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란 어떤 사조(思潮)인가(4-1) > 중앙총부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중앙총부

자유게시판 계몽주의란 어떤 사조(思潮)인가(4-1)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김 용 천
댓글 0건 조회 2,157회 작성일 13-09-06 22:19

본문

계몽주의란 어떤 사조(思潮)인가(4-1)
천도교 홈에 게재된, 본인의 모든 글과 동학, 천도교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은, 모두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카페(http://cafe.daum.net/oamdonghak)의 김 용천 자료실과 교리, 교사 연구 논문과 학술논문 자료실에 게재되어 있사오니, 자주 방문하시어 많이 읽어주시고, 교단발전에 널리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알림; 연구소 방문은, 필자의 카페주소인 여기를(http://cafe.daum.net/oamdonghak/오암 동학사상 연구소)를 클릭하여 ‘김 용천 자료실’을 찾으시면, 회원이 아니시더라도, 방문객은 누구나 각 종 분야에서 선정(選定)한 일만여 건(一萬餘 件)의 자료들을 검색하여 읽고, 활용하실 수 있습니다.
포덕 154(2013)년 9월 6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
알림; 아래의 글은 초고(草稿)로서 이 글에 사용된 모든 자료는, 각종 어학사전과 대백과사전, 그리고 분야별(分野別) 사전들과 해당분야(該當分野)의 관련 자료들을 폭넓게 사용하여 기술(記述)하였음과 인용 자료들은 이해하기 쉽도록 필자가 임의(任意)로 프레임을 재구성(再構成)을 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오자(誤字)와 오류(誤謬)는 수정(修正) 보완(補完)하였고, 이해(理解)를 돕기 위해서 필요에 따라서는 ( )에 한자(漢字)를 삽입(揷入)하였습니다.
목차
1. 계몽과 계도의 차이.
2. 계몽에 대한 각 분야에서의 해설.
3.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
4. 계몽주의 문학(啓蒙主義文學).
5. 근대 계몽주의 철학.
6. 계몽주의 시대의 역사학.
7. 유럽 군주제 시대의 계몽주의.
8. 계몽의 변증법.
9. 계몽주의를 거부한 낭만주의(浪漫主義).
1. 계몽(啓蒙)과 계도(啓導)의 차이(差異).
계몽(啓蒙)은 미개하거나 무지몽매한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친다는 뜻이기 때문에, 근자에는 잘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잘못 사용하면 상대의 감정을 상(傷)하게 하거나 비난(非難)을 받을 수도 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계도(啓導)’는 뭔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착각하고 있는 사람을 깨우쳐 이끌어 준다는 뜻으로, “일깨움”으로 순화(醇化)해 쓰이는 용어이다.
계몽이란 국어사전에서의 일차적(一次的)인 의미로, 무식(無識)한 사람이나 어린아이를 깨우쳐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계몽이란 광범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인습에 젖거나 사람이 무지하거나 올바른 지식을 갖지 못하여 지식수준(知識水準)이 낮거나 의식(意識)이 덜 깨어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쳐 사물(事物)의 이치(理致)를 알도록 가르치고 깨우쳐 주는 것으로, 정신(精神)이 몽매(蒙昧)한 사람을 계발(啓發)하여 개화(開化)로 인도(引導)하거나, 인습적(因襲的)인 기성관념(旣成觀念)에서 벗어나 자주적(自主的)이고 합리적(合理的)인 인식(認識)을 가지고 참되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계발(啓發)하는 것을 의미한다.
계몽이란, 인류의 탄생(誕生)으로부터 멸망(滅亡)까지 지속적(持續的)으로 여러 가지 형태로 행해질 수 있는 다양한 교육의 한 방법인 것이다. 계몽주의는 한 시대의 사상적(思想的) 조류(潮流)로써 그 시대의 시대정신(時代精神)의 하나로, 중심적인 사상적(思想的)인 사조(思潮)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시대는 계몽사상이 바탕으로 하여 철학, 사상, 문화, 종교 등 다양(多樣)한 분야의 핵심적(核心的)인 사상으로, 모든 시비(是非)의 가치기준(價値基準)이 되는 것이다. 그 결과 계몽은 인류의 역사상 시대와 지역(時空超越)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것이지만, 계몽주의는 그 시대가 필요한 시기의 시대사상(時代思想) 또는 시대정신(時代精神)으로 한 시대의 꽃으로 실존(實存)하다가 다음 시대의 다른 사상으로 전환(轉換)되는 시대적 조류(潮流)이거나 사조(思潮)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대에 있어서의 인간의 사회생활 전반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등의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관련 학문의 해설과 교육, 학문연구 등이, 계몽(啓蒙)과 교화(敎化)를 주축(主軸)으로 하여 그 사회의 구성원(構成員)으로서의 공동사회(共同社會)에서 맡은 바의 역할(役割)을 다하기 위함과 개인으로서의 사회생활을 원만하게 하기 위한 기초학습(基礎學習)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공공기관이나 개인회사의 신입사원(新入社員)에 대한 오리엔테이션도 계몽과 교화의 한 방식인 것이다. 현대와 같은 다원화(多元化) 사회에서는, 그 사회가 현상을 유지(維持)하거나 발전(發展)하기 위해서는 필수적(必須的)으로 계몽과 교화가 문제해결의 최선의 방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원화 사회는, 제 4물결의 필수적인 한 형태이기 때문에 이런 사회에서의 생존(生存)은 지식경쟁(知識競爭) 또는 지식전생(知識戰爭)에서의 살아남는다는 것이 필수이다. 그러기 때문에 계몽(啓蒙)이든, 계도(啓導)이든, 지도편달(指導鞭撻)이든 상관없이 보다 많은 지식을 가져야 생존경쟁(生存競爭)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살아남아야 내가 실존적(實存的)인 존재(存在)가 되는 것이다. 내가 없는 곳에서 무상(無上)의 가치(價値)가 무슨 의미(意味)와 소용(所用)이 있겠는가.
