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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천덕송중 "위령송"은 과연 "위령"의 노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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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동환
댓글 0건 조회 2,115회 작성일 12-08-3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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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덕송중 “위령송”은 진정 "위령"의 노래인가
선도사 海源 최 동 환
포덕153(2012)년 2월 8일
종교에 있어서 의식은 매우 중요하다. 교리를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종교생활을 실감하도록 하고 있어 의식이야말로 종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의식에는 의식의 종류에 따라 경건함과 거룩함, 슬픔과 즐거움, 기쁨 등의 감정이 잘 배어 있다. 그래서 전통이 있는 종교일수록 그 격조가 깊이 있고 은은하여 교인이나 일반인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종교의 역사가 짧다고 하여도 짧으면 짧은대로 미신적 요소나 허례허식이라든가 군더더기가 없는 참신함을 갖추고 있다. 시대와 환경, 가치관의 변천에 따라서 각 종 의식은 변화가 있게 마련이고, 교인들의 질적 수준에 따라 더욱더 성스럽고 경건한 의식이 되는가 하면 천박하고 경박한 의식이 되기도 한다.
천도교는 신흥종교로서 시천주(侍天主)진리와 오심 즉 여심 (吾心 卽 汝心 : 한울님의 마음이 맑고 밝고 깨끗하고 따뜻하고 의로운 수운대신사님의 마음)의 심법(心法), 대인접물(待人接物), 향아설위(向我設位), 성령출세설(性靈出世說), 성경신(誠敬信)의 수행 및 생활자세 등을 기초로하여 만든 의절(儀節)을 갖고 있다. 의절의 시작은 수운대신사님이 정하신 입도식(入道式)과 동경대전 수덕문(修德文)편에서 정한 7가지 행실규범에서부터 비롯되어 포덕 66(1925)년 처음으로 “천도교 의절”을 반포한 이래 포덕141(2000)년 4월 25일 개정공포하여 체계적으로 정립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천도교 의절”에 나오는 의식은 입교식, 시일식, 기념식, 경조사(慶弔事) 등 다양하고 몇 몇 부분을 제외하면 잘 갖춰져 있다. 상례(喪禮)의식도 화장장․수목장 등의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가 새롭게 보완하여야 할 부분이고, 태극기 설치에 대한 준칙 개정, 스승님 영정 게시에 대한 보완 필요성 등이 있어 보인다.
이 글에서는 의절중 장례의 영결식중 “위령송”합창에 대하여만 언급하려고 한다.
필자는 천덕송 제14장의 “위령송”을 들을 때마다 항상 내가 지금 돌아가신 분의 영혼(성령:性靈)을 위령(慰靈)하는 것인가 의문이 들어 간다.
“위령송”의 곡조는 가사내용에 따라 작곡하였음으로 언급을 하지 않는다. 다만 작사 내용에 대해서만 위령의 노래로서 천도교의 진리를 잘 표현하고 있는가 또는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가 생각하여 본다.
천덕송중 “위령송”의 가사는 용담유사 권학가편에서 부분 부분 발췌하 여 작사한 것이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1절. 장평갱졸 많은 사람 한울님을 우러러서 조화중에 생겼으니 은 덕은 고사하고 근본조차 잊을소냐 불망기본 하였어라
(후렴) 효박한 이 세상에 불고천명 하단말가 가련한 세상사람 경천순 천 하였어라
2절. 함지사지 출생들아 보국안민 어찌할꼬 대저 인간초목군생 사생 재천아닐런가 불시풍우 원망해도 임사호천 아닐런가
(풀이)
1절. 옛날 중국의 전국시대때(BC770-476년 : 중국 주나라 위열왕 23 년부터 진나라 시황제 26년 중국이 통일될 때까지의 약 200년 동안) 진나라 장수 백기가 조나라 포로 40만명을 조나라의 땅 장 평에다가 죽여 묻었는데, 그 많은 사람들도 한울님의 조화로 출 생하였다. 그런데 진나라의 살생행위는 한울님의 은덕을 털끗만 큼도 생각하지 못한 행위요, 나아가서 인생으로 태어난 근본마져 도 잊은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허무하게 살지말고 인 생으로 태어난 근본을 알고 살아라.
(후렴)
각박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천명을 돌아보지 않고 사는구나. 불쌍한 세상 사람들아! 한울님을 공경하고 한울님의 뜻(이치)에 맞게 살아라.
2절. 다 죽게 된 어려운 환경에 빠져 있는 사람들아! 나라를 위하여 행 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일(보국안민 ; 輔國安民)은 어떻게 할 것이냐?
무릇 사람과 나무와 풀들, 모든 생명들이 죽고 사는 것이 한울님 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때아닌 때의 비와 바람이 몰아치면 한울님을 원망하면서도, 죽게 된 처지에 이르면 한울님을 찾지 않던가.
