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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後經의 資料分析 比較硏究(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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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댓글 0건 조회 1,995회 작성일 16-10-21 23:04

본문

後經의 資料分析 比較硏究(10-7)

後經 二/印刷本/聖師曰如法自生大道
後經 二/謄寫本/聖師ㅣ曰如法이면自生大道니라
後經 二/創建本/曰法과如히하면 大道 l 自生하나니라
後經 二/三部本/曰 如法而行則大道自生矣니라.
後經 二/經典本/曰「如法而行則 自生大道니라.」
註 ; 後經 二/創建本은 聖師는 생략되고 윗글에 연결되어 한 문장으로 직역하고 있다. 後經 二/經典本은 後經 二/印刷本을 따르고 있으나 첨삭이 있다.
後經 二/筆寫本/曰法과如히하면大道 l 自生하나니라
後經 二/筆耕本/曰法과如히하면大道 l 自生하나니라
後經 二/抄稿本/曰如法而行則大道自生矣
後經 二/叢書本/曰「法과 如히 하면 大道自生하나니라」
註 ; 後經二/抄稿本/曰如法而行則大道自生矣 는 曰如法自生大道 의 誤記.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성사께서 대답하시기를 「한울의 질서를 잘 따라 행하면 스스로 큰 도를 깨닫게 된다.」
後經 二/印刷本/問曰何謂大道
後經 二/謄寫本/問曰何를大道라 謂하나니닛고
後經 二/創建本/問曰何를謂大道이닛고
後經 二/三部本/曰 何爲大道乎이까
後經 二/經典本/曰「何謂大道이까」
註 ; 後經 二/謄寫本은 後經 二/印刷本을 직역하였고 後經 二/三部本과 後經 二/經典本을 問 字를 생략하고 있고 後經 二/三部本 謂를 爲로 하여 誤字가 생겼다.
後經 二/筆寫本/問曰何를大道라謂하나니잇고
後經 二/筆耕本/問曰何를大道라謂하나니잇고
後經 二/抄稿本/曰何謂大道乎
後經 二/叢書本/問曰「何를 大道라 謂하나잇까」
註 ; 後經二/抄稿本/曰何謂大道乎 는 曰何謂大道 의 誤記.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道門의 第子들이 계속해서 묻기를「어떤 것을 큰 도라 말을 합니까.」
後經 二/印刷本/聖師曰大道者非天非地非山非水非人非鬼思不若思視不若視言不若言聽不若聽坐不若坐며立不若立如如之間怳然是本來淸淨
後經 二/謄寫本/聖師ㅣ曰大道者는非天非地오非山非水오非人非鬼아思不若思하며視不若視하며言不若言하며聽不若聽하며坐不若坐하며立不若立하야如如之間에怳然是本來淸淨이니라
後經 二/創建本/曰大道란것은非天非地 非山非水 非人非鬼라 思 l 思같지아니하며 視 l 視같지아니하며 言이言같지아니하며 聽이聽같지아니하며 坐 l 坐같지아니하며 立이立같지아니하야 如如의間에 怳然히 이本來淸淨이니라
後經 二/三部本/曰 大道는 非天 非地 非山 非水 非人 非鬼니 思不如思하고 視不如視하고 言不如言하고 聽不如聽하고 坐不如坐하고 立不如立하여 如如之間에 怳然是本來淸淨이니라.
後經 二/經典本/曰 「大道는 非天非地 非山非水 非人非鬼니 思不如思하고 視不如視하고 言不如言하고 聽不如聽하고 坐不如坐하고 立不如立하여 如如之間에 怳然是 本來淸淨이니라.」
註 ; 後經 二/創建本은 後經 二/謄寫本을 따르고 있으나 좀 더 구체적인 직역을 하고 있다. 後經 二/三部本은 後經 二/印刷本에 토를 달고 있고 ‘不若’을 ‘不如’로 修訂이 아니면 誤字라 할 수 있다. 後經 二/經典本은 後經 二/三部本을 따르고 있으나 띄어쓰기를 달리하고 있다.