우리들의 일상적인 생활이, 매우 복잡다단(複雜多端)한 기술 산업사회로 전이(轉移)되는 과정에서의 새로운 사회에로의 진입(進入)이 매우 어렵게 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적인 실정(實情)이다. 필자의 주변 사람들이 다 같이 호소(呼訴)하는 것 중에 가장 많은 것은, 방송과 신문 등의 모든 매체(媒體)가 하고 있는 방송(放送)과 보도(報道)에서 낯이 설은 각종 분야의 시사용어(時事用語) 때문에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듣고 읽어도 이해가 어렵게 되었다는 하소연이었다. 그래서인지 신문과 방송에서 새로운 용어에 대한 짤막한 용어해설을 조금씩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방송과 언론기관에서 방송되고 출판되고 있는 신문에서 또는 각 포털 사이트와 종편방송에서의 뉴스에서 각종 국내외 뉴스의 해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의 사건사고의 해설이 없이는 이해하고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필자도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지난 포덕 153(2012)년 10월 26일에 각 게시판에 게재한 ‘당황하게 하는 일상적인 용어들’에서 상당량의 각 분야의 시사용어들을 선정 정리하여 해설을 붙여 당면하고 있는 시사(時事) 문제를 이해하는데 조금의 도움이라도 드리려는 노력을 한 바가 있다. 이러한 모든 행위들이 모두 계몽의 한 형태인 것이다. 계몽이란 단어가 부끄러움과 자신이 무시당할 수 있다는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용어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고 형식과 내용에 구애(拘碍)받지 말고 누구보다 빨리 더 많은 지식과 상식을 배워 익혀 지식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새롭고 첨단적(尖端的)인 무장(武裝)이 매우 시급(時急)한 시대인 것이다. 투정을 부릴만한 여유도 없는 매일 매일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급속도(急速度)로 변하는 사회에로에 진입(進入)이 생존의 성패(成敗)를 결정하는 현실이 된 것이다.
또 인류생활과 관련되는 모든 분야에 관련된 학술도서는 물론 교양도서 및 몇 줄로 된 수필에 이르기 까지, 독자에 대한 계몽이 기본으로 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겸손한 마음으로 읽게 되고, 진정한 마음의 양식(良識)이 된다. 제 4물결의 꽃인 인터넷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떠한 형식의 것이든 모두가 잘 모르는 것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것도 계몽의 한 형태인 것이다. 세상사람 들이 자세히 모르는 것들과 일상적인 각종 일들의 실상(實相)과 진실(眞實)에 대한 것들은, 모르는 사람들을 깨우쳐 알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알고 싶은 것을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알았다면, 그것 또한 계몽의 한 형식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몽은 가고 옴이 없이 인류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같이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지식에 대하여 자만심(自慢心)을 갖거나 박학(博學)하다고 하여 생존에 필요한 신서(新書)를 읽지 않는다면, 무지(無知)와 몽매(蒙昧)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편중(偏重)된 지식으로는 다원화 사회(多元化 社會)나 미래사회(未來社會)에서는 인간다운 모습으로 거의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통감(痛感)해야 할 것이다. 지금이나 미래시대는 지식전쟁의 시대이고, 지식과 정보는 정보화 시대(情報化 時代)에 있어서 생존을 위한 생존경쟁의 최대 무기(武器)이기 때문이다. 지식(知識)과 정보(情報)가 많은 사람이 필승(必勝)의 장본인(張本人)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분야에서는 교역자의 모든 행위 즉 설교, 설법, 교리해설 등을 통한 교화(敎化), 그리고 수도와 수련의 지도, 입문서, 안내서, 의절, 의식해설 및 상담과 지도 등이 모두 계몽 또는 교화의 한 방식이고, 천도교에서는 동학시대에서 통유(通諭) 또는 통문(通文)과 천도교 시대에서의 공보(公報), 통장(通章), 종령(宗令), 공함(公函) 등등, 해방이후에는 천총(天總) 등이 또한 모두 계몽 또는 교화의 한 방식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00년부터 해방공간까지 우리 교단이 집중적인 운동으로 매진(邁進)해왔던 신문화 운동이나 전위단체운동은 대표적인 계몽운동이라고 학계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6.25동란 이후 교세가 크게 미약(微弱)하게 되어, 대 사회적인 운동으로 내세울 것이 없지만, 1970년대 전후로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대사회운동이었던 ‘새인간 운동’은 높이 평가받아야 했던 국민과 교인을 상대로 한 계몽운동의 하나였다. 포덕 110(1969)년 12월 22일 오전 11시부터 대교당에서 개최된 새인간 운동 발기준비 위원회에서 발표한 ‘새인간 운동 발기 취지문’을 보면(전문 내용)
‘悠久한 歷史를 통해 우리 祖上들은 이 江土에 이 빛나는 文化를 建設하여 왔다. 우리는 이 빛나는 傳統을 밟고 움직이는 世界 現實 속에서 보람있는 삶의 터전을 다져야 하며 나아가서는 人類文化의 새로운 發展에 이바지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높은 矜持와 참된 努力으로 本來의 飛躍을 위해 蹶起하여야 한다. 이에 우리는 다같이 힘을 모아 새人間運動을 힘차게 展開하기로 한다.
