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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경흥
댓글 0건 조회 2,035회 작성일 12-11-25 13:30

본문

<죄송합니다>
동학 장생주 4번. 5번 문장이
바뀌는 실수가 있었습니다
짓고 다시 옮깁니다.

3.지기의 속성

1) ‘무극대도’는 ‘지기와 장생주’를 뜻함
‘동학’이란 말이 쓰이기 전에는 ‘무극대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무극대도’는 미시적으로는 ‘지기’를 의미하고, 거시적으로는 ‘장생주’를 뜻합니다.

먼저 ‘무극대도’가 ‘지기’를 뜻함을 알아봅니다.
그럼 수운께서 ‘지기의 속성’을 언제 어디서 체득했는지부터 알아봐야 합니다. 그런데 정확히 밝힌 기록이 없으므로 그의 글을 통해 추리해야 합니다. 그의 글을 보면 1860년 4월 5일 용담정이라 추정됩니다. 당시의 뒤나절 상황을 기록한 ‘동학론’의 한울님 말씀인 “너는 무궁 무궁한 도에 이르렀으니 닦고 단련하여 그 글을 지어 사람들을 가르치고.(及汝無窮無窮之道 修而煉之 制其文敎人)란 글입니다. 여기서 ‘무궁한 도’란 ‘무극의 지기’를 의미하며 ‘이르렀으니’는 ‘보고 체험했으니’란 의미입니다. 즉 무극에 이르러 ‘지기의 속성’을 보고 겪은 ‘견천’한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처럼 윗글의 ‘무궁한 도···’는 이미 수운께서 무극에 이르러 지기의 속성들을 보고 온 것을 두고 한 한울님 말씀이므로 ‘지기 속성 체험’은 앞나절이요, 이를 언급한 한울님 말씀은 그 뒤인 뒤나절이 됩니다. 그래서 ‘지기의 속성’의 체득은 4월 5일 앞나절이 됩니다.
또 다른 증거는 ‘포덕문’의 ‘不意四月 心寒身戰 疾不得執症 言不得難狀之際 有何仙語 뜻밖에도 사월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리었지만 병 증세를 집어내지 못하고, 말로 터득하지 못하고 형상하기도 어려움에 마주쳤는데,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의 ‘언부득난상지제(言不得難狀之際)’란 말씀이라 봅니다. 이처럼 ‘언부득난상지제’를 독립 어구로 보기 위해 제(際사이·때·시기·마주치다·두 사물의 중간)에서 <마주치다>의 의미를 차용한 것입니다. 그래야 ‘동학론’의 ‘너는 무궁 무궁한 도에 이르렀으니’의 말씀의 출처를 밝힐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무궁한 도’에 이른 것이 언제인가를 밝히려면 ‘언부득난상지제’ 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언부득난상지제’에 ‘무궁한 도’인 ‘지기의 속성 체험’을 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미 본 바와 같이 ‘무극의 지기 체험’은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고 형상하기도 어려운 것’이어서 ‘언부득난상지제’라 마무리하시고 그 뒤의 쉬운 한울님 말씀으로 ‘포덕문’을 구성해 간 것이라 보입니다. 포덕문이 너무 어려우면 남이 알아보지 못해 헛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부득난상지제’는 무극의 ‘지기의 속성’ 겪음인 ‘견천’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처럼 수운께서는 형상하기 어려운 무한소 무극에서 견천한 ‘무극의 지기의 속성’을 ‘포덕문’에서는 ‘언부득난상지제’라 하고, ‘동학론’에서는 ‘무궁한 도’라 하고, ‘용담유사’에서는 ‘무극대도’라고 거듭 강조한 것입니다. 따라서 수운께서는 ‘지기의 속성’인 ‘무극대도’를 1860년 4월 5일 앞나절에 용담정 마루에서 득도한 것입니다.
그럼 ‘무극대도’가 ‘미시적’인 ‘지기’를 의미하는 것임을 좀더 알아봅니다. 득도 한 지 24일쯤 되어서 처음 지은 가사인 ‘용담가’에 “경신사월 초오일에 글로 어찌 기록하며 말로 어찌 이뤄낼까 만고없는 무극대도 여몽여각 득도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만고 없는 무극의 대도’에 해당하는 것은 ‘무극의 지기’밖에 없습니다. 그런 ‘무극의 지기’를 겪은 것을 ‘득도로다’하신 겁니다. ‘득도(得道)’는 ‘국어사전’에서 ‘①도를 깨달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득도’는 수운께서 4월 5일 무한소 무극에 이르러 ‘무한하고 맑고 밝고 거룩한···’ 모습을 보고, 이것이 ‘지기의 속성’임을 깨달은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득도> 한 ‘무극대도’는 ‘지기’를 의미합니다.

