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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경흥
댓글 0건 조회 1,880회 작성일 12-11-22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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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가 된 봄에 용담에서 명리학을 공부합니다. 그는 명리학을 ‘사주팔자’라고 하는데 ‘사주(四柱)’는 태어난 ‘년· 월· 일· 시’를 간지(干支;十干 十二支)1)로 바꾼 것으로 이를 네 기둥에 비유한 말이요, 팔자는 간지로 바꾼 글자가 모두 팔자(갑자· 갑축· 을자· 을축)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란 것을 압니다. 그런데 이 같은 ‘년· 월· 일· 시’에 운명이 실렸다면 똑같은 ‘년·월·일·시’에 태어난 사람들 운명은 같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와서 주역점처럼 해석할 나름임을 알게 되어 혹세무민에 불과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여러 제자들과 같이 아버님한테 배우는 바라 열심히 외워서 칭찬을 받습니다. 다시 겨울 방학에 들어갔습니다.
17세가 된 겨울방학 중이었습니다. 근암의 병환이 급격히 악화합니다. 근암은 양아들 제환에게 수운의 혼처를 알아보라고 합니다. 제환은 20여 리 거리의 서면 도리에 있는 가족묘에 갔다가 박대여(만재1817~1885)를 만나 결혼얘기를 꺼냅니다. 박대여가 울산에 사는 사촌 여동생을 소개하므로 같이 가봅니다. 제환의 마음에도 들어 결혼을 약속하고 돌아옵니다. 한편 수운은 방에서 조카들을 가르치고 공부하다가 아버님의 임종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결혼은 대상이 끝나는 2년 뒤 봄에 하기로 합니다.

그는 아버님이 환원한 뒤 집에서 조카들과 여동생을 가르치며 마음공부(心學)를 시작합니다. 무극이 사람으로 화생하고 사람 속에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줄곧 헤아려 왔는데 마음을 알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그건 무극의 허령이 마음으로 화생한 것이므로 마음을 알면 무극태극이 사람으로 화생하고 사람 속에 계신 뜻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여겨서입니다. 그는 주자·퇴계·율곡·송시열·노자·서경덕 등의 글에서 마음에 관한 것에 관심을 갖고 살펴봅니다. ‘주자’는 “사단 이것은 리의 발이요, 칠정 이것은 기의 발이다(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라고 했는데, ‘퇴계’에 와서는 “사단은 리에서 발하고 기는 그것을 따르고, 칠정은 기에서 발하고 리는 그것을 탄다(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발전한 것을 봅니다. 그리고 율곡에 와서는 ‘기발이리승(氣發而理乘)’만 수용되고 나머지는 버려지는 것을 봅니다. 그는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두렵고···’하는 마음이, 리(사단)인 ‘예의를 살피고 시비를 가리는 등’의 마음보다 앞서 발하는 것을 발견하고 율곡처럼 마음을 ‘기발리승(氣發理乘)’ 구조로 봅니다.

수운이 19세가 되어 아버님 탈상을 하고 결혼 채비를 할 때, 신부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다시 가을 한가위 10일 뒤로 미루고 결혼식도 신부 집이 아닌 신랑 집에서 하기로 합니다. 여동생과 동갑인 조카 세조의 결혼도 해야 하므로 더 뒤로 미룰 수 없어 그리 하기로 정한 겁니다. 가윗날이 지난 지 며칠 뒤 수운이 용담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안마당에 말 한 필이 말뚝에 묶여 있었습니다. 제환 형님이 부른다기에 가보니 무관시험을 보려면 연습할 말과 활이 필요해 사 온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어 말하길 “너는 우리 칠대조 정무공 최진립(1568~1636) 장군처럼 담력과 지혜를 갖추었으니 무관 시험을 보도록 해라. 결혼에 말이 필요하기도 해서 미리 사 온 거야.”라고 하신다. 그래서 그는 며칠을 말 타는 연습을 하고 울산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와 가정리에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리고 대구 관덕장 무관 시험 보는 곳에 가서 시험 일자를 알아보고 ‘무경칠서병요(武經七書兵要)’를 구해서 익힙니다. 그러나 그는 무관으로 출세하여 살고 싶은 맘은 없었습니다. 다만 스스로 자신의 삶의 문제를 풀어야 할 나이가 되었으므로 세간을 나야 하고 독립하려면 직업은 있어야 하므로 운명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그는 20세 봄에 대구 감영에 가서 ‘도시’에 응시해 ‘강서’에는 합격을 하나 말 타고 활쏘기와 같은 ‘실기’에서 탈락하고 맙니다. 다시 가을 도시에 응시하기로 하고 연습을 하는데 점점 자신감을 잃어갑니다. 과녘을 향해 활을 쏠 때마다 사람 가슴에 대고 쏘는 감이 들어 섬짓섬짓 해진 겁니다. ‘무극태극이 활로써 사람 가슴이나 쏘려고 사람으로 화생하고, 나로 화생한 것인가?’라는 회의가 든 것입니다.
그는 말을 타고 금강산 갈 때 만난 포항 소티고개 선비를 찾아가 자문을 구합니다. 선비는 서양은 총포로 싸우는데 우리는 아직도 말 타고 활 쏘는 걸 익혀서 무엇에 쓰느냐고 합니다. 또한 수운의 ‘기발리승’이야기도 듣고 그건 마음의 일부 현상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를 들어 설명하기를 무서운 개를 만나면 무서운 감정이 먼저 일어나고 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헤아리는 경우가 ‘기발리승’이라고 합니다. 수운은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자기의 무과시험은 시의에 뒤진 것이요, 마음에 대한 자기 견해도 마음의 일부에 지나지 못함을 깨닫습니다.
돌아와 보니 여동생의 사주단자가 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님의 지시대로 ‘신랑· 신부’의 사주팔자를 보고 택일서를 써서 경주 관아 앞에 있는 사돈집에 전합니다. 신랑 김진구의 아버지는 철을 관리하는 감야관이어서 김진구는 결혼 뒤 달천 채광장에서 출납일을 맡아 보게 됩니다. 수운에게서 명리학을 배운 여동생은 거기서 동리사람들 사주를 봐주면서 인기 있는 경주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운은 가을 도시 시험에서도 전과 같이 말 타고 활쏘기에서 또 떨어집니다.
