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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기성세대가 정말 저주받아야 할 세대인가(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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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댓글 0건 조회 1,601회 작성일 12-11-27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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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세대가 정말 저주받아야 할 세대인가(12-3)
/ 버림받고 있는 부모세대들이 울부짖는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유교(儒敎)중심 정책(政策)을 써서 고려(高麗)의 사원(祠院)을 대신하여 서재(書齋), 서당(書堂), 정사(精舍), 선현사(先賢祠), 향현사(鄕賢祠) 등을 장려(奬勵)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서원은 재와 사의 두 기능(機能)을 합한 것이 못되었으니 1542
년(중종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순흥에 고려의 학자(學者)인 안향(安珦)을 모시는 사당(祠堂)을 짓고 이듬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한 것이 최초(最初)이다. 그 후 전국 각지에 많은 서원이 생겼으며 1550년(명종5)에는 퇴계 이황(李滉)이 건의(建議)하여 백운동이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賜額)을 받았고 책(冊)과 노비(奴婢) 그리고 전결(田結)을 주어서 장려(奬勵)하였으므로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된 것이다. 이를 시초(始初)로 때마침 황폐(荒廢)되어가던 향교(鄕校)에 대신하여 국가의 보조(補助)를 받는 서원이 각처에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명종(明宗) 이전에는 29개, 선조(宣祖) 때는 124개, 숙종(肅宗)때는 한 도(道)에 무려 80∼90개로 서원이 늘어났다.
2). 서당의 구성과 교과내용.
서당은 훈장과 학생으로 구성되었으며, 규모가 큰 경우에는 학력이 우수하고 연령이 높은 학생을 접장(接長)으로 세우기도 했다. 학생은 8~15세의 연령에 있는 양반과 평민층의 아동들이었다. 학과 내용은 강독(講讀), 제술(製述; 시나 글을 지음), 습자(習字)등 세 가지로 구성되며, 교과내용은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 (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등이 기본이며 그 외에 사략(史略), 통감(通鑑), 소학(小學), 사서(四書), 삼경(三經), 사기(史記), 당송문(唐宋文), 당률(唐律), 오경통감(五經通鑑),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을 배웠다. 서당에 따라서 춘추(春秋), 예기(禮記), 근사록(近思錄)을 배워 모든 서당이 다 같은 것은 아니었다. 서당에서 사용된 교재는 서당의 형편과 각 서당 훈장의 취향과 아동의 능력 정도에 따라 천자문을 배우는 초급단계에서 경서류(經書類)를 배우는 상급단계까지 다양하였다.
서당은 비형식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나, 그 시대의 평민교육, 보통교육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서당에서는 학생의 능력에 맞는 수준에서 학습량을 결정하였는데, 당일의 학습량에 대해서는 완전히 암송하고 자의, 문의도 막힘이 없이 완전하게 알도록 하였다. 매일매일 학습한 내용을 다음날 평가한 후에 다음 진도를 결정했다. 이러한 교육 방법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학습량을 적게 잡아 반복, 연습하여 학습내용을 익혔으며, 둘째로, 석음법(釋音法)으로 한문을 배우면서 읽기와 쓰기가 상호 유기적으로 학습되는 의미파악의 직접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학습 분위기는 매우 엄하게 통제하면서도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학생이나 의문을 갖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자유로운 질의응답을 권고하였다.
강독(講讀)은 처음에는 초학서(初學書)를 놓고 한 자씩 가르치고, 음독(音讀)이 가능하면 구독(句讀)과 문리(文理)를 가르치고 그 다음에 대의(大義)를 가르쳐 나갔다(반복 암송이 강독의 유일한 방법). 교과의 진도는 훈장이 강(講)을 할 때 합격해야만 그 다음의 내용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강(講)이란 학습평가를 일컫는 것으로, 전일(前日)에 배운 것을 훈장 앞에서 책을 덮고 암송하며, 자의(字意)나 문의(文義)에 관한 훈장의 질문에 완전히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강의 대상은 방문강독(博文講讀), 암송(暗誦), 문장해석(文章解釋)이며, 강의 종류로는 전일(前日)에 배운 것 을 평가하는 지강(指講)과 책 한 권을 다 마치면 실시하는 책세식(冊洗式)과 서당의 전체 행사로서 실시하는 장원례(壯元禮)가 있었다. 책세식은 한 권의 책을 다 배우고 나서 학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잔치를 벌여 훈장에 대한 사은을 표하고 자축(自祝)의 의미도 포함되어 모든 학생과 더불어 회식을 하고 그 다음 단계의 책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급식(進級式)이었다. 장원례는 작시(作詩)까지도 포함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서당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매월 2-3회 강(講)하여 석차를 매겨 수석을 차지한 학생의 부모가 잔치를 베풀어 훈장에게 사은의 뜻을 표한다. 평가를 위하여 10일, 15일 등 지정된 날짜에 강을 실시하여 그 동안에 학습된 내용을 중간 종합평가하기도 하였다. 평가의 내용은 강독, 암송, 자의, 문의 등이었다, 평점의 등급은 순 대통(純/大通), 통(通), 낙 통(略/略通), 조 통(粗/粗通), 불통(不通)의 5단계로 하였다. ‘조(粗)’이상이 합격이었으며 우수자에게는 부상을 주어 격려하였고, ‘불(不)’은 불합격으로 학습이 완전하게 될 때까지 반복 학습을 시켰다.