지금 우리 앞에는 時急히 解決해야 할 課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民族的인 觀點에서 가장 重大한 課題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참된 우리의 主體性을 確立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의 自主的인 近代化를 促進해야 한다.
셋째로, 實質的인 勝共으로 國土의 統一을 實現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러한 課題를 위하여 과연 올바른 우리들은 精神姿勢와 참된 生活態度를 갖추고 있는가. 우리들은 이 始點에서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돌이켜 보건데 지난 60年代엔 무엇보다 祖國의 近代化를 위해 民族的인 力量을 總動員하여 왔다. 그 結果로 經濟成長은 世界의 耳目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 社會全體가 과연 健全하고 均衡잡힌 發展을 이룩하였는가 物質的인 發展에 과연 精神的인 뒷 밭침이 따르고 있는가? 우리는 民族的인 良心으로 우리 周邊에서 날로 늘어가는 不正과 不義, 奢侈와 腐敗 등 頹廢한 社會相을 指摘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회적인 病弊를 根本的으로 다스리지 않는 限 우리는 모처럼의 近代化作業도 그 所期의 目的을 達成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眞正한 近代化를 위하여 무엇보다 올바른 精神姿勢를 튼튼히 다져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精神運動으로서 새人間運動을 展開하기로 宣布한다.
우리는 民族的인 自覺과 世界現實의 洞察을 통해 참된 主體的인 人間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高度로 産業化된 現代社會에 適應할 수 있는 科學的素養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는 다같이 이러한 새人間이 됨으로써 健全하고 均衡 잡힌 社會發展을 期할수 있고 또 이러한 發展을 통해서만 實質的인 勝共으로 祖國의 진정한 自主統一을 期할수 있다.
새人間은 하늘에 사모치는 誠實과 人間을 人格으로 尊重하는 恭敬과 서로 믿고 서로 돕는 信義를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여기에 뜻을 같이 하는 滿天下의 人士들과 손을 굳게 잡고 새人間運動의 隊列속에 나서기로 하니 全國民의 뜨거운 呼應을 바라는 바이다.‘/ 新人間 통권 271호(포덕111/1970년 1월호 PP. 44-45.에서
위의 전문내용에서 밝히고 있듯이, 전 국민의 상당수가 현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직시(直視)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닥쳐 올 미래의 재난(災難)을 감지(感知)하지 못하며 이 시대의 시대정신과 시대적 사명을 숙지(熟知)하고 있지 못함을 개탄(慨歎)하면서 오늘날의 시대정신과 시대적 사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일깨워 새人間運動의 隊列속에 참여하기를 권유(勸諭)하는 계몽의 형태를 갖춘 글이다.
천도교 중앙 총부의 경우, 중앙과 지방교구(전교실 포함)에 교화를 담당하고 있는 교화관(敎化觀)과 교화부(敎化部)가 설치되어, 그 부서가 담당하고 있는 업무를 담당처리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만약 계몽(啓蒙)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미개(未開)하거나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친다는 뜻이기 때문에, 근자(近者)에는 잘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傾向)이 있고, 잘못 사용하면 상대(相對)의 감정을 상(傷)하거나 비난(非難)을 받을 수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면, 교화(敎化)란 용어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교화(敎化)란 용어도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데, 좋은 의미로만 사용되지 않는 것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1980년에 국가보위 비상대책 위원회(국보위)의 사회정화책의 일환으로 군부대 내에 설치한 기관으로 삼청교육대가 설치되어 폭력배와 사회풍토 문란사범을 소탕하고, 이들을 죄질(罪質)에 따라 순화교육 및 근로봉사를 시켰는데, 이것이 순화교육(醇化敎育)이란 이름아래 행해진 인간정신(人間精神) 교화사업(敎化事業)의 일환(一環)이었다. 는 점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다. 또 법무부가 그 부서의 업무 중에 하나로, 교정 및 교화(矯正, 敎化)사업을 중점적(重點的)으로 하고 있는데, 그 교정교화의 대상의 대부분이 범죄인(犯罪人)이기 때문에, 교화란 용어를 일반인인 교인을 상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결례(缺禮)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천도교의 기구인 교화관(敎化觀)과 교화부(敎化部)를 다른 명칭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면, 교의(敎義)를 생각한다면 매우 왜곡(歪曲)된 논리(論理)라 할 수 있다. 모든 언어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언중(言衆)의 선택이 따라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시대가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 언어가 담고 있는 근본적(根本的)인 의미를 다르게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로서 언어의 소통(疏通)의 기본인 사회적(社會的) 약속(約束)에 위배(違背)되는 것이다.
