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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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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댓글 0건 조회 2,174회 작성일 13-03-28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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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8)
原本; 이것이 當時의 國內政勢의 一端이었던바 崔水雲은 이것을 端的으로 批判하였으되
曰 「君不君 臣不臣」이라 하여 政治의 腐敗를 表徵하고
曰 「父不父 子不子 夫不夫 婦不婦」라 하여 倫理의 頹廢를 表徵하고
曰 「一世上 저 人物이 塗炭中 아니런가」하여 民生의 苦難을 表徵하고
曰 「儒道佛道 累千年에 運이亦是을 다했던가」하여 宗敎의 衰微를 表徵하였었다.
修 2; 이것이 當時의 國內政勢의 一端이여었던 바 崔水雲은 이것을 端的으로 批判하였으되
曰 「君不君 臣不臣」이라 하여 政治의 腐敗를 表徵하고
曰 「父不父 子不子 夫不夫 婦不婦」라 하여 倫理의 頹廢를 表徵하고
曰 「一世上 저 人物이 塗炭中 아닐런가」하여 民生의 苦難을 表徵하고
曰 「儒道 佛道 累千年에 運이 亦是 다했던가」하여 宗敎의 衰微를 表徵하였었다.
修 1; 이것이 當時의 國內政勢의 一端이었던바 崔水雲은 이것을 端的으로 批判하였으되
曰, 「君不君 臣不臣」이라 하여 政治의 腐敗를---
曰, 「父不父 子不子 夫不夫 婦不婦」라 하여 倫理의 腐敗를---
曰, 「一世上 저 人物이 塗炭中 아닐런가」하여 民生의 문제를---
曰, 「儒道佛道 累千年에 運이 亦是 다했던가」하여 宗敎의 쇠퇴를 개탄하였었다. /인용문장의 서술부분을 생략하여 내용을 불분명하게 했다.
解說; 이것이 그때의 국내정세의 한 모습이었던바 崔水雲 대신사께서는 이것을 곧바르고 명백하게 批判하기를 曰, 「君不君 臣不臣」이라 하여 19세기 중엽의 정치의 부패상을 들어내어 설명하였고, 曰, 「父不父 子不子 夫不夫 婦不婦」라 하여 윤리의 부패상을 들어내어 설명하였고, 曰, 「一世上 저 人物이 塗炭中 아닐런가」하여 백성들의 괴로움과 어려운 삶의 문제를 들어내어 설명하였고, 曰, 「儒道佛道 累千年에 運이 亦是 다했던가」라 하여 종교가 쇠퇴해감을 들어내어 설명하였다
註 00; 표징(表徵)-밖으로 드러나는 특징이나 상징 또는 어떤 것과 다르다는 것을 뚜렷하게 드러내 보이는 특징을 말한다.
註 00; 君不君 臣不臣은 몽중노소문답가에 나오는 구절이다.
평생에 하는근심 효박한 이세상에
군불군 신불신과 부불부 자부자를
주소간 탄식하니 울울한 그회포는
흉중에 가득하되 아는사람 전혀없어
처자산업 다버리고 팔도강산 다밟아서
인심풍속 살펴보니 무가내라 할길없네
우습다 세상사람 불고천명 아닐런가
그러나 君不君 臣不臣은 논어(안연편)의 제12장 11에 자기의 신분(이름과 지위)에 맞는 도덕성을 가져라. 에 나오는 말로 그 근원은 다음과 같다. 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臣臣父父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제나라의 경공이 바른 정치란 무엇인가 대해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어버이는 어버이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답게 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말에 경공이 다시 물었다. ‘좋은 말씀이오, 진실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어버이가 어버이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한 것이 내 나라의 형편이라면, 비록 나라에 곡식(의식주)이 쌓여 있다 한들 어찌 그것을 내가 먹고 즐기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註 00; ‘問政’의 정(政)이란 정치라는 것은 바로잡는 것이다.(政者正也) ‘政者正也’란 말은 논어의 子路篇 13장 3에서 자로와 공자의 문답에서 나온 말이다.
註 00; “名”이란 王, 大人, 四民(士農工商), 君, 臣, 父, 子, 夫, 婦, 등의 명칭을 말하며, “分”이란 그 이름에 따른 職分과 分數(직분에 대한 책임)를 말한다. 그러므로 “正名”이란 周禮에서 정한 身分과 이에 따른 職分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名分은 禮의 요체인 것이다.
子路曰 : "衛君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路 : 위 임금이 선생님을 모셔다가 정치를 부탁드린다면, 선생님께서는 무엇부터 먼저 하시겠습니까?子曰 : "必也正名乎!" 공자 : 반드시 명분부터 바로잡겠다.子路曰 :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子路 : 그런 게 있습니까? 선생님은 우원(迂遠/ 물정을 잘 모른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모른다.)하십니다. 어째서 그것을 바로잡으시겠다는 것입니까?
子曰 : "野哉, 由也! 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錯手足. 故君子名之必可言也, 言之必可行也. 君子於其言, 無所苟而已矣.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
공자 : 비속(卑俗)하구나 유여. 군자는 자기가 모르는 일에는 입을 다무는 법이다. 명분이 서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불흥이면 형벌이 적중하지 못하고, 그러하면 백성들이 손발 둘 곳이 없게 된다.그래서 사물에 이름을 붙일 때에는 반드시 말로 전달될 수 있어야 하며, 말로 전달되면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 군자는 말(言行)에 있어 구차스러운 바가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 몸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몸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해도 따르지 않는다.