제술로는 일반적으로 5언 절구(五言絶句)·7언 절구(七言絶句), 4율(四律), 고풍(古風), 18구시(十八句詩), 작문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서당과 훈장의 품위에 따라 각종 문제를 연습시키기도 했다. 벽촌의 작은 서당에서는 전혀 제술이 없는 곳도 많았다. 습자(習字)는 1점 1획의 연습으로 시작하여 숙달되면 글자의 구성으로 나아가고 이것이 숙달되면 훈장이 글자를 종이의 한쪽에 써 놓으면 그것을 체본(體本)으로 하여 연습하며 별도의 교과서는 없었다. 종이가 귀하여 연습지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판(紛板)과 사판(砂板)이 습자지 대신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습자는 서예(書藝)의 숙달에 한정한 것이 아니고 문자의 학습과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갖고 실시된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습자체로는 해서(楷書)를 많이 연습시켜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문체를 익히게 하였다.
서당은 설립 주체에 따라 훈장이 스스로 서당을 세워 아동들을 모아 가르치는 훈장 자영(自營)서당,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집에서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서당을 세우고 훈장을 고용하는 유지독영서당, 몇 명이 함께 운영비를 부담하여 훈장을 초빙하고 그들의 자제들만 가르치는 유지조합서당, 한 마을 전체 구성원이 주체가 되어 훈장을 두고 마을 아동들을 가르치는 촌 조합서당으로 그 유형을 나누기도 한다. 서당은 선현들에 대한 향사(享祀) 기능이 없기 때문에 사묘(祀廟)가 전혀 문제되지 않으며, 서당이 운영되는 지역적 범위가 군현 아래의 면이나 동리를 단위로 하며, 교육내용이 과거나 도학적 학문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향교나 서원과는 전혀 다른 교육체계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17세기부터 이러한 서당이 널리 설립되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부터 농민과 그 처지가 비슷한 하층양반들이 존재하기 시작하고, 또 상층농민 등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평민층의 교육요구가 높아지면서 조선왕조의 체제적 교육으로부터 벗어나 광범위한 교육인구를 대상으로 하며, 교육내용에서는 그 정도가 낮은 교육이 필요하게 된 사정과 연관이 있다. 그 후 18~19세기에 동족부락이 형성되고 이것이 서당설립의 주도세력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서당이 그들 가문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이전과는 달리 서당도 향사기능을 수행하는 등 보수화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사회변화와 함께 서당교육은 전체적으로 보아 체제교육의 틀 내에서나마 새로운 교육관에 입각한 교육을 산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점진적인 발전을 하고 있었다. 일제에 병합되면서 서당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했다. 당시 전국의 서당은 1만 6천 백 40개로 거의 모든 마을에 있었는데, 일제 침략 이후 일부에서는 종래의 초등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에 더하여 민족교육 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일제는 1918년에 서당규칙을 제정하여 서당이 일제의 동화교육(同化敎育; 內鮮一體의 식민정책을 바탕으로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는 교육)을 담당하도록 하는 한편 민족교육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이후 서당은 근대적 학교로 일부 개편된 경우도 있으나 그 입지가 점차 축소·쇠퇴하여 8·15해방 무렵에는 병합 당시의 수에 비해 1/3 수준으로 격감(激減)했다. 해방 후 새 정부의 교육법에 따라 서당은 그 기능을 보통학교에 물려주고 점차 소멸했다.
단원의 풍속도첩에 그려진 서당(書堂)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서 계속된 비형식적(非形式的)인 사설(私設) 교육 기관이다. 설립에 있어서 인가(認可)를 위한 기본 재산이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뜻있는 자는 자유로이 설립·폐지할 수 있었다. 서당은 사학(四學)과 향교에 입학을 위한 준비 및 널리 서민 대중의 자제들을 위한 교육 기관이 되어 한때 극히 성행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널리 퍼졌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점차 그 내용이나 질이 저하됨에 따라 궁유(窮儒)·한사(寒士)의 걸식처(乞食處)로 변하여 자연히 쇠퇴하게 되었다. 서당에서 수학한 학도는 7세부터 16세의 아동들이 중심이었으며, 20세 내지 25세 이상의 성인이 있는 경우도 많았다. 서당의 교육은 한 글방에서 복수식 교육을 실시하였으므로 그 교육수준을 초등·중등 교육 중의 어느 편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다.
3). 서당의 설립과 종류와 조직 그리고 교수방법.
서당의 설립과 경로로 보아 서당의 종류는 대략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훈장 자영(訓長自營)의 서당 - 여러 형태의 서당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였던 것으로 지방의 유지(有志)나 유학자가 훈장(訓長)이 되어 자기 생계의 수단으로 직업적으로 경영하거나, 아니면 교학일체(敎學一體)의 교육적 취미로 운영하는 서당이다.
2. 유지 독영(有志獨營)의 서당 - 가세(家勢)가 넉넉한 사람 즉 그 마을에서 경제 형편이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자기 자제를 교육시키기 위해 훈장을 초빙하고 서당운영의 모든 경비를 부담하여 친척의 자제나 이웃집 자제들 도 무료로 공부시키는 서당이다.