그는 불국사 아랫마을에 있는 풍류노인을 찾아 자문을 구하니 풍류는 무위자연을 따르는 것이라 하면서 두 번 떨어진 것은 그만 두라는 것이 아니냐 합니다.
수운은 장조카 세조의 혼행길에 갔다와보니 많은 하객들이 와 있는 걸 봅니다. 그걸 보고 그는 사람은 자연 법칙을 따르는 무위를 지나, 생명의 위함을 따르는 유위(有爲)를 넘어, 이유에 따라 움직이며 기다리는구나 하는 걸 깨닫습니다. 마찬가지로 무극태극도 영성을 갖춘 존재이므로 사람으로 화생한 이유가 있을 것이며 기다리는 까닭수도 있으리라 여깁니다.
결혼이 끝나자 세조 어머니는 무리해서인지 자리에 눕고, 수운의 처와 새로 시집 온 세조 처는 손발이 맞지 않아 부엌문을 닫지 않는 실수를 범합니다. 그래서 초겨울의 매서운 된바람이 돌개바람이 되어 부엌으로 밀려들어와 아궁이 잿불을 휘감아 부엌광에 쌓아놓은 검불에 뿌리어 불이 납니다. 깊은 잠이 들지 못하는 수운이 발견했을 때는 이미 지붕이 불바다가 되었을 때여서 이불과 쌀 댓 섬을 구하는 데 그치고 맙니다. 급한 대로 하구리 사촌 집으로 옮겼는데 수운은 더 덧붙어 있을 수 없어서 용담으로 옮깁니다. 마을 사람들이 수운 내외에게 간장 된장 등을 줘서 수운 처는 고마워 옷감 등을 준 집에서 목면 짜는 일을 돕습니다. 수운이 마구간을 짓고 있는데 세조가 벼 한 섬을 소에 실고 와서 하는 말이 친구가 결혼하는데 말을 빌려달란다고 해서 그러라고 합니다. 며칠 뒤 콩 두말과 볏단을 줘서 가져왔다고 짐을 내려놓아서 수운은 말을 빌려주면 대가를 받을 수 있구나 여기게 됩니다.
수운은 저녁끼니를 때우고 나서는 아랫목에 꽈앉아서 풍류노인에게서 배운 배호흡을 합니다. 배호흡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산만한 마음을 정화하고 마음을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마음을 전래의 사단칠정의 시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체계로 인식해야 한다고 여기게 됩니다. 선비가 수운의 ‘기발리승’도 마음의 일부일 뿐임을 입증한 뒤부터입니다. 선비는 유학의 칠정(七情=喜怒哀懼愛惡慾)도 ‘감정’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불교 ‘반야심경’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에서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은 ‘감각’이 되고, ‘무의식계(無意識界)’의 ‘의식(意識)’은 ‘의식’이라 여겨집니다. ‘감각’인 눈으로 아름다운 꽃을 보고 느끼면, 다음에 기쁜[喜] ‘감정’이 들고, 다음에 이를 의식하는데 이것이 마음이다 여겨집니다. 이 같은 마음은 ‘감각· 감정· 의식’ 순으로 알아가는 것이라고 깨닫습니다. 동시에 <마음의 속성은 앎이다.>라고 깨닫습니다. 그는 자기의 팔다리는 자기를 모르지만 자기 마음은 물건을 잡고 걷기 위해서임을 압니다. 그렇게 무극태극은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마음으로 화생한 거라고 여깁니다. 그것은 사람 마음에 부치어 뭔가 알기 위해서일 터인데 그게 무엇일까? 사유합니다.
수운은 낮에는 조카 세조와 멱실을 짓고, 눈이 오기 전에 땔감을 장만합니다. 내자는 낮에는 마을에 가서 목면 짜는 일을 도와주고 밤엔 수운 옷을 마르고 바느질 하는 데 푹 빠집니다.
수운은 밤이면 배호흡을 합니다. 풍류노인은 배호흡을 하면 장생하게 되고, 심신이 맑아지고, 무위에 이르게 되어 올바르게 분별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풍류노인의 말씀처럼 무위에 이르면 의식을 의식할 수 있게 되어서 정밀한 사유를 할 수 있어서입니다. 그는, 마음이 앎의 속성을 갖췄음을 안 뒤로 무극의 허령이 마음으로 화생해서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알기 위해 사유합니다. 마음이 궁극적으로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사유하다보면 문득 맑음을 봅니다. 그건 금강산에서 신선을 볼 때와 같은 맑음입니다. 그런 맑음에 무관이 된 모습이 떠오르며 차츰 흐려지더니 불쾌한 감정이 입니다. 이런 겪음은 요새 몇 번 겪어서 이상하다는 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하는 품새를, 농사하는 품새를, 유학경전을 외우는 품새를 그려 봤는데 통틀어 흐려집니다. 그러다가 삿갓을 쓰고 장삿길에 나선 제 꾸밈새를 마음거울에 올려봤더니 그 품은 점차 더 맑아집니다. 그는 마침내 ‘버려야 할 것은 흐려지고 취해야 할 것은 맑아짐’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무극허령의 뜻이라 여깁니다.
그 이튿날 그는 장에 가서 붓· 종이· 삿갓· 작두를 사 가지고 풍류노인 집에 가서 ‘주역(周易)’과, 명리학의 원서 ‘연해자평(淵海子平)’과 ‘천세력’과 ‘경국대전’을 빌려와 베끼기 시작합니다. 장사하는데 말거리로 필요해서입니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만 다 베끼고 나니 혹세무민(惑世誣民) 하는 것을 괜히 베꼈다는 맘이 듭니다. 이때 문득 ‘마음보다 더 신령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음은 무극의 허령이 화생한 것이므로 신 같은 존재다. 이처럼 신 같은 마음으로써 운명을 알아보고 점을 쳐야 맞을 가능성이 높다’라는 생각이 든 겁니다.

21세가 되었습니다. 봄기운이 돌기 시작해서 그는 맨손으로 장사를 하려면 보부상의 권리를 얻어야하는 걸 알고 보부상객주를 찾아가 주객(主客)이 됩니다. 주객은 말에 상품을 싣고 다니며 파는 이를 이르는 말입니다. 그는 서당을 찾아가 피지를 선물하고 이 마을에 결혼할 사람이 있는가를 물으며 다닙니다. 마침내 마수걸이로 이내겸의 결혼에 견마잡이를 하고 혼수품도 팔게 됩니다.
