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에게나 농락당해도 즐거운 우리들(12-5) > 중앙총부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중앙총부

자유게시판 아무에게나 농락당해도 즐거운 우리들(12-5)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김 용 천
댓글 0건 조회 1,993회 작성일 12-08-31 22:44

본문

아무에게나 농락(籠絡)당해도 즐거운 우리들(12-5)
링컨은 육해군 총사령관으로서 첫 번째 중요 결정을 내려 섬터 요새에 군대를 파견하고 자원병 모집을 요청하며 항구봉쇄를 명령하는 등의 조치들을 취했다. 그러나 그러한 결정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전략안과 명령체계가 필요했다. 스콧 장군은 링컨에게 버지니아에서의 접전을 피하고 미시시피 강을 장악하여 남부를 거대하고 튼튼한 포위망으로 좁혀 들어가는 전략을 제시했다. 그러나 링컨은 다소 소극적이고 가능한 한 피를 흘리지 않으려는 스콧의 '애너콘다'(구렁이) 작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전쟁에서 이기려면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스콧의 의견을 무시하고 버지니아 전선으로 바로 진군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이 결과 벌어진 불런 전투(1861. 7. 21)에서 북군은 패주하고 말았다. 그 뒤 연일 불면의 밤을 보낸 끝에 링컨은 군사정책에 대한 일련의 각서를 내놓았다. 그의 기본 생각은 몇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공격을 개시하고, 미주리, 켄터키, 버지니아 서부, 테네시 동부로 군대를 이동시켜 그곳에 있는 연방 지지자들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상은 해상봉쇄와 함께 링컨 전략의 핵심을 이루었다.
1861~64년 링컨은 자신의 생각을 장군들에게 명령하기를 잠시 망설이면서 지휘요원과 지휘조직에 대한 실험을 했다. 1861년 11월 그는 스콧의 사임을 받아들이고 조지 B. 매클렐런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몇 달 뒤 매클렐런의 지휘권을 포토맥군에만 한정시켰다. 링컨은 매클렐런이 내놓은 '반도회전'(半島會戰) 계획의 타당성에 의문을 던지면서 계획을 바꿀 것을 계속 요청했으며, 리치먼드 주변에서 벌어진 '7일 전투'(1862. 6~7) 뒤에는 계획 포기를 명령했다. 그리고나서 버지니아 사령관으로 존 포프, 매클렐런, 앰브로스 E. 번사이드, 조지프 후커, 고든 미드를 차례로 임명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만족하지 못했다. 한편 헨리 W. 핼럭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중요한 결정은 내리기를 피했다. 거의 2년 동안 북군은 효과적인 단일 명령체계를 가지지 못했다.
결국 링컨은 서부전선에서 총사령관감을 물색했다. 그는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지휘한 빅스버그 회전을 칭찬했다. 북군이 빅스버그를 함락시킨 지(1863. 7. 4) 9일 뒤 그는 그랜트에게 "더할 나위 없는 당신의 활약에 고마움을 표합니다."라고 썼다. 1864년 3월 링컨은 그랜트를 중장으로 승진시키고 북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마침내 링컨은 대규모 합동공격이라는 자신의 구상을 실현에 옮길 적임자를 찾았다. 이제 북군의 병력과 물자는 육군장관 스탠턴( Edwin McMasters Stanton)이, 대통령에 대한 자문 및 장군들과 대통령 사이의 연결은 참모총장 핼럭(haillock)이 각각 맡았으며, 모든 군대는 총사령관 그랜트(Grant)의 지휘하에 있고 그 가운데 포토맥군은 미드가 맡았다. 이와 같이 링컨은 전면전의 방대한 전략을 실행에 옮기는 데 있어 모든 물자와 병력의 동원을 담당하는 최고사령부의 창설을 주도했다. 그는 군대를 총지휘하는 데 있어 해가 갈수록 수완과 효율성을 발휘했다. 전쟁을 치른 경험이나 전쟁에 대한 훈련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해낸 일들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 부족은 불리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한 듯하다. 그는 케케묵은 군사이론에 구애받지 않고 군사적 천재성이라 말할 수 있는 현실적 통찰력과 상식을 적용하여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인간의 자유라는 대의에 대한 링컨의 깊고 진지한 헌신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 그는 종종 노예제를 주제로 유창하게 연설했다. 예를 들어 1854년 준주로까지 노예제가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대해 더글러스가 무관심하다고 비난하면서 "나는 노예제가 그 자체로 가공할 만한 불의이기 때문에 그것을 증오한다. 나는 노예제가 우리의 공화적 규범이 전 세계에 정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막고, 자유로운 제도의 적들에게 우리들을 위선자라고 비웃을 여지를 주기 때문에 그것을 증오한다."라고 공언했다.
