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동학혁명 전주올레길 자료(수정)
페이지 정보
본문
동학혁명 전주올레길 1구간자료
(동학혁명군진입로 용머리고개를 중심으로)
1. 용머리고개와 동학혁명 관련이야기
1894년 5월 31일(양력) 동학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할 당시 김제원평·전주삼천을 거쳐 이 고개를 지나 전주성을 점령하게 된다. 용머리 고개는 당시 전주로 들어오는 길로서 동학혁명군 진입로의 상징성이 있다. 동학혁명군의 발길을 따라 한 번 즘 걸어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으므로, 동학혁명군 올레길 시작으로서 정착되었으면 한다.
2. 서문지과 동학혁명 관련이야기
동학혁명군은 용머리 고개를 지나 서문을 통해 전주성에 입성한다. 전주성은 조선초기에 전라도관찰사 최유경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그 후 1734년(영조10년) 조현명에 의해 개축되었다. 전주성은 오늘날 없어졌으나 그 윤곽은 대체로 현재의 전주우체국을 중심으로 반경 약 500m의 원형에 근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문은 현재의 동문사거리이며, 이곳에서 경기전을 안쪽으로 끼고 성곽을 축조하여, 현존하는 풍남문에서 남문을 이루었다.
서문지는 현재 전주시 차이나거리 (구)다가동 파출소 앞에 표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 것으로 그 흔적을 역사 속에 남기고 있다.
3. 객사(보물538호)와 동학혁명 관련이야기
조선왕조의 역사와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설명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유적이다. 옛 전라감영의 권위와 명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중심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 팔작지붕이다. 중심건물 전면에는 ‘풍패지관’이란 초서체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풍패가 한고조 유방의 출생지를 일컫는 말로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의 본향임을 뜻하고 있다.
객사는 일반적으로 감영내 가장 북쪽에 위치한 건물이며, 중심건물에 조선왕조의 전패를 모시고, 좌우 익헌은 사신의 접대용 숙소로 쓰인다. 얼마전까지 중심건물과 서익현, 수직사 만이 남아 있었으나, 최근 동익헌을 복원하였다. 동학농민혁명과 직접적인 연관보다는 관련유적으로서 의미가 크다고 본다.
4. 전라감영-선화당(시도기념물107호)과 동학혁명 관련이야기
선화당은 동학농민혁명당시 전라감사 김학진의 집무실로 전라도 행정과 권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전봉준장군은 김학진과의 타협이후 이곳 선화당에 집무하면서 김학진과 함께 전라도 일대의 행정을 장악했다. 집강소를 역사상 최초의 민중권력기관 즉 민주주의 시원이라고 본다면, 선화당의 역사적 중요성과 의미는 어떤 유적에 비해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선화당은 동학혁명군의 집강소 통치와 관련하여 가장 상징적인 현장이다. 전라도의 수부이자 정치적 핵심이라는 상징적 의미에서 선화당이 복원되고 그 공간의 역사속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는 기념교육방식이 필요하다.
동학혁명 전주올레길 2구간자료
(한옥마을 동학혁명기념관을 중심으로)
1. 동학혁명기념관
동학혁명기념관은 1994년 동학혁명1백주년을 기념하여 천도교인 성금과 정부지원금을 받아 천도교전주교구 자리에 천도교중앙총부에서 건립한 지상 2층 지하 1층의 건물이다.
1층 강당은 동학종단인 천도교 시일 및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학술대회는 물론 각종 시민모임, 여러 단체에서 다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2층 전시실에는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선생의 초상화와 동학 2대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 동상 그리고 녹두 전봉준 장군의 유일한 사진 등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전국 동학유적지 사진설명이 1백여 점이 전시되어있다. 동학 창도에서부터 동학농민혁명, 3.1독립운동, 어린이 운동 등 동학천도교 역사자료인 동학경전 동경대전, 용담유사, 동학접주 임명장 등 1백50여점이 전시되어있다.
*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이 위치해 있는 곳에는 '전주한옥마을'이 관광단지로서, 국내는 물론 세계젹인 명소로 거듭 발전함에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동학혁명기념관도 이에따라 자료와 시설을 보충하고 있으며, 일반인들도 부담없이 동학영성수련을 체험할 수 있는. '동학-천도교 수련방'을 완성하여 개방할 예정이다.