註 00; 삼청교육대(三淸敎育隊) -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의 사회정화책의 일환으로 군부대 내에 설치한 기관으로, 교육대상자들을 검거하기 위한 군경 합동작전의 명칭이 '삼청작전'이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1980년 8월 4일 국보위는 각종 사회악을 단시일 내에 효과적으로 정화하여 사회개혁을 이룬다는 명분 아래, '사회악 일소를 위한 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 19호'를 발표, 폭력배와 사회풍토 문란사범을 소탕하고, 이들을 죄질에 따라 순화교육, 근로봉사·군사재판회부를 병행하여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했다. 2일 만에 1만 6,599명을 검거하여 1981년 1월까지 4차에 걸쳐 6만 755명을 체포했다. 피검거자들은 심사위원회(보안사령부 요원, 중앙정보부 요원, 검사, 경찰서장, 헌병대 요원, 지역정화위원 등으로 구성)에서 A, B, C, D 4 등급으로 분류되어 A급 3,252명은 군법회의 회부, B급과 C급 3만 9,786명은 각각 4주 교육 후 6개월간 노역, 2주의 교육 후 훈방조치, D급 1만 7,717명은 경찰에서 훈방되었다. 대대적인 '정화바람' 속에서 삼청교육 입소자들 가운데는 억울하게 검거된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의 4주간 교육은 연병장 둘레에 헌병을 배치, 엄중한 집총감시 속에서 진행되었다. 1988년 여소야대의 정기국회에서 순화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가혹행위는 국정감사의 대상이 되었고, 당시 국방부의 보고에 따르면 교육 중 5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 브리태니커에서
계몽과 교화의 학습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리 훌륭한 민족문화(民族文化)와 전통(傳統)을 향유(享有)하고 있다할지라도 계승(繼承)되기 어렵고, 만약에 계몽과 교화라는 용어 때문에 학습(學習)을 하지 않거나 기피(忌避)한다면, 찬란한 민족문화와 전통이란 유산(遺産)이 단절(斷絶)되고 말 것이다. 단순(單純)하고 순박(醇朴)한 마음으로 내가 어리석거나 지식이 부족하여 무시를 당한다는 느낌과 부끄러움 때문에 계몽과 교화의 학습을 수용(受容)할 수 없다는 것은, 무지(無知)의 한 표현인 것이다. 지자(知者)일수록 삶에 대한 경건(敬虔)함과 겸손(謙遜)을 위하여 보다 폭넓은 지식을 수용하여 새사람(新人間)이 되어야 하고, 풍요(豊饒)롭고 행복한 삶을 살려면, 더 많은 계몽과 교화의 학습을 받아들여 폭 넓게 활용해야 할 것이며 그런 자세와 행동이 참으로 슬기롭고 지혜로운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필자는 ‘언제인가 멈춰 서서, 내동댕이쳐질 수도 있는 팽이 같은 세상(7-1)’ 에서/포덕 154(2013)년 8월 22일. 각 게시판에 게재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한 바 있다.