위의 “위령송”풀이와 같이 “모든 생명이 죽고 사는 것은 한울님의 명령에 따라 달려 있으니, 죽을 때에야 한울님을 찾는 허무하고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고 평소에 한울님의 은덕을 생각하고, 한울님을 공경하고, 천리(순리)에 맞게 살아라”라고 하는 가르침의 말씀이다. 또한 보국안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아마도 작사를 하신 분은 살아 있는 상주나 조문객들만을 염두에 두었거나, 죽으면 환원(還元) 즉 근본으로 돌아감으로 개체영혼은 없는 것으로 상정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철저하게 살아 있는 사람에게 깨우침을 주거나 보국안민을 염려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결식에서 주인공은 돌아가신 분의 영혼(성령)과 상주와 조문객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돌아가신 분이 한울님께로 돌아가도록 하는 의식은 매우 중요한데도 여기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다. 또한
일반교인이나 일반인의 영결식장에서 보국안민을 걱정하는 것은 일반 서민들의 정서에는 맞지 않을 뿐만아니라, 천도교인에게도 맞지 않는 내용이다. 돌아가신 분의 영혼(성령)이나, 상주․ 조문객이 같이 슬퍼하고 서로 위로를 하는 기풍은 찾아 볼 여지가 없는 가사내용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영결식에서 돌아가신 분의 영혼(성령)을 위로하는 내용이라고는 볼 수는 없어 보인다. 오르지 상주나 조문객에게 심하게 말하면 돌아가신 분처럼 허무하게 살지 말고 한울님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돌아가신 분의 영혼이 한울님에게로 돌아가거나 후손(상주와 조문객)들의 마음에 계신다고 해도 영결식장에서 삶의 자세에 대한 가르침의 말씀을 주로 하는 것보다는 한울님과 돌아가신 분의 영혼과의 관계 설정이 중요하고, 돌아가신 분의 영혼과 상주와 일반 조문객 들과의 관계 설정이 중요하다. 또한 고달프거나 즐거웠던 인생살이에서도 벗어난 영생의 길로 가서 편안하실 것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야 한다. 또한 조문객의 슬픈 심정이거나 덤덤하면서도 희비의 감정을 초월한 심정을 불러 일으키는 노래 가사가 적절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성령출세를 한다고 하드라도 돌아가신 분의 육신과는 영원한 이별이기 때문에 슬픔․회한․아쉬움 또는 원망하는 심정이 들어 감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서요. 사람의 성품 곧 천성(天性)에 부합하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람의 생노병사와 고달프거나 즐거웠던 인생살이, 그 어떤 삶이었든 삶으로서의 짐을 진 것을 벗어나 한울님과 후손들과 더불어 영생극락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긴 가사와 거기에 걸맞는 곡조가 붙여진 위령송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간다. 그래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작사를 하여 보았다.
제목 : 영혼을 위한 기도
(1절)
빛나는 세상 한울님의 조화로 태어난 짧은 인생
아름다운 세상 즐겁게 노닐며 살아 가신 님
험난한 세상 거치른 파도 헤치며 살아 가신 님
다시는 볼 수 없어 슬픔이 가슴에 어립니다.
만물을 낳고 기르고 거두시는 한울님
병이나 사고나 늙음으로 가신 님 인도하여 주소서
(후렴)
가신 님 모든 여한 버리시고 거룩하신 한울님께 가소서
가신 님 거룩하신 한울님과 하나되시어 길이길이 사소서
맑고 밝은 영혼되시어 저희들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저희와 더불어 즐거움 함께 누리소서
맑고 밝은 영혼되시어 이 세상이 좋으실 때 다시 오셔서
즐거운 삶 누리소서
(2절)
화려한 세상 한울님의 조화로 태어난 이슬같은 인생
넓고 넓은 세상 함께 일하고 노래하며 살아 가신 님
좁고 좁은 세상 서로가 부디끼며 외롭게 살아 가신 님
다시는 웃을 수 없어 슬픔이 가슴에 어립니다.
선함도 악함도 선택하지 않는 한울님
일과 놀이에 엮였던 삶 다 풀어 인도하여 주소서
위와 같은 필자의 가사가 정형일 수는 없다. 필자는 가사를 지으면서
심사숙고한 부분은 천도교인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나 “후렴
”중 “맑고 밝은 영혼되시어 이 세상이 좋으실 때 다시 오셔서 즐거운 삶 누리소서”라고 한 부분인데 이것은 의암성사의 “성령출세설”편 에서 언급한 “전대 억조의 정령이 후대 억조의 정령이 된다”는 말씀
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리고 천덕송중 송가편에 “위령의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는 작사와 작곡이 적절한 것으로 생각되어 별도의 언급을 하지 않는다.
필자가 바라는 것은 다만 종무원이나 현기사나 교서편찬위원회에서 “위령송”에 대한 검토를 하여 새로운 위령의 노래를 마련하면 어떨까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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