2. 경기전(국가사적399호)과 동학혁명 관련이야기
현재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동학농민혁명과의 관련되는 역사 이야기가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초상화(어진)는 1410년(태종10) 서울 경주 평양 개경 영흥 등 6곳에 봉안되었었다. 경기전 어진은 1894년 5월 31일(양력) 동학혁명군이 전주성에 입성하게 되자, 전라감사 김문현·전주판관 민영승·영장 임태두 등은 경기전 이태조 영정과 조경묘(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의 위판을 봉안한 묘) 위패를 받들고 전주 동북쪽에 있는 위봉산성의 행궁에 봉안했다한다. 태조어진은 국난과 혁명을 거치면서 경기전에 봉안된 어진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국보급 유물이 되었다.
3. 풍남문(보물308호)과 동학혁명 관련이야기
1894년 1월부터 시작된 동학농민혁명 고부-무장-백산-황토현-장성-원평··전주용머리 고개를 지나 전주성의 서문을 통해 5월 전주성에 무혈 입성한다. 동학혁명군은 입성이후 완산전투와 전주화약을 체결해 오늘날 지방자치와 같은 민주주의의 시효로서, 혁명적이며 획기적인 집강소 통치를 실행하였다. 당시 1894년 동학농민혁명 기간 중 가장 큰 성과를 이뤄 낸 곳이 바로 조선왕조의 상징성과 전라감영이 자리했던 전주성이었다.
풍남문은 옛 전주성의 남문으로 조선 초기 전라도관찰사 최유경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그 후 1734년(영조10년) 조현명에 의해 개축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1978년에 복원하였다. 전주 사대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겨진 성문으로서, 1894년 당시 동학혁명군이 이룬 최대 전승지로서의 전주가 같은 의미와 점령 후 벌어지는 완산전투 등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역사적인 장소로, 동학농민혁명을 통하여 전주가 갖는 중요성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흔적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유적지이다.
4. 초록바위와 동학혁명 관련이야기
완산칠봉기슭 전주천변에 있는 초록바위는 동학대접주 김개남장군 순교순국터이다. 현재는 도로확장공사에 의해 그 흔적이 미미하게 남아있상태다. 김개남 장군은 1853년 출생하여 1895년 동학혁명 지도자중 한 명으로서 사형 당했다. 1890년 동학에 입도하여 1891년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2년 동학교도들에 의한 삼례교조신원운동, 1893년 보은집회 등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으며, 동학 2대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으로부터 동학대접주에 임명되었다.
1894년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장군과 함께 동학농민혁명 총관령 직책의 지도자로서 그 명성이 전국에 알려졌다. 동학혁명군의 전주성 점령과 전주화약, 그리고 외세개입에 의한 청일전쟁 후, 2차 동학농민혁명 즉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12월 27일 채포되어, 1895년 1월 8일 전주장대 이곳 초록바위에서 참수형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장군의 수급은 서울로 이송 1월 20일 서소문 밖에 3일간 효수된 뒤 다시 전주로 보내졌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김개남 장군의 묘소는 찾지 못하고 있다.
* 일본 공사관기록 자료에 의하면, 1894년 12월 3일(음력?) 신시(오후3시-5시)에 군인과 민간인을 서교장에 모이게 하여 김개남장군의 머리를 잘라 군중에게 보여 경각심을 일으키게 하였다고 한다.
5. 완산칠봉과 동학혁명 관련이야기
완산칠봉 전투지는 동학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직후 이를 되찾으려는 홍계훈의 경군과 전주성을 지키려는 혁명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여졌던 현장이다. 홍계훈의 관군은 완산칠봉에 진을 쳤고, 따라서 혁명군은 화력의 열세와 함께 지형적인 불리함도 안고 싸울수밖에 없었다. 특히 완산칠봉에 진을 치고 대포공격을 감행한 관군들의 공세에 의해 당시 전주성은 상당히 파괴되었고, 심지어 경기전도 훼손당했다고 전해진다. 구전에 의하면 당시 관군들이 포와 총을 쏘아대는 소리에, 동학혁명군들은 ‘관군들 방귀뀌는 소리가 요란하구나.’하였다 한다.
동학혁명 2차기포, 우금티 전투에서 패하고 후퇴하는 과정에서 전주천을 중심으로 완산칠봉 부근에 위치한 동학군과 전주성 부근 관군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많은 동학군이 살해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구전에 의하면 동학군 핏물이 완산칠봉 앞 전주천에 몇 날이 흘렀다고 한다. 최근 발견된 일본 방위청의 자료에 의하면 이곳 완산칠봉에 동학혁명군의 집단매장이 이루어졌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 완산칠봉정상 바로아래에 위치한 ‘동학농민군전주입성비’는 1991년 8월에 정부예산을 지원받아 전주시에서 건립하였다. 원래 건립 의도는 ‘동학혁명 전주화약기념탑’의 명칭으로, 옛 전주성자리 부근에 건립이 추진되었으나 진행과정에서 전주화약에 대한 자료미비와 학자들의 의견이 모아지지 않아 ‘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로 결정되었다.