‘한 인간이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하여,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학문을 갈고 닦고(切磋琢磨), 꿈을 실현하기 위한 관련도서를 숙독(熟讀)하고, 종교에 귀의(歸依)하여 신실(信實)한 신앙을 하는 것은, 내 삶의 풍요로움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도우며 어울러서 살기 위한 뜻 깊은 노력(與世同歸/同歸一體)인 것이다. 이러한 노력 속에서 인간은 현명(賢明)해지고 슬기로워지며 지적 직관(知的直觀; intellectual intuition)을 향유(享有)하게 되어 올바른 역사의식(未來指向的 歷史意識)과 미래에 대한 확고(確固)한 신념(信念)을 갖게 된다. 이러한 신념의 소지자(所持者)들이 모여 난마(亂麻)와 같이 얽히어 돌아가는 현실적 상황을 풀어내어 역사를 창조하는 주인으로서 중심인물(中心人物)이 되고 나아가 미래의 새 시대를 여는 신인간이 되는 것이다. 주체적인 인간이며 역사의 주변인(周邊人)과 국외자(局外者)가 아닌 핵심적(核心的)인 중심인(中心人)인 새인간(新人間)이 되는 것이 천도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하여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거나 미진(未盡)한 준비로 현실에 나타나는 수많은 일들을 잘못 판단하여 삶을 그르친다면, 그 모든 것의 결과에 대한책임은 누구의 것인가? 이런 결과에 대한 모든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그 누구의 탓도 아닌, 삶의 주체인 나 자신의 잘못된 예측(豫測)과 선택(選擇)에 따른 책임(責任)이라는 것은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알 일이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가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준비된 광범위(廣範圍)한 융합적(融合的) 또는 통섭적(統攝的) 지식을 통한 올바른 시각(視覺)과 관점(觀點) 그리고 지적 직관의 유무(有無)에 있는 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안녕(安寧)과 질서(秩序) 그리고 평화(平和)를 위하여 새로운 법을 시행(施行)하기에 앞서, 그 법의 취지(趣旨)와 결과(結果)에 대하여 계몽(啓蒙)을 하기 위하여 일정기간을 계도기간(啓導期間)을 주고 그 후에 집행(罰科金 徵收)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농수산물의 수입국 표기에 대한 계도기간, 음식점의 수입국과 계량과 가격의 표시에 대한 계도기간, 교통법규에 대한 계도기간, 금연을 위한 계도기간, 절전을 위한 계도기간 등등의 건전한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을 말한다. 결국 계도기간이란 계몽의 한 형태로 계몽기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계도(啓導)라는 용어의 의미가 ‘깨우쳐 이끌어 주다.’라는 것으로 스스로 깨우쳐 살아가지 못하여 남에게 지적인 수준이 모자라 이끌리어 가는 피동적(被動的)인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개하거나 무지몽매한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친다는 계몽이나 남에게 지적인 수준이 모자라 이끌리어 가는 피동적(被動的)인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나 모두 다 주관적(主觀的) 사고(思考)를 통한 자립적(自立的)이며 자율적(自律的)이고 자주적(自主的)인 인간이 못되고, 또 새 역사창조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주변에서 어정거리는 주변인(周邊人)으로서 삶의 터전에서 국외자(局外者)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표면적으로는 계몽(啓蒙)과 계도(啓導)의 차이(差異)가 있는 것 같지만, 내용적이나 실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는 말이다. 이것은 계몽을 부끄럽게 여겨 기피(忌避)하는 언중(言衆)을 위하여 조삼모사(朝三暮四/교묘한 속임수)와 같은 언어적(言語的) 유희(遊戱/ 우스꽝스러운 말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너는 똑똑한 척하니 내가 인심을 써서, 계몽대신 계도를 써 줄게, 그래서 계몽기간(啓蒙期間) 대신 계도기간(啓導期間)이라 할 테니까 만족하냐? 혹시 지도편달(指導鞭撻)은 안 될까?’ 와 같은 속임수의 한 방식에 불과한 것이다. ‘가르치어 깨우쳐 이끌어 간다.’ 는 의미에선 계몽(啓蒙)과 계도(啓導) 그리고 지도편달(指導鞭撻)은 다 같은 유의어(類義語)인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에는, 계몽(啓蒙)보다 계도(啓導)가 더 피동적(被動的)이고 종속적(從屬的)인 언어이며, 계도(啓導)보다 지도편달(指導鞭撻)이 더 피동적(被動的)이고 추종적(追從的)인 언어이고, 강압적(强壓的)인 의도(意圖)가 담긴 용어이다. 라는 점을 이해하고 사용하여야 한다.
註 00; 지도편달(指導鞭撻) - 指導는 남을 어떤 목적이나 방향으로 가르치어 이끎을 의미하고 鞭撻은 스승이나 어른이 타이르고 격려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과 종아리나 볼기를 치는 것과 같이 채찍으로 때리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 분야에서 指導는 교과학습 및 생활지도 = 교과의 학습 활동을 이끄는 일. 또는 학생들이 일상생활에서 좋은 습관이나 태도를 기르도록 이끄는 일이 되고 鞭撻은 사랑의 매일 수 있다.
2. 계몽에 대한 각 분야에서의 해설.