後經 二/筆寫本/曰大道란것은非天非地非山非水非人非鬼라思 l 思 l 갓지아니하며視 l 視갓지아니하며言이言갓지아니하며聽이聽갓지아니하며坐 l 坐갓지아니하며立이立갓지아니하야如如의間에怳然是本來의淸淨이니라
後經 二/筆耕本/曰大道란것은非天非地非山非水非人非鬼라思 l 思 l 갓지아니하며視 l 視갓지아니하며言이言갓지아니하며聽이聽갓지아니하며坐 l 坐갓지아니하며立이立갓지아니하야如如의間에怳然是本來의淸淨이니라
後經 二/抄稿本/曰大道非天非地非山非水非人非鬼思不如思視不如視言不如言聽不如聽坐不如坐며立不如立如如之間怳然是本來淸淨
後經 二/叢書本/曰「大道라함은 非天非地오 非山非水오 非人非鬼라 思不若思하며 視不若視하며 言不若言하며 聽不若聽하며 座不若座하며 立不若立하여 如如의 之間에 怳然히 是 l 本來의 淸淨이니라」
註 ; 後經二/筆寫本에서는 ‘같지아니하며’ 가 바른 表記인데 ‘갓지아니하며’ 라 하여 古文투의 표기를 하고 있다. 後經二/抄稿本에서 大道者에서 者가 省略되었고 不若을 不如로 修訂하고 있다. 後經二/叢書本에서 座不若座 은 坐不如坐 의 誤記. 坐 와 座 를 同字로 볼 수도 있지만 坐는 앉는다. 는 동사이고, 座는 자리. 라는 명사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성사께서 대답하시기를 「大道라는 것은 하늘과 땅도 아니요 산과 물도 아니요 사람과 귀신도 아니니, 생각하는 것 같으나 생각지 아니하고, 보는 것 같으나 보지 않고, 말하는 것 같으나 말하지 않고, 듣는 것 같으나 듣지 않고, 앉으나 앉은 것 같으나 앉지 않고, 선 것 같으나 서지 않는 거와 같이, 변함이 있는 것 같으나 변함이 없는 사이에 황홀하게 갑자기 대도의 본래의 모습이 맑고 깨끗한 것이라는 것을 터득하게 된다.」
後經 二/印刷本/問曰大道至此盡矣歟
後經 二/謄寫本/問曰大道ㅣ至此盡矣歟아
後經 二/創建本/曰大道ㅣ此에至하야 盡하나이까.
後經 二/三部本/曰 大道至此而盡乎이까.
後經 二/經典本/曰 「大道至此盡矣歟이까.」
註 ; 後經 二/ 2000年 一月 三十日에 國學資料院에서 간행된 影印本인 『韓末 天道敎 資料集』 Ⅰ(韓國史資料叢書ↀ)에서는 ‘問曰大道至此盡矣歟’의 句節이 두 번 記述되어 있다. 그 이유는 影印過程에서 PP.20-21.가 重複 影印되어 印刷되었기 때문으로 編輯 印刷過程에서의 錯誤인 것이다. PP.20-22. 참조.
後經 二/筆寫本/問曰大道ㅣ此에至하야盡하나닛가.
後經 二/筆耕本/問曰大道ㅣ此에至하야盡하나닛가.
後經 二/抄稿本/曰大道至此而盡乎
後經 二/叢書本/問曰「大道ㅣ 此에 至하여 盡하나잇까.」
註 ; 後經二/抄稿本/曰大道至此而盡乎 는 問曰大道至此盡矣歟 의 誤記.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道門의 第子들이 계속해서 묻기를 「대도가 이 경지에 도달하면 여기서 그 끝이 다하게 되는 겁니까.」
後經 二/印刷本/聖師曰修其性得其道者固至而盡矣然性上生心身在淸風明月家在宇宙江山
後經 二/謄寫本/聖師ㅣ曰修其性得其道者ㅣ固主而盡矣나然이나性上生心이면身在淸風明月이오家在宇宙江山이니라
後經 二/創建本/曰其性을修하야 其道를得한者ㅣ 진실로此에至할지나 性上에心이生하면 身은淸風明月이오 家는宇宙江山이니라
後經 二/三部本/曰 修其性而得其道者 荀至於此나 性上生心이면 身在淸風明月이요 家在宇宙江山이니라.
後經 二/經典本/曰 「修其性而 得其道者 固至而盡矣나 然이나 性上生心이면 身在淸風明月이요 家在宇宙江山이니라.
註 ; 後經 二/謄寫本에서는 道者固至而盡矣를 道者ㅣ固主而盡矣로 誤記를 하고 있다. 後經 二/三部本은 ‘固至而盡矣然’을 ‘荀至於此’로 바꾸어 직역하고 있다.
