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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아무에게나 농락당해도 즐거운 우리들(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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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댓글 0건 조회 2,003회 작성일 12-08-31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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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나 농락(籠絡)당해도 즐거운 우리들(12-4)
제 1 조, 인간은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한다. 사회적 차별은 공동 이익을 근거로 해서만 있을 수 있다.
제 2 조,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소멸될 수 없는 권리를 보전함에 있다. 그 권리란 자유, 재산, 안전, 그리고 압제에의 저항 등이다.
제 3 조,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어떠한 단체나 개인도 국민으로부터 명시적으로 유래하지 않는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제 4 조, 자유는 타인에게 해롭지 않은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음이 다. 그러므로 각자의 자연권의 행사는 사회의 다른 구성 원에게 같은 권리의 향유를 보장하는 이외의 제약을 갖지 아니한다. 그 제약은 법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제 5 조, 법은 사회에 유해한 행위가 아니면 금지할 권리를 갖지 아니한다. 법에 의해 금지되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이라도 방해될 수 없으며, 또 누구도 법이 명하지 않는 것을 행 하도록 강제될 수 없다.
제 6 조, 법은 일반 의사의 표명이다. 모든 시민은 스스로 또는 대 표자를 통하여 그 작성에 협력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법은 보호를 부여하는 경우에도 처벌을 가하는 경우에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모든 시민은 법 앞 에 평등하므로 그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덕성과 재능에 의한 차별 이외에는 평등하게 공적인 위계, 지위, 직무 등에 취임할 수 있다.
제 7 조, 누구도 법에 의해 규정된 경우, 그리고 법이 정하는 형식 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소추, 체포 또는 구금될 수 없다. 자의적 명령을 간청하거나 발령하거나 집행하거나 또는 집행시키는 자는 처벌된다. 그러나 법에 의해 소환되거나 체포된 시민은 모두 즉각 순응해야 한다. 이에 저항하는 자는 범죄자가 된다.
제 8 조, 법은 엄격히, 그리고 명백히 필요한 형벌만을 설정해야 하고 누구도 범죄 이전에 제정·공포되고, 또 합법적으로 적용된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될 수 없다.
제 9 조, 모든 사람은 범죄자로 선고되기까지는 무죄로 추정되는 것이므로, 체포할 수밖에 없다고 판정되더라도 신병을 확보하는 데 불가결하지 않은 모든 강제 조치를 법에 의해 준엄하게 제압된다.
제 10 조, 누구도 그 의사에 있어서 종교상의 것일지라도 그 표명이 법에 의해 설정된 공공질서를 교란하지 않는 한 방해될 수 없다.
제 11 조,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가장 귀중한 권리의 하나이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자유로이 발언하고 기술하고 인쇄할 수 있다. 다만, 법에 의해 규정된 경우 에 있어서의 그 자유의 남용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제 12 조, 인간과 시민의 제 권리의 보장은 공공 무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는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설치되는 것으로서, 그것이 위탁되는 사람들의 특수 이익을 위해 설치되지 아니한다.
제 13 조, 공공 무력의 유지를 위해, 그리고 행정의 제 비용을 위해 일반적인 조세는 불가결하다. 이는 모든 시민에게 그들의 능력에 따라 평등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제 14 조, 모든 시민은 스스로 또는 그들의 대표자를 통하여 공공 조세의 필요성을 검토하며, 그것에 자유로이 동의하며, 그 용도를 추급하며, 또한 그 액수, 기준, 징수, 그리고 존속 기간을 설정할 권리를 가진다.
제 15 조, 사회는 모든 공직자로부터 그 행정에 관한 보고를 요구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제 16 조, 권리의 보장이 확보되어 있지 않고 권력의 분립이 확정 되어 있지 아니한 사회는 헌법을 갖고 있지 아니한다.
제 17 조, 하나의 불가침적이고 신성한 권리인 소유권은 합법적으로 확인된 공공 필요성이 명백히 요구하고, 또 정당하고, 사전의 보상의 조건하에서가 아니면 침탈될 수 없다./ 위키 백과사전과 인권론 PP.243-245.
4). 에이브라햄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의 진실.
우리나라에서는 유독이 많은 사람들이 에이브라햄 링컨이 위대한 인물로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링컨이 생존한 시대와 그가 정치적인 활동을 한 그 시대의 미국의 역사와 링컨의 정치활동을 구체적으로 정확히 안다면, 절대로 위대한 인물이며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평가되는 기준으로 에이브라햄 링컨의 공과 과오의 전모를 보게 된다면 과연 존경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만약에 링컨의 과오를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드린다면, 수백 년간의 중화사상(中華思想, Sinocentrism)을 바탕으로 한 중화주의에 영향을 받아 사대주의로 주체성을 잃은 지 오래인데 그것도 모자라서 상대를 중국에서 서양으로 바꾼 한국의 집단지성은 신 사대주의에 철저하게 함몰(陷沒)된 이중 잣대를 가진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인 소인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외국의 인물들은 무비판적으로 위대한 인물이고, 5천년의 장구한 역사 속에 이 나라의 명맥(命脈)을 목숨 받쳐 이어오고 전통문화를 빛나게 한, 우리의 존경스럽고 위대한 인물들은 모르는 구차하고 부끄러운 민족이 되어가는 우리는, 바람직한 국민인가를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註 00; 중화사상과 중화주의- 중화사상(中華思想, Sinocentrism)이란, 중국이 자국의 문화와 중국이 천하의 중심에 있다고 하여 국토를 자랑스러워하며, 타 민족을 배척하는 사상을 말한다. 여기서의 ‘중화’는 세계의 중심의 우수한 나라라는 뜻이며, 그 밖의 나라는 오랑캐로 여기어 천시(賤視)한다. 이러한 타민족을 배척하고 멸시하는 사상을 다른 말로 화이사상(華夷思想)이라 한다. 이 사상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진(秦)· 한(漢) 시대에 걸쳐 형성되었다. 특히 한대(漢代)의 공양학(公羊學)에서 두드러졌다. 한족의 문화 전통을 지키겠다는 취지에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 사상을 강화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주자학(朱子學)이다.