그래서 용담에서 홀로 밤을 보내게 된 박씨부인은 친정인 울산 유곡동으로 가겠다고 해서 그렇게 합니다. 수운은 계속 서당을 찾아가 결혼할 집을 알아보고 찾아가 장가를 가려면 말을 타고 가야 하지 않느냐며, 자기가 견마잡이를 하겠다며, 보수는 쌀 두말이라고 하며, 설득합니다. 수운의 풍채가 선골이고, 말 또한 쭉 뻗은 이마와 뺨엔 흰점이 있는 간자말이라 대부분 응합니다. 한편 박씨부인은 친정집에서 목면을 짰는데, 수운은 매달 초순에 와서 목면을 울산 객주에 가서 위탁판매 합니다. 수운은 정직하게 거래를 하고 주역 명리학에 달통할 뿐 아니라 ‘마음점’을 잘 쳐서 ‘복술 도인’으로 이름이 나서 장사도 잘 풀려나갑니다.
그런데 가을(음력1844년 9월 14일) 말품팔고 경주객주에 돌아와 보니 형수(제환처)가 돌아가셨다는 전갈이 와있었습니다. 여동생에게는 어머니 같은 분이라 수운은 그 길로 달밤에 말을 몰아 울산 달천 여동생 집으로 달려가 동생을 뒤에 태우고 형님 집이 있는 하구리 지곡동으로 달려갑니다. 그는 또 다시 말을 타고 결혼할 신랑 집으로 한숨에 달려갑니다. 견마잡이는 자기가 없으면 큰 낭패이지만 장례는 자기가 없어도 막힘이 없으므로 이처럼 대가고 대오기를 되풀이합니다.
그렇게 그가 9년(1844∼1853)을 한결같이 장사에만 정성 드리는 사이 집안에는 잇단 변화가 일어납니다. 먼저 좋은 연고부터 보면 6년 앞서(1846년) 수운 처인 박씨부인이 3살 먹은 수양녀를 키우게 됩니다. 아랫마을 아이였는데 부모가 다 죽자 친척이 박씨부인에게 키워서 종으로 부려도 좋다고 하며 맡긴 겁니다. 박씨부인은 아직 자식도 없고 생활에 여유도 생겨서 아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양녀를 잘 키운 지 5년이 된 해 맏아들 세정(1851∼1882)을 낳습니다.
그러고 박씨부인을 따라 여러 집이 무명을 짜게 되어서 수운은 매월 초 무명을 말에 싣고 울산 객주에 가서 위탁판매하고 수금을 해다가 아내에게 주어서 마을이 부지런해지게 되어 굶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수운네도 유곡동 뒷산 여시바윗골에 뙈기 논 6배미가 딸린, 2천여 평의 땅을 사들여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경주 객주에 저축해 놓은 목돈도 그만큼 되었습니다. 이제 수운은 처갓집에서 벗어날 궁리도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나쁜 연고를 보면 2년 전(1851) 일입니다. 이해 7월 30일 아버지처럼 뒤봐주고 지켜보던 제환 형님이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받습니다. 형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 죄스러웠습니다. 그런 지 2년 뒤인 올해(1853년) 2월 14일 조카 세조 처가 출산하다 안타깝게 또 세상을 뜹니다. 그간 여동생도 어렵게 자식을 낳으면 홍역을 앓다 가곤 하다가 올해에 또 돌 고비를 넘긴 생때같은 자식을 잃었습니다. 이러다가 자기도 무극의 허령이 마음으로 화생한 뜻이 무엇이지 모르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일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죄의식· 슬픔· 떨림· 애탐· 못잠의 울증을 보여 갑니다.
고마운 간자말도 수운에게서 전염된 것인지 아니면 늙어서인지 힘겹게 걷다가 배가 불거지는 고착증에 걸려 죽습니다. 그는 늙다리를 배려하지 못하고 부려먹기만 한 무지한 자신을 책망합니다. 그는 서당에 다니며 말이 죽어서 장사를 못하게 되었다며 피지를 선물하고 집에 돌아옵니다. 그리고 울산 집에 가서도 목면 일을 처남에게 넘깁니다. 그는 목면을 짜는 유곡동 처남 집에서는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없다고 여기고 떠납니다.

30세의 늦가을. 그는 최진립 장군의 장손 ‘최부자 집’을 찾아갑니다. ‘최부자집’은 늘 50여 명의 식객이 머물고 있으며 책도 많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어 그리로 발길을 돌린 겁니다. ‘세’자 돌림인 주인은 삼촌 벌인 ‘제’자 돌림의 수운(최제우)을 보자 ‘복술도인’으로 알려진 삼촌을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처럼 찾아주셔서 고맙다고 각별히 독방을 내주며 책방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는 사실을 적은 역사서들인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와,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과, 북애노인의 ‘규원사화(揆園史話)’ 등을 골랐습니다. 그는 ‘동사강목’이 민족 뿌리인 고조선 단군서부터 삼국(고구려·백제·신라) 역사를 사실 위주로 적은 것이 마음에 들어 필사를 합니다. 글자를 쓰다보면 마음이 닦이어 몸맘이 정화되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수운의 글자를 보자 명필이라고 하면서 액자를 하나 써달라고 부탁해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써 줍니다. 그리고 자기 집에 여 벌의 책이 많다고 하면서 두 보따리나 되는 책을 가져다줍니다. 수운은 두 끼의 식사마저 반 그릇씩 남기지만 그나마 소화를 못시키므로 고민에 빠집니다.
마침내 ‘동의보감’ 한 권만 가지고 한의원에 갑니다. 거기서 의술도 배우고 입원 치료를 하기로 하고 한 달 치 치료비를 내 줍니다. 수운은 진맥 보는 것을 배우나 맥의 느낌을 분별할 수 없는 걸 알고 자신의 성정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위장약이라고 매일 같이 마셔보지만 조금의 차도도 없고, 주인이 권한 배호흡도 해보지만 신경만 더 예민해져 갈 뿐이어서 고민을 하게 되고 멀리 떠나고만 싶어집니다.
