섭한 것이므로 틀린 말씀이 됩니다. ‘천’을 ‘지기한울님’으로 봐야 말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의암의 ‘권도문’을 봐도 “후천 운수를 알아 지키지 아니하면 한울이 간섭치 아니하는 바, 한울이 간섭치 아니하면 오직 사람의 중함으로도 놀다가도 죽고 자다가도 죽고····”라고 하였다. 이 역식 ‘한울님’을 ‘지기한울님’으로 보고 한 말씀이어야 틀림없는 말씀이 됩니다
현대의 과학상식으로 봐도 ‘지기한울님이 맞습니다. 우리의 우주·물질·생명·인간이 존재하고 움직이는 데 ‘지기의 속성’과 특이점의 빅뱅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되고 있어서입니다. 그래서 지기위에 한울님을 내세울 필요가 도무지 없습니다. 물체와 그 속의 무한소 무한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분리 된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개체는 본체인 무한소 무한인 지기한울님의 섭명에 의해 존재하고 성질을 부여받고 마음을 부여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기한울님인 것입니다.
신일철 교수의 ‘범천론(凡天論)’을 보면 ‘몸속에 계신 지기한울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동학사상의 이해‘ 26쪽에서 “주문에서 ‘지기’와 ‘시천주’는 깊은 관계가 있다. ‘지기가 지금 크게 내리소소’ 그렇게 지기가 나의 내면에 내린 상태가 ‘시천주상태’가 된다.” 지기와 심신이 화한 생태인 ‘기화’가 ‘시천주상태’란 것입니다. 그러니 지기를 한울님으로 봐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반공주의였지만 학자적 입장에서 33쪽에서는 북한의 ‘철학사전’의 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천주는 비록 신적 존재이기는 하였지만 유교에서 말하는 ‘천’이나 예수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는 달리 ‘지기’를 인격화하여 표현했다” ‘천주’는 ‘지기를 인격화하여 표현한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즉 지기천주(지기한울님)로 봤다는 것입니다. 통일의 뒷날을 생각해서라도 ‘지기한울님’이어야 합니다.
범천은 만사만물의 궁극에 ‘한울님’이 내재한다는 신관이므로 ‘한울님이 몸속 무한소 무한에 있다.’는 신관입니다. 신일철 교수는 ‘동학사상의 이해’ 116쪽에서 말하기를 “최제우의 시천주 사상은 최시형에 와서 물물천 사사천 사인여천 등 범천론(凡天論)으로 세속화되고 그로 인해 서민 등 소외 계층의 인간존중과 자연애호의 경물주의에 이르러 1905년 후 인내천의 종지를 내세운 천도교의 교리와 교문조직의 기초를 이루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범천’은 ‘범신’이 아닌 동학에서 신앙하는 만물 속에, 몸속에 계신 지기한울님이라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이처럼 만유 속에 내재하는 ‘범천’이어서 세속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처럼 세속화하면서 간과한 것은 ‘범천신앙’의 유용한 가치를 찾아 신앙화하는데 주력하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이제라도 세속화한 범천을 신앙화 수도화 생활화하는 방법을 찾는데 애써야 합니다. 범천관은 세속화한 것이어서 신앙화 수도화가 수월하게 이뤄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모든 수도자들은 의식이 몸을 향하면 심신이 정화되는 것을 알고 있어서 의식을 몸에 보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천도교의 신앙의 대상은 몸속 무한소 무한에 계신 까닭에,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심고하면 자연히 의식이 ‘몸속 무한소 무한에 계신 지기한울님’에게 가게 되므로 무위로 심신이 정화가 됩니다. 그건 몸속 무한소 무한에 지기한울님의 속성인 ‘무한· 맑음····.’이 있어서 의식이 이같은 속성에 자연히 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수련을 하면 심신의 정화가 더 잘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밥 때도 ‘몸속에 계신 한울님’에게 심고하면 심신이 정화되어 고마운 마음으로 밥먹을 수 있어 건강에 유용합니다. 그래서 ‘몸속 무한소 무한에 계신 지기한울님’으로써 신앙하고 수련하는 방법을 계발해 가는 것이 유용한 일입니다. 이런 것을 헤아리면 범천인 ‘몸속 무한소 무한에 계신 지기한울님’은 신앙화 수도화에 가장 적합한 신관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범신도, 기독교의 범재신론도, 범신론적 일신론도 아닌 ‘범천론’인 ‘몸속 지기한울님’이 동학의 신관입니다.