그 후 만주족(滿洲)이 중국을 통치하며 청나라가 건국되었고 반만사상(反滿思想)이 재연되었다. 또한 서양 제국과의 외교 교섭을 가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양 문화의 수용을 저해(沮害)하였다. 그러나 차츰 서양 문화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고, 왕조체제의 붕괴와 함께 기존의 중화사상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자 중국 내부에서 다수의 한족과 지배받는 나머지 소수민족이 갈등 관계에 놓이자, 때때로 한족 사이에서 중화사상과 같은 것이 발현되기도 하였다. 이것이 티베트의 반 중국 시위 등을 유발하는 데 일정 부분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21세기 국제 정세에 맞게, 민족적으로는 중화사상이 일부 필요로 하는 부분도 있으나, 중화사상을 유화(宥和)하고 개방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중화주의라는 용어는 그 의미에 있어서 중화사상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중국을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데올로기이면서 정치경제의 체계를 말하기도 한다. 중화문명 이후로 중국은 양자강과 황하를 아우르는 지역을 천하의 중심으로 설정했고, 이곳을 문화와 문명이 있으며 도덕과 윤리가 있는 중원(中原)으로 부르고 있다. 중화주의는 이러한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철학과 통치이념인 동시에 경제와 인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중화사상 또는 중화중심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중화주의가 초래한 결과는 주변국들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고 한족중심의 문화를 바탕으로하는 획일적인 문화를 강요했다는 겁니다.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수나라가 멸망한 후에 일어선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려고 했던 것도, 한족중심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천하관(天下觀)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고 평가한다. / 위키 백과사전과 관련 자료 재정리.
註 00;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 소중화사상은 중국 이외의 주변 국가에서 중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조선, 베트남 등에서 생겨난 자민족 중심주의 사상이다. 이들은 중화사상에서 중국이 자신을 문명의 중심으로 놓고 주변국가들을 오랑캐로 본 것처럼, 자신들만이 문명국이며 주변의 "오랑캐"에 비해 문명의 수준이 높다고 자부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족의 중국을 이상화하는 양상을 띠기도 한다. 한족국가인 명나라가 이민족인 청나라에 의해서 멸망하자. 멸망한 중화는 자신들의 국가가 계승했다는 의식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한국, 일본, 베트남에 공통적으로 나타났으며, 이것은 일면 당시의 패권국가인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와 상충한다. 따라서 청나라와의 교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한국은 옛적부터 중국의 중심부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조선 시절부터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류가 활발하였다. 고조선 이후 성립된 삼국 시대의 각 국은 상대방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중국과의 교류를 시도하였다. 특히 남북조 시대에는 고구려는 북조, 백제는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상대방보다 우월한 위치를 점하려고 하였다. 신라는 초기에 고구려의 영향권 내에 있었는데, 광개토왕릉비를 보면 신라를 신민(臣民), 동이(東夷)등으로 표현하는 등,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볼 수 있다. 삼국이 신라를 중심으로 통일되는 과정에서 신라는 처음에 당나라에 거의 매년 조공을 하는 등, 그들의 힘을 빌어 고구려, 백제를 병합하려 하였다. 하지만 삼국 통일을 이룬 후, 당나라가 직접적인 지배야욕을 드러내자 독립을 위해 나당 전쟁을 벌였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만주 지역에 성립된 발해는 비교적 당나라에 대해 거리를 두고 독립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처럼 삼국 시대와 이후 남북국 시대 때 한국의 고대 국가들은 일방적 소중화사상을 추구하기보다는 중국과의 적절한 교류와 거리두기를 번갈아 보여주었다. 이후 성립된 고려 역시 당대의 강국이었던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에 대해 일방적인 사대보다는 시류(時流)의 변화를 파악하여 실리를 추구함으로써 독자적인 모습을 많이 추구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 말기부터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원의 간섭기를 겪은 이후 고려의 지배층은 친원적(親元的)인 관료들로 채워졌다. 공민왕의 즉위이후, 친원파를 몰아내고 실지(失地)회복에 나섰으나 공민왕 사후 원나라가 몽골 고원으로 쫓겨나고 그 자리를 명나라가 대체하자 이성계를 비롯하여 신진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다. 고려 말과 조선초기에는 명과 긴장관계에 있었으나 성리학 이념에 따라 사대를 추구하는 조선건국세력이 안정되자 조선은 명나라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으면서 명(중화)의 제후국을 자임한다. 