처음에 링컨은 노예제 폐지정책을 채택하는 데 주저했다. 그는 400만에 이르는 흑인들이 해방되어 국가의 정치·사회생활에 들어올 경우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을 염두에 두었으며, 무엇보다 폐지론을 내세울 경우 경계주(境界洲:남부 노예주 중 연방탈퇴보다는 타협으로 기운 주)들이 남부연합에 합류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럼에도 노예제 반대 감정이 높아졌을 때 그는 자신이 작성한 노예해방령을 들고 나왔다. 그의 제안에 따르면 각 주는 노예소유주에게 보상을 하고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으며, 연방정부는 노예해방에 드는 재정적 부담을 주와 나누어 가진다는 것이었다. 또한 해방은 점진적으로 행해지며 해방된 노예는 해외로 집단 이주시킬 것이라는 점도 덧붙여졌다. 연방의회는 링컨의 안을 실행에 옮기는 데 드는 비용을 표결에 붙이고자 했으나 경계 주들은 모두 이 안을 거부했으며, 흑인 지도자들도 자신의 동료들이 해외로 보내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점진안(漸進案)이 결국에는 통과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던 링컨은 별개의 조처에 착수해 예비선언(1862. 9. 22)을 거쳐 1863년 1월 1일 최종적인 노예해방령을 발표했다. 그가 전시의 대통령 권한 행사로 정당화시킨 이 유명한 선언은 남부연합이 실제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역만 대상으로 한 것이며, 연방에 충성한 노예주나 연방정부가 점령하고 있던 남부연합의 영토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전쟁기간 동안 노예해방령에 의해 직접적·간접적으로 자유의 몸이 된 노예는 20만 명이 채 못 되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상징으로 대단한 의미가 있었다. 노예해방령은 링컨 행정부가 연방의 회복 외에도 자유를 명분으로 내세웠음을 의미했고 이 때문에 연방정부의 대의는 영국과 유럽 대륙의 자유주의 언론으로부터 차츰 확고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링컨 자신은 그가 취한 조치가 일시적인 전쟁수단 외에 어떤 합헌성을 가지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뒤 노예의 자유를 보장하는 추가조치가 없었더라면 노예해방령으로 자유를 얻었던 노예는 옛날 신분으로 돌아갈 위험이 있었을 것이다. 노예제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수정헌법 제13조가 연방헌법의 한 부분으로 추가됨으로써 이러한 조치가 이루어졌으며 링컨은 이렇게 연방헌법을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뒤 수정헌법 제13조는 각주에서 잇따라 승인을 받았다.
링컨 대통령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지지를 얻어야 했으므로 남북의 재통합에 앞서 무엇보다 북부가 어느 정도 의견일치를 보아야 했다. 그러나 북부는 나름대로 이해를 갖는 다양한 집단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링컨은 이해가 다른 집단과 개인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지지를 자신의 행정부로 끌어 모아야 했다. 연방을 위해서 다행히도 그에게는 대통령으로서 남다른 정치적 기술이 있었다. 그는 동료 정치가에게 호소하고 그들의 입장에 서서 이야기하는 데 훌륭한 솜씨가 있었으며, 개인적 차이점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적대자들로부터 충성을 얻는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야당은 여전히 활기차고 강력했다. 야당인 민주당은 전쟁의 계속을 주장하는 당원과 평화를 주장하는 당원('독사')으로 분열되었으며 이들은 때로 남부와 연합하기도 했다. 링컨은 수정헌법 제13조가 의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평화파 민주당원의 지원을 얻기 위해 애썼으며, 가능한 한 그들을 무마시키려 했다.
링컨은 민주당의 활동에 대처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자신이 속해 있는 공화당 내에서도 당의 분열과 경쟁자들의 도전으로 그에 못지않은 어려움이 따랐다. 공화당은 경제원칙에서는 상당히 일치하여 링컨이 이전 휘그 당원 시절부터 지지해온 핵심 안건들인 보호관세, 전국적 은행체계, 국내 개량사업, 특히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철도 건설에 대한 연방정부의 원조 등을 법으로 제정했다. 그러나 전쟁수행과 목적에 관련된 여러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급진파'와 '보수파'로 나누어졌다. 링컨 자신은 보수파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으나 급진파 의원들 가운데도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양쪽에 지도력을 유지하도록 노력했다. 그는 1860년 대통령 선거전에서 같이 경쟁했던 사람들도 각료로 임명하고 모든 중요 정당세력에서 각료를 선택했다. 링컨은 현명하게 보수파와 급진파를 각각 대표하는 슈어드와 샐먼 P. 체이스를 입각시켜 내각의 위기를 극복했으며 대립관계에 있던 두 사람을 공식적 조언자로 삼았다.