註 00; ‘父不父 子不子 夫不夫 婦不婦’는 은 몽중노소문답가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세상에 군불군 신불신과 부불부 자부자를 주소간 탄식하니’의 가사내용을 구체적으로 확대하여 설명한 것임. 위의 註 00에서 전후문장을 참조
註 00; ‘一世上 저 人物이 塗炭中 아닐런가’는 권학가에 나오는 구절이다.
방방곡곡 찾아들어 만나기만 만날진댄
흉중에 품은회포 다른할말 바이없고
수문수답 하온후에 당당정리 밝혀내어
일세상 저인물이 도탄중 아닐런가
함지사지 출생들아 보국안민 어찌할꼬
註 00; ‘儒道佛道 累千年에 運이 亦是 다했던가’는 교훈가에 나오는 구절이다.
유도불도 누천년에 운이역시 다했던가
윤회같이 둘린운수 내가어찌 받았으며
억조창생 많은사람 내가어찌 높았으며
일세상 없는사람 내가어찌 있었던고
아마도 이내일은 잠자다가 얻었던가
꿈꾸다가 받았던가 측량치 못할러라
註 00; 표징(表徵)-밖으로 드러나는 특징이나 상징 또는 어떤 것과 다르다는 것을 뚜렷하게 드러내 보이는 특징을 말한다.
正本; 이것이 當時의 國內政勢의 一端이여었던 바, 崔水雲은 이것을 端的으로 批判하였으되
曰 「君不君 臣不臣」이라 하여 政治의 腐敗를 表徵하고
曰 「父不父 子不子 夫不夫 婦不婦」라 하여 倫理의 頹廢를 表徵하고
曰 「一世上 저 人物이 塗炭中 아닐런가」하여 民生의 苦難을 表徵하고
曰, 「儒道佛道 累千年에 運이 亦是 다했던가」하여 衰微를 表徵하였다.
原本; 다음 國際情勢로는 英國의 産業革命과 佛蘭西의 政治革命을 經過한 西洋의 資本主義列强의 勢力은 벌써 國外發展을 圖하여 帝國主義的 侵略의 魔手를 印度, 緬甸, 東印度, 安南, 中國等地에 페고 있는 때이다
修 2; 다음 國際情勢로는 英國의 産業革命과 佛蘭西의 政治革命을 經過한 西洋의 資本主義列强의 勢力은 벌써 國外發展을 圖하여 帝國主義的 侵略의 魔手를 印度, 緬甸, 東印度, 安南, 中國, 等地에 펴고 있는 때이다.
修 1; 다음 國際情勢로는 英國의 産業革命과 佛蘭西의 政治革命을 거친 西洋의 資本主義 列强의 勢力은 벌써 帝國主義的 侵略의 魔手를 印度, 버마, 東印度, 越南, 中國, 等地에 펴고 있는 때이다. / 일부 문장을 첨삭하였다. 첨삭 정도와 내용을 비교하기 바람
解說; 다음으로 국제정세는 영국의 산업혁명과 불란서의 정치혁명을 거친 서양의 자본주의 열강(列强)의 세력은 벌써 제국주의적인 침략의 마수(魔手)를 인도, 미dis마, 동인도(東印度), 베트남, 중국, 등 여러 나라에 펴고 있는 때였다.
註 00; 열강(列强)- 국제 관계에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영향력이 있고 국력이 강한 여러 나라들(强國).
註 00; 마수(魔手)- 악마의 손이라는 뜻으로, 사람을 현혹하거나 파멸시키는 음흉한 손길이나 수단을 비유적으로 쓰는 말이다.
註 00; 면전(緬甸)- 버마 또는 미얀마,
註 00; 동인도(東印度- 아시아 대륙 남동부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사이의, 인도양과 태평양이 접하는 해역에 있는 수많은 섬들. 근대 초기 유럽인들이 인도의 동쪽에 있는 여러 섬들을 이르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註 00; 안남(安南)- 인도차이나 반도의 베트남 또는 越南.
正本; 다음 國際情勢로는 英國의 産業革命과 佛蘭西의 政治革命을 經過한 西洋의 資本主義列强의 勢力은 벌써 國外發展을 圖하여 帝國主義的 侵略의 魔手를 印度, 緬甸, 東印度, 安南, 中國 等地에 펴고 있는 때이다
原本; 卽一八四O年에 中國에서는 有名한 阿片戰爭이 이러나 英國은 中國의 香港을 奪取한外에 五港의 開放을 얻었고 又 아론號(英國商船) 凌辱事件과 佛國宣敎師 殺害事件으로 因하여 一八五六年에 聯合軍의 北京侵入이 있었으며 그보다 먼저 露西亞는 愛琿條約에 의하여 黑龍江以北의 地를 割取하였고 나아가 沿海州를 取하는同時에 浦鹽斯德를 軍港으로 定하여 西伯利亞 鐵道를 敷設하여 滿洲와 朝鮮으로 進出할 計劃을 세웠었다.
修 2; 卽 一八四O年에 中國에서는 有名한 阿片戰爭이 일어나 英國은 中國의 香港을 奪取한 外에 五港의 開放을 얻었고 又「아론」號(英國商船) 凌辱事件과 佛國 宣敎師 殺害事件으로 因하여 一八五六年에 聯合軍의 北京侵入이 있었으며 그보다 먼저 露西亞는 愛琿條約에 의하여 黑龍江 以北의 地를 割取하였고 나아가 沿海州를 取하는 同時에 「浦鹽斯德」를 軍港으로 定하여 西伯利亞 鐵道를 敷設하여 滿洲와 朝鮮으로 進出할 計劃을 세웠었다.
