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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동학 장생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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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경흥
댓글 0건 조회 1,751회 작성일 12-11-21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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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의 말]
스피노자는 ‘범신론’을 써놓고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대학에서 교수로 초빙했으나 강단에 서면 ‘범신론’을 애기하게 되고 그러면 목숨이 위태할 것을 안 그는 시계를 조립해 파는 업으로 평생을 살다 갔습니다. 왜 문득 스피노자가 생각났는지·····. 며칠 전 이 게시판을 통해 ‘진암’이 환원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마음으로 고하는 ‘심고’를 하였습니다. 내 ‘장생주 풀이’를 보고 만나자고 한 유일한 분이었습니다. 나처럼 젊었을 때 당시 유행한 실존주의 문학작품들도 괘 읽으셔서 말이 잘 통하기도 하였습니다. 허허벌판에 홀로 남은 기분이었습니다. 나도 언제고 갑자기 떠날 수 있는 나이어서 그간 수정한 ‘동학의 장생주’를 ‘게시판’에 올려 여러 동덕들의 비평과 공감의 글을 받아보기로 맘을 정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 모두 함께 수정해 ‘공저’로 만들어 일차로 ‘문예창작과’ 대학생들을 가르쳐 보려고 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인간상을 찾아 그려내려 하니까요. 실존적 인간이나, 주체적 인간보다 장생주가 제시하는 ‘한울을 모신사람’이 훨씬 바람직한 인간상이라 여겨서입니다. 이것이 동학 천도교를 위한 내 마지막 꿈입니다. 동덕들의 진심어린 지적을 바랍니다. 2012 11 13 길로 심고

동학
장생주(長生呪)

목차

1.‘장생주’의 가치
2.장생주의 내력
3.지기의 속성
4.장생주의 주요 낱말의 뜻
1)지기
2)금지
3)원위대강
4)시천주
5)조화정
6)영세불말
7)만사지
8)그침 말
5. 한글 장생주
6. 모시는 수련
1) 한글 장생주 외기
2) 장생주 외기
3) 사유호흡
4) 기화호흡
7.장생주 맺는 말


1. 장생주의 가치

‘장생주’는 ‘인심’을 충족하는 주문이 아니라 ‘도심’을 충촉하는 주문입니다. ‘인심’이란 살려는 욕구로서 ‘의식주’를 구하려는 마음을 말합니다. 삶의 욕구에 의해 ‘의식주’를 구하다 보면 동물을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러면 자기를 싫어하게 되고 경멸하게 됩니다. 그래서 ‘삶의 욕구’가 성취되면 대부분 도심의 욕구를 충족하려고 합니다. ‘도심’이란 도를 구하려는 욕구로서 ‘근본’을 구하려는 의식을 말합니다. 나의 근본· 마음의 근본, 생명의 근본, 물질의 근본, 우주의 근본을 알려는 욕구이며, 나아가 이타심(利他心)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처럼 근본을 찾아 자기의 정체를 세워서 도덕인이 되려는 욕구입니다. 그래서 도덕인이 되어 가면 심신이 승화하는 기분이 듭니다. ‘장생주’는 이같은 ‘도심’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주문이어서 가치가 있습니다.