명나라가 청나라로 대체된 후에도 기존의 명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조선의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이는 대륙정세에 대한 오판으로 이어져 병자호란의 구실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의 유교적 지배층들은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중화 문명의 맥이 끊긴 것으로 보고, 조선이야말로 중화 문명의 정통 계승자라고 생각하여 소중화를 자처하였다. 조선에서는 청나라의 지배층인 만주족을 야만족으로 생각하여 현실관계에서는 사대하였으나 이념적으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으며 자신의 혈통을 중국에서 찾으려는 족보 제작도 조선 중기 이후 많아졌다. 이러한 소중화사상은 외국과의 교류를 중화사상의 쇠퇴로 보았으며, 조선 후기의 쇄국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 국민이 링컨이 위대한 인물로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미국을 비롯하여 서구의 미래지향적인 역사관의 영향 때문인 것이다. 서구의 역사 인식은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의 역사를 평가하고 단죄(斷罪)하는 과거로 회귀(回歸)하는 퇴행적 역사관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 일어난 시대적 상황을 가감(加減)없이 직시하여 철저히 고려하여 인정하고 미래 국가발전에 장애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여 위대한 국가가 될 수 있는 요소들을 보완하고 평가하고 해석하여 미래지향적인 역사관을 확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한 위대한 인물들의 공적은 찬양하되, 국가발전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평가되는 과오(過誤)를 과감히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에이브라햄 링컨도 공과(功過)가 극명(克明)한 위대한 인물 중에 하나로, 그의 과오는 지워져 버리고 있다. 그러면 링컨의 어떤 점들이 재해석 되었는가를 위키 백과사전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그리고 관련 자료를 통하여 살펴보면서 필자의 평가를 가미(加味)시켰다.
에이브라햄 링컨은 16대통령으로서의 재임기간인 1861년 3월 4일부터 암살된 1865년 4월 15일까지 4년여 동안, 남북전쟁(南北戰爭; American Civil War- 1861년부터 1865년까지) 기간이었음으로, 임기 전부를 남북전쟁을 치르는데 정치생명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링컨의 주된 관심사가 노예제도의 폐지나 노예제도 자체라기보다는 노예제도 존폐 문제로 서로 대립하던 남부와 북부의 분리를 막는 것이었던 점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었다. 그는 연방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전쟁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으며,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단기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북전쟁은 지루한 전쟁으로 4년이 걸렸다. 이것은 링컨의 상황판단을 잘못한 전쟁으로 수많은 병사들의 사상자를 내었다. 링컨의 연방을 지키기 위하여 임기 전부를 남북전쟁을 치르는데 정치생명을 건 것으로는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른 것이다. 필자는 남북전쟁에 대해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꼭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이겨야 했던 링컨의 정치적 태도는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으며, 그 많은 희생을 해야 할만한 가치가 있는 선택이었는가를?’
남북전쟁에서 보여준 링컨의 태도는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하여 전쟁을 수행했기 때문에 공화당의 중도파 수장으로서, 링컨은 모든 방향에서 비판을 받았다. 노예제도에 반대하던 극단적인 공화파에서는 남부에 대해 더욱 강한 조치를 촉구했으며, 전쟁에 반대하던 민주당에서는 평화와 협상을 촉구했다. 분리 독립주의자들은 링컨을 적으로 보았다. 링컨은 반대파에 지원책을 폄으로서 지지를 끌어내고자 했으며, 뛰어난 수사학 이용과 연설을 통해 대중의 의견을 이끌었다.
1863년에는 노예 해방선언을 발표했고, 수정 헌법 13조의 통과를 주장하며 노예제의 폐지를 이끌었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군사적, 정치적 양면으로 내전 승리에 집중했으며, 미국 남부 11주의 분리 독립선언 이후, 그 주들과 통합할 방법을 계속 모색했다. 그는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전례(前例) 없는 군사 조치를 취했으며, 분리 독립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재판 없이 수감하거나 구금 조치를 취했다.
물론 링컨 자신은 노예제도의 비인도성에 대해 “악의 제도”라고 말할 정도로 다소 회의적이고 비판적이었으나, 노예제도와 흑인 문제 전반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그의 노예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는 자본주의 경제지역이라 노예가 아닌, 임금 노동자가 일하는 북부에서는 설득력을 얻기 힘들었다. 나아가 링컨은 의지가 박약하거나 미숙하여 남북 분리를 초래했다는 우려의 말을 듣기도 하였다.
링컨은 단 한 번도 흑인 노예를 변호한 적이 없고, 노예 해방 선언은 정당성 확보를 위한 정치적 도구이며, 남북전쟁 당시 조직적 파괴, 자신을 비판한 언론 탄압, 인신 보호 영장 정지 등으로 국민들의 자유와 인권을 유린한 점을 들어 링컨을 “정략적 독재자”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미국 중앙정부의 비대화, 로비의 횡행, 정경 유착형 엽관제를 불러왔다고도 비판했다. 그리고 일부 학자들은 이 뿐만 아니라 링컨은 300여 개의 언론사를 폐쇄해 버렸다고 한다.