[주(主)의 의미]
수운께서는 ‘侍天主’의 ‘主’를 “주란 것은 존칭해서 부모처럼 섬기는 것이다(主者 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라고 풀었습니다. 따라서 ‘주’는 ‘몸속 지기한울님’을 부모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부모를 섬기는 것은 부모님의 성품에 관심을 갖고 사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듯이, ‘지기한울님’을 모심은 ‘한울님의 성품’인 ‘지기의 속성’에 관심을 갖고 사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시천주 의미]
‘시천주’를 살펴 본 결과를 세 가지 의미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의미는 ‘한울님을 몸속에 갖추고 있다·(몸속에 계신 지기한울님)’이고, 두 번째 의미는 ‘모시다’의 단독개념인 ‘사유하다· 기화하다’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의미는, ‘사유·기화’로 모시면 ‘모신한울님’이 생기는데 이것이 세 번째 의미가 됩니다.
이 세 가지 의미는 모두 각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갖추고 있으므로 ‘시천주’를 풀이 할 때는 세 가지 의미를 모두 살려내야 합니다. 그럼 ‘시천주’의 의미는 ‘1 몸속에 계신 지기한울님을, 2 사유와 기화로 모시고, 3 모신한울님’이 됩니다. 여기서 어느 하나라도 빼면 ‘시천주’가 딴 의미로 바뀔 수 있습니다. 부연하면 ‘몸속에 계신 지기한울님’은 모시기 전 본래의 한울님이요, ‘사유· 기화’는 모시는 방법이요, ‘모신한울님’은 모신 후의 화생한 한울님이 됩니다.
이처럼 ‘시천주의 세 가지 의미’를 알아야 경전 구절들도 제대로 풀어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해월 법설 ‘영부주문’의 현재의 해석을 봅니다. “천지만물이 다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느니, 저 새소리도 또한 시천주의 소리니라.(天地萬物皆莫非侍天主也 彼鳥聲亦是侍天主之聲也)” ‘천지만물이 한울님을 모셨다’는 말이나 ‘시천주의 소리’란 말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를 ‘첫번째 의미인 ‘몸속에 갖추고 있다· 몸속에 있는 지기한울님’‘이란 의미로써 풀이하면 “천지만물은 다 한울님을 몸에 갖추고 있지 않음이 없으니, 저 새소리도 역시 ‘몸속에 계신 지기한울님’의 소리니라”가 되어서 누구나 무슨 말인지 알게 됩니다.
다음 ‘모시다’의 2번째 의미인 모시는 방법인 ‘사유· 기화’를 알면, 모신 것인 ‘내유∼· 외유∼’가 ‘기화’에 해당하고 ‘각지불이자’가 ‘사유’에 해당함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또 ‘사유· 기화’는 모시는 방법이므로 한울님을 모시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 3번째 의미인 ‘시천주’가 ‘모신한울님’이란 의미임을 알면 ‘조화정’이 ‘모신한울님’의 조화정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시천주(모신한울님)의 조화’로 알게 되면 ‘천지자연의 조화’로 보는 것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시천주’의 세 가지 의미들은 동학의 목숨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사유·기화’로써 한울님을 모시는 것이 제일의 의의(意義)가 있습니다. 지기한울님이 ‘장생주’를 내려 주신 것은 한울님을 모시게 함이요, 이 같은 한울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방법이 ‘사유·기화’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걸 보면 지기한울님이 137억년을 물질로 생명으로 사람으로 화생하시고 사람 몸속에 계신 까닭은 사람의 모심을 받아 ‘모신한울님’이 되고 싶어서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천주’의 셋째 의미가 ‘모신한울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한울님을 모셔서 자기 ‘몸속에 모신한울님을 갖춘 모신사람이 된 것’은 한울님의 뜻을 이뤄드린 것이 되고, 또한 사람으로 태어난 도리가 됩니다. 도리가 됨은 지기한울님의 성품에 의해 사람은 화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은 지기한울님의 속성에 의해 화생했으므로 빗을 진 존재이며, 필연적 존재입니다. 이처럼 알고 보면 나는 ‘왜 태어났나?, 왜 사는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살아야 할 까닭’을 묻는 물음을 넘어서서 사람으로 태어난 도리를 다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사유· 기화’로 모심은 한울님의 뜻(성품)의 실현이 되고,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되어서 ‘시천주의 의미’ 중에서 제일의 의의가 됩니다.
