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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천도교 수도회 제4차 수련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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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환기
댓글 0건 조회 1,987회 작성일 16-09-27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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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수도회 제4차 수련
포덕 157년 9월 21일 ~ 24일

-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탐방 -
~2편~


계룡산 갑사(甲寺)
( 23일 아침 산책)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420년(백제 구이신왕 1) 고구려에서 온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는 설, 556년(백제 위덕왕 3) 혜명대사가 창건했다는 설,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혜명대사가 중창했다는 설이 있다. 679년(문무왕 19)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건물 1,000여 칸을 더 짓고 절 이름을 계룡갑사에서 갑사로 바꾸어 화엄대학지소로 삼았으며, 이때부터 화엄십찰의 하나가 되었다. 1579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건물이 모두 불타버리고, 1654년(효종 5) 사정·신휘 등이 관청의 도움을 받아 중수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강당·대적전·천불전·응향각·진해당·적묵당·팔상전·표충원·삼성각·종각·요사채 등이 있다.중요문화재로는 공주 갑사 철당간(보물 제256호), 공주 갑사 승탑(보물 제257호), 갑사동종(보물 제478호), 월인석보목판(보물 제582호) 등이 있다.






갑사계곡




요사채와 구절초




갑사 승탑

보물 제257호. 높이 205cm. 원래 갑사 뒤쪽의 계룡산에 있던 것을 1917년 현 위치로 옮겨왔다. 8각의 높은 지대석 위에 3층으로 된 하대석과 탑신, 옥개가 있는 8각원당형 구조이다. 하대석의 모서리에는 피어나는 연꽃을, 각 면에는 1구씩의 사자를 조각했는데 환조에 가까운 입체감을 준다. 그 위에는 구름 속에 있는 용이 생동감있게 표현되었고, 운룡문과 사자상 사이에 홈이 파져 물이 아래쪽으로 빠져나가도록 되어 있다. 중대석에는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이 양각되어 있으며, 각 모서리에는 꽃봉오리 같은 장식이 돌출되어 있다. 상대석 밑에는 높은 부연이 있으며 그 윗면에 32엽의 복련이 돌아가며 장식되어 있다.팔각형 탑신석 각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우고, 앞뒤 면에는 자물쇠가 있는 문을 새기고 그 좌우면에 2구의 사천왕상을 각각 배치했다. 옥개가 기단이나 탑신부에 비해 높고 폭이 좁은 편이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지 못한다. 옥개 밑에 작은 서까래를 촘촘히 새기고, 지붕 위의 낙수면에는 목조건축의 팔모지붕을 모방해 굵고 네모난 우동 사이로 가늘고 긴 기왓골을 표현했다. 상륜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뒤에 보수한 보주만 놓여 있다.이 부도는 전체적으로 매우 장식적이며 목조건축의 세부까지 표현했으나 전체비례에서 옥개석이 유달리 작아진 점이나 기단부의 장식문양과 뛰어난 조각솜씨 등으로 보아 신라승탑의 전통을 이어받은 고려승탑의 우수한 예로 평가된다.


















갑사 철당간
보물 제256호. 철당간높이 15m, 지주높이 3m. 기단은 단층으로 길쭉한 돌 2장을 합쳐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윗면 접착부위에 돌을 서로 연결하는 쇠못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옆면 사방은 아래 위로 굽을 둘렀고, 좌우 두 면에는 안상을 2구씩, 앞뒤 두 면에는 3구씩 음각했다. 이러한 장식수법은 통일신라시대의 특징이다. 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아무런 조각이 없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은 상부 한 곳에만 구멍을 파서 철제당간의 오절철통을 쇠줄로 3번 돌려 고정시켰다. 당간은 지름 50cm의 철통 24개를 연결한 것으로, 원래는 28개였는데 1893년(고종 30) 4개가 부러졌다고 한다. 철제당간에서 기단까지 모두 갖춘 귀중한 자료이다.











의승장 영규대사(靈圭大師) 비 앞에서

생년 미상 ~ 1592년)는 조선 중기의 승병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활약하였다. 본관은 밀양, 호는 기허, 속성은 박으로 충남 공주 출신이다. 계룡산 갑사에 출가하여 서산대사의 고제로 공주 청련암에서 수도하였고 선장으로 무예를 익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초로 승병을 일으켜 500명을 이끌고 의병장 조헌과 함께 청주 전투에서 청주성을 탈환했다. 그리고 다시 제2차 금산 전투를 벌였고 격전 끝에 싸우다 전사하였다. 금산의 칠백의총에 묻히고 종용사에 제향되었으며 법도, 대인에 의해 진락산에 영각이 세워졌으며 의선이란 편액이 하사되었다.





갑사유스호스텔에서의 역사 토크 및 대담
(23일 오전)




서울 민족통일포럼 대표




탐방 강사의 수운 대신사님에 대한 설명 중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청암 이국진 동덕께서 바로 잡고 보충 설명하는 모습.




원탁으로 이어진 자유 토론



우금티 동학혁명군 위령탑
[공주 우금치 전적] 사적 제387호(1994.03.17 지정)