修 1; 卽 一八四O年에 中國에서는 有名한 阿片戰爭이 일어나 英國은 中國의 香港을 奪取한 외에 五港의 開放을 얻었고 「아론」號(英國商船) 凌辱事件과 佛國 宣敎師 殺害 사건으로 因하여 一八五六年에 聯合軍의 北京侵入이 있었으며 그보다 먼저 露西亞는 愛琿條約에 의하여 黑龍江 以北의 땅을 빼앗고 나아가서는 沿海州를 취하는 동시에 「우라지보스독크」를 軍港으로 하여 시베리아 철도를 부설하고 만주와 우리 한국으로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 일부 문장을 수정하였다. 첨삭 정도와 내용을 비교하기 바람
解說; 즉 一八四O年에 중국에서는 유명한 阿片戰爭이 일어나 영국은 중국의 홍콩을 빼앗아 割讓(나누어 관리권을 양도받음.)하고 더하여 광저우(廣州), 샤먼(廈門), 푸저우(福州), 닝푸(寧浦), 상하이(上海) 등의 5개 항구의 개방을 얻어냈다, 또「아론」號(英國商船) 凌辱事件과 佛國 宣敎師 殺害 사건으로 인하여 一八五六年에 연합군의 북경침입이 있었으며 그보다 먼저 露西亞는 愛琿條約에 의하여 黑龍江 이북의 땅을 빼앗고 나아가서는 沿海州를 취하는 동시에 「우라지보스독크」를 軍港으로 하여 시베리아 철도를 부설하고 만주와 우리 한국으로 진출할 계획을 세웠다.
註 00; 아편전쟁(阿片戰爭/Opium Wars)과 아론號(英國商船) 凌辱事件(모욕을 당한 사건)- 19세기 중엽 서구 열강이 중국에서 상품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과 벌인 2차례의 전쟁이다. 학계에서는 이를 제1차 중·영 전쟁(中英戰爭/1839~42)과 제2차 중·영 전쟁(1856~60)으로 부른다. 제1차 중·영전쟁의 빌미가 된 것은, 아편문제였으므로 일반적으로 이 전쟁을 아편전쟁이라고 하며, 제2차 전쟁은 애로호 사건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서구의 자본주의와 중국 간의 충돌이라는 포괄적 의미를 함축하는 중·영 전쟁이라는 용어가 보다 타당하다. 보고 있다.
제1차 중·영 전쟁의 배경은 19세기에 들어 영국이 자국의 상품판매시장을 중국에서 찾으려는 영국에게, 가장 큰 장애는 광둥(廣東)의 무역체제였다. 광둥 무역체제하에서는 대외무역이 광저우(廣州) 한 항구에 국한되었고, 청나라의 허가를 얻은 공행(公行)이라는 독점적 상인 길드를 통해서만 무역이 가능했다. 영국은 공행의 자의적인 관세 부과와 외국 상인의 무역에 대한 제한 및 무역항의 제한을 무역신장의 장애로 여겼다. 따라서 아편전쟁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사신들을 파견하여 광둥 무역체제를 타파하고 무역을 확대하고자 했으나 중국은 이를 거부했다. 한편 영국에 대한 중국의 최대수출품은 차(茶)였고, 영국의 주요수출품은 모직물과 인도 면화였다. 양국의 무역수지는 대체로 중국의 수출초과였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차 수입을 결제할 은(銀)이 부족했다. 이에 영국은 은의 지불 없이 차를 수입할 방안을 모색했고 그에 따른 대체 수출품이 곧 아편이었다. 즉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지방의 무역 상인이 중국에 밀수출하여 벌어들인 은으로 중국의 차를 수입한 것이었다. 1820년대 후반부터는 아편수입으로 인해 중국이 은의 유입국에서 유출국으로 바뀌었다.
註 00; 공행(公行)- Gonghong (웨) Kunghung (영) Cohong/Hong/Conghong. 제1차 아편전쟁(1839~42) 이전 광저우[廣州]에서 서구상인과 무역할 수 있는 특권을 중앙정부로부터 부여받았던 중국 상인조합. 이러한 상회를 '양행'(洋行)이라고 불렀고, 이러한 상인을 가리켜 '행상'(行商)이라고 했다. 17세기 중엽까지 이러한 상인들이 이론적으로는 13개가 있다고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늘 4개를 넘지 못했다. 이 제도는 1740년대에 성립되었다. 이 제도에 의해 광저우에 도착한 모든 외국 선박은 행상의 감독을 받아야 했고, 행상은 외국상인들의 관세지불과 예의바른 행실을 보장해야 했다. 광저우가 유일한 대외무역항으로 개방되었을 때(1760), 광저우 행상은 외국인에게 차와 비단을 팔 수 있도록 허가받은 유일한 상인이었다. 비록 행상은 관리들에게 많은 돈을 강제로 바쳐야 했지만, 무평전과 같은 몇몇 상회의 행상들은 많은 재산을 축적하기도 했다. 1720~22년 행상은 피로 맹세하면서 집단가격결정제도를 수립했는데, 이는 중국 상인조합 사이에서 널리 행해졌다. 월해관 감독(粤海關監督)의 지휘를 받으면서 행상들은 공행을 결성했다(1760). 공행이라는 말은 가격결정을 위한 연합을 의미하지만, 장사할 때 사용되었던 피진 영어(포르투갈어 등이 혼합된 중국의 상업영어에 의해 코홍(Cohong)이라고 변형되어 상인 일반을 지칭하게 되었다. 행상은 광저우에서 집단적으로 대외무역을 독점했지만, 실제로 개개인의 거래행위에서는 상당히 자유로웠다.
