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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천도교의 우주관과 역사관 연구(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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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 용 천
댓글 0건 조회 1,737회 작성일 13-09-13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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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의 우주관과 역사관 연구.(7-7)
필자가 최근인 2005년에 간행된 최민자의 「동학사상과 신문명」의 ‘수운의 후천개벽과 에코토피아(Ecotopia)'를 거의 전 문장을 장황하게 인용한 것은, 소강절의 원회운세(元會運世)의 이론을 바탕으로 선 후천개벽을 해석하는 경향은, 천도교에서는 1920년 이전에 일부에서 교리를 해석하는 방법이었지만 동학이 천도교로 대고천하 한 후에는 이러한 시각은 많이 배제(排除)되었고 이돈화를 중심으로 한 철학화, 사상화, 이념화 주의화로 전환하여 근자의 교단에서는 이런 해석을 하는 사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지 않다. 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천도교시대의 교단의 교리해석방법에 대한 평가와 반성은 있어야 되겠지만, 현재와 미래를 내다보는 입장에서의 서구적인 종교의 개념이나 경향으로서는 재고(再考)의 여지(餘地)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윗글의 해석에서 결론이 ‘즉 천리를 따르게 되면 동귀일체(同歸一體)가 이루어져 후천개벽의 세상이 열리게 된다고 보았다.’라든가 ‘천지운행의 원리에 따른 우주적 차원의 질서 개편으로 이를 통해 곤운(坤運)의 후천 5만 년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와 같이 그저 운세에 따라 그렇게 될 것이니까 그렇게 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수운심법의 사상적 바탕이 아니기 때문이고, 더 더욱이나 현대인이나 미래에 살 인간들은, 우주나 인간에 대한 결정론이나 숙명론 또는 시운론은 수용할 사고를 가진 사람도 아니고 시대도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보는 시각이 올바르다고 판단이 되기 때문이다. ‘후천개벽의 세상이 열리게 된다고 보았다.’ 가 아니라 ‘후천개벽의 세상을 열리게 한다.’ 여야 하고 ‘곤운(坤運)의 후천 5만 년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가 아니라 ‘후천의 5만 년을 다시 개벽을 통하여 열리게 해야 한다.’ 라고 해야 한다. 그래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한울사람으로서 자신의 삶과 인류의 역사 창조에 수동적(受動的)이거나 피동적(被動的) 또는 종속적(從屬的)이 아닌 굳건한 신념에 찬 ‘주체적(主體的)인 인간(人間)’ 즉 새인간(新人間)으로서 주동적(主動的)인 힘으로, 새 세상인 지상천국의 건설과 그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근호는 「조선조 대외사상의 흐름」의 ‘제 6장 국권상실기에 있어서 민중과 지식인의 세계관의 전회’에서 동학의 후천개벽의 의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이 시기의 동학의 대외관을 보면, 초기에 동학이 국수적 입장에서 주창한 반외세론은 서양을 문명사회로 인정하는 문명관의 전도에 따라서 점차 개화적 입장으로 전환되어 갔으며, 따라서 외국과의 교류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손병희는 각국이 서로 각축하는 경쟁적 국제사회의 긴장관계를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결국 궁극적으로는 각국의 국력은 주교(主敎) 또는 국교(國敎) 등 종교의 우열에 따른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동학이 융성하면 조선의 독립은 결코 침해받지 않을 것이라는 규범적 낙관론을 피력했다. 이는 각국이 군사력에 의하여 식민지 확보에 광분하던 제국주의 시대에 있어서 동학의 대외의식의 계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식민지하에서도 동학은 민족 민중종교로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립시키면서 언젠가는 민족이 자주독립하는 후천개벽의 그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게 한 민족사상으로서의 역사적 역할은 크게 평가하여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본 절을 통하여 조선조 지배체제를 안으로부터 지탱한 사대부 계층의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한 주자학적 정치 이념과 중화적 세계관이 민중 속에서 동학의 새로운 세계관이 확산되면서 지배 사상으로서의 위력을 상실하고 붕괴되어 가는 것을 보았다.’/PP. 330-331.
라고, 조선조 말의 국내외 정세와 시대적 상황과 민중의 요구에 따라 동학이 잘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민족 민중종교로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립시키면서 언젠가는 민족이 자주독립하는 후천개벽의 그날이 올 것이며, 올 수 있도록 새 역사창조의 리더이고, 주인공이며 주체로서 매진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박맹수는 근년에 간행한 「東經大全 譯解」의 ‘동경대전(東經大全)의 해설’ 에서
‘(수운은/ 필자가 삽입) 젊은 시절에 전국을 방랑하면서 온갖 모순으로 가득한 시대 상황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동시에, 고통의 나날 속에서도 개벽이 어서 빨리 찾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민심을 읽었던 선생은 마침내 1860년 4월 5일에 득도를 하고 나서,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용담유사≫ <몽중노소문답가>)라 하여 ‘다시 개벽’의 새 세상이 오고 있음을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다. 이제 역사는 하원갑(下元甲)의 시대, 즉 낡고 병들고 온갖 모순으로 가득한 선천시대는 가고, 상원갑(上元甲), 즉 새롭고 생명이 넘치고 모든 모순이 다 해결되는 후천시대가 오고 있으며, 상원갑 호시절에는 가난하고 천한 모든 사람이 다 부자가 되고 귀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라고 했다.