다음에는 ‘무극대도’가 ‘거시적’으로는 ‘장생주’를 의미함을 봅니다.
관에서 포덕을 금지하여 용담을 떠나 남원을 향해 가며 방문 포덕을 할 때 지은 ‘교훈가’에 “칠팔삭 지내나니 꿈일런가 잠일런가 무극대도 받아내어 정심수신 하온후에 다시앉아 생각하니···· ”라 했고, ‘교훈가’를 더 읽어 가면 한울님 말씀이 나오는데 “그런비위 어데두고 만고없는 무극대도 받아놓고 자랑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받아내어 ·받아놓고’라는 말은 ‘선생주문’인 ‘지기금지사월래···’가 맑은울에 떠올랐을 때 받은 것을 말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처럼 <받았다.>의 ‘무극대도’는 ‘선생주문’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받은 ‘선생주’인 ‘至氣今至四月來 侍天主令我長生無窮無窮萬事知’와 ‘장생주’인 ‘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와 ‘至氣· 侍天主· 萬事知’가 같습니다. 또한 ‘선생주’인 ‘영아장생(令我 長生)’의 ‘장생(長生)에서 ‘長生呪’란 말도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주요 단어들이 똑 같아서 내용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선생주’와 이를 일부 수정한 ‘장생주’는 같은 것입니다. 남원에서 지은 ‘도수사’의 “내역시 이세상에 무극대도 닦아내어 오는사람 효유해서 삼칠자 전해주니····”라고 한 ‘무극대도’는 ‘선생주’요 이를 ‘닦아낸 것’은 ‘장생주’요, ‘효유한 삼칠자’도 ‘장생주’인 것입니다. 이처럼 ‘선생주’를 닦아내 포덕한 것이 ‘장생주’요 내용도 같은 것이므로 수운께서는 둘을 하나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무극대도’를 ‘장생주’로 보아도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받았다>는 ‘무극대도’는 거시적으로 보면 ‘장생주’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무극대도’는 <득도>한 ‘무극의 지기’를 의미하기도 하고, <받은> ‘장생주’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건 ‘무극대도’를 좁은 의미로 보면 ‘지기’가 되고, 넓은 의미로 보면 ‘장생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장생주’의 주어가 ‘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즉 ‘장생주’는 주어인 ‘지기’로써 이뤄졌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이처럼 ‘장생주’는 지기로 이뤄졌기 때문에 ‘장생주’를 이해하려면 먼저 ‘지기의 속성’을 익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2) 지기의 속성의 6가지