인류는 가치 있는 것을 밖에서 찾다가 안에서 찾게 됩니다. 그건 삶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필요한 ‘의식주’가 모두 밖에 있어서입니다. 그래서 인류문화도 필요한 것을 밖에서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환인· 환웅 때를 보면 밖에 있는 환한 해에서 찾았습니다. 철학도 보면 탈레스는 만물의 근본을 밖에 있는 물에서 찾습니다. 그러다가 소크라테스에 이르러 몸속 마음에서 찾기 시작합니다. 스피노자에 이르러서는 법신론이 나오는데 신도 안에서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동양의 주역도 음양을 밖의 ‘낮 밤, 천 지, 남 여’ 식으로 밖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주렴계의 ‘태극도’에 이르러서는 ‘무극태극이 만물로 화생하고 만물 속에 있다’고 하게 됩니다. 과학도 화학의 아버지인 라브지와(1743-1794)가 1772년 실험을 통해 33개의 원소를 발견함으로써 물질 속에서 물질의 본질을 찾기 시작합니다. 수운께서 받은 ‘장생주’는 애초부터 밖에 천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 한울님이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도 100년 전에 범신론이 진실이어서 범재신론을 주장하게 됩니다. 이처럼 인류는 필요한 것은 밖에 있다고 보다가 더 필요한 것은 ‘안에 있다’고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동학은 무극태극인 지기(至氣)가 안에 있을 뿐 아니라 한울님으로 위하고 ‘모셔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몸속에 있는 ‘무극태극’인 지기가 한울님임을 깨닫고 겪어서입니다. 이런 한울님을 수운께서는 ‘무궁한 나’라 하였고, 야뢰(이돈화1884∼1950)1)께서는 ‘사람성 무궁’이라 하였고, 또 철학은 ‘절대자아’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한울님을 위하는 것’이란 ‘무궁한 나· 사람성 무궁· 절대자아’를 모심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럼 ‘모심’이란 무엇인가요. 개체인 사람이 본체인 자기 몸속 ‘무한소 무한’에 있는 ‘지기’를 ‘사유· 기화’함을 뜻합니다. 그 ‘지기의 속성’은 ‘무한·맑음·밝음·거룩/ 섭명·기화’입니다. 이 같은 몸속 ‘지기의 속성’이 한울님의 성품이 됩니다. 이같은 ‘한울님의 성품’을 ‘사유’하는 것이 모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부모를 모시는 것은 부모님의 성품에 관심을 갖고 헤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듯이 ‘지기한울님을 모시는 것’도 ‘한울님의 성품’에 관심을 갖고 헤아리고 사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다음 ‘기화’란 몸속 ‘지기의 속성’에 심신이 화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처럼 기화가 되면 심신이 고요해지고 맑아지고 밝아지고 거룩해져서 한울님을 느끼고 의식하게 되고, 사람이 한울님(人乃天)임을 겪게 됩니다. 그럼 ‘만사지(萬事知)’ 했다는 통달감이 들고, 자아실현을 했다는 성취감이 듭니다. 이런 것이 모심의 절정입니다. 이처럼 동학의 장생주는 절대자가 ‘안에 있다’를 넘어서서 한울님으로 ‘모심’으로써 자아실현을 하는 데 특징이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장생주’는 개체인 사람의 자아실현을 통해 본체인 지기한울님의 자아실현도 이뤄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같은 예가 수운께서 1860년 4월 5일 경주 용담정에서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주문(장생주의 원본)’을 살펴서 ‘도통·영통’하여 만사를 알고, 마음이 한울님화하였을 때 한울님이 한신 말씀에 나옵니다. “너를만나 성공하니 나도성공 너도득의”(용담가)입니다. 여기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는 내가 사람으로 화생하고 사람속에 있는 뜻은 너와 같은 사람을 만나 만사지하고 한울님으로 화생하고자함이었는데 네가 그런 나의 뜻을 이뤄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기한울님은 사람을 통해 성공(자아실현)을 하기 위해 137억년을 물질로 생명으로 사람으로 화생하시고 사람속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너도 득의’라고 한 것은 너 역시 네가 바라던 천인합일(시천주)의 자아실현을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기한울님의 뜻을 알 수 있고, 또한 사람으로 태어난 도리가 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같이 ‘장생주’는 자아실현을 통해 지기한울님의 뜻과 사람의 도리를 알고 이루게 하는 지극히 가치 있는 주문입니다.
이처럼 지극히 가치 있는 ‘장생주’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 그 비밀스런 내력을 알아야 ‘장생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장생주의 내력

국어사전은 ‘내력(來歷)’을 ‘①어떤 것의 지나온 자취. 부자가 된 내력. 숭례문의 내력. ②부모나 조상에게서 내려오는 특성. 문학을 좋아하는 것은 그 집안의 내력이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따라서 ‘장생주의 내력’은 장생주의 ‘자취· 특성’입니다.