소강절의 원회운세(元會運世)의 이론을 바탕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 그 중심에 서 있는 곳은, 동학계열인 증산도(甑山道)와 수운(水雲敎) 그리고 상주(尙州) 동학교(東學敎)가 두드러지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를 하려면, 증산도의 ‘교전’과 안경전의 ‘이것이 개벽이다.’ 와 수운교의 ‘수운교경전,’ 그리고 ‘상주 동학경전’을 정독을 하게 되면 이해가 좀 더 깊어지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해석을 하면 시대정신에 맞서게 되거나 뒤떨어지게 된다는 것도 아울러 함께 깨닫게 될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하고 있다.
註 00; 최민자의 후천개벽에 대한 해설의 이론적 바탕이 되고 있는, 소강절(邵康節)과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그리고 육도삼략(六韜三略)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각주(脚註)에서 충분히 해설하였으므로 찾아서 대조하여 보시기 바람. 또 원회운세(元會運世)와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이치를 알 수 있는 자료로,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과 주(周)나라 문왕(文王)과 태공망(太公望)의 문답형식으로 된 동양 최고의 병서(兵書)인 「육도삼략(六韜三略)」을 같이 소개합니다.
六韜三略; 南晩星 譯解. 玄岩社. 서울. 1970.
老子 莊子; 世界思想全集 3. 張基槿 李錫浩 譯. 三省出版社. 서울. 1983. 21刷.
甑山道 敎典; 증산도 교전 편찬위원회. 서울. 道紀 123(1993).
이것이 개벽이다(上); 安耕田. 대원출판. 서울 1983.
수운교경전; 수운교 교리 연구원. 서울. 水降 149(1970).
상주 동학경전; 金文基 譯註. 도서출판 역락. 상주. 2008.
水雲은 동학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는 동경대전의 布德文과 論學文, 修德文 그리고 不然其然 의 첫 문장에서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이치를 이야기 하고 있다.
布德文에서의 ‘春秋迭代四時盛衰 不遷不易’과 ‘日月星辰 天地度數 成出文卷而以定天道之常然一動一靜一盛 一敗 付之於天命’
論學文에서 ‘故 天有九星 以應九州 地有八方 以應八卦而 有盈虛迭代之數 無動靜變易之理 陰陽相均 雖百千萬物 化出於其中’과 ‘四時盛衰 風露霜雪 不失其時 不變其序’
修德文에서 ‘元亨利貞 天道之常’
不然其然에서 ‘我思我則 父母在玆 後思後則 子孫存彼’와 ‘何者 太古兮 天皇氏 豈爲人 豈爲王 斯人之無根兮 胡不曰 不然也 世間 孰能無父母之人 考其先則 其然其然又其然之故也’가 모두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이치를 담고 있다고 보아진다. 여기에서 인용된 네 편의 글들은, 모두가 각각의 글에서 서두(書頭)의 글로써 각각의 그 글들의 대전제(大前提)가 되어 있음으로, 그 글의 참 뜻을 간과(看過)해선 안 된다고 필자는 깊이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수운의 역사관(歷史觀)이든 시운관(時運觀)이든 상관없이 수운이 우리들에게 말해주고자 했던 의미 있는 메시지(또는 커뮤니케이션)가 무엇인가를 분명(分明)하고 적확(的確)하게 이해해야 수운심법(水雲心法)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깊은 신앙심으로 따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盖自上古以來 春秋迭代四時盛衰 不遷不易 是亦天主造化之迹 昭然于天下也 愚夫愚民 未知雨露之澤 知其無爲而化矣 自五帝之後 聖人以生 日月星辰 天地度數 成出文卷而以定天道之常然 一動一靜一盛 一敗 付之於天命 是敬天命而順天理者也 故 人成君子 學成道德 道則天道 德則天德 明其道而修其德 故 乃成君子 至於至聖 豈不欽歎哉 /布德文
(필자의 실헙적인 풀이) - 아주 먼 옛날로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우주와 자연 질서의 순환과 사계절의 무성하고 쇄락함과 춘, 하, 추, 동, 사계절의 순서가 바뀌지 아니하고 돌아가는 것은, 모두 천리 천명에 따라 변화의 모습이 온 세상에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다. 라고 어찌 아니할 수 있겠는가. 천지만물의 탄생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은, 비와 이슬과 같은 자연의 혜택을 알지 못하고 무위이화로 알더니, 아주 먼 옛날 삼황과 오제가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후로부터 성인이 태어나시어 일월성신과 천지도수에 따른 운행의 이치를 글로 적어내어 천도의 당당함을 드러내어 알게 했고 일동일정과 일성일패를 천명에 부쳤으니, 이는 천명을 공경하고 천리를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군자가 되고 학문은 도덕을 이루었으니, 도는 천도요 덕은 천덕(天德)이라 한다. 그 도를 밝히고 그 덕을 닦음으로써 사람마다 군자가 되어 지극한 성인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어찌 부러워 감탄하지 않겠는가.