처음에 링컨은 노예제 폐지정책을 채택하는 데 주저했다. 그는 400만에 이르는 흑인들이 해방되어 국가의 정치, 사회생활에 들어올 경우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을 염두에 두었으며, 무엇보다 폐지론을 내세울 경우 경계주(境界洲:남부 노예주 중 연방탈퇴보다는 타협으로 기운 주)들이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에 합류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럼에도 노예제 반대 감정이 높아졌을 때 그는 자신이 작성한 노예해방령을 들고 나왔다. 그의 제안에 따르면 각 주는 노예소유주에게 보상을 하고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으며, 연방정부는 노예해방에 드는 재정적 부담을 주와 나누어 가진다는 것이었다. 또한 노예해방은 점진적으로 행해지며 해방된 노예는 해외로 집단 이주시킬 것이라는 점도 덧붙여졌다. 독재자를 뛰어넘는 링컨의 이러한 태도와 강경정책에도 불구하고 링컨이 위대한 대통령으로 추앙을 받는 것은, 링컨의 정치적 과오를 다 덮어버려 정죄(定罪)하지 않고 오늘날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었던 링컨이 주장했던 민주주의 이념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링컨은 게티즈버그 전투(Battle of Gettysburg)가 끝난 후, 링컨이 전투 격전지에서 발표한 선언문으로, 선언문 중에,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by the people, of the people, for the people)라는 짧은 문장 속에 민주주의의 이념을 잘 요약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에이브라햄 링컨의 진실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하여 관련 자료들에서 발췌 요약하였다.
링컨(Abraham Lincoln - 1809년 2월 12일~1865년 4월 15일)은 1861년 3월 4일부터 암살된 1865년 4월 15일까지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재임(在任)했다. 그는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War between the States)에서 승리해 연방(聯邦)을 보존하고 노예를 해방시킨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이었다. 그는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내부적 위기로부터 나라를 이끌어 벗어나게 하는 데 성공하여 연방을 보존하였고, 노예제를 끝냈다. 당시 미국 서부 변방의 개척지에 사는 가난한 가정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는 공부를 학교에서 배우기 보다는 혼자서 스스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변호사가 되었고, 일리노이 주 의원이 되었고, 미국 하원의원을 한 번 했지만, 상원 의원 선거에서는 두 번이나 실패하였다. 그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지는 못했지만, 자상한 남편이었고 네 아이의 아버지였다.
링컨은 미국의 노예제도의 확장에 대해서 공개적인 반대자였으며, 선거 기간 중 토론과 연설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 결과 그는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확보하였다. 대통령이 된 후에 그는 임기 중 일어났던 남북전쟁에서 북부 주들을 이끌며 미합중국에서 분리하려 노력했던 남부연합에 승리를 거뒀다. 1863년에는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했고, 수정 헌법 13조의 통과를 주장하며 노예제의 폐지를 이끌었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군사적, 정치적 양면으로 내전 승리에 집중했으며, 미국 남부 11주의 분리 독립 선언 이후, 그 주들과 통합할 방법을 계속 모색했다. 그는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전례(前例) 없는 군사 조치를 취했으며, 분리 독립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재판 없이 수감하거나 구금 조치를 취했다.
주(註) 00; 남북전쟁(南北戰爭; American Civil War. / War between the States)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기술에 의함.
미국 역사에서 연방정부와, 연방에서 분리할 권리를 주장했던 남부 11개주 사이에 일어난 4년간의 전쟁(1861~65). 1860~61년 남부 주들의 연방탈퇴(탈퇴순서는 사우스캐롤라이나·미시시피·플로리다·앨라배마·조지아·루이지애나·텍사스·버지니아·아칸소·테네시·노스캐롤라이나)와 잇따른 무장 소요 및 노예제·무역·관세 및 주권(州權)에 관련된 문제들로 몇 십 년을 끌어온 지역간의 불화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 불화는 근본적으로 남부와 북부의 경제상의 차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남부 경제가 노예 노동에 의한 대농장(플랜테이션)을 기초로 하는 반면 북부에는 자유민의 노동에 의한 작은 농장들과 날로 발전하는 제조업이 있었다. 1840~50년대 북부 주들은 언젠가는 새로운 주가 될 서부 지역에서 노예제를 금지하기를 바랐다. 남부의 주들은 노예제 확장을 저지하려는 모든 노력에 반대했으며 북부의 태도가 결국에는 남부 자체의 노예소유를 위태롭게 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1850년대 무렵 몇몇 북부인들이 노예제도의 완전한 폐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남부의 몇몇 주들은 노예를 소유할 권리를 지키기 위해 연방에서 탈퇴하겠다고 위협했다. 노예제를 반대하는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0년말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남부의 주들은 이러한 위협을 실천에 옮겨 연방에서 탈퇴했다.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이 이끄는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정부는 남부가 북부보다 애국적 정열 면에서 앞서고, 전략상 유리한 내륙수송로를 가지고 있으며, 국제적인 중요성을 갖는 환금작물인 목화를 생산하고 있으므로 남북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반면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이끄는 북부 연방은 남부보다 인구가 2배 이상 많았으며 제조력·수송력에서 남부를 훨씬 능가했다.