31세 봄. 남문 밖에서 약종상을 하는 최자원(崔子元)을 안마당에서 만나 조언을 듣게 됩니다. 최자원은 인연의 땅을 떠나라며 호남 남원의 광한루 오작교 밑에서 한약방을 하는 서형칠(徐亨七)을 찾아가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수운은 남원에 가서 서형칠을 만나 그가 달여 준 약을 먹게 됩니다. 그리고 유능한 채집인이며 그의 생질인 공윤창을 따라 다니며 약초를 캐러 다닙니다. 그렇게 산으로 약초를 캐러 몇 달을 다니고 보니 밥을 반 이상 남기던 것을 다 먹어도 속이 편하게 됩니다. 위병이 낫고 보니 약초의 이름이나 성분이나 용도 등을 알아보려는 마음도 엷어지고 지루해집니다.
그는 그동안 마음을 살펴온 것을 정리해 봅니다. 주자는 마음을 ‘도심’과 ‘인심’으로 나눠서 봤는데 도심을 ‘사단’으로 보고 인심을 ‘칠정’으로 봤습니다. 그런데 그는 인심을 살려는 마음인 의식주를 구하고 병을 고치려는 마음으로 봅니다. 반면에 도심을 도를 구하고 도덕사람인 ‘현인·군자·성인·신선’이 되려는 마음으로 봅니다. 이 같은 ‘인심·도심’은 욕구를 동반하는데 그 욕구는 칠정(喜怒哀樂愛惡慾)의 하나인 욕(慾)에서 발한 욕구(慾求)로 봅니다. ‘인심’은 삶의 욕구로, ‘도심’은 구도(求道)의 욕구로 본겁니다. ‘그래서 건강해지려는 인심이 충족되니까 그 같은 것에 무관심해지고, 시시해지고 지루해진 거다. 그것은 삶의 욕구인 인심에서 벗어나, 윗단계인 구도의 욕구인 도심으로 넘어가라는 신령한 마음의 명인 거다.’라고 헤아립니다. 그는 약초를 캐러 다니는 제 품을 그려보니 마음이 흐려지고, 수도하는 제 품을 그려보니 마음이 맑아지는 것을 겪습니다. 이것은 수도하여 도를 구하라는 무극 허령의 뜻이라 여깁니다.
그는 음력 10월(1854년) 달에 남원을 떠나 걸어서 경주 최부잣집에 와서 맡긴 책 보따릴 찾습니다. 그는 주인이 마련해 준 소몰이꾼과 함께 소등의 걸채에 책을 싣고 울산 유곡동을 향해 떠납니다. 한참을 걷다보니 누덕누덕 꿰맨 남루한 옷을 걸친 말 얼굴의 소년이 뒤따라옵니다. 점심때에 같이 국밥을 먹고 옷 한 벌을 사서 입힙니다. 그는 기해년(1839) 때 신부와 서학인들이 참수 당할 때 그의 부모도 참수당하고 그의 큰 아버지 손에 7살까지 살다가 거지가 사는 곳이 궁금해 따라 나서서 거지가 된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소년이 될 때까지 거지로 살다가 빌어먹는 거지가 싫어져서 자기 이름을 닮은 울산을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선생님을 따라가면 일거리가 있을 거라 여겨져 따라온 것이라 했습니다.
유곡동에 가보니 내자가 여시바윗골에 집을 지어놓고 있었습니다. 수운은 그리로 이사를 가고 울산과 함께 겨울 땔나무를 마련합니다. 울산은 자기가 말한 것처럼 일하기를 좋아해서 밤엔 천자문을 가르쳤더니 공부하려는 열의도 있어서 틈만 나면 책을 펼쳐서 봄이 될 임시엔 한글과 천자문을 떼고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게 됩니다. 박씨부인은 코흘리게 세청을 업고 양녀는 세정의 손을 잡고 유곡동에 가서 무명 짜는 일을 이어하고, 같이 간 울산은 아예 유곡동 집에서 먹고 자며 농사를 배웁니다.

32세(1855) 봄. 수운은 혼자 집에서 책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심과 도심의 도덕을 헤아려왔고, 요새는 요순 때의 도덕을 다시 살펴봅니다. 동양의 최초의 책인 ‘서경’을 보면 ‘요·순’ 때엔 상제님을 공경하고 믿고 제사를 지내며 천도를 따르고 천덕에 감사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도덕이 섰음을 봅니다. 또 하(夏BC2192~1751)나라 때의 동양 최초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을 보니 “동방 어진 나라에 군자의 훈화가 있었으니 예절로 사양하기를 늘 좋아하며 예는 이치로써 따진다”라고 우리나라를 동방예의지국으로 칭송하는 것을 봅니다. 그건 선조들도 하날님을 위해서였다고 여기고 다시 하날님을 위해야 도덕이 서리라 봅니다.
그는 따듯한 음력 3월 한나절 마루에서 책을 보다가 ‘몸속 무한소 무극의 허령’을 보고 싶어서 책을 덮고 배호흡으로 심신을 정화합니다. 무위에 이르렀는데 홀연 겉의식이 속의식으로 바뀌며 맑은 울을 봅니다. 그렇게 계속 의식이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마침내 무극허령을 볼 수 있으리라 여기는데 다시 정신이 깜박하더니 거울 같은 맑음만 보였는데 퍼뜩 용모가 깨끗한 노스님이 나타나 수운을 보고
“선생님이 경주 최생원이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소승이 긴밀히 드릴 말씀이 있어 잠시 마루에 오르겠습니다.”하고 올라와 수운 앞에 앉자 말을 잇습니다.
“소승은 금강산 유점사에 있는 사람입니다. 백일공을 마치는 날 탑 앞을 보니 한 권의 책이 탑돌 위에 놓였습니다. 거두어 펴보니 세상에서 보지 못한 고전체 글이었습니다. 그래서 박식하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보였으나 아는 사람이 없던 중 생원님이 박식하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온 것입니다.”라고 책을 수운 앞에 내려놓고 하는 말이 “사흘 여유를 드리겠습니다. 그새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하고 일어났는데 보이지 않았습니다. 책을 펼쳐보니 고전(古篆)체 글자로 쓰였는데, 유학이나 불학은 물론 어떤 학으로도 풀리지 않는 글이었습니다. 더 자세히 살피다보니 오직 말이 되는 문구는 고작 ‘기도어천(祈禱於天)’이라는 문구뿐이었습니다. 그는 그 글자에 책의 의미가 모개로 담긴 것 같아 눈을 떼지 못하고 보고 있는데 노승이 나타나 묻기를.