그럼 ‘장생주의 자취’를 어디서부터 살펴봐야 할까요. 이제 우리는 자연과학의 발달로 만사만물의 자취의 시원을 137억 년 전 무극의 특이점 빅뱅에서 살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연과학은 137억 년 전에 무한계의 특이점이 빅뱅2)해서 소립자-원자-물질-생명-사람으로 진화해온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같은 과정에서 어느 한 단계만 빠져도 장생주는 이뤄질 수 없습니다. 특히 마지막 단계인 사람이 빠지면 장생주는 전혀 나올 수 없습니다.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가 세상에 등장한 지 20만년이 지나서 수운(최제우)을 통해서만이 나오게 된 것을 보면 어떤 특성을 갖춰야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운이 장생주가 나올 수 있는 조건의 특성을 갖췄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를 알아보려면 수운은 37세에 장생주를 받았으므로 그 앞서의 자취를 살펴봐야 합니다.
수운의 자취와 특성을 인과적으로 밝혀보려고 하였습니다. 세상일은 대부분 안쪽 원인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사를 실증적으로 평생 연구해온 삼암(표영삼1925∼2008)의 ‘동학(2004년)’을 교본으로 삼고, 부족한 부분은 다른 책을 참고하거나, 추리하거나 답사해 현지인들의 말을 참고해 보충한 것입니다.

수운(최제우)께서는 음력 1824년 10월 28일에 ‘경주(월성)군 현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나나셨습니다. 수운의 아버지인 근암 최옥은 과거 향시에는 9번 붙었으나 대과에는 매 번 떨어진 유학자였습니다. 근암공은 50세에 아들도 없이 부인과 사별해서 둘째 동생인 최규의 장남 최제환을 양자들여서 장사지내게 합니다. 그 뒤 집안일을 양아들 제환에게 맡기고 구미산 중턱 용치골의 ‘와룡암’을 수리하고 그 위에 ‘용담정’을 지어 퇴계학을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댓새마다 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들리곤 했습니다. 그렇게 62세(1824년)가 된 해 집에 오니 제환이 하는 말이 “웬 부인이 집 앞 대추나무 밑에 쓰러져 있어서 안방에 모셨으니 놀라지 마십시요”라고 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근암공은 방에 들어가 부인에게 누구신가 물으니 “저는 금척리 사는 한씨로 20세에 과부가 되어 친정에서 10년간 수절하는데, 오늘 새벽에 몸이 떨리고, 붉은 해가 가슴속에 안기며 신령한 기운이 끌어서 이끌려오다가 얼을 잃었나 봅니다.”라고 말합니다. 듣고 보니 금척리 사는 7세 위의 선배인 한문언씨의 딸이었습니다. 그네는 제자 한상원과, 그 때까지 자식이 없던 양아들 제환과, 그리고 선배인 한문언씨까지 와서 자기 딸과 재혼할 것을 권유한, 하지만 거절했던 그 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인의 말을 듣고 보니 이건 천연이다 싶어 그날 밤 정안수를 모셔놓고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래서 수운은 재가녀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수운의 어머니 한씨부인은 재가녀여서 친척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 괴로운 함정에 빠져 갈등하다가 수운이 6살이고 여동생이 4살일 때 환원합니다. 그래서 여동생은 형수의 품에서 동갑인 조카 세조와 함께 자라게 되고, 수운은 동리 어린이들과 어울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수운은 7살인 10월 24일 생일 날 동리 큰 애가 여직껏처럼 “역적 눈아 이리와 봐”라고 불러서 편도체에 쌓인 분노가 치솟아 쏘아봤더니 큰 아이가 뒤로 주춤하고 물러서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자기 눈이 역시 무섭긴 무섭게 생긴 모양이다 여기며 자신 감을 얻은 그는 구미 산 속 용담정의 아버지를 찾아가다가 산 속에서 길을 잃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다가 무덤가에서 쉬는데 돌아가실 때의 창백한 얼굴로 어머님이 소나무 앞에 서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섬증이 들어 뛰어내려오다가 자기를 찾으러 나선 제환 형님을 만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그의 아버지 근암공은 그를 용담정에 데려다가 글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14세에 이르러서는 ‘4서 5경’을 다 떼게 됩니다. 그는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서 재가녀의 자식은 제사에도 참여 못하고 과시에도 응시 못하는 처지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조상 제사에 사촌 형들이 뒤로 밀어낸 이유도 알게 되어 친척도 멀리하게 되고, 그런 유학을 멀리하게 되고, 어머니· 아버지· 삼신할멈을 원망하다가 ‘왜 태어났나’ 한숨짓습니다.