註 00; 길드(guild 또는 gild)- 수공업자나 상인들이 상호 부조와 보호 및 직업상의 권익 증진을 위해 결성한 조합. 길드는 11~16세기에 유럽에서 번성하여 당시 경제·사회 구조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었다. 중세의 길드는 일반적으로 상인 길드나 수공업 길드였다. 상인 길드는 특정 마을이나 도시에서 영업하는 상인들의 전부 또는 대다수가 참여하는 조합이었으며, 조합원들은 지방 상인이거나 원거리 무역상인일 수도 있고, 도매상이거나 소매상일 수도 있고, 취급하는 상품에 따라 각양각색일 수도 있었다. 반면 수공업 길드는 특정 산업의 모든 기술자와 장인을 포함하는 직업 조합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모직업에는 직공(織工)·염색공·축융공(縮絨工) 등의 길드, 건축업에는 석공(石工)·건축기사 등의 길드가 있었고, 도장공(塗裝工)·금속세공인·대장장이·제과기술자·푸주한·무두장이·비누 제조공 등의 길드가 있었다. 길드는 지역경제에서 여러 가지의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소재지에서나 특정의 산업에서 거래의 독점 체제를 수립하고, 상품의 질과 거래 관행의 보전을 위한 기준을 세우고 유지했으며, 거래 상품과 필수 일용품의 안정된 가격의 유지를 위해 힘쓰고, 조합원들의 권익을 증진하고 그들의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읍이나 시 정부를 통제할 수단을 강구했다.
고대의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에 상인이나 수공업자들의 항구적인 조합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직접적인 증거는 전혀 없으며, 헬레니즘 시대 이전의 그리스에도 그러한 결사에 관한 증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고대 로마에는 그러한 조합들이 '콜레기아'라는 이름으로 존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수공업 길드들은 로마 공화정 말기에 생겨난 것으로 보이는데, 중앙정부가 인가를 내리고 행정장관이 감독하도록 되어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치세 이래로 제국정부는 공권력과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 이 길드들을 계획적으로 이용했다. 정부는 길드의 회원 자격을 숙련공들의 세습 계급으로 제한하려고 했지만, 로마 제국 말기에 정부가 길드에 세금 부담을 가중시킴으로써 AD 4세기까지는 대부분의 길드가 파탄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면서 유럽 사회에서 길드도 사라져 6세기 이상이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에는 '콜레기아'가 남아 있었으며, 특히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서 그 존재가 뚜렷했다. 900년에 비잔틴 황제 레오 6세의 명에 따라 작성된 듯한 정부 간행물인 유명한 〈행정장관의 책 Book of the Paect〉은 길드의 구체적인 조직에 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그 주된 목적은 콘스탄티노플 시내의 모든 수공업과 상업을 특히 자금 조달과 징세 목적으로 엄격히 통제하려는 데 있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중세 유럽의 길드가 비잔틴 제국의 '콜레기아'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지만, 이 상이한 단체들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정립된 적은 전혀 없으며, 중세 길드의 기원은 암흑시대로부터 벗어날 당시의 서유럽과 북유럽에서 경제기구들이 변화해간 과정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유럽에서의 길드의 성립은 고질화된 사회적 탈구(脫臼)와 농업의 후진성을 특징으로 한 암흑시대의 뒤를 이어 10~11세기에 도시들이 생겨나고 성장함으로써만 가능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의 상인들은 시장에서 시장으로 또는 마을에서 마을로 직접 돌아다니는 행상인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장사하러 돌아다닐 때 산적들이나 봉건 영주들의 착취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들끼리 단결하는 경향이 있었다. 점차 상인들은 특정 도시를 생활터전 겸 영업활동의 거점으로 삼아 활동 범위를 확대하고 상품 운송 같은 작업은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하게 되었다. 상인들의 조합은 곧 빈틈없이 조직화되었고 시정부의 인가를 받아 합법화되었다. 이들 상인 길드는 장거리 교역과 시내 거주민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영업활동에 있어서 회원들의 상업을 규제하고 보호하는 일에 깊이 관여했다. 길드는 식품·의류를 비롯한 그밖의 필수품의 배분과 판매를 통제함으로써 지방의 상업을 독점하게 되었다. 외국의 상인이나 무역업자들이 어떤 지방의 상거래에 참여하려면 그곳의 길드에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으며, 어떤 외부 상인들은 그 상거래에 참여하는 것이 아예 금지되기도 했다. 13세기까지 서유럽의 상인 길드에는 그 지방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시민들이 속하게 되었으며, 12~13세기에 많은 도시가 자치 정부를 수립함에 따라 길드들이 그들의 시의회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으로써 길드들은 모든 경제활동을 규제하는 법안들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수공업 길드는 상인 길드에 바로 뒤이어 생겨났다.
수공업 길드의 발원지는 분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면서 확대되어가는 도시들이었다. 한 도시 내의 수공업자 집단은 보통 같은 동네에서 가족 단위로 운영되는 많은 공장들로 구성되었으며, 그런 공장의 '선생'이나 주인들은 혈연이나 지연 또는 도제(徒弟)들의 공유에 의해 서로 관련을 맺었다. 이런 수공업자들은 그들 사이의 경쟁을 규제했으므로 그들 자신과 그들의 도시의 번영을 전체적으로 증진하기 위해 단결하기가 쉬웠다. 수공업자들은 그들의 전문직종을 관리하고 품질 기준을 설정하는 등의 기본적인 규정에 쉽게 합의를 보았다. 이런 식으로 최초의 수공업 길드가 결성되었다. 수공업 길드와 상인 길드는 흔히 특정 산업의 서로 다른 분야들을 지배했다. 예를 들어 양털가공을 하는 마을이나 도시에서 상인 길드는 원모의 구입과 가공 섬유의 생산·판매를 지배하는 한편 수공업 길드는 양모의 소모(梳毛)·염색·방직 등 생산과정을 지배했다.