“혹 깨달은 바가 있습니까?”
“책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노승은 사례하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책은 진실로 생원님께서 받아야 할 책입니다. 소승은 다만 전하기만 할 뿐입니다. 이 책의 뜻과 같이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고 노승은 일어나 마루를 내려가 몇 걸음 가는가 싶었는데 홀린 듯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좀 전에 보던 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심신이 신령한 기운에 휩싸이며 황홀해집니다. ‘노승은 신인이시었구나! 책은 천서(天書)였구나!’라는 깨달음이 옵니다. 신인(神人)과 천서(天書)가 생시에 본 것처럼 생생한데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어서 꿈인가 여겼지만 의식은 잇대어 깨어있었으므로 꿈도 아니라 가려집니다. 그는 의식속에 의식이 있어 그 속의식이 노승을 보고 대화를 나누고 책을 본 것이라 여깁니다. 의식은 신령한 것이라 그 속의식은 신의 세계도 보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14세 때 금강산 유점사에서 공부하다 돌아오는 길에 신선의 말씀을 들었을 때도 이와 비슷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그의 마음에 뚜렷이 떠오르는 것은 해각되지 않는 글 속에 들었던 ‘하날님에게 기도하라’는 ‘기도어천(祈禱於天)’이란 문구입니다. 이것은 유학이나 불학 같은 책으로써 사유하거나, 배호흡 같은 수련만으로 풀려하지 말고, 하날님에게 기도하여 하날님의 가르침을 받으라는 의미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하날님에게 기도하려면 하날님이 어떤 분이며, 어디 계신지 알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가 등장하였습니다.
이제도 하날님이 천상의 옥경대에 앉아 계시면서 천지만물을 다스린다고 믿고 기도할 수 없어서입니다. ‘천주실의’는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존재를 ‘하날님’으로 보았고 신유학도 무극인 태허를 천(天)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그는 녹문(鹿門 任聖周1711-1788)의 ‘녹문집’에서 “맑고 맑은 태허의 기(氣)는 딴 것이 아니라 천(天)이다.(湛一淸虛之氣 非他也 乃天也)”라는 글을 봅니다. 이는 장재(횡거1020~1077) 등이 무극의 ‘허·기·심’을 태허즉천(太虛卽天), 기즉천(氣卽天), 심즉천(心卽天’)이라고 했기 때문에 무극의 청허(淸虛)를 ‘천(天)’으로 본 것이라 여겨집니다. 수운도 오나가나 잊지 않은 것이 무극이어서 녹문처럼 무극의 ‘맑은 태허의 기’를 천으로 보고 나아가 영적인 하날님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그럼 하날님은 어디에 있다고 봐야 하는가? 주자는 ‘하나의 물은 하나의 태극을 각기 갖췄다(一物各具一太極)’라고 했고, 아버님은 “내 몸 빈 것 속엔 ‘리· 기· 허령’이 있네(在吾腔者裏理氣虛靈)”라고 하셨습니다. 이 ‘리·기’는 물질에 속하고, ‘허령’은 마음에 속하므로 간종그리면 ‘허령· 리기’가 되고 줄이면 ‘영기(靈氣)’가 됩니다. 이 ‘영기’는 ‘몸속 무한소 무한’이 되고, ‘무궁한 나· 본디의나· 참나· 정체’가 되기도 하고, 무극태극이 되기도 하고, 하날님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내 몸 빈 것 속에는 영기하날님이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날님을 ‘몸속 무한소 무극에 있는 것’으로 봄이 옳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이처럼 ‘몸속 무한소 무한’의 ‘하날님’이라면 천상의 하날님과 다르므로 ‘한울님’이란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몸속에 있는 무한소 무한’은 ‘무한한 울’이어서 ‘무한’을 ‘한’으로 보면 ‘한울’이 되므로 ‘한울님’이란 말이 어울릴 것 같아서입니다. 그럼 ‘한울님’은 ‘몸속 무한소 무한’의 존재자를 의미하게 되어, 기존의 천상의 ‘하날님·하나님·하느님’과 같은 허상과 구분되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몸속 한울님’을 그려보고 상상해 봐도 한울님이 몸속에 있다는 의식이 조금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즉 의식주도 밖에 있고 신도 밖에 있다고 봐온 습성에 젖어서 몸속 한울님이 잘 의식되지 않는 거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다시 헤아려 보니 무극의 한울님은 만물로 화생하고 만물 속에 있으므로 밖의 허공 속에도 있기 때문에 허공 속의 무극한울님께 기도하면 되리라 여깁니다. 그래서 그는 허공 속 무한소 무극에 있는 무극한울님을 상상하고 기도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피고 헤아려서 겨우 마음을 정한 것은 늦은 가을이었습니다. 당시 박씨부인은 음력 10월(1855년)에 유곡동 친정에서 큰딸을 출산한 뒤 며칠 몸조리를 하고 집에 와 있을 때였습니다. 세정은 5살, 세청은 2살에 불과한 철부지여서 가댁질4)하느라 백날 집안은 부산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낮엔 밭 주위에 가서 나무를 하고 새벽 묘시(5∼6)에 일어나서 다리 꽈앉기를 하고 허공 속에 계신 무극 한울님에게 ‘마음으로 화생하시어 알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 밝혀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33세 음력 4월 8일(1856년) 한낮께였습니다. 염불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쌀 시주를 바라는 까까머리를 한 젊은 스님이었습니다. 외딴곳까지 찾아준 것이 고마워서 쌀을 한바가지 퍼주었더니 합장하고 하는 말이
“공부하기 좋은 곳은 천성산 내원암이지요.”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 조용한 거처에 가서 기도수련을 해보려던 참이라 물품을 준비해 가지고 젊은 스님을 따라 나섭니다.
그는 북쪽에 향로와 촛대들과 초와 청수 그릇을 상위에 마련해 놓고, 기도식을 술시(밤7-9)와, 인시(새벽3-5)와, 오시(낮11-1)에 합니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꽈앉아 마음눈으로 허공 속 무한소 무극을 보고 나서 일어나 세 번 절하고 다시 꽈앉아 심고합니다.