야뢰 이돈화(1884~1950)께서는 ‘신인철학’ 29쪽에서 ‘지기의 속성’에 대해
“논학문(동학론)이란 글을 지어 제자에게 줄 때에 ‘至氣’ 2자를 해석하여 ‘至者 極焉之爲至. 氣者 虛靈蒼蒼 無事不涉 無事不命 然而如形而難狀 如聞而難見 是亦渾元之一氣也’라고 간단한 문구에 우주본원적 진리를 표현시킨 것이다....至氣의 本體로서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은 그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야뢰께서는 ‘지기(至氣)’를 ‘우주본원적 진리’라고 하였고, ‘지기의 속성’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지기의 속성’이 되는 풀이를 중요 단어 위주로 요약해 보면 ‘極焉之爲至=무극(무한), 虛靈蒼蒼=허령, 無事不涉 無事不命=섭명, 是亦渾元之一氣也=일기’가 됩니다.1) 이 외에도 맺는말의 ‘至化至氣 至於至聖(지기에 지극히 화하면 지극히 신성스러움에 이른다)’에서도 지기의 속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至化至氣’에서 ‘기화’를, ‘至於至聖’에서 ‘거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화·거룩’을 지기의 속성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이 같은 지기의 속성을 기능별로 분류해 나열해 보면 <‘무한·허령·일기·지성’, ‘섭명·기화’>가 되는데 여기서 <무한·허령·일기·지성>은 ‘체’가 되고, <섭명·기화>는 ‘용’이 됩니다.
그러면 만유의 시원인 ‘지기의 속성’들을 알아보도록 합니다. 동학에서 ‘지기의 속성’은 한글의 ‘자음 ·모음’과 같은 것입니다. ‘지기의 속성’을 모르고 동학을 이해하려는 것은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모르면서 한글을 이해하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1)무극(무한)