後經 二/筆寫本/曰其性을修하야其 l 道를得한者ㅣ진실노此에至하야盡할지나性上에心이生하면身은淸風明月이오家는宇宙江山이니라
後經 二/筆耕本/曰其性을修하야其 l 道를得한者ㅣ진실노此에至하야盡할지나性上에心이生하면身은淸風明月이오家는宇宙江山이니라
後經 二/抄稿本/曰修其性而得其道者荀至於此性上生心身在淸風明月家在宇宙江山
後經 二/叢書本/曰「其性을 修하여 其道를 得한者ㅣ 진실로 此에 至하여 盡할지나 性上에 心이 生하면 身은 是 l 淸風明月이오 家는 是 l 宇宙江山이니라
註 ; 後經二/筆寫本은 底本이 되고 있는 後經 二/創建本보다 토씨 사용에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後經二/抄稿本/曰修其性而得其道者荀至於此性上生心 은 曰修其性得其道者固至而盡矣然性上生心 의 誤記.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성사께서 대답하시기를 「그 성품을 잘 갈고 닦아 그 대 도를 얻은 사람은 진실로 수신함에 지극히 정성을 다 할 것이나, 이러한 성품에서 마음이 생동하면 몸은 청풍명월과 같이 세속적 욕망에 물들지 않게 되고 집은 우주강산처럼 넓은 세상으로 생각이 된다. 고 할 수 있다.
後經 二/印刷本/觀天地於我我在世在我我物物各遂其性各守其道各得其分.
後經 二/謄寫本/觀天地於我면我在世在하야我我物物이各遂其性이니各守其道하야各得其分이니라
後經 二/創建本/天地를我에서觀하면 我 l 在하고 世 l 在하야 我我物物이 各各其性을遂하며各各其道를守하며 各各其分을得할지니라
後經 二/三部本/觀天地於我則 我在世在하여 我我物物이 各遂其性하며 各守其道하며 各得其分이니.
後經 二/經典本/觀天地於我則 我在世在하여 我我物物이 各遂其性하며 各守其道하며 各得其分하나니.
後經 二/筆寫本/天地를我에셔觀하면我 l 在하고世 l 在하야我我物物이各히其性을遂하며各히其道를守하며各히其分을得할지니라
後經 二/筆耕本/天地를我에셔觀하면我 l 在하고世 l 在하야我我物物이各히其性을遂하며各히其道를守하며各히其分을得할지니라
後經 二/抄稿本/觀天地於我則我在世在我我物物各遂其性各守其道各得其分.
後經 二/叢書本/天地를 我에서 觀하면 我가 在하고 世가 在하여 我我物物이 各各其性을 遂하며 各各其道를 守하며 各各其分을 得할지니라
註 ; 後經二/抄稿本/觀天地於我則 은 觀天地於我 의 誤記.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천지를 나를 중심으로 해서 보면 나도 있고 세상도 있어 나와 나, 만물과 만물이 각각 그 천성(天性)을 갖추며 각각 그 도를 지키며 각각 그 직분을 얻게 된다.,
後經 二/印刷本/喜喜我喜喜物豈非極樂世哉
後經 二/謄寫本/喜喜我喜喜物이니豈非極樂世哉아
後經 二/創建本/喜喜我 喜喜物이 어찌極樂의世 l 아니랴.
後經 二/三部本/喜喜我喜喜物이 豈非極樂世界乎아
後經 二/經典本/喜喜我喜喜物이 豈非極樂世哉아
後經 二/筆寫本/喜喜我喜喜物이엇지極樂의世가아니랴.
後經 二/筆耕本/喜喜我喜喜物이엇지極樂의世가아니랴.
後經 二/抄稿本/喜喜我喜喜物豈非極樂世乎
後經 二/叢書本/喜喜我와 喜喜物이 어찌 極樂의 世가 아닐까.」
註 ; 後經二/抄稿本에서 종결사 哉를 乎로 바꾸었다.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항상 기쁜 나와 만물이 되면 어찌 그 곳이 극락세계가 아닐 수 있겠는가. / 그 곳을 우리는 바로 극락세계라 한다.