1861년 4월 12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에 있는 섬터 요새에 대해 남부연합 정부의 포가 발사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양측은 신속하게 군사를 모집하고 전투체제로 편성하기 시작했다. 7월 21일 남부연합의 수도인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로 행군하던 3만 명 가량의 북군은 '철벽장군' 토머스 J. 잭슨과 P.G.T. 보러가드 장군이 이끄는 남군에게 패배하여 워싱턴 D. C.로 후퇴했다. 이러한 패배에 충격을 받은 북부는 신병 50만 명을 더 소집했으며 조지 B. 매클렐런 장군에게 포토맥 군대를 훈련시키는 임무를 내렸다. 첫번째 중요한 원정은 1862년 2월에 시작했다. 이때 북군의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은 테네시 서부에 있는 남부연합 요새인 헨리 요새와 도넬슨 요새를 점령했다. 뒤를 이어 북군의 존 포프 장군은 미주리 주의 뉴마드리드를 점령했고 4월 6~7일에 테네시 주 샤일로에서는 희생이 크면서도 승패가 뚜렷하지 않은 전투가 있었다. 또 같은 4월에 북군 해군제독 데이비드 G. 패러것이 뉴올리언스를 장악했다. 동부에서는 매클렐런이 10만 명의 병력으로 리치먼드 점령을 다시 시도하기 위해 오래 기다려온 공격을 시작했다. 매클렐런은 남군의 로버트 E.리 장군과 그의 유능한 부하 잭슨과 J.E. 존슨턴에게 저지당하자 신중하게 진군했으나 '7일전투'(6. 25~7. 1)로 그의 '반도회전'(半島會戰)은 패배로 돌아가고 말았다. 제2차 불런 전투(8. 29~30)에서 리는 포프가 지휘하는 또다른 북군을 버지니아 주 밖으로 몰아내고 메릴랜드 주까지 추적했으며 앤티텀(또는 샤프스버그, 9. 17)에서 매클렐런에게 저지당했다(→ 색인 : 앤티텀 전투). 리는 철수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후 12월 13일 버지니아 주 프레더릭스버그에서 매클렐런의 후임자인 A.E. 번사이드를 크게 패배시켰다(→ 색인 : 프레더릭스버그 전투).
이 패배 뒤 북군 사령관은 번사이드에서 조지프 후커로 교체되었다. 후커 장군은 1863년 4월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버지니아 주의 챈설러즈빌에서 리의 측면을 공격하려 했던 그는 리의 책략에 완전히 넘어가(5.`1~5)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색인 : 챈설러즈빌 전투). 이후 리는 2번째 북부공격을 시도했으며 메릴랜드에 있는 후커를 능숙하게 피해 펜실베이니아로 들어갔다. 펜실베이니아에서는 소부대끼리 벌어진 우연한 접전이 극적인 게티즈버그 전투(7.1~3)로 발전했다. 이 전투에서 북군의 새로운 장군인 조지 G. 미드 장군이 방어진을 펼친 상태에서 남군의 피켓 장군이 공격을 가했다.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격퇴당한 리의 군대는 버지니아로 후퇴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서부에서도 전세가 역전되었다. 북군 장군 그랜트는 2개월 동안 교묘한 전술을 구사한 끝에 1863년 7월 4일 미시시피 주의 빅스버그를 점령했으며 이어 미시시피에 남아 있던 몇 개의 남부요새도 비교적 쉽사리 점령했다(→ 색인 : 빅스버그 회전). 이로써 미시시피 강은 완전히 북부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W.S. 로즈크랜스 장군이 이끄는 북군이 조지아 주의 치카모가에서 패한(9. 19~20) 뒤 10월에 그랜트에게 그곳의 지휘가 맡겨졌다. 윌리엄 T. 셔먼 장군의 도움을 받아 그랜트는 남군의 브랙턴 브래그 장군을 채터누가에서 몰아내고(11. 23~25) 이어 테네시 주 밖으로 쫓아냈다(→ 색인 : 채터누가 전투). 잇달아 셔먼은 녹스빌을 손에 넣었다. 1864년 3월 링컨은 그랜트를 북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랜트는 몸소 동부의 포토맥군을 맡았으며 병력과 물자에서 연방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것을 기초로 곧 지구전(持久戰) 전략을 세웠다. 그는 5월에 전진하기 시작하여 버지니아 주의 윌더니스·스폿실베이니아·콜드하버에서 벌어진 전투로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냈으나 6월 중순 무렵 피터즈버그 전방의 요새에 리를 묶어 두었다(→ 색인 : 피터즈버그 회전). 거의 10개월 간 북군의 피터즈버그 포위공격이 계속되었으며 그동안 그랜트는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갔다. 한편 셔먼은 조지아 주에서 남부연합의 또 다른 주요 병력과 맞섰다. 셔먼은 9월초 애틀랜타를 점령했으며 10월에는 전쟁의 참화를 뒤에 남기며 조지아 주를 가로지르는 480㎞의 행군을 시작했다(→ 색인 : 바다로의 행군). 12월 10일 서배너에 도착한 그는 곧 그 도시를 점령했다. 1865년 3월 무렵 리의 군대는 사상자와 탈주자들 때문에 수가 줄어들었고 물자도 크게 부족했다. 그랜트는 4월 1일 파이브포크스에서 마지막 진격을 개시하여 4월 3일 리치먼드를 점령하고 4월 9일 애퍼매턱스 코트하우스 근처에서 리의 항복을 받아냈다. 셔먼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노스캐롤라이나 주까지 들어갔으며 4월 26일 J.E. 존스턴의 항복을 받았다. 이로써 전쟁은 끝이 났다.