“한울님이시여 현현하옵소서. 무극태극의 영기가 만물로 화생하시고 만유 속에 계심을 알았으며, 한울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무극한울님이 만유의 시원이시며 첫 조상이 되심을 알았습니다. 또한 사람으로 화생하시고 사람 속에 계시며 마음으로 화생하시었음을 알았습니다. 마음으로 화생하시어 아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가르침을 내려주옵소서. 감응하옵소서.”
그는 이 때 무극의 영기(허령· 리기)가 기학(氣學)의 사람들이 주로 쓰는 ‘무사불섭 무사불명(無事不涉 無事不命 간섭하지 않음이 없고 명령하지 않음이 없다.)’에 의해서 마음으로 화생한 거라고 깨닫습니다. 그는 자주 쓰기에 너무 길어서 끝자인 ‘涉’과 ‘命을 따서 ‘섭명(涉命)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극의 허령(虛靈)이 뇌에 섭명(涉命)해서 마음으로 화생한 것이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은 ‘감각· 감정· 의식’인 것이요, 그 의식이 감정을 의식하고 감각을 의식하는 것처럼 허령도 의식하여 허령의 뜻을 알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래서 기도 뒤에는 배호흡을 하며 의식이 배호흡의 느낌을 타고 무한소 무한인 한울의 허령에 이르기를 바라며 수련을 합니다.
47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한울님에게 심고를 올리고 나서, 꽈앉기하고 배호흡을 하는데 잡념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잡념이 사라지는 짬마다 마음이 맑아지더니 홀연 거대한 물방울 속과 진배없는5) 맑은 울 속에서 80세이신 숙부께서 돌아가시는 창백한 얼굴이 보였습니다. 수운의 속의식은 공간 속 무한소 무한에 들어가 고향의 숙부께서 환원하시는 품을 본 겁니다. 수운은 인륜의 도리를 저버리고 더 기원만 할 수 없어서 고향에 가 장례를 치르기로 합니다. 그가 떠난 다음날 스님은 경주 현곡면 하구리에서 수운을 찾아온 사람이 있어 연유를 물었더니 복술(수운), 그분의 작은숙부께서 돌아가셔서 전하려고 왔다고 합니다. 스님들은 수운이 영통한 사람이 되었구나 하고 반깁니다. 세조도 갑자기 수운이 나타나서 어찌 알고 오셨냐고 물었더니 기도 중에 숙부께서 돌아가신 걸 보았다고 하니, 삼촌이 영통하셨다고 신기해합니다.

수운은 숙부께서 돌아가셔서 집에서 책을 보며 근신하고 있는데 9월(1856년) 초에 달천에 사는 동생 내외가 찾아와 철점인 용광업에 관해서 말을 꺼냈습니다. 용광업은 목탄과 토철을 사기 쉬운 곳이어야 하는데 적지가 두동면 중리라고 했습니다. 그곳에 팔려고 내놓은 용광장이 있는데 자기네가 샀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경주객주에서 받는 이자보다는 더 이득을 볼 수 있으니 빌려달라고 합니다. 수운이 사는 유곡동과 여동생이 사는 달천은 20여리 거리밖에 되지 않아서 나대기 좋아하는 여동생은 자주 여시바윗골에 들려 아내하고 온갖 이야기를 주고받아서 속사정을 잘 압니다. 수운은 동생도 자기처럼 자립해 살려고 하는 것을 알고 경주 객주에서 돈을 찾아다 줍니다.

34세 음력 5월 20(1857년). 아내는 제 송아지 상을 쏙 빼닮은 딸을 출산하였습니다. 수운은 둘째 딸의 생김새가 제 엄마를 닮고 빙그레 웃는 것 같은 배냇짓이 귀여워서 예쁠 완(婉)자를 써서 이름을 ‘완’이라 지어줬습니다.
수운은 숙부의 1년 상을 마치자,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찬바람이 이는 음력 7월 초순(1857)에 봇짐을 등에 지고 한갓진 천성산 적멸굴(寂滅窟)을 찾아갑니다. 앞서서는 내원암에서 편히 기도해서인지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이번에는 자연동굴에 들어가 거친 자연을 견디며 정성을 드려보기로 한 겁니다. 적멸굴은 내원암 못미처 길 양쪽으로 갈린 쌍바위에서, 턱을 들어 바라보면 멀리 제일 높이 솟은 천성산 꼭대기가 보이는데 바로 그 밑 오른쪽 큰 바위 밑에 있습니다. 내원암에서 수도할 때에 젊은 스님이 수련하기 좋은 자리라 해서 같이 가본 적이 있습니다.
적멸굴은 앞의 높이가 4m요, 깊이가 6m요, 뒤쪽 높이는 1m인데 식수로 쓸 만큼의 돌샘이 나옵니다. 왼쪽엔 구들장만 깔려 있었는데, 예전엔 초막이 쳐져 있었답니다. 수운은 아침 한 끼만 먹을 것이니 이틀에 두 사발만 가져다주면 고맙겠다고 하고 수도에 들어갑니다. 그는 샘터 쪽에 향로와 촛대와 청수를 설치하고, 전과 같이 기도는 술시(밤7-9)와, 인시(새벽3-5)와, 오시(낮11-1)에 하고 심고(마음으로 고함)도 전과 같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음력 7월 중순을 넘어서 비가 온 뒤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와서 밤기도식(밤7~9)이 끝난 뒤에는 추워서 잠이 들지 않았습니다. 나날이 바람은 더 차가워지고 더욱이 구둘장의 찬 기운은 온몸 뼈 속까지 파고들어 선잠이 들었다가 깨곤 했습다. 그래서 산속에서 약초를 캐다 한뎃잠을 잘 때처럼 솔가지를 꺾어 구들장위에 깔고, 그 위에 풀을 뜯어 깔고 자며 수도를 했으나 몸만 여위어갈 뿐 한울님의 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허망하게 49일 수도를 끝냅니다.
파리한 얼굴로 집에 돌아온(1857년) 그는 아내로부터 울산과 양녀가 서로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래서 집을 지은 기린상의 서군효한테 맡겨 사랑채 하나를 들여서 동리 사람들을 초청하고 결혼식을 치릅니다. 방에서 둘의 폐백을 받을 때 수운은 말합니다.
