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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상주동학교와 천도교 상주교당에 대하여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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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댓글 0건 조회 2,035회 작성일 14-01-17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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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동학교와 천도교 상주교당에 대하여 下.
尙州東學經典은, 직경 5.3센티 정도의 둥근 모양에 南接道主之章이라고 새겨 사용하였던 金周熙가 세운 동학계파 중에 하나인 尙州東學敎의 經典의 國譯本이다. 김주희는 鄭鑑錄에서 말하는 十勝之地의 하나라고 알려진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에 처음으로 敬天敎를 1904년에 세웠다. 한때 김주희의 號를 따라 靑林敎로 불리기도 하다가 1915년에는 東學敎로 개칭했고 1920년대 초에는 상주 동학교의 경전 40여권을 목판본으로 간행하기도 했다. 김주희는 1860년 10월 3일에 충남 공주군 신상면 달동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조 말에 국정이 혼란으로 인하여 민란과 동학혁명으로 어지러워지자 속리산에 들어가 수도수련에 열중하면서 세상에 대한 심회를 기술했고 이런 글들을 모아 1922년부터 1933년까지 목판본으로 총 40책의 가사집을 경북 상주에서 간행했다. 이 글들은 1970년대의 후손에 의해 재정리되어 상주동학경전으로 정착됐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경상북도와 상주시는, 상주동학교가 보관해온 1,400여점의 東學遺物이 문화재에 준하는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유교문화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새로운 교당과 遺物展示館으로 확장공사를 마쳤다. 이러한 尙州東學敎堂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장인 金文基가 처음으로 尙州東學經典을 譯註하여 2008년 9월 22일에 간행된 것이다. 이 경전의 구성은 東經大全 弓乙經. 通運歷代. 道源經. 道和經. 聖經敎正經. 聖經道正經. 聖經道修經. 道誠經. 祝式으로 되어 있다. 이 중 도성경은 목판본으로, 축식은 목활자본이고 나머지 편의 원전은 모두상주동학교당 소장 경전판본으로 하고 있다. 동경대전은 戊子季春板하고 유사하나 법설의 순서가 다소 다른 점이 있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尙州東學經典 活字로 된 原文 과 尙州東學經典의 影印이 수록되어 있다. 敎主 金 周熙는 1944년 항일에 앞장 서 활동하다 교도들과 함께 구속되었고 이로 인한 옥고로 1944년에 病死하고 副 敎主는 獄死했다. 김주희의 子는 敬天, 號는 三豊, 尊號는 靑林先生이며 부친 金允集(1823-1881)이 수운의 문하에 입도하자 김주희도 입도했었다. 김주희가 자와 호를 敬天과 靑林으로 한 것은 동학과 정감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須從白兎走靑林이란 詩句는 鄭鑑錄의 七言古訣이 原典이 되고, 이를 바탕으로 引用되고 變形되었다. 鄭鑑錄은 朝鮮朝의 민간에 널리 퍼져 있던 代表的인 豫言書로 여러 가지 鑑訣類와 秘訣書의 集大成이라 할 수 있으며 異本이 많다. 형식면에서 豫言說, 讖謠, 易數의 풀이, 風水地理說의 해석 등이 실려 있다. 정감록의 作者로 鄭鑑 또는 李沁으로 알려졌으나 鄭鑑과 李沁의 對話體 形式의 構成에서는 오는 誤解이며 다양한 수십 편의 글들을 한데 모은 傳說的인 人物로 評價하고 있다. 或者는 鄭道傳이 朝鮮王朝의 易姓革命을 合理化하고 民心을 造作하기 위하여 著述하였다는 主張도 하고 있다.