남북전쟁에서 해전은 육지에서의 전쟁에 비해 2차적인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유명한 전투가 있었다. 패러것이 뉴올리언스와 모빌에서 공훈을 세워 환호를 받았다. 그리고 철갑선(鐵甲船) '모니터호'와 '메리맥호'가 1862년 3월 9일에 펼친 전투는 현대적 해전을 개막시켰다고 종종 말해진다(→ 색인 : 모니터와 메리맥 전투). 그러나 크게 보면 해전은 남부연합이 유럽과 교역하는 것을 막으려는 북부의 시도 가운데 한 부분이었으며 이러한 시도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한 결과, 연방은 보존되었으며 아울러 노예제가 폐지되고 해방노예에게 시민권이 주어졌다. 또한 전쟁으로 급속히 공업화되고 점점 도시화하고 있던 북부의 주들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링컨은 남북전쟁에서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과 같은 최고 지휘관의 선발에 깊이 관여하며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역사가들은 그가 공화당 내 여러 분파의 지도자를 내각에 참여시킴으로써 당의 분파가 협력하도록 잘 조정했다고 말한다. 링컨은 1861년 말 트랜트호 사건에서 영국과 전쟁 위기까지 몰렸던 위기를 잘 해결했다. 링컨의 리더십 아래, 북군은 남북의 경계가 되던 주들을 점령할 수 있었다. 또 링컨은 186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다시 승리했다. 이러한 링컨의 태도는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하여 전쟁을 수행했기 때문에 공화당의 중도파 수장으로서, 링컨은 모든 방향에서 비판을 받았다. 노예제도에 반대하던 극단적인 공화파에서는 남부에 대해 더욱 강한 조치를 촉구했으며, 전쟁에 반대하던 민주당에서는 평화와 협상을 촉구했다. 분리 독립주의자들은 링컨을 적으로 보았다. 링컨은 반대파에 지원책을 폄으로서 지지를 끌어내고자 했으며, 뛰어난 수사학 이용과 연설을 통해 대중의 의견을 이끌었다. 예를 들어 게티스버그 연설은 미국의 전통인 자유주의 곧 자유, 평등, 민주주의에 대한 상징이 되었으며,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이 인용되는 연설로 손꼽힌다. 게티즈버그 연설은 게티즈버그 전투가 끝난 후, 링컨이 전투 격전지에서 발표한 선언문으로, 선언문 중에,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by the people, of the people, for the people)라는 짧은 문장 속에 민주주의의 이념을 잘 요약했다는 평을 받는다.
전쟁이 종료돼 가면서 링컨은 전후 재건에 대해 신중한 시각을 보이며 관대한 화해를 통해 국가를 통합하는 정책을 주장했다. 남부연합을 이끌던 로버트 리 장군의 큰 패배가 있은 지 6일 뒤에 링컨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임기 중에 암살되었다. 링컨은 지속적으로 전문가들에게서 모든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으며 영웅, 성자, 순교자가 된 실제 키(193cm)만큼 역사의 거인이라 할 수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1809년 2월 12일에 토마스 링컨과 낸시 링컨의 둘째 아이로 태어났으며, 그가 태어난 집은 켄터키 주 하딘 컨트리(현재는 라루 컨트리: LaRue Country)에 있는 방이 한 칸뿐인 통나무집이었다. 링컨의 조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조금밖에 없다. 역사가들은 그의 조상을 추적하였고 새뮤얼 링컨을 발견하였다. 새뮤얼은 1637년에 영국 노퍽으로부터 출발하여 미국 매사추세츠 주 힝햄에 도착한 수습 직조공 곧 섬유노동자이었다. 그의 가족은 분리 침례교(Separate Baptists) 교회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그 종파는 높은 도덕적 기준들을 가지고 있어서 술을 마시지 않고, 춤추지 않으며, 노예제도를 반대하였다. 아버지인 토마스는 켄터키에서 "상당히 즐길만한 위치"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배심원 역할을 맡았고 토지의 가격을 측정하고 지역을 순찰하고 죄수들을 지켰다. 그의 아들인 에이브러햄이 태어났을 때, 토마스는 600에이커의 농장들과 여러 부동산과 가축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그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에 속했다. 하지만 1816년에 링컨 가족은 잘못된 토지재산 소유권으로 인해 그들의 땅을 잃었고, 인디애나 주 페리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나중에 링컨은 이 이주를 두고 "부분적으로는 노예제도 때문"이었다고 기록했지만, 실제로 가장 주된 이유는 토지 등기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1831년에 그의 아버지는 일리노이주 콜스로 이사를 했고, 당시 22세가 되었던 링컨은 자신의 길을 개척하여 카누를 타고 상가몬 강를 내려가 일리노이 주의 뉴 살렘 마을에 도달하였다. 1831년 봄에 링컨은 뉴 살렘의 사업가 덴톤 오푸트에게 고용되었고, 친구들과 함께 링컨은 뉴살렘으로부터 상가몬 강과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올리언스까지 보트로 물건을 실어날랐다. 뉴올리언스에 도착한 후에 노예가 직접 목격한 바에 따르면 그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청년 시기에 링컨은 우체국장, 변호사 , 뱃사공, 가게점원, 토지측량 등 다양한 일에 종사하면서 온갖 고생을 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오하이오 주 국회의원으로 링컨을 경멸했던 제임스 가필드는 링컨 대통령을 가리켜 “일리노이의 이류 변호사가 미래의 모든 세대가 기억할 만한 말을 하는 하느님의 도구로 쓰이다니,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뜻밖의 사건이네.”라고 비아냥거렸다.