중세 수공업 길드의 내부 조직은 문서들을 통해 잘 알려져 있으며, 유럽의 어디서나 대체로 비슷했다. 길드 구성원 전체회의는 몇 개의 입법권을 보유했지만, 실제로 길드의 정책 통제권은 소수의 임원 및 자문(또는 보좌)위원회가 장악했다. 길드는 도제제도를 기초로 하여 위계질서를 극도로 중시하는 집단이 되어갔다. 이 위계제도에서 길드의 회원들은 장인(匠人)·직인(職人)·도제로 나뉘었다. 장인은 공인된 실력으로 자기의 공장을 경영하며 도제를 거느리는 기술자였으며, 도제는 장인의 집에 묵으며 그의 직업의 제반 요소에 관해 교육을 받는 10대 또는 사춘기의 소년들이었다. 도제는 숙식·의복·교육을 제공받는 대가로 장인을 위해 무보수로 일했다. 5년 내지 9년의 정해진 수습기간을 마치면 도제는 직인, 즉 어느 장인 밑에서나 일할 수 있고 노동 임금을 받는 독립기술자가 되었다. 기술자로서의 자격이 있다는 증거('걸작품')를 내놓을 수 있는 직인은 길드 내에서 장인의 신분으로 올라갈 수 있었고, 장인이 되면 자기의 공장을 세우고 도제를 채용하여 교육시킬 수 있었다. 장인들은 어떤 분야의 수공업자 길드에서건 기술자로서의 자격만이 아니라 부와 사회적 지위까지 누리는 핵심세력의 인물들이기 마련이었다. 도제제도는 수공업 길드의 번영을 떠받치는, 작업·전통·인원의 지속을 확보하는 장치인 만큼 길드의 기본요소였다. 특히 인기가 높았던 어떤 수공업 분야의 경우 아들을 장인의 도제로 들여보내려면 부모가 장인에게 거액의 돈을 내야 하기도 했다. 도제의 자격이 장인의 아들이나 친척으로 제한되는 경우도 흔했다.
수공업 길드는 회원들의 직업상의 비리를 단속했다. 길드의 사법부와 임원들은 불량한 작업과 불공정 경쟁과 그 밖의 문제에 대한 고소 내용을 조사하여 길드의 규정과 기준을 어긴 것으로 판명된 회원들에게는 벌금을 부과했다.
길드는 경제적·교육적 기능 외에 다른 목적에도 이바지했다. 길드는 흔히 수호성인과 연관되었으며, 지방의 길드가 교구교회 안에 예배당을 마련하여 회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길드는 가난한 회원만이 아니라 지역 전체를 상대로 하는 자선 사업도 벌였다. 또한 회원들이 연회를 개최하고 공적인 업무를 수행할 길드 집회소 건물을 지어 운영하기도 했다. 같은 도시 내에서 보다 부유한 상인 길드의 회원들과 경제적으로는 뒤지지만 수적으로는 훨씬 우세한 수공업 길드의 회원들 사이에는 종종 마찰이 일어났다. 이 두 집단 사이의 충돌은 시정부를 장악하기 위해 경쟁할 때 특히 치열했으며 이탈리아, 독일, 저지대 국가들의 많은 도시에서 발생했다. 길드의 배타성·보수주의·독점형태와 선별가입 제도들은 결국 길드의 경제적 유용성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도제제도는 거의 전적으로 세습화되었으며, 장인들은 도제가 직인이 되고 직인이 장인이 될 수 있는 기준을 터무니없이 높였다. 길드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했고 본거지의 거래를 독점하려 했다. 그들은 회원들의 이익을 위협하는 기술혁신에 대해 자주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때로는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상업 활동은 아예 근절하려고 했다. 상인 길드는 시정부를 지배하는 귀족들의 당이 되어 때로 수공업 길드를 억업하기도 했다.
중세 수공업 길드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기간 내내 서서히 몰락했다. 17세기에도 유럽 전역에서는 여전히 새로운 길드들이 설립되고 있었지만, 16세기에 이미 대부분의 길드가 뚜렷하게 운명의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종교개혁과 국민국가들의 성장이 파괴적인 영향을 끼친 일을 제외하더라도 새로운 시장과 보다 큰 자본 자원의 출현으로 수공업 길드들은 심각하게 약해졌다. 상인들은 자본주의 기업가가 되어 회사를 만들어 상인 길드의 중요성을 떨어뜨렸고, 수공업 길드들은 기술혁신이 가속화되고 새로운 거래 기회들이 특정 산업 분야에 대한 그들의 독점적 지위를 무산시킴에 따라 와해되었다. 장인들은 십장이나 기업가로 전환해갔고 직인과 도제들은 일당을 받는 노동자가 되었다. 부유한 상업자본가들의 통제된 회사와 그밖의 기구들이 출현함에 따라 길드들은 경제의 중심에서 갈수록 멀어지게 되었다.