우금치 전적지는 공주시 금학동,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길목인 견준산 기슭 우금치 일대로
제2차 동학농민전쟁의 최후 격전지이다.
이곳에는 1973년 동학혁명군 위령탑 건립위원회에서 동학혁명군 전적비를 세워 당시를 기리고 있다.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아산만이 진주하자, 일본은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조선으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6월 21일 조선의 내정 개혁을 내세워 경복궁을 불법 점령하여 친일 내각을 성립시킨 일본군은 이어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동학농민군에 대한 토벌을 본격으로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군에 의한 경복궁의 무력 점령 사건이 전해지기 시작한 6월 말부터 전국 각 지역의 동학농민군은 재봉기를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공주 지역에서도 6월경부터 동학농민군의 재봉기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우선 공주 인근 지역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서울로 향하겠다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회덕과 진잠에서는 무기고를 탈취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이인 반송의 접주 김필수의 주도 하에 “지금 외국이 내침하여 종사가 매우 위급하니 군대를 일으켜 한번 토벌하여 환난을 평정하고자 한다”며 군량과 마필, 총 등을 거두어가기도 하였다. 특히 공주 달동 출신의 접주 장준환은 부여·광천 등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그 세력을 키우고 있었으며, 8월 1일에는 공주 대접주 임기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1만여 명이 정안면 궁원에 집결하여 공주감영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당시 공주감영만이 점령되지 않았을 뿐이지 공주부 내 대부분 지역이 동학농민군에 의해서 장악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9월 10일 ‘척왜(斥倭)’의 명분을 내세운 재봉기를 선언하고 북상을 위해 논산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동학 교단지도부 또한 ‘기포령’을 내린 뒤 논산의 전봉준 부대와 합류하였으며, 공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이 논산으로 집결하면서 그 수가 4만여 명을 넘어섰다. 특히 공주 유생 이유상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집결해 있던 부여 건평 유회군 200여 명을 이끌고 논산의 동학농민군 연합 부대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이는 “나는 유도(儒道) 수령으로 동학당을 치고자 왔으나 장군(전봉준)을 만나 보니 감동되는 바 있어 협력”하기로 하였다는 이유상의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2차 봉기 당시 동족끼리 싸우지 말고 관과 농민군, 유생들이 함께 힘을 합하여 일본군과 싸우자는 전봉준의 반일연합전선 제의에 선봉장이 되어 활동하였다.마침내 대대적인 반일연합전선을 형성한 동학농민군은 천연의 요새이자 중부 지역을 석권할 수 있는 공주를 장악하여 서울로 북상하기로 계획하고 논산을 출발, 노성을 거쳐 공주 경천점과 이인역에서 관군 및 일본군 연합 부대와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1차 공주 전투]

동학농민군이 논산을 떠나 공주로 진격하던 시기, 충청감영에는 이미 서울에서 내려온 경군과 일본군에 의해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었다. 일본은 8월 16일 평양 전투에서 승리한 후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에 동학농민군을 모두 살육하라는 훈령을 내렸으며, 서울에서 세 길로 나누어 압박하면서 동학농민군을 남쪽 바다로 몰아 몰살하겠다는, 일명 ‘청야작전’이라는 구체적인 전술까지 마련하고 있었다. 그 결과 10월 24일 서로 분진대가, 26일에는 미나미가 이끄는 중로 분진대가 공주에 도착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우선봉 이두황은 장위영 병사를 이끌고 10월 21일 목천 세성산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후 10월 27일경에 공주에 도착하였다. 좌선봉 이규태는 교도중대와 통위영 2중대를 이끌고 과천·수원을 지나 일본군 3중대와 합류하여 10월 24일 공주에 도착하였다. 동학농민군이 공주를 공격할 즈음 충청감영에는 경군을 합친 조선 관군이 대략 3천 2백 명이었으며, 일본군은 2천여 명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10월 23일 마침내 경천점에 집결해 있던 동학농민군은 우선 이인역 방향과 효포 방향으로 나누어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청산·영동 지역에서 이동해 온 북접계 옥천포 동학농민군 수만 명이 공주 대교에서 관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먼저 전투가 벌어진 곳은 이인역으로 진격하던 동학농민군과 성하영의 경리청 부대, 스즈키 휘하의 일본군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이인역 주변 산에 집결해 있었으며, 선봉에 서 있던 일본군 100여 명은 맞은편 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일본군과 관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이 날 전투는 저녁까지 이어졌으며, 날이 저물자 각각 공주감영과 경천점으로 후퇴함으로써 무승부로 끝이 났다.

이날 밤 효포를 지키고 있던 홍운섭과 구상조 부대가 대교 지역으로 이동하자 경천점의 동학농민군은 효포를 장악하였으며, 다음날부터 효포를 둘러싼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효포 뒷고개 산마루를 중심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전투는 일단 관군이 물러서면서 일단락되었다. 한편 대교로 이동했던 홍운섭과 구상조 부대는 이 지역에 집결해 있던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여 동학농민군 20여 명을 사살하고 공주감영으로 복귀하였다. 10월 25일 동학농민군은 전봉준 지휘 하에 효포에서 감영으로 넘어오는 고개인 웅치(곰티)를 향해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맞서 24일 공주에 도착한 모리오가 이끄는 서로 분진대가 선봉에 서고, 이규태 부대와 대교에서 복귀한 홍운섭 부대까지 합세하여 웅치를 방어하였다. 한낮이 지나도록 전개된 치열한 전투는 근대적 군사 훈련과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파상 공격을 받은 동학농민군이 7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무기를 버리고 후퇴함으로써 끝이 났다.

이날 전투로 인해 웅치 골짜기, 시야산의 둔덕, 효포의 다리 주변에는 동학농민군의 시체가 무수히 널려 있었으며, 그들이 흘린 피가 시내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이날 패배로 상당한 충격을 받은 전봉준은 우선 경천점으로 후퇴한 뒤 전열을 재정비해야만 했다. 하지만 “두 차례 접전 후 1만여 명의 군병을 점검했더니 남은 군사가 불과 3천 명이었다”라고 전봉준이 후일 공초에서 언급했듯이 이 날의 전투는 동학농민군의 처절한 패배로 끝이 났다.