의회 안에도 파벌간의 반발이 있었으며 그것은 훨씬 더 심각했다. 중대 현안은 남부의 '재건작업'(남부의 연방 재편입 작업)이었다. 루이지애나 주, 아칸소 주, 테네시 주 같은 연방 탈퇴 주에서는 주로 연방군에 의해 재건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링컨은 1863년 말 이러한 남부 주에 대해 소위 '10%안(案)'을 제시했다. 이 안은 유권자의 10%가 연방정부에 충성을 서약하는 주에 대해서는 새로운 주정부의 설립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급진파는 링컨의 안이 너무 관대하다고 여겨 거부하고 대신 유권자의 과반수가 충성 서약을 하는 주에 대해서만 주정부 형성과 연방재가입을 받아들인다는 '웨이드-데이비스 안'을 제출했다. 링컨이 이 안을 거부하자 안의 발의자인 웨이드와 데이비스는 링컨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미 링컨은 '통일당'(공화당의 새로운 이름)의 대통령 후보로 대통령 재선을 노리고 있었는데 웨이드와 데이비스의 성명서는 링컨의 후보지명을 취소시키려는 공화당 내의 움직임을 분명히 드러내준 셈이었다. 그는 조용하고 끈기있게 이러한 움직임이 사라지기를 기다렸지만 당의 분열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훨씬 이전에 공화당 내 한 파에 의해 후보지명을 받은 존 C. 프리몬트(John C. Fremont)는 이미 선거운동에 나서고 있었다. 급진파의 지도자들은 링컨이 보수파인 몽고메리 블레어 체신장관을 해임한다면 프리몬트의 출마를 포기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프리몬트는 물러났고 블레어도 사임했다. 이로써 공화당은 다시 단결하여 1864년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게 되었다. 1860년 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1864년에도 링컨은 자신의 선거운동에서 직접 선거 전략을 맡았다. 국민 대다수가 공화당에 표를 던졌고, 링컨은 일반투표에서 과반수인 55%를 차지해 민주당 후보 매클렐런 장군을 누르고 재선되었다.
처음부터 링컨은 전쟁의 주목적이 '이른바 탈퇴한 주'를 가능한 한 빨리 이전처럼 연방과 '적절하고 실제적인 관계'를 맺도록 하는 데 있다는 믿음을 간직해왔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도 그는 패배한 남부에 대해 구체적이고 통일된 정책을 세우지 못했다. 루이지애나나 테네시 같은 주에 대해서는 전쟁 중에 자신이 제시한 10%안에 따라 새로운 주 정부를 세우도록 촉구했으나, 버지니아나 노스캐롤라이나 같은 주에 대해서는 전쟁을 일으킨 주 정부를 일시 유지시켜 평화 상태를 회복시키는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전후 남부로 간 북부 출신의 '이방인'(카핏배거)에게 남부 통치를 맡기는 것에 반대했다. 링컨은 남부인 스스로가 새로운 주 정부를 세우기를 원했으며, 그 과정에서 백인과 흑인이 서로 옛날의 관계에서 점차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맺기를 바랐다. 그는 해방노예에 대한 교육안이 흑인이 새로 얻은 신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핵심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어떤 흑인들 "예를 들면 지식수준이 매우 높고 특히 우리와 함께 용감하게 싸웠던 흑인들"에게는 즉시 선거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865년 초에 와서는 재건문제를 놓고 일어난 링컨과 공화당 내 극단주의자의 견해차가 그 전해보다 더욱 커졌다. 일부 급진파는 남부에 대해 잠정적으로 군정(軍政)을 실시하고, 남부 대농장주의 영지를 몰수해 그들을 해방된 흑인에게서 분리시킬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남부의 정치권력을 대농장주로부터 지난날의 노예에게 넘겨주도록 요구했다. 1865년 4월 링컨은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의 입장을 바꿈으로써 급진파와의 견해차를 좁혔다. 그는 버지니아 주의 전시의회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 남아 있도록 허용한 것을 철회하고 스탠턴의 남부 군정안을 원칙적으로 승인했다. 4월 14일 각료회의가 열렸을 때 법무장관인 제임스 스피드 장군은 링컨이 급진파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결론짓고 "그가 어느 때보다 우리 견해에 가까워진 것 같다"고 말했다. 따라서 링컨이 재임 임기를 마저 채웠더라면 그의 재건정책은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은 추측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1865년 4월 14일 저녁 그는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관람 중 존 윌크스 부스에게 저격당해 다음날 아침 사망했다.