註 00 ; 천지도수(天地度數) - 김항(金恒)의 저서인 『정역(正易)』에서 선후천개벽(先後天開闢)의 징후가 되는 일월운행(日月運行)의 변화를 상수적(象數的)으로 표현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정역』 중 상편(上篇)이라고 할 수 있는 「십오일언(十五一言)」에는 “하늘과 땅의 합덕이 바로 해와 달이다(天地之合德日月).”라는 구절이 있고, “해와 달의 공덕은 하늘과 땅이 나누어진 것(日月之德 天地之分)”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이는 천지와 일월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역(易)은 역(曆)이므로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의 역(易)이 다를 경우 당연히 역(曆)도 다르게 된다. 그런데 선천, 후천의 모든 역(曆)에는 모체가 되는 원역수(原曆數)가 존재한다. 원역수란 천지일월(天地日月) 사상(四象)의 기본체위도수(基本體位度數)를 159도(度)로 상정하고, 여기에 일원추연수(一元推衍數) 216도를 더한 375도를 가리키며, 이것이 바로 일부지기(一夫之朞)이다. 일부에 의하면 선천개벽(先天開闢)과 후천개벽(後天開闢) 모두가 이 375도의 원역수 내에서 이루어진다.
선천개벽이란 제요지기(帝堯之朞)인 366일에서 제순지기(帝舜之朞)인 365일과 4분의 1일로 기수(朞數)가 변한 것을 일컫는다. 후천개벽은 일부지기인 375도에서 공자지기(孔子之朞)인 360도 정역(正曆)으로 기수가 변화되는 것을 나타내며, 1년 기수 중에서 15도가 귀공(歸空)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선천개벽은 1년 기수 중에서 9시간이 귀공되는 것으로 날[日]의 변화를 나타낸 것이며, 후천개벽은 15도(실제로는 14일 3시간)가 귀공되는 것으로 달[月]의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선천개벽은 우주의 생장(生長)을 위한 개벽으로서 그 자체 내에 모순과 위기가 내재되어 있어 천경지위(天傾地危)의 3,000년 역사를 예고할 뿐이다. 이에 반하여 후천개벽은 우주의 완성을 위한 개벽으로서 천지일월의 합덕(合德)과 음양이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일치되는 이상세계이다. /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21권 P.890 / 글 장석만
夫天道者 如無形而有迹 地理者如廣大而有方者也 故 天有九星 以應九州 地有八方 以應八卦而 有盈虛迭代之數 無動靜變易之理 陰陽相均 雖百千萬物 化出於其中 獨惟人最靈者也 故定三才之理 出五行之數 五行者何也 天爲五行之綱 地爲五行之質 人爲五行之氣 天地人三才之數 於斯可見矣 四時盛衰 風露霜雪 不失其時 不變其序 如露蒼生 莫知其端 或云天主之恩 或云化工之迹 然而以恩言之 惟爲不見之事 以工言之 亦爲難狀之言 何者 於古及今 其中未必者也 / 論學文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대체로 천도란 것은 형상이 없는 것 같으나 자취가 있고, 지리가 넓은 것 같으나 동서남북이라는 방위가 있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한울에는 구성(九星)이 있어 땅의 구주(九州)와 조응(照應)하였고 땅에는 팔방이 있어 팔괘와 조응하였다, 차고 비고 서로 갈아드는 수는 있으나 동하고 정하고 변하고 바뀌는 이치는 없다. 음과 양이 서로 균일(均一)하여 비록 백 천 만물이 그 속에서 화해서 나오지마는 오직 사람이 가장 신령한 존재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삼재(三才/天地人)의 이치를 정하고 오행의 수를 내었으니 오행이란 것은 무엇인가. 한울(天)은 오행의 기준이 되는 틀이 되고, 땅(地)은 오행의 바탕이 되고, 사람(人)은 오행의 기운이 되었다, 천, 지, 인 삼재의 수를 위와 같은 이치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시성쇠와 풍로상설이 그 때를 잃지 아니하고 그 순서(順序/차례)를 바꾸지 아니하는 것은 이슬과 같은 백성들은 그렇게 되는(轉變이나 造化) 까닭을 알지 못하여 어떤 사람은 한울님이 은혜라 이르고 어떤 이는 조화의 자취라 이르나, 그러나 은혜라고 말할지라도 오직 보지 못한 일이요 조화의 자취라 말할지라도 또한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 이치를 바로 살피지 못한 것에 있는 것이다.