[2차 공주 전투]

10월 23일에서 10월 25일에 걸친 전투에서 처절한 패배를 당한 동학농민군은 논산에서 약 1주일 동안 전열을 재정비한 뒤 11월 8일 공주를 향해 최후 결전을 감행하였다. 이들은 우선 이인과 판치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구상조와 성하영 부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관군은 동학농민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퇴진하였으며, 승기를 잡은 동학농민군은 이인 인근 산으로 올라가 일제히 횃불을 들어 올렸다. 수많은 횃불로 인해 인근 산은 마치 화성(火城)과 같았다고 한다. 갑작스런 동학농민군의 공격에 놀란 관군은 우금치, 금학동, 웅치, 효포 봉수대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며, 모리오가 이끄는 일본군도 이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11월 9일 마침내 동학농민군은 동쪽 판치 후봉에서부터 서쪽 봉황산 후록에 이르기까지 대략 30~40리에 걸쳐 마치 병풍을 친 듯이 깃발을 꽂아 놓고 군세를 과시하였다. 또한 금학동, 우치, 효포 월봉 주변의 고봉(高峰)에도 진을 치고 고함을 지르거나 포를 쏘며 공격할 듯한 기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는 주 공격로로 삼고 있던 우금치를 진격하기 위해 우금치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는 방어선을 교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오전 10시, 마침내 동학농민군은 우금치를 향해 공격을 감행하였다. 한때 지형지물을 이용한 동학농민군이 우금치에서 150m 가량 떨어진 산허리까지 접근하기도 하였나, 관군과 일본군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접근을 막았다. 이렇게 우금치고개를 오르다가 밀리기를 40~50차례 거듭하였으나, 동학농민군의 시체만 쌓여갈 뿐 고개는 뚫리지 않았다. 결국 동학농민군은 산등성이에서 쏘아 대는 대포와 총의 사격거리 너머로 물러나야만 했으며, 웅치 전투를 끝으로 점차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동학농민군 주력 부대가 뿔뿔이 흩어지면서 지역별로 간헐적으로 전투가 진행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지역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유회군에 의한 토벌만이 자행될 뿐이었다.








[공주 전투의 패배 원인]

모두 2차례에 걸친 공주 전투는 동학농민혁명 전 기간에 걸쳐 규모면에서도 4만 명이 넘는 최대 규모였으며, 전봉준이 이끄는 주력 부대와 교단의 북접 부대까지 가세한 연합 부대의 성격을 지닌 모든 역량을 쏟은 전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우선 첫 번째는 무기의 절대적인 열세를 지적할 수 있다. 당시 일본군이 소지하고 있던 무기는 사거리만 수백 미터가 넘는 카트링식 기관총과 스나이더 소총, 무라타 소총이었다. 더구나 1초에 한발씩 발사되는 이들 소총에 비해 농민군이 소지하고 있는 화승총은 불을 붙여 발사하는데까지 30초나 걸리며 사정거리도 10분에 1에도 못 미친 것이었다.

당시 김윤식은 일본군 1명이 농민군 수천 명을 상대할 수 있고, 경군 1명은 수십 명을 상대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화승총과 근대식 소총의 차이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우금치를 두고 벌어진 전투에서 높은 고지에서 쏘아대는 소총에 농민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전술의 부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관군과 일본군이 이미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형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규모를 앞세워 전면전을 펼침으로써 이후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막대한 인명 피해를 당했던 것이다. 이는 세성산 전투와 홍주성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고립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성급한 전면전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 전투 그 이후]

4일간의 처절했던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이인·경천을 거쳐 11월 12일 노성에 이르러 진영을 재정비하고자 하였다. 이곳에서 전봉준은 대일연합전선을 호소하는 「고시경군여영병이교시민」이라는 글을 발표하였으나, 이미 전세가 기울어진 상황에서 호응하는 세력들을 결집하는데 실패하였다. 결국 노성에서 논산 대촌으로, 이어 소토산에서 황화대까지 관군과 일본군의 토벌대에 밀려 후퇴하였다.

퇴각하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관군과 일본군의 소탕은 학살 그 자체였다. 이때의 정황을 이두황은 “남은 도둑 천여 명이 여지없이 무너졌는데 새벽하늘에 별이 없어지는 것 같았고, 가을바람의 낙엽과 같았다. 길에 버려진 총과 창, 밭두덕에 버려진 시체가 눈에 걸리고 발에 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약탈까지 일삼았으며,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유회군은 각 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을 색출하여 무자비하게 처형하였다. 공주 접주 장준환 또한 이들에게 잡혀 효수를 당했으며, 유생으로 참여했던 이유상은 몸을 피해 종적을 감추었다.

지금도 공주에 가면 동학농민군 18명이 죽었다는 송장배미, 길을 닦다가 해골이 여러 바지게 나왔다는 하고개, 점심을 먹다가 일본군에게 몰살당한 동학농민군이 즐비해 공동묘지가 되었다는 승주골·은골·방축골 등 당시 처절했던 공주 전투와 얽힌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이 재현되길 바라는 환향바위 이야기처럼 비록 우금치를 넘지 못하고 동학농민혁명은 실패하였지만 새 세상을 향한 민중들의 염원은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에게 면면히 이어져 일제시기 자주독립을, 해방 이후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계승되었다.

(디지털공주문화대전에서 발췌한 내용)
















전봉준 장군 피체지 구역 내 녹두관
(전북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 전봉준은 남쪽으로 피난을 하여 순창 피노리에 도착하였다.
전봉준이 피노리를 선택한 것은 자신이 고부 접주로 활동할 당시 집사 업무를 맡아보던 김경천(金敬天)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상금을 탐낸 김경천은 민보군을 조직하고 있던 전라 감영 퇴교(全羅監營退校) 한신현(韓信賢), 김영철(金永澈),
정창욱(丁昌昱) 등과 함께 전봉준이 묵고 있는 주막을 포위하고, 잔혹한 몽둥이질을 통해 전봉준을 잡아 공회당에 가둔 뒤
관군에 인계하였다. 이후 한신현은 그 댓가로 현상금 1천냥을 받고, 황해도 금천 군수(金川郡守)에 제수되었으며,
김영철은 300냥, 정창욱은 200냥, 마을사람 9명이 200냥의 현상금을 받았다고 한다.