鄭鑑錄의 核心 중의 하나인 鄭道令이란 眞人이 출현하여 이씨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는 예언에 따라 민중들은 현실적인 고난을 이겨내며 새 세상에 대한 갈망이 높아졌다. 조선조 중엽에 이르러 진인인 정도령의 출현이 없자 靑林道士란 새로운 인물이 예언서에 등장하게 되어 정도령의 역할이 靑林道士에 옮겨가고 새로운 세상인 이상향이 靑林의 世上으로 옮겨 갔다. 김주희는 이런 흐름을 재빨리 看破하여 자칭 靑林道士라 하였고 동학에서 벗어나 敬天敎를 설립하여 靑林敎로 발전시키면서 暗黙的으로 靑林敎徒가 되어, 鄭鑑錄에서 말하는 十勝之地의 하나라고 알려진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로 와서 다 같이 재난을 피하자고 했다. 그리고 김주희는 자신의 자와 호를 敬天과 靑林으로 지어 暗示的으로 자신이 정도령의 換身이며, 청림도사로 진인이라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須從白兎走靑林이 의미하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이상향인 청림에서 청림교도가 되어야 재난을 피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弓乙歌는 數 種의 歌辭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용호대사 정북창의 弓乙歌.
2. 김주희의 弓乙歌.
3. 격암유록에서 弓乙에 관련된 여러 가지 詩歌.
4. 한국 가사문학 중의 작자미상의 弓乙歌.
일반적으로 학계에선 용호대사 鄭北窓의 弓乙歌를 원본으로 삼고 다른 노래들은 添削 또는 改作으로 보고 있다. 용호대사 정북창은 명종 때 사람으로 이름이 鄭磏, 1506년에 충남 아산 출신이다. 천문지리와 동물과 귀신의 세계까지를 이해한 奇人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天人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한다. 1549년에 젊은 나이로 죽었다. 金周熙 作인 弓乙歌는 龍潭遺辭之第 三十六卷 標題 弓乙歌로 구분된 것이며, 歌辭 95篇째로 기술된 517句의 장편가사이다. 主題는 修道이며, 궁을과 成道의 관계를 ‘궁궁을을 성도로다’ 라는 반복운율에 맞춰 설명하고 있다. 김주희는 100편의 방대한 동학가사를 지었다. 수운이 지은 용담유사를 龍潭遺辭之第 一卷이라 분리하여 가사 8편과 검결을 실었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의 가사를 龍潭遺辭라고 하고 第 二卷에서 第 三十九卷까지 100편의 가사를 실었다. 상주 동학의 경전은 1920년대 초에 교조 김주희의 주관하에 일차로 경전을 목판 판각하고 裝幀은 漢裝本으로 인쇄를 하여 배포했던 것을 1970년대 초에 복간했다. 格庵遺錄은 格庵 南師古의 비결서로, 이 책속에는 궁을가란 독립적인 글은 없고, 弓乙論, 弓弓歌, 乙乙歌, 弓乙圖歌 등이 있다. 南師古는 용호대사 정북창과 같은 시대인 1509년에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 역학, 풍수, 천문, 卜筮, 相法에 통달했다고 한다. 그의 예언은 적중률이 높아 많은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았고, 晩年에는 觀象監의 天文敎授를 지내다가 1571년에 세상을 떠났다. 끝으로 한국 가사문학 중의 作者未詳의 弓乙歌는 위의 1. 2. 중의 하나일 것으로 推定하고 있다.
弓乙歌란 二五思想에서 陰陽歌가 된다. 弓은 陰이고, 乙은 陽이기 때문이다. 二五란 陰陽五行을 의미한다. 弓乙歌의 내용은 당시의 時代的 狀況을 비관하고 陰陽의 調和가 必然的으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모든 試鍊을 克服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제시하고 있다. 또 無道하고 暴惡한 外國勢力이 우리나라를 侵犯할 것이라 하고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弓乙歌를 至誠으로 부르면 모든 災殃이 사라지고 泰平天下가 될 것이라고 했다.
또 ‘엇나가 따로 노는 마당놀이(上 ,下)’에서/ 포덕 151(2010)년 10월 24일. 에서도 상주 동학교와 같은 문제점에 대하여 구체적인 자료문헌 제시와 상세한 설명을 한 바가 있다. 그리고 이후 ‘天道敎의 神觀定立에 對하여(1-4)’ /포덕 152(201)년 5월 7일. 에서도 상주동학교에 대한 설명을 한 적이 있다. 위에서 기술 발표한 내용에 약간 첨가하여 기술했다.
