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으로 사유하기 3, 천도 > 중앙총부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중앙총부

자유게시판 동학으로 사유하기 3, 천도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정경흥
댓글 0건 조회 2,005회 작성일 12-12-02 16:22

본문



[동학으로 사유하기 3, 천도]

‘포덕문’의 3번째 구절을 보도록 합니다.
‘오제 뒤부터 성인이 나시어 일월성신과 천지도수를 글로 적어내서 천도의 떳떳함을 정하여 일동일정과 일성일패를 천명에 부쳤으니, 이는 천명을 공경하고 천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군자가 되고 학은 도덕을 이루었으니, 도는 천도요 덕은 천덕입니다. 그 도를 밝히고 그 덕을 닦음으로써 군자가 되어 지극한 성인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부러워 감탄하지 않으오리까.(自五帝之後 聖人以生 日月星辰 天地度數 成出文券而以定天道之常然 一動一靜一盛一敗 付之於天命 是敬天命以順天理者也 故 人成君子 學成道德 道則天道 德則天德 明其道而受其德 故 乃成君子 至於至聖 其不欽歎哉)
여기서 ‘천도’는 ‘사시성쇠’의 ‘천도’를 의미합니다. 고유학은 이런 천도를 따름으로써 학은 도덕을 이루고 사람은 군자가 되고 성인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부럽지 않겠느냐는 고유학을 긍정하는 글입니다. 순임금에 이르러서는 이 같은 천도가 상제의 천명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보고 ‘상제’에 제사지내고 천도인 ‘사계절’에도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고유학인들은 불천불역하는 이같은 천도를 도덕의 기준으로 삼아서 인도(人道)에 해당하는 것도 천도에 합하는 것으로 보고 이런 인도를 천도로 보기도 합니다. 즉 사계절에 맞춰 농사를 짓는 인도를 천도로 봅니다. 이런 흐름은 조선에도 전해져 사도세자빈 홍씨 회경궁의 자서전인 한중록(閑中錄; 회갑인1795년부터 십년간 쓴 책임)을 보면 “천도가 앎이 없었으면 선친인들 어찌 자손이 남았으며, 낸들 40년 세상에 머물러서 자손의 효양을 받았으리요 그때 국세가 호흡지간에 위태로웠는데...”라고 천도는 앎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친정에 자손이 남아 있게 되고, 아들인 정조의 효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며 ‘천도’는 앎이 있는 신비하고 도리를 다하는 존재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상제의 천명에 의한 천도를 고유학인들이 밝히고 그 천덕을 닦음으로써 군자성인이 되었다고 대신사께서는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신유학이 등장하여 태극을 중심한 논리가 펴지면서 유신론이 침잠하고 무신론이 우세해지면서 각자위심하여 세상이 어지럽게 되었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도덕을 세우려면 유신론을 세워야겠다고 여기던 차에 을묘천서에 기도어천(祈禱於天) 하라는 문구를 보시고 한울님에게 기도하라는 것이 한울님의 뜻이라 깨달으시고 한울님께 기도를 시작하시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경신년(1860년) 4월5일 무극대도인 ‘선생주문’을 받으시고, 무극에 이르러 견천(見天)하시고, 내유강화(內有降話)를 통해 한울님이 몸속에 계심을 겪으십니다. 그리고 몸속 한울님은 지기가 자기를 통해 화생한 기화한울님임을 깨달으십니다. 그건 청소년시절 ‘주자어류’를 통해 ‘일물각구일태극(一物各具一太極:하나의 물은 하나의 태극을 각기 갖췄다)라는 글을 보셨고, 또 아버님으로부터는 “내 몸 빈 것 속에 리· 기· 허령이 있다(在吾腔者裏理氣虛靈 (근암집)”라는 것을 배워서 무극의 ‘지기’가 몸속 무한소 무한의 존재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신사께서는 실재하는 한울님은 ‘몸속 무한소 무한인 지기한울님’이라고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신사께서는 ‘사시성쇠’하는 유학의 천도· 노자의 천도관이 아닌 <지기한울님의 길>을 ‘천도’로 봐야 한다고 여기시게 된 것입니다. 그게 ‘동학론’의 ‘도수천도 학즉동학(道雖天道 學則東學)이란 글입니다. 고 문암(김용문) 선생도 이것이 동학의 천도라고 거듭 말씀하셨고 20여 년 전 신인간에 글로도 밝히신 바 있습니다. 그럼 동학의 천도가 어떤 것인가를 동학으로 사유하라는 ’동학론‘의 글을 통해 알아보도록 합니다.
먼저 ‘동학론(논학문)’에서 천도와 관계된 문구를 뽑아 봅니다.
묻기를 「그러면 무슨 도라고 이름 합니까」대답하시기를 「천도입니다.」 묻기를 「양도와 다른 것이 없습니까」 대답하기를 「양학은 우리 도와 같은 듯하나 다름이 있고 비는 것 같으나 실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운인 즉 하나요 도인 즉 같으나 이치인 즉 아닙니다.」( 曰然則何道以名之 曰天道也 曰與洋道無異者乎 曰洋學如斯而有異 如呪而無實 然而運則一也 道則同也 理則非也)····.
묻기를 「도를 같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럼 서학이라고 이름합니까.」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합니다. 내가 또한 동에서 나서 동에서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이나 학인 즉 동학입니다.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뉘었으니 서를 어찌 동이라 이르며 동을 어찌 서라고 이르겠습니까.」(.曰 同道言之則 名其西學也 曰不然 吾亦生於東 受於東 道雖天道 學則東學 況地分東西 西何謂東 東何謂西 孔子生於魯 風於鄒 鄒魯之風 傳遺於斯世 吾道受於斯布於斯 豈可謂以西名之者乎