순창에 주둔하고 있던 관군인 교도대(敎導隊)는 1894년 12월 2일에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피노 마을∼용전리 묵산마을∼신광사재∼ 구림면 금창리 금상 마을로 압송로를 정하여
순창 관아로 끌고 갔는데, 이는 전봉준을 따르는 동학 농민군과 일반 농민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전주의 전라 감영으로 압송하기 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순창 관아에서 12월 7일 담양을 경유하여 나주로 압송하였다.
나주에서 1895년 1월 5일출발하여 1월 24일 서울 주재 일본 영사관에 인도되었다. 전봉준은 몇 차례 심문을 거쳐
2월 3일 법무 아문으로 인도되었고, 재판을 거쳐 3월 30일 최경선, 손화중, 김덕명, 성두한과 함께 사형을 당했다.





























































전봉준 피체지에서의 주문 수련과 천덕송 합창.











만세삼창















훈몽재(訓蒙齋)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둔전2길 83[둔전리 45-1]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가 1548년(명종 3)에 순창 점암촌 백방산 자락에 지은 강학당이다.
김인후는 주자(朱子)의 이기 이원론(理氣二元論)을 계승하는 견해로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적 목표로 삼아
이를 조선 왕조의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 월계(月溪) 조희문(趙希文)[1527~1578] 등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대학암(大學巖)

널찍하고 평평한 대학암에는 김인후의 문하생이었던 정철이 썼다는 ‘대학암(大學巖)’ 세 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김인후는 정철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에게 『대학(大學)』을 강의했다고 한다.





김인후가 39세 되던 1548년에 후학들을 양성하기 위해 처향(妻鄕)인 순창군 쌍치면의 점암촌에 초당을 짓고,
‘훈몽(訓蒙)’이라는 편액을 걸고 강학을 하였다. 김인후가 처음 훈몽재를 지은 곳은 대학암(大學巖) 위쪽이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김인후의 5세손인 자연당 김시서(金時瑞)[1652~1707]가 1680년(숙종 6)경 인근에 자연당을 짓고
기거하며 훈몽재를 중건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세월이 흘러 훈몽재가 퇴락하자 후손과 유림들이 다시 점암촌에
훈몽재를 중건하고 어암 서원(魚巖書院)을 건립하여 김인후, 김시서, 송강 정철,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1867년(고종 4)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훈몽재가 중건되었으나 1951년 6·25 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
2009년 11월 9일 현재의 위치에 훈몽재를 중건하고 동년 11월 29일 개원하였다.






훈몽재[강학당], 자연당[숙박 시설], 양정관[교육관 및 숙박 시설], 삼연정(三然亭), 하연정(下然亭), 대학암,
훈몽재 고인돌, 식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훈몽재, 김인후가 낙향하면서 자신의 자연 귀의 사상을
「자연가」라는 시를 통해 표현하였는데 김시서가 ‘자연당’이라는 이름으로 복원한 자연당, 매산 홍직필(洪直弼)[1776~1852]의
「훈몽재기(訓蒙齋記)」에 수록된 김인후의 교육 이념인 몽이양정(蒙而養正)[어리석은 사람을 바르게 기름]에서 따와
이름 붙인 양정관, 김인후의 문학적 사상인 산(山)·수(水)·인(人) 삼연(三然)을 구현한 정자인 삼연정이 있다.







훈몽재에서는 유학 전문 교육반[한문학과 대학생 등을 대상으로 훈몽재에 거주하면서
『논어』, 『맹자』 등 유학 경전을 전문으로 공부], 방학 예절 교육반[초등학생·중학생·고등학생·대학생 등을 대상으로
방학 기간 동안 1~4주 예절 및 인성 교육], 단기 체험 학습반[초등학생·중학생·고등학생·대학생·일반인을 대상으로
1~2일의 짧은 기간 동안 예절 및 심신 단련], 여성 교육반[가정주부 등을 대상으로 가정주부의 역할 및 도덕성 회복,
애경사 시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 등을 교육] 등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2011년 1월부터 고당 김충호가 훈몽재 산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훈몽재 인근에 조선 시대의 훈몽재 터인
훈몽재 유지가 2012년 11월 2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


























유학과 동학의 상관관계에 대한 강기욱 선생님의 현장 강의





조선 사상사의 맥락과 동학의 발현에 대하하여...











월봉서원(月峯書院)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452

1578년(선조 11)에 김계휘(金繼輝)를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기대승(奇大升)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광산군 비아면 산월리에 망천사(望川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46년(인조 24)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1654년(효종 5)에 ‘월봉(月峯)’이라고 사액되었다.1671년에 송시열(宋時烈) 등의 건의로 인근의 덕산사(德山祠)에 모셔져
있던 박상(朴祥)과 박순(朴淳)을 이향(移享)하였으며, 1673년에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을 추가배향하였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

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존재(存齋). 아버지는 진(進)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증(贈) 이조판서 문민공(文愍公) 준(遵)의 조카이다. 하서 김인후와 사돈간이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1년 알성시(謁聖試)에 응해서 시험에 합격했으나, 준의 조카라는 사실을 안 당시의 시험관 윤원형(尹元衡)의 방해로 낙방했다. 1558년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도중 김인후·이항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하고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았다.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해 10월 이황을 처음으로 찾아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황과의 만남은 사상 형성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뒤 이황과 13년 동안(1558~70)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辯)은 조선유학사상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이다.

1562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이량(李樑)과의 불화로 삭직되었으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청직(淸職)에 들어섰다. 이듬해 10월에 병조좌랑을 지내면서 지제교를 겸임했다.

이어 1565년 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사인을 두루 지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 집의·전한(典翰)이 되어 기묘사화와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윤원형 세력이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으로 죽음을 당한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했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했고, 이듬해 대사성에 올랐다.