※ 극락세계(極樂世界) - 극락세계(極樂世界)를 음역(音譯)하여 수하마제(須訶摩提)· 수마제(須摩提)· 소하박제(蘇訶縛提)라 쓰고, 안양(安養)· 안락(安樂)· 안온(安穩)· 묘락(妙樂)· 낙방(樂邦)이라 번역한다. 흔히 <西方淨土 · 極樂國>이라 한다. 이 사바세계(裟婆世界)에서 서쪽으로 십 만 억 국토를 지나서 있는 불국토인데 이 국토는 아미타불의 전신인 법장비구(法藏比丘)의 원력으로 이루어 졌으니 지금도 아미타불이 항상 설법하시며, 즐거움만이 있고 괴로움 이라고는 아주 없는 가장 자유롭고 안락한 국토이다. 누구나 지성으로 수행하면 극락에 날 수 있다. 이 정토는[法藏比丘(법장비구)가 오랜 동안 보살도를 닦은 인행(因行)의 과보로 얻어진 보토(報土)냐, 아니면 아미타불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이뤄놓은 응화토(應化土)냐, 또한 서방에 실제 하느냐 아니면 중생심에 있느냐]는 논의가 있다. 그러나 극락세계는 실재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은 중생심을 여의지 않고 있으니 중생심 중의 번뇌만 청정하면 즉시에 극락이 현전하는 것이 통설로 보아진다.
[내용] 아미타불이 상주하고 있는 불교도의 이상향인 불국토로. ‘안양(安養)·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불토(無量光佛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한다. 극락은 즐거움만이 있는 곳[樂有]이며, 이 즐거움은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에 의해서 성취된 깨달음의 즐거움이다.
≪아미타경 阿彌陀經≫에 의하면, 극락세계는 서방으로 기천만 기십만의 국토를 지나서 있는 곳이며, 현재 아미타불이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태어나는 사람은 몸과 마음에 괴로움이 없고 즐거움만이 있다. 이 세계는 일곱 겹의 난순(欄楯), 일곱 겹의 타아라나무기둥이 있고, 방울과 금·은·유리·수정의 사보(四寶)로 장식되어 있다. 이 네 가지 보석에 산호·마노·호박을 더한 칠보로 만든 연못이 있으며, 여기에는 여덟 가지 공덕을 구비한 물과 황금의 모래가 깔려 있다. 또한 하늘에서는 음악이 들리고 대지는 황금색으로 아름다우며, 주야로 세 번씩 천상의 꽃이 떨어진다. 백조·공작·앵무 등의 새들이 노래를 부르며, 이 노래는 그대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노래로 이 노래를 듣는 자들은 모두 불·법·승의 삼보(三寶)를 생각한다. 이 새들은 모두가 아미타불에 의해 화작(化作)된 것이다. 이 국토에는 지옥·축생(畜生)·사신(死神)이라는 명칭이 없고,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阿羅漢)이 수없이 많으며, 다음 생에 부처가 될 사람도 한량이 없다.
극락을 일반적으로 서방정토라고 하는 것은 인도 사람들이 방위와 시간을 일치시키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인도 사람들은 동쪽으로 서서 앞쪽을 과거, 뒤쪽을 미래라 한다. 따라서 극락은 내세에 왕생할 세계이며, 그것은 서방에 존재하였던 것이다. 또한 사바세계(娑婆世界)와의 거리를 ‘기천만 기십만’ 등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한역의 ≪아미타경≫에서는 십만 억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중국에서 상용된 최대의 숫자가 억이었기 때문에 먼 거리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세속적인 현실과 단절된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우리나라에서는 10만8000국토를 지나야 극락세계에 이른다는 설을 많이 채택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승들은 이를 공간적인 거리로 보지 않고, 마음 속에 있는 십악(十惡)과 팔사(八邪)를 없애버리면 곧 극락이 된다고 본다. 곧 살생·도둑질·사음(邪婬)과 거짓말, 이간 붙이는 말, 악담, 유혹하며 속이는 말, 탐욕, 성냄과 어리석은 소견 등의 십악을 고쳐서 십선(十善)으로 바꾸고, 사견(邪見)· 사사유(邪思惟)· 사어(邪語)· 사업(邪業)· 사명(邪命)· 사방편(邪方便)· 사념(邪念)· 사정(邪定) 등의 팔사를 팔정도(八正道)로 바꾸면 그곳이 곧 극락세계라고 본 것이다.