■ 칸트사전
계몽(啓蒙, 독어; Aufklärung , 불어; lumière, 영어; enlightenment) - 이 독일어는 외래어로서(멘델스존) 독일어의 동사 aufklären은 라이프니츠가 사용한 프랑스어 éclairer라든가 영어의 enlighten의 독일어 번역으로 간주된다. 1752년에 J. G. 줄처가 형용사 aufgeklärt를 사용하지만, 70년대에 들어서면 명사 'Aufklärung(계몽)'이 보급된다. 계몽의 활동은 17세기 끝 무렵부터 영국에서 시작되는데, 특히 18세기는 '야만과 어둠의 세기'에 대해 '계몽의 세기', '이성의 세기', '철학의 세기'라고 말해졌다. 계몽은 특정한 철학적 입장이 아니다. 계몽의 '철학자들(Les philosophes)'은 '선입견, 전통, 오래됨, 세상 사람들 일반의 동의, 권위, 한 마디로 말하면 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을 밟아 뭉개고 과감히 스스로 생각하며, 가장 명백한 일반적 원리들에까지 소급하고, 감각과 이성에 비춰진 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다(디드로). 여기서 18세기 유럽 각국의 공통된 계몽운동의 일반적인 이념을 볼 수 있다. 18세기는 인간 이성의 통일성과 보편성에 대한 신념에 의해 관철된다. 이성은 모든 인간, 모든 국민, 모든 시대, 모든 문화에 대해서 동일하다고 여겨졌다. 그것은 과학적인 보편적 이성이다. 철학과 관련하여 17세기는 철학적 인식의 본래적 과제를 수학적 방법에 기초한 철학적 체계의 구축에서 보고 있었지만, 18세기는 데카르트를 대신하여 뉴턴의 자연학과 로크의 인식 비판이 전형으로 되어 경험적 실험적 방법이 중시된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형이상학 거부로부터 실증주의로의 길이 열린다. 국가와 정치에 관해서는 자연권이 인간의 보편적 권리로서 선언되며, 사회계약이 중시되고, 국가 권력의 분립이 요구된다. 종교에 관해서는 이전 세기의 종교분쟁 후 영국에서 일찍부터 원죄와 기적의 교리가 부정되며, 계시종교에 반대하여 자연종교 또는 이성종교, 특히 이신론이 계몽신학의 핵심으로 된다. 로크는 이것의 전형이었다. 그리고 베일 이래로 종교적 관용(Toleranz)의 입장은 모든 계몽주의자에게 공통적이다. 계몽주의의 역사관에서는 비판적 진보사관이 강하다. 계몽 개념에는 '비판' 개념이 수반되어 미학과 역사 등 모든 영역에서 비판이라는 말이 적용되며, 이 경향이 칸트적 '비판' 개념으로 결정화되었다. 독일적 계몽의 특질 가운데 하나는 '짐은 국가의 노복'이라고 말한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의 존재에 있다. 그는 『반 마키아벨리』를 써서 계몽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대왕은 독일 국민을 미성년으로 간주하여 프랑스인을 초빙해 프랑스 문화의 도입을 도모하고 경제와 문화 지도를 맡겼다. 독일 계몽주의는 토마지우스에서 시작된다. 그는 경험주의의 영향 하에서 독일 철학이 형이상학적 추상물로 기울어 현실적 지식을 떠나 있다고 비판하며 철학의 가치를 사회적 선 · 행복의 촉진에 놓고자 한다. 그는 루터 교회 내부에서 대두한 경건주의와 결부된다. 이어서 라이프니츠학파의 볼프는 형이상학에 적대적이 아니라 이성적 신학도 포함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는 인식에서의 확실성에 도달하는 이성을 중시한다. 종교에 관해서도 신앙보다 이성을 우위에 두는 그는 경건주의자들에게서 공격당했지만, 대왕의 보호를 받는다. 그의 영향 하에 있는 이들로는 줄처, 크누첸, 바움가르텐, 마이어, 멘델스존, 라이마루스 등이 있다. 특히 레싱과 멘델스존은 독일 계몽의 지도자로 여겨졌으며, 니콜라이가 편집한 『베를린 월보』는 계몽운동에 공헌했다. 프랑스와 영국의 계몽은 철학과 종교의 비판을 넘어서서 사회와 경제에 이르렀지만, 독일의 계몽은 압도적으로 철학과 종교와 문학에 제한되어 정신적 변혁의 우위가 주장되었다. 칸트는 경험주의와 이성주의의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채택함으로써 볼프적인 교조적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사고양식의 변혁을 주장했다. 또한 칸트는 계몽을 미성년상태로부터의 탈피에 두고 스스로 사고하는 것(Selbstdenken)을 계몽의 본질로 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자율성을 강조하여 계몽주의의 완성자로 간주되었다. 독일에서는 경건주의(Pietismus)가 계몽주의에 대립했지만, 특히 '반 계몽'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청년 헤르더와 괴테 등의 '질풍노도(Sturm und Drang)' 운동(1770-1778)으로서 그것은 루소의 영향도 받아 이성주의에 반항함으로써 낭만주의를 예고한다. 그들은 천재미학의 창조성에 입각하여 "현존하는 법을 일탈하고, 기성의 규칙을 파괴하며, 모든 인습의 속박 위에 자기를 선언"(괴테)하고자 했다. 헤르더는 보편적 이성보다도 국민의 특수적 인격성을 강조했다. 18세기 끝 무렵에 계몽주의에 반대하여 낭만주의가 대두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세계의 탈 마법화(脫魔法化)를 지향한 계몽이 자연지배로부터 인간지배m 야만에로 전화되는 계몽의 변증법을 묘사했으며, 이것이 20세기에 계몽이념에 대해 새롭게 재평가하도록 압박함으로써 계몽은 권위와 전통의 관계에서 재음미되기에 이르렀다. /이소에 가게아츠(磯江景孜)[네이버 지식백과] 계몽 [啓蒙, Aufklärung, lumière] (칸트사전, 2009.10.1, 도서출판 b)