‘천도’에 대해 서학과 도인즉 같으나 이치인즉 아닙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道則同也’의 ‘道’는 ‘천도’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天道’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서학이나 동학의 도를 ‘천도’로 보신 것은 天道의 天을 유일신인 한울님(천주)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천도’는 유학의 천지자연의 천도가 아니라 ‘한울님의 도’를 ‘천도’라 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극의 무시무종한 유일신인 ‘천’의 면에서 보면 서학이나 동학이나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리인즉 다르다(理則非也)’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동학은 무극의 지기한울님이 만유로 화생하고 만유 속에 있다는 화생론이요, 서학은 무극의 여호와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했다는 창조론이므로 이치가 다르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창조자는 몸 밖에 있지만 화생자는 사람 몸속에 있어서 다르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똑같은 유일신이므로 같지만 이치는 창조자와 화생자, 몸밖과 몸속처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도즉동야 리즉비야’와 비슷한 문구를 다음 구절인 “도는 비록 천도이나 학인 즉 동학(道雖天道 學則東學)”에서 또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도’와 ‘학’으로 분리해서 또 설명하신 것입니다. ‘도’의 차원에서는 ‘비록 천도’이지만, 즉 유도· 서도· 동도가 모두 ‘천도’란 말을 쓸 수 있지만, ‘학’의 차원에서는 ‘동학’이란 말씀입니다. 즉 ‘학’의 차원에서는 서쪽의 ‘서학· 유학’의 천도가 아니라 동쪽의 ‘동학’의 천도란 것입니다. 이 같은 동학의 천도(한울님의 도)는 ‘지기한울님’이 ‘섭명’하여 만사만물로 화생하는 학이란 것입니다. 반면에 서학의 천도(여호와의 도)는 천주가 ‘말씀’으로써 만사만물을 창조해낸 학이요, 유학의 천도는 ‘천지자연’을 지칭하는 말이란 것입니다. 이처럼 ‘천도’란 말은 같지만 학으로 보면 동학은 ‘섭명’이요, 서학은 ‘말씀’이요, 유학은 ‘천지자연’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포덕문’에 나오는 ‘천도’나 ‘동학론’에 나오는 ‘부천도자(夫天道者)’는 ‘천지자연’의 ‘유학의 천도’요, 나중에 나오는 ‘도수천도(道雖天道)’는 ‘한울님의 도’인 ‘섭명’을 의미하는 동학의 ‘천도’를 지칭한 말입니다. 이처럼 ‘학’은 ‘천도’를 서학식 천도와, 유학식 천도와 동학식 천도로 속속들이 분리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인 동학론의 ‘도수천도’의 ‘천도’는 동학의 천도를 밝혀낸 글입니다. 이 같은 동학의 천도를 밝힌 게 ‘장생주 풀이’의 ‘지기도(知其道)’였습니다. 여기서의 ‘도’는 지기의 ‘섭명· 기화’의 도로써 한울님의 길인 ‘천도’였습니다. 즉 ‘지기가 섭명해서 만물을 이루고 만물 속에 사람을 이루고 사람 속에 계심에 이르는 길인, 지기한울님이 인간에 이르는 길과, 기화해서 조용해지고 맑아지고 밝아지고 신령해지고 거룩해짐에 이르는 길인, 사람이 한울님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이처럼 동학의 천도는 <지기한울님이 섭명을 통해서 인간에 이르는 길이요, 인간이 기화를 통해서 한울님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것을 줄인 말이 ‘한울님의 길(도)’이요, ‘천도’요, 이것이 ‘동학의 천도’입니다.
그래서 ‘도’는 뭉뚱그린 개념이요, ‘학’은 분석해낸 ‘정밀한 개념’입니다. 따라서 동학으로 사유하면, 결코 ‘천도’는 ‘천지자연’의 ‘사시성쇠’의 길도 ‘여호와천주’의 ‘말씀’의 길도 아닙니다. 동학의 ‘천도’는 ‘지기한울님의 길’인 ‘섭명·기화’의 길입니다.

‘동학론’ 말미의 “우리 도는 이제도 듣지 못하고 옛적에도 듣지 못하던 일이요, 이제도 비교할 데가 없고 옛적에도 비교할 데가 없는 법이라.”라는 대신사의 뜻을 다시 짚어봐야 합니다. 우리 도인 천도는 ‘학’인 동학으로써 새로운 천도, ‘이제도 옛적에도 비교할 데가 없는 법’인 ‘천도’인 것입니다. 이 같은 동학의 ‘천도’ 개념이 ‘천도교’의 ‘천도’ 개념으로 자리 잡아야 민족의, 세계의 독특하고 유용한 천도교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포덕문’의 ‘천지자연’의 ‘천도’는 ‘천도교’의 ‘천도’의 개념이 될 수 없습니다.
“몸속에 계신 지기한울님이시여 감응하옵소서”
길로 심고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회원가입

사이트 정보

모시고넷 / 천도교 청주교구
(우) 28604 충북 청주시 흥덕구 신율로 92

  • 게시물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2,886
어제
3,010
최대
6,815
전체
2,033,481
Copyright © mosigo.net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