링컨은 자신이 노예 제도를 없애기 위한 힘이 헌법에 의해 제한받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링컨은 새로운 미국 영토로 노예제 도입을 막는 것이 완벽한 노예제 폐지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또한, 각 주에 노예 소유주들에게 노예 해방에 대한 대가로 보상금을 지급하여 노예 제도를 축소할 경제적 유인책을 펴도록 설득했다. 링컨은 이 방식이 경제적으로도 노예제도를 없애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았으며, 이것이 미합중국 개국 정신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1861 년과 1862 년의 노예 해방 시도는 반대했었는데, 이 선언으로 북부와 남부 경계 주의 반발을 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1862년 7월, 의회에서 남북전쟁에 가담한 자들의 노예를 강제 해방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링컨은 의회 권력으로 이를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전쟁 사령관 직권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보았지만, 이 법안을 승인했다. 그 달,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의 첫 판을 내각들에게 발표했다. 이 안에 그는 "정당하고, 필요한 군사 조치로서, 1863년 1월 이후부터, 남부에서 노예로 잡혀있는 모든 사람을 영구히 해방시킨다."라고 적고 있다.
1862년 9월 22일 발표되고, 1863년 1월 1일 발효된 노예 해방 선언은 북부의 통제하에 들어있지 않은 영역의 모든 노예를 해방하도록 했다. 노예 제도 폐지가 군사적 목표로 설정되어, 북군이 남으로 진주하면서 해방된 노예가 3백만에 육박했다.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에 선언하며 "나는 내 삶에서 내가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을, 내가 여기 서명하는 지금 이 순간만큼 느껴본 적이 없다" 고 첨언했다. 노예 해방 선언이 발표된 후 13 명의 공화당 주지사가 전쟁 주지사 회의에서 만나, 대통령의 노예해방 선언을 지지하되, 조지 B. 매클렐런(George B. McClellan) 장군을 북군 사령관에 넣지 않도록 하는 것을 권고했다.
노예 해방 선언 이후 해방된 노예를 소집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링컨은 이 정책을 처음에 완전히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을 표했지만, 1863년 봄, 그는 "대대적인 흑인 모병" 정책을 실시할 수 있었다. 테네시 주의 주지사 앤드류 존슨(Andrew Johnson)에게 쓴 흑인 군대 소집을 권하는 편지에서 링컨은 "5만 명에 달하는 무장하고, 훈련받은 흑인 병사들이 미시시피 강변에서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반란은 끝날 것입니다" 고 쓰고 있다. 1863년 말, 링컨의 지시에 따라 토머스(Lorenzo Thomas)장군은 20 개 연대에 달하는 흑인들을 미시시피 강변에서 소집했다. 흑인이었던 도우글라스(Frederick Douglass)는 링컨을 "처음으로 미국에서 내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려고 하지 않은 위대한 사람"으로 평했다. 는 말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판단하고 평가한다면, 20 개 연대에 달하는 흑인만의 군대를 미시시피 강변에 소집해서 활용했다는 것은, 노예해방을 통하여 흑인 노예를 미국의 시민으로 받아드린다는 것이며, 백인과 동등한 국민으로서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는 것이라면, 노예해방의 근본취지와는 다른 것이며, 흑백의 평등이 아니라 또 다른 흑백의 인종차별이라 할 수 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남부지역 농장의 노예가 미국정부의 병사로 노예의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흑인은 백인과는 다른 미국의 시민이란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고(思考)는 노예해방으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현시점에서도 이와 유사한 인종차별로 인한 갈등과 백인우월주의가 존재하게 된 원인의 시발점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5). 사회주의(Socialism)와 공산주의(communism)의 진실.
가.) 사회주의란 어떤 사상인가?
위키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기술된 바에 의하면, 사회주의(社會主義, Socialism)란 자본주의의 시장원리를 반대하고 대중이 직접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자원을 분배하며 운영하는 공동 경제와 모든 민중이 노동의 대가로서 평등하게 분배받는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학설 및 정치운동을 통틀어서 말하고 있다.
영국의 사회주의자 앤서니 크로스런드(Anthony crosslund)가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자가 사회기구 속에서 구현하려고 하는 일련의 가치 또는 열망"이라고 말했듯이 사회주의의 뜻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근대 사회주의 이념의 싹은 플라톤의 〈국가; Republic〉,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Utopia〉와 18세기 계몽주의시대의 풍부한 유토피아 문학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실제로 근대 사회주의는 산업혁명이 야기한 사회·경제 관계와 전통적인 질서의 붕괴에 반대했던 다양한 작가들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야기한 부정, 불평등, 피해 및 자유방임적 시장경제 체제에 대해 비판의 화살을 쏘았다. 당시의 탐욕스런 개인주의를 비판하고 그들은 형제적 결속감(結束感)으로 결합된 새로운 생산자들의 공동체를 꿈꾸었다. 그들은 미래에는 대중이 자본가로부터 생산수단과 정부를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중이 직접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자원을 분배하며 운영하는 공동 경제와 모든 민중이 노동의 대가로서 평등하게 분배받는 사회를 지향하는 다양한 사상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라고 했다. 사회주의에서 갈라져 나온 대표적인 정치사상으로는 공산주의(共産主義)와 사회민주주의(社會民主主義)를 들 수 있다.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가 동기부여가 없이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한 사실상 실패한 정치사상으로 평가되는데 반해,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등 북유럽 복지국가들을 낳은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결합해 사회주의 발전 초기의 목적이었던 통제를 통한 결과의 분배가 아닌 무상교육, 복지를 통한 기회의 분배를 이룩한 성공적인 정치사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자본을 비판, 극복하기 위한 사상들로 사회주의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여겼다. 자본을 쥐고 착취를 통해 부를 축적한 사회의 극소수에게 권력과 부(富)가 집중되어, 모든 사람이 자신의 가능성을 펼칠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고 기술과 자원의 이용이 제한당하며 자본주의적 소유관계가 생산력에 족쇄를 채운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발전한 사회민주주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한 사회 안에서 양립할 수 있는 것이 증명되었다.