註 00; 탈 마법화(脫魔法化/ Entzauberung) - 국가가 종교를 자신 아래에 두고 종교에서 벗어나는 일, 이른바 ‘세속화’라 할 수 있다. ,중세 서구 유럽문명의 토대이자 문화적 삶의 동질성을 마련했던 종교의 권위에 대한 의존이 르네상스 시기가 되면서 점차 줄어들었다. 르네상스가 신적 권위를 무너뜨리게 되는 혼란기가 되자 신앙은 자비심의 원천이 아닌 증오의 원천이 되었고 이렇게 변해버린 종교는 강한 파괴력을 지닌 잔인한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를 목도한 유럽인들에게 종교가 누렸던 종래의 가치는 퇴색되었고 종교전쟁의 잔인함과 그에 이은 정치적 불안정은 결국 종교의 자리를 대체한 국민국가의 탄생으로 귀결되었다. 중세 유럽인들 삶의 동질성을 이끌어낸 중요한 토대들 중 교회는 가장 확고한 인자였다. 그 확고함은 십자군 원정을 통해 세속통치력에 대한 우월성을 입증한 교황의 권위 때문에 가능했다. 교황을 뿌리로 한 교회의 실질적 담당자인 사제와 수도사들은 그들 자신들이 보여준 지적 권위와 도덕성으로 교회의 단단한 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 줄기의 마르지 않은 자양분으로 작용한 것은 신분고하에 관계없이 중세 사람들의 삶에 스며든 교회의 예배, 의식, 축제와 통과의례였다.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강한 뿌리, 단단한 줄기, 끊임없는 자양분을 갖춘 교회는 중세유럽의 가장 강력한 응집력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응집력을 자랑했던 교회도 14세기가 지나면서 약화되었다. 이 당시 교회권위를 약화시킨 첫 번째 원인은 교황권위의 실추였다. 응집력의 뿌리를 이루었던 교황권위는 세속 통치자들의 강력한 반발로 난처해졌다. 세속 통치자들은 교황이 취했던 “성직자에 대한 세금징수 금지”와 “세속군주들에 대한 무조건적 교황 우위”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했고, 그에 이어서 그들은 금전적인 지원거부와 군사적인 행동과 같은 강력한 공세를 취하게 된다. 이렇게 흔들린 교황의 권위와 함께 교회의 줄기를 이루고 있던 성직자와 수도사들은 자신들과 교리나 예배의식이 다른 종파에 대해 관용을 잃어, 상호 비난과 박해를 가했다. 교회의 줄기가 갈라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와 동시에 교회의 자양분이었던 예배의식, 절차등도 교파에 따라 달라지면서 교회는 더 이상 중세의 버팀목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 중세의 버팀목이었던 교회권위는 루터의 교회세력 쇄신을 위한 비판을 정점으로 돌이킬 수 없는 분열 상태에 이르렀다. 분열상태의 표출은 그대로 1530 - 1640년대의 대규모 분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의 분쟁은 종교적 열정을 더욱 타락시켰다. 열정은 곧 수난을 의미했기에 타락된 열정은 곧 핏빛으로 물들 유럽의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 공포의 유럽 세계에서는 신앙이 이제 더 이상 자비심의 원천이 아닌 증오와 파괴의 의지로 되었기 때문이다. 증오와 파괴의 의지는 이 시기 전쟁을 20세기 이전까지 유럽이 겪은 가장 잔인한 전쟁으로 기억되게 만들었다. 특히 이러한 무차별적 학살과 잔인성은 1618년에서 1648년에 걸친 30년 전쟁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그 잔혹함은 30년 전쟁의 결과 스티브 툴민의 표현에 따르면 “당시 독일과 보헤미아 지역은 납골당이 되었다”주1)고 할 정도였다. 납골당으로 만드는데 실질적으로 기여한 것은 화약을 사용한 신무기의 확산과 전쟁으로 빚어진, 굶주림과 질병이었다. 코를 찌르는 화약과 시체 냄새가 휩싸여 공황상태에 빠진 사람들에게 인간생명에 대한 존중과 관용의 정신은 찾기 어려웠다.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이러한 악의 구렁텅이에서 이 당시 유럽인들이 빠져나오게 되었으나 이들의 마음속에 화약이나 굶주림, 질병보다 “종교가 미래의 안녕은커녕 현세의 평화도 보장 못하는 것임”이 더 강하게 각인되었다. 이와 동시에 유럽을 다시 안정된 상태로 이끌어준 주체에 믿음을 갖기 시작했는데 그 주체가 바로 국가였다.