“너희는 내 딸이요, 내 사위이니 이제부터는 아버님이라고 불러라.”
울산은 자기를 가족 일원으로 친자식처럼 여기겠다는 말씀인지라 감격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지질한 사람을 거둬주고 가르쳐 주고 가족으로 삼아준 고마운 눈물이요, 자기도 이제 가족을 갖게 되었다는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35세(1858) 봄. 울산의 요구대로 집 앞 논밭을 울산이 농사짓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울산은 기다리던 해토를 맞이하자 신이 나서 밭을 넓히려고 주위를 까뭉개고, 소를 빌려다 밭을 갈고, 때맞춰 감자·고추와 여러 가지 채소들을 심고 나머지 밭엔 모조리 목화를 심었습니다. 6월 가까이 되어 천수답 육 두락엔 전에처럼 유곡동 친정집 모판에서 가져다가 이양했는데 비가 많이 와서 천수답도 논이 마르지 않고 모가 잘 자랐습니다.
반면에 두동면 중리의 용광로 작업은 비가 많이 오면 숯 만들기가 힘들어 작업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제가 많이 쌓였는데 밤중에 비가 억수로 쏟아지더니 큰물이 나서 계곡 가의 지반이 무너지면서 그 위에 쌓아놓은 통나무들이 밀려내려가 계곡을 메워서 물길이 용광장 집터를 휩쓸어버렸습니다. 이때 골편수는 다리에 타박상을 입고, 매제는 왼쪽 다리를 다쳐 걷지를 못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진흙구덩이에서 빠져나온 꼴을 하고 온 동생이 울며 식구들 앞에서 털어놓았습니다.
그래서 목면을 위탁판매하던 울산 객주에게 여시바윗골 땅과 집을 담보로 잡히고 돈을 빌려와 다시 복구합니다.
그런데 울산 객주에게서 빌린 이자를 처음에는 잘 가져 오더니 다음 해(1859년) 3·4월 치를 5월에나 가져오고 나서, 5·6월 치를 7월이 넘고 8월이 넘도록 가뭇없었습니다. 그러자 울산 객주에서는 9월이 되자 이자가 밀렸다고 7월분 목면 값을 까고 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오빠에게 들은 동생은 할 수 없이 두동명 중리 용광장에 가보니 집은 불타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놀랜 가슴으로 용광장에서 사는 사람에게 물어 보니 다리를 다쳐 잘 걷지 못하는 매제 대신 영업을 하던 일꾼이 물건을 싼 값에 넘겨 잘 팔려서 일거리가 많아 모두 열심히 신나게 일했는데 이놈이 수금을 한 걸 몽땅 가지고 도망을 쳤다는 겁니다. 그래서 토철 외상값도 못 갚고 매제네는 고향으로 갔다는 겁니다.
목면 값을 받지 못한 7인은 의론한 결과 물품 대를 받지 못한 곡절이 수운한테 있으므로 수운에게 가서 따지자고 여시바윗골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중에 말솜씨 좋은 젊은 부인이 책을 보고 있던 수운 앞으로 나서며 “아저씨요. 아저씨가 이자를 갚지 않아 우리 목면 값을 두 달 치나 못 받았는데 책만 보고 계시면 어쩔 겁니까? 무슨 수를 써 주셔야지 않습니까?”라고 대들었다. 수운은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지 못해 고민에 푹 빠져서 제 몸 하나 건사도 못해 수염도 더부룩한 채로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무심한 그 꼴이 노파(서군효 어머니)의 마음을 갑갑하게 만들었던지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치며 소리칩니다.
“이 집도 땅도 다 잡혀 먹었다면서 뭘로 갚을꼬? 내 속 터져 죽겠고만.”
그러면서 복장을 치더니 쓰러지는 걸 옆의 젊은 여인이 안아서 방바닥에 뉩니다. 여인들은 놀래서 할머니를 부르며 흔들었으나 기척이 없습니다. 그 중에 두 여인이 할머니 집에 알려야겠다고 급히 밖으로 나갑니다. 다시 젊은 부인이 말하기를 “아저씨, 보고만 있지 말고 어떻게 살려 보시라요. 의술에도 영통하셨다면서 그러고만 있으면 우린 어쩌란 말이오?” 합니다.
그때 수운 머리에 떠 오른 것이 책 선반 위의 꿩 깃입니다. 그는 일어나서 선반 위의 꿩 깃을 꺼내 뿔대를 잡고 젊은 여인에게 노인 입을 크게 벌리게 하고 목구멍을 보며 깃을 집어넣어 휘저었습니다. 그렇게 몇 번하자 노인이 꿈틀거리더니 입으로 피를 토해 냅니다. 동리에 알리러 갔던 여인들과 박씨부인과 처남과 그리고 노파 아들 서군효 등이 들이닥칩니다. 서군효는 어머니가 쓰러졌지만 눈을 뜨고 계신 걸 보고 다행이다 여기는데, 젊은 여인이 수운 아저씨께서 살려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또 ‘죄송해요’라고 합니다. 어머니가 잘못되었을까봐 놀라서 어리둥절하던 차라, 그제야 어머니가 와서 소란을 피운 것이 미안한 마음이 든 겁니다. 처남은 수운 옆에 서드니
“내가 갚아드릴 터이니 그리들 아시고 집으로 돌아들 가세요.”라고 하면서 두 손으로 물을 뜨듯이 일어나라고 손짓을 합니다. 슬금슬금 일어나 밖으로 나가고 서군효도 긴 팔로 어머니를 일으켜 업고 방을 나갑니다. 처남도 따라 나가 배웅을 하고 들어와 앉습니다. 수운은 처남에게 ‘울산 행수에게 가서 며칠 뒤 땅과 집을 비어 주겠다고 전하시라고 합니다. 그러고 뵐 면목이 없어 인사 없이 떠나니 서운해 하시지 말란 말도 전하시라고 합니다. 그렇게 정리하고 수운은 식구들을 데리고 용담으로 돌아옵니다.