수운께서는 ‘장생주(21자주)’의 첫 자인 지기(至氣)의 ‘지(至)’를 “至者 極焉之爲至”라고 풀었습니다. ‘극(極)’은 ‘무극(無極’이란 의미이므로 “지라는 것은, 무극을 지라고 한 것이요”라는 뜻입니다.
그럼 ‘極焉之爲至’의 ‘極’이 ‘無極’을 의미하는가를 봅니다. ‘동학’이란 말이 쓰이기 전에는 ‘무극대도’란 말이 쓰이었습니다. 이 같은 ‘무극대도’에 해당하는 것은 ‘지기’이거나 ‘장생주’이었고, ‘장생주’에서 ‘무극’에 해당하는 것은 ‘지기(至氣)’밖에 없습니다. 이 ‘지(至)’를 수운께서 ‘極焉之爲至’라고 풀었으므로 ‘極’은 곧 ‘無極’을 의미하는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야뢰께서는 ‘수운심법강의 33쪽’에서 “極은 곧 無極이며...”라고 푼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동희 교수는 최신작 ‘새로 쓰는 동학’2)에서 “위가 없는 최고를 지(至)라고 한다.”라고 했는데 인용문을 참고 하면 ‘위가 없는 최고’는 ‘무극’을 의미하는 말로 쓴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극하다’는 말은 ‘지극한 정성. 지극한 기운’ 등으로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어서 ‘무극’의 개념과는 동떨어진 의미로 회자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 무한자 ‘지기’가 ‘지극한 기운’으로 오인되고 쓰이어서 동양의학에서 말하는 경락의 기나, 물질적인 기나, 혹은 에너지로 오인하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이런 ‘오인’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원래대로 ‘極’을 ‘무극’이라 풀어야 하고, ‘無極’은 ‘극이 없다’는 뜻이므로 요새 말로 하면 ‘무한’으로 인식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럼 야뢰께서 1925년에 지은 ‘수운심법강’의 33쪽에서 과학적 사실에 대입하여 ‘무극’을 동학적으로 정립한 글을 보도록 합니다. 과학은 실증학이므로 대부분의 학문이 과학에 대입해 풀고 있으며 종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동학에서 이를 처음 시도한 분이 의암(손병희1861∼1922) 도설의 ‘원자분자설’이며, 야뢰(이돈화1884∼1950)가 좀더 심화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대신사 해석하시되 至는 極을 이름이라 하셨으니 極은 곧 無極이며 무극은 곧 전우주의 無始無終을 이름이다....이를 强名하여 無限大라 하자. 그러나 無限大는 無限小를 전제한 것이다....우주의 광대무량을 無限大라 하고 보면 이와 상대로 無限小가 있음이 연상된다....이제 無限小가 어떤 것인가 생각하려면 물리학적 지식으로 생각하여 볼밖에 없다. 처음에 물질을 작은 편으로 분석하면 분자를 얻을 것이요, 분자를 또 분해하여 놓으면 原子가 될 것이요 원자를 또 분해하면 電子가 될 것이다. 전자설은 최근에 얻은바 과학자의 물질 단위라는 것이다. 금일 오인의 지식으로는 전자보다 더 작은 단위는 얻지 못하였으며 전자로부터 생각을 이어 그보다 더 작은 것이 至氣의 경애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至氣의 경애는 우주의 본체일 것이다. 靈妙眞如의 경애일 것이다. 철학상 소위 實在의 경애이다. 이에서는 靈과 物을 구분하여 볼 여지가 없다....천지만물은 다 같이 至氣로 生하며 至氣로 歸하고....”
‘극언지위지(極焉之爲至)’의 ‘극(極)’은 ‘무극(無極)’을 의미하는 것이요, 무극에는 ‘무한대’와 ‘무한소’가 있는데 ‘무한대’는 우주 밖을 연상해 볼 수 있고, ‘무한소’는 물질 속을 연상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소’를 알려면 물질을 분해하면서 그 속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을 과학의 양자학이 밝힌 ‘분자-원자-전자’로써 살피는 것을 봅니다. 물질에 대해서는 형이상학보다 과학이 실증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과학의 양자학을 인용해 살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자학도 ‘무한소’를 밝힌 바가 없어서 형이상학적 존재인 무한자 ‘지기’를 인용해 설명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야뢰가 말한 ‘극언지위지(極焉之爲至)’의 ‘무극(무한)’은 ‘무한소’를 의미하고 ‘지기’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물질의 궁극적 실재인 ‘무한소 지기’에 의해 만물은 화생되고 다시 만물은 지기로 돌아간다는 ‘지기의 화생· 환원’의 ‘만사지법’을 야뢰는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무한대’와 ‘무한소’는 별개의 실체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무한대’나 ‘무한소’나 똑같이 ‘무한’을 공유하므로 같은 ‘무한’입니다. 다만 개념을 달리할 뿐이니 즉 똑같은 ‘무한’인데 ‘무한대’는 밖으로 무한이요 ‘무한소’는 안으로 무한이란 방향 개념상의 차이뿐입니다. 원래 ‘무한’은 경계가 없는 것이어서 둘일 수가 없습니다. 둘이면 경계가 생겨 무한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한대· 무한소’는 똑 같은 ‘무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무한소’에 대해 좀더 알아봅니다. ‘무한소’는 물질 속 궁극의 실재자인 쿼크를 넘어 초월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한소’는 유한자를 전제한 것이므로 유한한 것 속에만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공간의 진공도 ‘암흑에너지’ 74%와 ‘암흑물질’ 22%로 채워져 있는 유한한 것으로 공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소’를 만나려면 ‘공간 속’이거나 ‘물질 속’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으므로 공간의 겉이나 물질의 겉에서는 만날 수 없는 존재란 것을 뇌 속 신경세포의 시냅스에 회로를 만들어둬야 합니다. 이는 지기가 물질 밖이나 공간 밖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오류의 관념에서 벗어나야 동학의 지기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무한소 지기’가 만유 속에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봅니다. ‘과학은 우주가 특이점에서 시작된 것임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만유는 위에서 야뢰께서 밝힌 것처럼 무한소를 품고 있으므로 이 특이점도 무한소를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특이점이 빅뱅해서 ‘초끈· 3력· 소립자’가 화생되고, 그 3력에 의해 소립자(쿼크·전자)들이 결합해서 원자·분자를 이루고 물질을 이룬 것입니다. 이들 물질을 분석해 보면 ‘원자· 쿼크’를 만나서 사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쿼크’보다 더 미시적인 ‘무한소’도 물질의 구성 요소로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물질은 물질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무한소’를 포함해 이뤄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공간3)·물질이 ‘무한소’를 품고 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진 것은 태초의 빛인 마이크로파(배경복사)가 우주 공간 여기저기에서 발견되어섭니다. 즉 빅뱅시의 빛은 우주의 팽창과 함께 우주 주위에 밀려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주 중심에서도 발견되고 지구로도 쏟아져 내리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는 우주가 밖으로만 팽창하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도 팽창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즉 태초의 빛이 137억년을 거쳐 무한소 무한을 향하여서도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무한소 무한에 지기는 있는 것이지, 즉 공간 속 물질 속 무한소 무한에 내초월해 있는 것이지 겉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기’는 만유 속에 있는 지기, ‘몸속에 있는 지기’입니다. 수운께서는 이 같은 개념을 17세에 신유학을 통해 알았으며, 경신년 4월 5일 37세에 지기체험을 통해 무한소 무극에 이르러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물질을 초월한 영적인 것이어서 순간적으로 무극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운선생의 의식은 몸속 무극에 이르러 무극을 볼 수 있었던 것이요, 이런 체험을 했기 때문에 ‘교훈가’에서 ‘네 몸에 모셨으니(있었으니)’라고 하셨고, ‘전팔절’에서도 구구절절이 도를 ‘나에게서 구하라’ 하신 것입니다. 즉 내 몸속 무한소 무한인 지기에서 구하란 것입니다.
그래서 ‘무극·무한’이 만유 속, 내 몸속에 있음을 알고, 자기 몸속 무한소 무한인 지기에서 도를 구해야 합니다.
(2) 허령(맑음)