이는 ≪관무량수경 觀無量壽經≫의 ‘여기에서 멀지 않다[去此不遠].’는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다. 또한 극락세계에 대한 묘사는 물질적 낙토관(樂土觀)과 함께 심오한 종교적 관념과도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극락의 주재불인 아미타불이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사람을 구제한다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이타적인 면에서 중생제도를 사명으로 하는 대승불교의 보살도(菩薩道)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미타불은 법장보살(法藏菩薩)이었을 때 세운 사십팔원(四十八願)을 성취함으로써 부처가 되었고 극락세계를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사십팔원에 근거해서 볼 때, 극락의 왕생을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면서 염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염불이 무아삼매(無我三昧)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점에서 볼 때, 극락은 현실의 사바세계와 공간적 거리를 갖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고승들은 사바세계가 곧 극락정토요, 현실세계와 극락세계가 불이(不二)라고 주장하였으며, 현실 속에서 극락세계의 실현을 희구하였던 것이다. 특히 우리 나라의 선종·화엄종·천태종 등의 종파에서는 만법유심(萬法唯心)의 이치에 의해 자기 마음을 닦아 불성(佛性)을 깨닫는다는 취지 아래, 새로운 극락관인 자성미타유심정토설(自性彌陀唯心淨土說)을 주창하였다.
이는 자기 마음 가운데 본래 갖추어져 있는 성품이 아미타불과 다르지 않지만 미혹하면 범부가 되고 깨달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며, 아미타불이나 극락정토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마음 가운데 있다고 본 것이다.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수행법 중 우 나라에서 가장 널리 채택되고 있는 것은 ≪관무량수경≫의 십육관법(十六觀法)과 ≪유마경 維摩經≫의 설이다. ≪유마경≫에서는 정토에 태어나는 길이 여덟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① 중생을 도와 주되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중생을 대신하여 모든 고생을 달게 받을 것, ② 모든 중생에게 대하여 평등하게 겸손할 것, ③ 모든 사람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할 것, ④ 모든 경전을 의심하지 않고 믿을 것, ⑤ 대승법(大乘法)을 믿을 것, ⑥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지 않을 것, ⑦ 자신의 허물만 살피고 남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을 것, ⑧ 늘 온갖 공덕을 힘써 닦을 것 등이다.
그리고 정토의 종류로 17가지를 들고 있다. 직심(直心)· 심심(深心)· 육바라밀(六波羅蜜)· 사무량심(四無量心)· 사섭법(四攝法)·십선법(十善法:이는 하나로 함)의 어느 하나라도 완숙하게 성취하면 극락에 왕생한다는 정신적인 정토왕생관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 이후로 극락에 왕생하고자 하는 정토신앙이 크게 성행하였다. 신라시대에는 교학적인 측면과 실천적인 측면이 함께 이루어졌으며, 고려시대에는 자성미타유심정토의 측면에서 종파별로 크게 신행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승속을 막론하고 내세에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는 신앙이 유행하였다. 따라서 사찰의 당우 중에도 극락전(極樂殿, 또는 無量壽殿)이 가장 중요한 법당으로 건립되었으며, 사찰 주위에도 안양교(安養橋)를 두는 등 극락과 관계된 많은 사항들이 수용되었다. →미타신앙, 정토사상 참조
참고문헌
『아미타경(阿彌陀經)』
『무량수경(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유마경(維摩經)』
『불전해설』(이기영, 한국불교연구원, 1978)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관련 자료 종합.
※ 사바세계(娑婆世界) - 석존(釋尊)이 교화하는 경토(境土), 괴로움이 많은 인간세계, 속세계(俗世界/世俗), 또는 감옥 등 구속된 생활을 하고 있는 곳에서, 그 바깥의 자유로운 세계를 가리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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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篇
註 ; 後經 二/印刷本은 聖師曰이 사용되었으며 分節되어 있고, 後經 二/謄寫本 전 문장이 이어져 있으며 주격조사와 조사가 쓰여 직역에 도움을 주고 있다.
後經 二/印刷本/聖師曰三天大氣混然相應同歸一心.
後經 二/謄寫本/三天大氣ㅣ混然相應하야同歸一心이니라
後經 二/創建本/三天의大氣ㅣ 混然히 相應하야 一心에 同歸하나니
後經 二/三部本/三天大氣混然相應하며 同歸一心하나니.
後經 二/經典本/三天의 大氣 混然相應하여 同歸一心하나니.