18세기의 계몽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남아 있던 길드들이 중대한 문제를 일으켰던 적이 드물었던 것은 길드의 존재가 그만큼 전반적으로 미미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수공업 길드를 폐지하는 법령이 프랑스(1791), 스페인(1840), 오스트리아와 독일(1859~60), 이탈리아(1864)에서 제정될 무렵에는 길드의 권위가 쇠퇴한지 이미 오래였다. 수공업 조합들이 인도·중국·일본과 이슬람권에서는 20세기로 접어들 때까지 계속 번영했지만, 이들 역시 서방의 현대적인 공업조직의 충격을 견뎌내지 못했다. 12~15세기의 전성기에 중세의 상인·수공업 길드들은 그들의 도시에 훌륭한 행정과 튼튼한 경제의 기초를 제공했으며, 자선 사업을 후원하고 학교·도로·교회들을 건설했다. 길드는 유럽의 경제기구를 쌓아올리고, 유럽이 봉건주의로부터 신생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데 필요로 하는 상인·기술자·은행가 등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이바지했다./ 브리태니커
제1차 중·영 전쟁의 발발(勃發)은 중국 내 아편의 확산은 여러 가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빈민층의 아편 흡식(吸食/ 빨아 먹는 것)은 농촌경제의 파탄과 구매력의 상실을 가져왔고, 관료와 병사의 아편 흡식은 국가의 기능을 마비시킬 지경이었다. 또 은의 유출이 커짐에 따라 은값이 오르게 되자, 은으로 조세를 납부해야 하는 농민들의 부담이 커져 조세미납사태가 일어남으로써 재정의 궁핍이 초래되었다. 이렇게 아편중독의 만연과 은의 유출로 인해 청나라가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했으며, 황제는 아편 흡식을 아예 금지하자는 엄금론의 주장자인 임칙서(林則徐)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광둥에 파견하여 아편문제를 처리하도록 했다.
註 00; 흠차대신(欽差大臣) 고위직의 흠차. 사신(使臣). 또는 청대(淸代)에 외국 파견의 중국 사신 및 중국 주재의 외국 사신을 모두 일컬었으며, 대사나 공사에 해당함. 동의어. 흠차관원(钦差官员) 흠차(钦差). 부정적인 의미로 하부에 파견된 전권 위임의 상급 간부를 지칭하기도 한다.
1839년 3월 광저우에 도착한 후 임칙서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중국인 아편 관련자의 처벌은 물론이고 외국인 아편 소지자에게도 아편과 서약서의 제출을 요구했다. 외국상인들의 미온적인 반응에 대해 외국 상관(商館)을 무력으로 봉쇄하여 아편을 몰수·파기했다. 영국상인들은 서약서의 제출을 거부한 채 마카오로 철수했고, 영국 정부는 10월 원정군 파견을 결정했다. 한편 주룽(九龍)에서 술에 취한 영국인 선원들에게 중국 농부 임유희(林維喜)가 살해된 사건(1839. 7. 7)은 전쟁 발발의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무역 감독관 찰스 엘리엇이 임칙서가 요구한 범인의 인도를 거부하자 8월 16일 임칙서가 마카오를 무력으로 봉쇄했으며, 57가구의 영국인은 포르투갈의 압력으로 홍콩과 주룽 사이의 바다로 이주했다. 9월 4일 압박 해제를 요구하러 주룽에 갔던 엘리엇의 함대와 중국 해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첫 발포가 일어났다. 이어 11월 3일 촨비(川鼻)에서 양국 해군간에 전투가 벌어졌고 중국이 참패했다. 이로써 선전포고 없이 전쟁이 시작되었다. 12월 6일 임칙서는 영국과의 통상 정지를 선포했다. 이미 10월에 개전을 결정한 바 있던 영국 정부는 1840년 2월에 조지 엘리엇을 전권대표로, 브레머를 사령관으로 하는 원정군을 파견했다. 의회에서도 4월에 전쟁을 승인했는데 여기에는 자본가집단의 압력이 작용했다. 원정군이 1840년 6월 마카오 해역에 도착하면서부터 정식으로 시작된 전쟁은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는 1841년 1월까지로, 영국이 다구(大沽)까지 북상하여 직례총독(直隸總督) 기선(琦善)과 협상한 뒤 남하하여 촨비에서 조약을 강요하며 홍콩을 강점하는 기간이다.
제2단계는 중국측이 조인하지 않은 촨비 가조약(假條約)을 영국이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홍콩을 강점, 영국 영토임을 선언하자(1841. 2. 1) 청나라가 다시 전쟁에 돌입한 때부터 8월까지이다. 영국은 선제공격을 가해 승리를 거두고 청나라로부터 새로운 정전조약인 광저우 화약(和約)을 얻어냈다. 제3단계는 1841년 8월 신임 전권대사 헨리 포틴저가 도착하면서부터 난징 조약[南京條約]에 이르는 시기이다. 포틴저는 곧바로 북상하여 양쯔 강[揚子江]의 요지를 점령하고, 1841년 7월 양쯔 강과 베이징[北京]으로 가는 주요수송로인 대운하와의 교차점 전장[鎭江]을 함락시킴으로써 대세를 판가름냈다. 청나라는 영국의 포화 위협 속에 8월 29일 콘월리스호 선상에서 영국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난징조약(南京條約)에 조인했다.