3.유지 조합(有志組合)의 서당 - 그 마을의 유지 몇 사람이 비용을 각기 분담하여 서당조합을 만들어 훈장을 초빙하여 자기들의 자제들 을 공부시키는 서당이다.
4. 촌락공영(村落共營) 서당(村 組合서당)- 촌락 단위로 조합을 만들어 마을 전체가 경비를 공동으로 분담하여 훈장을 초빙하고 그들의 자제를 공부시키는 서당이다.
5. 同族組合書堂 - 같은 종친끼리 조합을 구성하여 경비를 공동으로 부담하면서 자신들의 가문(家門)의 자제(子弟)들을 공부시키는 서당이다.
6. 官立書堂 - 지방관청의 소재지에 지방 행정관의 관권(官權)으로 설립하고 운영하던 서당을 말한다.
서당은 초등교육 기관이고 유학이념에 따른 교육에 한정되었으나, 전국 방방곡곡에 설립되어 있었고 지방의 유일한 교육 기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 대중의 문자 교육과 민풍과 도덕규범을 확립하는 교화 기능도 발휘하였던 점을 감안할 때, 다소 비판적인 면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서당이 국민 대중의 교화와 향풍의 정립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서당의 조직은 훈장·접장(接長)·학도 등으로 되어 있었다. 훈장은 서당 책임교사이다. 그의 학식(學識)의 기준은 일정하지 않았으며, 경사(經史), 백가(百家)를 강독할 수 있는 자는 드물었고, 국문이나 주석을 참고하여 경서(經書)를 해석하는 자가 많았다. 벽촌의 경우에는 한자의 활용조차 잘 할 줄 모르는 자도 있었다. 또한 제술(製述)로는 표(表)·책(策)·기(記)·명(銘)의 글을 짓고, 시(詩)·율(律)의 참뜻에 통달한 자가 드문 실정이고, 4율(四律)·18구시(十八句詩)를 읊는 것이 고작이었다. 궁촌(窮村)의 훈장은 제술을 모르는 자가 많았다.
교수방법은 천자문, 동몽선습 등을 교재로 한 자 한 자씩 가르쳤다. 다음은 단자(單子)를 붙여 음독(音讀)하는 것을 가르치고, 다음에 구두(句讀)의 문리(文理)를 가르치고, 또 그 다음에 일 장(一章)의 대의(大義)를 가르쳐서 마지막에는 학습자 스스로 풀이하여 읽도록 하였다. 강독(講讀)은 개인의 실력 정도에 맞게 범위를 정하여 놓고 종일 숙독(熟讀)시켰으며, 그 독수(讀數)를 세웠다. 숙독한 것은 이튿날 암송시켜 통한 후에 다음 것을 배우게 했으며, 만일 암송을 못하면 암송할 수 있을 때까지 다시 숙독시켰다. 그러므로 개인의 지능에 따라 진도의 정도가 달랐다. 또 밤글(夜讀)을 장려하였으며, 흔히 열두시가 넘도록 계속 숙독케 했다. 또한 학과와 계절을 조화시켜 학습시켰다. 여름에는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며 흥취(興趣)를 돋우는 시(詩)와 율(律)을 읽고 짓는 것으로 일과(日課)을 삼게 했다. 봄·가을에는 사기(史記)·고문(古文)을 읽히고, 겨울에는 경서(經書)를 읽게 하였다. 봄·가을에는 야독을 중단하고 그 대신 4율을 짓게 하였으며, 낮에는 독서 대신 습자를 연습시켰다. 또한 놀이를 이용하여 지식을 얻게 하였다. 고인(古人)의 시를 기억시키는 '초·중·종 놀이', 8도(八道)의 군 이름을 기억시키는 '고을 모둠놀이' 등을 이용하였다.
접장(接長)이란 단체 및 집단의 우두머리라는 뜻인데, 접주라고도 불렀다. 서당이 큰 경우 훈장 혼자서 많은 생도를 지도하기 곤란하므로 생도 가운데서 연령이 높고 학력이 우수한 자로 훈장을 돕게 했는데, 이를 '접장'이라 했다. 접장은 직접 훈장에게 지도를 받는 한편 자기 아래에 있는 생도를 가르치기도 했다. 학행(學行)이 뛰어난 훈장 밑에 훌륭한 접장이 나타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접장은 직접 생도들과 친근히 접촉하게 되므로 서당의 풍기에 미치는 영향은 훈장보다 큰 경우가 많았다.