‘虛靈蒼蒼’은 수운께서 경신년(1860년) 4월 5일 앞낮 11시 경에 용담정 마루에서 무한소 무극에 이르러 본 아득한 맑음을 마음의 본질이라 여겨져 기존의 ‘허령’이란 언어에 아득하다는 의미의 ‘창창’이란 언어를 합성해 만든 용어입니다. 따라서 ‘창창’은 우리 머리 위의 푸른 하늘이 아니라 무한계의 ‘아득하고 투명한 ‘허령’을 형용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요 언어는 마음의 본질이란 의미인 ‘허령’입니다.
이 같은 ‘허령’을 유학자들은 어떻게 보는가 봅니다. 주자(朱子1130∼1200)는 ‘주자전서’의 ‘어류(語類)’에서 “마음은 비록 몸의 주인이지만 그 체인 허령은 족히 천하의 리를 관리한다(心雖主乎一身 而其體虛靈足以管之乎天下之理)”라고 했습니다. ‘허령’은 마음의 본체가 되고, 모든 理의 주관자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곡계의 기호학파인 한남당(1682∼1751)은 ‘남당집’에서 “허령 이것은 마음의 본체이다(虛靈卽此 心之本體也)”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운의 부친이신 근암공께서도 ‘근암집’에서 “리․기는 허령이며 심체는 본래 허령이다(理氣虛而靈 心體本虛靈)”라고 했을 것이며, 이 같은 아버님에게 유학을 배웠으므로 수운께서도 의당 ‘허령’을 마음의 본체로 봤을 것입니다. 이처럼 ‘허령’을 ‘마음의 본체’로 보았기 때문에 무극의 ‘지기의 속성’으로 본 것입니다. 의암(손병희1861∼1922)께서는 ‘허령’의 ‘영’을 ‘견성해(見性解)’에서 “영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나의 생각과 헤아림이니(靈中所発 我思我量)”라고 하셨습니다. 영에서 생각이 나오는 것으로 봤으므로 영을 마음의 본체로 본 것입니다.
또 ‘허령’을 ‘맑음’으로 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극의 ‘허령(虛靈)’이나 무극의 ‘태허(太虛)’는 같이 ‘허(虛)’를 공유하는 무극의 존재자입니다. 이 태허를 장재(張載․횡거1020~1077)는 ‘태화편’에서 “太虛爲淸”이라고 했습니다. 서화담도 ‘화담집(花潭集)’에서 “태허는 맑으며 형체가 없으니, 그것을 일컬어 선천이라 한다. 그 보다 큰 것이 없고 그 보다 먼저 시작된 것도 없다.(太虛淡然無形 號之曰先天 其大無外 其先無始)”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무극의 허(虛)를 <청(淸)․담연(淡然)>으로, 즉 맑고 맑은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허령’은 ‘맑은 영’입니다. 해월(최시형1827∼1898)께서는 ‘대하고접하고(대인접물)’에서 “맑음은 몸에 있는 본심이며 도의 끝이니라.(淸明在躬之本心則 道之而盡矣)”라고 하셨습니다. ‘맑음(청명)은 몸에 있는 본심’이라 한 본심은 ‘허령’을 뜻합니다. 또 그 맑음(청명)을 ‘도의 끝’이라고 하였는데 ‘도의 끝’은 ‘무극’이므로 무극의 맑음에 이른 것을 도의 끝이라 한 겁니다. 이처럼 허령이 ‘맑음’이므로 수련할 때 의식이 무극의 허령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의식도 ‘맑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령’은 마음의 본체이며 맑음인 것입니다.