주1) 스티브 툴민(지음), 이종흡(옮김) <<코스모폴리스>> (경남대출판부, 2008년 1월)
그러면 종교간 분쟁을 종식시키고 유럽의 안정을 가져온 주체인 국가가 더 이상 종교가 보여주었던 잔인한 결과를 만들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었을까? 국가가 종교가 간 어두운 길을 가지 않기 위한 장치는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반도에서 시작되었던 도시국가 사이의 외교적 관계와 절차의 네트워크를 통해 서서히 마련되고 있었고 이를 통해 국가 간 분쟁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가 집약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30년 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렌조약이었다. 베스트팔렌조약을 경험한 군주들은 더 이상 전통적 방식의 화해형식이 국제관계를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법에 의해 운영되는 국제적 체제”만이 전쟁을 종식시키고 화해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세워진 외교의 기본절차와 국제적 의사소통수단이 표준화되었어도 전쟁이 종식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실제로 지방귀족세력과 중앙의 군주사이에 발생한 분쟁 즉 지방자치를 위한 투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분쟁의 양상은 종교전쟁이 보여준 잔인함에 견줄 정도로 크지 않았고 곧 해결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지역 세력을 통합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형성되었다. 국가의 중앙집권화는 군대라는 강력한 요소가 뒷받침 되었다. 이 군대는 점차 체계를 잡게 되고 지금의 “상비군”제도로 이어진다. 국가는 체계화된 군대조직을 통해 물리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종교의 맹목적 열정으로 인한 전쟁은 더 이상 국가가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1530 - 1640년대 사이에 벌어진 전쟁 때문에 종교의 잔혹함에 질려버렸는지 이해할 수 있다. 결국 통제된 물리력은 유럽인들의 안심기제였다. 안정을 되찾은 유럽인들은 국민국가의 통제아래 “납골당이 되어버린” 유럽재건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제 국가는 종교 우위, 즉 ‘탈마법화’를 추진하기 시작한 셈이었다. 유럽의 이러한 탈마법화는 곧 국가를 숭배하는 근대의 새로운 시작점이기도 했다. 이 시작점이었던 30년 전쟁 뒤 국가는 자신이 확보했던 정당화된 물리력을 통해 국민을 지배할 수 있는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자 손쉽게 시민을 강제로 징집하고 전쟁터로 내몰았다. 이렇듯 국가는 종교가 보여준 잔혹함을 없애기는커녕 국가자신을 위해 전쟁터에서 국민들이 목숨을 잃는 일마저 숭고한 희생이라 부르기까지 하고 있다. 결국 인간을 호모루퍼스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여 평화와 안녕을 지켜주겠다던 리바이어던은 다시 인민을 늑대의 상태로 되돌리고 있다. / ganseochi.egloos.com/4805492 / [서평]르네상스를 거쳐 이루어진 근대의 탈마법화 /1. 시어도어 랍(지음), 강유원, 정지인(옮김) <<르네상스의 마지막 날들>> (르네상스, 2008년 12월)와 관련자료 종합정리.
■ 헤겔사전
계몽(啓蒙; Aufklärung) - 종교적 미신과 압제에 의해서 야기된 민중의 무지몽매의 상태를 이성의 빛에 의해서 몰아내고자 하는 운동이지만,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는 정신이 자신에게 대립하는 현실을 경험해 가는 세계사적 경험의 한 단계로서 위치지어진다./『정신현상학』3. 398ff. 계몽에 대립하는 신앙의 단계에서는 인간의 자기의식은 종교적 세계와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서 양자의 동일함이 전제되어 있지만, 계몽의 단계에서 순수하게 꿰뚫어보는 것으로서 자아의 순수한 통찰에서 보면 이와 같은 신앙 안에는 미신과 선입견, 오류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오류의 나라"/[3. 401]로 된다. 거기서는 전제군주가 사제와 결탁하여 민중을 속이고, 무지몽매 가운데 있는 그대로의 신앙에 머무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순수하게 꿰뚫어보는 것은 이러한 민중에 대해 공기와 같이 저항 없이 침투, 보급되어 간다. 물론 현실에서는 이렇듯 순수하게 꿰뚫어보는 것인 계몽의 운동은, 신앙과 대립하여 싸우는 측면을 지니면서 진행되어 간다. 프랑스 계몽운동에서의 무신론과 유물론의 주장으로 상징되는 것처럼 종교적 미신과 압제에 대한 가차 없는 전투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몽은 자기의식으로서 대상을 부정하는 정신이긴 하지만, 내용을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다. 또한 종교가 지니는 적극적인 내용 자체를 자기 측에 경험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은 채 결국 세계의 현실에 대해서 전적으로 부정적으로 행동할 뿐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내용으로서는 자신의 이해를 기준으로 세계 전체를 파악해버리는 공리주의=유용성의 세계로 향하게 된다. 이와 같이 헤겔은 계몽의 운동이, 현실세계에 대한 자기의식의 능동적인 비판적 활동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근대의 주체주의의 필연적인 운동으로서 의미를 부여한다. 따라서 그 연장선상에 있는 칸트는 물론이고 독일 관념론 전체의 운동이 이와 같은 계몽의 운동의 필연적 귀결이기도 한다는 것을 헤겔은 보여주고 있다. / -사토 가즈오(佐藤和夫); [네이버 지식백과] 계몽 [啓蒙, Aufklärung] (헤겔사전, 2009.1.8, 도서출판 b)
/ 계몽주의란 어떤 사조(思潮)인가(4-1) 끝.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회원가입

사이트 정보

모시고넷 / 천도교 청주교구
(우) 28604 충북 청주시 흥덕구 신율로 92

  • 게시물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2,714
어제
4,438
최대
6,815
전체
2,166,322
Copyright © mosigo.net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