元亨利貞 天道之常 惟一執中 人事之察 故 生而知之 夫子之聖質 學而知之 先儒之相傳 雖有困而得之 淺見薄識 皆由於吾師之盛德 不失於先王之古禮 / 修德文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은 천도의 근원적(根源的)이고 항상성(恒常性/춘하추동과 같이 계절이 변화가 없이 항상 반복되어 온 것)인 것이요, 오로지 일념으로 중도(中道/선악에 기울지 않고 허실에 매달리지 않고 당당히 행동하는 것)를 찾아 지키는 것은 인사의 잘 잘못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면서부터 만사(萬事)를 아는 것은 공부자(孔夫子)와 같은 성인의 바탕이 되는 것이요, 태어나 이 세상에서 배워서 아는 것은 옛날 선비들의 서로서로 오랜 세월동안 전해오는 방법이다. 비록 애를 써서 얻은 얕은 견문(見聞)과 깊이가 없는 지식일지라도 모두가 다 우리 스승의 성덕(盛德)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선왕(先王)의 옛날의 예절이나 예법을 잃어버리지 않고 따라 지켜온 것이기 때문이다.
註 00; 원형이정(元亨利貞) -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천도(天道)의 네 가지 덕(德). 원(元)은 봄에 속하여 만물의 시초로 인(仁)이 되고, 형(亨)은 여름에 속하여, 만물이 자라나 예(禮)가 되고, 이(利)는 가을에 속하여, 만물이 이루어져 의(義)가 되고, 정(貞)은 겨울에 속하여, 만물이 거두어져 지(智)가 된다는 이론이다.
주역(周易)의 건괘(乾卦) 건위천(乾爲天) / PP.39-44.의 해설을 보면,
乾 元亨利貞 彖曰 大哉乾元, 萬物資始, 乃統天. 雲行雨施, 品物流形. 大明始終, 六位時成, 時乘六龍 以御天. 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 乃利貞. 首出庶物, 萬國咸寧. 象曰 天行健君子以自彊不息.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건의 법칙은 元, 亨, 利, 貞을 한다. 옛날에 文王이 말하기를 건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건원의 양기여! 만물이 건원의 이치에 따라 생겨나니 마침내 하늘을 다스리는 것이다. 구름이 떠다니며 비를 뿌리고, 온갖 만물이 각각의 형상을 갖춘다. 처음과 끝을 크게 밝히면, 六位가 제때에 이루어져, 때때로 여섯 龍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을 다스린다. 하늘의 道는 변화하여 각각 만물의 性命을 바르게 하고, 大和合을 하니 마침내 이롭고 바르게 되었다. 사람을 만물의 으뜸으로 태어나게 하니 온 세상이 다 편안하다. 고 하니 周公이 문왕의 말에 답하여 하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이치에 맞게 운행되고, 군자는 자신의 수양을 위해 쉼이 없이 노력한다. 고 했다.
初九, 潛龍勿用 象曰 潛龍勿用, 陽在下也.
九二 見龍在田 利見大人 象曰 見龍在田 德性善也
九三 君子終日乾乾 夕惕若厲无咎 象曰 終日乾乾 反復道也
九四 或躍在淵 无咎 象曰 或躍在淵 進无咎也
九五 飛龍在天 利見大人 象曰 飛龍在天 大人造也
上九 亢龍有悔 象曰 亢龍有悔 盈不可久也
用九 見群龍无首 吉 象曰 用九 天德不可爲首也/ PP.43-44.