(3) 일기(밝음)

혼원지일기(渾元之一氣)의 혼원(혼元)은 무극의 물질의 본체인 일기를 형용하는 말이므로 국어사전처럼 ‘우주· 천지’로 보지 말고, 무극의 희끄무레하게 흐린 ‘환함·밝음’으로 봐야 합니다. 이같은 ‘혼원’은 ‘일기’를 꾸미는 말이므로 중요한 것은 일기(一氣)’입니다. ‘일기’의 일(一)은 ‘일태극·일원·일신(一太極·一元·一神)의 일(一)처럼 ‘오직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오직 하나인 것’은 무극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일기’는 ‘오직 하나인 무극의 기’란 의미로 봐야 합니다.
동양은 만유의 본질을 기(氣)4)로 보았습니다. 이런 ‘기’가 만유로 화생하였으므로 ‘무극·물질·생명·마음’이란 의미의 용어로 다양하게 파생된 것입니다. 먼저 ‘무극·태극’을 의미하는 말로 쓰인 것을 보면 ‘元氣․一氣․二氣․太虛’ 등이 있습니다. ‘원기’는 ‘만물의 정기’를 의미하는 말이요, ‘일기’란 말은 유목(劉牧1020?~?)이 ‘조은도서(釣隱圖序)’에서 “太極者 一氣也”라고 한 것이요, 二氣는 음양의 기를 의미하고, ‘태허’는 장재(횡거)가 ‘太虛卽氣’라고 한 데서 비롯한 말입니다. 다음 ‘물질’적인 의미로 쓰인 것을 보면 ‘五氣(오행의기)․天氣․地氣․日氣· 氣孔․氣管․氣球’ 등이요, 생명을 의미하는 말로는 ‘生氣· 穀氣․血氣․氣體․經絡의 氣’ 등이 있고, 마음을 의미하는 말로는 ‘義氣․志氣․精氣․勇氣· 聰氣· 邪氣·心氣·’ 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氣)’를 太極卽氣요 物卽氣요 生卽氣이요 心卽氣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학의 ‘일기’는 ‘무극· 태극의 기’에 해당하므로 이에 한해서 쓰고 이해해야 합니다. 즉 동학의 ‘일기’는 만물의 본질로써의 ‘무극의 일기’를 의미하지 ‘심기·생기· 물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일기’를 ‘무극의 기’로만 인식하고 이해하고 써야 오류를 범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 같은 무극의 ‘일기’는 어떤 것인지 과학의 눈으로 봅니다. 무극 ‘일기’의 화생물인 풀· 나무 등 모든 생명들은 타며 불꽃을 냅니다. 더 뜨거운 열을 받으면 흙· 철 등 모든 물질도 타며 빛을 냅니다. 이로써 모든 물질은 빛으로 이뤄진 것을 알게 되고 빛은 밝음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이점이 자기가 품고 있는 무한소 무한인 초월적 존재인 지기로 최후의 환원을 할 때 빅뱅해서 ‘빛에너지·3력·소립자’ 등으로 화생하는데 이들은 전기를 띠고 있으며 빛을 내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지기의 일기는 밝음이란 것을 추리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과학적 추리에 의하면 일반물질은 불로 이뤄지고 빛으로 이뤄진 것이어서 그 본질인 일기를 ‘환함’으로 ‘밝음’으로 봐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련 중에 심신이 환해지고 밝아지는 것은 지기의 일기에 화해서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인식입니다.