1570년 을사위훈(乙巳僞勳)을 논할 때, "을사(乙巳)의 녹훈(錄勳)이 위훈(僞勳)이 아닐 뿐더러 또 선왕이 이미 정한 것이니 삭탈할 수 없다"고 하여 삭탈을 주장한 사람들의 반발을 사 벼슬에서 물러났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다. 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그해 11월 고부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기일원론
그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기준 등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의 주자학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이황·정지운·이항 등과의 논쟁을 통하여 체계가 이루어졌다. 그는 이황과 정지운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 지나치게 〈주자어류 朱子語類〉와 운봉호씨설(雲峰胡氏說)에만 근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자사(子思)와 맹자가 말하는 바가 같지 아니하므로 사단과 칠정의 구별이 있을 따름이요, 칠정 밖에 따로 사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여 선(善)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하여 선악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와 기를 양물(兩物)로 삼는 것이니, 이는 칠정이 성(性)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사단이 기를 타지[乘] 않는다"는 것이다.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논할 때에는 혹 이와 같은 설이 옳을지 모르나 사단·칠정은 이처럼 말할 수 없다"라고 하여 사단과 칠정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견해에 반대했다.

이어서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입각한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다.
성(性)과 정(情)은 미발(未發)·이발(已發)의 다름이 있을 뿐 불가분의 표리관계에 있음을 강조하고, 그 성(性)은 선(善)하지 않은 것이 없고 정(情)도 그 성(性)이 발하여 된 것이므로 불선(不善)이 있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사단칠정을 이기(理氣)에 분속(分屬)시킨다면 이(理)와 기(氣)를 독립된 별물(別物)로 보게 되어 사단 속에 기(氣)가 없고 칠정(七情) 속에는 이가 없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사단과 칠정을 대설(對說)이 아닌 인설(因說)로 파악하는 것으로 결론짓게 된다. 그는 사단이 칠정 중의 사단인 것처럼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서의 순리(純理)도 겸기(兼氣)인 기질지성(氣質之性) 중의 것임을 의미한다고 하여 심성론적(心性論的)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기의 주재자(主宰者)요, 기는 이의 재료인 것이다. 이 둘은 본래 나누어져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사물에 존재할 때는 본래 혼륜(混淪)되어 분개(分開)할 수 없다.
단 이약기강(理弱氣强)하고, 이는 조짐이 없으나 기는 흔적이 있으므로 그것이 유행(流行)·발견될 때 과불급의 차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칠정이 발할 때 혹은 선하고 혹은 악하여 성(性)의 본체도 혹 완전할 수 없게 되는 까닭인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기(理氣)는 논리적으로 구별되지만 실제에서는 떨어져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심성론을 중심으로 사단과 칠정의 차이를 중절(中節)과 부중절(不中節)로써 설명했다. 이러한 관점은 태극도설에도 반영되었다. 태극(太極)은 이(理)로서 주재자요, 음양(陰陽)은 기(氣)로서 재료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고봉 기대승의 정치사상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 사상을 이어받아, 전제주의 정치를 배격하고 민의에 따르고 민리(民利)를 쫓는 유교주의적 민본정치(民本政治)·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정치사상은 명종과 선조에 대한 경연강의(經筵講義)에 담겨 있다. 〈논사록 論思錄〉에 제시된 거현론(擧賢論)·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숭례론(崇禮論)·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 등은 왕도정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수단이었다. 먼저 현자(賢者)의 등용을 중시하고, "현자를 등용하고자 한다면 먼저 시비를 분명히 하여 인심을 열복(悅服)시킨 연후에야 현자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하여 윤원형 등 당시 집권층을 강경하게 비판했다. 이는 거현(擧賢)이야말로 양민(養民)하기 위한 지름길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현자들이 화를 입으면 소인배들이 득세하고, 그들의 사치와 사욕으로 말미암아 민재(民財)가 약탈되므로 민심이 흩어지게 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임금은 재용(財用)을 선처하여 민생들로 하여금 그 혜택을 입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러한 이재양민이 정치의 요체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국가정치의 일차적인 근본인 군덕(君德)의 증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덕치(德治)의 두 기둥인 존현(尊賢)과 이재(理財)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예(禮)가 강조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예란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오 인사(人事)의 의칙(儀則)"이었다. 특히 예는 "천명(天命)의 성(性)에서 나왔으므로 범인(凡人)은 이를 알지 못하고 성인(聖人)만이 이를 안다. 그리하여 예법을 만들어 일세(一世)를 교화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하면서, "임금이 지성으로 현자를 신임하지 않는다면 현자 또한 어떻게 쓰여질 것인가, 오직 임금의 현자를 쓰려는 성의가 있느냐에 있을 따름이다"라 하여 신하의 상향적인 예뿐만 아니라 임금의 신하에 대한 예도 강력히 요구했다.

또한 그는 "언로(言路)는 국가의 대사(大事)이다. 언로가 열리면 국가는 안정되고 언로가 막히면 국가는 위태롭다"라고 하여 임금이 언로를 막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시비(是非)를 명확히 가려 소인배의 득세를 방지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고경명(高敬命)·최경회(崔景會)·최시망(崔時望) 등이 있다. 1590년(선조 23) 종계변무의 주문(奏文)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덕원군(德原君)으로 추봉되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논사록〉·〈주자문록 朱子文錄〉·〈고봉집〉 등이 있다.







강기욱 선생님의 현장 강의.





이예진 (광주광역시 광산구 문화유산해설사) 선생님의 해설.

참고로 이예진 선생님은 광주광역시 광산교구장을 지내신 숙덕 어르신의 따님이시기도 합니다.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사단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 마음(감정)으로서 각각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착한 본성[德]에서 발로되어 나오는 감정이다. 그러므로 단서라고 이름 붙였는데, 단(端)이라 함은 선(善)이 발생할 가능성을 가진 시초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맹자의 용어로서 ≪맹자≫ 공손추편(公孫丑篇)에 나온다. 측은지심은 타인의 불행을 아파하는 마음, 수오지심은 부끄럽게 여기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마음, 사양지심은 타인에게 양보하는 마음, 시비지심은 선악시비를 판별하는 마음이다.