카를 마르크스와 더불어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의 창시자 중 한 명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 이론가인 앙리 드 생시몽은 사회적 생산 개념의 광범위한 도입만이 자본주의의 무정부적인 생산에 의한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라 주장하였다. 이들은 이를 위해 사회적 기여에 따른 분배를 실현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 내에서도 이러한 분배가 무슨 기준으로,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19~20세기에 사회주의자로 자칭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같은 생각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사회주의의 특정한 이념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을 달리했다. 생산수단의 완전한 국유화만이 그들의 목표를 달성시켜 줄 것이라고 주장한 사회주의자도 있고, 주요 산업의 선택적 국유화와 상속권자의 사유재산권 통제를 제안한 사회주의자도 있다. 또 다른 사회주의자들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의 지배와 계획경제를 주장한 반면 그 밖의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적 입안자가 시장경제를 주도하는 '시장 사회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사회주의자들이 제시한 좋은 사회로 나아가는 최선의 방법 역시 다양하다. 몇몇 사회주의자는 정부의 지도를 요구하지만 다른 사회주의자는 공공기관, 준(準)공공 위탁기관, 지방자치기관, 생산자의 자치공동체 등의 정책결정기구를 통해 가능한 한 분산·분권화를 주장한다. 노동자의 지배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자가 있는가 하면 정부의 계획기구에 의존하는 사회주의자도 있다. 국가수입이 보다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모든 사회주의자가 공통되지만 수입의 절대적 평등을 바라는 사회주의자도 있고 직업에 따른 차등지불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수입을 보장하는 것에만 목표를 두는 사회주의자도 있다.
"각자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는 사회주의자들이 자주 부르짖는 구호이다. 그러나 많은 사회주의자는 각자가 사회에 대한 공헌도에 따라 자신의 몫을 받는 것이 사실상의 사회유지라고 보며, 사회는 먼저 모든 시민에게 최소한의 의·식·주를 보장해야 하고 그들을 교육·건강·교통·오락 등의 기본 서비스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자는 또 모든 시민의 정치적 권리와 신분차이를 평등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분의 차이를 완전히 없애야 하는지, 사회주의 사회에서 정책결정의 불평등이 유지되도록 내버려둘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로 이견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라는 말이 사용되고 악용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일찍이 1845년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독일인들이 사용하는 사회주의라는 말이 "모호하고 막연하며 정의할 수 없는 용어"라고 토로했다. 엥겔스 시대 이래 사회주의는 이 용어를 사용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재산과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독일 내의 어떠한 단체도 불법화했던 1870년대 후반 독일의 총리 비스마르크조차도 몇 년 뒤에 "국가는 우리의 제국(帝國)을 위해 사회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파시스트와 전체주의적 독재자 등 현대의 궤변적 보수주의자들도 종종 자신들이 사회주의 건설에 종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註 00;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독일어: Karl Heinrich Marx, 1818년 5월 5일~1883년 3월 14일)- 인류역사를 바꾸어 놓은 유대인으로, 예수 다음가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자본론’으로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라인란트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역사학자, 경제학자, 철학자, 사회학자로, 2005년 영국 공영방송 BBC는 설문조사를 통해 마르크스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선정된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이다. 젊은 날의 마르크스는 낭만주의에 심취한 몽상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청년이었다. 1847년 공산주의자동맹을 창설했다. 1847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공동집필해 이듬해 2월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과 1850년에는 《프랑스에서 계급투쟁》, 1852년 《루이 보나파르트》발표 그리고, 1867년 초판이 출간된 《자본론/ Das Kapital》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다. 맑스, 막스, 칼 마르크스 등으로 표기하기도 하나, 외래어 표기법에 준하는 표기는 “카를 마르크스”이다. / 각종 백과사전과 기타 자료에서 재정리함.