따라서 ‘일기(一氣)’는 환한 밝음입니다.

(4) 지성(거룩)
원문을 옮겨보면 “故 明明其德 念念不忘則 至化至氣 至於至聖(고로 밝고 밝은 그 덕을 생각하고 생각하여 잊지 않은 즉 지기에 지극히 화하여 지극히 신성한 사람에 이릅니다.)”입니다.
이처럼 ‘지기의 속성’의 밝고 밝은 그 덕을 사유하면 ‘지기에 지극히 화하여 지극히 신성(神聖)한 사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기’에 신령하고 성스러운(神聖) 거룩한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지기에 거룩한 기운이 있어서 수운께서는 무한소 무극의 지기에 이르렀을 때 거룩함을 느꼈던 것이요, 그래서 ‘지기에 지극히 화하면 지성(至聖)에 이른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련을 할 때, 몸속 무한소 무한에 있는 ‘지기의 속성’을 깊이 사유하면 몸맘이 지기에 지극히 화하여(至化至氣) 신령한 기운이 옴 몸으로 확산하다가 성스러움에 이르는(至於至聖) 것을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시천주(몸속 지기한울님)를 느끼고 의식하거나, 나아가 심신이 한울님화한 경지에 이르러 인내천을 체득하게 됩니다.
성(聖)은 ‘지기의 속성’에서 최상의 한울님성품으로 한울님 그 자체입니다. 사람은 성(聖)에 이르면 누구나 한울님을 느끼고 의식할 수 있게 되어섭니다. 이는 마치 혀가 단맛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처럼 심신이 신령해지거나 성스러워지면 저절로 한울님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본능은 지기의 섭명에 의해 인간이 갖추게 된 성품이므로 이 본능에는 한울님이 인간으로 화생한 뜻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그건 사람을 통해 현화(現化)하고자 하는 지기한울님의 뜻이라 여겨집니다. 또한 사람이 한울님을 느끼고 의식하다 보면 심신이 한울님화하여 한울님이 주체가 되고 나는 객체가 되기도 하는데 이런 걸 보면 지기한울님은 인간의 의식을 통해 한울님으로 깨어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기한울님은 사람을 통해 한울님으로 깨어나는 자아실현을 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던 것이 명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성(至聖)은 거룩한 한울님입니다.

<주석>
1) ‘모시는 사람들’ ‘한울님에 이르는 길 297쪽 참고
2)집문당. 최동희 ‘새로쓰는 동학’ 238쪽
3) 암흑에너지 74% 암흑물질 24%로 채워진 곳임. 진공도 마찬가지로 이들로 채워진 곳임. 우주에서 공기나 지구나 별을 이루는 일반물질은 4%임.
4) 정신세계사. 박희준옮김 마루야마 도시아끼저 ‘氣란무엇인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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