‘필자가 발표한 ‘東經大全의 板本比較 分析硏究 拔萃文(上, 中, 下)’/포덕 151(2010)년 8월 14일. 에서, 미 발표분의 註. 15.에서 尙州東學經典은, 직경 5.3센티 정도의 둥근 모양에 南接道主之章이라고 새겨 사용하였던 金周熙가 세운 동학계파 중에 하나인 尙州東學敎의 經典의 國譯本이다. 김주희는 鄭鑑錄에서 말하는 十勝之地의 하나라고 알려진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에 1904년에 敬天敎를 처음으로 세웠다. 한때 김주희의 號를 따라 靑林敎로 불리기도 하다가 1915년에는 東學敎로 개칭했고 1920년대 초에는 상주 동학교의 경전 40여권을 목판본으로 간행하기도 했다.
김주희는 1860년 10월 3일에 충남 공주군 신상면 달동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조 말에 국정이 혼란으로 인하여 민란과 동학혁명으로 어지러워지자 속리산에 들어가 수도수련에 열중하면서 세상에 대한 심회를 기술했고 이런 글들을 모아 1922년부터 1933년까지 목판본으로 총 40책의 歌辭集을 경북 상주에서 간행했다. 이 글들은 1970년대의 후손에 의해 재정리되어 상주동학경전으로 정착됐다. 김주희의 子는 敬天, 號는 三豊, 尊號는 靑林先生이며 부친 金允集(1823-1881)이 수운의 문하에 입도하자 김주희도 입도했었다. 김주희가 자와 호를 敬天과 靑林으로 한 것은 동학과 정감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944년 항일에 앞장 서 활동하다 교도들과 함께 구속되었고 이로 인한 옥고로 1944년에 敎主 金 周熙는 病死하고 副 敎主는 獄死했다.’라고 기술했다.
상주시 지방문화재 민속자료에 의하면 동학교당 유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프레임을 독자께서 이해하기 쉽도록 필자 임의로 변경함. / 참고사항; 다움 의 통합검색에서, 상주동학교당이나 상주동학교당 유물을 검색하면 상세한 자료를 만날 수 있습니다.
문화재명 : 동학교당 유물
주 소 :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 730번지
지 정 : 지방문화재 민속자료 제111호(1995.3.31 지정)
상세정보 - 상주동학교당에 보존되어 있는 동학교에 관한 유물로서는, 총 177종 1,084점에 이른다. 동학은 1860년(조선 철종 11년)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로서, 처음엔 서민층에 널리 유포된 단순한 신앙형태이었으나, 나중에는 사회개혁운동의 주체로 변모되어 민족운동의 역사에 큰 획을 긋게 되었다. 2대 교주 최시형을 거쳐 3대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내부의 대립이 심화되어 30여 개의 교파로 나뉘고 각기 독립된 교당을 설립하였다. 1922년 김낙세 부자의 노력으로 설립된 상주동학교당은 대대적인 간행사업을 벌이기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편 끝에 상주, 문경, 안동 등 경북을 중심으로, 충청도 강원도에까지 교세가 이르게 되었다. 이 교당에 소장된 유물은 동학 경전을 비롯한 전적류 131점, 동학경서나 가사 등을 나무에 새긴 판목 792점, 의복류 31점, 교기와 인장 등이 130점 남아 있다. 동학교 내에서 상주동학교당의 지위와 성격을 밝힐 수 있고, 동학 연구에도 기여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상주동학교당 유물에 대하여 한국 민족문화 대 백과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 다음 글의 프레임을 독자께서 이해하기 쉽도록 필자 임의로 변경함.
[간략정보]
한자 尙州東學敎堂遺物
분야 종교·철학/천도교
유형 유물
시대 근대
성격 종교유물|동학 관련 유물
제작시기/일시 1920년~1930년대
수량 1,084점(177종)
소장처 동학교당(경북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
소유자 김정선(개인소장)
관리자 김정선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1호
문화재 지정일 1995년 3월 31일
집필자 김용만
상주 동학교당 유물
[정의] - 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 동학교당(전통건조물 10호)에 소장되어 있는 동학 관련 유물.
[내용]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1호. 지정된 유물은 총 177종 1,084점으로 전적이 100종 131점, 판목 67종 792판, 복식 6종 31점, 유물 4종 130점이며, 제작시기는 대체로 1920년∼1930년대이다.