36세(1859) 10월 2일. 가장 반기는 사람은 세조였습니다. 세조는 수운이 용담에 돌아와 학문을 펴서 학문하는 이들이 모여들어 할아버지 시절처럼 선비 집안의 권위를 이어가려 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인 근암을 추모하는 30여 명의 인사들이 만든 ‘수계모임’이 용담에서 매년 봄마다 이뤄져 왔는데 그는 바짝 다잡아 도왔습니다. 용담정이나 와룡암도 늘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잘 관리하였습니다. 수운도 말 타고 여러 번 들린 적이 있어서 잘 압니다. 수운은 5칸살이 와룡암을 살림집으로, 3칸살이 용담정은 수도용으로 쓰기로 마음을 정하고 온 겁니다.
수운은 제살붙이는 와룡암의 4칸짜리 안방을 쓰게 하고, 울산 내외한테는 마루 건너 2칸짜리 방을 쓰게 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책보따리 등을 용담정으로 옮기고 며칠 간 나무를 하며 수도 준비를 합니다. 마침내 그는 붓을 들어 ‘不出山外(불출산외)’라고 쓰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水雲 崔濟愚(수운 최제우)’라고 쓰고, 밥풀로 방문 위에 붙입니다. 호를 ‘수운(水雲)’이라고 지은 것은 최치원 호인 고운(孤雲)에서 운(雲)자를 따온 것으로 여기엔 최치원 원조처럼 새로운 도를 찾을 때까지 산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결의가 담긴 겁니다. 그리고 이름을 제선(濟宣)에서 제우(濟愚)로 고친 것은 어리석은 누리 사람들을 건지겠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두 끼만 먹으며 적멸굴에서처럼 밤 8시께(戌時)와 새벽 5시께(寅時)와 낮 12시께(午時)에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우고, 정안수를 봉전하고 기원하기로 합니다. 적멸굴에서처럼 아침 한 때만 먹으려 했으나 식구들이 마음끓일 것이므로 저녁밥을 먹기로 하되 반쯤만 먹기로 한 겁니다. 그가 이처럼 힘겨운 수도를 하기로 마음을 정한 것은 금식(禁食)으로 몸을 맑혀야 마음이 한울님 가까이 가리라 여겨져서요, 몸맘이 맑아지면 도진 속병도 나을 것이란 여겨섭니다.
기도 시간인 낮 12시께(午時)가 가까워 오자, 쾌상 위에 향로와 촛대를 올려놓고, 부엌 뒤 샘터에서 정안수를 가들막하게 떠다가 향로 앞에 봉전하고, 부시 쳐서 초에 댕기고, 향로에 향을 피웁니다. 그는 세 번 절하고 나서 다리 꽈앉고 기도에 들어갑니다.
“무극한울님이시여 현현하옵소서. 무극의 영기가 만물로 화생하시고 만유 속에 계시며 사람으로 화생하시고 사람 속에, 제 몸속에 계심을 아옵니다. 그래서 무극한울님이 만유의 시원이시며 첫 조상님이 되심을 아옵니다. 첫 할아버님이신 한울님이시여, 간절히 바라오니 몸속에 계시며 마음으로 화생하신 까닭을 가르쳐 주옵소서. 바라시는 바를 가르쳐 주옵소서. 한울님의 뜻에 합하는 삶을 살려고 하오니 가르쳐 주옵소서. 감응하옵소서.”
다시 세 번 절하고 촛불을 끕니다. 그러고 꽈앉기 하고, 눈을 감고 배호흡을 하다가 마음이 맑아지자 도심을 헤아려 봅니다. 그는 도심에 무극의 영기의 뜻이 담겨 있으리란 것을 안 뒤 도심을 헤아리기 시작 하였습니다. 사람의 도심은 근원을 알려는 욕구를 갖추어서 자기의 정체를 알고 싶어하고, 만물의 시원을 알고 싶어하고, 그 시원자가 어떻게 만물로 화생했는가를 알고 싶어 하는 거라 여겼습니다. 이 같은 도심의 욕구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의식주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욕구입니다. 따라서 이 도심의 욕구는 무극한울님의 뜻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도심의 욕구로써 자신의 정체를 발견한 것은 곧 무극허령이 자신의 정체를 발견한 꼴이라 여겨집니다. 이래서 무극한울님은 만물로 화생하고 만물 속에, 사람으로 화생하고 사람 속에 있는 거란 의식이 듭니다. 사람의 몸속에 있어야 무극의 허령이 자연스럽게 마음으로 화생하여 자신의 정체를 추리해 알 수 있어서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이제껏 몸 밖 공간속의 무극한울님에게 기도해 왔으니 자신의 기도나 앎이 자기의 몸속한울님에게 전해질 수 없었을 거란 의식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뒤부터 ‘몸속에 계신 무극한울님’께 기도하고, 배호흡을 할 때에도 ‘몸속에 계신 무극한울님’만 사유하며 합니다. 그랬더니 배호흡을 하면 의식이 자연스레 호흡의 느낌을 타고 깊어지며 무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몸속한울님에게 한발 가까워진 느낌이 듭니다. 의식이 감각·감정의 뜻을 알 수 있듯이 몸속 무한소 영기한울님의 뜻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집니다.
그는 겨울을 보내고 37세의 입춘(음력1860·1·13)을 맞이합니다. 입춘 시를 “도기장존사불입(道氣長存邪不入; 도의 기운을 길이 보전하니 삿된 것이 들어오지 못하네). 세간중인부동귀(世間衆人不同歸; 세상의 중인들의 인심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란 시를 써서 방문 밖 기둥에 붙입니다. 밤낮으로 기도하고 배호흡을 할 때도 몸속에 계신 한울님을 사유하다 보니 도의 기운이 몸에 어리어 삿된 의식이 들지 않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세간의 중인들처럼 의식주를 구하는 일로 돌아가지 않고, 도를 밖에서 구하는 데로 돌아가지 않고, 자기 몸속에서 구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렇게 의식을 자기의 안속 무한소 무한의 영기한울님에 몰입하다보니 각성상태가 심화되어 신경이 예민해져서 잠이 들어도 의식은 반쯤 깨어서 깊은 잠이 들지 못합니다. 밥도 한 끼 정도밖에 먹지 않아 그의 얼굴은 바싹 야위고 금색 눈망울 속 동자는 불꽃이 튀어나올 것처럼 빛났습니다.

<주석>
1) 十干(육십갑자의 윗부분을 이루는 글자;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十二支(육십갑자의 아랫부분을 이루는 글자;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까닭수 ; 결과에 이른 사정이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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