5) 조화정
“造化者는 無爲而化요 定者는 合其德 定其心也(<조화>라는 것은 무위이화요, <정>이라는 것은 그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하는 것입니다)”
<조화>라는 것은 ‘무위이화요’.(造化者는 無爲而化)라고 하신 ‘무위이화’는 몸맘의 무위상태를 뜻합니다. 시천주(모신한울님)의 조화이므로 ‘조화’는 용(用)에 해당하고, ‘용’은 ‘섭명· 기화’이므로 ‘섭명의 조화’이거나, ‘기화의 조화’이거나를 의미합니다.
‘섭명의 조화’로 본 말씀을 ‘포덕문’ 첫머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저 옛적부터 봄과 가을이 갈아들고 사시가 성하고 쇠함이 옮기지도 바뀌지도 아니하니 이 또한 한울님 조화의 자취가 천하에 뚜렷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비와 이슬의 혜택을 알지 못하고 무위이화로 알더이다(盖自上古以來 春秋秩代四時盛衰 不遷不易 是亦天主造化之迹 昭然于天下也. 愚夫愚民 未知雨露之澤 知其無爲而化矣)” 이처럼 ‘사시성쇠’를 수운께서는 ‘지기한울님의 조화의 자취가 천하에 뚜렷한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위이화’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 까닭을 ‘논학문’에서 밝히고 계신데 “어찌하여 그런가. 옛적부터 지금까지 그 중심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何者 於古及今 其中未必者也)”라고 하신 겁니다. ‘그 중심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란 말씀은 무한자 ‘지기한울님의 속성인 <섭명>에 의해 만사의 성쇠가 이뤄짐을 아직 일반사람들의 의식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란 의미입니다. ‘맘 급함을 한탄함(탄도유심급)’에서 “산하의 큰 운수가 다 이 도에 돌아오나니 그 근원이 가장 깊고 그 이치가 심히 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지기의 속성을 살펴보면 만사만물의 ‘화생·환원’이 섭명에 의해서임을 알게 됩니다. 그럼 ‘사시성쇠’와 같은 자연현상이 무극의 지기한울님의 ‘섭명’에 의한 조화의 자취임도 알게 됩니다. 이 같은 ‘섭명’을 ‘지기의 속성’에서는 ‘직접섭명· 간접섭명’으로 나누어 풀었습니다. 이 같은 자연현상에 해당하는 섭명에 의한 조화를 수운께서는 노자처럼 ‘무위이화’라 하지 않고 ‘조화의 자취’라고 한 것입니다. 이를 보면 수운께서는 자연현상을 지기한울님의 섭명의 조화로 보고 자취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비와 이슬의 혜택을 알지 못하고 무위이화로 알더이다”에서 보는 것처럼 자연현상은 노자처럼 무위이화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기한울님의 섭명에 의해 되지는 자취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동경대전· 용담유사’ 어디에도 ‘자연현상’을 ‘무위이화’라고 한 구절은 없습니다.
다음, ‘기화의 조화’를 봅니다. 그래서 ‘造化者 無爲而化’의 ‘무위이화’는 ‘기화의 조화’로 봐야 합니다. ‘기화’하면 심신이 고요해지면서 무위이화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심신이 맑아지고 밝아지고 신령해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 같은 기화를 반복하다 보면 속의식은 몸을 초월하여 무극의 지기를 보게도 됩니다. 이처럼 심신이 기화에 의해 무위에 이르게 되고 맑아지고 신령해지는 등의 ‘조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기화· 무위이화· 조화’입니다. 이것이 ‘기화의 조화’입니다.