전적은 ‘동경대전총목록(東經大全總目錄)’ㆍ‘동경대전(東經大全)’ㆍ‘궁을경(弓乙經)’ㆍ‘통운역대(通運歷代)’등 경서, ‘용담유사’ㆍ‘임하유서(林下遺書)’ㆍ‘허황가(虛荒歌)’ 등 동학가사(東學歌辭), 『림하유셔』ㆍ『챵덕가』ㆍ『챵도가』ㆍ『챵화가』ㆍ『인션슈덕가』 등 한글본ㆍ국한문 혼용본, 『경호당(敬浩堂)』ㆍ『동학교적(東學敎籍)』 등 기타 판본이 있다. 판목으로는 동학경서판목ㆍ동학가사판목, 한글본ㆍ국한문 혼용본 및 기타 판목이 있고, 복식으로는 전복(戰服)ㆍ학창의(鶴氅衣)ㆍ받침예복(禮服)ㆍ오색예복(五色禮服)ㆍ오색관(五色冠)ㆍ유건(儒巾)이 있다.
전복은 두루막 위에 입으며, 주로 미성년자가 천제시(天祭時)에 입고, 학창의는 천제시에 일반교인이 입으며, 제사시에는 제관이 입는다. 받침예복은 오색예복에 받쳐 입고 오색관을 쓴다. 오색예복은 교주ㆍ부교주ㆍ성교장(誠敎長)ㆍ경교장(敬敎長)ㆍ신도장(信徒長)이 천제시에 입는다. 복식의 특징은 옆트림이 없고 직선배래이다. 유물로는 교기(敎旗)ㆍ인장(印章)ㆍ민구(民具)ㆍ인쇄용구(印刷用具) 가 있다. 인쇄용구는 목활자본을 인쇄하는데 사용하는 목활자ㆍ목활자 보관함ㆍ소도구ㆍ받침대 등으로 인쇄에 사용되던 도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동학과 관련된 유물과 교당건물이 이처럼 잘 갖추어져 남아 있는 곳은 전국에서 그 예를 찾기 어렵다.
다움에서는 상주동학교당 소개는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 다음 글의 프레임을 독자께서 이해하기 쉽도록 필자 임의로 변경함.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의 평지마을에 있는 동학의 교당이다. 현 소유자의 부친 김주희(1860∼1940)가 1915년에 이곳에 본거를 정하고 민족 고유의 종교인 동학의 포교와 교세확장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1924년에 지었다고 한다. 동·서·남·북재 4동의 건물이 사방에 배치되었고 곳간 채는 왼쪽 뒤편에 있다. 중심 건물인 북채는 성화실, 사랑채인 동재는 접주실, 안 사랑채인 서재는 남녀교도가 각각 반씩 사용하였으며, 행랑채인 남재는 남교도가 사용하였다. 원래는 모든 건물이 초가였으나, 후에 슬레트로 지붕을 고쳤다. 동학의 본부 건물이라는 특수한 예로 주목된다.
공식명칭; 상주동학교당.
한자명칭; 尙州東學敎堂
주소; 경북 상주시 은척면 우기 1리 728
종목; 시도 민속 문화재 120
테마; 유적건조물, 종교신앙, 민족종교, 천도교
또 다움에서는 상주 동학 본부에 대하여 민족문화 대 백과사전의 기술에 따라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 다음 글의 프레임을 독자께서 이해하기 쉽도록 필자 임의로 변경함.
■ 간략정보
한자; 東學本部
분야; 종교·철학/신종교
유형; 단체
시대; 현대/현대
성격; 종교|신종교
설립일시; 1904년
설립자; 김주희(金周熙)
집필자; 탁명환
■ 정의
1904년 김주희(金周熙)가 창시한 종교. 동학계의 신종교이다.
■ 내용
김주희는 충청남도 공주 출생으로 할아버지인 남접도주(南接道主) 김시종(金時宗)의 밑에서 동학을 공부하였다. 김시종은 천도교 제2세 교주인 최시형(崔時亨) 등의 북접이 광제창생의 이념에 지나치게 철저한 것을 보고 수운사상(水雲思想)에 어긋난다고 생각, 최시형의 북접에 대하여 스스로 남접이라 하고 경상북도 안동 지방에서 포교하고 있었다.