後經 二/筆寫本/三天의大氣ㅣ混然히相應하야一心에 同歸하나니
後經 二/筆耕本/三天의大氣ㅣ混然히相應하야一心에 同歸하나니
後經 二/抄稿本/三天大氣混然相應同歸一心.
後經 二/叢書本/三天의 大氣가 混然히 相應하여 一心에 同歸하나니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성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삼천의 큰 기운이 두루 섞이어 서로 어울려 기맥(氣脈) 통하여 한 마음으로 돌아가 되니,
後經 二/印刷本/前聖後聖不立文字只以心傳心也.
後經 二/謄寫本/前聖後聖이不立文字하고只以心傳心也니라
後經 二/創建本/前聖後聖이 文字를 立치아니하고 다만心으로써 心을傳함이라
後經 二/三部本/前聖後聖이 不主文字하고 只以心傳心也니라
後經 二/經典本/前聖後聖이 不立文字하고 但 以心傳心也니라
註 ; 後經 二/印刷本의 ‘只以心傳心也.’를 後經 二/經典本에서 但 以心傳心也니라로 수정하고 있다. 後經 二/三部本에서 ‘不立文字’를 ‘不主文字’로, 立을 主로 하여 誤字를 내고 있다.
後經 二/筆寫本/前聖後聖이文字를立치아니하고只히心으로써心을傳함이라
後經 二/筆耕本/前聖後聖이文字를立치아니하고只히心으로써心을傳함이라
後經 二/抄稿本/前聖後聖不主文字但心傳心.
後經 二/叢書本/前聖과 後聖이 文字를 不立하고 但只心으로써 心을 傳하니라
註 ; 後經二/抄稿本/前聖後聖不主文字但心傳心. 은 前聖後聖不立文字只以心傳心也. 의 誤記.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먼저 태어난 성인과 그 뒤를 잇는 성인들이 진리를 말이나 글로 전할 수 없어서 다만 마음으로써 천도(天道)를 전했다.
※ 불립문자(不立文字) - 문자로는 세울 수 없다. 진리는 말이나 글로 전할 수 없다. 선종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말이나 글에 의하지 않고 바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는 법을 말한다. 흔히 교외별전이라는 말과 함께 쓰인다. 교외별전이란 경전의 가르침과는 별도로 특수하게 전수된 것이 있음을 말하며, 경전에 절대적 가치나 의의를 부여하지 않는 입장의 표방이다. 〈능가경〉은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천명하고 있다. "문자에 따라 의미를 해석하지 말라. 진실은 자구에 묶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뭔가를 가리키자,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상이 아니라 손가락 끝만 응시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또한 문자 그대로의 번역으로 이루어진 그 손가락 끝에 집착한 채 인생을 마감하는 어리석은 속물이나 어린애와 같아서, 결코 보다 깊은 의미에 이르지 못한다." 불립문자를 표방하는 중국의 선(남종선)은 이심전심으로 가르침을 전하는 사제관계를 중시하게 되었다. 흔히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말과 함께 쓰인다. 불립문자란 문자에 집착하지 않고 보편적 명제의 형태로 정언(定言)을 세우지 않는다는 입장의 표방이며, 따라서 경전의 문구에 대해서는 형식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운 태도를 취한다. 교외별전이란 경전의 가르침과는 별도로 특수하게 전수된 것이 있음을 말하며, 경전에 절대적 가치나 의의를 부여하지 않는 입장의 표방이다. 교종(敎宗)이 경론의 문자나 교설만을 위주로 공부함으로써 불교의 참정신을 잃고 있다고 보아, 선종에서는 부처의 진정한 진리로서의 정법은 단순히 어구나 문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라는 체험을 중시하여 불립문자·교외별전을 주장했다.
이 정신은 중국 선종의 개조인 보리달마에게도 보이지만, 제6조 혜능(慧能)으로부터 번성한 남종선에서 특히 강조되었다. 한편 이 정신의 경전적 근거는 〈능가경 楞伽經〉에서 발견된다. 여기서는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천명하고 있다.
"문자에 따라 의미를 해석하지 말라. 진실은 자구(字句)에 묶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주시하는 사람처럼 행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손가락으로 뭔가를 가리키자, 그 사람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상을 보지 않고 오로지 손가락 끝만 응시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또한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라는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의미를 무시하고 문자 그대로의 번역으로 이루어진 그 손가락 끝에 집착한 채 인생을 마감하는 어리석은 속물이나 어린애와 같아서, 결코 보다 깊은 의미에 이르지 못한다." 또 부처는 성도 이후 입멸할 때까지 한 마디도 설하지 않았다고 하는 〈입능가경 入楞伽經〉 권5의 언급도 불립문자의 근거로서 주목된다.