단(彖)은 문왕이 짓고 상(象)은 주공이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단, 상, 효에 대한 공자의 해석이 있다. 彖은 乾을 원형이정이라고 하였다. 공자는 원형이정을 원형, 이정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원, 형, 이, 정 이렇게 따로 해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元亨은 한없이 發展한다는 뜻이고, 利貞은 곧고 이롭다는 뜻이다. 하늘이라는 것은 우주만물을 한 없이 발전시키고 자라나게 하는데 자라난 우주만물이 멋이 있다는 것이다. 밤하늘의 우주는 질서 정연한 코스모스이고 태양계의 지구는 만물이 약동(躍動)하는 생명이다. 공자는 원형을 태어나게 하고 발전하게 하는 것이고 이정을 열매를 맺게 하여 살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원, 형, 이, 정을 따로 따로 해석해서 공자는 원을 선함의 으뜸으로(文言曰 元者 善之長也) 형을 아름다운 모임으로(亨者 嘉之會也) 가회족이합체(嘉會足以合體), 아름다운 예술의 사회는 족, 근본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은 진리로부터 나온다. 利를 義와 평화로(利者 義之和也) 이물족이화의利物足以和義), 만물을 이롭게 하기위해서는 평화와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 貞은 사지간이라고 하였다.(貞者 事之幹야) 貞이라는 것은 사의 뼈대라는 것으로 사물의 법칙法則과 기준基準이다. 정고족이간사(貞固足而幹事), 올바르고 견고한 것이야 말로 모든 일의 뼈대가 된다는 말이다. 이상은 다 공자의 문언전의 내용이다. / 네이버의 지식백과에서 종합.
원형이정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이해를 위하여, 주역(周易)의 건괘(乾卦) 건위천(乾爲天) 文言傳 解說문에서/ P.39-47. 보면
‘원형이정(元亨利貞)은 하늘이 갖추고 있는 네 가지 덕(德) 또는 만물이 처음 생겨나서 자라고, 삶을 이루고, 완성되는 사물의 근본 원리를 말한다. [주역(周易)]의 건괘(乾卦)에 “건은 원형이정으로 천도의 상도이고, 인의예지는 인성의 기준이 된다./元亨利貞 天道之常 仁義禮智 人性之綱”라고 하였다. 문언전(文言傳)에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원(元)은 착함이 자라는 것이요, 또는 선(善)의 으뜸으로 나타내고,
형(亨)은 아름다움이 모인 것이요, 또는 미(美)의 으뜸으로 나타낸다.
이(利)는 의로움이 조화를 이룬 것이요, 또는 의(義)의 조화(調和)를 의미하고
정(貞)은 사물의 근간이다. 또는 사(事)의 주간(主幹)을 낸다. 라고 했다.
군자(君子)는 인(仁)을 체득(體得)하여 사람을 자라게 할 수 있고, 아름다움을 모아 예(禮)를 합치(合致)시킬 수 있고, 사물을 이롭게 하여 의로움과 조화(調和)를 이루게 할 수 있고 곧음(貞)을 굳건히 하여 사물의 根幹이 되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 元者, 善之長也. 亨者, 嘉之會也, 利者, 義之和也. 貞者, 事之幹也. 君子體仁足以長人, 嘉會足以合禮, 利物足以和義, 貞固足以幹事. 君子行此四德, 故曰, 乾, 元亨利貞./ 주역(周易)의 건괘(乾卦) 건위천(乾爲天) 文言傳 解說文/P.39-47.과 한국 종교문화사전에서 종합 정리 요약
註 00; 六位(liùwèi); - 주역(周易)의 육효(六爻)로, 음양(陰陽), 유강(柔剛), 인의(仁義)를 말하며, 人倫에서의 육위는 군(君)·신(臣)·부(父)·자(子)·부(夫)·부(婦)의 도를 말한다.
歌曰 而千古之萬物兮 各有成各有形 所見以論之則 其然而似然 所自以度之則 其遠而甚遠 是亦杳然之事 難測之言 我思我則 父母在玆 後思後則 子孫存彼 來世而比之則 理無異於我思我 去世而尋之則惑難分於人爲人 噫 如斯之忖度兮 由其然而看之則 其然如其然 探不然而思之則 不然于不然 何者 太古兮 天皇氏 豈爲人 豈爲王 斯人之無根兮 胡不曰 不然也 世間 孰能無父母之人 考其先則 其然其然又其然之故也 / 不然其然에서.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 노래로 불러(한시형태의 시적 표현) 깊은 이치를 생각해보니 먼 옛날부터 태어나고 죽어 사라지는 온갖 사물이여! 물건마다 그 물건이 될 성분과 형체를 가짐으로써 만물이 각각 다른 제 모습을 갖게 되었구나. 이와 같이 나타나 보이는 사물의 모양만을 가지고 의논하고 생각해 보면 그런 것같이 그럴듯하게 이해된다. 그러나 그 옛날부터 어떻게 생겨 지금까지 왔을까, 그 유래를 깊이 생각해보면 모든 사물이 생겨나는 본바탕과 시작이 멀고도 아주 멀어 알 수 없구나. 만유의 시작이 멀고 먼 옛날 아득한 일이 되어서 헤아리기 어렵고 말로써 설명하기 어렵다. 내가, 내가된 것과 내가 태어남을 생각해보면(만물의 생성, 유래와 존재 이유) 나를 낳아주신 부모가 있고 뒤로 나의 뒤를 이을 생명을 생각해보면 나의 후손들이 있다. 다가오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지난날을 거울삼아 생각해보면 그 이치는 내가 태어나 살아온 바를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지나간 세상을 거슬러 찾아 올라가 깊이 생각하면 사람이 어떻게 사람이 되었는지, 그 까닭은 어지러워 헤아려 가늠해 알기 어렵다.