서당은 비록 사설(私設)이었으나 지방 문화의 창달(暢達)과 국민 교육에 큰 영향을 주었다. 효종 10년(1659) 성균 제주(祭酒) 송준길(宋浚吉)이 서당교육의 중요성과 의의를 살피고 다음 같은 규정을 지었다. 즉, 훈장은 각 고을에 고르게 두되 대학장의(大學掌儀)의 예(例)에 의할 것이며, 수령(守令)은 때때로 친히 이들을 돌보고, 학도들을 시험해 보며, 감사(監司)와 도사(都寺)·교양관(敎養官)도 또한 수시로 강을 받고 제술을 시켜 볼 것과, 만일 실적을 올린 자가 있을 때는 대전(大典)에 의하여 사장(師長)에게는 세금을 면제하고, 학도에게는 상을 주며, 그 중 가장 뛰어난 자는 계문(啓聞)하여 사장에게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이나 다른 관직을 주어 권장할 것 등이다. 이로써 보면 서당 교육의 진흥을 꾀하고자 노력을 했으나, 관존민비사상(官尊民卑思想)으로 말미암아 서민 교육이 경시되어 그것의 장려책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조선 후기에 와서는 쇠퇴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서당교육의 특징을 요약하면, 개별교수법, 주입식, 암기식, 개인에 따라 진도가 달랐다. 태만한 학생은 초달(회초리)로 징계, 성적과 품행이 양호한 학생은 표창하고 상품을 주었다. 학업지도 생활지도 담당, 면학분위기 유지에 큰 역할 이는 학생상호 교수법 등은 영국의 Lancaster 조교제도와 유사하다
조선후기의 서당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점점 발전하여 학생 수와 기관의 생명력이 가장 많고 긴 교육기관이었다. 전적으로 사설 교육기관이며, 그 설립과 폐지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으므로 뜻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서당을 설립하여 경영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 규모와 수준과 성격도 매우 다양했다. 서당은 평민에게도 입학을 허용하였으며, 학문과 생활윤리 교육이 주목적이었다. 조선시대 민중의 지적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에서 서당은 교육사적으로나 민족사적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2. 향교(鄕校)의 교육목적과 특징.
서울의 성균관의 축소형으로 향교를 세워 지방 공립학교의 역할을 하도록 하여 성현에 대한 제사, 지방유생의 교화, 관리진출의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교육과정은 소학, 사서삼경이 중심내용으로, 대부분 과거에 필요한 유교의 경서. 농업(農業)과 잠업(蠶業)에 대한 서적이 사용된 점으로 약간의 실업교육을 병행(竝行)하였다. 는 것이 특징이다.
교관(敎官; 가르치는 교사)은 국가에서 파견하는 교수관(敎授官)과 훈도관(訓導官)이며, 교관이 부족할 때에는 생원(生員), 진사(進士)의 자격(資格)을 가진 교도(敎導). 학장(學長)은 정식관리가 아닌 임시직이었다. 교생(敎生; 배우는 학생)에게는 과거응시 자격과 생원, 진사의 초시 면제, 부역 군역 면제의 자격을 부여했다.
조선후기의 향교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가의 보조가 중단되고 흉년까지 들면서, 향교의 운영에 큰 지장이 생겼다. 결국 향교는 공교육을 담당하는 교육 기관의 기능을 잃고 점차 돈 있는 지역 유지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명분의 장소로 전락했다. 그러나 선비들의 활동과 특권을 보장해 주는 중요한 향촌기구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3. 서원(書院)의 교육목적과 특징.
서원은 조선시대의 중등사학(사립학교)의 역할을 해온 교육기관으로, 설립의 배경은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의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해 세운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에서 비롯(시작)되었다. 교육목적은 선현(先賢)에 대한 제사(祭祀)와 유학교육(先賢尊崇과 後進奬學), 과거제도 준비 등이 교육내용의 중심이었다. 서원의 순기능(順機能)도 있엇지만 폐단(弊端/逆機能)도 있었다. 서원의 폐해는 ‘서원(書院)의 장(場)’이 되어 군역(軍役) 회피(回避)의 장이었으며, 점차 놀고 마시는 유식장화(遊食場化)가 되어 우민(愚民)을 착취(搾取)하고, 문벌(門閥)의 대립과 朋黨의 溫床이 되었다는 점이다.
1). 서원의 특징
첫째. 한적하고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위치하여 학문과 수양에 적합한 환경이다.
둘째. 관학(官學)에 비해 까다로운 학령(學令)의 규제를 덜 받고 자유로운 가운데 학문과 수양 활동을 할 수 있는 장점이었다.
셋째.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文廟)가 공자 이래 역대 유학의 성현들을 모두 제향(祭香)하는데 비해, 서원은 한 사람의 이름난 선현에 대해 제향(祭享)하였다.
넷째. 향교의 교육적 기능이 쇠퇴하면서 서원이 이를 대신하여 지방의 문화와 교육을 진흥시키는데 기여하였다.
2).서원의 폐단(폐해)
첫째, 지나치게 많은 서원들이 설립되어 향교의 쇠퇴를 가져온 원인이 되었다.
둘째, 학문 장려를 위해 국가가 제공한 각종 특권을 악용하여 양반이 서원의 장이 되어, 군역과 부역을 회피하는 도피처가 되었다..
셋째, 적당한 스승이 없어 잡담이나 즐기며 놀고먹는 자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넷째, 민중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착취하고 횡포를 부렸다.
다섯째, 중앙에 정쟁이 생기면 서원이 이에 가담하여 문벌의 대립과 붕당의 온상이 되었다.
서원은 조선 후기로 접어들어서면서 엄청나게 첩설(疊設)되고 남설(濫設)되었으며, 서원과 사우(祠宇)는 그 성격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서원은 점점 서원 성립 당시의 본래 정신을 벗어나 붕당(朋黨)으로 인한 당론으로 정권을 견제하며, 면세(免稅) · 면역(免役)의 특권을 누려 국가재정과 병력을 약화시켰다. 결국 이러한 정치·사회적인 폐단을 낳게 되었으며, 조선 말기 고종8년(1871)에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모두 폐쇄해 버리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는 과거 천여 년 동안, 대표적인 교육기관이었던 서당, 향교, 서원 이외에도 경연(經筵),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종학(宗學) 등 임금과 세자 및 종친을 교육하기 위한 기관도 있었다. 또한 크게 중시되지는 않았으나, 역학(譯學), 율학(律學), 의학(醫學), 천문학(天文學), 지리학(地理學), 명과학(命課學), 산학(算學), 화학(畵學), 도학(道學), 악학(樂學), 자학(字學), 무학(武學) 등과 같은 특수한 분야들을 가르치는 잡학(雜學) 교육기관도 존재하였다.