〈능가경〉의 3종 한역본 중에서도 선종과 관계가 깊은 것은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번역의 4권본 〈능가경〉인데, 여기서 "부처의 말씀은 마음이다"라고 설하는 것과 같은 경문도 불립문자로 표방되는 선종의 정신과 상통한다. 그러나 전설적으로는 불립문자의 전통을 '염화시중'(拈華示衆)이라는 일화에서 찾기도 한다. 어느 설법 자리에서 석가모니가 연꽃 한 송이를 들고 침묵하고 있을 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으나, 십대제자의 한 사람인 가섭(迦葉)만이 그 뜻을 알고 미소지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가섭에게 자신이 죽은 이후 정법을 후대에 전하도록 부탁했다. 어느 날 역시 십대제자인 아난(阿難)이 부처가 전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가섭은 "가서 깃대를 내려라"라고 답했다. 사원 밖에 깃대를 내리라는 말은 언설을 집어치우라는 뜻이다. 이런 전설에 유래하여 선종에서는 가섭을 인도로부터의 초대 조사로 간주한다. 이렇게 불립문자를 표방하는 중국의 선(남종선)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가르침을 전하는 사제(師弟) 관계를 중시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불립문자의 정신은 신라 하대 최치원과 지선(智詵) 등의 언급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당시 교종을 습관존신지법(習觀存神之法)이라고 비판하면서 교종의 한계로 관념화·미신화·세속화·체제지향 등을 들었다. 따라서 이들은 각 개인의 지성을 중시하고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방법으로, 교외별전·직지인심·견성성불과 함께 불립문자를 표방하며 선종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고려 중기 이후 대가들의 유명한 언행을 공안(公案) 또는 화두(話頭)로 삼아 수행하는 간화선(看話禪)이 유행하게 되어, 오히려 언어나 문자에 얽매이는 듯한 역설적 현상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공안의 취의도 언어·문자의 허구를 깨뜨리는 데에 있고 보면, 선종이 표방한 불립문자는 언어·문자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는 것이었다. / 출처 ; 백과사전 편찬위원회와 관련 자료 종합.
後經 二/印刷本/欲求天道自持求心求則求也畢求無受
後經 二/謄寫本/欲其天道댄自持求心이니求則求也나畢求無受니라
後經 二/創建本/天道를 求코저할댄 그求하는心을 自持할것이니 求하면 求할것이나 求하기를 無受니라 畢하야는 受할데가 無하니라.
後經 二/三部本/欲求天道인데 其心自持니 求則此也나 畢求無受니라
後經 二/經典本/欲求天道면 自持求心이니 求則求也나 畢求無受니라
註 ; 後經 二/印刷本의 欲求天道를 後經 二/謄寫本에서 欲其天道로 誤記하고 있다. 後經 二/創建本에서 求하면 求할것이나 求하기를 無受니라 畢하야는 受할데가 無하니라. 는 중복 직역하고 있다. 後經 二/三部本에서는 原文 ‘自持求心求則求也’를 ‘其心自持니 求則此也나’ 로 誤記하고 있다. 後經 二/經典本은 後經 二/三部本을 따르지 않고 ‘自持求心이니 求則求也나으로’ 원문을 따랐다.
後經 二/筆寫本/天道를求코자할진대其 l 求하난心을自持할것이니求하면求할것이나求하기를 畢하여난受할대가無하니라.
後經 二/筆耕本/天道를求코자할진대其 l 求하난心을自持할것이니求하면求할것이나求하기를 畢하야는受할대가無하니라.
後經 二/抄稿本/欲求天道其心自持求則此也畢求無受
後經 二/叢書本/天道를 求하고자 할진댄 其求하는 心을 自持할지니 求하면 求할것이나 求하기를 畢하여는 受할데가 無하니라.
註 ; 後經二/抄稿本/欲求天道其心自持求則此也 는 欲求天道自持求心求則求也 의 誤記.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천도를 구하고자 하면 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스스로 다잡아 가져야 한다, 그러면 구하고자 하면 구하게 될 것이나 구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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