김주희는 1904년 할아버지의 뜻을 받아 김낙춘(金洛春) 등과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에서 교당을 세우고 경천교(敬天敎)라 하였으나, 이 교단도 1908년부터 항일운동 조직으로 탈바꿈하고자 하여 김주희는 이에 결별을 선언하고 속리산으로 은둔해버렸다. 경천교는 1912년 까지 존속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1915년 에는 경상북도 상주군 은척면 우기리 자기 집에 동학본부라는 간판을 걸고 다시 포교를 시작하였다.
1922년 5월 에 조선총독부의 공인을 얻어 포교에 주력하여 교당을 신축하고 충청북도, 경상북도, 강원도 지역에 전도사를 파견하여, 1929년 통계에 따르면 신자가 1,500여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게다가 1933년까지 한문경전 10여 종, 한글경전 40책 115종을 목판으로 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학본부는 지나칠 정도로 현실참여를 외면하였음에도 일제의 탄압을 수차례 받은 결과 1943년 교주 이하 많은 신자들이 구속되기도 하였다. 김주희는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 뒤 교세는 급속도로 쇠퇴하게 되었다. 김주희의 아들 김덕룡(金德龍)이 교단을 대표하고 있다가 1986년 에 사망하고 현재는 김덕룡의 아들 김정선(金正善)이 책임을 맡고 있다. 현재 신도수는 안동과 상주 지역에 약 50여 가구가 있다.
1979년 에는 동학본부에서 발행한 서책 40책을 한데 묶어 ≪동학가사≫ Ⅰ, Ⅱ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바가 있고, 또 본부 건물 1곽(전통초가 5동과 상하마석 깃대꽂이)이 국가 전통건조물 제 10호로 지정되어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 동학본부의 교의와 신조는 본래 동학에서 출발하였으므로 천도교와 큰 차이가 없다.
동학의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유·불·선 삼도합일(三道合一)을 주장한 것을 그대로 취하였으며, 덕에 의하여 무한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는 수도법이 강조된다. 경전은 ≪동경대전 東經大全≫을 비롯한 동학경전을 그대로 쓴다.
[참고문헌]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한국종교학회, 1985)
『朝鮮の類似宗敎』(村山智順, 朝鮮總督府, 1934)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김홍철 외,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7)
김문기(金文基)는 국역 상주동학경전을 2008년에 간행하면서 일러두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상주동학교당 소장 경전판본을 대본으로 역주(譯註)하였는데, 동경대전·궁을경·통운역대·도원경·도화경·성경(교정경, 도정경, 도수경)·도성경은 목판본을 대상으로 하였고, 축식은 목활자본을 대상으로 하였다. 변역문은 원의에 충실을 기하여 위하여 가급적 직역(直譯)을 원칙으로 하되 부득이한 경우는 원의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의역(意譯)을 하였다.
번역문 가운데 인명, 지명, 관직명 등의 고유명사 또는 문맥 가운데 뜻을 분명히 할 필요성이 있는 어휘에 한해서는 괄호 안에 한자를 함께 표기하였다. 번역문 가운데 시에 한하여 원문을 번역문 오른쪽에 수록하여 번역의 이해를 돕도록 하였다. 라고 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김상일은 동학학회 월례 발표 자료로 ‘東學歌辭의 主題類型 考’를 2003년 4월 월례 발표회에서 발표하였다. 발표 내용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序論
2. 前‧後期 東學歌辭의 內容과 主題
1) 『龍潭遺詞』의 內容과 主題
2) 『尙州 東學歌辭』의 內容과 主題
3. 東學歌辭의 主題類型
4. 結論
※ 參考文獻으로 구성 되었다. 이 발표 논문은 추가 설명을 상세하게 하여 3년 후인, 2006년 12월에 발행된, 동학학보 제 12호(제10권 2호)에 ‘상주지역 동학교단의 활동과 동학가사’/ PP. 49-212,란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또 김상일은, 2003년 6월에 간행된 동학학보 제5호에 게재된 ‘전-후기 동학가사의 동학사상과 그 변모’ / PP. 177-223.에서 천도교와 상주 동학교의 경전의 한글 가사를 구체적으로 비교 분석하여 설명하고 있다.