註 00; 프리드리히 엥겔스(독일어: Friedrich Engels, 1820년 11월 28일 - 1895년 8월 5일)- 독일의 사회주의 철학자, 경제학자로 카를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독일 라인 주 바르멘시(오늘의 부페르탈)에서 방직 공장주의 집에서 태어났다. 아들을 자신 같은 자본가로 키우려는 아버지의 뜻에 의하여 엥겔스는 김나지움을 중퇴하고 브레멘 상사에서 일했다.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청강하며 헤겔리안 좌파가 되었다. 군 복무를 끝마친 그는 영국의 맨체스터로 건너가 영국 노동계급의 비참한 삶을 깊이 연구하였고, 차티스트 운동 관련자들과 연계를 맺었으며, 영국의 출판물들에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앵겔스의 이러한 현실비평은 마르크스가 이상적 사회주의를 비롯한, 현실에 맞지 않는 사회주의 조류들을 극복하고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고유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1844년 9월 독일로 가던 중 엥겔스는 파리에서 카를 마르크스와 만났다. 이때 엥겔스는 유물론자, 혁명주의자였으며 노동계급만이 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일어서게 되는 계급이라 생각했다. 1846년에 그는 마르크스와 함께 《공산주의자통신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1847년에는 《정의자동맹》을 《공산주의자동맹》으로 개편하였다. 1848년 쾰른에서 마르크스와 함께 《신라인신문》을 발간하였다. 1849년에 라인지방과 남부 독일에서 무장투쟁이 일어나자, 군복무 경험이 있는 엥겔스는 직접 군사행동에 참가해서 작전을 지도하였다. 무장투쟁이 실패한 후 마르크스의 제의로 런던으로 갔다.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운동을 적극적으로 돕는것을 자기 의무로 판단한 엥겔스는 1850년 11월부터 마르크스가 《자본론》1권을 탈고하고 생을 마칠때까지 거의 한평생을 같이하며 마르크스를 물질적으로 도왔다. 엥겔스는 맨체스터에서 자주 마르크스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다양한 정치, 경제, 전략 전술 문제들을 토론하였는데, 이 시기 엥겔스는 군사분야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다. 1864년에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함께 제1인터내셔널을 창건하는 과업에 참가하였으며 파리 코뮌을 적극 지지 성원하였다.
마르크스가 죽은 후 엥겔스는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이끌며 마르크스가 살아있을 때 완성하지 못한 《자본론》의 2권과 3권을 정리해서 1885년과 1894년에 각각 출판되었다. 1889년에 그는 제2인터내셔널을 창건하였으며 1891년에는 마르크스의 저서《고타강령비판》을 출판하였다.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정력적으로 지도하여 오던 엥겔스는 1895년 8월 5일에 암으로 별세하였는데, 유언에 따라 화장된 유골이 바다에 수장되었다. 주요 저작으로는 《신성가족》,《독일 이데올로기》,《영국 노동계급의 형편》,《공산주의적원리》,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반듀링론》, 《자연변증법》.《가족, 사적소유 및 국가의 기원》,《루드위히 포예르바하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프랑스와 독일에서의 농민문제》등이 잇다./ 각종 백과사전과 기타 자료에서 재정리함.
註 00; 클로드 앙리 드 루브루아 생시몽(Claude Henri de Rouvroy, comte de Saint-Simon, 1760년 10월 17일 ~ 1825년 5월 19일)- 프랑스의 사상가, 경제학이다.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오웬·푸리에와 함께 공상적 사회주의자의 한 사람이다. 귀족 출신으로, 18세 때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미국의 산업 발전에 충격을 받고 귀국하여 프랑스 혁명에 찬성하였다. 한때 국유지 매매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으나, 과학 연구에 사용하여 극빈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정치·경제·사회 등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여 만년에는 은행가의 후원을 받아 <산업론> <산업 제도론> <신 크리스트 교> 등을 완성시켰다. 그는 인류 역사의 발전적 전개를 주장, 봉건 영주와 산업자의 계급투쟁으로 이어진 프랑스의 역사를 개선하여 양쪽이 협력, 지배하는 계획 생산의 새 사회 제도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사상은 천재적이었지만, 종교적·도덕적이고 공상적인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회주의 이념과 존 스튜어트 밀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 각종 백과사전과 기타 자료에서 재정리함.
사회주의는 단일한 이론에 의해 고정되어 있는 이념이 아니다. 사회와 경제에 대하여 공공성과 사회화가 얼마나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사회주의의 분파마다 견해가 다르다. 예컨대 완전한 계획경제를 주장하는 분파(공산주의 등)에서부터 시장경제를 상당부분 인정하는 분파(사회민주주의 등)까지 다양하다. 이 때문에 사회주의의 각 분파는 상대방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사회주의 운동 분파에 대한 큰 구분으로는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을 위해 급진적 혁명을 지향하는지, 아니면 점진적 개혁을 지향하는지에 따른 구분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주의 분파에 따라 "공공경영경제"는 완전한 사회화로 이해되기도 하고, 시장경제가 유지되는 가운데 공기업과 같은 국가가 관리 감독하는 양립체제로 이해되기도 한다. 또, 결과의 분배를 중시하는 공산주의와 기회의 분배를 중시하는 사회민주주의로 나누어 보는 견해도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의 '소련식 경제 개발 모델' 에 고무되어 있었다. 이 모델은 모든 생산 수단의 공유화와 중앙 집중적인 계획 경제를 특징으로 한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의 기간 동안에는 중화 인민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헝가리 인민공화국, 동독과 같은 현실 사회주의의 여러 나라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실시한 시장 사회주의가 주목을 받았다. 시장 사회주의는 자유 시장의 존재를 인정하고 국가의 계획 경제와 시장을 병립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한다.