그는 떠나고 싶고 경주를 구경하고 싶어 아버님의 내키지 않는 허락을 받아 집을 떠납니다. 토함산에서 석굴의 석불을 구경하고 내려오다가 풍류노인을 만나 풍류도의 ‘풍류· 접화군생· 무위’을 배우고 그 근본인 배호흡을 배웁니다. 그는 자기처럼 따돌림을 당했을 어머니의 고향인 금척리에 가서 외삼촌 한상우와 어머니의 벗들을 만나 보니 ‘금색 눈과 오뚝한 코’가 엄마를 닮았다고 반기고 배려해 주는 걸 보고 ‘남을 배려 할 줄 아는 것’이 참 도덕이다 여깁니다. 용담에 돌아온 그는 ‘예기(禮記)’를 읽다가 ‘왕제’ 편에서 ‘지자부제(支者不祭 지자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란 글씨를 보고 ‘지자’가 첩의 자식, 재가녀 자식을 지칭하는 뜻이란 확신이 들자 얼굴이 화끈거려 책을 덮어버리고 맙니다.
그는 아예 출가할 속마음을 품고 여비를 타가지고 형산강을 따라 금강산3)을 향해 길떠나갑니다. 형산(兄山) 밑에서 새파란 선비를 만나 유학에 대한 애기를 나누다가 그의 집에서 하루를 묵으며 그가 내준 서학의 ‘천주실의’를 봅니다. 제1편에서 <천주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면서 만물의 시작이요, 만물의 뿌리이다. (天主則 無始無終而 爲萬物始焉 爲萬物根柢焉)>란 글이 마음에 새겨집니다. 천주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시무종’한 존재란 글이 맘에 와 닿은 것입니다. 그는 금강산 유점사에 가서 ‘반야심경찬((般若心經贊)’ 등의 불서를 공부합니다. 대승불교 경전인 ‘화엄경’을 보다가 불교의 참 모습은 ‘공(空)’임을 깨닫고, 불교는 삶을 떠나 출가한 이들을 위한 도라고 봅니다. 그런데 삶이 있어 출가도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은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처럼 대칭으로 이뤄진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미움을 다 수용하며 새끼줄처럼 꼬아가는 것이 삶이라 여기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야 할 까닭이 무엇일까 헤아리다가 이를 집에 돌아가 격물치지(格物致知)4) 해 보기로 합니다. 그는 유점사를 뒤로 하고 돌아오다가 금강산 전경을 보기 위해 산 위에 올라 금강산들을 눈에 담아봅니다. 그러다가 깜박했는데 거울 같은 맑은 울이 보였습니다. 거기에 홀연 깃옷입은 신선이 나타나 수운을 내려다보며 가사를 읊습니다.
“높고높은 봉우리서 잠자기는 무슨일고
수신제가 아니하고 강산구경 하단말가
뒤틀어진 세상사람 탓할것이 무엇인고
천운이 둘렸으니 근심말고 돌아가리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
만고없는 무극대도 이세상에 날것일세”
신선도 맑은 울도 사라지고 신령한 기운과 가사만이 마음에 남아서 가사를 거듭 외우다가 ‘만고없는 무극대도 이세상에 날것일세’란 말씀의 ‘무극대도’가 어떤 도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15세에 용담정에 돌아온 그는 여러 제자들과 함께 아버님으로부터 주역을 배웁니다. 주역이 산가지 50개를 우연히 뽑아 6효(양음음 음양음 등)라 하고, 그렇게 우연히 정해진 6효의 점괘를 보고 왈가왈부 하는 것임을 알고 혹세무민이라 봅니다. 그러나 주역의 우주관인 “주역은 태극에 있다. 이것이 음양을 낳고 (易有太極 是生兩儀)”라는 글에는 관심을 보입니다. 신선이 말씀하신 ‘무극대도’에 해당하는 ‘태극’을 우주의 시원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는 겨울방학에 아버님과 가정리 집에 있을 때, ‘무극태극’을 언급한 책들을 추려 봅니다. 주렴계(周濂溪1017-1073)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의 ‘태극도(太極圖)’가 ‘무극태극’이 만물로 화생하고 만물 속에 있음을 의미하는 그림이란 걸 아버님으로부터 설명을 듣습니다. 그러고 소옹(강절1011~1077)은 ‘황극경세(皇極經世)’에서 ‘사람 정신은 곧 천지 정신(人之神則天之神)’이라 하고, 또한 ‘천지 마음(天地之心)은 만물을 낳는 근본이다.’라고 하면서 마음을 무극태극으로 보는 것을 압니다. 