위키 백과사전의 조선의 종교 설명 중에 동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철종 때에는 이 천주교에 대립하여 최제우(崔濟遇)가 종래의 천신사상(天神思想)에다가 유(儒)·불(佛)·선(仙) 등의 삼교(三敎)와 풍수사상을 응용하여 동학(東學)을 개창(開倉)한 뒤에 이 역시 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점차 민간에 전파되어 하나의 큰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고종 때에는 동학혁명까지 일으키게 되었다. 뒤에 동학은 천도교(天道敎), 시천교(侍天敎)에서 상제교(上帝敎), 천진교(天眞敎)가 갈렸고, 청림교(靑林敎), 제우교(濟遇敎) 등으로 갈렸으며 이 밖에도 동학 계통의 유사 종교가 속출하여 농촌 사회에 널리 유포되었다.
오지영(吳知泳)은 동학계 교파에 대해서, 1939년에 출간된 ‘동학사(東學史 - 永昌書館. 서울. 1939.)’ 附 동학(東學) 각파(各派) 일별(一瞥) / PP. 237-242.에서는 다음과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각 교파에 대한 설명은 전부 생략함. / 一瞥; 한 번 살펴보다. 한 번 흘낏 봄. 간략하게 살펴 봄. 간락하게 설명해 봄의 뜻.
1. 天道敎 革新派. 1. 天道敎 復舊派. 1. 侍天敎派. 1. 上帝敎派. 1, 天道明理敎派. 1. 靑林敎派. 1. 白白敎派. 1. 敬天敎派. 1. 水雲敎派. 1. 大宗敎派. 1. 元宗敎派. 1. 天오(두려워할 오; 심방(忄)변에 요(夭/예쁠 요 또는 오)를 더 한 글자)敎派. 1. 濟遇敎派. 1. 濟世敎派. 1. 人天敎派. 1. 南辰敎派. 1. 東學敎派. 1. 大同敎派. 1. 天命道派 . 1. 平和敎派. 1. 无窮道派. 1. 无窮大道派. 1. 三聖无極敎派. 1. 天法敎派. 1. 大道敎派. 1. 辛由甲派. 1. 權一淸派. 1. 九月山派. 1. 馬耳山派. 1. 李仁錫派. 로 분류하여 설명하면서 결말에 ‘東學의 派黨은 이 밖에도 얼마든지 많이 있는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외에 근래에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동학계열의 甑山敎는. 브리태니커 사전에 의하면, 1902년 강일순(姜一淳:1871~1909)이 개창한 종교로, 이 종교는 교조의 사후에 많은 분파가 생겨났는데, 일반적으로는 이 분파된 종단들을 통칭하여 창시자의 호를 따서 증산교라고 부른다. 일제 강점기에 흠치교(吽哆敎)라고도 했다. 증산교는 한말 개항기에 나타난 동학·대종교와 함께 이 땅에 새로운 이상세계를 건설한다는 후천개벽을 주장한 대표적인 자생적 종교의 하나이다. 또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문화, 특히 무속(巫俗)과 선도(仙道)를 계승·발전시켜 한국 민중의 개인적인 신앙의식을 민간 중심의 공동체 신앙으로 승화시켰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는 조금 다른 증산교본부 [甑山敎本部]는 증산교 계통의 신종교단체로, 보천교(普天敎) 교도였던 이상호(李祥昊)가 세웠다. 그는 보천교의 핵심간부인 60방주(方主) 중의 한 사람이었으나 보천교의 교주 차경석(車京石)과의 불화로 인해 교단을 탈퇴했다. 그는 증산교의 전통을 확립하고자 증산교의 경전에 해당하는 〈증산천사공사기 甑山天師公事記〉·〈대순전경 大巡典經〉을 간행했으며, 그후로 나머지 다른 증산교단과는 달리 많은 문헌을 발간하여 증산교의 교리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교리와 의식상의 특징은 단군(檀君)·수운(水雲:崔濟愚)·증산(甑山)을 동시에 모시는 삼단신앙체계(三段信仰體系)이다. 즉 홍익인간(弘益人間)·인내천(人乃天)·인존사상(人尊思想)을 각각 재세이화(在世理化)·무극대도(無極大道)·천지공사(天地公事)와 연계시키고 있다. 교단조직은 선거제에 기초한 민주적인 종령제(宗領制)를 체택하고 있으며 교인들은 주로 혈연과 지연에 의해 묶여 있다. 그리고 이들은 증산교의 다른 교단들과 끊임없이 제휴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으며 다른 사회단체나 지방행정기관과도 유대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라고 브리태니커 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증산교본부는 1973년에 간행된 洪 又의 “東學入門” 1980년에 간행된 “東學文明/미 책의 末尾에 ‘法文 玄武經’의 影印本이 수록 게재되어 있다.”과 1983년에 출간된 安耕田의 “이것이 開闢이다 上”과 2000년에 간행된 洪凡草의 증산교종단 가사집 “南朝鮮 뱃노래” 그리고 1993년에 초판이 간행되어 수정 보완된 “甑山道 道典”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고 있다 .도전 첫 페이지 전면에 한글로 된 심고문이 게재되어 있다. 洪凡草의 본명은 性烈이며, 증산종단연합회 회장을 지낸 인물로, 1982년에 “증산교 개설”을 출간하고. 1988년에는 “ 범증산교사”를 간행하였고 1988년 동년에 월간「천지공사」를 발행하였다.