나. 천자문(千字文), 격몽요결(擊蒙要訣), 동몽선습(童蒙先習)의 교육내용
1). 천자문(千字文)
천자문(千字文)은 한문(漢文)을 처음 배우는 사람을 위해 교과서로 쓰이던 책으로 동양학적 사유를 배우게 된 시초가 된다. 천자문의 구성은 1구 4자의 사언고시(四言古詩)로 250구, 모두 합해 1,000자로 된 고시(古詩)이다. 1,000자가 각각 다른 글자로 되어 있다. 천자문은 동양학의 근간이 되는 한자의 기본이 되는 글자들로 구성되어 한자를 공부하는 사람이나 동양의 사상이 담긴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입문서의 역할을 한 책이다. 이 천자문에는 논어, 주역, 맹자, 춘추좌씨전을 비롯하여 장자 등 동양고전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은 사언절구로 구성되어 있어 한자를 배우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동양사상의 기본은 물론 인문학의 바탕을 익히기에도 좋은 교재이다.
중국 남조(南朝) 양(梁)나라(502~549)의 주흥사(周興嗣)가 양(梁) 무제(武帝)의 명을 받고 문장을 만들고, 동진(東晉) 왕희지(王羲之)의 필적 속에서 해당되는 글자를 모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더 오래전에 위(魏)나라 종요(鍾繇)의 필적을 모은 것이라고도 하며, 종요가 손수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전설에는 주흥사가 무제의 명에 따라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야 했으나 마지막 4자를 짓지 못하여 고심하고 있는데, 홀연히 귀신이 나타나서 어조사 언재호야의 마무리를 알려주었으며, 완성한 후에 보니 머리털이 하얗게 세었다고 하여 "백수문(白首文)"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해서 '언재호야(焉哉乎也)'의 어조사로 끝나는데, 자연 현상부터 인륜 도덕에 이르는 넓은 범위의 글귀를 수록하여 한문의 입문서로 널리 쓰였다. 당대(唐代) 이후 빠른 속도로 보급되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씌어졌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왕희지의 7대손인 왕지영(王智永)이 만든 진초 천자본(眞草千字本)으로, 1109년(大觀 3)에 새긴 석각(石刻)이 남아 있다. 둔황[敦煌]에서 발견된 문서 속에 이것을 필사한 것이 많이 있다. 송나라부터는 완전히 정착되어 《속(續)천자문》을 만들기도 하고 《서고천자문(敍古千字文)》과 같이 전혀 다른 글자를 이용한 새로운 천자문이 생기기도 했으며, 천자문의 순서를 이용해 문서 번호를 붙이는 풍습도 생겼다. 천자문이 한국에 전래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예로부터 한자를 배우는 입문서로 널리 사용되어왔다.
일설에는 일본의 사서 《일본서기》에는 285년 백제의 왕인(王仁)이 《논어》 10권과 함께 《천자문》 1권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백제에는 이보다 훨씬 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지만, 이 시기는 천자문의 성립 이전이므로 단순한 전설이라는 것, 일부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것, 혹은 또 다른 천자문이라고 하는 것 등의 논란이 있다.
한편, 신라에는 법흥왕 8년(521년)에 중국 남조 양의 승려 원표가 사신으로 오면서 많은 불경과 《천자문》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천자문은 한문의 입문서로써 줄곧 중용되어 여러 가지 판본이 존재했고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한자마다 그 새김과 소리를 넣어 석음(釋音)을 붙여 간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 선조 8년(1575년)에 광주에서 간행된 광주판 천자문이며, 현재 일본 동경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것은 조선 선조 16년(1583년) 어명에 의해 명필 한호가 쓴 《석봉천자문(石峯千字文)》으로 여러차례 중간되어 왔는데, 현존하는 여러 판본중에서 경북 영주의 박찬성(朴贊成) 소장본과 일본 나이카쿠 문고(內閣文庫) 소장본이 원간본 혹은 이것에 가까운 판본으로 추정된다.