현대의 사회 민주주의적 사회주의는 개인의 재산권과 사업 운영의 권리를 인정하고 시장 경제의 틀 속에서 주요 산업을 공유화하는 형태의 혼합 경제를 지지한다. 이는 자본주의를 개혁하는 것에 보다 촛점을 맞춘 것으로,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자체를 폐지하려 했던 것과 대비된다. 오늘날 유럽의 복지사회에서 보여주듯 현대의 사회민주주의는 공공성을 기반으로 한 복지 국가와 시장의 규제를 주요 경제정책으로 삼으며 결과물의 분배가 아닌 기회의 분배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편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이나 리버럴 마르크스주의(신좌파)와 같은 리버럴 사회주의에서는 산업의 노동자 자주관리 등의 경영민주주의를 보다 강조한다.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19세기에 파생되었다. 영국에서는 감리교(Methodist Church) 노동 공동체를 구상하던 로버트 오웬을 따르는 이들이 1827년 자신들을 설명하는 데에 처음 사용하였으며, 프랑스에서는 1832년 이상적 사회주의자로 불리는 생시몽의 이념을 따르는 이들과 앙시끌로뻬디 누벨의 저자 삐에르 레로와 J. 레노들이 사용하였다. 그 후 이 용어는 사회주의자들과 그의 비난자들이 폭넓게 활용하였다. 사회주의 단체들 사이에 이견은 존재하나 이들은 대체적으로 19세기와 20세기 산업·농업 노동자들의 투쟁사를 공유하고 있으며, 연대의 원칙과, 소수가 아니라 폭넓은 대중에게 유리한 경제 체제가 근간이 되는 평등한 사회를 부르짖는다는 것에 합의를 본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다음 단계이며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계급 억압이 차츰 약해짐에 따라 최종적으로 공산주의로 발전한다.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는 둘 다 사회주의의 한 계열이다.
계몽주의 시대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따르면 사회주의 모델과 생각은 인류의 사회역사 초창기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으며 인간의 본성과 초창기 인간 사회 조직 구조의 불가피한 형태였다. 18세기 계몽 시대가 막을 올리자 일련의 사상가들인 콩도르세, 볼테르, 장 자크 루소, 드니 디드로 등은 프랑스의 동요하는 사회 계층을 위한 지적 그리고 사상적 표현을 제공하였다. 이것은 심지어 앙시앵 레짐(구체제, 舊體制)으로 말미암아 소외된 부르주아지까지도 포함하여 추후 사회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될 대중적 계급들을 포섭하였다. 근대적 사회주의근대적인 형태의 사회주의는 초창기부터 일련의 성격을 공유하였다. 이것들은 개인주의보다 사회 안정 추구, 경쟁보다 협력, 그리고 산업계 또는 정치계 지도자 또는 구조들보다는 노동자를 중시하는 것이다. 초창기 사회주의는 계급투쟁으로서 사고하지는 않고 다만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하여 부요한 자들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유에 대한 도전과 혁명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의 특별한 위상에 대하여 계급투쟁이라는 답변은 프랑스 혁명 중 바뵈프의 민중의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이러한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분파가 크게 발전시킨다. 이상적 사회주의 엘리 알레뷔에 따르면 "사회주의"라는 표현은 두 가지 상이한 사회 및 경제 체제를 표방하는 두 개 조직에서 상호 독립적으로 도입하였다. 이들의 한 무리는 생시몽, 특히 1813-33년 사이에 피에르 뤼록스이며 다른 무리는 1835년경 로버트 오웬의 추종자이다.