洪凡草의 증산교종단 가사집 “南朝鮮 뱃노래” 는 김지하 시인을 감동시켜 1985년에 간행된 金芝河의 이야기 모음인 “남녘땅뱃노래”의 제 3부 남녘땅뱃노래/姜甑山의 남 사상 음미. PP.251-270. 란 副題의 글에서 “南朝鮮 뱃노래”를 우리나라 전통사상의 하나라 할 수 있는 江南思想의 한 측면에서 해석하고 있다.
註 김지하(金芝河-1941. 2. 4 - 생존. 전남 목포 출생) - 1970년대 반체제문인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본명은 영일(英一), '지하'는 필명이다.
원주중학교와 중동고등학교를 거쳐 196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다닐 때 4·19혁명, 6·3사태 등을 겪으면서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했고, 졸업 후에도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의 선두에서 활동했다. 그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1970년대의 문학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정치활동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1964년에는 한일회담을 반대한 학생시위에 적극 가담했다가 체포·투옥되어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으며, 1970년 담시(譚詩) 〈오적 五賊〉을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투옥되었다(→ 색인 : 오적필화사건). 1974년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체포되어 긴급조치 4호 위반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다음해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나,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가 석방된 다음 달에 다시 체포되었다. 전 세계의 주목 속에 오랜 재판과정을 거쳐, 앞선 무기징역에 다시 징역 7년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6년간의 옥살이 끝에 정권이 바뀌자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 뒤로는 정치적 발언을 삼가면서, 그리스도교사상·미륵사상·화엄사상·선불교·기(氣)철학 등의 여러 사상들을 재해석하여 자신의 독특한 생명사상을 펼치거나, 그에 따른 생명운동을 벌이는 데 힘쓰고 있다. 시에서도 정치적 경향의 시보다는 주로 생명사상을 바탕으로 한 담시와 서정시를 쓰고 있다./ 브리태니커 사전 참조.
또 동학계열에 하나로 알려진 大巡眞理會는 1974년에 “典經”이란 경전을 간행하여 크게 발전하고 있다. 브리태니커 사전에 의하면, ‘증산교(甑山敎)계통의 신종교로, 1969년 증산교의 일파인 태극도(太極道)에서 분립했다. 교리는 음양합덕(陰陽合德)·신인조화(神人調和)·해원상생(解寃相生)·도통진경(道通眞境)의 대순진리를 종지(宗旨)로 한다. 성(誠)·경(敬)·신(信)의 삼법언(三法言)을 수도의 요체로 삼고, 안심(安心)과 안신(安身)의 이율령(二律領)으로 훈전(訓典)을 삼아 윤리도덕을 숭상하고 무자기(無自欺)를 근본으로 하여 인간개조와 정신개벽으로 포덕천하(布德天下)·구제창생(救濟蒼生)·보국안민(報國安民)·지상천국(地上天國)을 건설하는 것이다. 주요행사는 증산교의 창시자인 강증산(姜甑山) 상제(上帝)와 태극도의 창시자인 조정산(趙鼎山) 도주(道主)의 강세일(降世日)과 화천일(化天日), 그리고 영대봉안일(靈臺奉安日)이 있다. 교단조직은 최고직책인 도전(都典) 산하에 협의기구인 중앙종의회가 있고, 그 아래에 육영사업부·수강원(受講院)·감사원·종무원·정원(正院)·포정원(布政院)이 있다. 특히 종무원 산하에는 교리연구를 전문적으로 하는 대순종교문화연구소가 있다. 종단 계통의 교육기관으로 대진고등학교와 대진여자고등학교가 있고, 1992년 대진대학을 설립했다.