동학혁명 전주올레길 3구간자료
1. 전주덕진공원과 동학혁명기념 관련이야기
- 전봉준장군 동상, 손화중장군 추모비, 김개남장군 추모비 -
전북대학교 바로 옆에 위치한 전주덕진공원에 전봉준선생 동상이 ‘보국안민’의 글자와 함께 1981년 10월 3일 '한국청년회의소'에서 세웠다.
동상 바로 앞쪽에 손화중장군 추모비는 ‘사람이 한울이다.와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비문과 함께 세워져 있다. 본 추모비는 1998년 11월 7일'손화중장군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세웠다.
그 옆에 김개남장군 추모비는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라는 비문과 함께 1993년 5월 30일'김개남장군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세웠다. 동학혁명군 대장 전봉준장군 동상과 함께 동학대접주 손화중장군, 김개남장군 추모비가 삼각형을 이루며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 동학농민혁명 3대지도자의 기념물은 전주를 상징하는 역사조형물로서, 현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큰 교훈과 가르침을 주고 있다.
2. 전주덕진 예술회관과 동학혁명기념 관련이야기
-동학혁명상-
전주덕진공원 바로 옆, 전북도립국악원 앞 부근에 '전주덕진 예술회관'이 있다. 오래전에는 '전주덕진, 반공회관'이라는 건물이름이었는데, 남북평화통일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예술회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예술회관 남쪽 벽면에 '동학혁명상'이 '학도의용군상'과 함께 나란히, 1980년 10월에 완성되어 동판벽화조각상으로 벽면에 붙여 세워져있다.
* 본 벽화조각상은 규모가 상당히 크고, 전봉준 장군과 함께 동학농민군들의 의지에 찬 모습이 작품으로 드러나는 예술성이 돋보인다.
(동학혁명군진입로 용머리고개를 중심으로)
1. 용머리고개와 동학혁명 관련이야기
1894년 5월 31일(양력) 동학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할 당시 김제원평·전주삼천을 거쳐 이 고개를 지나 전주성을 점령하게 된다. 용머리 고개는 당시 전주로 들어오는 길로서 동학혁명군 진입로의 상징성이 있다. 동학혁명군의 발길을 따라 한 번 즘 걸어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으므로, 동학혁명군 올레길 시작으로서 정착되었으면 한다.
2. 서문지과 동학혁명 관련이야기
동학혁명군은 용머리 고개를 지나 서문을 통해 전주성에 입성한다. 전주성은 조선초기에 전라도관찰사 최유경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그 후 1734년(영조10년) 조현명에 의해 개축되었다. 전주성은 오늘날 없어졌으나 그 윤곽은 대체로 현재의 전주우체국을 중심으로 반경 약 500m의 원형에 근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문은 현재의 동문사거리이며, 이곳에서 경기전을 안쪽으로 끼고 성곽을 축조하여, 현존하는 풍남문에서 남문을 이루었다.
서문지는 현재 전주시 차이나거리 (구)다가동 파출소 앞에 표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 것으로 그 흔적을 역사 속에 남기고 있다.
3. 객사(보물538호)와 동학혁명 관련이야기
조선왕조의 역사와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설명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유적이다. 옛 전라감영의 권위와 명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중심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 팔작지붕이다. 중심건물 전면에는 ‘풍패지관’이란 초서체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풍패가 한고조 유방의 출생지를 일컫는 말로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의 본향임을 뜻하고 있다.
객사는 일반적으로 감영내 가장 북쪽에 위치한 건물이며, 중심건물에 조선왕조의 전패를 모시고, 좌우 익헌은 사신의 접대용 숙소로 쓰인다. 얼마전까지 중심건물과 서익현, 수직사 만이 남아 있었으나, 최근 동익헌을 복원하였다. 동학농민혁명과 직접적인 연관보다는 관련유적으로서 의미가 크다고 본다.