링컨의 정식 교육은 약 18개월 동안 여러 명의 순회교사로부터 수업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는 대부분 스스로 공부했으며, 열심히 책을 읽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치열한 레슬링 시합을 치르면서 팔 힘이 세고 대담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다만 그의 가족과 이웃들은 그를 게으르다고 생각했다. 링컨은 동물을 죽이고 싶어 하지 않아서 사냥이나 낚시를 하지 않았다. 자녀들의 죽음은 링컨 부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말년에 메리는 남편과 아이들을 잃은 데서 오는 스트레스에 시달렸으며, 로버트 링컨은 그녀를 1875년에 정신병원으로 보냈다. 링컨은 오늘날에는 임상 우울증이라고 불리는 우울한 상태로 인해 고통 받았다.
1832년에 일리노이 주 의회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여 쓰라린 첫 정치적 경험을 하였다. 1833년에는 관심이 있던 법률을 혼자 공부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1834년 일리노이 주 주의원 당선을 시작으로 정치계에 입문, 1846년 연방의회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858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노련한 정치가 더글러스 현역 상원의원과 경쟁을 벌인다. 이때 이들의 논쟁 주제는 노예제도였는데, 당시 링컨은 '분열된 집은 살아남을 수 없다.' 는 연설로 노예 제도로 대립하던 미국인의 단결을 호소하였다. 결과는 더글러스의 상원의원 재선이었지만, 더글러스와의 논쟁 때 노예제도를 “악의 제도”라고 비판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노예제도 반대론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1861년 3월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자 남부에서는 ‘노예제 반대론자’가 대통령이 된 것에 대해 위기감을 공공연하게 드러냈고, 링컨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남북전쟁이 일어난다.
1864년 유명 배우이자 남부 지지자였던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는 링컨을 인질로 잡아 남부 포로를 석방하기 위한 계획을 짰다. 4월 11일 링컨의 흑인 투표권을 위한 연설을 들은 후, 몹시 화난 부스는 그의 계획을 수정해 링컨을 암살하기로 한다. 대통령과 영부인이 포드 극장에 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 부스는 공범자들과 함께 부통령 앤드루 존슨과 서기 윌리엄 H. 세이워드를 암살하기로 했다. 그의 경호원 라몬(Ward Hill Lamon)이 없는 동안, 링컨은 연극 《Our American Cousin》을 1865년 4월 14일 관람했다. 링컨의 경호원이었던 존 파커는 잠시 극의 막간에 링컨의 마부들과 한 잔하기 위해 옆의 스타 살롱(Star Saloon)으로 나가 있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대통령은 발코니의 관람석에 무방비 상태로 앉아 있었다. 기회를 노리던 부스는 뒤에서 기어 나와 오후 10시 13분에 링컨의 바로 뒤에서 머리를 겨눠 치명상을 입혔다. 헨리 라스본(Henry Rathbone) 소령이 부스를 잠시 동안 붙잡는 데 성공했지만 부스는 그를 찌르고 탈출했다. 10일 간 추적당한 끝에 부스는 워싱턴 D.C.의 30마일 남쪽에 있는 버지니아의 가렛트 농장(Garrett's farm) 에서 발견되었다. 잠시간의 싸움 끝에 부스는 4월 26일 병사들에게 사살되었다. 군의관 찰스 레알레(Charles Leale)는 링컨의 부상을 치명상으로 진단했으며, 링컨은 길을 건너가 피터슨 하우스(Petersen House)로 옮겨졌다. 9시간 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끝에 링컨은 4월 15일 오전 7시 22분에 사망했다. 전쟁 서기관 Stanton이 경례를 하고 “이분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이후, 주변에 있던 장로교 목사 걸레이(Phineas Densmore Gurley)가 임종 당시 기도를 올렸다. 뜻밖에도 링컨이 암살된 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수난절(受難節)이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링컨에게서 워싱턴과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느낀다고 말한다. 링컨이 암살된 지 1주기 되는 해인 1866년 에, 미국 우체국은 사망한 대통령을 기리기 위하여 처음으로 대통령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필자는 여기에서 링컨이 반대파와의 소통의 부재로 암살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를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기독교인은 링컨이 노예제도가 비성서적인 것으로 보아 반대했다고 인식하고 있으나, 링컨의 주된 관심사가 노예제도의 폐지나 노예제도 자체라기보다는 노예제도 존폐 문제로 서로 대립하던 남부와 북부의 분리를 막는 것이었던 점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된 후에도 노예출신 흑인들은 정부에서 노예에게 자유만 줄 뿐, 생계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옛 상전 밑에서 농장 노동자로 다시 종속되었으며, 공화당의 반발로 흑인에 대한 사회에서의 차별도 여전했다. 오히려 백인우월주의를 주장하는 비밀 테러 단체(대표적인 예가 KKK단)의 출현으로 흑인은 새로운 탄압을 받았다. 물론 링컨 자신은 노예제도의 비인도성에 대해 “악의 제도”라고 말할 정도로 다소 회의적이고 비판적이었으나, 노예제도와 흑인 문제 전반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그의 노예제도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는 자본주의 경제지역이라 노예가 아닌, 임금 노동자가 일하는 북부에서는 설득력을 얻기 힘들었다. 나아가 링컨은 의지가 박약하거나 미숙하여 남북 분리를 초래했다는 우려의 말을 듣기도 하였다.