경전은 다른 증산 교단처럼 대순전경(大巡典經)을 사용하나 그것의 축약판인 전경(典經)을 많이 사용하고, 정기간행물로는 계간인 대순회보(大巡會報)와 생애와 사상이 있다. 전국에 소재한 교당은 약 140개이며, 교직자는 약 1만 3,000명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는 다른 종단이지만 동학계 방계(傍系) 종단으로 알려진 청림교(靑林敎)에 대해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동학 계통의 신종교로, 창시자는 동학교도였던 남정(南正)이다. 교단 명칭은 그의 호(號)인 '청림'에서 유래했다. 그는 1894년 동학혁명이 끝난 후 지하로 들어가 포교활동에 종사했다. 그러나 1904년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후 1920년 김상설· 이옥정 등이 서울을 거점으로 청림교 간판을 내세우면서 청림교를 합법화시켰다. 그들은 한반도를 넘어 만주의 지린 성[吉林省], 북간도지방까지 교세를 확장하여, 지부(支部) 42개, 전교실(傳敎室) 50개를 확보했으며, 당시 교도의 수는 30만 명을 헤아렸다. 그러나 2대 교주인 태두섭 부자(父子)와 간부들이 불온사상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일제 총독부에 의해 검거되어 교세는 급격히 하락했다. 그래서 1933년에는 교인 수가 600명 정도로 줄었고, 그후 교단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이들의 교리는 최제우의 가르침을 계승한 천도교(天道敎)나 시천교(侍天敎)와 거의 차이점이 없다. 한편 최제우 당시 이백초(李白初)라는 사람이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어 청림도사(靑林道士)라고 칭하면서 청림교가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라고 했고, /집필자; 탁명환. 민족문화 대 백과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자; 靑林敎
분야; 종교·철학/신종교
유형; 단체
시대; 근대
성격; 종교
해체일시 1933년
설립자; 남정
[정의] - 동학혁명 후 남정(南正)이 창시한 종교.
[내용] - 남정은 동학혁명 이후 포교에 종사하다가 1904년에 후계자 없이 죽었으나 1920년 김상설(金相卨)과 이옥정(李玉汀) 등이 서울에서 소멸되어가는 청림교의 간판을 다시 달고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청림이라는 명칭은 남정의 호가 청림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교세가 늘어 한때는 만주의 길림과 북간도 방면까지 뻗어나갔고, 42개의 지부와 50개소의 포교소에 신도가 30여만 명이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2세 교주 태두섭(太斗燮)과 많은 간부들이 항일투쟁의 죄명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된 뒤 교세가 약화되다가 완전히 소멸되었다. 신앙의 대상이나 사상은 천도교와 동일하나, 최수운(崔水雲)은 5만년 후천개벽의 창세주이며, 백성을 제도하고 신성한 대덕을 이루어 무극대도(無極大道)를 펴자는 것이 이 교의 요지였다. 특히, 이 교는 자기들이 최수운의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미래의 중생들을 선도하기 위하여 미신을 타파하고 바르게 깨달아, 새로운 지식을 발휘하여 도의 원리를 크게 깨달아 지상극락을 이루어가자고 가르쳤다. 신도들에게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라는 주문을 주로 외우게 하는 수련을 시켰다. 초하루·보름의 가정치성과 연 세 차례의 전체치성이 있었다.
주(註); 위에서서 말하고 있는 청림교는 金周熙가 敬天敎를 설립하여 靑林敎로 발전시킨 청림교와는 전혀 다른 교단이다.-필자의 견해.
/ 상주동학교와 천도교 상주교당에 대하여 下. 끝(大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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