‘논학문’에 “우리도는 무위이화라. 그 마음을 지키고 그 기운을 바르게 하고, 그 성품을 따라 그 가르침을 받으면 자연한 가운데 되어져 나옵니다.(曰吾道無爲而化矣 守其心正其氣 率其性受其敎 化出於自然之中也)” 하셨습니다. ‘그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 하고...’ 등의 글을 보면 여기의 ‘무위이화’는 몸맘의 무위이화를 지칭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 확실한 것은 ‘흥비가’의 “합기덕 알았으니 무위이화 알지마는” 하는 글에서입니다. ‘합기덕’은 기화해서 심신이 무위이화되어 고요해지고 맑아진 것과 같은 ‘기화조화’의 덕입니다. 이런 덕을 알면 무위이화를 안다는 것은, 이런 덕이 몸맘의 무위이화 상태에서 이뤄져서입니다.
그래서 ‘造化者 無爲而化’의 ‘무위이화’는 ‘몸맘의 무위이화’이고, 그 ‘무위이화’의 원인은 ‘기화의 조화’입니다.
그럼 기화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봅니다. 그건 ‘대강’입니다. 또 ‘대강’의 ‘고요해지고· 맑아지고· 밝아지고· 거룩해진 것’ 중에서 가장 유용한 것이 ‘맑아짐’입니다. 지기한울님은 만사를 잘 분별하도록 ‘감각· 본능· 감정’으로 화생하셔서 알게 하셨으며, 이 역시 부정확하여 ‘감각· 본능· 감정’을 ‘의식화’하여 의식으로 결정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부족하기 때문에 의식이 생각해 봐서 ‘흐려지면 버리게 하고, 맑아지면 받아들이게 하신 것입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쾌불쾌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의식은 쾌하면 받아들이고 불쾌하면 거부하는 본능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맑아지면 받아들이게 한 본능’은 지기한울님의 허령의 섭명에 의해 이뤄진 한울님의 뜻입니다. ‘맑음’은 허령의 표상으로, 허령은 맑음으로써 분별의 기준(흐리면 버리고 맑아지면 받아들이는 법)을 삼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화한 무위이화의 조화 중에서 제일 ‘유용한 것’이 ‘맑음’임을 시냅스에 기록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학의 ‘조화’에는 ‘섭명’에 의한 조화인 ‘섭명조화’가 있고, 기화에 의한 조화인 ‘기화조화’가 있는데 여기서의 조화는 ‘기화조화’입니다. 이 같은 몸맘의 ‘기화조화’를 ‘무위이화’라 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定者 合其德 定其心也(<정>이라는 것은 그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하는 것입니다)”를 보겠습니다. 여기서 그 덕(其德)은 ‘기화조화’의 덕이며, 이 중에서 가장 유용한 것이 맑음이었으므로 ‘맑음의 덕’입니다. 이 같은 ‘맑음의 덕’은 수련해 기화가 되어 심신의 무위이화에서 얻는 덕입니다.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은 이처럼 애써서 얻는 맑음의 덕입니다. ‘맑음의 덕’을 살펴보면 심신이 맑아지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되고, 또 큰 기화로 더욱 맑아지면 마침내 견천(지기의 속성인 무한· 맑음· 거룩을 봄)도 하게 됩니다. 또한 맑음의 거울에 일을 그려내면 버려야 할 일은 흐려지고 선택해야 할 일은 맑아지는 삶의 지혜의 덕도 얻습니다. 더구나 이처럼 맑아지는 일을 모두 선택하면 우리가 바라는 맑은 세상이 되기 때문에 대덕이 됩니다.
그럼 이제 ‘조화정’의 의미를 정리해 봅니다. ‘조화란 것은 무위이화’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몸맘이 기화한 무위이화였습니다. 심신이 기화하여 무위에 이르면 ‘선뜩’ 해지며 여러 가지 기화현상이 일어납니다. 그 중에서 최상의 유용한 조화는 ‘맑아짐’이요 ‘맑음의 덕’입니다. 따라서 ‘합기덕’은 맑아지는 덕에 합하기를 바라는 것이요, ‘정기심’은 그런 맑음으로 마음을 정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흐려지는 마음을 버리고 맑아지는 마음으로 정하는 것입니다. 점집의 점보다 이 ‘마음점’이 더 잘 맞습니다. 그 ‘맑아진 마음’은 지기한울님의 속성인 허령의 화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화정’을 의역하면 “(모신한울님의) 조화, 맑음으로 마음을 정하게 하옵소서”입니다.
<주석>
1) 최동희지음. "동경대전 용어출전" 127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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