그러고 장재(횡거1020~1077)는 ‘정몽(正蒙)’에서 ‘태허즉기(太虛卽氣) 태허즉천(太虛卽天) 태허즉성(太虛卽性) 태허즉심(太虛卽心)’을 거론하지만 ‘태허즉기’가 주제임을 압니다. 그래서 ‘태화’편에서 “태허는 기 없이는 능할 수 없으며, 기가 모이지 않으면 만물이 이뤄질 수 없으며, 만물이 흩어지지 않으면 태허가 이뤄질 수 없으며 이같이 들고 나는 순환, 이것은 다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다. (太虛不能無氣 氣不能不聚爲萬物 萬物不能不散而太虛 循是出入 是皆不得已而然也)”라고 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장재는 태허즉기를 무극태극으로 여김을 압니다. 그 다음에 도학을 집대성한 주자(1130~1200)는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리재기선(理在氣先)’이라 하는 것을 보고 이 같은 ‘리’를 무극태극으로 보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소옹은 마음을, 장재는 기를, 주자는 리를 무극태극이라고 자기 나름대로 논리를 펴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무엇이 참 무극태극인지 알 수 없어 고민에 빠집니다.
특히 주자의 ‘주자어류’에서 ‘일물각구일태극(一物各具一太極:하나의 물은 하나의 태극을 각기 갖췄다)’이란 글을 보고 더욱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이때 아버님이 자신이 쓴 글을 내어 놓고 손가락으로 짚으셨는데 ‘在吾腔者裏理氣虛靈(재오강자리리기허령)’이란 글입니다. 아버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몸 빈 것 속에 리· 기· 허령이 있다.’라고 한 것은 나는 ‘무극태극’을 ‘리· 기· 허령’으로 보아서이다.”라고 하시었습니다. 아버님은 ‘리·기·심’이 아닌 ‘리·기·허령’을 무극태극으로 보신다고 했는데 아버님 말씀이 옳다고 여깁니다. 허령은 마음의 본질이기 때문에 무극태극에 해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주자의 ‘일태극은 일물 속에 있다’는 글이나 아버님의 ‘내 몸 빈속에 리·기· 허령이 있다’는 글입니다. ‘어떻게 유한한 내 작은 몸속에 무한한 무극이 들어있을 수 있는가?’라고 헤아려져서입니다.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이 세상은 대칭구조로 이뤄졌으므로 무한대가 있으면 무한소도 있을 거다.’라고 여기게 됩니다. 무한대는 밖으로 무한히 가면 만나는 무한이며, 무한소는 안으로 파헤쳐 들어가 보면 만나는 무한이라고 여깁니다. ‘무한대 무한’이나 ‘무한소 무한’이나 똑같은 ‘무한’을 공유하므로 둘은 같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무극태극’을 ‘무한소 무한’으로 보면 제일 작은 티끌 속에도 있기 때문에 ‘일물(一物)은 일태극(一太極)을 각기 갖췄다(一物各具一太極)라는 말은 진실이란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내 몸 빈속 무한소 무한에 ‘리·기·허령’이 있다는 아버님 말씀도 진실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는 몸속에 무극인 ‘리·기·허령’을 품고 있는 존재란 걸 알아서 내 몸속 무극이 ‘본디의 나’라고 여기게 됩니다. 이어서 자기는 어머니의 자식, 아버지의 자식, 최씨가문의 자식이기 앞서서 무극태극의 자식이란 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무극을 본아로 봄으로서 나와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어 더욱 초연한 의식을 갖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는 이 같은 참 나인 무극태극이 만물로 화생하고 만물 속에, 사람으로 화생하고 사람 속에, 자기 속에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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