4. 전라감영-선화당(시도기념물107호)과 동학혁명 관련이야기
선화당은 동학농민혁명당시 전라감사 김학진의 집무실로 전라도 행정과 권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전봉준장군은 김학진과의 타협이후 이곳 선화당에 집무하면서 김학진과 함께 전라도 일대의 행정을 장악했다. 집강소를 역사상 최초의 민중권력기관 즉 민주주의 시원이라고 본다면, 선화당의 역사적 중요성과 의미는 어떤 유적에 비해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선화당은 동학혁명군의 집강소 통치와 관련하여 가장 상징적인 현장이다. 전라도의 수부이자 정치적 핵심이라는 상징적 의미에서 선화당이 복원되고 그 공간의 역사속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자연스럽게 설명될 수 있는 기념교육방식이 필요하다.
동학혁명 전주올레길 2구간자료
(한옥마을 동학혁명기념관을 중심으로)
1. 동학혁명기념관
동학혁명기념관은 1994년 동학혁명1백주년을 기념하여 천도교인 성금과 정부지원금을 받아 천도교전주교구 자리에 천도교중앙총부에서 건립한 지상 2층 지하 1층의 건물이다.
1층 강당은 동학종단인 천도교 시일 및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학술대회는 물론 각종 시민모임, 여러 단체에서 다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2층 전시실에는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선생의 초상화와 동학 2대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 동상 그리고 녹두 전봉준 장군의 유일한 사진 등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전국 동학유적지 사진설명이 1백여 점이 전시되어있다. 동학 창도에서부터 동학농민혁명, 3.1독립운동, 어린이 운동 등 동학천도교 역사자료인 동학경전 동경대전, 용담유사, 동학접주 임명장 등 1백50여점이 전시되어있다.
*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이 위치해 있는 곳에는 '전주한옥마을'이 관광단지로서, 국내는 물론 세계젹인 명소로 거듭 발전함에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동학혁명기념관도 이에따라 자료와 시설을 보충하고 있으며, 일반인들도 부담없이 동학영성수련을 체험할 수 있는. '동학-천도교 수련방'을 완성하여 개방할 예정이다.
2. 경기전(국가사적399호)과 동학혁명 관련이야기
현재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동학농민혁명과의 관련되는 역사 이야기가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초상화(어진)는 1410년(태종10) 서울 경주 평양 개경 영흥 등 6곳에 봉안되었었다. 경기전 어진은 1894년 5월 31일(양력) 동학혁명군이 전주성에 입성하게 되자, 전라감사 김문현·전주판관 민영승·영장 임태두 등은 경기전 이태조 영정과 조경묘(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의 위판을 봉안한 묘) 위패를 받들고 전주 동북쪽에 있는 위봉산성의 행궁에 봉안했다한다. 태조어진은 국난과 혁명을 거치면서 경기전에 봉안된 어진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국보급 유물이 되었다.
3. 풍남문(보물308호)과 동학혁명 관련이야기
1894년 1월부터 시작된 동학농민혁명 고부-무장-백산-황토현-장성-원평··전주용머리 고개를 지나 전주성의 서문을 통해 5월 전주성에 무혈 입성한다. 동학혁명군은 입성이후 완산전투와 전주화약을 체결해 오늘날 지방자치와 같은 민주주의의 시효로서, 혁명적이며 획기적인 집강소 통치를 실행하였다. 당시 1894년 동학농민혁명 기간 중 가장 큰 성과를 이뤄 낸 곳이 바로 조선왕조의 상징성과 전라감영이 자리했던 전주성이었다.
풍남문은 옛 전주성의 남문으로 조선 초기 전라도관찰사 최유경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그 후 1734년(영조10년) 조현명에 의해 개축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1978년에 복원하였다. 전주 사대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겨진 성문으로서, 1894년 당시 동학혁명군이 이룬 최대 전승지로서의 전주가 같은 의미와 점령 후 벌어지는 완산전투 등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역사적인 장소로, 동학농민혁명을 통하여 전주가 갖는 중요성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흔적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유적지이다.
4. 초록바위와 동학혁명 관련이야기
완산칠봉기슭 전주천변에 있는 초록바위는 동학대접주 김개남장군 순교순국터이다. 현재는 도로확장공사에 의해 그 흔적이 미미하게 남아있상태다. 김개남 장군은 1853년 출생하여 1895년 동학혁명 지도자중 한 명으로서 사형 당했다. 1890년 동학에 입도하여 1891년 접주로 임명되었다. 1892년 동학교도들에 의한 삼례교조신원운동, 1893년 보은집회 등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으며, 동학 2대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으로부터 동학대접주에 임명되었다.