아, 이와 같이 그 이치를 깊이 미루어 헤아려 추측해 봄이여! 그렇게 된 까닭을 나타난 현상만을 얼핏 본 대로 생각하면 그렇게 된 것이 그런 것 같다. 그런가 하고 가늠해보기 어렵고 의심스러운 것으로 깊이 찾아 생각해보면 그렇게 된 까닭이 아닌 것 같다. 어찌하여 기연과 불연일까. 아득하고 먼 옛날이여! 천황씨는(복희 또는 최초의 인간) 어떻게 사람이 되었으며 어떻게 임금이 되었는가. 이 사람의 근원(낳아준 조상)이 없음이여. 그런데 어찌하여 불연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세상에 어느 누구도 부모로부터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없다.(근원이 없는 것, 조상이 없는 것) 선조들을 살펴보며 자세히 고찰해보면 그렇고 또 그렇다고 하는 그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동양사상에서 자연관을 이야기 할 때, 학계에서는 ‘유기론적(有機論的) 자연관’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유기론적(有機論的) 자연관’이란 용어는 자연관을 설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양사상에서 동양인의 역사의식 또는 역사관을 ‘유기론적(有機論的) 자연관’ 이란 용어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제 ‘유기론적(有機論的) 자연관’ 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 위하여, 2003년 1월에 네이버의 道와 文史哲 나눔터에 琴오름이 올린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통해 본 우리의 전통적 자연관(소고)’이란 글을 보면, 이 글에서 유기론적(有機論的) 자연관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천도교 자연관은 창조적 자연관 보다는 유기론적(有機論的) 자연관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나 엄격히 말하면 ‘창조적이고 유기론적(有機論的) 자연관’이라고 하는 것이 설법을 바탕으로 한 천도교의 자연관이라 할 수 있겠지만, 아직은 이런 용어에 대한 교단에서 논의 된 바도 없고, 적합성(適合性)과 논리적 전개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2대경전이라 할 수 있는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천부경에서는 자연(우주)에 대해서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로 답하고 있다. 그 뜻은 "만물(자연 혹은 우주)의 시작은 무(無)이니 시작도 하나이며, 만물의 마침도 무(無)이니 그 마침도 하나이다." 혹은 "만물은 그 자체가 하나이므로 하나에서 시작하지만 하나에서 비롯됨이 없으며 하나에서 마치되 하나에서 마침이 없다."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든지 크게 보아서 만물은 본래 하나(混元一氣)에서 비롯되었으므로 그 자체로 완전한 하나(一氣)일 뿐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통적 자연관에 따르면 자연을 이해하려는 경우에는 무엇을 따로 떼어놓고 구분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무의미할 뿐이며 자연은 언제나 전체로서 그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전통 자연관은 전체론적 자연관이며, 유기론적 자연관이며, 시스템적 자연관이었다. 이러한 전체론적 자연관을 전제로 자연(우주)은 다시 그 내용상 크게 삼요소로 나누어 보았고(석삼극(析三極)) 그 각각에 해당하는 개념을 천(天)·지(地)·인(人)에 비유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자연을 편의상 삼분하여 생각할지라도 언제나 자연은 그 자체로서 하나(一氣), 무(無)가 그 근본임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이들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편의상 그 의미를 분할해본 것이므로 자연의 전체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님을 명심하여야 하며, 이들 삼요소의 변화로 비롯된 자연(우주)의 변화도 무한히 계속됨(천부경에서는 무진본(無盡本)으로 말함)을 명심하여 한다. 그러므로 자연은 획일적인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며, 그렇다고 제멋대로 산만하게 운행되는 체계도 아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서 신비이며 그 속에 담긴 심오한 이치를 바탕으로 질서정연하게 운행되는 법칙 그 자체이다. 이처럼 우리의 전통사상은 3태극사상으로서 자연(우주)을 천(天)·지(地)·인(人)의 삼요소로 나누어 이해하였다. -중략-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전통적 자연관(우주관)은 전체론(全體論)적, 유기론(有機論)적, 상대론(相對論)적 우주관이었다. 자연은 근원적으로 하나여서 이들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보일지라도 그 자체로는 언제나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 그래서 고래(古來)로 우리는 어느 한쪽을 무시한 채 다른 쪽만을 이해하려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 자연을 전체로서 이해하려 하였고 전체와의 조화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많이 사용하면서도 그 의미가 불분명 한 것은, 아마도 자연의 개념일 것이다. 그만큼 자연에 함유된 의미가 폭 넓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짐작을 가능하게 하는데 자연 nature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이라고 번역되는 영어의 'nature'는 라틴어의 'natura'라는 단어에서 온 것이며 이는 또 'natus'라는 단어에서 온 것으로 '만들어지다' 또는 '태어나다'라는 뜻을 가진 'nascore'라는 동사의 과거 분사형에서 온 것이다. 흔히 자연이라고 번역되는 'nature'의 어원에는 그러므로 '만들어진 것' 이라는 의미가 있는 셈이다. 