천자문은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당시의 대학자인 주흥사에게 명하여 왕자들을 교육시킬 목적으로 만든 인문학의 기초교양서이자 사서삼경으로 들어가는 입문서입니다. 어찌 그런가하면 논어에서는 인仁(사랑)을 맹자에서는 의義(분별)를 중용에서는 인과 의에 대한 진리와 기준을 대학에서는 수신修身을 구체적으로 말하는데 이 천자문 안에 이에 대한 기초적인 내용들이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시경과 서경에 나오는 내용들도 들어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의 장점으로는 ‘한자의 본뜻 풀이’로 한자에 담긴 ,1900년 전 중국 자전인 설문, 이아, 집운, 광운, 고금주 등 기타 자전 등에 의거해서 그 뜻을 설명하고 있다. 알지 못했던 한자에 담긴 뜻의 깊은 의미를 알기에 충분한 역할을 하며 읽는 재미가 좋다. 쓰임에 따라 달라지는 한자의 뜻을 원래 그 자가 담고 있는 뜻을 알아가는 재미는 곧 현대의 눈으로 한자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좋은 내용이 많이 들어있는 훌륭한 책을 학동들이 읽었다고 가벼이 생각하는데 학동들은 천자문을 읽고 난 후 글공부를 그만 둔 것이 아니라 바로 동몽선습과 격몽요결을 읽으며 사람으로서의 도리와 자세에 대하여 거듭 새겼고 사서로 들어가 구체적인 내용을 공부하였기에 결국은 천자문이 사서삼경의 입문서가 된 것이며 그 내용을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이해를 다 할 수 있었기에 공부의 기초가 된 것인데 현대에 들어서는 사서삼경을 공부하지 않은 일반 사람들에게 그 내용들은 전혀 인용하지 않고 4언1구씩 독립시켜 그냥 그대로 단편적으로 풀이하며 무턱대고 외우게만 하였기에 천자문의 내용이나 가치를 제대로 몰라 읽으려는 사람조차 드물게 되었으며 ‘하늘 천 따지 하는 식으로 외운다.’는 속담까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천자문은 주흥사뿐만 아니라 중국 위나라 종요(鍾繇)도 천자문을 남겼다. 주흥사의 책은 “天地玄黃”으로 시작하나, 종요의 책은 “二儀日月”로 시작한다. / 위키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관련 자료를 종합 요약 정리함.
2). 격몽요결(擊夢要訣)
격몽요결(擊夢要訣)은 율곡 선생이 42(1577년)세 때 해주(海州) 석담(石潭)에 있으면서 초학자들의 학문하는 방향을 일러주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책의 제목인 격몽(擊蒙)은 주역(周易)의 몽괘(夢卦) 상구(上九) 효사(爻辭)의 말로, '몽매하여 따르지 않는 자를 깨우치거나 징벌한다.' 는 뜻이므로 격몽(擊蒙)은 몽매함을 깨우친다는 의미이고, 요결(要訣)은 그 일의 중요한 비결이란 뜻이 된다. 격몽요결의 지은이 율곡 이이가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여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사업에 종사하면서 지은 책이다. 정치가로서의 지은이가 교육자로의 면모를 보임과 동시에 지은이의 교육사상이 적절하게 잘 나타나있다.
이 책은 학문을 시작하는 사람들(初學者)에게 뜻을 세우고, 몸을 삼가며, 부모를 모시고, 남을 대접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초학자에게 학문의 방향을 인도하고 올바른 마음을 닦고 도를 향하는 기초를 세우도록 노력하게 만든다는 입문서의 목적으로 엮은 책으로 2권 1책의 목판본이다. 입지(立志), 혁구습(革舊習), 지신(持身), 독서(讀書), 사친(事親), 상제(喪制), 제례(祭禮), 거가(居家), 접인(接人), 처세(處世) 등 총 10장으로 나누어 구성되었으며, 사당도(祠堂圖), 시제도(時祭圖), 설찬도(設饌圖)와 제의(祭儀)의 출입의(出入儀), 참례의(參禮儀), 천헌의(薦獻儀), 고사의(告事儀),시제의(時祭儀), 기제의(忌祭儀), 묘제의(墓祭儀), 상복중행제의(喪服中行祭儀) 등을 첨부 간행하였다. 이 책은 조리 있는 서술과 배우고 익혀 실천하기에 적절한 덕목을 수록한 점이 특징이며, 저술 직후부터 왕으로부터 일반 유생에게까지 널리 익혀졌다. 인조 시대에는 전국 향교의 교재가 되기도 하였다. 초학자들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에 이어 널리 읽혀졌다.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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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2; 이(李珥, 1536년 음력 12월 26일 ~ 1584년 음력 1월 16일)는 조선시대의 문신, 성리학자이며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작가, 시인이다. 관직은 숭정대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성혼, 송익필, 김장생 등과 함께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西人)의 종주로 추앙된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간 여묘 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 깎고 중이 되려다가 환속한 자 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공납(貢納)의 폐단 시정책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실시를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분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뒤 그를 문묘에 제향하는 문제를 놓고 인조반정 이후 50년간 논쟁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 종사되었다. 본관은 덕수(德水),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시호(諡號)는 문성(文成)이다.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의 5대손이며, 중종 때의 재상 이기, 이행 형제의 재종손이자 통덕랑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사후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이원수(李元秀)와 정경부인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셋째 아들이었다. 휴암 백인걸(白仁傑)의 문인이다.
율곡의 저서로는 정치방면에서「동호문답(東湖問答)」은 율곡이 34세 9월에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있을 때, 왕도(王道)정치의 이상을 제진(製進)한 것으로 논군도(論君道), 논신도(論臣道), 논안민지술(論安民之術) 등 총 11조로 구성되어 있다 철학방면의 저서「성학집요(聖學輯要)」는 율곡이 40세때 유학의 요지를 간추려 편찬한 책으로서 이는 율곡의 사상과 경륜(經綸)을 아울러 살필 수 있는 핵심적 저술이며, 또한 동양에서 유학의 근본정신을 가장 완벽하게 집약한 유학사상의 진수(眞髓)라고 말할 수 있다. 교육방면의 저서「격몽요결(擊蒙要訣)」은 42세에 초학자에게 학문의 방향을 인도하기 위하여 그 입문서로서 쓴 것이다. 그리고 역사방면의 저서「경연일기(經筵日記)」는 46세에 명종 20년 7월에서 선조 14년 11월에 이르기까지 17년간에 걸쳐 일어났던 중요한 시사(時事)를 편년사체(編年史體)로 기술하여 자신의 논평을 덧붙여 완성한 것으로, 사료적(史料的) 가치로는 물론 율곡의 역사에 대한 안목과 사학사상(史學思想)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이외에도 그는 시(詩), 부(賦), 상소문(疏), 서간문(書簡文)이나 서(序), 기(記), 발(跋)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뛰어난 저술을 남겼다.