맹자에 의하면 이 사단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일종의 선천적인 도덕적 능력이다. 그러므로 맹자는 이것을 확충함으로써 인·의·예·지의 덕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측은지심의 경우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 누구나 아무 조건 없이 그 아이를 끌어안고 구하려는 마음이 순수하게 발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소박한 자발적인 행위를 보면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단설은 맹자 성선설(性善說)의 근본으로서 인간의 도덕적 주체 내지 도덕적 규범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칠정은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일곱 가지 감정인데, ≪예기≫ 예운편(禮運篇)에서 비롯하여 당(唐)의 한유(韓愈)가 <원성편 原性篇>에서 7정으로 나누어 논하였다. 이것은 중국 고대에서 오래 전부터 있던 사상으로서 인간이 외부 사물에 접하면 여러 가지 정이 표현되는 심리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중용≫에는 희로애락의 발현[發] 이전을 ‘중(中)’, 발현하여 절도에 맞는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을 ‘화(和)’라 말하고 있는데, 결국 칠정은 여기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심리의 숨김없는 현실태를 총칭한 것이다.

이렇게 사단과 칠정은 별도로 주장된 것인데, 송대에 성리학이 성립되면서 이른바 사서(四書) 중심의 학풍으로 바뀌자 맹자의 사단설이 중시되고, 아울러 사단에 대립되는 개념인 칠정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자에 있어서는 사단과 칠정을 조선조 성리학에서처럼 첨예하게 대립시켜 상세하게 논의하지는 않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 간의 논쟁 이후로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논쟁을 거쳐 한 말에 이르기까지 조선조 주자학자로서 이 사단칠정에 대해 한마디하지 않은 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한국 성리학 논쟁의 중요 쟁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사칠론에 존재론적 범주로 사용되던 이(理)와 기(氣)의 개념이 도입되고, 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라는 개념이 함께 논의됨으로써 그 논쟁이 한층 복잡하게 되었다. 주자는 “사단은 이의 발현이요, 칠정은 기의 발현이다(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라고 하였다.
또 주자는, 제자가 “희·노·애·구·애·오·욕은 칠정이므로 그것은 인간 본성에서 발현되어 나오는 것입니다만, 노(怒)는 수오지심에서 발현되어 나오고, 희·애·욕은 모두 측은지심에서 발현되어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물은 데 대하여, “애·구는 어디에서 발현되어 나오는가? 아마 측은지심에서 발현되어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구(懼)는 두려운 마음이 심한 경우이다. 그러나 칠정을 사단에 일대 일로 나누어 배속(비교) 시킬 수는 없다. 칠정은 그 자체가 사단 속을 꿰뚫어 지나가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취지로 칠정은 사단에 배속시키는 문제를 물은 데 대하여, “대략 서로 비슷한 것과 갖다 붙여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거나 “본디 사단과 칠정은 서로 비슷한 점이 있긴 있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주자는 “측은·수오도 중절(中節 : 절도에 맞음.)과 부중절(不中節 : 절도에 맞지 않음.)이 있다”며, “사단은 시시로 발현하는데 거기에 정(正)·부정(不正)이 있다”라고 하여 사단도 그 발현에 있어서는 절도에 맞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사단도 인간 본성에서 발현되어 나온 감정이기 때문에 그 나타난 현 실태를 보면 중절·부중절과 정·부정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에서의 사단칠정을 둘러싼 논의는 처음에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서 벌어졌다.
그 뒤 이이가 기대승의 설을 지지하고 이황의 설을 반대함으로써 그 논의는 확대되어 성리학 논쟁의 핵심 문제로 등장, 사단·칠정뿐 아니라 이기론(理氣論) 및 정치 사회관에 이르기까지 두 유형의 사고 방식의 대립을 보이게까지 되었다. 이로 인하여 주리학파(主理學派)·주기학파(主氣學派)로 학파가 나누어 그 뒤 많은 학자들이 학파적 관심을 가지고 토론하였다. ‘주리’·‘주기’의 문구는 이황과 기대승 사이의 논쟁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로서 각각 도덕론적 입장과 존재론적 입장을 상징하고 있다.

즉, 주리·주기의 차이의 시원은 인간의 측면에서 자연을 해명하려는 입장과 자연의 측면에서 인간을 해명하려는 입장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다. 이 두 관점의 혼재는 성리학의 본래적인 특성, 즉 자연법 사상의 특성으로 흔히 ‘천인합일(天人合一)’ 또는 ‘물리(物理)=도리(道理)’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황 이전에 정지운(鄭之雲)이 <천명도설 天命圖說>에서 “사단은 이에서 발현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현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고 하였는데, 이 문구를 이황이 개작하여 “사단은 이가 발현한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기대승이 “칠정 이 외에 달리 또 사단이라는 정이 없다”라는 생각에서 이황에게 해명을 요구함으로써 문제가 발단되었다.
그 후 이황은 자기설을 수정하여 “사단은 이가 발현하는데 기가 거기에 따르는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하는데 이가 거기에 타는 것이다(四端理發而氣隨之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하였다.