즉 서양의 자연관은 '자연이 지어진 것'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는 생각에는 자연은 스스로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닌, 어느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본래 히브리(유태) 사상에서 나온 것이나. 기독교에 의해 계승되고 기독교 사상이 플라톤 이후의 회랍적인 이원론 철학과 만나면서 서양의 전통 사상으로 그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이다. 즉 피조물로서의 자연은 창조자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는 증거이며 이러만 사상은 자연의 모든 현상에 대한 상징은 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되었으며 점차 이러한 자연관의 확대는 급기야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범신론이란 유일신의 능력과 의지가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에 자연 속에서 신의 존재가 발견된다는 생각으로 자연 어디에서도 신이 존재한다는 사상이다. 자연을 신의 피조물로 보며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구분을 근본가정으로 하고 있는 서양의 자연관은 과학의 발달과 계몽사상의 신장으로 인하여 자연을 이성의 하위개념에 놓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데카르트(R. Descartes 1577-1650)의 합리론 이후에 두드러지게 된다. 즉 세상의 구성원리를 궁극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것은 합리적 이성이며, 이에 반하여 합리적 이성의 탐구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이었다. 그러므로 이성과 자연은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합리주의자에게 자연이 자연일 수 있는 것은 단지 자연이 규칙성에 의하여 정확하게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자연은 이미 그 신비의 베일을 벗고 자신의 구석구석을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이제 자연은 수학과 과학에 의해서 그 작용이 측정되고 검증되는 물체 이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자연은 이미 그 신비의 이러한 자연의 규칙성을 따르는 서양의 자연주의는 그리스 미술의 규범 canon을 만들어 냈으며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자연을 똑같이 재현해내려는 노력으로 이어져 왔다. 즉 선. 공기원근법과 색채 원근법 , 생명체 혹은 무기물의 구조와 표면 색조를 모사할 수 있는 기법탐구. 재료의 탐구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은 자연을 관조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하고 탐구하는 대상으로 바뀌어갔던 것이다.
서양의 자연관은 동양의 자연관과 서로 많은 상이점을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조형예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중략- 서양의 자연관에 비해 동양의 자연관은 자연(自然)이란 한자의미를 생각할 때 '거기에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즉 동양의 자연은 경험과 인식의 대상으로서 구체적인 자연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정신 즉 우주의 본체와 근원적 원리로서의 자연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동양의 자연관은 도교, 불교, 유교의 전통적 사상과 밀접하게 관련 맺어오면서부터 더욱 동양인의 정신세계 이루는 토대로 자리 잡게 된다. 무엇보다 동양의 자연관의 특징은 인식 주체로서의 자아와 인식대상인 타자가 분명히 구분되어 있지 않다. 이는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창조자로서 신에 대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은 그저 거기에 있는 것으로 인식된 것이다. 자연은 인간과 독립되고 분리된 객체가 아니라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여겨져 왔다.
인간이 작은 자연이라면 외계의 자연은 확대된 자연일 뿐이다. 세상에 있는 만물 또한 자연의 일부이므로 인간이 이들보다 우월하거나 또는 상위에 있다는 가정 또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외계에 있는 동물이나 식물과 같은 위계상에 있을 뿐이다. 이는 자연을 살아 있는 생물체로 보는 유기론적 자연관이라 할 수 있다. 살아 있는 생물은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인다. 따라서 유기론적 자연관은 달리 생명적 자연관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기에 동양에서는 살아있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가장 중시하는 것이다. 중국 고대의 자연관에서 하늘은 도덕의 근원이며 인간은 천지의 덕인 존재이므로 자연과 인간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일원적 세계관을 가진다. 이처럼 우주 안에 있는 삼라만상은 서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 나와 천지의 뿌리가 같듯이 서로 평등하다고 보는 관점을 유기론적 자연관이라 할 것이다. 이 같은 처지에서 인간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본다는 생각은 가능하지 않다. 인간은 지상의 다른 자연물과 평화롭고 조화롭게 공존할 뿐이다. 서양에서의 자연이 정복의 대상이었던 데 반하여 동양에서의 자연은 인간의 동반자로 여겨져 왔으며 인간은 자연의 품속에서 살다가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로 여겨 져 왔던 것이다.