율곡은 격몽요결의 저작이유와 교육목적을 그의 서(序)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학문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없다. 이른바 학문이란 것은 역시 이상하거나 별다른 것이 아니다. 다만 아비가 되어서는 자애롭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하고, 부부간에는 분별이 있고, 형제간에는 우애롭고, 젊은이는 어른을 공경하고, 친구 간에는 신의를 두는 것으로서 일용의 모든 일에 있어 그 일에 따라 각기 마땅하게 할 뿐이요, 현묘한 것에 마음을 두거나 기이한 것을 노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학문하지 않은 사람은 마음이 막히고 식견이 좁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여 마땅히 향할 길을 밝힌 연후에야 조예가 올바르고 실천에 중도를 얻게 된다.
요즘 사람들은 학문이 일상생활에 있는 줄은 모르고 망령되어 높고 멀어 행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까닭에 특별한 사람에게 미루고 자기는 자포자기를 한다. 이 어찌 불쌍한 일이 아니랴. 내가 해산(海山)의 남쪽(해주의 석담을 가리킴)에 거처를 정하자 한두 학도가 추종하여 학문을 청해 왔다. 내가 스승이 될 수 없는 것이 부끄러웠으나 또한 초학(初學)이 향방을 모를 뿐 아니라, 굳은 뜻이 없이 그저 아무렇게나 이것저것 배우면 피차에 도움이 없고 도리어 남의 조롱만 사게 될까 염려되었다.
이에 간략하게 한 책을 써서 대략 마음을 세우는 것, 몸가짐을 단속하는 일, 부모를 봉양하는 법, 남을 접대하는 방법을 서술하고 이를 「격몽요결」이라 이름해서 학도들로 하여금 이것을 보아 마음을 씻고 뜻을 세워 즉시 공부에 착수하게 하고, 나 역시 오랫동안 구습에 얽매어 괴로워하던 차에 이것으로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코자 하노라.
정축년 늦겨울 덕수(德水) 이이 씀.
1788년에 정조 12년에 정조임금은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서문을 썼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하면 다음과 같다.
그 사람을 사모하면 반드시 그의 저서를 읽게 되고, 그의 저서를 읽으면 반드시 그의 마음을 추구(追求)하게 되는 것이니, 마음은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고인(古人)을 벗으로 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분의 저서를 우선으로 하는 것인데, 이제 사모하는 사람의 저서에다가 그것도 또 손수 자필(自筆)로 자구(字句)를 수정한 필적이라면 그 분의 마음이 필획(筆劃)에 나타난 것까지 아울러 봄으로서 조용히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을 터이니, 그 분 마음을 추구하는 데 있어 더욱 절실하지 않겠는가. 이 문성(文成: 율곡의 시호)은 내가 존모(尊慕)하는 분이다. 그 분의 전서(全書)를 읽고서 그 인품을 상상할 수 있었다. 요즈음 강릉에 그분이 손수 쓰신 「격몽요결」과 남기신 벼루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른 가져다가 보았다. 점(點)과 획이 새롭고 시작과 끝이 한결같아 영명(英明) · 순수(純粹)하신 뛰어난 품성과 광풍제월(光風霽月) 같은 시원한 기상을 책을 펼쳐보는 순간 은연중 감지할 수 있어, 홀연 이 문성과 200여년의 시대차가 있다는 사실을 잊었으니 그것은 이 책을 읽고 나서야 그런 것이 아니었다.-중략-
나는 이로 인하여 특별한 감회가 있다. 지난번에는 영남[嶠南]에서 이문순(李文純: 퇴계의 시호임)공이 손수 쓰신 「심경(心經)」을 얻었는데 이번에 또 이 책을 얻었다. 두 분 현자(賢者)의 태어남이 이미 동일한 시대였는데 두 책이 마침 서로 전후에 걸쳐 발견되었으니, 때를 기다림이 있었던 듯싶고 우연한 일이 아닌 듯하다. 그런데 유풍(儒風)은 점점 멀어지고 성언(聖言)은 날로 사라져 가니, 매양 경연(經筵)에 나아가매 더욱 같은 시대에 태어나기 못한 한탄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강릉은 바로 공의 외가가 있는 고을로서 공이 사실은 이곳에서 태어났으니 이른바 '오죽헌(烏竹軒)'이라는 곳이 그곳이다. 이곳이 뒤에는 권씨(權氏) 소유가 되어 책도 또한 그 집에 소장되어 있으니, 권씨의 선세(先世)가 공의 이모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여기 이렇게 적고 또 벼루에 명(銘)을 지어서 돌려보내는 바이다. 내가 즉위한 지 12년이 되는 무신년(1788) 초여름에 짓고 이내 각직(閣職)에 있는 공의 방손(傍孫) 이 병모(李秉模)을 시켜서 글씨를 쓰게 했다.
