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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경흥
댓글 0건 조회 1,962회 작성일 12-11-30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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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으로 사유하기]
동학으로 사유하는 것은 ‘장생주’로써 사유하기이며, 장생주로써 사유하려면 ‘장생주’의 주어인 ‘지기’로써 사유해야 하며, ‘지기’로서 사유하려면 ‘지기’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지기의 속성’이 무엇인가 파악을 해야 하며, ‘지기의 속성’으로써 만사를 알아가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기로써 만사를 설명할 수 있으면 우선 ‘장생주’를 ‘지기의 속성’으로써 풀어 봐서 막힘이 없어야 합니다. 막힘없이 풀 수 있으면 다음에는 ‘동경대전·용담유사’를 풀어보고 신사님 성사님 법설도 풀어봐야 합니다. 그래서 천도교 경전이 ‘지기’로써 풀이 되어야 천도교 교리가 일차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동학의 원형인 ‘장생주·지기’로써 만사지 하는 것이 동학으로 사유하기입니다.
그럼 먼저 ‘동경대전’의 첫장인 ‘포덕문’의 중요 용어들을 ‘지기’로써 풀어 보도록 합니다.
‘포덕문’의 구조를 보면 변증법적 구조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긍정·부정 ·긍정’의 구조로 이뤄졌습니다. “저 옛적부터 봄 가을이 갈아들고····성인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부러워 감탄하지 않겠습니까”는 긍정의 글이요 “이 근래에 오면서~ 각자위심하여···의심이 있었더라”는 부정의 글이요, “뜻밖에도 사월에···· 삼가 교훈의 말씀으로 삼길 바랍니다”는 긍정의 글입니다. 긍정한 것은 ‘유신론(有神論)’이요 부정한 것은 ‘무신론(無神論)입니다. 이런 거시적 신관의 입장에서 누구나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쓴 것이 ’포덕문‘입니다.
그럼 포덕문 첫구를 봅니다.. “저 옛적부터 봄과 가을이 갈아들고 사시가 성하고 쇠함이 옮기지도 바뀌지도 아니하니 이 또한 한울님 조화의 자취가 천하에 뚜렷한 것이로다(盖自上古以來 春秋秩代四時盛衰 不遷不易 是亦天主造化之迹 昭然于天下也)” 여기서 중요어구는 ‘천주조화지적(天主造化之迹)’입니다. 종교는 신앙의 대상으로써 만사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천도교는 지기가 화생해 만물을 이룬 것으로 보기 때문에 지기로써 만사를 설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한울님(천주)’만으로는 만사를 설명할 수 없으므로 ‘지기한울님’이어야 합니다. 또한 지기한울님은 몸속에 있으므로 ‘천주’를 ‘몸속 지기한울님’으로 의역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몸속 지기한울님(천주)’의 조화’란 지기의 ‘섭명의 조화’를 지칭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물은 지기의 ‘직접섭명· 간접섭명’에 의해 ‘성쇠’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천주조화지적’은 <몸속지기한울님의 섭명의 자취>라고 풀어야 동학적 풀이가 됩니다. 이처럼 신앙 대상의 개성을 뚜렷이 밝혀야 신화적 신앙의 대상인 ‘상제· 천주· 하느님’과 같은 의미란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천도인 들에게는 ‘한울님’이란 말이 익숙해져서 ‘몸속에 한울님’이란 말이 생경해서 거부감을 느끼겠지만 외부사람들에게는 호기심을 일으키는 신칭입니다. 한 눈에 신의 위치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몸속에 한울님’이란 어떤 한울님일까 관심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포덕의 첫째가 관심입니다. 관심을 끌어야 포덕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에 ‘퇴행성’이란 말이 있습니다. 변기에 오줌을 싸던 아기가 이브자리에 싸는 것과 같은 행위를 이르는 말인데, 이는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입니다. 요새 극한투쟁을 일삼는 대모 꾼이나 환경운동 등도 다 관심을 끌기 위한 퇴행성 행위입니다. 그렇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입니다.