1894년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장군과 함께 동학농민혁명 총관령 직책의 지도자로서 그 명성이 전국에 알려졌다. 동학혁명군의 전주성 점령과 전주화약, 그리고 외세개입에 의한 청일전쟁 후, 2차 동학농민혁명 즉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12월 27일 채포되어, 1895년 1월 8일 전주장대 이곳 초록바위에서 참수형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장군의 수급은 서울로 이송 1월 20일 서소문 밖에 3일간 효수된 뒤 다시 전주로 보내졌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김개남 장군의 묘소는 찾지 못하고 있다.
* 일본 공사관기록 자료에 의하면, 1894년 12월 3일(음력?) 신시(오후3시-5시)에 군인과 민간인을 서교장에 모이게 하여 김개남장군의 머리를 잘라 군중에게 보여 경각심을 일으키게 하였다고 한다.
5. 완산칠봉과 동학혁명 관련이야기
완산칠봉 전투지는 동학혁명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직후 이를 되찾으려는 홍계훈의 경군과 전주성을 지키려는 혁명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여졌던 현장이다. 홍계훈의 관군은 완산칠봉에 진을 쳤고, 따라서 혁명군은 화력의 열세와 함께 지형적인 불리함도 안고 싸울수밖에 없었다. 특히 완산칠봉에 진을 치고 대포공격을 감행한 관군들의 공세에 의해 당시 전주성은 상당히 파괴되었고, 심지어 경기전도 훼손당했다고 전해진다. 구전에 의하면 당시 관군들이 포와 총을 쏘아대는 소리에, 동학혁명군들은 ‘관군들 방귀뀌는 소리가 요란하구나.’하였다 한다.
동학혁명 2차기포, 우금티 전투에서 패하고 후퇴하는 과정에서 전주천을 중심으로 완산칠봉 부근에 위치한 동학군과 전주성 부근 관군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많은 동학군이 살해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구전에 의하면 동학군 핏물이 완산칠봉 앞 전주천에 몇 날이 흘렀다고 한다. 최근 발견된 일본 방위청의 자료에 의하면 이곳 완산칠봉에 동학혁명군의 집단매장이 이루어졌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 완산칠봉정상 바로아래에 위치한 ‘동학농민군전주입성비’는 1991년 8월에 정부예산을 지원받아 전주시에서 건립하였다. 원래 건립 의도는 ‘동학혁명 전주화약기념탑’의 명칭으로, 옛 전주성자리 부근에 건립이 추진되었으나 진행과정에서 전주화약에 대한 자료미비와 학자들의 의견이 모아지지 않아 ‘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로 결정되었다.
동학혁명 전주올레길 3구간자료
1. 전주덕진공원과 동학혁명기념 관련이야기
- 전봉준장군 동상, 손화중장군 추모비, 김개남장군 추모비 -
전북대학교 바로 옆에 위치한 전주덕진공원에 전봉준선생 동상이 ‘보국안민’의 글자와 함께 1981년 10월 3일 '한국청년회의소'에서 세웠다.
동상 바로 앞쪽에 손화중장군 추모비는 ‘사람이 한울이다.와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비문과 함께 세워져 있다. 본 추모비는 1998년 11월 7일'손화중장군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세웠다.
그 옆에 김개남장군 추모비는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라는 비문과 함께 1993년 5월 30일'김개남장군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세웠다. 동학혁명군 대장 전봉준장군 동상과 함께 동학대접주 손화중장군, 김개남장군 추모비가 삼각형을 이루며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 동학농민혁명 3대지도자의 기념물은 전주를 상징하는 역사조형물로서, 현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큰 교훈과 가르침을 주고 있다.
2. 전주덕진 예술회관과 동학혁명기념 관련이야기
-동학혁명상-
전주덕진공원 바로 옆, 전북도립국악원 앞 부근에 '전주덕진 예술회관'이 있다. 오래전에는 '전주덕진, 반공회관'이라는 건물이름이었는데, 남북평화통일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예술회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예술회관 남쪽 벽면에 '동학혁명상'이 '학도의용군상'과 함께 나란히, 1980년 10월에 완성되어 동판벽화조각상으로 벽면에 붙여 세워져있다.
* 본 벽화조각상은 규모가 상당히 크고, 전봉준 장군과 함께 동학농민군들의 의지에 찬 모습이 작품으로 드러나는 예술성이 돋보인다.
관련링크
- 이전글초청장(모시는 글) 12.05.17
- 다음글[환원소식] 김재인(선암) 선도사 환원(남해교구, 도원포) 12.05.18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