1848년 혁명의 때에는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사회주의"들이 존재하였다. 이 중 가장 영향력 있는 것은 생시몽과 오웬 그리고 샤를 푸리에가 설립한 것들이었다. 이 시대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들 사상을 "이상주의적 사회주의"로 부르며 스스로는 이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공산주의자"라고 부르고 있었다. (추후 엥겔스는 마르크스주의를 논리를 갖춘 사회주의 이론이라는 뜻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라 부르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서 이탈리아의 사회주의의 한 분파에서 파시즘이 탄생했다. 파시즘 운동의 시발점은 1919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시작된다. 초기의 파시스트들은 과격한 퇴역군인과 국가주의적 생디칼리스트, 미래파 지식인, 젊은 반(反)부르주아 불만 세력으로 민족의 영광과 사회 변화를 함께 꿈꿨던 사람들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이 사회주의자 및 급진적 기독교 정당인 이탈리아 인민당(Partito Populare Italiano, PPI)과 달랐던 점은 민족주의밖에 없었다. 실제로 초기 이탈리아 파시스트 중 많은 사람들이 무솔리니와 마찬가지로 좌파 출신들이었다. 파시스트 행동대는 파시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구성비가 우파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지주의 아들들과 심지어는 일부 범죄 집단들도 이제 파시즘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파시즘은 여전히 초기의 특성을 유지했다. 즉, 새로운 파시즘은 기성세대와 기득권에 저항하는 세대의 반란이었다.
무솔리니는 1919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실패한 좌파 민족주의 파시즘을 고수하지 않고, 자신의 운동을 정치적 기회로 활용하는 편을 택했다. 1920년에서 1922년 사이 그의 연설과 강령에서 무솔리니가 점차 우파 쪽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초기 파시즘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사상은 전쟁과 제국주의에 대한 거부였다. '참호(에서 얻을) 반전주의'는 전투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던 당시 퇴역군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신념이었다. 이탈리아 산세폴크로 광장에서 발표한 강령은 (피우메와 달마티아 해변에 대한 이탈리아의 권리를 주장하기는 했지만) '각 나라의 영토를 보전하는 것이 최우선의 원리'라는 국제연맹의 원칙을 받아들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탈리아의 기성 우파, 반왕당파 및 공화정 세력은 귀족과 재벌들의 이권을 수호하고 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유지하였으며, 이들을 좌파로 규정, 위험성을 경고하는 수준에서 머물렀다.
1919년 6월의 강령에서는 직업적 군대를 방어적 의미의 민병대로 대체하고 무기 및 군수품 공장을 국유화한다는 파시스트들의 주장은 그대로였지만, 국제연맹 이야기는 사라졌다. 1921년 발표한 강령에서 달라진 파시스트당은 국제연맹을 편파적이라고 비난하고, '지중해 라틴 문명의 보루'이자 이탈리아적인 것(Italianita)의 보루로서 이탈리아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이탈리아의 식민지 개척과 대규모 상비군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무솔리니는 자랑스러운 이탈리아, 로마 제국의 옛 영광, 반국가 행위자 처벌 등을 주창했다. 이러한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들의 주장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대중들의 급격한 동의를 얻으면서 기성의 우파 정당을 대체하여 집권당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영국에서는 2차 대전 직후 일부 좌파들은 파시즘을 신봉하였으나, 히틀러 등의 패망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1940년은 처칠이 노동당을 포함한 거국 내각을 표방함에 따라, 일부 좌파가 신봉했던 파시즘이 독일과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 영국에서도 하나의 이념으로 민주주의와 대적할 수 있었던 해였다. 훗날 마이클 푸트는 "1940년은 우파에게 징발당한 대단히 상징적인 해"라고 말했다.
사회주의자들의 공통된 신념맥락에 따라 사회주의라는 표현은 이들 사상, 또는 이들 사상의 직계 후손을 칭할 수 있다. 이들 사상은 아주 넓은 범위의 시각을 포괄한다. 그러나 공통된 신념은 봉건과 자본주의적 사회들이 소수의 경제 엘리트를 위하여 작동하고 있다는 인식과 대중이 없이는 이 엘리트들도 존재할 수 없으므로 사회가 공중의 이익을 위하여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사회주의"적 사상들은 경제 경쟁보다 경제 협력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거의 대부분 어떠한 형태의 계획 경제를 추구한다. (일부 분파들, 특히 초기의 분파들은 중앙 계획을 선호하나 이것은 모든 분파들이 공유하는 점은 아니다).) 이들은 모두 생산 수단과 부 그리고 서비스 분배의 적어도 일부분을 대중 또는 협력적 소유 제도로 바꾸는 것을 지지한다.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사상은 노동조합의 성장과 보조를 같이하였다. 세계의 수많은 곳에서 이들 두 개 운동은 아직 긴밀한 연관이 있으며 다른 곳에서는 두 가지 움직임으로 분리되었다. 19세기 이후 세계의 사회주의 이념은 다양한 분파를 형성하면서 진화, 발전하였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아직 사회주의를 경직되게 해석,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주의로 불리는 주요 사상들은 다음과 같다:
/ 아무에게나 농락(籠絡)당해도 즐거운 우리들(12-5 끝)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회원가입

사이트 정보

모시고넷 / 천도교 청주교구
(우) 28604 충북 청주시 흥덕구 신율로 92

  • 게시물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1,152
어제
4,438
최대
6,815
전체
2,164,760
Copyright © mosigo.net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