그러나 기대승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질문을 계속하여 논쟁이 수차 계속되었으며, 퇴계 사후에 이이가 기대승의 설을 지지하여 칠정은 사단을 내포한 것이며 사단도 기발이승(氣發理乘)일 뿐이라고 하여 이른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였다.
이황은 “대개 사람의 몸은 이와 기가 합하여 된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가 서로 발용(發用)하고 서로 필요로 한다. 호발(互發)하므로 각각 주(主)된 바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서로 필요로 하므로 서로 그 가운데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칠정 대 사단으로 분별하여 말하면 칠정의 기에 대한 관계는 사단의 이에 대한 관계와 같다. 또 사단도 물(物)에 감(感)하여 동(動)함은 칠정에 있어서와 다름없으나 다만 사단은 이가 발현하는데 기가 따르는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하는데 이가 타는 것이다"라고 하여 사단·칠정 논의를 통하여 이·기가 상호발현[互發]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이황은 주자 학설 중 이와 기는 전연 별개라는 이른바 이기부잡(理氣不雜)의 면을 강조하여 이(理)를 작용이 있는 것으로 보고 이와 기를 귀천(貴賤) 관계로 파악하였다. 즉, 이황은 이는 이성(理性), 기는 감성(感性)으로 보았으므로 이가 기를 제어하지 못하면 이욕(利欲)에 떨어져 짐승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황은 사단·칠정을 각각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에 견주어 선악으로 대립시켜 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황에게 있어서는 주자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기의 귀천 관계 내지 기에 대한 이의 제어라는 의미의 우열 관계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가 우주론에서 이(理)는 작용하는 것으로 본 사고와 표리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즉, 존재론적 의미로서의 이·기를 도덕론을 중심으로 보려 하는 것으로 여기에 그의 성리학의 특색이 있다.

그러나 주자의 “사단은 이의 발현이요 칠정은 기의 발현이다”라는 명제 및 정지운의 “사단은 이에서 발현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현한다”는 명제는 본래 이·기를 대략 선악의 의미로 보아 그 개념을 빌려 사단과 칠정을 논하려고 하였던 소박한 입론(立論)이었다. 그런데 퇴계가 이를 “사단은 이발이기수지, 칠정은 기발이이승지(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고침으로써 ‘발(發)’에 더욱 강조점이 옮겨지게 되고, 또 ‘수(隨)’자와 ‘승(乘)’자를 대치시켜 은연중 이(理)를 강조하려는 생각을 표현하게 되어, 결국 존재론적 개념인 이·기의 개념에 혼란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이(理)는 발현할 수 없는데, 이러한 능동적 발현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는 이·기 개념으로는 그의 도덕론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위의 명제에서 나타난 그의 사상적 특성과 그의 언어 사용상의 착오와 한계는 구분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퇴계의 입론에 담긴 사상의 특성을 잘 알 수 있다.

이황의 이발론(理發論)과 관련하여 고려할 점은 성리학의 심성구조론(心性構造論)인 ‘성이 발현하여 정이 된다(性發爲情)’라는 명제다. 이는 성·정을 본체와 작용으로 나누어 심성의 구조를 말한 것으로서 성(性)의 본체의 운동이나 작용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황의 “사단은 이(理)의 발현[發]”이라는 입론에서의 ‘발(發)’의 의미와는 언어상의 큰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황의 ‘이발론’은 왕수인(王守仁)의 ‘심즉리(心卽理)’가 “심을 이에 합치시켜라”라고 하는 수양론적 의미가 강한 것과 같이 “이가 기를 제어하여 금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도덕론적 강령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이황의 이러한 주리적 사고는 그 뒤 이진상(李震相)에 이르러 왕양명과는 다른 ‘심즉리’ 설을 주창하게 되는데, 이는 주리적 사고의 필연적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이는 이황이 사단을 이(理)의 발현 즉, 이성적 작용으로 파악한 데 대해 이성적 작용도 작용인 이상 기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이는 무위(無爲)라는 주자의 설을 계승, 존재와 도덕을 일괄하여 이·기 관계를 이른바 ‘기발이승일도설’로 제시하였다. 따라서 사단과 칠정의 관계는 칠정은 기의 발동의 총칭이므로 사단은 칠정에 포함된다고 본다. 이이는 “사단과 칠정은 본연지성(本然之性)·기질지성(氣質之性)과의 관계와 같다. 본연지성은 기질을 겸하지 않고 말한 것이며, 기질지성은 도리어 본연지성을 겸한다. 그러므로 사단은 칠정을 겸하지 못하나 칠정은 사단을 겸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인심·도심은, 이황에서처럼 대립적이기는 하나, 그것이 사단·칠정과 같은 대립 관계는 아니라고 하였다.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주장에서 이이는 다시 칠정과 사단을 비슷한 것끼리 연결시켜, 측은은 애(愛)에, 수오는 오(惡)에, 공경은 구(懼)에, 시비는 ‘희로(喜怒)의 당연성 여부를 아는 것’에 배속시킨다. 그러나 주자는 칠정과 사단은 비슷한 점이 있지만 그 성격상 나누어 붙이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이의 ‘사칠배속’은 그의 ‘기발이승일도설’의 필연적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지나친 천착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칠정의 선한 것과 사단은 다르기 때문이다. 사단은 도덕의 표준이라는 성격을 갖는 것이므로 칠정의 선한 것과 같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이는 존재론의 입장에서 도덕률을 규정하려고 하였으므로 ‘천지의 변화(天地之化)’는 바로 ‘내 마음의 발현(吾心之發)’이라고 하여 천지에 이화(理化)·기화(氣化)의 구분이 없다면 우리 마음에도 이발·기발이 없다고 하였다. 이이의 이러한 입장은 그의 ‘이통기국(理通氣局)’의 명제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즉, 기는 물질적·시간적 유한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기국(氣局)’이고, 이는 초월적 존재로 보편적 존재이기 때문에 시공(時空)에 국한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통(理通)’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의 ‘기발이승일도설’은 더 나아가 ‘심시기(心是氣)’를 주장하게 되고, 이 설은 그 뒤 주기학파의 송시열(宋時烈)·한원진(韓元震) 등에게 계승되었다.