노장사상(老莊思想)은 동양의 자연관의 중심에 있다. 선(불교)이나 유가의 자연관도 노장사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지만 노장사상 만금 자연을 강조하지 않는다. 유가사상이 정치사상, 윤리사상, 교육 등 현실적 측면에 있어서 그 주역을 담당했다면 노장사상은 중국에서 철학, 종교적인 면뿐만 아니라 회화, 시문 등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노장사상 중에서도 도(道)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용어는 노장사상의 자연관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노자는 『도덕경(道德經)』제25장에서
‘사람은 땅을 법도로 삼고 따르고, 땅은 하늘을 법도로 삼고 따르고,
하늘은 도를 법도로 삼고 따르지만 도는 자연을 따라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다.‘
註 00; 필자가 알기로는, 일반적인 해석에서는 위와 같은 직역이 아니고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고 해석한다. 『도덕경(道德經)』제25장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윗글에서는 원문이 생략되었으나 필자가 찾아 덧붙임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 而王居其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 老子 莊子 『도덕경(道德經)』제25장 象元. P.84. 혼돈하여 하나가 된 그 무엇이 천지가 생기기 이전부터 존재해 있었다. 그 것은 고요하여 소리도 없고, 아득하여 모양도 없고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어느 것으로도 변하지 않으며 삼라만상에 두루 나타나 잠시도 쉬는 일이 없다. 그 것을 만물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실상 그 이름마저 알 수 없다. 임시로 이름 지어 도라 하고, 억지로 이름 붙여 크다 하자. 이 큰 것은 크기 때문에 흘러 움직이고 흘러 움직이면 끝이 안 보이는 넓이를 갖게 되고 멀고 먼 넓이를 가지면 또 본래의 근원으로 되돌아간다. 이리하여 도는 큰 것이라 불리지만 큰 것으로는,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제왕도 또한 크다. 이 세상에는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제왕이 그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제왕은 인류의 지배자로서 땅의 참모습을 본받고 땅은 하늘의 참모습을 본받으며 하늘은 다시 도의 참모습을 본받는다. 그리고 도의 본 모습은 자연이기 때문에 도는 다만 자연을 본받아 자유자재 한다.
註 00; 윗글은 老子(노자)의 道德經(도덕경) 1장의 전문을 요약한 것으로, 원문이 생략되어 있어 필자가 찾아 덧붙임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儌.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老子 莊子 第1章 體道 P.27.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도라고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영원히 불변하는 도가 아니다. 어 떤 사물이든 이름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이름은 영원불변하는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을 때부터 하늘과 땅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이 있는 것이 만물의 엄마가 된다. 그러한 까닭으로 인하여, 항상 욕심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도의 현묘함을 살펴 볼 수 있다. 만약 늘 욕심이 있다면, 그는 드러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볼 것이다. 이 둘은(욕심이 있고 없음으로 보는 현상들) 같은 근원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이것은 현묘함에서 나타나며. 현묘하고 심원한데서 모든 현묘함의 이치와 변화가 생기는 근원이 된다.
라며, 도란 자연을 본받는 것이라고 했다. 자연은 사람. 땅. 하늘. 도가 따라야 할 어떤 것이다. 여기서 노자는 "이 우주 중에 도가 위대하며, 하늘도 위대하며, 땅도 위대하며, 사람도 역시 위대하다"고 하였다. 자연이란 개념은 무목적, 무의식 적으로 일체 사물을 생성할 수 있는 도의 기능을 형용하는 것이므로 사물이 마땅히 그러한(인위가 개입되지 않은 사물의 존재형태와 운동변화) 일종의 상태를 형용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도의 개념에 많은 해석이 있으나 어째든 자연은 만물의 근원이 이룬다는 것은 사실이다. 또 하나의 노장사상에서 자연에 관한 중요한 개념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사실 이 무위는 자연이 상태를 가장 잘 보존하는 실천적인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무위는 노장사상의 세계관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용어로서 문자 그대로의 뜻 "하지 않음'인데 노자는 이를 일러 "무위(無爲)란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 풀어서 말하자면 무위한 "행위 없는 행위"라는 뜻이 되는데 전자의 행위는 인위 (人爲)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편이 적절하다. 이는 미적으로 말하면“의식을 넘어선 미감”이다. 무위는 곧 자연을 미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위의 세계는 자연을 이해나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어떤 의도나 목적 없이 사물들의 형상을 직관하는데서 비롯된다. 그것은 세상의 인륜이나 공명의식도 뜬구름처럼 여기며 심지어는 자신조차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순수한 마음 상태에서 가능한 것이다. “무위”와“자연”의 한 가운데서 대자연의 큰 아름다움을 관조하게 되는 것이다. /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통해 본 우리의 전통적 자연관(소고)’에서 발췌하여 요약함
천도교의 우주관과 역사관 연구(7-7) 大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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