미국 메릴랜드 로욜라 대학교의 경제학 교수로 『가면을 벗긴 링컨』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토머스 딜로렌조(Thomas J. DiLorenzo, 1954년 ~ )는 그의 저서 『링컨의 진실 - 패권주의, 위대한 해방자의 정치적 초상』에서 링컨의 연설문, 군 지휘관들에게 보내는 서한 등 1차 문헌을 참고자료로 인용하여, ‘링컨은 단 한 번도 흑인 노예를 변호한 적이 없고, 노예 해방 선언은 정당성 확보를 위한 정치적 도구이며, 남북전쟁 당시 조직적 파괴, 자신을 비판한 언론 탄압, 인신 보호 영장 정지 등으로 국민들의 자유와 인권을 유린한 점을 들어 링컨을 “정략적 독재자”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미국 중앙정부의 비대화, 로비의 횡행, 정경 유착형 엽관제를 불러왔다고도 비판했다.’ 그리고 딜로렌조와 다른 일부 학자들은 이 뿐만 아니라 링컨은 300여 개의 언론사를 폐쇄해 버렸다고 했다.
링컨과 노예 해방 선언의 진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를 막기 위해 의회에서는 여러 가지 타협안을 제시했다. 가장 중요한 것이 크리튼던 타협안으로 이것은 이미 노예제가 실시되고 있는 주에 대해서는 노예제를 허용하되 새로 연방에 들어올 주는 노예제를 허용하는 노예주와 노예제를 금지하는 자유주로 나누도록 하자는 안이었다. 링컨은 이 타협안의 첫 번째 부분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두 번째 부분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노예제 확대 원칙의 허용은 지역적 분열을 일으킬 것이며, 대농장주들로 하여금 미국 남부 경계를 넘어서까지 새로운 노예주를 얻는 데 박차를 가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연방의 분열을 막으려는 링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를 따라 6개 주가 연방을 탈퇴했고, 이들 7개 주는 '남부연합' 정부를 결성했다.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에 이미 연방 분열의 위기가 보이고 있었다. 당시 북부와 남부의 관심은, 찰스턴 항구의 섬터 요새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직 건설 중이던 이 요새는 로버트 앤더슨 소령이 이끄는 미국 군대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은 요새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항구의 다른 요새들로부터 그곳을 위협했다. 링컨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섬터 요새의 식량이 곧 바닥날 것이므로 지원을 하지 않으면 군대를 철수시켜야 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반대되는 2가지 조언을 받았다. 스콧 장군, 국무장관 윌리엄 H. 슈어드 등이 요새를 포기할 것을 요청한 반면, 많은 공화당원들은 약함을 보이는 것은 당과 연방에 매우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링컨은 섬터 요새와 플로리다 주의 피컨스 요새에 보낼 2개의 원조부대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링컨이 보낸 파견대가 섬터 요새에 도착하기 전에 남부연합 정부는 앤더슨 소령에게 요새에서 즉시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며, 앤더슨 소령이 이를 거부하자 마침내 1861년 4월 12일 동틀 무렵 찰스턴 항구에 있는 남부연합의 포대는 발포를 개시했다.
7월 4일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링컨은 "당시 남부연합 정부의 공격으로 교전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남부연합은 링컨이 자신들에게 전범(戰犯)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기 위해 교묘하게 조정하여 첫 발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고 말했다. 링컨에게 전쟁 원인의 책임을 돌리는 역사가도 있지만, 이러한 비난은 사실을 완전히 왜곡하는 것인 듯하다. 연방을 지켜야겠다는 입장이 확고했던 링컨은 이를 위해 남부연합에 강경히 맞서기로 했으며 섬터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링컨의 원래 목적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평화를 유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연방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전쟁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으며,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단기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 아무에게나 농락(籠絡)당해도 즐거운 우리들(12-4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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