격몽요결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 1장 입지(立志): 입지란 올바른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하여 움직이지 않는 확고한 마음을 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율곡의 입지는 어디까지나 실천도덕의 입지이기 때문에 그의 입지 목표는 당연히 성인에 두고 있는 것이다. 처음 배우는 사람은 먼저 뜻을 세워 반드시 성인이 되겠다고 결심하여야 할 것이다. 뜻을 세운 것을 이루려면 입지(立志), 명지(明知), 독행(篤行)을 하여야 한다.
보통 사람들이 제 자신 뜻을 세웠다 하면서도 바로 노력하려 들지 않고 머뭇거리며 기다리는 것은, 명목상으로는 뜻을 세웠다 하면서도 실상 배우려는 성의가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내 뜻이 학문에 두어졌다면, 인(仁)을 행함은 나에게 있어 하려고 하면 이를 수 있는 것인데, 왜 뒷날로 미루겠는가. 뜻을 세움이 귀하다는 것은 곧 공부를 시작하여 미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생각마다 물러서지 않으려 한 까닭에서이다. 만일 뜻이 정성스럽고 단단하지 못하여 그대로 날만 보낸다면 나이가 차 죽는 날까지도 어찌 성취가 있을 것인가 율곡은 더 나아가 입지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병적 원인이 셋이 있다고 말하면서 첫째는 불신(不信)이요, 둘째는 부지(不智)요, 셋째는 불용(不勇)이라고 했다.
첫째 불신(不信)이란 성현이 우리에게 일깨워 알게 해준 것이 명백하고 친절하여 진실로 그 말의 순서를 따라 점차 나아가면 우리도 성현이 되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고 그렇게 해서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성현의 말은 사람들을 권유하기 위한 것이라 하여 믿지 않고 그 성현들의 글만 완독(玩讀: 비판적으로 책을 읽지 않고 생각 없이 일기만 함)하고 몸으로써 실천하지 않고 있으니, 그 읽고 있는 것은 성현의 글이지만 몸소 실천하는 것은 속된 유행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둘째 부지(不智)란 사람이 타고난 성질이 수없이 다르지만 힘써 알고 힘써 행하면 성공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지혜롭지 못한 자는 스스로 자기 자신의 자질이 부족함을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알고 뒤로 물러서서 안일하게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도 심지(心志)를 바르게 하고 노력하면 성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므로 날마다 열심히 읽는 것은 성현의 글이지만, 언제나 자기 자신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셋째 불용(不勇)이란 성현이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것과 우리가 힘써 배우고 실천하면 기질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조금은 알고 있다 해도 항상 하던 버릇이 습관이 되어 힘을 내어 일어나지 못한다. 어제 한 것을 오늘에 고쳐 바로잡기를 어렵게 여기고 오늘 한 것을 내일에 고치기를 꺼려하며 인순고식(因循姑息: 낡은 폐습을 버리지 못하고 눈앞의 편안함만 바람)하여 한 발 앞으로 나갔다가 열 발 뒤로 물러서는 것은 용기 없는 불용의 소치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읽는 것은 성현의 글이지만, 편안함을 바라는 것은 과거의 폐습이라고 할 수 있다.
제 2장 혁구습(革舊習): 사람이 비록 학문에 뜻을 두고서도 용맹스럽게 앞으로 나아가 성취함이 있도록 하지 못하는 것은 구습이 막아서서 방해를 하는 까닭이다. 구습의 명목을 다음과 같이 열기(列記)하니, 만일 뜻을 가다듬어 매섭게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끝내 학문의 바탕은 마련되지 않을 것이다.
1. 마음가짐을 게을리 하고 몸가짐을 함부로 하여 다만 편하게 놀기만을 생각하고 절제하기를 매우 싫어하는 것.
2. 항상 일이나 꾸미려 하고 조용히 안정을 유지하지 못하여 분주히 드나들면서 이야기로 세월을 보내는 것.
3. 함께 휩쓸리기를 즐기고 남과 다르게 행동하기를 싫어하여 속된 무리들 속에 빠지는 것과, 몸을 조금만 닦거나 조심을 해보려다가도 여러 사람들과 틀어질까 두려워하는 것.(따돌림에 대한 두려움)
4. 문장이나 보기 좋게 꾸며 세상의 명예나 취하려 하고, 옛글을 따다가 화려한 문장이나 꾸며 만드는 것.
5. 편지나 글씨에 공을 들이고, 음악이나 술 마시기를 일삼으며, 공연히 놀며 세월을 보내면서 자기만이 맑은 운치를 가지고 사는 체 하는 것.
6. 한가롭게 아무 일도 없는 사람들을 모아 바둑, 장기나 두고 즐기면서 종일토록 배불리 먹고 내기로 다투는 것.
7. 부귀를 부러워하고 빈천을 싫어하여 좋지 못한 옷과 음식을 매우 부끄럽게 여기는 것.
8. 즐기고 욕심내는 것에 절도가 없어 능히 이를 끊고 억제하지 못하면서, 재물과 이익, 노래와 색(色)을 꿀맛같이 여기는 것.
/ 기성세대가 정말 저주받아야 할 세대인가(12-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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