정상적으로 관심을 끄는 방법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동학만의 새로운 특징을 보여줌입니다. 그러려면 동학으로 사유해서 동학의 참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처럼 처음 동학으로 사유하려고 애쓴 분이 야뢰(이돈화)이며, 다음 최동희· 신일철 교수입니다. 이 분들이 연구한 것을 이 시점에서 다시 분석해 봐서 옳은 것은 수용하고 잘못된 부분은 수정해야 합니다. 이 분들이 연구해 온 것을 근거로 해서 정리해 본 것이 ‘동학 장생주’입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하시고,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으면 긍정하면서 수정 보완해 우리의 것으로 해야 합니다. 동학으로 사유하여 동학의 교리를 만들어 가서 모든 천도인 들의 교리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의 교리는 신앙의 대상에 의해 결정됩니다. 신에 의해 만사만물이 이뤄졌다는 것이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대상이 밖에 있느냐 몸속에 있느냐, 창조냐 화생자냐에 의해 교리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말했지만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신은 ‘몸속에 신’으로 결정 났습니다. 그래서 미국 기독교에서 100년 전에 ‘범재신론’을 거론 하게 된 것입니다. 며칠 전 새벽에 TV 미국 영화 ‘포세이돈 어드밴처’를 보았습니다. 범재신론자인 목사와 천주교 신부가 유람선(포세이돈 어드밴처)에 함께 탔습니다. 누가 기도를 인도할 것인가를 의론하다가 범재신론자인 목사가 신부에게 ‘하나님에게 기도한다고 천재지변을 막을 수 있느냐’고 공격합니다. 그러면서 진실한 기도, 살아있는 기도를 해야 한다면서 자기가 맡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승선자들을 향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노력하며 최선을 다하는 용기 있는 자를 돕습니다. 내 속의 하나님이 노력하는 나를 돕는 것입니다. 이처럼 최선을 다하며 내 몸속에 있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 속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고 거듭 강조해 기도합니다. 그 뒤 바다의 지진으로 높은 파도가 일어 거대한 유람선은 침몰합니다. 목사는 자기의 설교처럼 최선을 다해 몸을 던져 사람들을 인도하다가 마침내 몇 사람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고 죽음 속으로 뛰어 드는 영화였습니다. 마치 ‘범재신론’을 주재로 한 영화 같았습니다. 이미 정년 퇴임한지 십여 년이 넘은 퇴물이 되어서도 여전히 교회 나가는 친구들에게 범재신론을 이야기 하고 ‘몸속에 한울님’을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잘들 이해하며 수긍했으며, 한 친구는 자기도 교회에 나가 ‘몸속 하나님에게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불교도 양식있는 사람은 자기 속에서 불성을 찾지 밖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도교회에서 ‘몸속 지기한울님’을 이야기 하면 대부분 반격하거나 돌아서거나 못들은 척하거나 무시합니다. 우리만이 신화적 신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덕문’의 시작은 “저 옛적부터 봄과 가을이 갈아들고 사시가 성하고 쇠함이 옮기지도 바뀌지도 아니하니 이 또한 몸속에 계신 지기한울님의 섭명· 조화의 자취가 천하에 뚜렷한 것입니다”라고 의역해야 합니다.
그런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신사께서 ‘천주조화지적’이라 하셨는데 이를 너무 의역해버리면 예에 벗어난다고 여기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입니다. 그러나 대신사의 참뜻이 뭔지 살펴보면 그런 마음이 가시게 됩니다. ‘포덕문’의 ‘자오제지후’는 최초의 유학경전인 ‘서경’의 첫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순임금은 천문을 따라야 한다고 별을 보고 춘하추동 사계절 정하고 이에 따라 농사를 짓게 합니다. 순임금은 이 같은 ‘사시성쇠’가 상제의 명이라 보고 ‘상제’ 등에 제사를 지냅니다. 그래서 유학은 상제의 천명에 의한 천도로 천지자연으로 보게 되어 ‘상제’ 신앙이 자리 잡게 됩니다. 이처럼 ‘상제’를 신앙함으로써 고유학 시절에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수운께서는 보셨습니다. 그래서 ‘사시성쇠’를 한울님의 조화의 자취로 봐야 한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포덕문’의 첫항은 ‘사시성쇠’를 ‘천주조화지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고유학이 신앙한 ‘상제’를 내세워 ‘상제조화지적’이라 하시지 않고 ‘천주조화지적’이라고 하셨을까요? ‘천주실의’를 지은 마테오리치는 ‘상제’가 곧 ‘천주’라고 하였고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천주실의’의 제1편엔 <천주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면서 만물의 시작이요, 만물의 뿌리인 것이다(天主則 無始無終而 爲萬物始焉 爲萬物根柢焉)>라고 하였습니다. 수운께서는 ‘天主則 無始無終’이란 ‘천주실의’를 보셨기 때문에 유학의 옥황상제와는 다름을 아신 것입니다. 수운께서 ‘상제’란 말 대신 ‘천주’란 말을 쓴 것은 동학의 한울님은 서학의 ‘천주’와 더 가깝다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 ‘포덕문’ 짓기 한참 전에 쓰신 ‘안심가’에는 ‘초학주문’의 ‘爲天主고아정영세불망만사의’의 ‘위천주’를 보고 사람들이 서학으로 오인하고 모함한다는 글이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덕문’에서 ‘상제’ 대신 ‘천주’란 말을 쓰신 것을 보면 동학의 한울님은 서학의 ‘무시무종’한 한울님이라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동학론’에서 ‘도즉동야 리즉비야’라고 리치는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도즉동야’라고 하신 것은 ‘무시무종’한 측면에서는 같지만, ‘리즉비야’라고 ‘리’의 측면에서 보면 서학의 천주는 창조주요 몸 밖에 있고, 동학의 지기한울님은 화생주요 몸속에 있기 때문에 다르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서학의 천주나 동학의 한울님이나 ‘무시무종’한 면에서는 같고, 이를 중시 하신 것이어서 ‘천주’란 말을 쓰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리인즉 다르다’고 하셨으므로 이제는 서학의 ‘천주’와 다른 면을 부각시켜 해석하는 것이 수운 선생님의 뜻에 합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당시 누구나 알아보도록 써야 할 ‘포덕문’에 이같은 심오한 동학의 ‘몸속 지기한울님’을 밝히 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대신사의 뜻을 헤아려 보면 망설임이 죄가 됩니다.
그래서, 지적 수준이 사뭇 높아진 이제는 “···· 이 또한 몸속에 계신 지기한울님의 섭명· 조화의 자취가 천하에 뚜렷한 것입니다”라고 의역해야 합니다. 이처럼 ‘사시성쇠’를 ‘몸속 지기한울님의 섭명의 조화 자취’로 보는 것이 과학에 합하고 합리적이어서 나도 남도 설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기의 ‘섭명· 기화’로써 만사지 하려면 반드시 선택해야 할 길입니다.
길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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