전쟁의 결과와 불평등조약 체제의 성립
제1차 중·영전쟁의 결과 난징 조약과 이를 보완하기 위한 중영5구 통상장정(中英五口通商章程:1843. 7. 22)과 후먼(虎門) 조약(1843. 10. 8)이 맺어졌다. 난징 조약의 요점은 홍콩의 할양, 광저우(廣州), 샤먼(廈門), 푸저우(福州), 닝푸(寧浦), 상하이(上海) 등의 5개 항구, 개항장에 영사(領事) 설치, 배상금 지불(2,100만 달러), 공행상인 폐지, 관세 협의, 양국 관리간의 대등한 문서왕복 등이었다. 5구 통상장정에서는 영사재판권이 규정되었고, 후먼 조약에서는 최혜국대우조관이 추가되었다. 미국과 프랑스도 청·영국 간의 통상조약과 유사한 망하(望廈)조약(1844. 7. 3), 황푸(黃埔) 조약(1844. 8. 14)을 맺었다. 황푸 조약에서 프랑스는 개항장에서의 포교권을 규정했다. 관세자주권의 상실(협정관세), 영사재판권, 최혜국대우 등의 규정을 통해 중국은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한 조약체제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이들 조약은 이후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발판이 되었다. 홍콩의 할양이라든가 5개항의 개항은 중국진출 기반의 확보를 의미했다. 통상항구에 군함을 파견하거나 순찰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5구 통상장정, 망하 조약) 외국 군함이 중국 영해에 자유로이 진입하게 되었고, 개항장에 "땅을 빌려 집을 짓고 영원히 거주"할 수 있게 함으로써(후먼 조약) 영사 재판권의 확보와 함께 조계제도(租界制度)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로써 중국 사회의 반(半)식민지화 기반이 닦인 셈이었다.
제2차 중·영전쟁의 배경은 제1차 중·영 전쟁 이후 광둥(廣東)을 중심으로 한 민중의 배영운동(排英運動)과 영국측의 조약개정 요구가 제2차 중·영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배영운동의 직접적 요인은 영국인들의 오만과 행패였다. 가장 대표적인 배영운동은 대규모로 장기에 걸쳐 일어난 영국인의 광저우 입성(入城) 저지운동이었다. 외교상의 교섭으로도 입성에 실패한 영국은 다시 한 번 중국을 무력으로 굴복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게다가 불평등조약 체제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제1차 중·영전쟁의 주요인이었던 중국무역이 뜻대로 신장되지 않자, 자국의 공업제품 수출을 증대시키기 위해 중국 내지 깊숙이 진입하고 북쪽 항구를 개방시킬 필요를 느꼈다. 이를 위해 중국과의 조약개정을 위한 활동을 벌였으나 청나라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영국은 무력을 사용할 빌미를 찾고 있던 중 애로호 사건이 일어나서 제2차 중·영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애로호 사건과 전쟁의 발발.
1856년 10월 8일 광저우 앞 주장 강(珠江)에 정박하고 있던 범선 애로호에 중국 관헌이 올라가서 중국인 승무원 12명을 해적혐의로 연행해갔다. 애로호는 중국인 소유의 배로, 선원도 중국인이었지만, 선장이 영국인으로 선적(船籍)을 홍콩에 두고 있었다. 광저우의 영국 영사는 승무원을 즉각 송환하고 배에 걸려 있던 영국기를 함부로 내린 데 대해 공개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양광총독(兩廣總督)은 당시 배에 영국 국기가 걸려 있지도 않았고 중국인 소유의 배이므로 영국이 나설 까닭이 없다고 일축했다. 사실 배의 선적등록 만기가 지나 있어서 영국 배일 수가 없었는데도 이 사실을 숨긴 채 영국 영사가 교섭에 나선 것을 보면, 영국이 의도적으로 이 사건을 전쟁의 빌미로 삼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중국측이 승무원들을 모두 영국 영사관으로 보냈는데도 영사는 접수를 거부했으며, 이튿날 돌연 영국군이 광저우를 공격하고 총독관저에까지 침입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했다. 프랑스는 1856년 광시 성[廣西省]에서 불법적으로 포교하고 있던 선교사가 중국 관리에게 처형된 사건을 명목으로 영국과 공동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미국과 러시아도 조약개정 교섭에는 참가하기로 했다.
1857년 12월 12일 양광총독이 영국과 프랑스의 최후통첩을 거부하자 28일 공격을 개시하여 이튿날 광저우를 점령하고 양광총독을 포로로 잡아간 뒤, 투항한 광둥[廣東] 순무(巡撫)를 내세워 광저우에 약 3년 동안 괴뢰정권을 세웠으나 청나라는 이를 관망했다. 전쟁 발발부터 괴뢰정권 성립 때까지가 전쟁의 제1단계였다. 제2단계는 이때부터 1858년 7월 톈진[天津] 조약 및 11월 상하이에서 해관세칙(海關稅則)이 맺어질 때까지이다. 광저우를 점령한 다음달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의 4국 대표들이 상하이에서 요구한 조약개정 교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4월에 북상하여 톈진으로 진격, 여기서 청나라가 파견한 관리들과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맺었다. 조약은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 순으로 맺어졌는데, 주요내용은 외국공사의 베이징 주재, 양쯔 강 유역과 북부 및 기타 지역의 10개 항구 개항, 내지에서의 여행·통상·포교의 자유, 영사재판권의 확대, 양쯔 강 및 각 통상항으로의 군함 진입권, 배상금 등이었다. 해관세칙은 아편무역의 승인, 관세율의 고정과 내지통과세의 경감, 해관 세무 때 외국인 초빙 등을 내용으로 했다. 그러나 톈진 조약의 비준서 교환장소를 둘러싼 분규로 인하여 전쟁은 제3단계로 접어들었다. 외국사절의 수도 입성을 꺼린 청나라가 톈진 조약의 규정에 있는 베이징 대신 상하이에서 비준서를 교환하려 하자, 영국·프랑스군은 1859년 6월 베이징에서의 비준을 강행하기 위해 북상하다가 다구에서 중국 포대의 포격을 받아 대파되었다. 영국·프랑스군은 1860년 10월 베이징을 함락하고 베이징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는 톈진 조약을 인정한 위에 톈진을 추가로 개항하며 중국 노동자의 이민을 허가하고 주룽쓰(九龍司)를 영국에 할양하도록 했다. 또한 몰수한 가톨릭 교회당을 상환하고 교회가 각 성의 토지를 임대·구매하여 교회를 건립할 수 있게 했으며, 배상금을 증액시켰다.