우리 나라에서의 사칠 논쟁은 이황·기대승·이이의 초기 논쟁에서는 이황의 ‘발(發)’개념의 오해, 이이의 사칠배속의 천착 등으로 개념상의 혼란이 야기되어 논쟁의 실마리가 잘 풀리지 않았다. 더욱이 존재론적 시각(사실의 차원)과 도덕론적 시각(가치의 차원) 상호 간의 입장 이해가 전제되지 않아 논쟁이 언어상의 논쟁에 맴돌았다. 그러나 그 뒤 많은 학자들이 다시 논의함으로써 개념이 다시 분석, 정리되어 이황·이이의 사고 방식이 점차 명료하게 되어 갔다. 물론 이 논쟁의 시원적 원인은 자연법 사상으로서의 주자학 자체 내에 있었다. 즉, 존재론의 차원에서는 이(理)가 무위(無爲)이면서 도덕론에서는 ‘사단은 이의 발현’이라 하였고, 사단은 본성의 발현으로 순선무악(純善無惡)하다고 하면서 사단에도 ‘중절·부중절’ 또 ‘정·부정’이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유학 사상사에서 사단칠정론은 성리학 이론 논쟁의 핵심이지만 이것이 사상 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현실을 보는 두 유형의 사고정형(思考定型)으로서 이황의 이상주의, 이이의 현실주의를 형성하였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서 발췌한 내용)


















금번 동학유적지 탐뱡에 함께 해주신
(재)고봉학술원 강기욱, 김진미 선생님 부부의 거주지 애일당(愛日堂) 방문.
(광주 광역시 광산구 너브실 마을 소재)




마지막 날(24日)
아침 수련 후 '묵방산들국화'에서 금번 전체 일정에 대한 회고의 시간.


































점심 식사 후 근처 해안 산책 중.


































부안(扶安) 백산성(白山城)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전라북도 기념물 제31호. 해발 47.4m의 백산이라 부르는 산 위에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길이 120m, 너비 50-60m의 타원형 평면을 가진 테뫼식(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 토축산성이다.
외곽의 길이는 약 310m로서 이 외곽의 안쪽으로 평탄히 돌아가는 회랑식의 부분은 남쪽에서 너비가 약 9m이고 서북쪽에서는 약 13.5m이다. 동쪽으로는 동진강을 바라보며, 급경사에 암반이 드러나 있다. 동북쪽에 북문터가 있고, 남쪽에도 문터의 흔적이 있다.
정상부는 평탄한 대지로서 계단식의 대지면이 건물지로 여겨지며, 서남쪽으로 이어지는 구릉지역은 선사시대 이래의 유적지이다. 이 지역에서는 적갈색의 무문토기와 원삼국기의 타날문토기편을 비롯하여 삼국시기의 토기편이 채집된다.
특히 이 지역은 백제의 유민들이 부흥운동을 일으켜 일본에 가있던 왕자 부여풍(夫餘豊)을 왕으로 모시고, 일본의 수군을 불러들여 신라와 당의 연합군과 최후의 결전을 하였다는 백강(白江) 혹은 백촌강(白村江) 싸움이 일어난 곳으로 비정되고 있어서 역사지리상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




동학혁명 때 동학군이 부안 및 전주 방면으로 진격하기 위하여 집결하였던 성이기도 하다.
1998년 백산성지는 역사성이 있는 전적지로 인정받아 지방기념물 제31호에서 사적 제409호로 승격,
부안 백산성으로 지정되었다.




백산 봉기
제1차 농민 봉기는 1894년 3월 20일에 무장에서 창의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무장에서 봉기한 4천여 명의 농민군은 고부를 점령하고, 3월 25일 백산으로 이동하여 조직을 정비하였다.
이 때 농민군 병력은 약 8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여기서 격문을 공포하여 백성들에게 함께 일어서라고 촉구하였다.
백산에 모인 농민군은 대부분 흰 옷을 입었고, 죽창으로 무장을 하였다.
그래서 농민군이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이 되었다고 한다.











백산성 아래를 흐르는 동진강.





동학정에서의 심고.




《천도교 수도회 제4차 수련》 '동학혁명유적지탐방'의 끝







천도교 수도회 제4차 수련 참여 회원
지성당 고온자 / 법성당 김재순 / 화성당 김정화 / 경천당 라인경 / 인화당 라정숙 / 성수당 박징재
성인당 백영희 / 정심당 변주원 / 수암 김희수 / 일포 이우원 / 청암 이국진 / 다천 김환기

특별 초청 인사
(재) 고봉학술원 강기욱 / 김진미 선생님 부부


동학농민운동 유적지 탐방 동행 단체
광주 유교대학 / 서울 민족통일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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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천도를 온 몸으로 실천 발현(發現)하고서도
끝내 개벽의 날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선대 동학군들의 눈물이
구월 구절초의 애잔함으로 동학혁명 유적지 곳곳에 별처럼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천도교 수도회 제4차 수련》의 장.
동덕 여러분의 전폭적인 협조하에 3박 4일의 여정을 가히 꿈꾸 듯 엮어 갈 수 있었습니다.
늦은 밤, 탐방 동선을 복기하자니 선열에 대한 죄스러움은 더욱 더 커져만 갑니다.

빠듯한 탐방 일정을 소화하느라 주문 수련 시간이 다소 부족한 아쉬움은 있지만
금번 수련의 주 테마로 삼은 <동학혁명유적지탐방>은 너무도 적절한 선택이었다는 결론입니다.
그 어떤 공부 건 간에 현장 대조는 더 큰 가르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4차 수련의 진행을 위해 일포장님과 정심당님께서 배풀어 주신 크나큰 은덕(恩德)에 감사드리며,
성수당님을 위시한 여성 동덕님들의 정성어린 수덕발현(修德發現)의 기운(氣運)과
청암장님과 수암장님의 성인지덕행(聖人之德行)에도 큰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특별 초청으로 금번 천도교 수도회 4차 수련에 함께 해주신
(재)고봉학술원 강기욱, 김진미 선생님께도 크나큰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수도회 참여자 한 분, 한 분 모두가 저를 비추게 하는 맑은 거울들이십니다.
한울님 스승님 동덕님들의 소중한 가르침이 어둠 속에 절절히 다가오는 밤입니다.

*
*
*

만사지(萬事知) 그리고 또 만사지(萬事知).

- 茶泉 心告 -


至氣今至願爲大 降
지기금지원위대 강

侍 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시 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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