제1·2차 중·영전쟁의 영향.
제1·2차 중·영 전쟁은 불평등조약 체제의 확립과 이의 확대·심화 과정이었다. 이들 전쟁의 영향을 보면, 우선 정치적으로 보아 홍콩·주룽스가 영국에, 헤이룽 강(黑龍江) 유역의 방대한 영토가 러시아에 할양되었을 뿐 아니라 공사관·조계·외국인세무사 제도가 생겨났다. 사회적·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개항장이 도합 16개로 확대되고 내지 여행권, 내해(內海) 항행권이 보장되면서 중국은 서양의 상품시장 및 원료시장화 되었다. 특히 외국상품에 대한 내지 통관세의 경감은 중국 민족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아편무역과 쿨리 무역의 합법화는 제국주의적 침략의 무자비함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사상적·문화적 측면에서도 외국 선교사가 자유로이 교회를 설립하고 포교할 수 있게 되어, 이후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에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면서 중국인의 반 그리스도교 운동을 유발했다. 또한 군사적으로는 외국 군함이 연해 및 내하(內河)에까지 항행할 수 있게 되어 중국의 주권에 큰 위협을 가져왔다. 이로써 중국은 세계 자본주의체제 속에 종속적 시장으로 편입되는 반(半)식민지화의 길로 들어섰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요약정리.
이 사건은 대신사께서 東經大全의 論學文에서 말씀하신 ‘夫庚申之年建巳之月天下紛亂民心淆薄莫知所向之地又有怪違之說崩騰于世間西洋之人道成德立及其造化無事不成功鬪干戈無人在前中國燒滅豈可無脣亡之患耶都緣無他斯人道稱西道學稱天主敎則聖敎此非知天時而受天命耶’의 핵심인 中國燒滅豈可無脣亡之患耶가 바로 제 1·2차 중·영 전쟁을 의미한다.
註 00; 향항(香港)- 중국 광둥성 남단, 주장강 어귀에 있는 섬으로 홍콩을 가리킴.
註 00; 포염사덕(浦鹽斯德)- 블라디보스톡 또는 우라지보스독크 군항을 가리킨다.
註 00; 서백리아(西伯利亞)-시베리아 또는 사이베리아.
註 00; 佛國 宣敎師 殺害事件(프랑스 宣敎師 殺害事件)- 애로호 사건의 와중에서 프랑스는 1856년에 광시성(廣西省)에서 불법적으로 포교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가 중국 관리에게 처형된 사건을 명목으로 영국과 공동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이 사건을 빌미로 하여 영국과 프랑스는 동맹을 맺고 영불 연합군이 천진(天津)과 북경(北京)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註 00; 愛琿條約(아이훈 조약)- 아이훈조약(愛琿條約)은 1858년 헤이룽장 성의 북쪽 아무르 강 연안의 아이훈에서 러시아 제국과 청나라가 맺은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은 스타노보이 산맥과 아무르 강 사이의 땅을 양도함으로써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이 1689년에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을 뒤집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에서 실질적으로 유일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60만 평방킬로미터의 땅을 확보한 것이다. 러시아는 청나라가 제 2차 아편 전쟁 중인 것을 기회로 청나라의 전권대사 이산을 협박해서 이 조약을 맺게 하였다.
1. 헤이룽 강(黑龍江, 아무르 강)의 좌안은 러시아 령으로 한다. 헤이룽 강 우안 중 우수리 강 서쪽은 청나라 영토로 하고, 우수리 강 동쪽은 두 나라가 공동 관리한다.
2. 헤이룽 강 좌안의 만주인 촌락은 청나라가 관할한다.
3. 헤이룽 강, 쑹화 강, 우수리 강의 항행은 두 나라의 배로 제한한다.
4. 위 세 강 연안의 주민 간에는 무역을 허용한다.
이 조약의 결과로 청나라는 아무르 강(현재의 헤이룽 강) 이북 지역을 모두 러시아에 내주었다. 청나라 정부는 이 조약을 승인했다가 얼마 뒤 부인하였으나, 1860년에 체결된 베이징 조약에서 아이훈 조약의 약정 내용을 재확인하게 되었으며, 베이징 조약으로 인해 우수리 강 동쪽인 연해주마저 모두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正本; 卽 一八四O年에 中國에서는 有名한 阿片戰爭이 일어나 英國은 中國의 香港을 奪取한 外에 五港의 開放을 얻었고 又 아론號(英國商船) 凌辱事件과 佛國 宣敎師 殺害事件으로 因하여 一八五六年에 聯合軍의 北京侵入이 있었으며 그보다 먼저 露西亞는 愛琿條約에 의하여 黑龍江 以北의 地를 割取하였고 나아가 沿海州를 取하는 同時에 浦鹽斯德를 軍港으로 定하여 西伯利亞 鐵道를 敷設하여 滿洲와 朝鮮으로 進出할 計劃을 세웠었다
/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8)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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